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덴티티 - 할인행사
제임스 맨골드 감독, 존 쿠삭 출연 / 소니픽쳐스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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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재밌는 영화다 흥미진진 하고 긴장감 장난 아니다 영화 보면서 너무 긴장해 손에 땀을 쥘 정도였다 혼자 불꺼놓고 노트북으로 보는데 정말 오싹했다 시나리오도 좋고 무엇보다 배우들 연기가 정말 좋았다 메이킹 필름 보니까 창녀로 나온 여주인공이 오디션에 뽑힌 신인이던데 정말 잘 하더라 존 쿠색은 처음 보는 배우지만 명성에 걸맞게 정신분열증의 심리 상태를 잘 표현했다 메이킹 필름에서 여주인공이 존 쿠색과 같이 연기하는 게 너무 흥분돼서 잠을 못 잘 정도였다고 말한다 한술 더떠 왜 키스신이 없냐고 감독에게 만들어 달라고 떼를 썼으며 쿠색을 덮치는 장난도 쳤다고 한다 정말 헐리우드 배우들은 솔직하고 대담하다 과연 우리나라 여배우 중에 대놓고 남자 배우랑 키스씬 만들어 달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까?


마지막 반전은 좀 황당한 면도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 꼬마애가 모든 살인을 저질렀다는 게 말이 안 돼지만 모든 것이 정신분열자의 머릿속에서 일어난 살인이라고 생각하면 독특한 구성이라 할 수 있겠다 이제 할리우드 영화는 정신분열 쪽으로 가는 건가?  어찌 보면 "나비효과" 와 비슷한 맥락의 영화다 앞뒤 사건들을 끼워 맞추느라 몇 번을 생각했었다 한참 만에 정리가 될 정도로 복잡하다 시나리오 작가의 구성력이 놀랍다 특히 마지막에 "창녀에게 새 삶은 필요없어" 라는 대사와 함께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이 압권이다 머릿속에서 살인자가 반성하지 않고 남은 한 사람까지 죽이는 순간, 현실에서도 범인은 자신을 사형에서 구원해 준 정신과 의사를 죽이고 만다 결국 정신분열증은 치료받을 수 없다는 말일까?


다중인격자의 살인이 처벌받지 않는 것은 그가 범죄를 저지를 때는 자기 인격이 아니었다는데 근거가 있다 전혀 다른 사람이 살인을 한 것이므로 현재의 범인을 죽이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얘기다 요즘처럼 범죄자 여부를 떠나서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시대이므로 가능한 얘기지, 한 세기 전의 사람이 들었으면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내 안에 전혀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다중 인격자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살인자들과의 인터뷰" 를 읽어 보면 연쇄 살인범들은 정상인과 전혀 다른 사고 구조를 가졌다 그들은 살인을 할 때 두렵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쾌락을 느낀다 몰래 포르노 비디오를 빌려 볼 때의 짜릿함 같은 걸 사람을 죽임으로써 느끼는 것이다 어떤 미친 놈은 죽인 여자들의 목을 따서 자기 침대 밑에 넣어 둔 후 자극을 느끼고 싶을 때마다 꺼내 봤다고 한다 또 어떤 놈은 살인 충동을 억제하기 위해 충동이 생길 때마다 목욕을 했는데 어떤 날은 목욕 까운을 입은 채 뛰쳐 나가 살인을 저지르기도 했다고 한다 한 마디로 평범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뇌 구조를 가진 것이다


모텔에서 한 명 한 명 죽을 때마다 대체 누가 범인일까 무척 궁금했다 투숙객 중에 범인이 있지 않나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제 3의 인물이 있을 것 같았다 그 모텔이 인디언들의 무덤이었다는 전설을 이용해 누군가가 죽은 자의 원혼을 가장해 살인을 저지르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김전일 만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스토리다 경찰에게 호송되어 온 살인범이 범인이 아닌 줄은 알고 있었다 그가 범인이면 사건이 너무 금방 해결되기 때문이다 역시 그 놈은 처음에 살해된다 그런데 실은 그 경찰이 같은 살인범이었다는 설정이 기막힐 정도로 놀라웠다 경찰이랍시고 살인범을 호송하던 그 놈이 실은 경찰을 죽인 후 같이 연행되던 살인범을 호송하는 것처럼 꾸민 것이다 논리적으로 안 맞는 부분도 있지만 어쨌든 발상 자체는 기가 막힌다


맨 처음에 죽은 여배우 목이 드럼 세탁기 안에서 돌고 있을 때 정말 섬뜩했다 냉동고에서 얼어 있는 시신 발견할 때도 오싹했다 살인자들은 어떻게 저 공포감을 이기고 사람 죽이는 걸 즐길 수 있을까? 결국 죄책감이나 두려움도 다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낸 창조물이 아닌가 싶다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말이 이럴 때 해당되는 걸까? 세상을 보는 관점의 차이, 혹은 사물을 인지하는 인식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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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4-12-04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인사이드>라는 비디오도 한번 찾아 보세요. 같은 작가의 시나리오로 만들어진 영화랍니다. 아주 재미있구요.(나만???) 최근에 나온 비디오니까 가게마다 다 있을거예요.

