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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록 - 내 붓을 들어 한의 세월을 적는다 ㅣ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4
혜경궁 홍씨 지음, 이선형 옮김 / 서해문집 / 2003년 11월
평점 :
조선사 중 가장 흥미진진한 사건을 꼽자면 인현왕후 폐위 사건과 사도 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은 일일 것이다
드라마로도 수없이 만들어졌는데, 사건 자체의 극적 전개는 물론이거니와 이 두 사건을 자세히 기록한 한글 기록이 있기 때문에 더욱 우리의 관심을 끈다
특히 한중록은 사도 세자의 부인이었던 혜경궁 홍씨의 기록으로써, 신원이 확실하고 당시 정치 상황을 자세히 기록해 더욱 그 가치가 높다고 하겠다
조선사를 돌이켜 보면 비단 그녀 뿐 아니라 한맺힌 비빈들이 많을 터인데, 기록으로 남긴 것이 겨우 한 질 뿐이니 (계축일기와 인현왕후전은 궁녀가 쓴 것이라 제외하고), 유달리 문학성이 뛰어난 분이라 생각된다
비록 자기 가문의 신원 회복을 위해 썼다고 하지만, 조선 왕조 5백년 역사 중에 이런 기록을 남긴 분은 그 분 혼자이니, 그 가치를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한중록의 객관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은 이덕일의 역사 에세이 "사도세자의 고백"을 통해 처음 접했다
그 책을 보면 단지 한중록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료로써의 가치조차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투다
사도세자는 정신병이 없었고 혜경궁은 남편을 버리고 친정을 택한 비정한 여인으로 나온다
사도세자는 영특하기 그지없는 훌륭한 왕재였는데, 노론의 탄압을 받아 아버지의 손에 죽임을 당했고 아내인 혜경궁은 노론인 친정 편에 서서 남편 죽이는데 앞장 섰다고 한다
심지어 아버지 홍봉한은 외손인 정조 대신, 사도세자의 서자를 옹립하려고까지 했으나 어미 된 심정에 차마 그러지는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선뜻 동의하기 힘든 구석이 많아 직접 "한중록"을 읽고 싶었다
다행히 국문으로 쉽게 번역된 책이 나와 흥미롭게 읽었다
이덕일의 책을 보면 한중록이 한스럽다 "恨"자가 아닌, 한가할 "閑"자를 쓴다면서 절대 남편을 위한 사모곡이 아님을 주장했다
그렇지만 실제 한중록의 원본이 전해지지 않는 상태에서 여러 이본에는 두 가지 한자가 다 쓰인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녀가 어떤 한자를 썼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런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을 이덕일이 왜 굳이 유리한 쪽으로 해석을 하는지 모르겠다
한중록은 총 6권으로 혜경궁 말년 10여년에 걸쳐 쓰여졌는데, 각 권마다 기술한 내용이 다르다
아마도 글을 쓰는 목적이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정조가 승하한 후 쓴 책을 보면 확실히 가문의 회복을 위해 손자 순조에게 탄원하는 형식이긴 하다
그렇지만 모든 책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즉 반드시 그 목적만으로 쓴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한편으로 그녀의 처지가 얼마나 곤궁했는지 이해도 간다
큰 이변이 없는 한 당연히 즉위하여 왕비가 되리라 믿었을텐데 (더구나 세손까지 낳았으니 무슨 근심이 있었으랴!), 어처구니 없이 남편이 뒤주에 갇혀 굶어 죽은 후 오직 아들에게 의존하며 살얼음 걷듯 살았을 것이다
그 와중에 정승을 역임하던 친정가문은 멸문지화에 가까운 화를 입고, 왕이 된 아들이 원한을 풀어주리라 믿었는데 느닷없이 아들이 급서한 후 어린 손자가 왕위에 올랐는데, 정작 정사는 대왕대비의 손에 있고 자신은 궁에서 아무 위치도 아니었다
아들 죽고 나니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였을 것이다
철천지 원수로 보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신원 회복은 커녕, 오히려 동생 홍낙임이 죽임을 당했으니 70 넘은 그녀가 누구에게 하소연 할 수 있겠는가!
