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일의 피카소 - 예술과 사랑을 열정으로 불사른 생애
김원일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4년 4월
평점 :
품절


책 두께에 기가 질렸는데 의외로 술술 넘어가고 재밌다 저자가 소설가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림이 많아서 생각만큼 분량이 많지 않아서인가? 원래 그림책은 그림이 한 면씩 차지하니까 읽는데 시간이 덜 걸리는 것도 있지만 저자가 참 글을 맛깔스럽게 잘 쓰는 것 같다 해설을 한 서울대 교수는 저자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지 않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엔 미술사가가 아니기 때문에 정확성을 기하려고 애쓴 측면도 있고 또 전기 같으면서도 자신의 경험이나 한국의 실정들을 잘 첨부해서 퍽 흥미롭다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 때문에 한 번에 읽는 나 같은 사람은 좀 힘들지만, 시간 여유를 갖고 읽으면 아주 재밌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피카소라는 화가 자체가 너무너무 매혹적이다!! 피카소 하면 "아비뇽의 아가씨들" 과 "게르니카" 정도 밖에 몰랐기 때문에 도무지 감동할 수가 없었다 해설한 교수도 통탄하는 바지만,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작품 자체 보다는 에피소드들이 더 많이 알려졌다고 해야 하나? 여자 편력이 심하고 살아서부터 거장으로 인정받았다는 정도 밖에는 몰랐다 그런데 왠걸, 그의 작품들을 접해 보니 이건 정말 장난이 아니다 저자 역시 감탄하는 바지만, 예술가들은 나름의 방식이 있는데 피카소는 그야말로 모든 방식을 다 망라했다 그것도 한 시기에 한 방식으로 그리는 게 아니라, 같은 시기에 여러 방식으로 그린 것이다 화가라면 모든 방식으로 다 그려야 하는 거 아닌가? 혹은 그냥 그리면 되지, 형식이 중요한가? 이렇게 가볍게 생각했는데 저자가 적절한 예를 들어 준다 아마 자기 역시 소설을 쓰는 예술가라 더욱 잘 알 것이다 지식인의 고뇌를 그리는 최인훈에게 농촌 노동자의 삶에 대해 쓰라고 하면 안 되는 것이고, 또 서민들 얘기를 쓰는 소설가에게 지식인에 대해 쓰라고 하면 실례라는 것이다 전 생애를 거쳐 서서히 변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동시대에 전혀 다른 양식을 병행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 등의 창작 행위는 자신을 드러내는 아주 내밀한 의식일진대, 전혀 상이한 방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한다는 건 몹시 어려울 것이다 입체주의로 그리면서도 사실주의를 동시에 추구한 피카소, 혹은 신고전주의와 초현실주의를 넘나드는 피카소! 덕분에 변절자라는 비판도 들었지만 형식이 내용을 결정하는 대부분의 화가들과는 달리 피카소는 내용이 형식을 결정하는 천재였다 일정한 형식에 구애받지 않은 것이다 그의 그림들을 보면서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어린 시절에 라파엘로처럼 그릴 수 있었다는 말이 빈말이 아닌 것 같다 사실주의 화풍으로 정교하게 그린 그림들을 보면 아무리 형식 파괴를 추구한다 해도 역시 기본을 잘하는 사람이 다 잘한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이른바 청색 시대의 작품들은 신비로운 느낌도 든다 고갱 그림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두운 파란색이 주는 느낌이 자못 신비롭다 친구인 카사헤마스가 여자 때문에 자살한 후 그린 "인생" 이란 그림이 퍽 마음에 든다 카사헤마스의 표정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멋진 그림이다 솔직히 나 같은 그림의 문외한들에게는 이런 구체적인 그림들이 훨씬 마음에 와 닿는다 입체주의 그림들은 솔직히 큰 감동은 없다 미술사적 의의는 알겠는데 나에게는 좋은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특히 "아비뇽의 아가씨들" 이나 "게르니카" 등은 워낙 유명하니까 그런가 보다 할 뿐이다 큐비즘이 뭘 의미하는지는 알 것 같다 각을 지우면서 2차원의 세계에서 3차원을 표현하려는 시도라는 느낌은 든다 입체파의 선구자인 피카소와 브라크가 왜 세잔을 존경했는지도 알 것 같다 대상의 형태를 원뿔이나 각 사이로 숨겨 버리는 그 시도 자체가 놀랍다 이런 게 바로 혁신인가? 제일 마음에 드는 그림은 "해변을 달리는 여인들" 이다 나는 이런 강렬한 색체와 뚜렷한 형태의 그림이 좋다 마치 마네의 그림처럼 말이다 피카소는 인물들의 손발을 유난히 크게 그린다 풍만함을 넘어서 거대하다는 느낌도 든다 상투적인 표현으로 무한한 생명력이라고 해야 하나?

