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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플랜 사차원 유럽 여행 - 읽고만 있어도 좋은
정숙영 지음 / 부키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제목이 뭐 이 따위야, 서점에서 책을 본 후 괜히 심술맞게 생기는 첫 느낌이었다
그렇고 그런 유럽 여행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요즘은 유럽 가는 게 철지난 유행처럼 느껴질 정도로 워낙 흔해서인지, 유럽 여행기는 이제 지겹고 식상한 느낌마저 든다
그래서 영국이나 프랑스, 스페인 등등 한 나라만 집중적으로 여행한 책이나, 아예 한국인들이 아직 못 가 본 생소한 여행지에 관한 책이 관심을 끌고 있다
어떻게 보면 다소 철지난 얘기 같기도 하다
한 3-4년 전 쯤에 나왔어야 할 책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점을 주자면 별 셋은 주겠다
어떤 독자 서평에서는 정신 산만하고 쓰잘데기 없는 얘기로 책 한 권을 채웠다는 말도 있지만, 글쓴이의 성실한 집필 태도에는 박수를 보낸다
사실 한 군데도 빼 놓지 않고 주저리 주저리 다 늘어 놓는 바람에 무려 400페이지에 달하는, 그것도 사진 한 장 없이 글씨로만 빽빽하게 채운 만만찮은 분량의 책이 됐다
그렇지만 결코 지루하지는 않다
저자가 어느 정도 필력이 있다고 생각된다
어떤 면에서는 너무 일상적인 말투를 남발해서 글의 깊이가 좀 떨어지는 부분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유머가 넘치고 무엇보다 가식이 없어서 좋다
버스에서 읽으면서 키득키득 웃은 부분이 많다
만약 내가 그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서 유럽을 다녀 오지 않았다면 과연 이 책에 몇 %나 공감할 수 있었을지 궁금하다
유럽에 가 보지 않은 사람이, 혹은 배낭 여행이 아닌 편안한 패키지 투어로 간 사람이 나처럼 구구절절 하게 책 부분 부분 마다 다 공감을 할 수 있을지 매우 의심스럽다
그러고 보면 소유물 보다는 경험에 투자하는 삶이 행복하다는 명언이 맞긴 맞는 말이다
겨우 3주 되는 방학 기간을 3주 다 써서 다녀온 유럽 여행, 동생들 둘까지 대동해 1000만원에 달하는 여행 비용을 아낌없이 투자해 준 부모님께 새삼 감사드리는 바다
유럽 하면 제일 고생스러웠던 기억이 바로 야간 열차다
이 놈의 야간열차, 정말 너무너무 너무너무 싫다
너무 싫다를 한 백 번은 강조하고 싶다
방학 기간에 갔기 때문에 당연히 최성수기였고 발에 치이는 게 대한민국 학생들이었다
더구나 유럽 애들도 방학이라고 집채만한 배낭 메고 기차 안을 돌아다닐 때라 사람에 치여 죽는 줄 알았다
야간열차 예약도 끔찍했고 쿠셋 같은 우아한 슬리핑카는 아예 있지도 않았다
야간 열차 대여섯 번 타면서 단 한 번도 쿠셋에서 잔 적 없다
항상 미어 터지는 좁디 좁은 컴파트먼트에 끼여서 잠이라곤 한숨도 못 잤다
또 같은 일행들끼리 한 컴파트먼트에 들어갔는데 대체 왜 그렇게 떠드는지 시끄러워 미쳐 버리는 줄 알았다
차라리 외국인이면 어차피 못 알아들으니까 더 낫겠는데 한국말로 다 귀에 쏙쏙 들어오니 앞에 앉은 그 커플들 정말 죽여 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우등 고속을 타도 불편해서 한 숨도 못 자는 예민한 성격의 나로써는 야간열차 타고 잔다는 사람들이 인간 같이 안 보였다
다음에 여행 가면 무조건 낮에 움직인다
야간열차, 이런 거 내 사전에 없다
책에는 도둑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난 운이 좋았는지 한 번도 만난 적 없다
맨날 떼로 몰려 다녀서 그랬나?
