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과 이브에게는 배꼽이 있었을까
마틴 가드너 지음, 강윤재 옮김 / 바다출판사 / 2002년 5월
평점 :
절판


상당히 어렵게 읽은 책이다

사이비 과학이 왜 틀린가를 과학적으로 논증한 책이기 때문에 술술 읽히지가 않았다

양자 역학에 관한 부분은 특히 어려웠다

양자 역학에 대한 개념이 부족해서 사이비 이론도 이해가 안 가는데, 왜 틀렸는가를 과학적으로 논증한 내용은 더더욱 어려웠다

그렇지만 나머지 부분은 대체적으로 수긍이 가고, UFO에 관한 내용은 황당무계해서 재밌기까지 했다

적어도 칼 세이건의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보다는 쉽다

(오래 전에 절판된 책이라 구하느라 꽤 애를 먹었는데, 막상 헌책방까지 뒤져 손에 넣고 보니 내용이 너무 어려워 읽다 만 기억이 있는 사연있는 책이다)

 

마틴 가드너라는 작가 자체가 칼 세이건처럼 과학자는 아닌 듯 싶다

그의 약력은 다만 과학 에세이스트 혹은 퍼즐 전문가 정도로만 나왔다

사실 그 점 때문에 또 하나의 말장난에 휩싸이는 건 아닌지 걱정을 했는데, 책의 수준은 그런 걱정이 기우임을 보여 준다

다만 본인의 논증 보다는 다른 과학자들의 반론을 많이 인용했다

확실히 미국 사람들은 출처 밝히기에 열심이다

 

이 책에서 제일 인상깊었던 부분은 패러다임의 틀이었다

그는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에 관한 글이 사이비 과학에 종종 잘못 인용된다고 지적하는데, 그 글은 수능 문제집에서 본 기억이 난다

언어 영역 지문에 인용됐는데, 그 때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을 처음 알았을 뿐더러,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것들이 (이를테면 뉴턴의 만유 인력 법칙 같은) 패러다임이 변하면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패러다임이란 사물을 보는 틀이자 관점이기 때문에 패러다임이 변하면 당연히 진리도 바뀐다고 했다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뀌는 것도 대표적인 패러다임의 변화다

지난 세대에는 진리라고 믿었던 창조론이나 천동설 같은 이론도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라 폐기되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진리들도 다음 세대가 되면 전혀 엉터리가 될 수 있다는 게 그 글의 요지였다

 

그러나 저자는 바로 이 포스트모더니즘주의가 과학과 사이비의 경계선을 모호하게 하는데 이용된다고 한탄한다

과학적 진실들은 1과 0 사이에 나열되어 있으나 우리가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것들은 (이를테면 지동설과 진화론 등) 0.999999999의 가능성을 가진, 말하자면 1에 거의 근접한 것들이기 때문에 사실로 받아 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학 평론가들이 흔히 이용하는 과학의 오류나 거짓, 숨겨진 이야기 따위는 사실과 분리되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성경이다

저자는 왜 성경을 과학으로 증명해 내려는가 의아해 한다

신의 말씀을 인간의 과학으로 풀어내려는 시도 자체가 사실은 신성 모독이 아니냐는 것이다

즉, 성경은 신의 말씀을 기록한 경전일 뿐이지, 자연 법칙이나 과학적 사실들을 논증한 책이 아니다

그런데도 수많은 사람들은 경전이 마치 과학책이라도 되는 양, 그 안에서 과학적 사실들을 찾아내려고 애쓴다

여기서 바로 이 책의 제목, "아담과 이브는 배꼽이 있었는가"라는 질문이 나온다

아담과 이브가 신에 의해 지어진 최초의 인간이라면 당연히 그들은 부모의 탯줄을 의미하는 배꼽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아담과 이브를 그린 모든 그림들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처럼) 배꼽을 당연시 한다

창조론도 마찬가지다

이미 로마 카톨릭은 진화론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잃어 버린 고리들을 예로 들어 진화론이 허구라고 공격한다

그렇다면 화석의 존재는 무엇이고, 수많은 지질학적 증거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들은 진화론을 부정하는 대신, 그것을 대체할만한 어떤 논리적 증거나 과학적인 이론도 내 놓지 못한다

다만 모든 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식이다

 

성경에 대한 사이비 과학의 정점은 종말론일 것이다

부끄럽게도 1992년 다미 선교회 사건이 그 예로 기록되어 있다

나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 때 중학생이었는데 92년 10월에 종말이 올 거라는 광고를 보고 (그들은 뉴욕 타임즈에까지 광고를 실었다고 한다) 혹시 그 예언이 맞으면 어쩌나, 두려워 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했지만, 정작 이장림 목사는 신자들에게 거둔 돈을 다음해가 만기인 채권에 투자했다고 한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사건들이 지금도 미국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다

사실 신앙을 공고히 하는 지파일수록 다니엘서와 요한 계시록을 분석하여 종말론을 내세운다

다미 선교회처럼 특정 날짜를 명시해 신자들의 재산을 갈취하지는 않을지라도,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세상의 마지막이고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며 666이라는 짐승의 숫자가 새겨진 바코드를 이마에 받고 여기서 살아 남은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한 후 천년 왕국에서 살게 될 거라는 일련의 이야기들은 너무나 익숙하다

정상적인 사회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이 최후의 심판이 우리 세대에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최후의 심판은 기독교의 기본 교리 중 하나다