어린 순조의 자비를 바라며 친정의 억울함을 밝히려 피로써 한중록을 써 가던 그녀의 안타까운 노후가 눈에 밟히는 듯 하여 마음이 아팠다
사도세자가 노론에 의해 희생됐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그에게 문제가 있음은 분명하다
아무리 편파적이다 할지라도 한중록의 기록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영조 역시 다소 독특한 성격이었던 것 같다
보통 아들을 귀히 여기는 법인데, 큰 아들을 잃고 늘그막에 본 하나 뿐인 아드님을 그토록 박대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간다
여러 옹주들 중에서도 유독 화평과 화완만 총애하고, 화협과 화순 옹주 등은 세자처럼 극도로 미워했다니 애정의 편파가 심했던 모양이다
특히 화순 옹주는 남편이 죽고 나자 곡기를 끊고 따라 죽었는데, 아무리 아비 먼저 죽은 자식이 밉더라도 당시의 충효 사상을 따르자면 열녀비 하나는 세워 줄 만 하다
그런데도 밥 먹으라는 하교를 거부했다고 끝까지 모른 척 했다니, 영조가 얼마나 호불호가 뚜렷한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이 가엾은 옹주의 열녀비는 나중에 조카 정조가 세워 준다
영조의 극단적인 자식 편애에 괴로워 하던 사도 세자는 점점 어긋가는 쪽으로 나가 나중에는 의대병이라는 희한한 병이 생기고, 화를 못 이겨 주변 내인들을 여럿 죽였다고 한다
의대병이란 옷을 한 번에 못 입는 병인데, 이 옷을 입혀 주려다 세자의 후궁 빙애도 칼맞아 죽고 말았다
(그녀는 아들을 낳아 준 여자다)
혜경궁 역시 세자가 던진 바둑판에 눈을 찧어 자칫 눈알이 빠질 뻔 했다고 하니, 사도 세자의 상태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급기야 생모인 선희궁이 아들의 상태를 직접 영조에게 고할 정도였으니, 사도 세자의 병증이 심각했음은 분명하다
아마도 영조는 아들이 모반하지 않을까 겁냈던 것 같다
무기류를 처소에 쌓아 놓고 관서 지방으로 여행한 것이 결정적인 화근이 되어 참변을 당했으니 말이다
권력 앞에서는 부자지간도 소용없다고 하지만, 혼란스런 시대도 아니고 예와 문치의 나라 조선에서 하나 뿐인 아들을 뒤주 속에 넣고 굶겨 죽인 영조도 보통 사람은 아니다
폐서인 시킬 수도 있고 (양녕대군처럼) 사약을 내려 한 번에 죽게 할 수도 있는데, 굳이 뒤주를 내와 그 안에 들어가게 한 뒤 8일 동안 고통 속에서 죽게 해야 했을까?
더구나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삼복 더위였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안에서 대소변은 또 어떻게 해결했을까? 한 나라의 세자가 이토록 비참하게 죽을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애통하다)
할아버지에 의해 아버지가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 본 정조가 얼마나 가슴 졸이며 동궁 시절을 보냈을지 짐작이 간다
또 정조가 사도 세자의 죽은 형인 효장 세자의 아들로 입적된 후, 왕실 내의 어떤 지위도 얻지 못하고 오직 아들에게 신세를 의탁하며 시아버지 눈치를 살피고 살얼음 걷듯 세월을 보낸 혜경궁에게도 동정이 간다
사도 세자가 죽은 후 영조가 유일하게 총애하던 화완 옹주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던 혜경궁의 처지가 참 가엾다
사도 세자가 무사히 왕위에 올랐으면 중전이 되어 옹주와는 비교도 안 될 높은 처지가 됐을건만 (인원왕후는 왕실의 법도를 엄히 세워 옹주는 세자빈과 감히 어깨를 나란히 앉지도 못하게 했다고 한다), 남편이 시아버지 손에 죽고 나니 왕실에서 그녀를 보호해 줄 방패막이는 아무 것도 없었다
영조가 그녀를 귀여워 했다고는 하나, 정치적인 이유로 하나 뿐인 아들 정조를 뺏어가 효장세자의 아들로 삼으니, 아무리 아들이 왕위에 올라도 그녀는 대비 칭호를 받을 수 없고 그저 한낱 "빈"에 불과했다
더구나 친정집은 남편 일에 연루되어 아들 정조로부터도 배척받게 되니, 고립무원이었을 그녀 처지가 안타깝다
정조가 오래 살았으면 말년에 행복했으련만, 하필 50도 못 되어 어머니 앞에 죽으니 얼마나 애통했을까?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는 혜경궁 보다 10세나 어린데, 이 집안이 사도 세자 죽음에 한 몫을 하고 나중에는 홍씨 가문을 공격한다
정조가 등극한 후는 모두 유배되고 사사됐으나, 순조가 어린 나이에 즉위한 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면서 다시 혜경궁의 집안은 공격을 받는다
이미 70이 넘은 혜경궁은 어떻게든 동생의 죽음을 막아 보려 곡기를 끊고 자살하겠다고 시위하자, 오히려 정순왕후는 부추기는 놈을 찾아 내라고 성화니 그녀는 한중록에 그 서운함을 토로한다
"너무 이리 마십시오"
한중록을 보면 온통 좋은 말 투성인데, 시어머니 정순왕후에게 이리 말한 것을 기록한 걸 보면 너무나 억울하고 분해 악에 받쳐 내뱉은 말처럼 느껴진다
혜경궁 홍씨의 일생을 살펴 보면 참으로 파란만장 하고, 한맺힌 삶이다
10세 때 세자빈으로 뽑혀 궁으로 들어간 후, 윗전들이 다 귀애하고 아들딸 무사히 순산하고, 본인도 80세까지 살았으니 (조선 시대 80세면 정말 건강했을 것이다) 큰 이변만 없었으면 대단히 복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독특한 성격의 남편을 만나 모진 세월의 풍파를 겪었으니 그녀의 한이 얼마나 클지 짐작이 간다
다행히 자신의 일생을 자세히 기록한 저서를 남겨 (그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후손에게 전하니, 헛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대어로 번역했다고는 하나, 기본적으로 권선징악 식의 서술이 너무 많아 아주 재밌지는 않다
어떤 인물을 논할 때 무조건 착하고 바른 사람, 혹은 악하고 못된 사람이라는 식으로만 묘사하고 충효를 너무나 강조한 나머지 도덕 교과서를 읽는 기분도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궐의 자잘한 에피소드들도 빼놓지 않고 기록하고, 또 당시 정세에 대해 소상하게 기록해 왕실 여인의 눈으로 본 조선 당쟁사를 읽는 새로운 기쁨도 준다
책 편집은 썩 훌륭한 편이다
주석도 많이 달고 당시 제도나 관습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