피카소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육신과 가난한 정신의 세계를 추구했다
돈 걱정 안 하고 편하게 그림을 그려야 하니까 예술가는 돈이 많아야 한다는 말이 뻔뻔하게 들리지 않는 것은, 그가 그만큼 치열하게 예술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하기사 화가들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건데, 고흐나 고갱처럼 평생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기왕이면 피카소처럼 제대로 대접받고 원하는 그림을 맘껏 그리는 게 더 멋진 거 아닌가?
더구나 그는 이미 30대부터 대가로 대접받았던 행운아다
당대에 인정받는 것만 해도 축복받은 일인데 (대중이 시대를 앞서가는 천재에게 보조를 맞춰춘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젊어서부터 그 진가를 인정받았으니, 그는 얼마나 행복한 화가인가!!
이미 30대 때 그의 그림은 파리에서 가장 비싼 값으로 거래됐다
당시 그의 경쟁자는 12세 연상인 색체의 대가 마티스였다
얼굴색이 반반으로 나뉜 여자의 초상화를 본 기억이 난다
워낙 유명해 미술책에 실렸던 것 같다
그처럼 마티스는 색을 자유자재로 썼고 피카소는 형태의 파괴를 즐겼다
특히 피카소는 공간 분할을 통해 여러 관점에서 대상을 표현했다
피카소는 마티스를 유일한 경쟁자로 생각했다니, 마티스도 보통 인물은 아닌가 보다

피카소가 공산주의였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더 충격인 것은 6.25 때 양민 학살을 그렸다고 알려진 "한국에서의 학살" 이 사실은 미군의 북한 인민 학살을 그린 거란 사실이다
얼마나 충격적이던지!!
요즘에서야 미군이나 국군의 양민 학살이 표면 위로 드러나 논의되고 있지만, 사실 학살하면 공산주의자와 동의어 아닌가?
이게 내가 받은 교육이었는데, 실은 미군도 북한 점령하면서 사람들을 학살했다는 것이다
북한 괴뢰군으로부터 한국을 지켜준 자유민주주의 수호자 미국이 학살을 자행했다니, 믿을 수가 없다
한 때 우리나라에서 이 그림의 소개가 금지됐을 정도니 확실히 미군의 학살을 비난하긴 한 건가 보다
이에 따른 저자의 설명이 더 마음에 든다
평양을 직접 방문해서 학살 사진들을 봤는데 미군이 직접 개인한 장면은 없고 대부분이 국군이나 반공주의자에 의한 학살이었다고 한다
아마 이게 맞는 설명일 것이다
미군이든 중공군이든 남의 나라 내전에 원정와서 굳이 주민들 한꺼번에 죽이는 수고를 하진 않았을 것이다
보나마나 그들을 등에 업고 권력 깨나 얻어 보려던 내지인들의 소행일 것이다
어쨌든 피카소가 공산주의자였고 반미주의자였으며 한국의 내전에 미국이 개입한 걸 비판했다고 하니 충격적이다