2004-12-04 1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marine 2004-12-04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죄송합니다 책 읽거나 영화 보고 나서 감상문 쓸 때는 먼저 제 비공개 블로그에 쓴 후 공개해도 괜찮은 것만 다시 복사해서 올리기 때문에 일기 형식으로 씁니다 그래서 간혹 지나치게 개인적인 얘기들이 등장하기도 하죠^^ 특히 영화는 어쩔 수 없이 스포일러가 되버리더라구요 다음부터는 그 부분은 지우고 쓸게요^^

2004-12-04 1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꽃피는 봄이 오면 - [할인행사]
류장하 감독, 최민식 외 출연 / 아이비젼엔터테인먼트(쌈지)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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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식 나오는 영화라고 기대를 했건만... 물론 그의 연기는 좋았다 배우에 1류, 2류는 없다, 배우와 연예인이 있을 뿐이라는 오만한 발언도 다 용납이 될만큼 진정한 배우로서의 깊이를 보여 주는 훌륭한 연기자지만 그래도 이 영화는 재미없다 사건의 기승전결도 없고 너무 밋밋하다 직장 못 잡고 방황하는 트럼펫 주자 최민식의 인생 행로를 그저 카메라가 따라 갈 뿐이다 오히려 좋은 연기자들이 시나리오에 치인 느낌이다


최민식 애인으로 나온 여자 분위기가 독특해 누군가 했더니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상받은 김호정이라고 한다 예쁘지는 않는데 연기는 잘 한다 아니, 딱히 잘 한다기 보다는 하여간 분위기가 아주 독특하다 최민식 보러 갔다가 만나지도 않고 바닷가에서 어떤 소년에게 트럼펫 연주 부탁하는 장면이 제일 멋있었다 사랑하는 남자를 현실적인 이유로 떠났으면서도 마음에서는 보내지 못한 여자의 갈등과 안타까움이 잘 녹아났다 그녀에게는 연예인답지 않는 일상성이 있다 동네 약사로 나온 장신영은 말 그대로 연예인이 나와서 영화 찍는 건데, 김호정은 그저 영화 속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일 뿐이다 녹아드는 정도가 다르다고 할까? 그런데 대체 왜 장신영은 신인 여배우상 후보에 올랐을까? 존재감 전혀 없고 무난 그 자체의 연기를 하던데 말이다 일단 영화가 뜨면 상은 못 줘도 후보로라도 올려 주는 건가? 나는 대체 장신영이 왜 나왔는지 모르겠다 하긴 그래도 "우리형" 에 나온 이보영 보다는 낫다 왜 등장하는지 이해가 안 가는, 존재 자체가 미미한 캐릭터들이다


제일 맘에 들었던 장면. 친구가 강원도 삼척에 가 있는 최민식 찾아서 김호정과 차 타고 온다 시골 깡촌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었는지 친구가 안타까운 마음에 한 소리 한다 "걔는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대니?" 그러자 김호정이 정색을 하고 말한다 "여기가 어때서?" 서울 사람들은 지방에 대한 편견이 강하다 서울 살다 지방 내려가면 인생의 실패라고 간주하는 것 같다 드라마를 보면 그런 장면들이 너무 많이 나온다 서울 중심주의의 폐해인가? 갑자기 국토 종합 발전이라는 거창한 구호가 떠오른다


사실 이 친구는 카바례에서 섹스폰 부는 알바를 하는데  최민식이 예술한다는 놈이 이런 데서 돈 버냐고 비난하자 화를 내면서 말한다 "여기 있는 사람들 다 너보다 더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다, 너 이 사람들 비난할 자격없다" 카바레에서 돈 버는 게 자기도 좀 창피해서 괜히 쪽팔리니까 자가당착 식으로 흥분한 면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사람 사는데 높고 낮음이 어디 있겠는가? 열심히 성실하게 살고 남에게 피해 안 주고 양심에 부끄러울 거 없으면 다 떳떳하고 당당한 인생 아닌가? 카바레에서 섹스폰 불어도 자기 음악을 펼칠 장소로 생각하면 하나의 공연이 될 수도 있는 거다 문제는 자기가 어떻게 인식하느냐다


