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역국 두그릇>
오늘이 나의 서른 일곱번째 생일이다. 매년마다 해 오던 것처럼 언니가 보내 준 미역으로 국을 끓였다. 그리고 엄마와 할머니의 몫으로 두그릇을 떠 놓고 속으로 빌었다. "감사하다고!" 독감 때문에 맛은 모르지만 엄마와 할머니를 위해 떠 놓은 미역국 두그릇을 먹었다. 먹고나니 배가 빵빵했었다...
그리고 이건...
울랑의 작품!! (생일이라고 울랑이 해준 스테이크다. 역시 사진보다는 직접보는 게 더 맛나게 보일 것 같다.^^)
미역국 두그릇의 의미는 한그릇은 울언니와 나를 이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신 엄마의 미역국이고 다른 한그릇은 엄마 대신에 우리를 길러주신 할머니의 미역국이다. 언니는 엄마를 어렴풋이 기억을 하고 있지만 난 엄마의 얼굴을 모른다. 엄마는 나를 낳자마자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래서 할머니가 갓난아기인 나를 젖동냥을 해가면서 나를 길러주셨다.
그리고 언니랑 산으로 들로 뛰어놀면 산열매를 따 먹었던 추억이 난다...나는 언니와 다섯살 차이가 난다. 그래서 할머니가 나의 첫번째 엄마라면 언니는 나에게 두번째 엄마가 된다. 그런데 항상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서면 동생아~하고 부르던 언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정말로...
어느 날부터 언니가 보이지 않았다...
나의 나이가 몇 살쯤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 짐작으로는 일곱살쯤 되었을 때인 것 같다. 어느 날부터 미군의사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나는 어릴적부터 잔병치레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학교를 늦게 들어가는 바람에 나의 친구들보다 한 둘살이 더 많은 셈이다. 이 때 나의 왼쪽 눈 위에 자그만한 혹이 생기면서 동그랗게 점점 커지더니 그 속에 고름이 잔뜩 들어 있었다고 한다. 이 때 고모가 미팔군 부대에서 직장을 가지고 계셨는데 고모가 아시는 의사한테 나를 부탁을 했단다. 그래서 대구 수성못 근처에 있는 미군 아파트에서 미군의사 가족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의 기억으로 의사아저씨 가족을 소개하자면 부인과 나의 또래로 보이는 딸 제이미가 다였다. 참 이상타. 의사아저씨나 부인 이름은 생각이 안 나는데 딸 이름은 기억을 하고 있다니...그런데 제이미와 아저씨는 나한테 너무나 친절하게 대해 주었는데 부인은 그렇지 않다. 항상 나에게 쌀쌀하게 대해 주었는데 지금 생각을 해도 이유를 모르겠다. 그런데 한 가지 더 고모가 나보고 절대로 고모라고 부르지 말라는 것이다.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하라고! 나는 어려서 이해를 못했지만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았다. 하여튼 미군 아파트에서 살면서 많은 게 변했다. 먼저 나의 왼쪽 눈 위에 생긴 혹도 없어지고 새옷들도 생기고...그리고 어느 날 출근을 하시는 아저씨가 맛난 것 사 먹으라고 5불을 주셨다. 물론 이 때는 5불이 얼마인지도 몰랐지만...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려고 밖으로 나오다 고모랑 마주쳤다. 고모는 내 손에 들린 돈을 보고는 누가 주었느냐고 묻는 걸 의사 아저씨가 주었다고 했더니 5불을 달란다. 5불을 받아 지갑에 넣고는 아무한테 말하지 말라면 50센트(500원)를 주는 것이다. 난 고모가 준 50센트를 받아가지고 가게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서 맛나게 먹었다...
이 집에서 생활한지 1년이 흘렸을 때 나이 아홉살에 사라진 언니가 할머니랑 같이 의사아저씨 집에 방문을 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고모와 함께...하지만 고모가 온 것은 통역을 해 주기 위함이었다고 들었다. 의사아저씨 가족들과 울언니와 울 할머니가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를 하는데...물론 고모가 중간에서 통역을 해 주느라 바빴지만...
(나의 나이 네살에 언니랑 헤어진 세월이 얼마나 흘렸기에 난 언니를 남 보듯 했다. 그래도 언니는 동생을 보고 반가웠던지 눈물을 흘렀다. 그리고 옆에 앉아 나의 손을 꼭 잡아 준 언니다.)
자리에 모인 이유는 의사아저씨네가 나를 입양을 하고 싶다고 했단다. 그리고 입양을 허락하면 할머니 몫으로 아파트 한채 사준다는 말과 함께! 하지만 할머니와 언니는 그 자리에서 반대를 했고 고모는 중간에서 할머니랑 언니한테 설득을 시키느라고 고생을 했단다...그 날로 난 할머니와 언니랑 함께 의사아저씨 집에서 나와 할머니랑 살게 되었다. 그리고 또다시 언니가 보이지 않았다. 그 뒤로 의사아저씨 가족들은 더 이상 만나지도 보지도 못했다. 가끔씩 의사아저씨가 많이 생각이 나고 보고싶다. 정말로 나한테 잘 해 주었는데...
