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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서점 이야기 - ‘세계 서적상의 왕’ 베스파시아노, 그리고 르네상스를 만든 책과 작가들
로스 킹 지음, 최파일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1월
평점 :

목판본의 한계는 분명하다. 40쪽짜리 책 한 권에는 40장의 각기 다른 목판이 필요했다. 구텐베르크의 1454년 성서와 같은 책 한 권에는 본문 1282쪽마다 별개의 목판이 필요했을 것이고 목판 하나에 평균 2500자를 새겨야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목판 인쇄는 짧은 논고, 트럼프 카드, 유럽 전역의 성소에서 순례자들에게 파는 종교 목판화처럼 이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고수익을 올릴 수 있는 사업 분야가 아닌 다른 인쇄에는 비현실적인 수단이었다. (p.211)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책을 읽을 영광을 누리게 해준 방법이나 수단, 그 역할을 한 사람에 관한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현대에 책을 만드는 것 역시 수많은 이들의 노력이겠지만, 과거의 노고와는 다를 것이기에 고서의 내용을 만날 때면 꽤 숭고한 마음이 든다.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국이라는 자부심이 있으면서도, 역사의 풍랑 속에서 수많은 예술품과 고서 등이 잘 보존되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기에 그 감정이 한층 짙은 것이리.
김진명 작가님의 <직지> 덕분에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에 대해 반짝, 관심을 가졌던 시절은 있었으나 (지금 돌아보면 정말 딱, 구텐베르크에게만이었다. 한심하게도) 솔직히 이야기하면 수많은 고서가 어떤 과정으로 우리에게 전달될 수 있었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 같다. 몇몇 책에서 간간히 언급된 내용은 읽었으나 <피렌체 서점 이야기>를 읽고 난 지금, 15세기 '활자중독자'들의 지독한 책 사랑을 이제야 겨우 알았다는 생각이 든다.
르네상스를 이야기하면 주로 미술품을 이야기하게 되는데, 예술성이 발달할 때, 딱 그림으로만 혹은 음악으로만, 문학으로만 발달하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한 이 책은, 마치 소설을 읽듯 혹은 잘 만들어진 예술영화를 보듯 생생한 문장들이 이어진다. 그 생생함 덕분에 몇 장 읽기도 전에 독자는 피렌체의 길 한가운데에서 베시파시아노의 필사를, 책을 수집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시작은 '먹고 살기 위해'였을지는 모르지만, 결과적으로는 천 여권의 책을 제작하고, 인문주의자들의 토론장이 되기도 하고, 세월에 묻힐 뻔했던 우리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고대 철학자의 빛나는 문장들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의 삶을 통해 우리는 고대 책들이 어떻게 발견되고 재탄생되는지, 서점과 책 그리고 작가의 발전이 어떤 양상으로 변해가는지, 종교와 예술이 어떤 유기적인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을 이어갔는지 자세히 살피게 된다. 또 필사에서 인쇄로 옮겨가는 책 제작 방식에 대해서도 무척이나 자세히 다루고 있어, 그야말로 그 시절의 '책'이 우리에게 오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만날 수 있게 된다.
어쩌면 나는 한심하게도, 구텐베르크가 금속 활판을 어떻게 만들고, 그것이 인쇄술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만 관심을 가졌을 뿐, 도서관이 어떻게 첫발을 들였는지 인쇄술에 사용된 책들이 어떻게 보존됐는지, 그 역할을 한 것이 누군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난 지금, 어쩌면 구텐베르크만큼 베스파시아노도 '책'에 큰 공을 했다고 생각해본다.
빠르고 편리한 기술만이 먼저 살아남기에 당연한 순서로 인쇄술로 인해 수많은 책이, 서점이 생겨났고 결국 베스파시아노는 58세의 나이에 서점 문을 닫는다. 그러나 그는 은퇴 후에도 여전히 신념을 지킨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과거의 지혜를 다시 포착하고 그것을 현재를 위해, 페트라르카의 손자들이 믿은 것처럼 더 행복하고 더 나은 삶의 방식을 배울 수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되살리고자 했던 꿈의 적극적인 협력 가(p.547)로 남게 된 것이겠지.
분명 읽기 쉬운 책은 아니었다. 읽는 내내 책에 등장하는 또 다른 책을, 작가를, 배경을 검색하고 공부해야 했다. 그러나 이 책은 마법처럼 나를 묶어두었고, 결국에는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엄청난 스토리텔링에, 책에 대한 경의에 벅차게 만들었다.
감히 이 책을 평가하자면, 애서가들이 책을 더욱 사랑하게 만드는 마법의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