그러나 성경에 흩어진 지엽적인 사실들을 교묘하게 짜 맞추어 바로 지금이 그 시기라고 주장하는 자칭 예언자들은 사이비라고 규정할 수 밖에 없다

 

UFO에 관한 믿음도 종말론 만큼이나 널리 퍼져 있다

제일 웃긴 건 정부가 이 사실을 알면서도 발표를 안 한다는 것이다

음모론이 판을 치는 미국에서 UFO에 관한 은폐설도 한 몫을 하고 있다

하버드 대학의 존 맥이라는 정신과 교수는 외계인에게 납치된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다는 책을 썼다

에모리 대학의 브라운 교수는 원격 투시를 통해 외계인 세력이 멕시코에 거주한다는 책을 썼다

도대체 이런 정신병자들이 대학의 교수로 멀쩡하게 강의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다만 대학 당국은 그들이 종신 교수이고, 학문의 자유를 인정한다는 입장을 취하긴 하지만 그들이 대단한 골치거리임은 분명하다고 한다

브라운의 외계인 이주설을 들으면 영락없는 정신 분열증 환자다

과대 망상의 표본이다

대기 오염으로 화성이 황폐화 되자 다른 은하인의 도움을 받아 지구로 건너 온 화성인은 현재 멕시코 산 속에서 거주하고 있다는 식이다

 

(정신과 인턴을 할 때 환자를 면담했는데, 그녀는 본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교시를 받고 있다고 했다 너무나 멀쩡하게 생기고 너무나 분명하게 얘기를 해서 처음에는 약간 어리둥절 했다 식사는 잘 하냐고 의례적인 질문을 했더니, 화를 내면서 나의 하나님이 밥을 굶으라고 할 만큼 나쁜 분이 아니라고 했다 안 죽을 만큼 잘 먹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얘기나 브라운의 얘기는 질적으로 다를 게 없는데 왜 한 사람은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있고, 한 사람은 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그 얘기책으로 돈방석에 앉았는지 정말 의아하다)

 

설마 브라운 같은 사람이 책을 팔기 위해, 혹은 이름을 얻기 위해 일부러 황당무계한 얘기를 지어낸 건 아닐 것이다

그런 얘기가 받아들여질 만큼 UFO에 관한 사이비 과학이 우리 시대에 널리 퍼진 것이다

식인 풍습이 일반적이라는 믿음도 저자는 사이비 과학으로 보고 있다

특수한 경우를 (이를테면 적의 시신을 먹음으로써 공포감을 조성하거나 전쟁 같은 극한 상황) 제외하고 일상적으로 사람을 잡아 먹는 풍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이런 믿음이 퍼진 것은 선교사들이 전해 들은 이야기를 확인없이 책에 기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인류학자들이 조사해 본 결과 식인 풍습이 일상적인 곳은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반론이 쿠루병인데 광우병이 인간에게 발생한 것으로 파푸아 뉴기니의 원주민들이 죽은 이의 뇌를 먹는 풍습 때문에 걸린다고 알려졌다

이것을 밝힌 영국의 의사는 노벨상을 탔다

당연히 그는 식인 풍습을 지지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이 많다고 한다

저자는 아직 결론이 난 문제가 아니라고 한 발짝 비켜 선다

 

내 입장에서 제일 흥미로웠던 부분은 역시 대체의학이다

소변을 마시는 게 좋다거나 발이 몸의 모든 곳을 관장한다는 식의 믿음은 서양에도 널리 퍼진 모양이다

사내아이의 소변을 받아 마시면 정력에 좋다거나, (채만식의 태평천하에서 읽었다) 더러운 물을 마시느니 차라리 자신의 소변을 마시는 게 낫다는 식의 (홍신자의 수필집에 보면 인도를 여행하는데 물이 너무 더러워 깨끗한 자신의 소변을 마셨다고 한다) 이야기는 웃고 넘어 가더라도, (과학자들은 바다 위에서 표류할 때 조차도 소변을 마시는 건 득보다는 해가 많다고 일축한다) 반사학에 대해서는 쉽게 넘어가기가 어렵다

반사학이라고 이름 붙인 사이비 과학은 우리 식으로 보면 수지침이나 발마사지, 경락, 경혈 이런 식으로 풀이될 수 있을 듯 싶다

사실 나 역시 한의학에 대해 별 신뢰를 못하는데 요즘 신경과에서 IMS나 TPI, 테이핑 요법 등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걸 보면 침에 대한 생각도 바뀌어야 하지 않나 싶었다

흔히 발바닥은 몸의 모든 기와 혈이 모여 있어 장이 안 좋으면 어느 부위를 누르라는 식의 믿음이 꽤 통용되어 왔다

저자는 발의 특정 부위를 누르면 특정 장기에 영향을 끼쳐 치료 효과가 있다는 식의 믿음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한의학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저자의 이 주장은 받아 들이기가 좀 애매하다

그는 대부분의 대체의학들을 아무 실험도 거치지 않은 채, 그저 그럴 것이다는 식의 직관에 의존해 잘못된 믿음을 설파한다고 비판하는데, 적어도 과학적인 절차를 통한 검증이 필요함은 분명한 듯 싶다

 

점성술이나 UFO, 대체 의학 등은 사이비는커녕 다양한 과학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패러다임이 변하면 어떤 것들은 진리가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중요한 건 직관에 의해 이럴 것이다, 하는 식의 주장은 진리가 될 수 없다

