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수일기 - 126일간의 평안도 암행어사 기록
박래겸 지음, 조남권.박동욱 옮김 / 푸른역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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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에 못 미치는 책이다.

옛 사람의 일기를 토대로 당시 사회상을 분석하는 책을 원했는데 이 책은 정말 한글로 번역만 해서 아쉽다.

번역과 연구는 또다른 차원인 것 같다.

뒷부분 해제가 너무 간략해 아쉽다.

얼마전에 읽은 정병설 교수의 혜빈궁 일기 정도 수준은 되는 줄 알았는데 국문으로 번역에만 초점을 맞춘 듯하다.

그래도 우리 학계에서도 이런 일기류 같은 개인 전적들이 많이 발굴되어 미시사 연구가 활발해지는 것 같아 반갑다.

이 책의 주인공은 순조 때 평안도로 암행어사를 떠난 박래겸이라는 인물이다.

홍문관 교리였다고 하니 아마도 문과에 급제해 고위관료를 역임한 인물인듯 한데 역사책에서는 이름을 보지 못했다.

보통 일기라고 하면 개인의 내밀한 감정과 생각을 고백하는 아주 사적인 기록이라 기대하는데, 옛 사람들의 일기는 일록이라 표현하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오늘 날씨는 어땠다, 오늘 무슨 일을 했다 이 정도의 간략한 하루 일과 기록이라 대부분이라 아쉽다.

그러고 보면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이 대단한 문학적 가치를 가진 책 같다.

뚜렷한 목적을 갖고 서술했기 때문에 더 그렇겠지만 말이다.

생각했던 것처럼 암행어사 출두가 극비리에 이루어지기도 어려웠고 다른 책에서도 본 바지만, 수령을 현장에서 파직하는 등의 대단한 권한을 갖지도 못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국왕을 대신해 시찰하는 정도의 수준이었던 것 같다.

전통사회는 교류가 많지 않던 시대라 외지인의 등장은 금방 이슈가 되고 더군다나 하고 다니는 행색이 초라해도 말을 타고 어사 신분이다 보니 당당함이 베어 나와 눈치빠른 기생들은 쉽게 박래겸의 정체를 알아차려 버린다.

관리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도 접대를 받아 뱃놀이를 하고 관기가 수청을 드는 걸 보면 춘향전의 암행어사는 민중들의 환상 속에서나 존재했던 모양이다.

교통수단이 거의 없던 시대라 말을 타고 하루에 평균 40리를 이동하고 많을 때는 120리까지 갔다고 한다.

40리는 21km에 해당된다.

이것은 조사 때문에 쉬는 날도 다 합친 평균 거리이고 일기에 보면 대부분 90리를 갔던 것 같다.

말타고 신분도 숨기고 궁벽진 시골까지 이동했으니 암행어사로 내려갔다가 순직한 사람도 있다는 게 이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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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통해 본 양반들의 일상세계 - 17세기 <매원일기>를 중심으로 국학자료 심층연구 총서 11
정정남 외 지음 / 새물결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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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영남 지방의 사족인 김광계라는 인물이 28년간 쓴 <매원일기>를 바탕으로 당시 향촌 사회를 분석한 책이다.

역사책에 나오는 거대 정치 담론 말고 실제로 당시를 살아간 일반인들의 삶은 어땠는지 가공하지 않은 날자료로 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16세기까지는 남귀여가혼의 풍속으로 혼인을 하면 처가 근처로 이사하였고 처가로부터 재산도 많이 물려받고 제사도 윤회봉사로 돌아가면서 지냈다.

집 구조도 부부가 안방에서 거주하여 사랑방을 따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남성들은 손님을 접대하고 개인 독서처를 갖기 위해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17세기 들어 부부가 안채와 사랑채에서 따로 거주하게 되어 그 공간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17세기는 주자학이 일상생활에 스며들어 가부장적 사회로 변화했고 18세기에 완벽하게 통제됐다.

