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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별빛처럼 빛난 자들 - 20세기 한국사의 가장자리에 우뚝 선 이름들
강부원 지음 / 믹스커피 / 2022년 11월
평점 :

전형필은 골동과 서화를 살 때도, 학생들을 교육시킬 때도, 문화재를 연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도 인색하지 않았다. 국외로 반출된 국보급 문화재를 다시 사들이느라 전 재산을 소진하다시피 해 말년에 이르러 자산이 형편없이 쪼그라들었을 때도, 자신을 찾아온 역사학 교수와 문화재 담당 기자, 미술잡지 관계자들을 늘 풍성하게 먹이고 재웠다. 자신을 도와 일을 맡아준 사람들의 은혜를 잊지 않고 챙겼다. (p.260)
이 책에서는 여전히 동시대를 살고 있거나, 최근까지 함께 웃고 울던 이들- 그러나 생을 살아냄과 동시에 역사를 써 내려간 인물 26인을 다룬다. 조선 최고의 무용수 최승희, 이상·김환기의 여자를 넘어 세상을 이끌었던 김향안, 강단 있는 자유주의 화가 천경자, 한국농구의 여왕 박신자, 미니스커트로 표현되기에는 너무나 많은 업적을 남긴 윤복희, 한국 야구의 불꽃 최동원, 훈맹정음의 박두성, 노동자들을 지켜낸 전태일, 간송문화재단의 전형필, 시인 기형도, 가수 김추자, 한대수, 홍청자. 김창완, 김동원 감독, 조영래 변호사, 함세웅 신부님, 정종명, 현봉학, 진창현, 김벌래, 김중업 건축가, 이창호, 김일, 성철스님까지. 이미 익숙한 이야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으나, 고저 없이 모든 인물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각 인물에 대한 탄탄한 정보와 절제된 감정이 균형을 매우 잘 이루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작 '역사에 불꽃처럼 맞선 자들'에서 역사의 그늘에 가려졌으나, 자신의 이름을 묵묵히 빛낸 이들을 담담히 전하여 나를 울컥하게 했던 작가님은, 이번 책 역시 그들의 업적이나 명성보다는 그들의 삶, 살아낸 흐름을 기록한다. 그래서일까. 한 발치 물러선 시각이 만들어낸 거리감이 오히려 그들을 나처럼 그저 '사람'으로 바라보게 하여 오히려 그들의 업적을 더욱 반짝이게 했다고나 할까. 글에서 느껴지는 작가의 성정은, 자신을 낮춰 타인을 더 빛나게 만들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가 담아낸 역사 속 인물들의 이야기는, 독자에게 더 많은 감정을 품게 하는 느낌이다.
이상의 아내에서 김환기의 아내로, 그러나 다시 김향안이자 환기재단 설립자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낸 김향안의 이야기에서는 당대에 상상조차 하기 힘든 여성의 진취성과 개방성을 느낌과 동시에 같은 여성으로서 척박한 삶이었겠다는 애잔함을 준다.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는 데도 인정받지 못한 천재 화가 천경자 역시, 화가로서의 예술성은 당연히 대단하나 아버지가 다른 아이들을 키워내며 삶도 놓지 않은 강인함이 더 마음에 닿는다. 작가의 문장에는 감정이 배제되어 있으나, 오히려 그런 절제된 문장이라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던 전태일의 깊고 슬픈 분노가, 미니스커트에 가려져 세상의 등불로 더 빛나지 못한 윤복희의 시대적 안타까움이, 신념 때문에 더 빛나지 못한 최동원의 시간들이, 모두가 포기하라고 할 때도 자신의 길을 꿋꿋하게 걸은 김윤심의 뚝심이 더욱 짙게 느껴진다. 비 오는 날 커피 향이 더 강하게 느껴지듯, 차분히 이어지는 그의 문장에서 독자는 더 많은 감정을, 더 많은 감동을 얻게 되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작가의 말을 펼쳐 들었다. “한낮의 태양처럼 강렬하고 뜨겁진 않지만,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처럼 은은하게 반짝이는 사람들, 지난 한 세기 동안 자신만의 고유한 색을 띠며 밝게 빛나던 존재들을 찾아보니 아무래도 그렇게 모였다. 이들이 일평생 온몸으로 써 내려간 자기 서사를 역사란 이름으로 다시 정리해 옮겨 적었을 따름이다. (p.5)”라고 기록한 작가의 말을 읽으며 나는 또 한 번 감동을 곱씹었다. 내가 문장에서 느낀 것을 확인받는 기분도 들었고, '일평생 온몸으로 써간 자기 서사'라는 말이 괜히 울컥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한낮의 태양 같은 사람들만 기억되기도 바쁜 세상에서, 별처럼 어느 자리에서든,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빛나는 이들을 발굴해주는 분들이 있어 우리는 그 빛을 느낄 수 있다. 작가의 다음 이야기가 벌써 기대되는 건, 이번에는 또 어떤 별들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 나 역시 내 자리에서 부지런히 반짝이며 살아가야지-하는 다짐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