어떤 주장이나 논리든지 과학적 방식에 따라 철저하게 검증한 후에서야 비로소 진리인지 아닌지 판명이 될 것이다

막연히 과학은 오류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게 전부는 아니다는 식의 문학적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의 정신 의학계가 프로이드를 상상력 풍부한 과학 문예가 정도로 밖에 평가하지 않는 이유는, 그가 과학적 실험 보다는 지나치게 직관에 의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건 좀 놀라운 일이다 나는 정신과 시간에 프로이드를 제일 첫장에서 배웠다 그의 이론이 이미 낡은 이론으로 변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꿈이 무의식의 욕망을 표출한다는 프로이드의 해석은, 뇌파 분석과 여러 실험들을 통해 별 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예컨데 신경증 환자를 치료하려면 꿈을 해석할 게 아니라, 약물 치료를 하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그의 이론들은 여러 실험을 통해 하나씩 격파되고 있다

20세기 최고의 지식 혁명이라고 평가받는 프로이드조차 냉정한 심판을 받는데, 사이비 과학들이 아무 근거나 논증 과정도 없이 막연히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을 거다는 식으로 검증되지 않은 지식을 팔아 먹는 건 잘못된 일이다

더불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과학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기울여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원리에 대해 정확히 알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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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문명
정수일 지음 / 창비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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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마드 깐수 사건은 한동안 놀라움 그 자체였다

단국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그가 사실은 북한에서 보낸 공작원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한 때 퍽 시끄러웠던 기억이 난다

북한의 대남 간첩 남파는 해가 가도 끊이지 않고 집요하다는 사실에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 그 저자가 출소 후 자신의 학문적 지식을 책을 통해 유감없이 선보이고 있다

그가 작가나 화가 같은 예술가는 아니지만, 자신만의 학문의 세계를 저서를 통해 펼쳐 보이는 걸 보면, 예술가와 그들의 역작은 분리되어 평가할 수 밖에 없는 듯 싶다

 

사실 이슬람 문명에 대해 무척 궁금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특히 9.11 테러 이후 이슬람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어 한동안 서점에 이슬람 관련 책들이 쏟아진 기억이 난다

그런데도 이슬람 하면 부정적이고 보수적이며 호전적인 생각 밖에 안 든다

이슬람 문명에 대한 정확하고 포괄적인 지식에 대한 욕구가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 어느 정도는 해소된 기분이다

물론 제대로 된 이해는 아직도 요원하지만 말이다

 

일단 이 책을 읽고 싶으면 이슬람에 대한 공부를 한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루해서 읽다가 덮게 될지도 모른다

이슬람 문명에 대한 권위있는 전문가이고, 또 교수라는 신분 때문인지 마치 교과서처럼 기술했다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도 첫째, 둘째 이런 식으로 하나 하나 짚어가면서 교과서식으로 나열한다

참고했던 책들도 대학 교제들이 많았다

사실 보다 에세이적이고, 비판적인, 또 분석적인 책을 기대했는데 이건 너무 교과서적이라 잔재미가 부족하다

그렇지만 어떤 책 보다도 이슬람 문명에 대해 전통적이고 학문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객관적이라 할 만 하다

 

이슬람을 이해하는 첫 단계는 이슬람교가 정교합일의 원칙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불교는 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 역시 종교와 정치는 확연히 분리되어 있다

발전된 종교일수록 정교 분리가 분명하다고 알고 있는 나로서는 다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이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도 낯설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이나 이란의 호메이니처럼 종교 최고 지도자가 바로 정치를 지배하는 사람과 동일시 된다

이것이 옳은 일인가, 그른 일인가를 떠나서 그들의 전통이고 교리라고 하면, 문화 상대주의적 입장에서 보면 타 문명인들이 왈가왈부 할 일이 아니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이슬람교의 꾸르안은 (코란의 원어식 발음이라고 한다 꾸란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단어냐고 작가는 한탄한다)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부분만 강조하는 여타 경전과는 다르게, 이슬람인의 모든 생활을 통제한다

정치, 경제, 문화, 도덕, 예술 등등 사회 전반에 걸쳐 이슬람인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가를 가르친다

 

그래서 나온 독특한 제도가 바로 무이자 은행이다

꾸르안은 상업 활동은 장려하나 이자 놀이는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근로 소득이 아니라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슬람인들은 이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 지금도 무이자 은행이 전체의 20% 정도를 차지한다고 한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이슬람인들이 경전의 가르침을 어떻게 지켜 나가야 하는가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라 할 수 있겠다

 

서구인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여성에 대한 억압이다

전 책에 걸쳐 일관되게 이슬람 문명을 옹호하고 있는 저자는 이것 역시 이슬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편견이라는 식으로 말한다

남자들은 정욕이 강하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여성을 보호하고, 남자 역시 죄를 짓지 않게 하기 위해 여성이 바깥으로 나갈 때는 히잡을 쓰도록 한다

이것은 의무 사항이 아니고 다만 보호 차원에서 권유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히잡을 두른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교가 여성들을 억압시킨다는 비난은 거둘 수 없을 것 같다

어떤 종교나 문화든지 근본적인 뜻은 바람직하고 좋다

유교 문화 역시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바깥 출입을 삼가게 하고 집에 가두었다

