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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숲 [dts]
송일곤 감독, 감우성 외 출연 / 유니버설픽쳐스 / 2004년 11월
평점 :
품절
(스포일러가 될 수 있음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감우성을 좋아해서 본 영화인데 알포인트 보다 덜 재밌었다 처음 시작은 좋았지만 결말이 2% 부족하다 마무리가 제대로 안 되고 그대로 벌려 놓은 채 끝난 기분이다 솔직히 마지막 결말이 실망스럽다 알포인트도 소재나 전개 등은 참 좋았지만 뒤로 갈수록 미스테리가 허망하게 풀리는, 즉 결말 구조가 힘을 잃는 것 같아 씁쓸했는데 이 영화 역시 그렇다 앞 부분에서 보여 준 훌륭한 서사 구조가 뒤로 갈수록 결론을 내지 못해 어물쩡 넘어 가 버리는 것 같다 미스테리라 할지라도 사건의 인과 관계를 확실히 보여 주고,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정확한 구조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어쩔 수 없이 불만이 생기는 영화다
감우성이라는 배우는 참 좋았다 거미숲도 그렇고 알포인트에서도 참 연기를 잘 했는데 왜 그 해 남우 주연상 후보에도 못 올랐는지 모르겠다 눈에 띄는 인상적인 연기는 아니지만 작품에서 요구하는 캐릭터를 정말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TV에서보다 오히려 영화에서 더 빛을 발하는 것 같다 "현정아 사랑해" 같은 드라마에서는 그저 그런 평범한 탤런트 중 하나 같지만, 영화 판으로 오면 감우성 아니면 연기하기 힘든, 예민하고 시니컬한 지식인의 표상을 잘 그려낸다 데뷔작 "결혼은 미친 짓이다" 에서도 그만의 매력을 잘 표현해 냈지만, 특히 "알포인트" 에서 감우성 연기는 최고였다 감우성이 아니었다면 그 중위 역은 누구도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감우성 역시 자신의 캐릭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영화와 관계없는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저런 남자는 어떤 여자와 살지 무척 궁금하다 서울대 동양화과를 졸업한 걸 보면 머리도 좋고 그림도 잘 그릴텐데, 현실에서는 더 멋있을 것 같다)
요즘 미스테리 영화의 주제는 정신분열증인 것 같다 "아이덴티티" 에서도 한 정신병자의 머릿속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다뤘고 "나비효과" 도 주인공의 기억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거미숲" 에서도 강민이라는 남자가 정신분열을 일으켜 살인을 저지르고도 자신이 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범인을 찾는 내용이다 내심 누가 범인일까 무척 궁금했는데 주인공 자신이 살해했다는 걸 알고 섬뜩하기도 하면서, 다소 식상한 느낌도 들었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흔하게 본 설정이기 때문이다 또 무대 장치나 효과 면에서 긴장김이 떨어지는, 좀 엉성한 구조라서 섬짓한 분위기가 덜 살아난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그렇게 범인을 찾아 해맸는데, 정작 범인은 본인 자신이었다는 결말은 충격적이었다 우리 안에 숨겨진 악한 본성, 파괴적이고 잔인한 일면을 보는 것 같아 무서웠다 즉 나의 무의식이 두 사람을 낫으로 살해해 놓고, 정신이 돌아온 후 자신의 끔찍한 행동을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자 아예 기억에서 지워 버리고 다른 사람이 한 걸로 인식한 것이다 살해 현장을 목격한 후 누군가에게 머리를 심하게 얻어 맞고 교통사고를 당한 것은, 실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기억을 지워 버리기 위한 자해 행동이었을 것이다