말 거는 외국인 남자도 없었고 소매치기 하러 접근하는 놈들도 없었다
그래서 집시 애들에 대한 경계가 살갑게 와 닿지가 않는다
이탈리아에 대해서도 별다른 불만은 없었다
이 책 뿐 아니라 하루키 아저씨도 "먼 북소리" 에서 이탈리아의 늑장 행정이나 대충대충 시스템에 대해 성토했지만, 사실 난 오히려 이탈리아에 대한 이미지가 좋은 편이었다
한국에서 호텔을 미리 예약하고 갔기 때문에 아무리 가까운 곳에 숙소가 있어도 죽으나 사나 무조건 숙소 찾아 가야 하는 호텔팩 여행자였던 나는, 가는 도시마다 호텔들이 어찌나 먼지 정말 미쳐 버릴 뻔 했다
그나마 우리 팀은 미국서 살다 온 애가 있어서 좀 나은 편
같은 여행사에서 호텔 예약한 어떤 애들은, 브뤼셀에서 호텔 찾느라 얼마나 헤맸던지, 원래 그 전 날 체크인 했어야 하는 애들을, 다음날 아침 조식 먹으러 가는데 만난 적도 있다
말 그대로 기차에서 내려 하루 종일 호텔 찾아 헤매다가 새벽에 찾았다는 거다
진짜 기도 안 찼다
그 기막힌 여행사의 이름은 내일 여행사다
그 해 배낭 여행자들에게 어찌나 원성이 높았는지, 욕 좀 하려고 게시판 들어갔더니 아예 폐쇄를 시켜 놨더라
어쨌든 기본으로 몇 시간은 헤매 줘야 할 위치에 예약을 하던 여행사가, 신기하게도 로마에서는 테르미나 역 바로 옆, 정말 말 그대로 걸어서 5분 밖에 안 걸릴 곳에, 그것도 꽤 크고 괜찮은 곳에 숙소를 잡아 놨다
역 바로 옆에 있는 호텔은 로마 뿐이었다
그래서 난 로마에 대한 기억이 매우 좋다
그렇지만 베네치아는 여행지 중 최악이었다
이 책에서도 하소연한 바대로, 너무 더워서 정말 구이가 되 버린 느낌이었다
전날 야간열차 타고 잠 설친 후 아침에 베네치아에 내렸으니 정신도 몽롱했고 어찌나 덥고 습기가 많은지 딱 죽고 싶었다
바닷바람이 짠기가 섞인 듯 시원한 게 아니라 끈적끈적 했다
결국 뚜깔레 궁전 들어 가려고 한나절은 줄 서는 관광객들을 뒤로 하고 우리 팀은 궁전 입구 바닥에 드러 누워 잠만 쿨쿨 잤다
그리고 배 들어 오자 마자 역으로 나가서 계속 잤다
바닥에 등이라도 닿아야 촉감 때문에 살 것 같은, 정말 최악의 도시가 바로 베네치아였다
남들은 베네치아가 물의 도시니 어쩌고 하지만 난 정말 완전히 황이었다
다행히 이 책의 저자도 비슷한 불평을 토로해 줘서 기쁘다
한국인 가는 루트가 다 거기서 거기인지, 이 책에 나오는 곳은 다 가 봤다
그래서 더욱 공감하기 쉬웠다
이 책의 저자도 삽질 많이 했지만, 나도 만만치 않았다
빠리 드골 공항에 내린 우리는, 유럽 땅에 발을 디뎠다는 감격도 뒤로 한 채 한 나절 내내 숙소 찾느라 온 힘을 탕진했다
아침 7시에 파리 시내로 들어 왔는데, 세상에서 오후 2시가 넘어서 숙소에 도착했으니 정말 미칠 일 아닌가?
차라리 숙소는 나중에 가고 구경부터 했으면 더 나았으련만 동생들에다가 동생 친구들까지 책임진 나로써는 일단 숙소부터 찾아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숙소 찾느라 빠리의 한 나절을 허무하게 길에서 보냈다
그 뿐이 아니다
다음 날은 기차 예약 하느라 북역에서 아예 하루 종일 보냈다
대체 이 놈의 나라는 무슨 예약 시스템이 이렇게도 철저하단 말인가?
