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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읽어주는 여자 ㅣ 명진 읽어주는 시리즈 5
이은희 지음 / 명진출판사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읽어 주는" 시리즈는 한젬마의 "그림 읽어주는 여자" 때문에 신뢰가 안 갔다
한젬마라는 유명세에 비해, 책 내용이 별 게 없어 실망한 기억이 있다
"과학 읽어 주는 여자"의 추천사에서도 나온 말이지만, 과학의 대중화를 외치다 보면 과학 자체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우를 범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대중의 눈높이도 중요하지만, 질적 수준을 떨어뜨린다면 이미지를 위해 본질을 놓치는 꼴이 될 것이다
"이기적인 유전자"의 저자, 도킨스가 한 말처럼 대중에게 과학을 알린답시고 과학에 물을 타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비단 과학에만 국한되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역사나 철학, 문학, 예술 등등 모든 분야의 학문에 해당되는 말이다)
다행히도 이 책의 저자는 질적 수준을 떨어뜨리지 않으면서도 쉽고 재밌는 시각으로 대중에게 다가선다
대학에서 연구하는 나이 지긋한 학자가 아니라 약간 걱정은 했지만, 과학 교양을 쌓기에 부족함이 없는 좋은 책이다
사실 생물학은 물리학이나 화학 등 보다 훨씬 재밌고 쉬운 학문이다
내가 생물학 계통을 전공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일들이고 일련의 과정이 마치 소설 읽듯 자연스럽게 전개되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물리학이나 화학을 공부하는 것보다 훨씬 흥미롭다
면역학이나 생화학 교과서를 읽다 보면 신체 내에서 일어나는 메커니즘들이 하나의 스토리를 형성할 만큼 정교하고 자연스럽게 진행되기 때문에, 소설을 읽는다는 착각을 느낄 때가 있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생물학의 묘미를 잘 알고 있다
그녀는 과학이야 말로 인간의 상상력을 현실로 만들어 주는 훌륭한 예술이라고 했는데, 과학자와 예술가는 자유로운 상상력과 창의성을 공유한 비슷한 집단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과학은 더 이상 어렵고 복잡한 학문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을 북돋아 주는 좋은 자극제가 될 것이다
우주의 신호를 받아 들이는 세티 계획은 이 책에서 처음 알았다
칼 세이건의 유명한 영화 "콘택트"에서 소개된 내용인데, 영화를 봤지만 세티 계획이라는 용어 자체는 처음 접했다
우주의 신호를 수집하는 이 광대한 설비 기구는 MS의 공동 설립자인 폴 앨런으로부터 1000만 달러를 기증받으면서 건설할 수 있었다고 한다
빌 게이츠 역시 그의 고향 도서관에 천만 달러를 기증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데, 미국 갑부들의 놀라운 기부 문화를 접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도 기업 문화가 정착되면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 되길 기대해 본다
앨런의 기부금으로 설립한 이 대규모 망원경 단지는 외계의 전파를 수집하는데, 인터넷의 발달로 전세계 유저들이 잠시 컴퓨터를 쉬는 동안 신호 분석을 시도한다고 한다
컴퓨터를 켜 놓고 잠깐 다른 일을 할 때, 스크린 세이버 안에서 우주 신호 분석이 이뤄지는 셈이다
세티 계획은 드넓은 우주 안에 있을 또 다른 지적 생명체를 찾는 원대한 계획이다
우주 안에 인간 외에 또 다른 생명체가 있다는 사실 만으로 우리의 가슴은 설렌다
우리의 시각이 좁은 지구에 갇히지 않고 태양계 밖으로 뻗어 가는 순간, 인간의 상상력과 모험심, 호기심 등은 무한대로 확장될 것이다
그런 까닭에 별 이득도 없는 우주 계발에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매달리고, "콘택트"의 엘리처럼 우주 신호에 매일 귀기울이는 노력을 계속할 것이다
태양계 밖으로 처음 내보낸 파이오니어 10호가 30년 만에 신호를 보내왔다는 사실만으로 가슴이 설렌다
우주 미아가 된 줄 알았는데, 여전히 원소 모형과 태양계의 구성, 손 흔드는 남녀등이 그려진 (칼 세이건의 작품이다) 파이오니어 10호는, 어딘가에 있을 지적 생명체에게 우리 존재를 알리기 위해 탐험 중인 것이다!!
머리카락의 생성 주기가 한정되어 있으므로 누구나 발끝까지 머리칼을 기를 수 없다거나, 잘린 머리칼은 유전자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없으므로 모근째 뽑힌 머리칼만 유용하다는 얘기, 자외선이 해로운 까닭은 DNA 구조를 파괴해 잘못된 염기 배열을 만들기 때문이며, 장미는 파란색을 만드는효소가 부족해 델피니딘 성분을 합성하지 못하므로 피튜니아 꽃에서 Blue gene을 찾아 아그로박테리움에 이식한 후 장미 유전자에 침투시켜 파란 장미를 만들어 냈다는 이야기 등 흥미있는 주제들이 많다
드라큘라는 포르피린증에 걸려 햇빛에 민감하므로 밤에만 활동했다거나 (니콜 키드먼 주연의 "The others"를 피부과 의사와 함께 봤는데 그도 주인공들이 포르피린증에 걸렸을 거란 얘기를 했다), 멜라토닌을 이용한 생체 시계 조절 (원할 때 잠들고 깨는 것), 2세 이후 더 이상 분열하지 않기 때문에 알쯔하이머 병이나 파킨슨 병 등에 걸리면 치명적인 뇌세포 이야기 등도 흥미로웠다
특히 남자들의 피임법에 얽힌 얘기가 재밌다
흔히 피임이라면 여자들이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호르몬 주기를 이용한 피임약의 탄생이 여성들을 해방시킨 건 사실이지만, 매일 같은 시간에 복용해야 하므로 꽤나 힘든 일이다
남자들이 피임을 할 경우 테스토스테론에 영향을 미쳐 성기능도 함께 저하되므로 절대 남자에게 먹일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요즘 정자의 머리에 붙은 애크로솜을 분해해 밖으로 배출을 막는 NB-DNJ라는 피임약도 개발 중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남자들은 아무리 좋은 효과의 피임약이 나와도 절대 먹지 않겠다고 한다
콘돔 끼는 것조차 쾌감이 줄어든다고 거부하는 이들이니, 여전히 생명 탄생의 책임감을 함께 나누는 것은 요원한 일인 모양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매일 복용하는 번거러움을 줄이기 위해 4주 주기가 아닌, 12주 주기의 피임약이 등장했다
매달 생리를 하는 대신, 1년에 계절별로 4번만 하면 되니까 이름도 Seasonale이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문제들이지만, 무심코 넘어가기 쉬운 과학적 주제들이 친절하고 자상한 해설과 함께 잘 서술됐다
많은 삽화와 사진들과 함께 큼직큼직 하게 편집되서 읽기도 편하다
두 어 시간이면 금방 한 권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가볍고 부담스럽지 않다
우리 일상의 과학에 대해 호기심이 있다면 머리 식히는 기분으로 가볍게 집어 들어도 괜찮을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