근본 취지가 좋다고 해서 현실 생활에서 반드시 바람직한 방향으로 작용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아내를 넷까지 둘 수 있다는 교리가 전쟁 때 미망인들을 거두기 위한 여성 보호책의 일종이었다고 말하지만, 근본 취지와는 다르게 여성들의 지위를 남편에게 종속시켰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다

히잡 역시 근본 취지는 사회적 약자인 여성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슬람 여성들을 사회적으로 억압해 왔다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여성에게도 똑같은 권리와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은 어떤 문화나 종교를 막론하고 당연시 되야 할 보편적인 가치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종교가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가, 그 의미에 대해 좀 더 비판적인 관점을 견지할 필요가 있을 듯 하다

 

명예 살인은 여전히 이슬람 사회에서 자주 일어나는데, 이것은 명예, 특히 가족의 명예를 중요시 하는 태도 때문이라고 한다

간통을 한 여자를 남편이 아닌 그녀의 친정 아버지나 오빠, 남동생 등등이 가족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살해를 저지른다

이것은 공공연한 관습으로 쉽게 처벌되지 않는다고 한다

명예 살인이야 말로 (명예라는 말을 붙이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지만) 이슬람 여성 인권의 현주소를 보여 주는 극명한 사례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가 좀 더 보편적인 관점에서 이슬람을 들여다 봤으면 훨씬 더 흥미로운 책이 되지 않았을까, 아쉽다

 

지하드는 서구 사회에서 가장 비난받는 개념이다

흔히 성전이라고 번역하는데 적절한 단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지하드라고 말하는 게 낫다고 한다 (일본 천황을 덴노라고 그대로 부르자는 주장처럼)

지하드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개인의 삶을 신앙에 전력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알려진 것처럼 신앙을 지키기 위해 사회적으로 전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자신의 전력을 기울이는 방법이 반드시 폭력적일 필요는 없다

지하드 자체가 폭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다만 전술로써 전쟁이나 자살 테러 등을 택할 수는 있다고 본다

호전적인 교파에서는 이 지하드를 이슬람의 5대 의무 중 하나로 끼워 넣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지하드는 기본 의무가 아니다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자살 테러 등은 이슬람의 근본 교리를 잘못 해석한 것이라고 저자는 단언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슬람은 절대 호전적이지도 않고 폭력적이지는 더더욱 않다

 

이슬람인이라면 꾸르안의 규정에 따라 6가지를 믿어야 하고, 5가지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알라, 경전, 천사, 예언자, 정명(일종의 숙명 내지는 운명), 말일(최후 심판) 등 여섯 가지를 믿고, 단식(라마돤 한 달 동안), 성지 순례(일생에 한 번 이상), 예배(하루 다섯 번), 믿음(알라와 그의 예언자 무함마드를 믿는다는 고백), 적선(일정 금액을 가난한 이들이나 사원에 희사) 등이다

이슬람인들은 신은 알라 뿐이고, 그가 보낸 예언자 무함마드를 믿는다는 구절을 하루에도 수십 번 반복한다고 한다

꾸르안이라는 말 자체가 읽음이라는 명사인 만큼 그들은 자신의 경전과 믿음을 끊임없이 소리내어 말한다

하루 다섯 번의 예배는 메카를 향해 10분 남짓 시행되는데, 이렇게 바쁜 시대에 그 계율을 어떻게 지키겠냐는 서구인의 비아냥에 이슬람인들은 가볍게 웃으면서 대답한다고 한다

"담배 피울 시간에 하면 되지요"

이슬람인들이 거주하는 중동 지역은 대부분이 사막이라 단식에 들어가면 해 지기 전에는 물 한 방울도 마실 수 없기 때문에 무척 괴로운 일이다

저자는 이 의무를 자기 절제라는 식으로 해석한다

한 달씩이나 해 지기 전까지 음식은 물론 물 한 방울도 마실 수 없고, 한 달 내내 성교나 매매 등도 금지되는데 이러한 훈련을 통해 신에 대한 믿음을 키우고, 욕망을 억제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모든 종교나 문화의 의식들에는 다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걸 되새겨 보면 수긍이 간다

 

정명이라는 개념은 다소 어려운데, 이에 반하는 것이 자유의지이다

인간이 처음부터 신에 의해 운명지워져 있는 존재라면, 세상을 살면서 죄짓는 것도 다 신의 뜻 아니냐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도 자유 의지는 중요한 개념이다

이미 여호와는 인간이 죄지을 것을 알고 있었는데 왜 창조했는가에 대한 의문들이 많다

결국 이것은 자유 의지로 설명된다

신은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느냐, 마느냐는 태어나기 전부터 숙명지어진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살면서 인간의 의지로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슬람교 보다는 기독교가 훨씬 더 운명론, 혹은 예정설을 중요시 한다

흔히 알려진 칼뱅의 예정설만 봐도 이미 구원은 태어나기 전부터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그저 열심히 자기 일만 하면서 살면 된다고 했다

 

이슬람에 대한 여러 가지 설명들 중 역시 가장 마음에 든 부분은 마지막 결론이었다

저자는 요즘 유행하는 문명 충돌론을 거부한다

원래 문명이란 이질적인 것들이 만나 교류를 통해 더 나은 것으로 발전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금의 현실은 충돌이 아니라 교류 과정에서 나오는 사소한 부작용에 불과하다고 본다

흔히 우리 나라는 이슬람과 별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극동에 위치한 은둔의 나라 코리아도 오래 전부터 이슬람과 교류를 해 왔다