강민이 애인 황수영과 자신을 괴롭히던 직장 상사 최국장이 섹스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분노해 낫으로 살해하는 장면은 솔직히 개연성이 떨어진다 살해까지 할 정도로 분노했다면 그 전에 애인과 죽고 못 살 정도로 열렬한 관계로 설정을 하고, 최국장에게도 살의를 품을 정도로 크게 깨지고 당하는 장면이 나와야 하는데 영화 내용으로만 보자면 강민은 이 둘에게 대한 애증의 감정이 그다지 크지 않다 어쩌면 강민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세상일에 냉소적이고 남에 대한 기대나 실망이 그리 크지 않는지도 모른다 아내가 비행기 사고로 죽고 난 후 황수영과 1년간 관계를 갖지만 내가 보기엔 그저 섹스 파트너로 밖에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황수영에게 청혼한 것도 좀 의외였다 그 청혼도 널 너무 사랑하니까 결혼하자가 아니고, 해도 좋고, 싫음 말고, 이런 식의 가벼운 제안이었다 최국장에 대한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을 무능한 PD로 모는 최국장에게 (이건 딱 한 컷 나왔다) 한 마디 분노도 표출하지 않은 채 방송국 적성에 안 맞으니까 나와야겠다, 이 정도로 끝난다 최국장이 강민에게 화를 내는 건 직장 상사의 일상적인 질책이었고 강민 역시 그를 죽여야겠다는 살의를 느낄 정도로 분노했던 건 아니다 (이 정도로 사람 죽인다면 아마 난 벌써 여럿 죽였어야 할 거다)
황수영과 최국장이 불륜의 관계였다는 건 어느 정도 암시를 준다 일단 이 황수영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가볍고 헤픈 여자로 등장한다 리포터로 처음 방송국에 입사한 날부터 회식 자리에서 강민을 유혹해 잠자리까지 간다 강민의 청혼에 답을 미루는 것도 정리해야 할 관계가 있다는 걸 암시한다 그렇지만 황수영이 최국장과 섹스를 벌이는 건 내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 갔다 방송 출연을 위해 몸을 바친다는 얘긴데, 황수영이라는 여자가 출세하겠다는 야망이 넘치는 것 같지도 않고, 무엇보다 이 최국장이라는 남자는 섹스를 사랑이 아닌 일종의 배설 행위로 생각하는 것 같다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호감을 갖고 감정의 교류가 있는 따뜻한 행동이면 좋으련만, 최국장은 미친듯이 먹어 대면서 세상은 전쟁이라는 말 같지도 않은 구호를 늘어 놓으면서 황수영의 몸에 피스톤 운동을 계속한다 창녀도 아니고 직장 여직원을 유혹해 섹스를 하면서 저렇게까지 동물적인 본능을 표출해야 하는지 역겨웠다 그 밑에 깔려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괴로워 하는 (내가 보기엔 최국장이 아무래도 새디스트적 기질이 있는 것 같다 그는 여자를 괴롭힘으로써 쾌감을 느끼는 듯 하다) 황수영이라는 여자가 불쌍했다 결국 그 섹스 현장을 들켜 결혼까지 생각했던 남자에게 낫으로 살해당했으니, 끔찍한 죽음이 아닐 수 없다 이치적으로 따지자면 이 황수영의 원혼이 강민을 괴롭히는 게 맞지 않을까? 바람 좀 피웠다고서니 낫으로 살해당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끔찍하고 잔인하다
제일 아귀가 안 맞았던 부분은 민수인의 등장이다 이 여자는 결국 귀신인 셈인데, 강민은 현실 세계에 살아 있으니, 귀신과 조우한 게 된다 나중에 민수인이 어린 시절 결핵으로 죽었다는 걸 알고 강민 역시 이미 죽은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마치 "식스 센스" 에서 처럼 말이다 그런데 강민은 여전히 안 죽고 살아 있다 느닷없이 산 사람에게 귀신이 나타나 자기가 저지른 살인의 전모를 보여 준다는 게 좀 어색하다 어린 시절 민수인이 죽어서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은 한 편의 코메디였다 컴퓨터 그래픽 같은 걸로 처리하면 안 됐을까? 피아노줄 이용해 위로 올리는데 이건 홍콩 영화도 아니고 (요즘 홍콩 영화도 이렇게까지 티 나게 어색하게는 안 찍던데) 웃음 나와서 혼났다
강민의 기억에 의하면 자신과 민수인은 어린 시절 시골 학교에서 만났다 민수인의 아버지는 어쩌다 한 번씩 집에 들리고 그녀의 어머니는 동네 남자들과 욕정을 나누기 때문에 마을에서 따돌림을 받는다 강민이 민수인의 집에 놀러간 날 역시 어머니는 왠 남자를 끌어 들여 섹스를 벌이는데 갑자기 끔찍한 소리가 나고 둘은 집을 뛰쳐 나온다 어머니를 죽인 남자가 이 둘을 쫓는데 강민이 돌에 넘어져 정신을 잃는 순간 민수인은 그 놈에게 살해당한다 그런데 나중에 어른이 되서 강민이 학교 선생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민수인은 어렸을 때 폐렴 걸려 죽었고, 강민의 어머니가 바람이 나서 아버지 혼자 강민을 키운 걸로 나온다 그래서 나는 혹시 강민이 바람 피우는 어머니를 죽이고 그것을 목격한 민수인까지 함께 죽인 후 그 사실을 의식 속에서 받아들이지 못해 기억상실증에 걸려 잊어 버린 게 아닌가 추론했는데, 거기에 대한 답은 안 나온다 사실 이것도 불만이다 누가 어머니를 죽였는지, 또 민수인은 어떻게 죽게 됐는지 밝혀져야 할 것 아닌가?