"스쿨 오브 락" 이 훨씬 재밌다 이 영화랑 비슷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용은 전혀 다르다 "스쿨 오브 락" 이 공부 밖에 모르는 학생들에게 락의 정신을 가르쳐 주고 공연을 통해 일체감을 획득하는 데 비해, "꽃피는 봄이 오면" 은 학생과 선생이 따로 논다 이 영화는 그저 최민식의 모습을 시간 순으로 보여줄 뿐, 관현악반 학생들은 들러리에 불과하다 시나리오의 미숙함이라고 생각한다


최민식 엄마로 나오는 윤여정 연기는 정말 좋았다 최민식과 둘이 있으니까 진짜 불꽃 튄다 장가 안 간 나이든 아들에게 잔소리 하는 엄마와, 그거 듣기 싫어서 집 나가고 싶지만 딱히 갈 데도 없는 아들의 아웅다웅한 일상을 어쩌면 그렇게 자연스레 풀어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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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4-12-06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영화 너무 좋게 봤는데요, 좋은 장면이 참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윤여정이 최민식에게, '니가 왜 끝이야, 이제 시작이지' 하고 퉁치는 장면과 마지막 장면. 최민식이 벚꽃 날리는 여자친구 아파트 앞에서 여자친구한테 전화하면서 해죽해죽 웃으며 농담따먹기 하며 너무나 편안한 모습으로 벤치에 기대던 모습이요.

marine 2004-12-07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맞아요 저도 마지막 장면 좋았어요 혹시 "스쿨 오브 락" 보셨어요? 이 영화도 재밌어요 한 실패한 락커가 임시 교사로 초등학교에 들어가는데 공부 밖에 모르던 아이들에게 락의 정신을 가르쳐 주고 밴드를 조직해 공연을 하게 되는 내용입니다 전 거기서 락이란 바로 저런 거구나, 자유로움, 억압의 철폐 등등을 느꼈답니다

하이드 2004-12-07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스쿨오브 락도 재밌게 봤어요. 전 '꽃봄 ' 이 더 좋았던 이유가 대충 영화 줄거리 듣고 홀랜드 오퍼스, 스쿨 오브 락, 탄광촌 나온다고 해서 빌리 엘리어트 등등 많은 영화들이 휙휙 머리속에 떠올려 보면서 극장에 들어섰는데, 그 어떤 영화와도 달랐죠. 우리나라 영화 우리나라 배우 우리나라 이야기였어요. 최민식이란 배우 너무 힘들어가서 별로였는데, 이 영화에선 좋더라구요. 윤여정씨, 그리고 친구역 , 여자친구역, 아이들까지도, 2% 부족하다고 하는 분도 있던데, 전 그 모자람마저 좋아보였던 영화였어요.

marine 2004-12-07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역 맡은 분도 연기 잘 하죠? 그 사람이 요즘 김수현 드라마 "부모님전상서" 인가? 거기 나오더라구요 연기파 배우로 뜰 거라 기대합니다 스쿨오브락은 진짜 미국적 영화고 꽃피는 봄이 오면은 정말 한국적 영화 같아요 사실 전 예고편만 보고 스쿨오브락의 한국판인가? 최민식이 왜 저런 영화에 나올까? 의아했는데 전혀 다른 영화더라구요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 [초특가판]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1
피터 웨버 감독, 스칼렛 요한슨 외 출연 / 기타 (DVD)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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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안 본 사람은 과연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배우들의 연기에 숨어 있는 행간을 읽는다는 건 보통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너무 지루하고 생략이 많은 영화다 소설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재현하기는 했는데 주인공의 심리 묘사는 거의 안 됐다고 보면 된다 그나마 나는 소설을 먼저 읽었기 때문에 지금 저건 저 뜻으로 한 얘기야, 이렇게 이해할 수 있었지만 영화만 본 사람에게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영화일 것 같다


감독은 왜 영화를 밋밋하게 만들었을까? 음악도 좀 많이 넣고 주인공 그리트의 심리 상태 표현도 더 많이 했으면 좋았을텐데. 내가 보기에는 소설 자체가 영화화 되기 어려운 내용 같다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쓴 소설이라 사건 보다는 심리 묘사가 훨씬 많기 때문에 영화에서 보여주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다 은희경의 쓴 "새의 선물" 을 단만극으로 만든 걸 본 적이 있는데 어쩜 저렇게까지 재미없게 만들 수 있을까? 신기할 정도였다 소설로 쓸 때는 재밌던 것이 영화로 바뀌면 참 지루해진다 역시 영화는 심리 묘사 보다는 사건 위주로 가는 게 훨씬 재밌다