피카소는 성적 에너지가 넘치는 남자였다
92세까지 산 걸 보면 일단 대단히 건강했을 것이고 건강한 남자가 성욕이 왕성한 건 당연할 것이다
젊었을 때 사진을 보니 잘 생긴 건 아니지만 인상이 무척 강렬하다
눈이 부리부리 하고 윤곽이 뚜렷한 게 카리스마가 있었을 것 같다
오래 같이 산 여자만 해서 7명인데 정식으로 결혼한 여자는 올가와 늘그막의 자클린느 뿐이었다
자클린느는 무려 45세 연하였다
젊어서부터 워낙 거장으로 받들여지던 탓도 있겠지만 여하튼 젊은 여자와 사랑을 나눌 만큼 그의 정력이나 매력이 대단했던 것 같다
우리나라의 김흥수 화백이 생각난다
자클린느는 불임이었고 피카소를 헌신적으로 받드는 동양 여자 타입이었다
그녀는 27세의 나이로 72세의 피카소를 만나 함께 살았다
이미 결혼에 한 번 실패해서였을까?
아무리 그가 거장이라 할지라도 20대 여자가 70대 남자랑 산다는 건 참...
아버지 뻘도 아니고 완전히 할아버지 아닌가?
60대 영조에게 시집오던 열 다섯 살의 정순왕후가 생각난다
권력을 갖는다는 건 이렇게 행복한 일인가?
어쨌든 이 헌신적인 젊은 아내는 피카소가 죽은 뒤 자녀들의 재산 싸움에 휘말려 자살하고 말았다니, 돈이나 권력 때문에 피카소랑 살았던 건 아닌 게 분명하다

능력만 되면 피카소처럼 결혼 생활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는 한 여자와 10년 이상 살지 않았고 결혼도 않하고 동거만 했다
질릴만 하면 새 여자가 나타나 그의 뮤즈가 되어 준 것이다
그것도 나이가 들수록 더욱 젊은 여자가 나타난다
40대에 만난 마리 테레즈는 겨우 17세였다!!
워낙 그림에만 몰두해서 그런지 피카소는 자식들에게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파트너에게는 말할 것도 없지만 말이다
그래서 늙그막에 배다른 그의 자식들은 아버지 유산만 노리고 있다고 피카소는 슬퍼한다
사회적으로 워낙 인정받고 또 자신의 예술적 재능이 여기저기서 분출하는 천재였던지라 주위 사람들에게 관심을 나눠 주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그야말로 진정한 개인주의자고 자아 정체성을 확실하게 표현한 사람이랄까?
근검절약형이었던 피카소는 파트너들에게도 꽤 인색했다
사실 이 점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나 역시 내가 소비적이지 않기 때문에 타인에게도 내식대로 대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인색하다는 평을 듣는다
그렇다고 인정이 없어서 그런 건 절대 아니다
내 기준으로 보면 사치고 낭비이기 때문에 선뜻 돈을 안 쓰는 것이다
피카소도 올가나 마리 등의 사치를 혐오했다
돈은 많지만 소비적이지 않았던 피카소는 대신 조국 스페인의 민주화 등을 위해서는 선뜻 거금을 내놓는다

한 때 귀족들과 어울리며 사교계를 드나들기도 하지만 예술혼으로 불타던 피카소에게 이런 가식적인 삶은 어울리지 않았을 게 뻔하다
기질이 틀리다고 해야 하나?
만약 피카소가 세속적인 성공에 젖어들었다면 위대한 화가가 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자신의 작품값을 철저하게 받아 내는 경제 관념이 뚜렷했던 것과는 별개로, 그는 그림에만 치열하게 매달린다
사실 이거야 말로 가장 바람직한 예술가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세속적인 성공도 하고 예술적으로도 치열하게 사는 삶!!
90세가 넘어서도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던 그 정열은 놀라움을 넘어서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일이 곧 휴식이고 쉬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는 그의 열정은 정말 대단하다
이미 30대에 입체주의를 완성한 후 거기에 머물지 않고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한다
마르지 않는 창작열이라고 할까?
로시니는 젊어서 오페라로 번 돈으로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며 편안하게 살았다
머리 아픈 오페라 작곡을 더 이상 하지 않은 것이다
일단 성공하고 나면 더 나은 작품을 써야 한다는 부담감이나 혹은 창작의 괴로움 때문에 더 이상 매달리고 싶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젊은 나이에 은퇴하는지도 모른다
반면 피카소는 그리는 것이 곧 행복이고 여가였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새로운 형태로 그린다
도자기, 무대 예술, 판화, 조각 등등 그가 손대지 않은 시각 예술은 거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금각사 - 마로니에북스 35
미시마 유키오 지음 / 청림출판 / 1991년 10월
평점 :
품절


