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합격자 발표날
1994년은 저물고 1995년의 해가 밝았다. ㄱ대에서는 신입생 합격자를 발표하고 있었다. 민이와 민규, 혜진은 합격자 발표 확인을 하느라고 ㄱ대에 왔다. 천문학과 합격자가 적혀 있는 대자보를 보던 혜진은 강민규라는 이름이 쓰여 있는 것을 보았다.
“저기 있네.”
혜진이 민규의 이름이 적혀있는 곳을 가리켰다. 남매는 혜진이 가리킨 곳을 보았다. 민규의 수험번호와 이름이 뚜렷하게 적혀 있었다. 민규의 얼굴이 환해졌다.
“축하해. 축하하는 의미로 점심은 내가 살게.”
혜진이 말했다.
“니가 돈이 어딨다고 니가 산다 그래? 내가 낼게.”
“어제 과외비 받았어.”
“과외비라니? 벌써 과외자리 구했어?”
“응. 그러니까 오늘은 내가 살게.”
혜진이 밝게 미소를 띠며 말했다.
세 사람은 학교 정문 쪽으로 걸어갔다.
민규가 합격자 확인 발표를 확인하던 반대편에는 의예과 신입생 합격자가 붙어 있었다. 파란색 잠바에 청바지를 입은 곱상한 외모의 진수영은 그 곳에서 혼자서 합격자 발표를 확인하고 있었다. 자신의 수험번호와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수영은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아버지의 뜻을 거역할 수가 없어 의대에 지원했을 뿐이었다. 수영은 한 번도 의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수영은 공중전화가 있는 곳으로 가서 집에다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됐니?”
전화를 받은 사람은 어머니인 정미정이었다. 미정의 목소리에는 기대감이 잔뜩 서려 있었다.
“합격했어요.”
수영은 신통치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합격을 했다면서 목소리가 왜 그래? 하나도 기쁘지 않은 거 같구나.”
미정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에요. 저 내려갈게요.”
수영은 충주로 내려가기 위해 ㄱ대를 나왔다.
민규, 민이, 혜진 세 사람은 학교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고 있었다.
“밥 먹고 우리 어디 놀러 갈까?”
혜진이 말했다.
“응? 니가 웬 일이냐? 놀러 가자는 얘기를 다 하고.”
민이가 놀라며 물었다.
“민규 합격했잖아? 민규는 어디 놀러 가고 싶은 데 없어?”
“그럼 우리 민속촌 가요.”
“민속촌?”
“왜요? 누나는 싫어요?”
“아냐. 그럼 밥 먹고 나서 민속촌 가자.”
세 사람은 밥을 다 먹고 나온 후 민속촌으로 가려고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민속촌에 놀러 온 혜진, 민이, 민규 세 사람은 주위를 구경하며 길을 걷고 있었는데 외국인 남자 한 명이 다가와서 그들한테 영어로 말을 묻었다. 혜진과 그 외국인 남자는 잠시 동안 영어로 얘기했고 외국인 남자는 고맙다고 말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역시 누나는 영어를 잘하는군요. 난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 듣겠던데.”
“난 별로 잘 하는 거 아냐. 우리과에 영어 진짜 잘하는 애 있어.”
“유진이 말하는 거야? 너 유진이 좋아하지? 유진이도 너 좋아하는 것 같던데......”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혜진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당황했다.
“누구에요? 우리 혜진이 누나 건드리려고 하는 게.”
민규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 꼴통아.”
민이가 민규한테 꿀밤을 먹였다.
“아야! 자꾸 이러면 나도 가만있지 않을 거야.”
“니가 가만있지 않으면 어떡할 건데?”
“가정 폭력범으로 고소할 거야.”
“뭐?”
민이는 또 다시 민규한테 꿀밤을 먹이려 했고 민규는 재빨리 혜진이의 등 뒤로 숨었다.
“민아, 그만해.”
혜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혜진이 너 때문에 참는다.”
민이는 분을 삭이며 말했다.
서울 강변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떠난 지 2시간 후에 수영은 충주에 있는 집에 도착했다. 미정은 의예과에 합격한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전혀 기뻐하지 않는 수영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미정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아들은 의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음을. 아들이 의사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남편이라는 것을.
한 시간 후 의과대학 교수인 수영의 아버지인 진중호가 집에 도착했다. 중호는 ㄱ대 의대에 합격한 아들이 자랑스러워 1층에 있는 수영의 방으로 가 방문을 열었다. 수영은 책상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잘 했다. 난 네가 붙을 줄 알았어. 그리고 서울에서 공부하는 건 염려하지 말고. 내가 잘 아는 친구한테 니가 살 데 좀 알아 봐 달라고 했더니 자기 집에서 지내게 해 주겠다는구나. 어차피 넓은 집에 사람도 별로 없다고 하면서. 다음 주 중에 올라가면 될 거야.”
“예.”
수영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수영은 한 번도 아버지의 말을 거역한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왠지 모르게 아버지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민속촌에 놀러 왔던 혜진, 민이, 민규, 세 사람은 민속촌을 나왔다.
“재밌었어?”
혜진이 민규한테 물었다.
“예. 누나, 우리 다음에도 또 놀러 가요.”
“그래.”
“어디 가서 밥이나 먹고 들어가자.”
민이가 말했다. 세 사람은 근처에 있는 식당으로 걸어갔다.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다. 하지만 수영은 잠이 오지 않았고 머리 속에선 이런 저런 생각들이 날라 다녔다. 사실 수영은 의사가 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뭐 딱히 다른 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수영은 도대체 자신은 왜 살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생각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