그리고 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5학년까지 반장을 했었다. 반장이 될 때마다 할머니는 동네방네 자랑을 하고 다니셨다. 그리고 할머니는 항상 나한테 "너만큼은 꼭 성공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하지만 반장이 되어도 기쁘지가 않았다...
난 처음으로 1학년 때 봄소풍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다른 친구들과 다른점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엄마가 없다는 점이다. 모두들 아들 딸들이 가는 봄소풍에 부모님들이 오셨는데 난 그게 무척이나 부러웠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그리고 알았다. 반장이 되면 반장과 부회장 부모님들이 담임선생님들의 도시락을 사 오시는 것을...내가 처음으로 반장이 되어 소풍을 가게 되었는데 솔직히 가고싶지가 않았다. 그런데 소풍가는 날 아침에 할머니가 담임 선생님 드리라고 찬합을 내밀었다. 할머니한테 고맙다고 안기면서 젖을 만진 기억이 난다.^^ 그리고 반성도 많이 했다...
이제 긴긴 이야기를 해야할 것 같다...
2. <.......그리고 잊지 못할 상처들.......>
울언니가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있는데 고모가 학교로 찾아갔다. 그리고 수업하고 있는 언니의 손을 잡아끌고 어느 부잣집에 언니를 팔아 넘긴 것이다. 그 집에는 갓난아기 아들 두명이 있었는데 그 집 주인 아줌마가 아이들을 돌 볼 보모를 찾고 있는 중에 고모가 그 집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미리 선금을 받고 언니를 그 집에 보낸 것이다. 그것도 울 언니 나이 아홉살에...
그 때부터 언니의 고생이 시작되었다. 아이들만 보는 게 아니라 집안 청소면 부엌일도 해야 했으면 음식까지 만들어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집 주인 아줌마가 무엇을 잘못하면 그냥 넘어가지 않고 언니한테 손찌검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가혹하게...언니는 몰래 고모한테 전화를 해서 집에 보내 달라고...아프다고...무섭다고...울면서 고모한테 애원을 했지만 고모는 그저 알았다고만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다. 언니는 여전히 매를 맞아가면서 그 집에서 살았던 것이다. 미리 선금까지 챙겨 간 고모로 인해 언니는 감옥살이 아닌 감옥살이를 살아야만 했다. 아홉살 나이인 언니는 정말로 많이 어린 나이였다. 안 그래도 고모가 많이 밉고 싫었는데 언니를 지옥같은 그 집으로 보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뒤로는 고모가 죽도록 미웠고 또 미웠다. 이제야 알았다...왜 할머니가 밤낮으로 언니를 걱정하시는지...그리고 절에 가서 부처님께 불공을 드리는지...그리고 나한테 하셨던 말씀..."너만큼은 성공해야 한다."는 말씀이...가슴깊게 자리를 잡는다...
울 언니 나이 19살에 언니가 그토록 나오고 싶어 했던 그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나를 옆에 앉혀 둔 언니가 주인 아줌마한테 고모가 받아 간 선금은 10년을 이곳에서 일을 해 주었으니 빚은 다 갚은 셈이니 이제 이 집에서 나가게 해 달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울 언니를 보았다. 그런데 그 아줌마 하는 말이 그래서 나를 못미더워 동생을 여기까지 데리고 왔느냐고...언니는 망설임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우리는 그 집에서 나왔다...
그렇게 세월이 흘렸다...
나의 나이 열일곱살.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고 며칠이 안 되어 할머니가 중풍으로 자리에 눕고 말으셨다. 처음에 오른쪽 팔부터 마비가 오시더니 나중에는 왼쪽 팔만 정상이고 다리부터 시작해 입까지 마비가 되셨던 것이다. 학교를 다니면서 할머니 병 수발을 해 왔다. 하지만 정말 힘이 들었다. 매일 소변과 대변을 받아내야하고 학교 갔다 집에오면 방안이 냄새로 가득했다. 움직이지 못하시는 할머니를 목욕시키는 것도 힘이 들었고...겨울철에 연탄이 없어 이웃집에 가서 빌려 오는데 설움에 눈물도 많이 흘렸다. 화가 날 때는 움직이시지 못하시는 할머니를 볼 때마다 마음속으로 얼마나 울었던가. 찾아오는 이라곤 일주일에 한번씩 고모들이 왔다가고...언니는 시댁 눈치보느라 자주는 못 오고 가끔씩 형부랑 다녀가기도 했다.