예상 외로 재밌는 책이었다
제목이 좀 고리타분 하고 미학에 관한 책이라고 해서 지루할 거라 생각했는데, 왠걸 문장력이 장난 아니다
아주 세련되고 현대적이다
하긴 1956년에 발표한 책이니 현대적인 게 당연하지
제목 때문에 그랬을까?
나는 이 소설이 아주 옛날식 문장일 거라 생각했다
노벨상을 받은 가와바타 야스나리로부터 문장력이 훌륭하다는 칭찬과 함께 문단에 추천됐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다
이문열의 소설을 보는 기분이다
문득 이 소설가가 꽤 잘 생겼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일본 가서 금각사를 봤는데 아주 멀리 떨어져서 봤다
연못 하나를 사이에 두고 멀리서 형태만 봤다
1950년에 절에 사는 어린 스님이 커플끼리 절에 놀러 오는 거 보고 질투심을 느껴 금각사에 불을 질렀다고 한다
그 후로 아예 접근을 통제하는 것일까?
어쨌든 그 멋진 절을 가까이서 볼 수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생각만큼 크고 화려한 것은 아니었지만 "금각사" 라는 소설 때문인지 왠지 모를 신비감을 주는 절이었다
아빠가 "금각사" 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서 책을 읽지 않은 나도 덩달아 감동하면서 절을 봤던 기억이 난다

주인공 "나"는 스님인 아버지에게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깅가쿠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말더듬이라는 불구를 안고 살았기 때문에 친구도 없었고 자신의 불완전한 육체에 대해 환멸을 느끼는 대신,  깅가쿠지의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환상을 품고 산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는 깅가쿠지의 주지에게 도제로 맡겨진다
어머니는 그가 노사의 눈에 들어 깅가쿠지의 주지가 되길 바란다
"나"는 어머니를 혐오한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자기 집에 얹혀 살던 친척과 관계 갖는 걸 본 까닭이다
그 장면은 아버지도 목격했는데 아버지는 어린 "나"의 눈을 가린 채 그 일을 묵과한다
폐결핵 환자였던 아버지로서는 젊은 아내의 육욕을 만족시키기 힘들었을 것이다

"나"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은 대학에서 만난 가시와기다
그는 안짱 다리라는 불구를 안고 살지만 (아마도 선천성 고과절 탈구증일 것 같다 어린 시절 수술해 줬어야 하는데 부모의 방치로 평생 불구가 됐다는 말로 미루어 봐서) 자신의 불구를 동정의 대상으로 삼아 여자를 끌어 들일 만큼 노회하면서 또 독설가이기도 하다
문득 가난하면 선할 거라는 편견을 버리라던 니체가 생각난다
가시와기는 같은 불구라는 점 때문에 동지 의식을 느끼고 접근한 "나"에게 말더듬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인식시켜 준다
자기 불행을 직시하는 것, 혹은 남의 결점에 대해 대놓고 말할 수 있는 것, 대단한 베짱과 뻔뻔함이 아닐 수 없다
왠지 그의 삶이 비틀렸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그러나 오히려 비틀린 사람은 말더듬이라는 결점을 숨기려 했던 "나" 로 드러난다
가시와기는 불구라는 점을 이용해 연애를 걸 만큼 어찌 보면 삶에 대해 도전적인 자세를 잃지 않지만, "나"는 결국 마음으로부터 극복하지 못하고 금각사에 불을 지르고 마니까