그리트 역을 맡은 요한슨인가 하는 여배우는 잘 어울리는 것 같으면서도 좀 답답했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에 나올 때부터 별로 마음에 안 들었다 남들은 연기 잘 한다고 하는데, 연기를 떠나서 뭔가 속에 할 말이 많은데 참고 있는 듯한, 속을 알 수 없는 답답함이 있어서 싫다 이 영화에서도 그랬다 속시원하게 좀 털어 놓으면 좋으련만, 관객에게 도대체 자기 마음을 보여 주지 않는다 대체 어떻게 그녀 속을 짐작하겠냐고요!! 오히려 베르메르 역을 맡은 남자 배우가 훨씬 잘 어울렸다 소설에서도 베르메르는 말이 없고 속을 알 수 없는 답답한 사람으로 나온다 하녀로 들어온 그리트를 좋아하는 것 같으면서도 스킨쉽도 없고 따뜻한 말 한 마디 건네는 법이 없으며 그리트가 도둑으로 몰렸을 때조차 도와주지 않을 정도로 그리트에 대한 감정을 절제한다 소설에서 그는 자기 그림에만 몰두하는, 그래서 주위 사람들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 전형적인 예술가로 나온다


베르메르의 딸 코넬리아가 그리트를 질투해 어머니의 보석을 훔쳐 자기 방에 숨겨 놓은 후 그녀를 도둑으로 몬 사건이 발생한다 영화에서는 그리트가 베르메르에게 도와 달라는 눈빛을 보내자 베르메르가 온 방을 뒤져 보석을 찾아내지만 소설에서 베르메르는 외면한다 그게 더 일관성이 있다 베르메르는 그리트의 총명함을 좋아하고 물감 만드는 일을 시킬 정도로 그녀가 자기 예술을 이해한다고 인정하지만, (아내는 그의 화실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한다) 절대 그녀를 보호해 주지 않는다 아내 몰래 물감 만드는 일을 시킬 때도 집안일 때문에 바쁜 그리트에게 니가 알아서 시간을 쪼개라는 식이다


영화에서는 잘 표현되지 않았지만 그리트는 베르메르의 예술 세계를 동경한다 자기가 하는 일은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너무나 일상적이고 하찮은 일인데 반해, 베르메르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이 세상일과는 떨어져 있는 천상의 것으로 느낀다 부잣집 주인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아니라 예술에 대한 동경으로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리트는 남자로서 베르메르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림과 같은 고귀한 일을 하는 예술가로서의 베르메르를 사모했던 것이다 반면 베르메르의 아내는 남편의 예술 세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는 그리트를 질투해 저 애는 그림은 커녕 글자도 읽지 못한다고 비난하지만, 예술에 대한 이해는 단순히 교육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어느 정도는 안목이 길러지겠지만 기본적인 감각이나 안목은 타고나는 건지도 모른다 그리트가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다면, 베르메르 같은 화가와 결혼했다면 그녀는 훨씬 행복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현명하게도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푸줏간집 아들과 결혼해 일상의 행복을 느끼고 살아간다 소설을 읽을 때 혹시 그리트가 베르메르에게 반해 자기와 결혼하고자 하는 피터를 버리고 베르메르에게 매달리면 어쩌나 걱정했다 주인과 하녀의 관계에서 상처받는 건 약자 뿐이다 더구나 베르메르는 자기 예술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남자다 그를 믿고 자신의 인생을 맡긴다는 건 파멸의 지름길이리라 소설에서 그리트는 영리하고 똑똑한 아가씨로 나오는데, 역시 그녀는 선택도 현명하게 잘 한다 베르메르 집을 나와 피터와 결혼한 것이다


영화보다 소설이 한 10배는 낫다 소설은 정말 재밌다 그리트의 심리 상태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녀에게 동화되고 만다 그런데 영화는 감정의 생략이 너무 많아 관객이 제대로 몰입되지 못한다 다만 17세기 네덜란드 일상은 잘 보여준다 베르메르의 다른 그림들도 써비스로 보여 줬음 좋았을텐데 그게 아쉽다 베르메르 그림은 일상의 평화로움과 아름다움을 잘 보여 준다 그 따뜻하고 놀라운 색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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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소비 트렌드
김상일 지음 / 원앤원북스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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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쉽고 재밌다
그리고 유용하다
부자 되는 법이나 자기계발서 보다 훨씬 더 실질적인 정보를 제공해 준다
시사 주간지 등에 실리는 경제 기사를 조금 더 많이 읽는 기분이다