조선이라는 왕조의 입장에서는 향촌까지 성리학 일변도의 통제된 사회가 되어 안정적이었으나 결과적으로 근대 사회로 변모하지 못한 원인이 된 듯하다.

반정 이후 서인 세력, 19세기에는 완전히 세도정치로 변하면서 지방 사족들은 더더욱 중앙 관계로 진출하지 못한 대신, 향촌 사회에서 문중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갔다.

제사는 일종의 문중 단합 의식인 것 같기도 하다.

종가를 중심으로 제사를 지내면서 향촌에서 재지 사족으로 인정받으면서 관에도 대항하고 서원을 중심으로 공론을 형성해 자신들의 권리를 챙겼다.

당시가 병자호란 때라 이 책의 주인공 김광계는 의병장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의병으로 차출되어 전쟁에 나간 것은 노비들이었고 양반들은 군량미를 댔다고 한다.

양반이라고 하면 상민들을 억압하는 모습만 상상하기 쉬운데, 이들도 관으로부터 핍박받고 심지어 관찰사를 모욕했다고 형신을 받다가 도산서원의 원장이 사망하는 일도 있었으니 기본적으로 지방 사회는 중앙 권력에 의해 통제됐던 것 같다.

그래도 공동으로 대응하는 게 유리하기 때문에 혼맥과 학맥을 중심으로 외연을 넓히고 공론을 일으키는데 그 중심이 바로 서원이었다.

김광계도 도산 서원의 원장을 역임하면서 예안이라는 지역 사회를 이끌었다.

조선 후기 일기를 읽어보면 문과에 급제하기가 매우 어려웠던 듯하다.

역사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정말로 바늘귀 같은 좁은 문을 통과했던 사람들인가 보다.

이 공론을 이끌기 위해 양반들은 접빈객이 일상화 됐다.

사대부가 여자의 가장 중요한 일이 접빈객 봉제사라고 하더니만 일기를 보면 과연 그렇다.

거의 매일 손님이 오고 제사를 지낸다.

시장이 활성화 되지도 않았을 때라 손님이 오면 집에서 술을 담그고 음식을 준비해서 대접해야 했으니 매일 같은 손님 접대가 주부 입장에서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싶고 상당한 재물이 아니면 지역사회에서 위상을 유지하기가 어려웠을 것 같다.

음풍농월로 놀려고 손님들을 만나는 게 아니라 지역의 여러 사람들을 두루 만나는 사교 과정에서 인맥을 형성하고 공론을 만들었던 것이다.

역시 역사는 글을 남기는 사람들이 승리하는 모양이다.

하층민들의 일상은 글로 남겨진 게 없어 생활상을 재구성하기 어려우니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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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혼후 - 지워진 황제의 부활
리롱우 지음, 진화 옮김 / 나무발전소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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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나왔을 때 도서관에 신청했는데 계속 미뤄두다가 드디어 읽게 됐다.

막연하게 마왕퇴 같은 황제릉 발굴기인가 했는데 그 부분은 오히려 소략하고 황제에 등극했다가 27일 만에 폐위된 창읍왕 유하의 일대기를 소설식으로 재구성한 책이다.

그래서 더 흥미로웠다.

저자의 상상력이 좀 가미되긴 했으나 무리하지 않은 전개 덕분에 편하게 전한 시대를 둘러 볼 수 있었다.

보통 한나라 역사라고 하면 유방의 건국 당시나 여태후의 집권, 한 무제의 서역 원정, 왕망으로 인한 망국 정도 얘기하는데 이 책은 가장 조명받지 못하는 해혼후 유하 시대에 대한 이야기라 흥미로웠다.

안 그래도 중국 황제의 계보를 볼 때마다 창읍왕이 도대체 누구인가, 왜 며칠 만에 폐위가 됐을까 궁금했던 차다.

한 무제가 위황후의 적장자인 여태자 유거를 무고의 변으로 죽인 후 겨우 8세인 유불릉 소제가 황위에 오르게 된다.

