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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야행 - 불안과 두려움의 끝까지
가쿠하타 유스케 지음, 박승희 옮김 / 마티 / 2019년 2월
평점 :

극지방이라고 하면 눈, 빙하, 백야와 오로라가 떠올라요. 평생 가보기 힘들고 차마 여행할 엄두조차 내기 어려운 곳이라 마치 외계를 여행하는 기분이 들 것 같아요.
극지에는 밤이 없는 백야 뿐만 아니라 태양이 뜨지 않는 ‘극야’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네요.
아사히신문사에서 8년을 일하다 본격 탐험가로 전향한 저자가 극지방을 여행한 4개월 여정의 기록이라니 독특한 경험을 뛰어난 글솜씨로 빚어냈을 것으로 기대되었습니다.
뜻밖에도 이 글은 저자의 아내가 출산하는 분만실에서 시작합니다. 어리둥절하지만 출산에 대한 경외심과 두려움을 사실적이고 극적으로 묘사한 부분은 저자의 글솜씨에 대한 믿음과 기대감을 높여요.
그리고 본격적으로 극야행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지구에는 극야라는 어둠에 갇힌 미지의 공간이 있다.
극야는 태양이 지평선 밑으로 가라앉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길고 긴 칠흑의 밤이다. 그 칠흑 같은 밤이 위도에 따라 3개월에서 4개월, 어떤 곳에서는 반년이나 이어진다.p.27

캄캄한 밤이 몇 달이나 계속 된다니 상상만해도 두려워지네요. 저자는 그런 어둠에 갇혀지내는 생활이 사람을 미치게하지 않을까하는 호기심에 극야행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극야지방에 거주하는 원주민조차 극야는 생존에 위협될 정도인데도 말이죠. 그들조차 극야병에 시달린다니 인간은 빛에 가까운 존재인가 봅니다. 저자도 막상 극야의 마을에 도착하여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하기 전 우울해졌다고 하니까요.
저자는 '야성의 절규'에 나왔던 개썰매를 이용했다고 해요. 개썰매는 유일한 이동수단인 만큼 생명과 직결되는 개를 선택하는 건 무척 신중해야할 일이죠. 그런데 어이없게도 저자가 개를 선택한 기준은 바로 사랑스러운 얼굴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비록 인류와 개의 진화사 관점에서 볼 때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핑계를 대지만요. 개와 늑대를 구별하는 큰 특징 중 하나가 개의 네오테니화이다. 네오테니란 유아기의 특징을 남긴 채 어른이 되는 현상을 가리키는 생물학 용어로, 진화에 유이하다고 알려져 있다. p.101

그리고 그 개의 기이한 행동에 대한 에피소드는 원초적이고 코믹해요. 텐트가 눈에 파묻혀 그대로 무덤이 될 뻔한 상황을 묘사한 뒤에 나오는 내용이라 더 웃음이 나옵니다. 이렇게 저자는 강약을 잘 조절해가며 지루할 틈없이 극야탐험을 현실적으로 묘사합니다.
영하 20-30도의 극한 속에서 끊임없이 이동하느라 극야병에 걸릴 여유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빛이 없으니 알 것 같았다. 인간은 자기 존재를 어떤 시간과 공간 안에 뿌리내려야 비로소 안정을 찾는데 그러려면 빛이 필요하다.
빛이 공간고 시간을 관장하고 인간의 존립 기반을 안정시킨다. 인간에게 미래를 내다볼 안정감과 힘을 준다. 사람들은 이를 희망이라 부른다. 빛은 미래이자 희망인 것이다.p.151

밤은 오히려 달과 별들이 있어 밝을 때가 있습니다. 저자를 절망시킨 건 어둠이 아닌 굶주림이었습니다.
극야의 심연 가장자리에 서서 끝이 보이지 않는 검디검은 어둠을 들여다보았다.
극야는 더 깊은 어둠이 되어 끝을 알 수 없는 늪처럼 아가리를 벌리고 내 앞에 서 있었다. p.237

최악의 경우 개를 식량으로 삼을 것을 미리 계획한 저자의 치밀함에 놀라움을 느낍니다. 21세기에 백곰, 늑대의 출현이라니 기이하기도 했어요. 과거 극지탐험가들의 고난을 경험하는 저자가 대단해요. 인간이 극한의 상황에 몰리면 어떤 생각을 하는 지를 실감할 수도 있고요.
가끔 지나치게 솔직한 표현, 뛰어난 글 실력과 한계 상황에서도 잃지 않는 유머감각이 적절히 잘 조화를 이뤄 소설처럼 박진감있고 재미있어요.
* 이 리뷰는 네이버 이북카페를 통해 출판사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