한국인은 참 독특하다
책에서도 지적한 바지만 여전히 유교적 가부장제가 사회의 지배 원리인데 비해 이혼율은 세계 2위이고, 출산률 역시 세계 최저 수준이다
휴대폰이나 MP3, 디카 등 디지털 제품의 교체 주기도 엄청나게 빠르고 인터넷 보급률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전통을 중시하는 것 같으면서도 변화에 아주 민감한 모순적인 상황이 자주 등장한다
우리가 중시하는 전통이란 실은 파시즘의 잔재가 아닌가 싶다
지역주의, 학벌주의, 혈연 중시 풍조, 가부장제, 수직적인 인간 관계, 개인의 개성을 침해하는 집단주의 등등 사회 의식 수준의 발전에 따라 폐기돼야 할 파시즘의 모습들이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한국인은 새로운 것에 열광하고 쉽게 라이프 스타일을 바꾸는 대단히 미래지향적이고 역동적인 민족이지 않을까?
50여년 만에 이룩한 놀라운 근대화 속도만 봐도 알 수 있다
저자는 한국이 이미 글로벌화 시장에 진입했다고 한다
어쩌면 우리는 더이상 전통 중시의 나라가 아닌지도 모른다

내가 제일 이해할 수 없고 한편으로 부끄럽게 생각했던 것이 바로 명품족었다
명품을 사기 위해 한 달을 라면으로 버틴다는 어떤 머리 빈 여자의 기사를 접하면서, 이런 풍조가 사회의 주류로 자리잡으면 대한민국은 망하는 거 아닐까 이런 걱정까지 했었다
배낭 여행 가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명품 싹쓸이 아르바이트나 한국은 명품 기업의 밥이라는 식의 기사를 읽으면 화가 치솟기도 했다
대체 왜 우리가 다른 나라 기업들의 바보같은 전략에 놀아나야 하는가?
나로서는 제품의 품질에 비해 터무니 없이 비싼 가격을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과시적인 소비자는 가장 어리석은 소비자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명품에 열광하는 대한민국 소비자의 숨겨진 특성을 읽을 수 있었다
한국 소비자들은 감성을 중시한다
가격이 비싸도 나를 드러내 줄 수 있는 제품이라면 기꺼이 많은 돈을 지불한다
대신 한 푼이라도 싸게 사기 위해 온 인터넷 싸이트와 매장을 뒤진다
일단 소비를 결정하면 그 때부터는 눈에 불을 켜고 단 1원이라도 깍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왜? 나는 현명한 소비자이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대립되는 이 현상이 바로 한국 소비자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일단 명품이라고 인정받는 제품은 인터넷 등을 통해 약간 싼 가격으로 대량 판매된다
"럭셔리 신드롬" 에도 지적된 바지만 이게 바로 명품 회사의 판매 전략이라고 한다
고급품이라는 이미지를 획득하고 나면 대중들이 돈을 조금만 더 주면 살 수 있을 정도의 가격으로 대량 생산을 한다
명품이란 일부 부유한 소비 계층만이 구입할 수 있는 고가의 제품인데도 너도나도 들고 다니는 (명품 하나 없으면 소외를 받는 어이없는 현상!!) 대중품이 되버린 것이다
저자는 이 현상을 프레스티지라고 설명한다
대중과 고급품의 결합이라는 뜻이다

저가 화장품 미샤의 성공은 상당히 획기적이다
미샤는 보아 등의 억대 모델을 쓰면서 고급 이미지를 유지하면서도 정작 가격은 3300원이라는 파격적인 저가 정책으로 단번에 화장품 업계의 선두로 뛰어올랐다
도소매점을 거치지 않고 직거래를 통해 유통 마진을 최소화 하고, 유리 용기 대신 플라스틱 용기를 사용함으로써 생산 비용도 낮췄다
그럼에도 품질은 일정 수준 이상을 유지하기 때문에 미샤는 단번에 주목을 끌게 됐다
저자는 한국 소비자들이 지극히 이기적이고 합리적이라고 한다
제품 충성도가 낮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싸고 좋은 제품이 나오면 즉시 옮겨간다
그러나 단순히 싼 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품질은 기본이고 소비자의 감성도 만족시켜야 한다
스타벅스라는 고가품의 커피가 성공한 것도 바로 이 감성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커피 대신 문화를 판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경우다

