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의 시대 탐미의 발견 이지은의 오브제 문화사 1
이지은 지음 / 모요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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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나왔던 책인데 개정판으로 다시 나온 모양이다.

처음으로 오브제 아트라는 것을 알게 해 준 책, 사진이 많아 무척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책이 두꺼워 시간이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사진이 1/3은 차지하고 글 수준도 평이해서 쉽게 잘 읽힌다.

루이 14세 시대부터 나폴레옹 시대까지 프랑스 가구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조용준씨가 쓴 도자기 책에 이어 가구도 그림처럼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유럽 박물관에 가면 공예관에서 오래 머물렀던 것 같기도 하다.

회화와는 달리 예술가의 이름은 잘 모르지만, 눈부신 공예품들에 마음을 뺏기고 한참을 봤었다.

책에 나온 저자의 말대로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 평생에 걸쳐 갈고 닦은 실력으로 제작한 가구들이니, 과연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숭배될 만하다.

공예품은 특히나 나라의 부유함과 관련이 있지 않나 싶다.

루이 14세 시대부터 루이 16세에 이르기까지 혁명으로 왕정이 망해버릴 정도로 왕실의 사치는 대단했지만, 그런 화려한 문화가 가능했던 것도 그만큼 부유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조선의 사대부 문화가 검약을 강조했던 것과 달리 중상주의를 추구했던 프랑스에서는 화려함이 미덕이었고 그것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국력이 있어 우아하고 사치스러운 로코코 문화가 만개했던 것이다.



<오류>

120p

프롱드의 난을 뒤에서 조종한 야심만만한 콩데 왕자(앙리 4세의 종질)은 수시로 루이 14세를 감시했고

-> 콩데 왕자는 루이 2세 드 콩데인데, 앙리 4세의 종질, 즉 당조카는 그의 아버지인 앙리 2세 콩데이다. 루이 2세는 앙리 4세의 조카가 아니라 손자뻘, 즉 재종손이다.

282p

루이 15세는 유모 마담 방타두르와 삼촌 오를레앙 공을 제외하면 고아나 다름없는 유년기를 보냈다.

-> 오를레앙 공은 루이 15세의 삼촌이 아니라 재종조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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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예술로 보는 이탈리아 기행 - 세계 인문 기행 2 세계인문기행 2
다나카 치세코 지음, 정선이 옮김 / 예담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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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독특한 컨셉의 기행문이다.

이 시리즈가 참 마음에 들어 하나씩 읽어 보고 있다.

필자가 다 다른데 어쩜 이렇게 다 재밌는지.

사진 몇 장과 적당히 2차 자료를 가공해서 가벼운 감상을 섞어서 출판하는 기행문들과는 질적으로 다르고 독자에게 많은 생각할 꺼리를 준다는 점에서 아주 마음에 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진!

책에 실린 사진들이 이탈리아의 구석구석을 너무나 매력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다.

어쩜 이렇게 도판의 인쇄 질이 좋을까, 전문 사진 작가가 찍지 않았나 싶다.

제목이 다소 진부한 게 아쉽다.

좀더 매력적인 제목으로 재출간 한다면 훨씬 많이 읽힐텐데 아쉽다.


이 책의 저자는 일본의 영화 평론가인 모양이다.

영화를 주제로 돌아보는 이탈리아 여행기이다.

역자 서문대로 적당히 2차 자료를 가공해서 쓴 글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그 지역을 순례하면서 얻은 현지 감각과 문화적 지식이 이탈리아 영화라는 매개체와 어우러진 매우 개성있고 독특한 기행문이다.

영화는 큰 관심이 없고 더군다나 1950,60년대 영화들이라 내용도 전혀 몰라서 단번이 와 닿지는 않았다.

열심히 인터넷 검색해 가면서 읽다 보니 이탈리아라는 나라가 단지 박제된 고대 문화 유적 도시나 명품 소비지가 아닌, 살아있는 우리 시대의 이웃으로 느껴졌다.

갑자기 영화를 보고 싶은 충동이 막 느껴진다.

가장 인상적인 사람은 저자가 영화 평론가의 길을 가게 된 계기가 됐던 파솔리니 감독이다.

무늬만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뼛속까지 공산주의자인 게 문제였을까?

정권 투쟁에 골몰하다 결국은 파시스트와 다를 바 없어진 권력자들과는 다르게, 신념으로서의 진짜 공산주의를 추구한 듯한 그는 너무나 뜻밖에도 집시 소년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좌파 이념이 결국은 타인을 배제하고 다양성을 몰살시키며 하층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변질되어 파시즘과 비슷해져 버린다는 모순을 깨달은 지식인은 어디에도 설 자리가 없는 것 같다.


오랜 자치 전통의 역사 때문인지 이탈리아 각 지역 사람들의 고향 사랑이 대단하다.