여행사에서 어떻게 루트를 짰는지 죄다 만원이고 자리는 하나도 없고 취소표 나올지 모른다고 기다려 보라고 하길래 정말 하루 종일 기다렸는데 결국은 야간열차 포기하고 밝은 대낮에 일반열차 타고 니스에 갔다
우리 팀만 그런 게 아니라 그 여행사로 호텔팩 온 모든 팀들이 다 같이 일반 열차 타고 와서 밤중에 니스 도착한 후 다음날 체크인 하기로 되어 있는 호텔 앞에서 노숙했다
그나마 공터가 좀 넓다 싶었더니 주차장이라고, 새벽 6시 되니까 차 빼야 한다고 나가라고 쫓는 바람에 말 그대로 길가에 앉아 식당 문 열기 기다리던 처참한 생각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책 읽으면서 정말 새록새록 옛 추억이 떠오른다
주로 안 좋은 쪽으로
그래도 우리 팀은 미국에서 살다 온 애가 있어서 하루만 북역에서 고생하고 베르사유 갔는데, 어떤 팀은 아예 빠리에서 3일 내내 역에서 실갱이 하느라 루브르 밖에 못 봤다고 한다
보통 런던 인 빠리 아웃인데 우린 특이하게 여행사에서 빠리 인 런던 아웃으로 잡는 바람에 첫 도착지인 프랑스에서 말이 안 통해 특히 많이 헤맸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리는 정말 너무너무 아름다운 도시다
가는 곳 마다 너무 좋았다
특히 상젤리에 거리를 지나 개선문까지 향하는 길이 무척 아름다웠다
지리 교과서에 방사형 도시라고 늘 나오는 그 개선문에 도착하니, 정말 차들이 개선문을 중심으로 퍼져 가는 게 아닌가?
비가 약간 뿌렸지만 평생 언제 개선문 가겠냐고 비 철철 맞고 기어이 가서 그랬는지 더욱 기억에 생생하다
나폴레옹 시신이 안치됐다는 성당과 군사 박물관의 정원도 너무 좋았다
그 벤취에 앉아 한가하게 낮잠도 잤는데...
루브르는 또 얼마나 거대하고 아름다운지!!
평생 여기서 그림 보면서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콩코드 광장도 좋았고 거리의 까페도 너무 예뻤다
프랑스어만 잘 하면 여기서 직장 구해서 살고 싶다는 생각마저 했으니...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저자도 빠리가 제일 좋았다고 하는 걸 보면, 확실히 빠리는 매력적인 도시다
스위스의 아름다운 녹색 자연도 정말 좋았다
가 보지 않은 사람은 그 느낌을 모를 것이다
호수의 물도 정말 저자의 표현대로 파란 피죤 색 같다
집은 또 얼마나 아기자기 하게 예쁜지, 창가 쪽에는 꼭 화분이 나와 있어 경관이 너무 예쁘다
그렇지만 물가는 끔찍하다
베른에서 하룻밤 자고 퐁듀도 먹고 중국집도 갔는데 하여간 스위스가 젤 비쌌다
트램은 참 신기했다
전차를 본 적이 없어서 그랬나?
한국 같은 교통지옥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느릿느릿한 참 귀여운 교통수단이 아닐 수 없더라
서유럽은 바로크 시대의 전통적인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어 본 곳 마다 새롭고 이색적이었는데 체코의 프라하는 마치 서울에 온 듯한 현대적이긴 하지만 메마른 느낌의 도시였다
대신 호텔은 여기가 젤 넓었다
흥, 그러고 보니 런던 호텔 말 안 할 수가 없다
화장실이 어찌나 좁은지 세면대가 밖으로 나와 있었다
내 참 기가 막혀서...
당근 샤워 못 하는 구조였다
하여간 그 내일 여행사, 잊을 수가 없다
여행 일정이 3주였기 때문에 스페인은 못 갔다
한 달 코스면 들르는데 3주 코스에 스페인 들르는 일정은 없다
파리에서 기차 타면 열 몇 시간을 가야 하는, 피레네 산맥 너머 멀긴 먼 곳인가 보다
그래서 다음 여행 때는 꼭 스페인에 가 보고 싶다
바르셀로나 가서 가우디 건축물도 보고 피카소 미술관도 가고, 알 함브라 궁전도 보고,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서 고야 그림도 봐 야지
플라멩고도 보고 요즘은 투우 금지 됐다고 하니까 이건 못 보겠지
(사실 나도 옛날부터 이거 동물 학대 아닌가? 이런 생각 들었는데 다행히 금지되는 추세라고 함 굶긴 후에 창으로 찔러 죽이는 거, 21세기 동물에게는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저자가 해 본 건 나도 거의 다 했는데, 아쉬운 점도 몇 가지 있다
먼저 오스트리아 가서 자연사 미술관 못 본 거
이게 유럽에서도 손 꼽히는 크기라고 한다
대체 왜 못 봤을까?