가시와기는 아주 중요한 말을 던진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위가 아니라 인식이라고 한다
깅가쿠지에 불을 지를 "나"의 마음을 읽은 것도 아닌데, "내"가 어떻게 대상을 인식하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충고를 던진다
아마도 "내"가 인식 대신 행위에 의존할 거라는 느낌을 받아서였을 것이다
가시와기는 "나"와 도제 생활을 함께 하던 쯔루가와가 보낸 편지들을 보여준다
놀랍게도 쯔루가와는 가시와기에게 연애 상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쯔루가와를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의 상처가 없는 영혼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그는 놀라운 고민을 불구자인 쯔루가와에게 털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쯔루가와는 말더듬이인 "나"에게 친절하게 대하지만, 가시와기의 독설을 싫어해 그와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가시와기에게 연애 상담을 하고 있었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인생의 통찰력 면에서 가시와기를 좋아했던 것일까?
아니면 가시와기의 인간성 자체는 경멸하지만 연애 상담 면에서만 도움을 필요로 했던 것일까?
어쨌든 그는 행위 대신 인식을 바꾸라는 가시와기의 편지가 도착하기 전 "행위" 를 실행하고 만다
자살을 한 것이다

가시와기는 독특한 캐릭터다
그는 불구인 신체를 숨기려고 하지 않는다
육체적인 결점을 숨길래야 숨길 수 없음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현실을 직시한다
자기 결점을 똑바로 바라보고 남에게도 아무 감정없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보통 용기가 아니다
내가 보기에 그는 그 두려움과 수치심을 이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뻔뻔해진 것 같다
어쩌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인식이라는 점을 일찌감치 깨달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는 상대의 결점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이야기 할 수 있다
이미 나 자신의 결점을 세상에 까발릴 수 있는 베짱이라면 거칠 게 뭐가 있겠는가?
그는 놀랍게도 그 불구인 다리를 이용해 여자를 꼬신다
아마 생긴 건 잘났을 것이고 말도 잘했을 것이다
말솜씨와 얼굴을 이용해 접근한 후 여자의 동정심을 불러 일으키는 수법을 쓰는 것이다
그는 여자와 즐긴 후 미련없이 차 버림으로써 자신이 여자에게 매달릴 수도 있는 비참한 상황을 모면한다
오래 사귀게 되면 여자가 질릴 것이고 더 이상 동정심을 써 먹을 수 없게 된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내가 일탈을 시도하기 위해 돈을 빌릴 때도 선선히 꾸어 주지만, 차용 증서까지 쓰게 한다
"나"를 친구로 받아 들이지 않았다는 뜻이고, 아마도 누구에게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것이다
가타와시는 인생을 냉정한 눈으로 보는 만큼 우정이나 사랑이라는 감정 따위에 쉽게 휩쓸리지 않는다
솔직히 "나"에게 계속 이자와 원금을 요구하는 걸 보고 실망스럽기도 했다
너 역시 잘난 척 하지만 별 볼일 없는 인간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노사에게 돈을 받아낸 후 "나"에게 인식과 행위의 차이를 충고하는 모습을 보면서 새삼 그의 그릇을 느끼는 기분이었다
아마도 그는 인생에 절대 패배하지 않을 것 같다

절의 주지 스님인 노사에 관한 묘사도 인상 깊었다
일본의 중들은 결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성관계가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 같다
노사는 독신이기 때문에 후계자를 선택해야 한다
어머니는 "내"가 노사의 후계자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
그런데 정작 "나"는 노사를 경멸한다
사실 노사의 모습은 일상적인 종교인의 모습일 수 있다
종교적인 지위를 이용해 절이나 교회에서 신도들에게 권력을 휘두르고 시주받은 돈으로 자기 욕심을 채우는 모습!!
종교인이라는 말 자체가 직업을 의미한다면 어쩔 수 없는 현상 아닌가
노사는 결혼을 하지 않은 대신 술집 여성들을 끼고 논다
"나"는 도덕적이지 못하고 오히려 위선적인 노사를 마음으로부터 경멸하지만 그의 총애를 받아야 후계자가 될 수 있다
이 갈등을 괴로워 하다가 결국 "나"는 노사가 데리고 논 술집 여자의 사진을 노사에게 보내질 않나, 대학 수업을 빠지질 않나 어떻게 해서든 일탈을 저지르려고 애쓴다
완전히 눈 밖에 나버려야 일말의 기대마저도 포기할 것 같은 그 심정이 이해가 간다
만약 "내"가 어머니를 사랑했다면 주지가 되라는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더욱 괴로웠을 것이다
다행히 "나"는 어머니를 증오했기 때문에 어머니의 기대로부터 훨씬 자유로웠다

