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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고 멀쩡한 중독자들
키슬 지음 / 좋은생각 / 2022년 12월
평점 :

누구보다 인생을 열심히 사는 내가 알코올 의존증이라고?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문자 그대로 어리고 멀쩡했다. 알코올 의존증은 나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였다. 나는 혼란스러웠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사람이란 정말 재미있는 동물이 아니던가. 충격과 수용은 완전히 별개의 일이었다. 나는 그날의 충격마저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시는 것으로 풀어버렸다. (p.65)
<어리고 멀쩡한 중독자들>. 이 책은 제목만으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나는 많은 술을 마시는 편은 아니지만, 종종 자주 맥주 한두 캔을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뭐 한두 캔이 취할 정도는 아니지만, 언제인가 감정의 변화에 맞춰 술을 생각하면 알코올 의존증이라는 말을 읽은 적이 있던 터라 궁금했던 것.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내 주변의 꽤 많은 사람, 그리고 나도 어느 측면에서는 “고도 적응형 알코올 의존증”이다. 즉,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히 잘 살지만, 속으로는 알코올의 힘에 기대기도 하는, '속으로는 알코올 의존형'이라는 것. 다행인 것은 아직 의지로 바꿀 수 있는 단계이기에 이 솔직한 '자기 고발형' 책은 나에게 큰 도움을 준 듯하다.
부지런하고 열정적인, 그러나 술을 좋아하는 어쩌면 흔하디흔한 20대였던 작가는 어느 순간 자신의 식이장애도, 중독자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만났다고 기록한다. 사랑받고 싶어서, 인정받고 싶어서 시작된 행동은 점점 더 스스로를 수렁으로 밀어 넣었고, 스스로 괜찮다고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마음도 갈아먹었다. '진짜로 멀쩡한 사람이라면 그토록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을까? (p.690)' 자괴감과 타인과 비교하며 얻는 가짜 만족은 그녀를 원래대로 돌려주지 못했다. 촘촘한 그녀의 감정선을 읽으며 나의 마음을 자주 들여다봤다. 나에게도 그런 시간들이 있었다. 다행히도 나에게는 살아야 할 이유가 있기에 안간힘으로 버텼으나, 그녀는 너무 어린 나였던지라 더 빠른 속도로 힘들어졌던 것 같다.
누군가의 중독기를 읽는 것도 마음이 아픈데, 자신의 중독기를 적어내는 마음은 오죽했을까. 아마 그녀는 이 문장들을 꺼내며 적잖이 아프고 힘들었을 것 같다. 그러나 그녀가 쏟아내는 문장들로 인해 독자는 자신의 현실을 바라보게 되기도 하고, 자신의 모습을 보다 객관적으로 만난다. 그녀의 어둠 속 모습과 내가 겹치는 점을 만날 때마다 나는 나를 제대로 짚으려 노력했고, 다시 밝은 곳으로 내 마음을 꺼내오려고 노력했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책을 읽고 난 후에 마음 한켠에 남아있던 응어리 같은 것을 꽤 꺼내온 것 같았다.
가장 공감이 갔던 부분은 “중독자가 되기 위해 너무 큰 노력을 했다”라는 부분이었다. 그녀는 중독이란 것 자체가 갑자기 나타나는 증세가 아닌, '시간이 걸리는 병'임을 정확히 꼬집는다. 맞다. 우리가 알코올 중독(까지는 아니더라도 의존증) 정도로 술을 먹으려면, 그동안의 시간과 술과 돈이 필요했던 거다. 이것을 자각하고 보면 이야기는 꽤 쉬워진다. 그녀도 독자도, '나의 통제권은 내가 갖자'라는 다짐을 함으로써 오래 걸리더라도 자신의 삶을 건져 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미 세바시 강연으로 유명했던 '국내최초 여성 알코올 중독자 유튜버'인 그녀를 타이틀로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나 역시 그저 선입견으로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 같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자신의 감정을 이토록 솔직하게 기록할 수 있는 그녀가 대단하다고 생각했고, 세상을 향해 자신이 아팠던 것을 인정하고 나아갈 수 있음이 멋있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과정이 있었기에 그녀가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어 다시 살아갈 수 있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책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애주가'와 '알코올 중독자' 사이의 폭은 몹시 좁다. 그 외의 수많은 중독 역시 마찬가지다. 'ㅈ'만을 밟아도 이미 중독의 늪에서 헤어날 수 없는 거다. 스스로 조금이라도 어떤 중독에 발을 얹고 있는 것 같다면 부디 이 책을 만나, 그녀의 깊은 슬픔과 동굴을 빠져나오는 과정을 만나보면 좋겠다. 그 아픔을 이겨내는 과정은 분명 독자에게도 희망과 위로가 되어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