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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터 - 자연의 역사를 읽는 사람들
랜스 그란데 지음, 김새남 옮김, 이정모 감수 / 소소의책 / 2019년 4월
평점 :
어려운 내용일까 봐 걱정했는데 과학책이라기 보다는 에세이로 분류해야 할 것 같다.
지난 번에 읽은 <완전히 새로운 공룡의 역사>는 공룡학자가 된 저자의 개인사와 공룡에 대한 최신 연구 소견이 합해져 정말 흥미롭게 읽었는데, 이 책은 거의 전적으로 시카고 자연사박물관의 큐레이터에 관한 수필집이라 과학적인 내용이 없어 아쉽다.
큐레이터, 특히 저자처럼 연구 큐레이터가 어떤 일을 하는지 궁금한 사람이라면 흥미로울 것 같다.
딱히 과학적 소견도 없는데 서울시립과학 관장인 이정모씨의 감수는 왜 필요한 건지 모르겠다.
박물관 직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 많아 흥미롭긴 한데 학구적인 사진들은 아니라 아쉽다.
표지에 나온 저 우람한 공룡은 티 렉스인데 발견자의 이름을 따 수라고 불린다.
얼마나 유명한 공룡인지 당시 대통령인 클린턴까지 관람하고 갔다.
미국에는 상업적인 화석 발굴 회사들이 있는 모양이다.
지난 번 공룡책에서도 학자인 저자가 이들을 비판했던 글이 생각난다.
얼마나 화석 발굴이 일반화 됐으면 학자가 아닌 사업가들이 뛰어들었을까.
대중들의 과학에 대한 관심이 놀랍고, 땅이 넓고 투자할 여력이 많다 보니 미국은 참 별 사업이 다 있구나 싶다.
티 렉스를 발굴한 회사는 20개월에 걸쳐 이것을 암석에서 분리하는 고된 작업을 했으나 사유지에 무단 침입한 게 드러나 결국 이 거대한 화석은 땅주인 소유가 되어 경매에 부쳐졌다.
무려 800만 달러가 넘는 가격에 시카고 박물관이 낙찰을 받아 저렇게 멋진 전시품으로 탄생하게 됐다.
이 복잡한 과정이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상식적으로는 아무리 소유권이 땅 주인에게 있다고 해도 발굴하는데만 2년여가 걸린 엄청난 작업을 한 사람은 보상은 커녕 감옥에 들어갔다는 게 희안하다.
공룡 화석이 백 억에 가까운 금액으로 거래될 정도이니 과연 쥬라기 공원 같은 영화가 나올 만 하다.
확실히 미국은 과학의 나라인 것 같다.
과학에 관한 대중들의 관심도 놀랍고 국가의 투자도 굉장한 듯하다.
그런데도 한 쪽에서는 창조론을 교과서에 수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참 재밌는 나라다.
저자도 마지막 장에서 미국의 과학 문맹이 심각함을 걱정하고 있다.
사실 이 책에서 제일 마음에 든 부분이 바로 마지막 장이다.
과학자라면 누구나 저자처럼 종교가 과학의 영역을 침범해 진실을 가리우고 있음을 걱정할 것이다.
진화란 자연에서 일관성 있게 발견되는 패턴을 설명하기 위한 가장 합리적인 이론이라는 말에 정말 공감이 간다.
과학자들은 보통 동료 집단에게 인정받기 위해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고 학술 지원금을 따내는 것에 총력을 기울인다.
학계는 전문 연구가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곳이므로 오늘날 미국 과학계의 수준은 세계적이나 불행히도 대중과 공유하지 못하고 있음을 저자는 안타까워 하고 있다.
비단 과학계가 아니어도 내가 관심갖고 있는 역사학계에서도 비슷한 얘기를 읽었었다.
민족주의에 기반한 유사역사학이 판을 치는데도 학자들은 대중서 출간이 실적에 전혀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학문적 이미지에 손상이 가므로 기피한다는 것이다.
엘리트와 대중간의 간극차는 비단 학계 뿐 아니라 정치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전문가들의 연구 성과를 어떻게 대중에게 잘 전달할 것인가, 대중을 어떻게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갈 것인가가 참 중요한 시대인 것 같다.
전문가의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는 시대가 아닌 "대중사회"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큐레이터들은 아주 중요하고 적절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박물관에서 전시를 하면 대중들의 관심을 환기시킬 수 있고 교육적인 효과가 높아진다.
나를 봐도 별 관심없는 주제였다가 우연히 전시회에 다녀온 후 호기심이 생겨 책을 읽게 되는 경우가 많다.
어려서는 누구나 자연 환경에 호기심을 갖고 있고 성인이 된 후 잠시 잊었다가도 전시회를 다녀오면 곧 호기심이 되살아 날 수 있다면서 대중과의 소통을 강조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자연사 박물관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할 정도라니, 그 수준이 정말 대단한 것 같다.
흥미로운 것은 테뉴어라는 정년 보장제이다.
지금은 한국도 정식 교수 되기가 어렵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학교에 취업을 하면 정년 보장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 왔는데 미국은 이 테뉴어가 대단히 얻기 힘든 자격인 모양이다.
저런 치열한 경쟁이 있기에 발전하는 것 같다.
노동자 계층에서 태어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경영학 대학을 다니던 저자가 어느날 선물받은 고대 어류 암석에 대한 호기심으로 갑자기 고생물학자가 된 사연이 재밌다.
같이 일한 양서류 분과의 큐레이터가 뱀에게 물린 후 가볍게 생각하고 병원에 안 갔는데, 물린지 28시간 만에 내출혈로 사망한 이야기가 나와 안타까웠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한 연예인의 애견에 물린 여자도 파상풍으로 사망했었다.
맹독이 이렇게 무서운 모양이다.
저자가 관리자가 된 후 수익을 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미국 박물관은 한국처럼 세금으로 운영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좋은 인재를 유치하여 명성이 있는 연구를 하려면 많은 돈이 필요하고 자본주의의 나라답게 관람객을 모아 수익을 내기 위해 노력한다.
표지의 멋진 티 렉스도 시카고 박물관의 대표적인 전시품이 되어 관람객들을 불러 들이고 있다.
큐레이터가 단순히 전시에만 머물지 않고 직접 전세계를 다니면서 발굴을 하고, 논문을 써서 학회에 발표하고, 대학원생들을 가르치는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다.
대학 교수와 같은 수준의 지식을 갖고 있고 그만한 대우를 받는 셈이니 이 박물관의 질적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 짐작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