이미 이슬람 지리서에는 신라가 황금이 많은 이상향으로 묘사되고, 그 위치까지 지도에 나온다

고려 시대에는 이슬람인을 우대한 몽고에 의해 교역이 활발했고,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많은 이슬람인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고 한다

덕수 장씨나 경주 설씨는 대표적인 회회인들이다

이처럼 고래로부터 아무리 멀리 떨어진 문명이라 할지라도 서로 교류하면서 발전해 왔다

이제 와서 새삼 문명의 충돌 운운하면서 위기인 것처럼 떠들어 대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태도라고 일축한다

문명이란 본시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기 마련이라고 저자는 문명 진화론을 적극 옹호한다

그러므로 우리도 13억 인구를 아우르고 있는 이슬람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갖고 정확한 지식을 얻자고 한다

원활한 문명의 교류를 위해서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확실히 우리가 (혹은 내가) 서구 중심 문화에 젖어 있음을 알게 됐다

우리가 서구 문화권에 살기 때문에 60억 인구가 모두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세계화는 곧 서구화라고 믿은 것이다

산업 혁명 이후 서구 문명이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세계의 1/5을 담당하는 이슬람 문명 역시 중요한 축이라는 걸 간과했다

또 반드시 서구 문명이 가장 선진화 됐고, 가장 이상적이라는 식의 잠재의식도 버려야 할 것 같다

저자의 말처럼 여러 문명이 서로 교류하는 과정에서 보다 이상적인 문명으로 진화한다는 열린 사고를 가져야 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낯선 문화에 대한 편견을 어느 정도 벗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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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주의한 사랑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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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라는 작가 이름 때문에 그녀의 소설을 한 번쯤 읽어 보고 싶었는데, 이 책이 눈에 들어아 집어 들었다

"부주의한 사랑" 다소 도발적인 제목이지 않는가?

왠지 모르게 유부남과 얽힌 이야기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역시 예감이 맞긴 한데, 아이러니컬 하게도 절대 이런 부주의한 사랑은 안 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작가가 독자에게 원하는 건 이런 결론이 아니었을 것 같지만...

 

배수아는 90년대 감각적 이미지의 글쓰기를 대표하는 작가로 불린다

그 명성에 걸맞게 평론에서도 언급한 것이지만, 읽는다기 보다는 보는 느낌이 드는 소설을 쓴다

책 말미의 평론에서는 그녀의 소설을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에 비유했다

사실 이런 글쓰기는 잘 읽혀지지 않는다

소설이란 감각적인 부분이 중요하다 할지라도 그 기본틀은 서사 구조가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으로서는, 영화의 시놉시스 같은 그녀의 소설이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200페이지에 불과한 짧은 소설인데도 문장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 꽤 오래 읽었다

특히 주인공 연연의 나쁜 피가 섞인 태생적 한계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은 다소 억지스러워 보이고, 툭툭 끊어지는 전개 때문에 읽기 힘들었다

 

중국 이름 같은 연연은 역시 중국 이름 같은 어머니 모령의 불행한 사생아로 태어난다

이 소설의 배경이 6.25 직후 50년대이기 때문에 등장 인물들은 아주 가난한고 불행하다

무지막지한 남편에게 시집 간 모령은 평생을 남편과 전처 아이들과 본인이 낳은 자식들 뒷바라지에 허리가 휘도록 일한다

그나마 남편이 죽은지 몇년 후에 낳게 된 연연 때문에 일자리마저 잃게 된다

연연은 모령의 이복 동생인 미령에게 보내진다

모령은 40이 넘은 출산 때문에 그 후 죽었는지, 살았는지 행방이 묘연해진다

 

미령은 60년대에 미대를 나온 인텔리 여성이었으나 여섯 살이나 어린 남자와의 결혼으로 불행해졌다고 믿는 여자다

미령의 남편은 젊고 잘 생긴 물리 선생인데 역시 그의 친구들이 학위를 받고 대학에 남게 되지만 신입생 때 미령을 만나 학업을 포기하고 학교 선생이 된 남자다

미령과 그녀의 남편은 계속되는 출산 때문에 가난해진다

그럼에도 미령의 남편은 자기 생활에 비관하지 않고 가정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애쓴다

반면 미령은 자신보다 여섯 살이 어린 남편이 남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을 질투하고, 여러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어 뒤치닥꺼리를 해야 하는 가난한 삶을 증오한다

미령은 늘 현실에서 반쯤 발을 뗀 채 살아간다

결국 그녀는 우울증과 강박증에 시달리다 불행하게 죽고 만다

 

이 집에는 이미 모령의 다른 딸이 식모 비슷하게 키워지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 역시 연연인데 무척 아름답지만 학교를 다니지 않는 백치미가 있는 여자로 그려진다

아내의 조카이지만 마을 사람들은 잘 생기고 젊은 주인 남자와 내연의 관계라고 의심한다

아내가 죽은 날, 어이없게도 연연 역시 뒷산에서 정원용 도끼가 가슴에 꽂힌 채 시체로 발견된다

미령의 남편이 내연의 관계였다는 마을 사람들의 증언에 의해 용의자로 잡혀가고, 이 소설의 주인공 어린 연연은 양부모에게 입양된다

 

여기까지가 연연의 태생적 한계를 보여주는 어린 시절 이야기다

소설의 화자는 연연 자신인데, 그녀의 무의식 속에 자리잡은 태어난 배경에 대해 독자에게 들려준다

말하자면 그녀는 나쁜 피가 흐르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일까, 연연은 유부남과 사랑을 나누게 된다