덕을 많이 쌓고 살아오신 할머니가 1년 반을 중풍으로 누워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니 정말이지 눈앞이 캄캄했다. 울고 싶은데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주인 잃은 할머니의 옷들을 가슴에 품으면서 허공만 바라보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한동안 집에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반갑지 않은 고모가 찾아왔다. 70세 된 노인이 있는데 나보고 그 노인한테 시집을 가란다. 헉! 정말 가도가도 끝이 없구나! 도대체 고모가 우리에게 무슨 원한이 있어 이럴까...남도 아닌 친고모가...
결국에는 집을 나오고 말았다. 집을 나와 친구 자취방에서 함께 지내면 1년을 식당에서 일을 하고는 대구를 떠나 서울로 갔다. 처음에는 이태원에서...용산 삼각지...남영동으로...레스토랑 카운터일도 보고...또다시 식당에서 일을 하고...커피숍에서 일을 하고...그저 죽도록 일만 했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다 보니 친구들도 사귀고...친구들도 고아나 책에서 더러 나오는 이야기처럼 못된 계모 때문에 집에서 뛰쳐 나온 친구들...하여튼 내가 사귄 친구들도 나만큼이나 사연이 많았다. 그런데 나에게 여전히 학교시절 친구들이 있었지만...학교친구들과 사회에 나와서 사귄 친구들은 달라도 많이 달랐다. 그리고 난 이들에게서 희망을 배우고...삶을 배우고...사랑을 배우고...믿음을 배우고...행복을 배웠다. 함께 웃어 주고...함께 울어 주고...함께 행복을 느끼고...
친구는 항상 소중한 보물이다. 나에게 학교친구들과 사회에서 만나 친구들이 없었다면 정말 외롭게 지냈을 것이다...고맙다...친구들아!!
그리고 한참 나중에 서울에서 군인이었던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내가 미국으로 오는 바람에 사회에서 사귄 소중한 벗들과 연락이 둔절 되었지만 난 항상 벗들을 위해 행복을 빈다. 그리고 모두들 건강하게 잘 있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좋은 남편들을 만나서 이쁜 아기를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을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인연이 되면 다시 만나겠지 하는 희망을 품어보는 나다.
불행을 안겨 준 고모한테는 아들 둘에 딸이 하나 있다. 모두가 대학교를 나오고 좋은 직장을 가지고 있다.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자기 자식들에게는 잘 하면서 왜 우리한테는...이해가 안된다. 자식을 키우는 사람이 어찌 그리 독하고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지금은 자식들에게 아파트 한 채씩을 물러주고도 따로 집을 짓고 있단다. 3년전에 고모 때문에 모든 인생을 남의 집에 바친 언니를 위해 눈 딱 감고 고모네 집에 전화를 했었다. 울 언니 좀 도와 주라고...그런데 한마디로 딱 잘라서 거절을 하더라...정말 차갑더라...다시는 연락을 안 할 것이다...절대로!!! 그런데...사촌언니와 오빠들은 고모가 우리에게 한 짓을 알고나 있을까...틀림없이 모르고 있을 것이다...고모부마저도...
나와 언니는 떳떳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물론 한이 있다면 공부를 못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부끄럽지는 않다. 나중에 우리나라로 나가서 살게 된다면 못다한 공부를 시작할 것이다. 울 언니도 머리가 참 좋다. 운전면허증 시험을 쳐서 한방에 합격한 언니다.
항상 어둡던 나의 마음이 내가 이 글을 올리는 동시에 나의 마음은 밝은 곳으로 나올 것이다. 이 글을 올리면서 난 부끄럽다는 생각은 안 든다. 언니도 마찬가지라고 했지만 자식들에게는 미안하다고 한다. 친척이 있으면서도 데리고 갈 수가 없고 어미라는 사람이 제대로 배우지 못한 점이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럽단다...그래서 아이들 교육에 있어서는 욕심을 많이 내는 언니다...
나를 입양으로 보내려고 했던 일...어린 언니를 남의 집에 팔아버린 일이면...나를 70세 노인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했던 일...그래서 나의 생일날 집을 나오게 했던 일...그래서 우리에게 사과를 해야할 사람도 고모이고 부끄러워 해야 할 사람도 고모이고 반성을 해야할 사람도 고모이거늘...그런데 이런 일은 평생 없을 것 같다...
자주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쁜 상처들은 생각이 나기 마련이다. 특히 나의 생일날이면 더욱 더...많이...그래서 오늘 마음을 먹고 나의 블로그에 적어 보았다.
오늘 쓴 것은 대충 간추려서 적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이곳에 다 쓰지 못한 사연을 조금씩 조금씩 써 내려 갈 것이다. 언니는 글을 써서 책으로 내라고 하지만 난 아직 부족한 게 많아서...아직은 무리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하지만 언젠가는 꼭!!!
남편...
12년을 살면서 정말이지 울 언니를 많이 도와 준 남편이다. 항상 고맙고 감사하다...부모와 친척들의 복은 없지만 남편복은 있나보다...
앞으로 언니와 나 열심히 살 것이다. 그리고 행복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