저자는 세계 경제가 완전 경쟁 시장으로 진입했음을 지적한다
경제학 책에서만 보던 그 완전 경쟁 시장이 현실에서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완전경쟁시장이란 다수의 구매자가 존재하고 정보 획득에 비용이 들지 않고 시장의 진입과 후퇴에 장벽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인터넷에서 클릭 몇 번만 하면 최신의 상품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디카나 노트북 등 디지털 제품이다
디씨인사이드 등을 가면 모든 제품의 정보가 쏟아져 나온다
온라인 서점 등의 인터넷 업체들은 매장 비용 하나 들지 않고도 엄청난 판매고를 올리고 있다
인터넷을 이용하면 아마존 등 해외 제품들도 바로 구입할 수 있다
세계는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반드시 좋은 현상인지는 모르겠다
선점효과는 갈수록 커져 한 번 주도권을 잡으면 2등과의 격차는 갈수록 커지는 양극화 현상이 나타난다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자본주의 원리가 갈수록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 셈이다
과거에 개인 진료소를 가지면 대부분의 의사들이 비슷한 수입을 유지했던 것과 달리, 의료계에도 대형 병원들이 생기면서 동네 병원이 망해간다
부자 의사, 가난한 의사가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되버렸다
의료 역시 자본에 종속된 것이다
특히 한국처럼 새 트렌드에 민감한 시장은 갈수록 공급자들의 치열한 경쟁을 유발시킨다
독일 같은 경우는 도서 정가제를 실시해 온라인 오프라인 할 것 없이 가격이 동일하다고 한다
소비자 입장에서 보면 안 좋은 거지만, 그 덕분에 동네 서점도 온라인 서점이나 대형 서점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
소매업자들에 대한 보호 정책도 서서히 논의되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갈수록 소비자들의 천국이 되어 간다고 한다
입맛 까다롭고 냉정한 대한민국 소비자들!!
시장의 역동성 면에서는 좋겠지만 결국 사회의 양극화 현상은 더욱 심해지지 않을까 걱정된다
능력있는 사람이 모든 것을 싹쓸이 하는, 마치 로또 복권의 원리처럼 되지 않을까 , 평범한 사람 입장에서는 여간 걱정되는 게 아니다

인상적인 것은 미국의 로하스(Life of Health & Sustainability) 열풍이었다
우리나라의 웰빙과 비교되는 이 개념은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아주 다르다
로하스가 친환경적인 소비 행태를 의미하는 반면, 웰빙은 개인의 건강을 우선시 한다
유기농 야채나 요가, 스파 등으로 대표되는 웰빙족들은 이기적이고 언뜻 보면 사치스럽기까지 하다
반면 로하스는 환경을 위해 품질이 좀 떨어지더라도 더 많은 돈을 지불한다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웰빙에 비해 로하스는 사회적이고 이타적이다
저자는 우리나라에서는 웰빙이 로하스로 바뀌지 어려울 뿐더러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고 한다
트렌드는 강제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시민들의 의식 수준이 높아지면 이기적이고 유행주의인 웰빙을 넘어서 함께 사는 사회를 위한 친환경적이고 이타적인 로하스 개념으로 바뀐다면 우리 사회가 훨씬 성숙해질 것 같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좋지만 막상 내가 공급자가 되면 부담스럽기 짝이 없다
자기계발서가 불티나게 팔리는 것도 다 완전경쟁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임을 깨달았다
전체적인 부의 크기가 증가하면서 극빈층이 점점 줄어 들고 있지만, 상대적인 격차는 갈수록 커지는 것 같다
파이도 키우면서 나누는 방법도 함께 연구하는 성숙한 사회가 되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민 단체의 활동이 더욱 중요해지고 개인의 의식도 함께 성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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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4-12-03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곡된 평등주의는 아닐까요? 수도권과밀 못지않게 시루같은 아파트문화에 넘 익숙한 것은 아닐까요? 그렇게 살다보니, 옆에서 좀 괜찮다싶으면 싹쓸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핸드폰이든, 디카든, 명품까지..아니 생각까지 똑 같고 싶어서~.눈꼴사나워~ 못보는, 다양한 생각이나 삶의 방식이 여물고 자라났으면 좋겠습니다.



로하스..괜찮네요. 사회적이고 이타적이었으면,

압축적 근대화만큼, 다양성의 영역이 곧 드러날 것이라고 봅니다. 역방향도 있겠지만, 순방향도 있을 것이라 낙관합니다. 지금의 우리같은 상황-짚신,고무신에서 인라인까지 함께 살고있는세대-은 세계사적으로 전무후이할 것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님의 생각처럼 파이도 키우고 나누는 방법도 발명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marine 2004-12-03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는 이것을 소비 동질화라고 설명합니다 소비 성향이 비슷하기 때문에 한 번 히트치면 완전히 대박나는 거죠 이걸 눈덩이 효과라고 하는데, "태극기 휘날리며" 가 천만 돌파한데는 남들이 다 보니까 나도 봐야 할 것 같은 느낌이 주효했습니다 공급자로서는 이것이 기회일 수 있으므로 소비 성향을 잘 파악한 뒤 품질 좋은 제품을 만들고 마케팅에 주력해 지렛대로 이용해야 한다는 겁니다 나라가 좁아서 그런지, 아니면 여전히 개발우선주의라서 그런지 각자의 개성이 존중되고 다양한 취향이 존중받는 사회는 요원한 것 같습니다

여울 2004-12-03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그렇군요. 눈덩이효과...대박을 한번 꿈꿔볼까요~ ㅎㅎ. 지렛대는 어디갔나? 지렛대가 없군요... 이래서 안되는군요. ㅎㅎ 

 왼쪽 책은 비슷한 류인 것 같은데, 읽어보셨죠.