그것도 사귀던 남자의 사촌과 동거를 한다

사귀던 남자애의 이름은 "운"인데 그의 사촌 "택"은 "운"이 사촌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연연도 "사촌"이라고 호칭한다

연연이 사랑하는 남자의 공식 명칭은, 그래서 사촌이 된다

 

사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렇고 그런 통속 소설의 범주에서 벗어나질 않는다

그런데 내가 전율을 느낀 까닭은 부주의한 사랑을 택한 연연의 삶이 어떤 식으로 망가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탓이다

사촌과 사귀기 전까지만 해도 연연은 집도 있고, 직장도 있고, 양부모로부터 매달 생활비도 받아 경제적으로 전혀 어렵지 않는 여자였다

그녀가 처음에 사귄 "운"은 재경부의 공무원으로 둘이 결혼하면 괜찮은 중산층이 될 운명이었다

나쁜 피가 섞인 태생적 한계와는 전혀 상관없이 말이다

 

그런데 "운"의 사촌이 나타나면서 모든 것이 꼬이기 시작한다

쌍둥이 아기가 있는 사촌은 아내가 임신 중임에도 불구하고 연연과 동거에 들어간다

사업을 하는 사촌은 연연에게 더욱 부유한 삶을 제공한다

연연은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직장에 더 불성실해지고 가족으로부터도 계속 멀어진다

입양됐기 때문에 가족으로 남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연연은 "부주의한 사랑"을 택한 것에 대해 전혀 변명하지 않는다

결국 나쁜 피는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가족으로부터 배척당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미 두 아이가 있던 사촌은 아내가 세 번째 아이를 낳자 8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간다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겠다는 뻔뻔한 말을 남긴 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연은 사촌을 사랑했던 날들을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촌이 자신을 망쳤다는 가족들의 비난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는 홀로 남은 집에서 사촌을 기다리지만, 기다림에 지친다거나 그를 원망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사촌을 사랑했던 날들은 그저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촌을 사랑한 댓가는 너무나 끔찍하다

다만 그녀가 자신이 이렇게 된 것과 사촌은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뿐...

 

직장을 잃고,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았으며, 그 모든 책임을 져야 할 사촌 역시 떠나버린 뒤 연연은 생계를 위해 중국집의 웨이트리스로 취직을 한다

양아버지의 지원이 끊겼기 때문에 겨울 내내 난방도 못하고 며칠을 굶기까지 한다

서서히 보이지 않게 몰락한 그녀의 삶을 보면서 섬뜩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일반적인 통속 소설의 주인공들은 유부남과의 "부주의한 사랑"이 끝난 후에도 이런 식으로 비참해지지 않는다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라는 소설에서 주인공 강진희는 유부남과 사귄 것이 문제되어 대학 교수 자리에서 밀려 나지만, 조금도 비참해지지 않고 평론가로써 예전과 다름 없는 수준의 삶을 영위한다

사회적인 지탄은 받을지언정, 그것 때문에 여주인공의 삶이 피폐해진다거나 가난해지는 건 어떤 소설에서도 본 일이 없다

그런데 배수아는 부주의한 댓가가 어떤 것인지 아주 사실적으로 그려 준다

아마도 작가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겠지만...

 

한 때 사귀었던 "운"은 뇌물 사건에 연루되어 파면된 후 며칠을 방황하다가 연연의 집에 나타난다

사촌과의 동거 때문에 잘 나가던 고위 공무원 남자 친구를 잃었던 연연은 주변의 안타까움과는 달리 (그 남자를 잡았어야 한다는 식의...) "운"에 대한 미련을 두지 않는다

연연이 현명했던 것일까?

사람이든 상황이든 늘 변하기 마련이라는 걸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잘 나가던 고위 공무원 "운"은 파면된 후 결국 연연과의 하룻밤을 마지막으로 그녀의 집 앞 강에 몸을 던지고 만다

자신에게 주어진 어처구니 없는 사회적 몰락을 이겨낼 만큼 강하지 않았던 것이다

 

작가가 결코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이 소설은 부주의한 사랑의 댓가를 너무나 분명하고 사실적으로 보여 준다

만약 연연이 조금 더 자제력이 있고, 현실적이었다면, 그래서 무책임한 유부남 따위는 사랑하지 않았다면,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지도 않았을 것이고 경제적으로도 몰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경린의 소설 "내 생에 꼭 한 번 뿐인 특별한 날"을 읽을 때만 해도 여주인공 미흔은, 부주의한 사랑 후에도 여전히 매력적으로 그려진다

이혼은 했지만, 또 사랑하던 남자가 가 버렸지만 그녀는 자기 삶을 꿋꿋이 잘 살아 나가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배수아 소설 속의 연연은 냉정하게 말하면 유부남으로부터 농락당한 꼴 밖에 되지 않는다

소설에서 흔히 묘사된 것과는 다르게, 유부남이었던 사촌은 한 때의 사랑보다 가족을 택한 것이다

그는 일반적인 통속 소설에서처럼 가족을 버리는 대신, 현실에서처럼 주인공을 버린다

그리고 주인공은 사회적으로 몰락해 간다

 

웃기는 결론일 수도 있지만, 책을 덮으면서 인생은 신중하게 건너야 하는 외나무 다리라는 생각을 했다

사랑은 좀 더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부주의한 사랑"의 댓가가 얼마나 끔찍하고 견디기 힘든 일인지에 대한 예화들은 주위에 널려 있다