"나"는 한 때 노사를 죽일 생각도 하지만 인간은 반드시 죽는 존재이기 때문에 굳이 내 손으로 해치울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절대미의 존재가 아니므로 불태울 가치조차 없다
반면 금각사라는 건축물은 영원히 존재하는 절대미의 상징이므로 불태울 가치가 있다
인간의 유한함과 한계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다
금각사를 불태우면서 자신도 그 안에 들어가 죽으려고 했으나 불행히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나"는 계획을 바꿔 산으로 도망치고 담배 한 개비를 태우면서 살아겠다는 의지를 불태운다
충동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기까지는 죽음도 불사할 정도로 강한 의지를 가진다
죽음을 각오한다면 두려울 게 뭐가 있겠는가?
반면 막상 일을 저지르고 난 후 충동감이 해소되면 그 때부터는 현실을 직시하고 살 궁리를 찾게 된다
주인공 역시 절대미의 상징인 금각사를 불태울 때까지만 해도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었으나 막상 그 절이 사라져 가자 현실을 깨닫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과연 주인공은 무사히 살아 남을 수 있을까?

자위대의 결성을 외치며 할복 자살한 저자의 특이한 이력과 잘 어울리는 소설이다
절대미의 세계에 집착하는 저자의 정신 세계를 들여다 보는 기분이 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드팀전 2004-12-01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토에 갔을때 금각사를 본 적이 있었는데..너무 금칠을 해놔서 ...영.

미시마 유키오의 전력에 대한 편견땜에 그의 책은 한권도 본적이 없습니다.님의 리뷰에 깐깐한 별점 평가를 유추해볼때 다섯은 상당히 좋은 책이 아닐까 하는데 .. 관심이 아주 많이 가는군요.잘봤습니다.

marine 2004-12-01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네 아주 인상깊게 본 소설입니다 전 일단 작가는 문장력이 뛰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좀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미려한 문장이 돋보인다" 고 할 수 있습니다 금각사로 대표되는 절대미, 혹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의 추구, 이런 것들이 잘 어우러져 있답니다 재밌는 소설입니다 읽어 보세요
 
클래식, 아는 만큼 들린다
최영옥 지음 / 문예마당 / 2000년 6월
평점 :
품절


이 책보다 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여행을 추천합니다

가격 차이가 6천원 정도 나는데 그 책이 훨씬 화려하고 재밌고 유익합니다

솔직히 좀 실망스럽네요

에피소드라고 삽입한 것도 너무 일상적인 내용이고  깊이가 없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두 책에서 작곡가나 곡 설명하는 게 거의 똑같더군요

누가 누구 걸 베꼈는지, 아니면 외국에서 만든 원전을 같이 베꼈는지 완전히 일치하는 곳이 몇 군데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중문화의 겉과 속 2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평들이 대체적으로 좋은 책을 비판한다는 건 모험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

대체 그는 자기 책을 낸 것인가? 아니면 여러 책을 종합한 요약본을 낸 것인가?

대중문화라면 그의 전공으로 알고 있는데 이렇게 전체를 남의 책 요약으로 일관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자신의 이야기는 거의 없고 90% 이상을 남의 얘기로  채울 뿐이다

그나마 원전을 밝혀서 다행인 셈인가?

불행히도 나는 이 책을 읽기 전 여기 인용되는 몇 권의 책을 먼저 읽었다

보보스나 명품에 관한 챕터는 정말 원전 그대로의 내용을 요약한 것에 불과하다

강준만이 쓴 책을 읽는 이유는 강준만의 의견을 듣고 싶기 때문이다

원전이 다 번역되서 팔리고 있는데 그 요약본을 굳이 읽을 필요가 있겠는가?

차라리 여기 인용된 원전들을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깊이의 정도가 다르다

또 그가 인용한 원전들은 어렵지도 않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늘빵 2004-11-11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이책... 강준만 교수의 고전(?)이네요. ^^;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 항상 다른 새로운 책들에 관심 쏟느라 아직까지도 읽지 못한 책.

