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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없는 중개자들 - 석유부터 밀까지, 자원 시장을 움직이는 탐욕의 세력들
하비에르 블라스.잭 파시 지음, 김정혜 옮김 / 알키 / 2023년 5월
평점 :

이 셋은 참으로 기묘한 조합이었다. 석유 중개 산업의 거물, 영국의 정치인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혁명을 주도한 게릴라 지도자의 조합이니 말이다. 기묘하지만 어쩌면 그 시대의 축소판 같기도 했다. 이념보다 돈이 중요해지고, 원자재 중개업체가 세계 국가 지도자에게 영향력을 미치던 시대이지 않았는가. (p.287)
변화의 바람이 이 대륙 전체에 붑니다. 우리 마음에 들든 말든 이처럼 국가 의식이 성장하는 것은 엄연한 정치적 사실입니다. 우리 모두는 반드시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p.163)
회사의 목표에 자신의 전부를 바치지 않은 인물로 글라센버그의 눈에 들면, 그 상대가 누구든 그는 표정을 매몰차게 바꾸었다. 글렌코어의 한 전직 직원은 “글라센버그에겐 같은 편이거나 아니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습니다.”라며 “퇴사 의사를 밝힌 후로, 글라센버그는 나와 한마디도 섞지 않았습니다.:라고 밝혔다. (p.327)
솔직히 말해 『얼굴 없는 중개자들』을 받아들었을 때는 어려운 책이겠지, 하는 생각이 강했다. “경제나 경영서가 쉬운 턱이 있나”, “그러나 쉬워서 읽는 책은 아니니까”하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그러나 『얼굴 없는 중개자들』은 그런 나의 첫인상을 와장창 깨버렸다. 그래, 물론 쉬운 책은 아니다. 하지만 절대 어려운 책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마치 상류층들의 숨은 이야기를 비치는 드라마처럼 이야기는 흥미진진하고, 놀라웠다.
『얼굴 없는 중개자들』은 파이낸셜타임스, 맥킨지 추천 올해의 경제 경영도서로 세상의 자원을 독점하고, 돈으로 만드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자, 이렇게 이야기하면 쉽다. '밀가루'로 돈을 버는 사람은 밀 농사를 짓는 이들일까, 이것을 사들이고 밀가루로 되파는 이들일까? 답은 아마 이미 내려졌을 거다. 이 책에는 그렇게 세상의 자원을 사고, 다시 세상이 원하는 형태(어쩌면 자신들이 원하는 형태)로 되파는 이들, 그러나 어마어마한 황금 제국을 운영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산업혁명의 물결이 유럽을 휘감은 무렵부터 시작하여 우리가 먹는 소고기와 밀가루, 우리가 매일 타고 다니는 자동차의 자재가 되는 철과 가솔린, 현재 우리를 깨우는 휴대폰의 코발트 등 어쩌면 우리의 일상 전체를 자치하는 모든 원자재에는 사실 보이지 않는 손이 존재한다. 이 흐름을 볼 수 있다면 우리도 원자재로 부자가 되거나 그들이 주식을 사들이겠지만, 우리의 눈은 안타깝게도 대부분 그 본질보다는 '형성된 모습'에 집중하기 마련. 그래서 이 이야기가 더욱 낯설고, 신기하고, 흥미롭게 느껴졌다. 또 『얼굴 없는 중개자들』에 등장하는 수많은 '차가운 회장님'들을 보며 이질감을 느끼기도 했고.
『얼굴 없는 중개자들』을 읽는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던 까닭은, '돈'이 사람 위에 있음을 수시로 깨닫는 부분이었고, 우리나라는 언제나 원자재의 수입국임이 씁쓸했다. 또 환경을 해치는 원자재들을 대체할 수 없는 것도 안타까운 현실이라 느껴졌고. 사실 우리가 몰랐을 뿐, 원자재의 보이지 않는 전쟁은 산업화와 함께 시작되어, 매일 순간마다 진행되고 있다. 총과 칼을 들어야만 전쟁이 아님을 깨닫고, 몇몇 파동들을 떠올리며 오히려 이런 전쟁이 더 무서울 수 있겠다는 생각에 살짝 무서워졌다.
『얼굴 없는 중개자들』의 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우리가 보지 못할 뿐 지금 이순간에도 말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문득 우리 집을 구성하는 것들, 내 일상을 구성하는 것들이 달리 보인다. 이 책은 분명 유쾌하기만 한 책은 아니다. 그러나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찾게 한다. 보이지 않는 이들로 인해, 우리의 오늘은, 또 내일은 얼마나 달라질까.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에 다가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