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광주에서 2

 

 

  밤이 되자 학생들은 다시 운동장으로 모여들었다. 단상위에서는 북춤이 흥겹게 펼쳐지고 있었다.

ㄱ대 풍물패 회원들도 다들 그 곳에 모여 있었는데 희연은 조금 전부터 계속 기침을 해대고 있었다. 며칠 전에 걸린 감기가 더 심해진 모양이었다.

“괜찮아? 그만 들어가서 자지 그래?”

유진은 걱정스런 눈으로 희연이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이 정도 가지고 뭘.”

“그렇게 고집만 부리지 말고 그만 들어가서 자. 그러다가 더 심해져서 올라가면 네 어머니가 걱정할거 아냐.”

희연은 어머니라는 말에 유진이 어머님이 생각났다. 여기에 내려와서 아직 유진이의 어머님한테 전화를 한 번도 걸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자 죄를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럴까? 그럼 나 그만 들어가서 잘 게.”

“그래, 잘 생각했어. 들어가서 푹 쉬어.”

희연은 유진이의 안부를 뒤로하며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강 여사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왔다.

“어머님, 저예요. 희연이.”

“그래, 잘 지내고 있냐?”

강 여사는 무척이나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예. 잘 지내고 있어요. 유진이도 잘 있고요.”

“그래. 다행이구나. 근데 목소리가 왜 그러냐?”

“감기가 좀 들어서요.”

“저런. 조심하지 않고.”

“괜찮아요. 어머님. 별로 심하지 않으니까요. 그럼 모레 올라갈게요.”

“그래. 몸조심하고 잘 지내다 올라오너라.”

희연은 전화를 끊었다. 감기 때문인지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다. 희연은 잠을 청하기 위해 강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유진이 어머님이 걱정한 대로 이 곳에서 별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미 전경들이 주변에 쫙 깔린 채 만약의 사태에 대비를 하고 있었지만 김영삼 문민정부는 아직 초기단계였다. 그런 까닭에 이런 한총련이라는 이적단체를 대할 때 아직은 강경책 보다는 온건책을 택할 것이라는 것을 희연은 잘 알고 있었다.

강의실로 돌아온 희연은 요를 깔고 누운 후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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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광주에서 1

 

 

  풍물패 동아리 회원들이 광주에 내려온 지 하루가 지난 밤이었다. 그들은 ㅈ대의 넓은 운동장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한총련 출범식을 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내려온 대학생들은 운동장에 자리를 꽉 메운 채 앉아 있었다. 단상위에 마련된 무대에서는 그동안 준비했던 공연들을 학생들한테 선보이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김영삼 대통령을 클린턴 대통령의 하수인으로 모욕하는 노골적인 연극도 있었다. 밤이 깊어지면서 주위에는 찬바람이 일기 시작했지만 단상 위에서 이어지는 북춤에 학생들의 열기는 오히려 한층 더 타오르고 있었다.

북춤이 끝나고 새로이 한총련 의장에 뽑힌 학생이 깃대에 높이 걸려있는 성조기를 향해 불붙은 화살을 쏘아 올렸다. 화살은 그대로 성조기에 가 꽂혔고 성조기는 삽시간에 불에 타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때를 같이하여 운동장에 모인 학생들의 환호가 어둡고 추운 밤 속에서 일제히 터졌다. 희연이는 그 광경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희연은 애초에 이런 행사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희연은 분위기에 빠져들지 못하고 오히려 조금 전부터 일기 시작한 찬바람에 몸을 자주 떨었다.

“에취.”

희연은 크게 재채기를 했다.

“춥니?”

옆에 앉아있던 유진이가 희연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유진의 얼굴은 흥분이 된 듯 매우 상기되어 있었다.

“아니야. 괜찮아.”

“그만 들어가서 자지 그래? 너 감기 걸린 것 같은데.”

“괜찮아. 그냥 재채기 했을 뿐인데. 뭐.”

“정말 괜찮아?”

“응.”

“그럼 이거라도 입고 있어.”

유진은 자신이 입고 있는 잠바를 벗어서 희연이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고마워.”

“그런 말은 친구 사이에 하는 게 아냐.”

유진은 말을 마치고 단상 위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단상 위에서는 어느새 사물놀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친구?’

희연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조금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유진은 언제나 자신한테 친구라는 말만을 했었다.

 

 

  새벽 3시가 되어서야 둘째 날의 일정이 모두 끝났다. 이미 많은 학생들이 자러 들어갔지만 운동장에는 아직도 많은 학생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일정이 끝나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ㄱ대 풍물패 회원들도 많은 학생들이 자러 들어갔지만 유진, 재수, 민이, 희연은 일정이 끝난 새벽 3시에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 명의 학생은 강의실로 돌아가고 있었다. ㅈ대에 내려온 학생들은 강의실에서 요를 하나 덮고 잠을 청하고 있었다.

“에취”

희연은 손으로 입을 막으며 재채기를 했다.

“그러길래 내가 아까 들어가서 자랬잖아? 가뜩이나 몸도 약하면서.”

유진은 걱정스런 얼굴로 희연이를 쳐다보았다.

“괜찮다니까. 그냥 감기일 뿐인데, 뭐.”