야클 2004-11-12 0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인물과 사상>은 여러권 봤는데요.재미있고 일부분 공감하지만 또한 많은 부분에서 거부감이 드는 묘한 사람이란 느낌을 갖고있어요.이책은 안읽어봤는데....별로 읽고싶은 생각도 안드네요. ^^
 
쇼핑의 유혹 - 쇼핑의 역사와 문화에 얽힌 인간 욕망의 9가지 얼굴
토머스 하인 지음, 김종식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3년 12월
평점 :
품절


우리가 쇼핑을 하는 이유는 뭘까?
단순히 소비 생활을 위해서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백화점에 진열된 물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느끼고, 직접 물건을 구매할 때의 기쁨은 말할 것도 없다
쇼핑 중독자의 경우 백화점 순례하는 게 최고의 여가 활동 아닌가?
돈을 주고 물건을 구입할 때의 그 희열감은, 비록 지불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일반적인 것이다
그래서 외상 구매, 혹은 신용 카드가 생긴 거 아니겠는가?
만약 사람들이 합리적인 소비만 한다면 충동 구매를 부축이기 위한 신용 카드 같은 제도는 애당초 필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쇼핑은 하나의 여가이자 소비 활동이라는 것이 지금까지의 중론이었다
그런데 저자는 다양한 관점으로 쇼핑을 분석한다
사람들은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 쇼핑을 한다
쇼핑과 소속감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같은 취향을 공유하는 그룹에 끼기 위해 비슷한 물건을 구매한다
저자의 분석처럼 취향과 유행은 좀 다른 개념인데, 유행이 잠깐 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데 비해 취향은 거의 영구적으로 우리 마음을 지배한다
유행이야 무시할 수도 있지만, 취향은 그 사람의 본질을 지배하는 중요한 특성 중 하나라 쉽게 포기할 수 없다
중년의 남성은 유행 따위에 쉽게 휘둘리지 않는다
대신 자기가 갖는 자신만의 독특한 취향은, 누가 뭐라 한다 해서 쉽사리 바뀔 만한 취약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대단히 견고한 자신만의 취향을 가지고 있다
그 취향을 드러내기 위해 쇼핑을 한다
말하자면 그의 쇼핑 목록은, 나는 이런 사람이오, 라고 현시적으로 보여 주는 도구가 된다

이 취향을 공유하는 소수의 집단들은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 낸다
이것은 비단 쇼핑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동호회 같은 것도 여기게 속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란 참으로 개성적인 존재다
대중 매체에 의해 끊임없이 똑같아지라는 압박을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독특한 생각과 스타일을 어떻게 해서든 드러내려고 애를 쓴다
요즘 같은 다품종 소량 생산의 시대는, 곧 비슷한 취향의 소비자들을 하나의 그룹으로 묶어 주기 쉽다

오늘날 쇼핑의 특징으로는 브랜드 네임 밸류가 있다
옛날에는 점원들의 설명을 듣고 직접 눈으로 확인한 후 구매를 결정했는데, 20세기 후반의 소비자들은 브랜드 이름만 가지고 제품의 품질을 판단한다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 바로 광고다
광고를 통해 대중에게 알리지 않는다면, 그 제품 품질이 좋다는 것을 수많은 소비자들에게 어떻게 알릴 수 있겠는가?
현대 사회는 정말 모든 분야가 유기적으로 연결됐다는 생각이 든다
부어스티니 주장하는 그 이미지의 환상도 결국 매스 미디어 시대에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필수 요소다
광고가 없는 21세기는 상상도 할 수 없다
기업들은 광고를 통해 이미지를 팔고, 소비자들은 그 이미지로 제품의 질을 판단한 뒤 대량 구매를 한다
대량 생산과 대량 구매는 광고라는 중간자가 없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쇼핑의 새로운 개념으로 책임감이라는 게 있다
대체 쇼핑과 책임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쇼핑이라는 단어에는 과소비와 무절제라는 속뜻이 숨어 있는 기분인데, 쇼핑을 책임있는 행동이라 할 수 있을까?
저자는 한 푼이라도 아껴서 꼭 필요한 물건만을 구입하는 가정 주부들을 예로 든다
그들은 한정된 액수 내에서 가족에게 최대의 효용성을 안겨 줄 물품을 구하기 위해 애쓴다
따지고 보면 자급자족 시대가 아닌 이상, 시장에 나가 물건을 구매하는 행위는 먹고 살기 위한 필수 과정이다
내가 필요한 제화를 구입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게 아닌가?
그러므로 쇼핑의 속성에는,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노리는 "책임"이라는 덕목이 들어 간다
(나 역시 그런 면에 해당된다)

