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과 이브의 모든 것
스티븐 그린블랫 지음, 정영목 옮김 / 까치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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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 지상주의, 혹은 근본주의 기독교를 공격하는 책은 주로 리처드 도킨스 같은 과학자들이 쓰는 줄 알았는데, 이 책의 저자는 인문학 교수인 것 같다.

진화론에 입각한 책인 줄 알고 읽었는데, 창조의 기원, 즉 창세기의 주인공 아담과 이브가 실존 인물이 될 수 없음을 역사적으로 논증하고 있다.

번역자 정영목씨의 번역본들이 아주 매끄럽게 잘 쓰여 있어 무척 기대가 컸지만, 원서 자체의 문체가 난해한지 한 눈에 읽히지 않아 다소 어려웠다.

다른 리뷰에는 번역이 아주 훌륭하다고 하는데 문학적인 표현이 많아서 그런가 나로서는 가독성이 많이 떨어져 아쉽다.

너무 꾸미는 문학적 문장이 많아 명료하지가 않다.

전체적인 내용은 공감하는 바가 아주 컸다.

내가 여전히 기독교에 관심이 있고 또 무신론 혹은 진화론에 대한 확고한 증거를 열심히 찾고 있는 것은 순전히 근본주의자인 엄마 때문이다.

엄마는 인격적으로 매우 존경스럽고 사회 생활과 가정 생활 모두를 훌륭하게 해내는 내 롤모델 같은 분인데 문제는 그 굳건한 자존감의 근원이 기독교적 근본주의에 있다는 사실이다.

신이 있는가, 이런 거창하고 근원적인 질문에는 확고하게 답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적어도 이 책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아담과 이브가 인간의 기원이 아님은 확실히 알고 있다.

근본주의자들은 문자 그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진화를 여전히 가설에 불과하다고 폄훼한다.

그런데 이런 성경의 모순에 대해서는 진화에 대한 과학적 증거를 갖고 있는 현대인들만 지적한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서구인들도 지적하고 고민해 왔음을 알게 됐다.

진화라는 엄청난 비밀을 모른다 해도 문자 그대로 성경을 해석하자면 너무나 많은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

필연적으로 성경은 알레고리, 즉 우화로써 읽힐 수 밖에 없지만, 그럴 경우 종교적 믿음이 흔들리게 되므로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초기 교부들은 강력하게 창세기의 문구를 방어하고, 아담과 이브의 원죄가 우리에게 전해 왔다고 설파했다.

<아담 이전 사람들>을 저술한 17세기의 이삭 라 페이레르에 따르면 아담의 자녀들은 누구와 결혼했단 말인가?

그들은 근친상간으로 번성했는가?

카인이 아벨을 죽이고 도망갔을 때 다른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 할까 봐 두려워 했다는데 그들은 또 누구란 말인가?

인류 이전의 공룡 화석은 또 뭐란 말인가?

지구의 나이가 6600년이라고 지금도 믿고 있는 근본주의자들이 창조론을 과학 시간에 함께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진리라고 믿었어야 했던 당시 지식인들의 고뇌가 얼마나 컸을까 싶다.

아담과 이브는 유대인의 조상일 뿐이라는 게 라 페이레르의 결론이다.

문자 그대로의 창세기를 믿지 않으면 진정한 믿음이 아니라는 교회의 논리에 맞서 신앙과 과학의 조화는 결국 성경이 알레고리임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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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미술사 이야기
박용숙 지음 / 예경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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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나 교수의 <20세기 한국 미술> 읽다가 뒷편 날개에 소개됐길래 같이 읽게 됐다.

요즘 나온 책들은 책날개 홍보가 별로 없는 것 같은데, 나에게는 유용한 책 선택지 중 하나다.

현대 미술은 참 어렵고 직관적으로 공감하기가 힘들다.

그래도 팝 아트나 색면회화 정도까지는 색채가 주는 감정의 고양을 경험할 수 있어 그럭저럭 감상할 수 있는데, 설치미술, 특히 비디오 아트나 대지미술, 아르테 포베라 여기로 넘어가면 평론가들의 설명에 전혀 공감이 안 된다.

말을 위한 현학적인 말장난 느낌이 강하게 들어 거부감이 생긴다.

과연 작가들은 평론가들의 철학적이고 난해한 사고방식을 거쳐 작품을 만들었을까?

이 책에서도 모더니즘의 바탕이 되는 인문학, 혹은 사유의 중요성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 한다.

그러고 보면 동양의 전통적인 수묵화는 현대미술처럼 수단이 아닌 목적, 즉 기운생동이라는 정신의 표현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통하는 면이 있는 것 같긴 하다.