네 명의 학생은 강의실로 돌아와서 요를 깔고 자리를 잡고 누웠다. 유진과 재수와 민이는 피곤했는지 금새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희연은 잠이 든 유진이의 모습을 행복한 미소로 바라보고 나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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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광주로 떠나고

 

 

  ‘삐이이...’하고 신호음이 울리자 박 회장은 수화기를 들었다.

“무슨 일이야?”

박 회장의 목소리엔 위엄이 담겨 있었다.

“회장님, 희연 아가씨께서 오셨는데요.”

“들어오라고 해.”

박 회장의 목소리가 한층 누그러졌다.

“회장님께서 들어오라고 하세요.”

데스크를 보고 있는 안내원이 희연이한테 공손하게 말했다.

희연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가 3층에 도착해 문이 열리자 희연은 회장실로 갔다. 그리고는 문 앞에서 노크를 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근데 무슨 일이세요? 절 갑자기 보자고 하시고.”

“일은 무슨? 저녁은 먹었니?”

“아뇨. 아직.”

“그럼 저녁이나 같이 먹으면서 얘기하자꾸나.”

박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은한 불빛 아래, 박 회장과 희연이 마주보며 앉아 있었다. 그 곳은 박 회장이 즐겨 찾는 최고급 프랑스 레스토랑이었다. 그들 앞에 놓인 테이블에는 그 날의 스페셜 요리와 화이트 와인이 놓여 있었고, 아름다운 여인이 연주하는 피아노 음악이 그들의 식사를 한껏 분위기 있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박 회장은 화이트 와인 한 모금을 마시고 나서 말을 꺼냈다.

“내일 광주로 내려간다며?”

“예.”

“집사람이 괜한 걸 너한테 부탁했어. 이젠 별 일 없을 텐데 말야.”

“전 괜찮아요. 아버님.”

“어쨌든 못난 내 아들 놈 때문에 니가 고생이 많구나.”

“고생이라뇨? 당연히 제가 할 일인걸요.”

“그 녀석이 그렇게 좋으냐?”

희연은 쑥스러운 듯이 얼굴을 붉혔다.

“그 녀석은 널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직 소꿉친구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그러니까 아버님이 좀 도와 주세요.”

“내가 도와 줄 필요는 없을 거야. 적어도 그 녀석은 나하고는 달라서 인정은 있거든. 결국 니가 원하는 대로 될 거다.”

“정말 그렇게 되겠죠?”

희연이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렇게 될 거다.”

박 회장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희연은 박회장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도 일말의 불안감을 씻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희연이는 유진이가 자신을 떠나가는 꿈을 자주 꾸었다. 그것이 희연이를 더욱 불안하게 했고 그래서 희연은 언제나 유진이 앞에서는 조심스럽게 행동을 했다.

 

  다음 날, ㄱ대 학교 운동장 안에는 한 대의 버스가 서 있었다. 학생들은 이미 버스에 올라타서 버스가 출발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이 닫히고 버스에 시동이 걸렸을 때 버스를 향해 희연이가 뛰어오고 있었다. 다시 버스의 문이 열렸고 희연은 버스에 올라타더니 숨을 고르며 안으로 들어갔다. 앞좌석에 앉아 있던 유진은 희연이가 차에 올라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떻게 된 거야?”

“나도 같이 갈려고 왔어.”

“피아노 연주회는 어떻게 하고?”

“피아노 연주회는 다음에도 얼마든지 있는 걸. 뭐.”

유진은 희연이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희연은 여지껏 피아노 연주회가 있는 날에는 한 번도 빠짐없이 피아노 연주회를 보러 갔었다. 그런데 그런 희연이가 피아노 연주회를 포기했던 것이다. 그것도 희연이가 별로 탐탁치 않게 여기는 이런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 유진은 아무리 생각해도 희연이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굳이 그 이유를 따져 묻진 않았다.

희연은 뒷좌석에 비어있는 민이의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니가 웬 일이냐?”

민이는 희연이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나도 같이 갈려고 왔어. 차 놓치는 줄 알고 뛰어 오느라 혼났어.”

“어쨌든 환영한다. 너도 이제 우리와 뜻을 같이 하게 됐으니 말야.”

민이가 밝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환영하긴 아직 일러. 난 너희와 뜻을 같이 한다고 한 적은 없으니까.”

“그럼 뭣 땜에 우리들의 여행에 동참한 건데?”

“그거야 목적지가 같기 때문이지. 하지만 목적지가 같다고 해서 사람들이 가는 목적이 다 같은 것은 아니잖아.”

“그럼 네 목적은 뭔데?”

“그냥 광주에 한 번 내려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사과도 할 겸해서 말야.”

“사과라니?”

“우리 아버지 광주에서 사람 많이 죽였거든.”

“그래도 넌 니 아버지랑은 좀 다르구나.”

“다를 거 없어. 만약 똑같이 그런 상황이 또 일어난다면 나도 아버지처럼 행동할 테니까. 나도 아버지를 닮아가지고 내가 얻고 싶은 게 있으면 무슨 일이든 서슴치 않고 하거든.”

“뭐?”

“그냥 그렇다는 얘기야. 너무 신경쓰지마. 그나저나 어제 리포트를 밤새 썼더니 너무 피곤한 걸.”

희연은 더 이상 얘기를 하고 싶지 않은 듯 두 눈을 감았다. 민이는 그런 희연이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누구보다 따뜻하게만 보이던 희연이의 얼굴이 갑자기 얼음장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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