그렇게 따지자면 제일 못마땅한 것은 강민에게 황수영이 바람피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 전화다 강민은 미스테리 극장을 기획하는 PD인데 그 앞으로 제보 전화가 오고 그 때문에 민수인이 사는 시골까지 내려오게 된다 그 때 강민에게는 황수영과 최국장이 바람 피우는 장소를 알려 주는 전화가 온다 남자 목소리니까 이걸 민수인이 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고, 대체 이 남자의 정체는 뭐냔 말이다 그 남자는 강민을 잘 알고 있고 그 역시 자신을 안다고 했다 강민을 문제의 거미숲으로 끌어 들이는 역할을 했으니, 전체적으로 보면 민수인이 한 짓이어야 아귀가 맞는데, 목소리는 남자고... 너무 복잡하다 혹시 두 사람을 살해해 놓고도 다른 놈이 했다고 믿는 것처럼, 황수영과 최국장의 관계를 의심해 스스로 둘의 비밀 장소인 거미숲으로 향하면서도 다른 누군가가 시켜서 그런 걸로 착각하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이 강민이란 놈은 완전히 미친 놈이라는 얘긴데...
마직막에 민수인은 강민이 저지른 일을 용서받을 수 있다고 했다 숲을 지나 동굴 끝의 문을 열면 모든 비밀이 풀린다고 해서 난 강민의 어린 시절 엄마 죽은 얘기가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얘기는 없고 강민이 교통사고 당하던 첫 장면이 나온다 즉 강민은 자신이 두 사람을 죽이고 정신없이 터널을 방황하다가 교통사고가 났는데, 자신이 차에 치이는 며칠 전의 장면을 현재의 강민이 목격하는 것이다 대체 이게 무슨 얘긴지 모르겠다 어쨌든 마지막 장면은 강민이 다시 병원으로 돌아온 후 멍하게 앉아 있는 것으로 끝났으니 그는 다시 기억 상실증에 걸려 지난 일을 다 잊어 버렸을지 모른다 그가 어린 시절 엄마와 민수인이 죽은 사실을 잊어버리고 대신 원인 모를 두통에 시달린 것처럼 말이다
민수인과 강민의 아내는 동일 인물이다 1인 2역을 했는데 무척 예쁘고 분위기 있다 연기는 다소 어색하지만 꽤 우아하게 나온다 앞으로 좋은 역 맡으면 뜨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 보니까 강민의 아내가 비행기 사고로 죽는 걸 스스로 알고 있다는 점도 좀 이상하다 뭔가 개연성이 있어야 하는데, 그냥 자기 죽음을 미리 알고 ㅣ있을 뿐이다 이 아내가 바로 민수인의 환생이라는 분위기인데, 이것도 좀 억지스럽고...
전체적으로 봤을 때 괜찮은 영화지만 결말이 마음에 안 든다 감우성이나 다른 배우들의 연기도 좋고 지루하지 않게 긴장감을 유지하지만 훌륭한 영화가 되기엔 2% 부족하다 그래도 이보다 못한 영화들도 관객 엄청 끄는데 이건 왜 실패했는지 모르겠다 "알 포인트" 도 마찬가지다 괜찮은 영화인데 왜 못 떴을까? 어쩌면 기획력의 실패인지도 모른다 홍보 많이 했으면 훨씬 좋았을텐데 아쉽다
감우성의 영화 행보가 더욱 주목된다 인기보다는 자신에게 맞는 역, 좋은 영화 많이 출연해서 배우로서의 경력을 잘 쌓았으면 좋겠다 송강호가 설경구 등의 연기파 배우와는 또다른 매력을 보여 주는 감우성의 영화판 등장이 신선해서 좋다 또 그는 연기도 잘 하지만 어찌나 멋있는지... 장동건이나 원빈 등의 꽃미남 스타들과는 다른 지적인 매력이 풍겨서 너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