이 무제도 정말 끔찍한 사람인 것이, 어린 아들이 황제가 되면 어머니가 정권을 농단한다고 생전에 아름다운 구익부인을 죽여 버린다.

다음 대통을 이어줄 아들을 낳은 총희들인데도 별 시덥지 않은 이유로 죽여 버리는 걸 보면 전제 군주의 권력은 21세기 후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정도 같다.

성종도 연산군을 낳은 폐비 윤씨를 죽였고, 숙종도 경종을 낳은 장희빈을 저주했다는 확실치도 않은 고변으로 아들이 세자로 있는데도 죽이지 않았던가.

어린 소제가 즉위할 때 아버지 무제는 곽광에게 아들을 부탁한다.

곽광은 어린 황제를 끼고 정권을 휘두르다 사후 가문이 몰락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책에서는 한나라를 이끌어 가는 충신으로 묘사된다.

중국에서는 이런 평가를 받는 모양이다.

곽광은 자신의 외손녀 상관씨를 겨우 6세의 어린 나이에 12세 소제의 황후로 밀어 올린다.

다른 여자와 동침도 못하게 막아 21세에 소제가 사망하자 후사가 없었고 그래서 선택된 이가 바로 무제의 손자인 창읍왕 유하이다.

황제 사망 당시 황후는 겨우 15세였으니 자식을 낳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왜 그렇게 젊은 나이에 느닷없이 죽어 버렸을까?

그러니 독살됐다는 음모론이 횡행했던 모양이다.

이언년의 누이인 이부인의 아들 창읍애왕이 사망하자 5세 때 그 자리를 물려받은 유하는 19세의 나이에 황제로 뽑혀 장안에 들어온다.

그러나 창읍왕부에서 어려서부터 제멋대로 왕권을 휘두르며 살다가 느닷없이 천하를 손에 쥐니 실세였던 곽광을 무시하고 자기 사람을 등용하려다 결국 곽광의 외손녀인 상관황태후의 명으로 27일만에 폐위되어 다시 고향으로 쫓겨간다.

황제에 오른 이가 이렇게 짧은 시기에 폐위된 경우가 또 있나 싶다.

곽광의 위세가 과연 한 나라의 황제를 세우고 폐할 수 있을 만큼 대단했던 모양이다.

그는 다시 무고로 죽은 여태자의 손자인 18세의 선제를 황제로 세우고 조강지처를 독살시킨 후 자기 딸을 황후로 세운다.

그러나 몇년 후 그가 죽자 선제는 전처의 복수를 하면서 곽씨 일가를 몰살시키고 아내도 쫓아내 버린다.

결국 황제가 승리한 셈이다.


쫓겨난 창읍왕 유하는 죽은 듯이 자기 땅에서 살고 있었으나 재위에 오른 선제는 혹시라도 반역의 마음을 품을까 불안해 그를 다시 해혼후로 강등시켜 궁벽한 강서성 남창으로 이주시켰다.

이 불쌍한 젊은이는 한이 맺혀 오래 못 살았는지 34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그 아들들에게 해혼후 자리를 물려 주려 했으나 연이어 아들 둘도 급서해 그 후손들은 서민으로 강등된다.

그래도 해혼후의 재정이 튼튼해 유하는 자신의 지하 궁전을 훌륭하게 꾸몄는데, 4세기 무렵 지진이 일어나 파양호가 넘쳐 그 땅이 물에 잠기는 과정에서 무덤이 유실되고 만다.

그 무덤이 2015년에 발굴된 것이다.

후손 입장에서는 해혼후 작위가 사라지고 무덤마저 유실되어 불행했을테지만, 역사적으로 봤을 때는 이렇게 널리 이름을 남기게 됐으니 불행 중 다행이다.

황제에서 쫓겨나 일개 제후에 불과했는데도 이렇게 어마어마한 양의 부장품이 발견된 걸 보면 과연 당시 절대 권력자들의 부유함이 대단했었고, 또 한나라의 경제력도 엄청났던 것 같다.