 물론 10년전 1995년판 한국인트렌트 1도 잼 있었구요.

 뭐라고 쓰였는지 기억은 하나도 없군요. ㅎㅎ 주말 즐거운 독서되시구요.


토토와꼬맹이 2004-12-12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대화의 미성숙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럽이나 미국등과 같은 국가의 평균 근대화 기간이 100년이 넘는데 비해 단 30년 만에 근대자본주의 문화를 살아가는 한국인에게는 소비지향의 사회가 삶의 가치관을 바꾸어 놓은 것은 아닌지요....

좋은 글! 부럽네요.

marine 2004-12-13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의식이 바뀌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얘기겠지요?
 
국경 없는 의사회 - 인도주의의 꽃
엘리어트 레이턴 지음, 박은영 옮김, 그렉 로크 사진 / 우물이있는집 / 2003년 6월
평점 :
절판


옛날부터 관심을 갖던 단체인데 이제서야 읽게 됐다
내가 생각하는 "국경 없는 의사회" 란 완벽한 능력을 가진 멋진 사람이 도덕성까지 훌륭해 인도주의 이상을 실천하게 만드는 장소였다
사실 이런 착각은 나만 하는 게 아니라 선진국에서도 흔히 갖는 위선이다
학살이 일어난 곳에 대한 진정한 이해나 안타까움은 뒤로 한 채, 자신이 도덕성을 증명하기 위해 생색용으로 쓰이곤 한다
물론 이 곳에 근무하는 이들은 그렇지 않지만, 정부 관료들은 그들을 내세워 자신들이 3세계에 대한 도덕적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정말 해야 할 지원은 회피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들 역시 이런 도덕적 위선을 가장 경계하고, 자신들의 정부가 3세계에 대한 영향력을 높이기 위한 도구로 쓰지 않을까 늘 걱정한다

과연 나라면 이 곳에서 일할 수 있을까?
젊은 날의 짧은 모험이라면 모를까, 몇년씩 머물기는 힘들 것이다
단 하루의 봉사도 못하는 주제에 아프리카까지 날아가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까지 봉사 활동을 할 수 있을까?
하긴 양로원이나 고아원 찾는 것 보다는 더 스릴있고 멋지다는 어설픈 겉멋 때문에 갈 수도 있겠다
어쨌든 몇 년씩 장기적으로 근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혹시 경력에 도움이 된다면 모를까, 즉 자신에게 실제적인 이익이 없다면 편한 생활은 고사하고 생명의 위협마저 느끼는 그 곳에 누가 지원하겠는가?
그런 의미로 본다면 MSF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보통 사람은 아닌 게 분명하다
그들이 이뤄낸 결과가 미미하다 할지라도 그 가치를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이 영웅으로 숭배되는 것도 싫어한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매스컴은 늘 자극적인 소재를 원하기 때문에 한 번 매스컴을 타고 나면 그들은 박애 정신의 화신으로 둔갑해 버린다
그것은 실로 무거운 멍에이며 MSF에 지원하는 이들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어찌 보면 그들 자신을 기만하는 행위일 수도 있다
단순히 모험이 좋아서, 무료한 일상이 싫어서, 약간의 도덕적 우월감 때문에, 혹은 직장을 잡기 어려워서 등 다양한 이유로 MSF에 지원했고 그 동기들은 모두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그들 표현대로 MSF가 어떤 활동을 하든, 아무 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에 개인적인 공명심 때문에 아프리카로 날아 왔다고 해도 그 곳 일이 일상의 안락함을 포기하는, 명백한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에 절대 동기 자체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자국에서 편안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의 학살 현장으로 날아간 이들의 심정도 이해가 된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참으로 영적인 존재 같다
물질적으로 부유하고 편하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신적인 가치가 만족될 때 비로소 인간은 진정한 행복을 느낀다
어찌 보면 돈을 벌려고 애쓰고 경쟁에서 이기려고 아둥바둥 하는 것도 물질적인 편안함 그 자체 보다는 남보다 우월하다는 승리감을 맛보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저자의 지적처럼 현대 사회는 인간 소외가 심각하다
나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직장에 다니는 것이 아니라, 회사의 이익을 위해 그저 부속품으로 일할 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의 존엄성이라든가 주체성이 강조되지만, 실상은 대중이라는 거대한 무리 속에 묻힐 뿐 개인의 가치를 찾기란 갈수록 어려워진다
MSF에 지원하는 사람들은 부속품이 아닌 주도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 기꺼이 아프리카로 날아 온다
일상은 힘들지만 자국의 편안한 삶에서는 느끼지 못한 자부심과 주체성을 맛보는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이 누군가의 삶에 큰 도움을 준다는 것을 직접 옆에서 느낄 때 그 희열감은 말로 설명하기 힘들 것이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그들은 계약 기간이 끝난 후에도 다시 MSF로 돌아올 것이다
실제로 자국에 돌아가면 친구들과 어울리기 힘들다고 한다
아프리카 난민들의 참상을 보지 못한 친구들과 이야기 주제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대화가 원활하지 않고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이미 그들의 가치관이 바뀌어 버린 이상, 물질과 부를 기준으로 평가하는 사회에서 어울려 살기 힘들 것이다 