형상을 똑같이 그려내는 사실주의가 아닌, 마음에 품은 정신을 표현하는 것, 김정희가 말한 "문자향 서권기" 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서구의 모더니즘이 곧 동양철학이냐, 그것은 아닌 것 같다.

저자는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가 동양의 선 정신을 표현함으로써 동서양 융합을 추구했다고 하는데, 얼마 전에 읽은 김영나 교수의 책에서는 오히려 백남준은 동양적인 것에 규정받지 않으려고 애썼고, 선덕여왕이니 이순신이니 하는 우리 위인들을 주제로 작품을 만든 것은, 한국의 컬렉터들을 위한 맞춤 제작이었다고 했다.

이 의견에 더 공감이 간다.

저자의 해석들이 당위적이고 표면적이라는 의심이 드는 부분이 많았다.

1) <맹견도>를 김홍도 작품으로 추정하던데 다른 책에서는 서양화 영향을 받은 청나라 화가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김홍도가 정조의 명으로 일본에 건너가 시찰을 하고 사진을 찍듯 여러 그림을 남겼다는 상상의 나래가 첫 장부터 펼쳐져 신뢰도가 떨어졌다.

2)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이나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을 두고 서양은 화가들이 직접 정치 일선에 나가 몸으로 체험을 하고 그림을 그렸지만 일제 시대 우리 화가들은 시대정신이 부족했다는 비판이 있다.

서양화가 처음 들어온 상황에서 배우기도 힘들었을텐데 화가에게 시대 참여가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 과연 작품에 반드시 시대적 상황을 녹여 내야 하는지 의문이다.

더구나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은 정치 선전물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니 적당한 예가 안 되는 것 같다.

고희동의 자화상에 대해서도 시민적 자아를 흉내내고 있다고 비난하는데 작가 정신이 부족하다는 뜻일까?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 외국 화풍을 모방하는데 그친 부분에 대해 비판하고 그 밑에 깔린 인문정신을 강조했다.

일제 시대는 서양화가 막 소개되어 일본으로 유학을 갔던 시절이라 일본 화가들도 서구에서 배워온 것을 다시 조선인들에게 전수하는 시대였으니 따라하기도 바빴을 것 같긴 하다.

그렇지만 당시 화가들을 작가정신 혹은 시대정신이 부족한, 인문학적 사유가 결여됐다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


책의 특장점은 선명하고 많은 도판들이다.

미술 전문 출판사라 그런지 2003년에 나온 책인데도 도판 상태가 너무 좋다.

올 컬러이고 인쇄가 아주 잘 돼서 크기가 작은 게 아쉽긴 하지만 감상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고, 본문에 나온 그림들도 거의 다 실려 있어 보기 좋았다.

현학적인 미술 이론들에 공감이 좀 안 되긴 했지만 한국 현대 미술을 전반적으로 훑어 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오류>

401p

작품 <한국 여성사>에서는 회화가 아니라 사진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광고판처럼 꾸민 거대한 설치물 속에 확대된 명성황후의 사진이 걸려 있다.

-> 사진 속 여인은 명성황후가 아니라 그 며느리인 순정효황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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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
석영중 지음 / 예담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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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독의 폐해인가 읽은 책인 줄 몰랐다.

읽고 싶은 책은 많고 정리할 시간이 부족해서 그런지 시간이 좀 지나면 까마득하게 잊어 버리는 것 같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면 전에 읽었구나, 하고 알아차리게 되는 장면들이 있다.

기시감이 드는 장면들.

고골의 탐식과 절제 사이의 괴로움에 대한 부분이 그랬다.

많이 먹는 것은 기독교에서 7대 죄악으로 규정하고 있을 정도라 끊임없이 죄책감을 불러 일으키지만,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이고 보면, 또 전통사회에서 배고픔은 너무나 흔한 생존의 문제였으니 공동체를 유지함에 있어 절제는 필수적인 덕목이었을 것 같다.

자원이 적기 때문에 무한정으로 욕구를 채워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이 종교의 금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먹을 것을 멀리 하지만 본능을 억압하기 때문에 더 강렬하게 욕구가 솟아오른다.

다이어트 하는 여자들이 폭식하는 거랑 비슷한 심리 상태 같다.

러시아 문학은 거의 읽어 보지 않았지만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은 충분히 공감이 갔다.

잉여인간, 반복되는 삶의 범속성, 음식을 매개로 하는 금욕과 절제, 빵에 투영되는 민족의식, 러시아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의 대립.

하여튼 너무 재밌다.

유튜브에서 강연하는 걸 우연히 들었는데 글만 잘 쓰는 게 아니라 전달 능력도 아주 좋으신 분이었다.