쇼핑을 하는 또다른 이유로는 주목(attention)을 들 수 있다
물품 구매를 통해 타인의 주목을 받고 싶은 심리를 말한다
이것은 부유층일수록 더욱 그렇다
유한 계급이란 생활에 필수적이지 않는 것을 구매할 능력이 있는 계층이라고 누군가 정의했다
여기에는 사치 품목 뿐 아니라 오페라나 클래식, 발레 같은 예술도 포함된다
부유층들은 보다 값비싼 물품을 구입함으로써 그것을 소유하지 못한 계층과 차이를 두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이들을 흉내내기 위해 한 달 월급을 명품에 쏟아붓는 서민층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명품을 소유했느냐, 안 했느냐는 본질이 아니다
명품, 혹은 사치품은 그저 차이를 드러내는 수단에 불과하다
본질적으로 부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 단지 그들이 갖는 몇몇 물건들을 소유했다고 해서 달라질 게 뭐가 있겠는가?
소득 격차를 인정하고 각자의 능력에 맞게 사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이다

쇼핑을 하는 다른 이유로는 축하를 들 수 있다
제일 쉬운 예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생각하면 된다
흔히 크리스마스나 밸런타이 데이를 관련 업계의 상술이라고 비난하지만, 저자의 말을 들어 보면 사람들이 기꺼이 지갑을 여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사실 인간이 얼마나 영리한 동물인데 남의 말에 속아서 돈을 지불하겠는가?)
선사 시대 이래로 사람들은 축제를 즐겼다
생산력이 부족한 시대에 축제는 거의 유일하게 먹고 마실 수 있는 기회였다
더구나 축제 때는 귀족들이 자선의 은혜를 베푼다
(크리스마스의 불우 이웃 돕기란 이런 맥락의 전통이었나 보다)
1년 중 단 며칠을 쉴 수 있는 축제 기간 동안, 사람들은 가까운 사람들에게 선물을 하므로써 개인적인 유대 관계를 돈독히 한다
사실 아무 날도 아닌데 친하게 지내자고 선물을 건넨다면 얼마나 어색하겠는가?
사람들이 기념일을 찾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크리스마스 등의 축일을 기념함으로써 그들은 새로운 인간 관계를 다진다

현대 사회의 특징으로 인터넷 쇼핑과 홈쇼핑이 빠질 수 없다
세계가 복잡해지면서 사람들은 쇼핑을 위해 시간을 따로 내기 힘들어진다
대형 쇼핑몰이 번창하는 이유도, 바쁜 현대인을 위해 모든 물건들을 한 곳에 모아 놨기 때문이다
이제 인터넷 쇼핑이니 홈쇼핑이 대중화 되면서 고객들은 원하는 물건을 앉아서 바로 구매할 수 있다
물론 직접 눈으로 볼 수 없고, 조언자도 없기 때문에 불안한 심리가 있지만, 환불 제도를 통해 극복해 가고 있다
저자는 쇼핑의 마지막 특징으로 이러한 편의성을 들고 있다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다소 깊이가 얕긴 하지만, 비교적 일목 요연하게 쇼핑의 심리에 대해 잘 기술하고 있다
지나친 비약을 피하고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문제들을 예로 든 것도 이해를 돕는다
일반인이 현상을 분석한 책을 읽었으니, 이제는 보다 학문적으로 접근한 글을 읽고 싶다
확실히 인간은 소비하는 동물이다
도구적 인간, 정치적 인간 등등 인간을 정의하는 수많은 개념 속에 소비하는 인간도 함께 포함시켜야 할 듯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