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5분, 뇌력 낭비 없애는 루틴 - 적게 일해도 폭발적 성과를 내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인풋 80가지
가바사와 시온 지음, 신찬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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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볍고 읽기 편하게 편집은 잘 되어 있는데 역시나...

내용은 참 없다.

특별한 내용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자기계발서의 특징은 제목을 참 잘 짓는다는 것, 그런데 제목이 전부인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다.

일본의 정신과 의사가 썼다는데, 일본 자기계발서 특유의 조잡함(?)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좀 민망했다.

간단히 말해서 인풋만 있으면 안 되고 아웃풋을 하기 위해 노력해라가 이 책의 주제이다.

독서의 경우 인풋은 책을 읽는 것이고 아웃풋은 글쓰기, 발표 같은 행위일 것이다.

책을 열 권 읽는 것보다 세 권 읽고 리뷰 세 편 쓰는 게 더 낫다는 말.

당연한 말이긴 하다.

자기 것으로 소화시키지 않으면 읽은 보람이 없다.

리뷰 쓰는 것고 좋고 다른 사람에게 강의를 해 보는 것도 좋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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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영 밖으로 달아난 한양 수비군 - 훈국등록 고전탐독 12
윤진영 외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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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판형에 귀여운 표지가 인상적인 책으로, 짧지만 내용이 알차다.

훈련도감의 일지를 바탕으로 조선 후기 도성 군영의 모습을 여러 학자들이 재구성 했다.

우리도 서양처럼 미시사적 접근이 활발해지는 것 같아 역사책 읽기가 아주 재밌다.

양란을 거치고 효종은 북벌을 준비하면서 훈련도감의 인원을 5000명까지 늘렸다.

이들은 군역을 지는 농민병이 아니라 급료를 받는 직업군인이었다.

그런데 처우가 열악해 모집이 어려워 결원이 생기면 의무적으로 지방에서 뽑아 올리는 승호제도를 시행했다.

승호군에 뽑히면 장기 복무해야 하므로 가족이 전부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면 자급자족 시대이니 먹고 살 수는 있으나, 전답을 팔고 상경하면 당장 잘 곳도 없고 적은 급료로 살아가야 하니 승호를 기피했던 풍속이 이해된다.

당시에도 서울 집값은 대단히 비싸서 시골에서 상경한 군인들의 거주지가 없어 항상 문제였다.

요즘 같은 관사 개념으로 숙식처를 제공하기에는 조선 조정의 재정이 빠듯했던 모양이다.

기왕에 포수와 같은 정예병을 키우는 제도이니 급료를 많이 주고 훌륭한 인재들을 유치하면 좋았을 것을, 오죽이나 대우가 형편없으면 강제로 지방에서 착출했을까 싶다.

조선 후기는 양란 이후 큰 무력 충돌이 없었기 때문에 훈련도감의 한양 수비군들은 축성 같은 공사판에 동원됐다.

훈련도감에 소속된 장인들이 수공업 제품을 만들어 팔기도 하고 세곡선을 운송하는 가외일을 통해 재정을 충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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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수일기 - 200년 전 암행어사가 밟은 5천리 평안도 길 규장각 대우 새로 읽는 우리 고전 9
박래겸 지음, 오수창 옮김 / 아카넷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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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저자가 번역한 서수일기를 먼저 읽고, 새로운 해석인가 싶어 일부러 신간 신청을 하고 읽게 됐다.

특별히 얻은 내용이 많지는 않아서 그저 그렇다.

책의 주인공 박내겸은 국왕을 근시에서 모시는 엘리트 관원으로 나온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처음 접한 걸 보면, 우리가 이름을 알고 있는 인물들은 당대의 대단한 고위 관료들이었나 보다.

평안도나 함경도 같은 북방 지역에서는 과거 급제자도 적고, 설사 급제한다 할지라도 고위직으로 갈 수 있는 이조정랑 같은 좋은 벼슬자리를 내주지 않아 대부분 하위직에 머물고 말았다고 한다.