쉔부른 궁전만 가고 여길 못 갔다
같이 간 어린 동생놈의 시키들이, 여행 중반에 이르르니 죽어도 한식을 먹어야 한다고 우기는 바람에 한인 음식점 찾아 헤매느라 못 갔다
그 날 비도 왔었고
다음은 뮌쉔 가서 알테 피나코텍 못 간 거
내가 사랑해 마지 않는 알브라이트 뒤러의 그림도 있다는데, 대체 왜 뮌쉔 가서는 호프브로이에서 술만 처 마시고 다음날 호텔에서 뻗어 잠만 잤는지...
사실 매우 피곤하긴 했다
전날 야간열차로 이동해서 잠을 한 숨도 못 잤고 여행의 피로가 쌓이는 중이었다
그래서 호텔에서 하루 종일 먹고 자고만 반복했다
그래도 편의점 찾아서 먹을 거 사 오고 자고 일어나면 다른 편의점 가서 군것질 거리 사 오고, 이게 너무 재밌었다
그만큼 피곤했던 모양
런던에서는 런던 아이 못 탄 게 아쉽다
내셔널 갤러리가 너무 좋아서 또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에 반해서 대영박물관이나 자연사 박물관 등 할 게 너무너무 많았지만, 그래도 그 회전열차 한 번 타 봤어야 하는데
5파운드나 한다고 비싸다지만, 30분이나 런던의 야경을 볼 수 있다면 해 볼만 하다고 생각한다
난 오히려 유람선 타는 게 아깝더라
물론 유레일 패스에 있는 공짜 티켓이라 빠리에서나 스위스에서 안 빼 먹고 다 탔지만 솔직히 잠 오더라고
노부부나 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을 읽으면서 옛 생각이 마구마구 떠 올라 행복했다
직장인이 된 후 이제는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는 곳이 바로 유럽이다
EU 통합 후 환전할 필요도 없고 국경 통과시 여권 검사도 필요없게 됐으니 더욱 여행하기 좋아졌으련만, 더구나 이지젯 같은 저가 항공기 때문에 시간도 단축될텐데, 이제는 그렇게 멀리 떠날 시간이 없다
돈이 있으니까 시간이 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다시 유럽을 간다면 물론 학교 다닐 때처럼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배낭 여행은 안 할 거다
여행은 고생이라는 말도 난 안 믿는다
늙었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이제는 쾌적하고 편하게 다녀 오고 싶다
말 그대로 재충전을 하고 싶지, 꼬질꼬질 하게 죽도록 고생하는 거 사양한다
이번에 여행을 간다면 당연히 미술관 투어를 하고 싶다
영국에서는 당연히 내셔널 갤러리, 빠리는 루브르와 오르쉐 (북역에서 예약 때문에 삽질하느라 못 갔다 통탄하는 바다) 뮌쉔에서는 알테 피나코텍, 피렌체는 우피지, 마드리드는 프라도, 빈은 자연사 미술관, 아 갈 곳이 너무 많다
숨 찬다
박종호씨의 유럽축제순례기를 읽으면서 휴가철 마다 차를 몰고 유럽의 축제 현장을 돌아 다니는 그 분의 여행법이 너무 부러웠다
아직 내 귀는 클래식은 좀 약하니까 눈으로 즐기는 미술관 투어를 꼭 하고 싶다
저자는 아예 가이드 내지는 여행 기자로 나섰다
난 직업으로 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1년에 한 번 정도는 내가 속하지 않는 새로운 문화가 있는 곳으로 떠나고 싶다
사실 여행은 굉장한 투자고 결심이다
누가 그러더라
유럽 가는 데 든 300만원 있으면 차라리 명품을 사겠다고
여행은 갔다 오면 끝이지만 명품은 끝까지 남는다나?
가치를 어디다 두느냐의 차이지만, 사람들이 끊임없이 많은 돈을 들여 가며 또 고생을 각오하면서 어디론가 떠나는 것은, 몇 배의 가치를 하는 여행의 즐거움이 따로 있기 때문이리라
이번에 가면 사진도 많이 찍고 (디카 있으니 걱정 없다 무려 2기가까지 나오지 않았겠는가?) 꼼꼼하게 기록도 열심히 할 거다
나만의 여행기를 만들어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