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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양반가여성의 생애와 풍속
김미란 지음 / 평민사 / 2016년 7월
평점 :
품절
전에 읽었던 책 같은데 제목이 너무 흥미로워 또 빌렸다.
그 때는 좀 지루하다 느꼈었는데 다시 읽으니 생각할꺼리도 많고 재밌다.
양반가 여성들이 죽은 후 남자 형제나 아버지가 쓴 제문이나 묘비명을 통해 당시 사대부 여성들의 삶을 추적해 보는 글이다.
의외로 여성들 역시 이름이 다 있었다고 한다.
공적인 생활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름을 특별히 남길 기회가 없었고 여성 개인의 삶 보다는 아내과 어머니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족보에도 이름 대신 누구의 처로 기재되었을 뿐이다.
특히 전통적으로 이름을 부르는 것을 꺼려하다 보니 더욱 불릴 기회가 없고 신사임당처럼 호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 같다.
유아 사망률이 워낙 높은 때이고 평균 혼인 연령이 16세였기 때문에 자녀 출산이 아주 많았다.
그 아이들이 다 커서 어른이 됐으면 금방 인구가 넘쳐났을텐데 많이 태어난 만큼 많이 죽었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는 시조로 유명한 남구만의 경우 형제가 열 셋이었는데 그 중 자신과 여동생 한 명만 살아 남았고 이 경우가 특별하지도 않다.
먹고 사는데 별 문제가 없었을 양반가에서도 이렇게 많이 죽었다는 게 참 안타깝다.
예방접종과 항생제가 없었던 시절이니 돌 전에 많이 사망했을 것이다.
왜 돌잔치를 했는지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여성들 역시 어린 나이에 출산하면서 죽는 경우가 많았다.
가문승계의식이 높을 때라 남성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재혼, 삼혼을 해야 했고 양반가의 여자들도 재취 자리로 가는 게 전혀 흠이 아니었다고 한다.
신분사회였던 만큼 노비들의 규모도 엄청났다.
생산성은 오직 토지에서 사람의 노동을 통해 얻던 시절이라 많은 인력을 거느려야 했다.
남자는 열심히 공부해 관직에 진출하고 여자는 노비들을 데리고 농사를 지으면서 재산을 증식했다.
왕자들은 노비의 규모가 만 단위였고 이름있는 신하들은 천 단위, 지방의 평범한 사대부도 50에서 100명은 거느렸다고 하니 과연 신분제 사회였다는 게 실감이 난다.
봉제사 접빈객이 매우 중요한 사교활동이었던 만큼 이것을 준비해야 하는 안주인의 노력도 대단했다.
기본적으로 조선 사회는 검약과 청렴을 중시하는 생산성이 낮은 사회였기 때문에 세도가라고 해서 요즘 생각처럼 재물이 넘쳐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대식구를 이끌고 집안 경제를 책임졌을 양반가 여성들의 고된 삶이 느껴진다.
<오류>
17p
장이순: 장유의 딸, 효종비인 인선왕후의 어머니
-> 인선왕후의 어머니는 김상용의 딸이고, 장이순은 아마도 언니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