우리는 생각만큼 강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겨울에 난방을 할 수 없고, 제 때에 식사를 하지 못하면, 금새 비참해지고 초라해질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잊고 지내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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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메를 고쳐매며
이문열 지음 / 문이당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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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은 껄끄러운 작가다

그의 문학적 위상이 이제는 현실 정치판에까지 미쳐 (한나라당 공천 심사 위원으로 위촉될 정도) 대표적인 보수 논객으로 수많은 분열과 논쟁을 일으키고 있다

작가의 정치적 발언은 누가 됐든지, 그 작품을 사랑하는 독자로서는 부담되는 일이다

작품과 작가를 완벽하게 분리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니까

홍위병 발언이라든지, 반페미니스트적인 논쟁 등으로 칼럼 등에 실리는 그의 발언들을 편하게 대하기 어렵지만, 역시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보여주는 산문집이다

 

이문열은 글을 참 잘 쓰는 작가다

또 그 작품에 깊이가 있으며 한국을 대표하는 현대 작가라는 걸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수려한 그의 문장들을 읽으면서 문장 자체에 감동할 때가 참 많았다

특히 중편 정도의 분량 밖에 안 되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금방 읽는 게 아까워 한 자 한 자 정성들여 읽었던 기억도 있다

"영웅 일기"라든가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혹은 그의 여러 단편들을 읽으면서 읽는 재미에 푹 빠지곤 했다

"선택"도 반페미니스트적이고 가부장적인 사고 방식으로 논란이 많은 작품이지만 앞부분의 몇몇 구절만 빼면 재밌는 소설이었다고 기억된다

특히 사라져 가는 우리 문화에 대한 (주로 가부장적이고 조상 숭배 얘기지만) 안타까움은 여러 단편들을 통해 잘 그려져 읽을 때마다 마음이 찡하곤 하다

 

이번 그의 산문집은 주로 칼럼에 기고한 얘기들로 구성됐다

현실적인 정치 얘기도 많고 (주로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당선자에 대한 비판들) 경박한 인터넷 문화에 대한 비판도 많으며, 반미 감정에 대해서도 어이없어 한다

미국이 물러나면 안보는 어찌 할 것이냐는 식의 전형적인 보수 논리가 주를 이룬다

내 생각과는 다른 부분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감동적으로 글을 읽은 것은 미려하고 아름다운 문장들, 또 문학에 대한 깊은 애정, 그의 풍부한 학식 덕인 것 같다

나는 늘 고전을 읽지 않는 것에 대해 약간의 죄책감을 갖고 있는데, 이문열처럼 고전을 열심히 읽고 감동하는 사람을 보면 기가 죽는다

요즘은 세상에 읽어야 할 책들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내 수준에 맞는 책이나 부지런히 읽고, 훌륭한 고전은 직업적으로 읽어야 할 작가들에게나 맡기자는 심정으로 조금 편해지긴 했다

어쨌든 그의 독서 노트 부분을 보면서 다시금 고개가 숙여진다

직업적인 작가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 정도 수준의 책들은 읽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역시 제일 감동적인 글은 산문집의 제목처럼 "신들메를 고쳐매며"라는 부분이었다

처음에 제목만 보고 무슨 내용인지 이해가 안 갔는데, 무척 감동스런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

이제 그의 나이는 60을 바라보고 있다

괴테나 톨스토이 등은 말년에 "파우스트"나 "부활" 같은 대작들을 썼지만, 그건 아주 특별한 천재들의 예외라는 것이다

자신이 천재가 아님을 고려하면 글쓰기 수명은 대부분의 직장인들처럼 65세가 정년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고, 그렇다면 글을 쓸 수 있는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자각해야 한다

다작하는 작가라고 알려졌지만,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거장들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임도 알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제는 남은 기간 동안 필생의 역작을 쓰는데 온 역량을 쏟아 부어야 할 때라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이제 햇빛이 얼마 남지 않았고 가야 할 길은 아직 멀다

그 동안 문학 밖의 여러 난잡했던 일들은 잊어 버리고 (보수와 진보 논쟁에 휩싸였던 일) 신들메를 고쳐매고 부지런히 남은 길을 해가 떨어지기 전에 가야 할 때라고 말한다

노년을 바라보는 작가의 결연한 다짐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그가 정말 여러 복잡한 논쟁들로부터 벗어나 자신을 문학사에 길이 남게 해 줄 위대한 작품을 쓰게 되길 바란다

여전히 마지막 다짐 후에도 사회 현상에 대한 자신의 보수적인 시각을 드러내는 일과 젊은이들을 훈계하길 게을리 하지 않으나, 어찌 됐든 다른 무엇보다 자신의 말처럼 이제는 문학에만 전념하여 고전으로 남을 소설을 쓰게 되길 바란다

작가도 퍽이나 분노하고 괘씸하게 여긴 책 장례식 같은 사건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음 좋겠다

그들의 취지는 이해하나 소설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어리석은 대중의 무지를 보여 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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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낯설게 읽기
기호학연대 엮음 / 문경(문학과경계)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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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미리 밝혀 둘 것은 아주 어려운 책이다

평범한 교양서를 읽는 수준의 나 정도 독자는 꽤나 헤맬 것이다

기호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어렵고 도상적이며 이론적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 소재가 대중 문화이기 때문에 선뜻 집어든 책인데, 절대 쉽게 읽히지 않는다