<닥터 지바고>에 대한 해석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영화를 감명깊게 보고 야심차게 책에 도전했는데, 정말 너무너무 지루하고 개연성이 없고 지바고라는 인물이 이해가 안 가서 억지로 완독했던 기억이 난다.

영화는 라라와 유리의 사랑 이야기 같은데 소설에서 사랑은 매우 작은 일회적 에피소드에 불과하고 지바고라는 인물이 러시아 혁명이라는 시대적 파도에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서사도 아니고 시로 보여주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여느 주인공처럼 괴로워하거나 대의명분을 가지고 맞서 싸우는 것도 아니고 이도저도 못하는 고뇌하고 무능력한 지식인처럼 답답하기만 했다.

그런데 저자의 해석을 읽어 보니, 반복되는 우연성은 비평가들로부터 소설의 약점이라 지적받은 부분이라 했고, 작가가 추구하는 인간상은 거대한 역사라는 배경에서 개인성의 회복을 찾으려는 모습이라고 한다.

얼마 전에 본 <패왕별희>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중국에 공산당이 들어서고 문화혁명이라는 엄혹한 시기를 거치면서 점차 파괴되어 가는 한 인간의 삶, 통속 영화 같으면 민족과 이념을 위해 개인사를 버리고 독립 운동에 나서야 할텐데, 이 영화는 파괴되어 가는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췄다.

그런데 참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공산주의 혁명은 전통 사회의 부가 일부 상류층에 편중되어 있어 인민들이 굶주리기 때문에 그 부를 공평하게 나줘 주겠다는 명분으로 성공했다.

그럼에도 왜 여전히 끔찍한 기아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일까?

중국만 대약진 운동으로 아사자가 많았는 줄 알았는데, 소련도 1920년대 엄청난 기아에 시달렸다고 한다.

수년 사이에 죽은 이들이 2000만이라고 하니, 대국이라 재난의 스케일도 참 크다.

부를 독식하는 봉건사회의 지배자들을 다 처단했는데도 왜 이렇게 많은 인민들이 굶어 죽는 것인가?

일당 독재는 또 어떤가?

인민을 사랑하는 착한 독재자는 괜찮은 것인가?

마지막 챕터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동물적 욕구만 남은 본능적인 인간과 존엄성을 가진 인간의 차이가 무엇인지에 대해 잘 묘사한다.

아무리 생존의 위협이 있는 극단적인 상황에 몰린다 해도 인간은 마지막 자존심을 지킬 수 있고 그것이 짐승과 인간의 차이를 가르고 존엄성을 지키게 된다는 주제 의식을 잘 보여준다.

나도 무척이나 인상깊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보통 책에 소개된 소설을 읽지 않으면 내용이 지루해지기 마련인데 저자는 맛깔스럽게 참 잘 풀어낸다.

400 페이지 남짓 되는 책이지만 술술 잘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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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서 24시간 살아보기 - 2000년 전 로마인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생활 밀착형 문화사 고대 문명에서 24시간 살아보기
필립 마티작 지음, 이정민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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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 사회의 일상을 시간대 별로 소설처럼 그려낸 책이다.

이집트 편에 이어서 읽었는데 한번에 확 들어오지 않아 약간 지루했다.

풍자시나 전기류 등 로마인들의 저작을 참조해서 쓴 글이라 2천년 전 사람들의 실제 모습을 그려보는 데 도움이 됐다.

동양인이라 그런지 이런 서구 역사책을 읽을 때는 항상 비교를 하게 된다.

우리 문화와 어떻게 다른가,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목욕 문화이다.

검투사 같은 끔찍한 놀이 문화도 그렇고 확실히 서양은 육체에 대해 상당히 오픈됐던 것 같다.

로마 시대에 공중 목욕탕이 가능했다면 상하수도 시설이 그만큼 완벽했다는 뜻인데 왜 중세 때는 사라졌을까?

단순히 기술의 후퇴인지 아니면 기독교 영향인지 궁금하다.

2천 년 전에 수도 공급이 가능할 정도로 엄청난 기술을 가진 곳이지만 여전히 노예의 존재가 값싼 노동력으로 기계를 대신하게 만든다.

이런 걸 보면 아무리 발전했다 해도 고대 사회의 한계가 있는 것 같다.

책에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경기장을 짓는데 기계 대신 일자리를 얻으려는 평민들을 고용해야 한다는 에피소드가 소개된다.

어제 읽은 <건축사의 대사건들>에서는 아우구스투스가 그렇게 말했다고 나온다.

서양사의 이런저런 에피소드들도 역사적 사실이기 보다는 유명인의 이름에 빗대 만든 경구들인 모양이다.