동전이 무려 200만 개나 묻혀 있었다고 한다.

연호가 새겨져 있지 않은 걸로 보아 망자가 저승가서 쓰라는 의미로 본다.

당시 유통된 동전의 1%에 해당되는 수치라고 하니 이것을 무덤에 부장시킬 수 있는 경제력이 대단하다.

도굴되지 않은 무덤들이 이렇게 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전해주니 도굴꾼들에게 파헤쳐진 무덤들이 안타깝다.

그렇지만 이 무덤도 도굴을 시도하다가 수상하게 생각한 경찰에게 잡혀서 비로소 알려진 걸 보면 경제적 동기를 이길 수 있는 경우는 드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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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민음 지식의 정원 서양사편 11
안효상 지음 / 민음인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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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의 이 시리즈는 참 재밌고 유익하고 이해하기 쉽다.

겨우 120 페이지 밖에 안 되는 짧은 분량에 어떻게 미국의 역사를 뭉뚱그려 넣을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멀리는 베링 해협이 생기기도 전에 인디언들이 순록을 찾아 아메리카로 건너온 시기부터 시작해 세계 1,2 대전을 통해 강대국으로 거듭나기까지 미국의 길지 않은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그리고 재밌게 잘 설명한다.

좋은 필자들만 섭외하는 건지 읽는 책마다 다 재밌고 유익하다.

개척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미국으로 건너가 자신들의 정부를 세우고 세계 최강으로 우뚝 서게 된 과정이 흥미롭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전 세계로 확산되는 과정도 흥미진진하다.

에스파냐 본국의 영주제를 이식시킨 남미는 해방 후에도 혼란을 겪고 경제적으로도 뒤쳐진 반면, 자치권을 줬던 영국의 식민지 미국은 공화주의를 바탕으로 독립 후 최고의 국가로 성장했던 점이 중요한 차이가 아닌가 싶다.

전세계의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향한 것은 그 나라가 전통사회의 본국보다 살기 좋을 거라는 희망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미국의 성공이 그냥 이뤄진 것이 아니라 그 나라를 떠받치고 있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현대 사회를 이끌어가는 성공적인 이데올로기라는 걸 보여주는 듯하다.


<오류>

22p

1482년 세 척의 배를 몰고 출발한 그는 41일 만에 대서양을 건너 바하마 제도의 한 섬에 도착했다.

-> 콜럼버스가 대항해를 시작한 해는 1482년이 아니라 1492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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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왕국의 풍경, 그리고 새로운 시선
이근우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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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책 검색하다가 추천마법사에 있길래 문득 궁금해져 다시 읽게 됐다.

2007년에 썼던 리뷰가 있다.

오래 된 책이라 다소 지루한 느낌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흥미롭게 읽었다.

민족주의적 역사관에서 벗어나 동아시아사라는 좀더 넓은 안목으로 역사를 본다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인가 보다.

저자는 삼국사기의 예를 들어, 김부식이 역사서를 편찬한 까닭은 오늘날처럼 실증사학의 관점에서 쓴 것이 아니라, 왕에게 귀감을 보여주기 위해, 즉 교훈을 주기 위해 서술했음을 밝힌다.

쓰는 목적이 감계와 포폄을 위함이었으니 사료비판이 매우 중요하고 고고학적 증거도 반드시 첨부해야 비로소 당시 사회상이 입체적으로 그려질 것 같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민족주의적 역사서술도 학문으로서의 역사라기 보다는, 우리 민족의 찬란한 과거를 밝히고 자부심을 주기 위한 목적은 아닐까?

고대의 영광을 찬양하고 더 나아가 마치 만주를 잃어버린 우리 땅, 수복해야 할 우리의 고토 이런 식으로 묘사하는 책을 보면 결국은 동북공정이나 임나일본부설의 한국 버전이 아닐까 싶다.

사대주의 관점에서 역사서를 썼다는 김부식을 비판할 것도 없이, 우리 역시 근현대사를 자신들의 정치척 이해관계에 맞춰 서술할 뿐 과연 학문적인 입장의 서술이 얼마나 될까 궁금하다.