화려하게 저자들의 약력을 기술해 놓은 것만 봐도 슬쩍 기가 죽는다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꼼꼼하게 다 읽은 건 아니다

어려워서 이해가 안 가는 부분들도 있었고, 지나치게 이론화 되어 실제적인 의미가 퇴색된 것 같다는 반발심이 드는 부분도 있었다

다만 책을 읽은 이상 어느 정도의 감상은 있게 마련이라 몇 자 짤막하게 적는다

 

누구나 흔히 알고 있는 것이지만, 광고는 늘 대중을 속인다

정우성과 고소영이 나오는 삼성 카드 광고에 사용된 소품들이 얼마나 비싼 것인가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정우성이 타는 벤츠 자전거가 소형 자동차 한 대 값이라니, 다른 건 말 안 해도 알 만 하다

정우성은 대표적인 보보스 족으로 그려지는데 광고 기획 당시 월 300만원 정도는 저축이나 일상 생활에 상관없이 순수하게 레저 비용에만 쏟아 부을 수 있는 경제력을 가진 사람으로 설정했다고 한다

한 달에 300만원을 버는 사람도 시청자들의 다수가 아닌 마당에 순수 레저 비용으로 쓸 사람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 카드를 쓰면 당신도 정우성처럼 멋지게 보일 수 있다고 광고는 부추긴다

 

대한민국 1%가 타는 차라고 광고하는 렉스턴을 당신이 타면 바로 그 1%에 낄 수 있다고 속삭인다

광고는 끊임없이 당신을 강조한다

그저 수많은 익명의 소비자 중 한 명에 불과한 나를 콕 집어 "당신"이라고 명칭하면서 마치 한 개인을 위해 준비한 상품인 듯 선전한다

자본주의 경제를 대표하는 광고들의 본질을 파헤치는 건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 같다

 

취화선에 대한 비판도 상당 부분 동의한다

저자는 절대 취화선을 깍아 내리려는 게 아니라고 강조하지만, 임권택 감독의 작품에 대해 할 말이 많은 건 분명하다

뭐, 그만큼 거장의 작품이기 때문에 이야기할 꺼리가 많은 것이기도 하겠지

취화선은 한국의 미를 세계에 알린 작품으로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까지 받았음에도 우리 관객에게 왜 외면당했는지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베를린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오아시스"가 흥행에 성공한 것과는 반대로 수상 소식이 알려져도 취화선은 여전히 관객들로부터 외면받았다

저자는 한국의 미를 알리기 위해 지나치게 영상에 집착한 나머지, 정작 배우들의 연기나 전체적인 서사 구조가 영상미에 묻혀 버렸다고 평한다

취화선은 예술가의 삶을 너무나 정형화 시키고 속된 말로 뻔한 이야기 이상의 의미를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영화를 안 봐서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사실 이런 느낌 때문에 안 보기도 했다

"서편제"에 대한 마광수의 비판에 상당 부분 동의했기 때문에 취화선 역시 끌리지가 않았다

 

마광수가 한참 문필을 날릴 때 (즐거운 사라로 연대에서 해직되기 이전)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영화일 뿐더러 엽기적이기까지 하다고 비판했다

딸의 득음을 위해 아버지가 딸의 눈을 멀게 하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발상이냐는 것이다

눈이 멀어야 득음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데, 본인이 선택하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가 딸에게 장님이 될 것을 강요한다는 게 얼마나 어이없냐고 한탄한다

사실 나도 이 부분이 무척 마음에 안 들었는데, 나름대로 이름있는 교수가 비판하니까 대리 만족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신창원에 대한 언론의 부추김도 기호학적 의미로 설명된다

신창원을 이슈화 시키고 의적으로 둔갑시킨 것도 언론이고, 또 그 현상을 비판하는 것도 역시 언론이다

사실 언론의 이런 자극적이고 모순적인 행태는 (이슈를 만들고, 다시 그것을 비판함으로써 기사를 만들어 내는 행위) 스포츠 신문 등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유력 일간지라 해도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여러 예를 통해 보여 준다

미군 병사들이 이라크인들에게 구호품을 나눠 주는 사진을 실으면 독자들은 은연 중에 전쟁의 당위에 대해 동의하게 되고, 반대로 집을 잃고 헤매는 아이들의 사진을 실으면 반감을 품게 된다

즉 언론이 어떤 사건과 사진을 택하고, 어떤 식으로 기술하느냐에 따라 여론의 행방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대중들이 특정 집단에 끌려 갈 만큼 어리석은 것은 절대 아니라는 말도 빼 먹지 않는다

대중들은 설득 당하는 것 같으면서도, 나름대로의 취사 선택을 통해 원하는 문화를 양산한다고 한다

대중에게 선택받은 것들은 (밀리언 셀러 음반이라든가, 베스트 셀러가 되는 책들, 혹은 수백만이 본 영화 등등) 대중의 정서와 기호에 적합하기 때문에 선택받은 것이다

대중과 언론은 (혹은 지배층은) 끊임없는 상호 작용을 통해 지배적인 문화와 이념을 형성해 간다고 한다

확실히 인터넷 등을 통해 대중은 문화를 창출해 내고 있다

광고가 판을 치고 갈수록 언론의 힘이 세지는 21세기에 숨은 의미까지 간파하는 똑똑한 소비자 내지는 독자가 되기는 무척 어려운 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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