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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인간다움에게
박정은 지음 / 한빛비즈 / 2022년 11월
평점 :

□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최고의 모습을 알아보고 또 좋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내 주변 사람들의 가장 좋은 모습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주변 친구들의 좋은 점을 많이 알면 알수록 내 삶의 질은 더욱 높아질 것이고, 그 상대의 삶의 질도 더 좋아질 것이다. (p.102)
□ 긴 시선은 느리고 천천히 움직이며 고요함을 선사한다. 내 속에서 많은 시끄러운 이야기들이 소란을 피울 때 나의 시선은 잘리고, 또 불연속적인 것이 된다. 있는 그대로 나무가 움을 트고, 잎을 틔우는 것을 보는 긴 시선에는 내면의 침묵과 고요와 공존한다. (p.101)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인간답다'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 듯하다. 인간답다는 게 무엇인지 점점 모를 일이기도 하고, 뉴스 안에는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 더 많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상처받은 인간다움'에 라는 제목의 이 책은 어쩌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일상', 그리고 '자아'를 이루는 것들, 그리고 그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책은, 가벼운 수필을 읽듯 쉬이 읽히지만, 마음에 남기는 잔상이 절대 가볍지는 않다. 내가 숨 쉬는 일상, 그 일상 속의 나, 그리고 수많은 '나'들로 이루어진 세상에 대해 많은 생각과 질문을 던지게 하는 책이었다. 그 생각들이 나의 하루를 보다 의미 있게 하고, 나를 조금 더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시간으로 연결되었다.
수녀님이자 영성학 교수라는 이력답게 일상이 영적인 순간들도 만날 수 있고, 또 그로 인해 조금 더 숙고하는 삶을 엿볼 수 있었다. 그녀의 느린 호흡과 시선을 통해 독자는 위로를 얻고, 타인에게 더욱 너그러운 시선을 갖는 너그러움까지 얻을 수 있는 것이다.
□ 노트를 사용하는 사람, 일기나 메모를 쓰는 사람, 그리고 매일매일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삶은 훨씬 더 촘촘하다. 끝없이 반복되는 똑같은 하루라고 해도 시작점을 만들고, 또 내가 정한 정착지에서 나의 수고와 달려온 길을 좀 더 돌아보고 나 스스로 귀히 여기며 어루만져 주면서 정돈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 리듬이 생기고 아름다움이 생겨난다. (p.39)
저자가 미국에 터를 두고 있기에, 약간의 차이는 느낄 수 있으나 그렇다고 그것이 '다름'의 결은 아니다. 공간은 다르지만, 사람의 보편성은 크게 다르지 않고, 인간 본연의 고민은 결국 같은 선상에 놓여있다는 생각이 꽤 많이 들었다. 특히 작가의 이야기 확장능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상과 비정상. 차별과 구별, 불안과 애착, 차단됨과 이어짐 등을 생각하게 하는 수많은 이야기와 이주와 난민, 공존, ai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에 만연한 문제(혹은 과제)들 등, 꽤 다양한 주제의 글들 속에서 공동체 속의 개인, 그리고 그 개인들이 이루며 살아가는 공동체 양쪽을 생각해보게 하니 말이다.
꽤 어렸을 때 '풍요 속 빈곤'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는데 그때는 그 말이 도저히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최근까지도 나는 그랬던 것 같다. 삼십 대 후반이 되며, 또 이 책을 읽으며 그 말의 의미를 되새긴다. 가진 게 많아서 나눌 수 없는 사람들, 챙길 것이 너무 많아서 잊고 사는 것들, 너무 많은 타인으로 인해 놓쳐버린 자신. 한 해를 새로이 시작하며, 살짝 늦은 감이 있지만, 올해는 내면을 더욱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자고, '많은 것'에 현혹되기보다는 '나를 채우는 것'을 목적으로 살아보자고 마음먹어본다. 아마 이 책은 매번 상처받지만, 또 매번 굳어지는 우리에게 도닥임이 되어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