서울공화국에 살고 있는 한국의 지역주의와는 아주 다른 느낌이다.

너무 지나쳐 북부 이탈리아 분리 동맹 당까지 생겼지만 말이다.

아, 정말 매력적인 나라 이탈리아.

로마 시대 유적지나 르네상스 미술품이 다가 아니었다.

코로나 때문에 여행 취소된 게 정말 아쉽다.


<오류>

167p

만테냐의 <최후의 만찬> 프레스코화를 수복중인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 등과는 달리

-> 만테냐가 아니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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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양반가여성의 생애와 풍속
김미란 지음 / 평민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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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전에 읽었던 책 같은데 제목이 너무 흥미로워 또 빌렸다.

그 때는 좀 지루하다 느꼈었는데 다시 읽으니 생각할꺼리도 많고 재밌다.

양반가 여성들이 죽은 후 남자 형제나 아버지가 쓴 제문이나 묘비명을 통해 당시 사대부 여성들의 삶을 추적해 보는 글이다.

의외로 여성들 역시 이름이 다 있었다고 한다.

공적인 생활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름을 특별히 남길 기회가 없었고 여성 개인의 삶 보다는 아내과 어머니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족보에도 이름 대신 누구의 처로 기재되었을 뿐이다.

특히 전통적으로 이름을 부르는 것을 꺼려하다 보니 더욱 불릴 기회가 없고 신사임당처럼 호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 같다.

유아 사망률이 워낙 높은 때이고 평균 혼인 연령이 16세였기 때문에 자녀 출산이 아주 많았다.

그 아이들이 다 커서 어른이 됐으면 금방 인구가 넘쳐났을텐데 많이 태어난 만큼 많이 죽었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는 시조로 유명한 남구만의 경우 형제가 열 셋이었는데 그 중 자신과 여동생 한 명만 살아 남았고 이 경우가 특별하지도 않다.

먹고 사는데 별 문제가 없었을 양반가에서도 이렇게 많이 죽었다는 게 참 안타깝다.

예방접종과 항생제가 없었던 시절이니 돌 전에 많이 사망했을 것이다.

왜 돌잔치를 했는지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여성들 역시 어린 나이에 출산하면서 죽는 경우가 많았다.

가문승계의식이 높을 때라 남성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재혼, 삼혼을 해야 했고 양반가의 여자들도 재취 자리로 가는 게 전혀 흠이 아니었다고 한다.

신분사회였던 만큼 노비들의 규모도 엄청났다.

생산성은 오직 토지에서 사람의 노동을 통해 얻던 시절이라 많은 인력을 거느려야 했다.

남자는 열심히 공부해 관직에 진출하고 여자는 노비들을 데리고 농사를 지으면서 재산을 증식했다.

왕자들은 노비의 규모가 만 단위였고 이름있는 신하들은 천 단위, 지방의 평범한 사대부도 50에서 100명은 거느렸다고 하니 과연 신분제 사회였다는 게 실감이 난다.

봉제사 접빈객이 매우 중요한 사교활동이었던 만큼 이것을 준비해야 하는 안주인의 노력도 대단했다.

기본적으로 조선 사회는 검약과 청렴을 중시하는 생산성이 낮은 사회였기 때문에 세도가라고 해서 요즘 생각처럼 재물이 넘쳐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대식구를 이끌고 집안 경제를 책임졌을 양반가 여성들의 고된 삶이 느껴진다.



<오류>

17p

장이순: 장유의 딸, 효종비인 인선왕후의 어머니

-> 인선왕후의 어머니는 김상용의 딸이고, 장이순은 아마도 언니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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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살인사건 - 검안을 통해 본 조선의 일상사
김호 지음 / 휴머니스트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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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야지 생각만 하다가 드디어 읽게 된 책이다.

제목부터 흥미롭고 저자가 19세기에 남아있는 검시 기록들을 꼼꼼하게 분석해 읽기 쉽게 풀어놓았다.

네이버에 연재된 글이라 그런지 비교적 접근하기 쉬운 느낌이다.

더 오래 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은 것 같고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벌어진 살인사건들이다.

대한제국 시기면 근대 국가 같은데 사건 기록들을 보면 여전히 전통사회의 연속이라는 느낌이 든다.

상민들은 양반들의 횡포에 시달렸고 이들이 서로 힘을 합쳐 자활조직을 만들었지만 그것이 또 주변인들에게는 새로운 폭력 집단이 된다.

사회에서 억압받는 남자들은 가정 내에서 가족인 여성을 폭행하고 시어머니가 되면 며느리를 학대한다.

단편적인 사건들이지만 전근대 사회는 사적 폭력이 상당히 일상화 됐다는 느낌이 든다.