노예제가 있었지만 해방노예라는 존재가 한반도의 노비제와 비교된다.

한 번 노예는 대대손손 영원히 노예는 아니었던 것 같다.

노예제는 확실히 사회의 발전을 정체시키는 고대적 제도다.

조선 말까지 노비제가 존속했던 것도 기계보다 인력이 훨씬 비용이 적게 들고, 그만큼 생산성이 낮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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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사의 대사건들 - 피라미드에서 에펠탑까지, 한 권으로 읽는 이야기 건축사
우르술라 무쉘러 지음, 김수은 옮김 / 열대림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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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사에 길이 남을 건축물들에 대한 이야기.

이집트의 피라미드부터 시작해 20세기 브라질의 새로운 수도 건설에 이르기까지 전 시대에 걸친 유명 건축물들이 소개된다.

중세까지는 재밌게 읽었는데 근대로 넘어오면서 너무 자세한 건축 에피소드들이 많아 다소 지루했다.

서구 사회에서는 많이 알려진 일반적인 이야기일 것 같은데, 동양인에게는 유럽의 현대 건축사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다 알기가 어려워 배경지식 부족으로 시간이 꽤 걸렸다.

그렇지만 단순히 건물이 아니라 그것이 건축되기까지의 복잡한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니 좀더 실제적으로 다가온다.

오늘날 역사에 길이 남은 유명한 건물들도 세워질 당시로서는 많은 논쟁이 있었던 듯하다.

유명한 에펠탑 뿐 아니라. 독일공작연맹이 미스 반 데어 로에 등을 중심으로 지은 슈투트가르트의 바이센호프 주택단지, 르 코르뷔비지에의 국제 연맹궁 (설계안만 당선됐을 뿐 짓지도못했다), 오스카 니마이어의 브라질리아 도시 계획 등 다양한 현대 건축사 뒷얘기가 나온다.

밀라노나 피사의 대성당,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 등도 건축 과정에서 많은 논란이 있어 규모가 크기도 했지만 100년 이상 오래 걸린 이유가 다 있었다.

맨 첫 장에서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단순히 노예 노동이 아니라 사실은 2만 여의 기술자들이 동원된 건축 사업이었다는 관점이 인상적이다.

쿠푸의 대피라미드가 지금으로부터 무려 5천여 년 전에 세워진 것이니 로마 시대 같은 거대한 노예 집단이 있지도 않았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최첨단 건축 기술이 동원된 일이라 전문 기술자들이 참여했고 농번기에 농민들이 단순 작업에 동원되기도 했다.

신왕국 시대, 왕들의 계곡이라는 분묘군 옆에는 아예 기술자들의 집단 거주지가 따로 있었고 이들이 도굴의 범인꾼으로 변하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이렇게 큰 건축물들이 없어서 그런가 웅장한 건물을 지으려고 하는 사회적 욕구가 흥미롭게 다가온다.

큰 건물을 짓는데 들어가는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생각하면 그만큰 한국의 전통사회는 빈곤했던 것인지 궁금하다.

건축가들은 건축물을 통해 자신의 예술성과 독창성을 드러내고 싶고, 건축주는 반대로 자신의 명예와 야심을 표현하고 싶고 또 재정적인 문제에도 봉착하게 된다.

건축주가 건축가의 재능을 인정하고 후원해 준다면 좀 낫겠지만 프리드리히 2세나 루트비히 1세처럼 딜레탕트적인 수준의 건축적 열정을 가지고 있으면 건축가는 더욱 고통을 받게 된다.

화가에게 이렇게 그려라 저렇게 그려라 훈수를 두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 되버리는 것이다.

오죽하면 19세기 바이에른의 건축가 레오 폰 클렌체가 루트비히 1세의 끔찍한 간섭에 대해 회고록을 남겼을까.

엄청난 돈이 들고 여러 사람이 협력해야 한다는 점에서 건축가는 순전히 예술가로만 분류하기는 어러운 것 같다.

그래서 중세에도 성당 하나를 지으려면 수백 년이 걸렸던 모양이다.

돈도 돈이지만 건축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온전한 자율권이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 위대한 미켈란젤로도 성 베드로 성당 건축을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오류>

98p

아우구스투스는 조카딸 율리아가 지은 사치스럽고 화려한 시골 별장을 그런 이유로 허물어 버렸고

-> 아우구스투스의 조카딸은 누나 옥타비아의 딸인 안토니아고, 율리아는 그의 딸이다.

109p

유대 왕국의 국가적 구심점이며 민족동맹을 상징하는 오래된 성소, 즉 법괘가 모셔진 장소였다.

-> 법괘가 아니라 법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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