유독 식민지 치하와 해방 이후 역사만 강조하는 정치적 목적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여러 흥미로운 주장들이 많았다.

1) 일본서기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

임나일본부설 등을 이유로 일본서기의 정확성을 의심하면서 정작 백제에서 유교나 불교를 전해준 사건 등은 중요하게 받아들인다.

원하는 결과만 취사선택하는 셈이다.

근초고왕의 영산강 유역 남정 역시 일본서기에만 나오는데 목라근자 등이 일본의 군사를 데리고 와서 남부 경략을 했다고 기록에 있는데도 주체가 백제 왕실이었을 것이다고 편의대로 해석해 버린다.

고고학적 증거로 봐도 백제가 영산강 유역을 정복한 것은 6세기였으리라 생각된다.

한쪽은 기록을 남겼고 한쪽은 당시 기록이 전혀 없으니 고고학적 증거라도 있어야 주장을 할텐데 그마저도 불리한 상황에서 과연 어떤 해석이 맞는 것인지.

고대인들이 과학적 태도로 역사를 연구해서 서술한 것도 아니고 요즘처럼 언론을 통해 정치 상황을 잘 알 수도 없었을테니 어떤 의도로 기술했는지 사료비판은 매우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일관된 태도는 취해야 할 것 같다.


2) 책을 읽으면서 제일 흥미로운 주장이었는데, 백제가 왜에 불교와 오경박사 등을 전해준 것이 양 무제의 영향력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저자는 천자문과 논어를 전해 준 왕인마저 양나라 사람일 수도 있다고 추론한다.

천자문 자체가 양나라 때 처음 간행된 것이므로 왕인은 4세기 사람이 아니라 6세기 사람일 걸로 추정하고, 후손들이 조상의 기원을 멀리 잡기 위해 늘려 놨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이 부분도 좀 이해가 안 가긴 했다.

후손이 그냥 200년을 늘려 버린 걸까?

좀더 실증적인 증거가 필요할 것 같다.

무령왕 당시의 양나라와 문화 교류는 무령왕릉의 전축분을 통해 익히 알려졌다.

양 무제는 50여 년을 재위하면서 주변에 불교와 유학을 널리 전파했고 백제에도 경전박사들이 많이 건너왔는데 일본의 요청에 의해 열도로 건너갔으리라 추정한다.

오경박사들의 성이 고씨, 단씨 등 중국성임을 근거로 든다.

가능성이 있지만 좀더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이러니 일본에서도 한반도는 건너 뛰고 중국의 영향만 강조하는 모양이다.


3) 또 흥미로운 것, 무령왕의 아버지 문제

삼국사기에는 무령왕이 개로왕의 아들인 곤지의 손자로 나온다.

일본서기에는 곤지가 개로왕의 형제이고 일본으로 건너갈 때 임신한 형수를 아내로 달라 하여 태어난 이가 무령왕이라 한다.

출생년도 등을 고려할 때 무령왕이 개로왕의 증손이라기 보다는, 아들 쪽이 더 신뢰가 간다.

그런데 임신한 형의 아내를 달라는 건 좀 이상하다.

저자는 무령왕이 곤지의 적자인 동성왕의 배다른 형제라는 다른 기록을 증거로 삼아, 살해당한 동성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무령왕이 자신의 혈통을 강화시키기 위해 개로왕의 아들이라 자처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모계의 격이 떨어지고 한성백제의 정통인 개로왕의 직계임을 내세워 권위를 높이기 위한 방책이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가능성 있는 추론 같다.

그렇다면 무령왕은 동성왕과 이복형제이고 곤지의 아들이자 개로왕의 조카인 셈이다.


민족주의적인 관점에 함몰되지 않고 보다 넓은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우리 고대사를 바라본 점이 신선했다.

역사가 민족주의를 고취시키기 위한 선동이 아니라 분석하고 평가하는 학문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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