조선을 세운 사람이 함경도의 무인 이성계인데 완전히 문치주의 나라로 바뀐 점이 흥미롭다.

평안도는 청나라 사신이 왕래하는 곳이고 호란 이후 방어를 철저히 하느라 재정이 아주 풍부했다고 한다.

평안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고 한다.

사신을 따라가는 공무역이나 밀무역도 지리적 특성상 잦았을 것이고 상업 자본이 모여 경제적으로는 풍족했으나 중앙 정계로의 진출이 어려워 홍경래의 난 같은 자체 모순이 터져 나왔다고 설명한다.

지방 차별은 비단 왕건의 훈요십조에서만 나온 정책은 아닌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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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중국사 진.한 - 최초의 중화제국 하버드 중국사
마크 에드워드 루이스 지음, 김우영 옮김 / 너머북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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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중국사 마지막 권을 읽었다.

제일 나중에 번역된 게 가장 초기인 진한 시대이다.

다른 책들도 참 재밌게 읽었지만 이 책도 곳곳에 표시를 많이 해 뒀다.

다만 뒷부분의 문예나 종교 편은 솔직히 지루했다.

원래 글 쓰는 스타일이 이런 건가, 아니면 번역의 문제인가, 그것도 아니면 내 독해 능력의 문제인가.

뒷부분이 잘 안 넘어가서 지루하게 읽었다.

정치 경제 부분은 흥미롭다.

서양에서 발간되는 역사책들은 군주 중심의 일회성 에피소드 보다는 사회의 제도에 대한 설명이 많아 입체적으로 한 시대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1. 이민족과 중화 제국의 관계

북방 유목민들로부터 한족의 땅을 지키는 과정에서 중화라는 개념이 완성되고 중화제국이라는 통일된 정치체가 형성되었다.

타자를 통해 정체성이 확립된다고 할까.

유목민들 역시 중국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흉노 같은 이민족 나라를 세웠다는 점은 마찬가지이다.

중국에서 사여하는 공물을 부족들에게 얼마나 배분하느냐로 유목민 수장의 권위가 결정됐기 때문에 끊임없이 이들은 약탈을 자행했고 나중에는 내지로 들어와 변경을 지키는 수비군이 됐다.

이 부분이 사실 제일 흥미로웠다.

막연하게 중국은 농민이 곧 군인인 줄 알았다.

그런데 진한 시대에 중국은 전민개병제를 포기했고 농민은 군역을 세금으로 대신했고 실제 전투를 하는 군인은 이민족들이 맡았다.

마치 로마의 국경을 지키던 게르만족들처럼 말이다.

이들은 당연히 중국 황제나 관리보다는 부대를 이끄는 직속 상관, 부족의 우두머리에 충성했다.

서진이 망한 뒤 5호 16국 시대가 그냥 온 것이 아니라 이런 이민족들이 군벌로 성장했기 때문에 가능한 시대였던 셈이다.

동한 이후 삼국지 시대의 혼란도 지방의 감찰관이었던 자사가 군사를 모집할 수 있는 권한을 획득한 후 그 지역의 군벌이 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중화제국의 가장 큰 적인 흉노는 기병이었기 때문에 농민들의 일시적인 군사 훈련으로는 전투를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웠다.

또 농민들의 군사 훈련은 지방 반란의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한나라는 국경을 투항해 오는 이민족들에게 맡기게 된다.


2. 진시황릉과 같은 거대한 건축물은 형도, 즉 범죄자들의 노역으로 이루어졌다.

이 부분도 참 흥미롭고 신기했다.

농민들의 요역이나 노예 노동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 범죄에 의한 강제 노역형으로 시행됐다고 한다.

마치 러시아가 시베리아를 범죄자들의 추방으로 개발시켰던 것처럼 중국에서도 거대한 건축물 공사 현장에 범죄자들을 투입했고 변경 지대로 강제 이주했으며 군대에 편입시켰다.