말단 지방에까지 행정관을 파견하는 중앙집권국가였으나 시대적 한계상 세세하게 주민들의 일상을 법으로만 통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상당 부분은 마을 자치에 맡겼던 것 같기도 하다.

지방관이 지방민과 유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임기를 짧게 했던 조선왕조의 고충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사적 복수의 허용도 전근대 사회의 특징 같다.

마치 프랑스에서 국왕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결투를 통해 시비를 가렸던 것처럼 조선 역시 성리학적 명분론에 근거하여 자신과 가족의 명예를 훼손한 이를 향해 사적 복수를 감행하고 이것이 또 법에 저촉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찬양하는 분위기였다는 게 신기하다.

오늘날과 매우 다른 개념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아무리 억울하고 화가 나더라도 피해를 입힌 사람을, 심지어 살인자라 할지라도 사적으로는 절대 폭력을 가할 수 없는데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인권의식이나 개인의 존엄성 같은 가치들도 시간이 흐르면서 발달해 온 것 같다.

처음부터 당연하게 있었던 게 아니고 오랜 시간에 걸쳐 우리가 쟁취한 진보적 가치관들인 것이다.

확실히 전근대인들은 현대인과는 다른 사고체계를 가진 사람들이고 오늘날의 관점에서 당대를 판단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걸 새삼 깨달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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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으로 읽는 동아시아 삼국지 2 - 한중일 동아시아史를 한 바늘로 꿰어낸 신개념 역사서 옆으로 읽는 동아시아 삼국지 2
이희진 지음 / 동아시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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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보다 두꺼워 걱정했는데 역사 이야기라 술술 잘 읽힌다.

다만 한중일 세 나라의 역사를 한꺼번에 서술하려다 보니 많은 정보를 압축한 부분이 있고, 특히 일본사는 내가 잘 모르는 분야라 읽기가 좀 어려웠다.

일본사는 좀더 공부가 필요할 듯 하다.

처음에는 한중일 역사를 같이 다룬다고 해서 기획이 신선하다 생각했는데 의외로 이 세 나라가 각자의 길을 간 느낌이 든다.

신라 통일 무렵과 임진왜란 정도가 좀 엮이는 것 같고 그 외에는 서로 크게 상관하지 않고 지냈던 것 같다.

중국과 한국도 조공외교라는 대외적 관계에서만 접촉을 할 뿐 큰 내정간섭 없이 발전했던 듯하다.

그래서 결국 중국 역사 따로 한국 역사 따로 일본 역사 따로 독립된 이야기들을 병렬식으로 모아 놓은 느낌이다.

일본 역사를 굉장히 건조하게 사건들만 늘어놓았는데 맨 마지막 페이지에서 일본의 메이지 유신은 신화에 불과하다는 결론이 생뚱맞다.

일본도 많은 시행착오 끝에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해 제국주의 대열에 합류했겠지만 객관적 실체와 그 배경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느닷없이 제국주의의 환상을 깨달으라는 일갈이 황당하게 느껴진다.



<오류>

118p

희종의 조카인 완안양이 희종을 살해하고 황제에 올랐다. 그는 나중에 폐위되었기 때문에 해릉왕이라 불린다.

-> 해릉왕은 희종의 조카가 아니라 사촌형제이다.

278p

경태제는 원래 황태자였던 정통제의 아들 주견준(朱見浚)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아들인 주견제를 황태자로 책봉했다.

-> 한자가 잘못됐다. 朱見濬 이다.

313p

태종의 외손자 남이 등

-> 남이는 태종의 외손자가 아니라 외증조부이다.

즉, 남이의 할머니 정선공주가 태종의 딸이다.

434p

이때 옹립된 주유승은 홍광제로 불린다.

-> 주유승이 아니라 주유숭이다.

435p

버마까지 추격한 오삼계 군대에게 홍광제가 죽고

-> 버마까지 오삼계가 추격해서 죽인 이는 홍광제가 아니라 남명의 마지막 황제인 영력제이다.

453p

1939년 임칙서를 보내 아편을 단속하게 했다.

-> 1939년이 아니라 1839년이다.

500p

이하전 같이 代 수도 맞고 인물도 출중한 왕위 계승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안동 김씨 세도정치를 이어가기 위해 방계인 데다 정치 경험도 없는 철종을 무리하게 즉위시킨 것이 근본적인 문제였다.

-> 헌종 사후 철종이 즉위한 것은 안동 김씨가 세도정치를 위해 무리하게 즉위시킨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살아있는 왕손 중에서 헌종과 혈연관계가 가장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하전은 도정궁, 즉 덕흥대원군의 사손으로 당시 왕실과는 실제적인 혈연관계가 전혀 없었다.

훗날 철종을 이어 즉위한 고종 역시 당시 왕실로서는 가장 가까운 혈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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