학살에 대한 통찰력 있는 고찰도 좋았다
복수가 먼저이고 화해는 그 다음이라는 표어를 보면, 폭력성은 인간의 기본적인 속성이 아닌가 싶다
르완다 내전시 후투족은 투치족을 죽이기 위해 무덤이 아직 비어있다고 선동한다
국영 라디오 방송에서 이런 멘트를 내보낼 수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2차 대전 당시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을 생각하면 비단 후진국의 문제라고 넘어갈 일도 아닌 것 같다
소수에 대한 집단의 폭력성은 인간의 내밀한 속성일지도 모른다
거창하게 국가나 민족을 따질 것도 없다
학교에서 흔히 벌어지는 왕따 현상도 넓게 보면 소수 민족 학살과 일맥상통한다

이 책의 미덕은 MSF의 좋은 점만 떠벌여 책 팔려고 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저자가 교수 출신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MSF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가감없이 발언한다
어쩌면 자신들의 문제점과 고민을 솔직히 드러내는 MSF 자체의 건강성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지원 때문에 군벌은 활력을 얻어 전쟁을 연장한다고 한다
난민촌이 있어야 국제 원조가 이뤄지므로 없는 난민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난민촌에 숨어 들어 다음 전쟁을 준비하는 식으로 난민을 전쟁 도구로 이용하는 상황이니, 오히려 MSF 같은 국제 기구가 전쟁을 연장시킨다는 회의도 들만 하다
그렇지만 고민하는 새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의료 시설의 부족으로 죽어 간다
그들은 고민하는 대신 행동한다
UN 같은 국제기국들이 자국의 영향력 증대를 비롯, 여러가지 제반 사항들을 고민하는 대신 즉각적인 구조 활동을 펼치는 이런 정신이 MSF를 건강하게 유지시키는 것 같다

대중 매체에 대한 홍보도 이 단체의 고민 중 하나다
비단 MSF 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모든 NGO들의 문제점일 것이다
사람들의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서는 매체 홍보가 필수적이지만 매스 미디어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기사를 원한다
그들 역시 하나의 사업인 만큼 최대의 이익 창출을 위해 보다 극적인 기사거리를 찾기 때문에 기금 모금을 위해서 대중 매체의 힘을 빌려야 하는 단체들은 어쩔 수 없이 과장 섞인 홍보를 하기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단체의 본질이 흐려지기 마련이다
난민촌의 실상을 정확히 전달하는 사람 대신, 보다 자극적이고 극적으로 포장된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이 더 선호되는 현실은 씁쓰름 하지만, 감수해야 할 부분 같다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이상 NGO 역시 돈 없이는 움직일 수 없고 대중의 관심을 촉구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매스 미디어인 이상, 일정 부분의 과장이나 포장 등은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어쨌든 안 하는 것 보다는 하는 게 낫기 때문이다

슈바이처처럼 전 생애를 봉사에 바칠 수는 없지만, 내 도움이 필요로 하는 곳에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다면 행동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의의가 있지 않을까?
또 자율성과 주체성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다
물질적인 부나 성공에 매달리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고 오히려 더 충만된 삶을 살 수도 있다
부와 성공은 경쟁을 통해 패배자가 생기기 마련인 제로섬 게임이다
그러므로 함께 나눠도 줄지 않는 자원, 즉 인간의 존엄성이나 봉사 정신, 혹은 주체성, 자발성 등의 내적 가치를 얻기 위해 애써야 할 것이다
성인들은 이런 원리를 깨닫고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나는 가진 게 참 많다
나는 극빈층도 아니고 무엇보다 확실한 직업을 가졌다
자기 발전을 위해 애쓰는 건 좋지만, 남보다 앞서기 위해 안절부절 하는 것은 스스로를 갉아 먹는 행위다
평가 기준을 다른 곳에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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