국가의 부의 원천인 농사를 지어야 할 농민들을 요역에 자주 동원할 수 없었고, 노비 역시 개인의 큰 재산이었기 때문에 주로 가내 노동, 즉 귀족의 개인적인 서비스업에 종사했고, 광산을 개발한다거나 황릉이나 궁전을 짓는 것 같은 엄청난 역사는 범죄자들을 투입했다.

노역형을 받는 범죄자가 그렇게도 많았을까.

하루 평균 1~6명 꼴로 사망자가 나왔을 정도로 건설 현장은 열악했으나 그 정도의 희생은 감수할 만 하다고 여겼다고 한다.


3. 황제의 발명

동양의 정치체제는 막연히 전제정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얼마 전에 읽은 로마의 공화정과 비교해 볼 때 매우 독특하고 특징적으로 황제라는 절대 군주를 중심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를 형성했다.

한나라 후기로 갈수록 어린 황제들이 외척이나 환관들에게 좌지우지 되는데 이것도 황제라는 절대 권력자로부터 얼마나 사적으로 가까이 위치하는냐에 따라 권력의 점유가 결정되는 탓이다.

어지러운 세상을 통일하려 했던 조조도 마지막까지 제위에 오르지 못하고 정통성의 원천인 헌제를 끌고 다녔다.

유목민의 황제는 여러 족장들 중 일인자였기 때문에 영토를 넓히고 부족원들에게 약탈품을 분배함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 보여야 했고 그렇지 못할 경우 곧 교체됐기 때문에 한 사람의 절대 권력 아래 복종하고 있던 전제정의 중국과 조약을 맺어도 곧잘 위반되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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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와 그리스도교 - 그리스도교는 어떻게 로마를 정복했는가? His+STORY 그리스도교의 역사 1
김덕수 지음 / 홍성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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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디자인이 참 예쁘고 보기 편하게 편집되었다.

같이 실린 명화들은 흑백이고 너무 작아 차라리 빼는 게 나을 뻔했다.

기독교가 어떻게 로마의 국교가 됐느냐에 대한 고찰이기도 하지만 역으로 기독교의 로마화이기도 한다.

다신교 전통이 강했던 로마가 유일신 사상이 기독교로 바뀌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비성경적인 요소들, 이를테면 성인숭배나 마리아 공경 등과 같은 풍속들이 유입되었다.

2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종교이고 보면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해 정화된 개신교보다는 교리적으로 좀더 빈틈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기독교가 국교화 된 후 로마가 오히려 멸망해 버리자 당시 사람들의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축복하는 나라인데 오히려 이민족들에게 망해 버리다니.

저자는 아우구스투스의 <신국론>이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쓰여졌다고 본다.

하나님의 나라인 신국과 지상의 나라 로마는 서로 별개라는 것이다.

마치 유대인들이 제대로 신앙 생활을 하지 않아 나라가 멸망하고 디아스포라에 처해졌으니 더욱 열심히 믿어야 한다는 논리의 변형 같다.

현실과 교리상의 모순을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했다면 오늘날까지 보편적인 종교로 계승되지 못했을 것이다.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로마가 멸망했으나 오히려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기독교는 유럽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북방 이민족이 중국을 점령한 후 오히려 한화가 되버린 경우와 비슷할까?

여러 민족을 하나로 통합하는데 기독교가 중요한 정신적 기둥 역할을 잘 수행해 낸 것이다.

로마는 왜 멸망했는가에 대한 에드워드 기번의 대답은, 제국이 커지면서 많은 문제들이 생겼는데 기독교를 국교화 함으로써 상무 정신을 잃어버리고 세속적인 에너지를 종교에 돌려버려 그 모순점들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오늘날 종교 광신주의자나 중동의 이슬람 국가들을 생각해 보면 일리있는 지적 같기도 하다.

서구가 근대화에 성공한 것도 종교로부터 독립하여 세속적인 방향으로 선회했기 때문일 것이다.

주제는 기독교지만 전체적으로 로마사를 훑어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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