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할인가에 판매합니다 - 신진 작가 9인의 SF 단편 앤솔러지 네오픽션 ON시리즈 1
신조하 외 지음 / 네오픽션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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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를 하기에는 감정적으로 지쳐 있었다. 미안한 마음과 응어리진 우울감을 모두 토로하고 싶었지만 너무 벅찬 일이었다. 망설인 끝에 여자는 남자에게 문자메시지를 전송했다. 여자의 심리 상태를 분석한 AI가 자동으로 생성한 문자메시지를. (p.166)


처음에는 이 책을 읽을지 말지 고민했다. sf를 좋아하지 않기도 하고, 9명의 단편이라길래 짤막짤막 재미가 있을 만 하면 끝나는 것 아닐까 하는 선입견에서였다. 순전히 킬링타임용으로 펼친 이 책을 읽는데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분명 sf 소설인데 마치 머지않아 우리의 주변에 이런 일이 '당연한 듯' 있을 것만 같고, 나만 모를 뿐 어쩌면 이미 이런 움직임이 시작되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살짝 무서운 마음도 들더라. 무서워서 무서운 게 아니라 사실적이라 무서운 기분이라고 하면 공감할 수 있을까. 


사실 이미 우리의 실상에 ai는 깊숙이 들어와 있다. 우리 집 꼬마만 해도 자연스럽게 “친구야, 클래식 들려줘~”를 외치곤 하니 말이다. 조명이나 문, 텔레비전 등의 수많은 기계가 ai로 작동될 뿐 아니라 음식 배달이나 초기진찰 등의 '사람만이 할 수 있을 것 같은' 업무도 점점 로봇이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구글 날씨를 기반으로 하여 “오늘 날씨에 적합한 음악을 추천해 드릴게요.” 정도의 멘트는 이제 우리에게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다. 


이 책 역시 이러한 배경으로 시작되었으리라. 분명 편리를 위해 시작된 문명의 발달은 그저 좋을 수만은 없다는 것을 필연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책을 읽는 내내 뒷맛이 씁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무엇인가'가 인간의 대리가 될 수 있다는 것, 감정을 판매할 수 있고, 내 감정을 ai가 유추하여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 소름 돋는 기분이었다. 인간의 고유한 영역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어느새 그렇지 않음을 느낄 때 오는 공허함이랄까. 나는 이 책이 너무 쓸쓸하게 느껴졌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내가 생각한 '인간다움'은 과연 언제까지 보장될 수 있든지였는데, 책을 덮고 난 후 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묵직한 마음이 든다. 언제부터인가 점점 이런 류의 책이 단순히 읽고 끝나지 않는 것은 막연히 그것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은 아닐까. 그저 이 모든 이야기가 작가님들의 기발함이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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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바 지구 수비대 1 : 기후 위기 - 국내최초 몸개그 액션 환경학습만화 라바 지구 수비대 1
김정욱 지음, 김정한 그림, 장미정 감수 / 다산어린이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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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우리 집 지구수비대 녀석의 손에서 오래오래 붙어 지낸 책이 있었다. 제목부터 취향 저격인 “라바 지구수비대”. 꿈틀꿈틀, 어른들 눈엔 징그럽고 아이들 눈엔 귀여운 라바 친구로도 부족해 액션 만화라니! 아이들이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재미만 있는 책 말고 좋은 정보까지 주는 책을 읽게 하고 싶은 부모님들께도 점수 깎일 일이 없는 게 '기후위기'를 주제로 한 학습만화이기 때문. 

 

최근 학습만화를 즐겨보던 터라 더욱 취향 저격이었던 탓에 아이가 잠들고 나서야 겨우 구경할 수 있었는데, 내용을 읽어보니 왜 “학부모 사전 평가단”이 4.86이라는 엄청난 점수를 준지 이해가 되었다. 어른이 보기에도 너무 재미있는 구성 하며, 알찬 내용까지! 뭐하나 부족한 게 없었다. 

 

기후 위기상황에서는 벌레들도 더운지 레드와 옐로우도 땀을 뻘뻘 흘리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폰트도 너무 귀엽고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표정이 너무 귀여워서 어른이 보기에도 웃음이 났다. 중간중간 상식이 소개되는 칸이 있었는데, 쉬운 말로 적절히 잘 설명하여 어린아이들이 읽기에도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교과서 어디와 연계되는 과정인지 표시해두어 학부모들이 다음에 찾아볼 때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또 군데군데 미로찾기나 틀린 그림 찾기 등의 게임이 들어있어, 아이들이 집중력이 흐트러질 때마다 잡아주기도 했다. 

 

사실 처음에는 굳이 지구의 기온을 애벌레들로 이야기해야 하나 하는 반신반의한 마음도 있었으나, 책을 읽다 보니 오히려 아주 작은 생명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가 기후의 영향을 받고 환경에 책임과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아이들이 직간접적으로 익히게 하는 구조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익살스러운 것을 좋아하는 초등학생들에게 매우 인기 많은 캐릭터이기도 하고.) 

  

우리 아이는 환경에 아주 조금 관심을 가졌을 무렵 우연히 참가한 환경캠페인에서 “어린이 지구수비대 선서식”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그것을 계기로 환경에 점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길가의 쓰레기를 줍고, 빨대는 사용하지 않으며, 재활용 쓰레기도 직접 버린다. 나와 소통해온 분들은 아시겠지만 쓰레기 줍는 집게를 들고 운동을 하는 꼬마가 된 것이다. 그런 아이가 이 책을 만나 시너지효과를 얻었다. '지구를 구하는 환경정보'페이지마다 인덱스를 붙이며 정독하고 환경마크가 붙어있는 물건만 사자고 나에게 건의하기도 했다. 

 

이 이야기를 적은 이유는 어쩌면 이 책이 많은 아이에게 그런 '계기'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다. 아이들에게 어려운 설명으로 지구를 지켜야 하는 이유를 주입하기보다는, 직접 환경을 보호해야 하는 이유를 깨달으면 아이들은 어른보다 훨씬 잘 실천한다고 생각하기에 이 책을 많은 아이가 만나면 좋겠다. 

 

주인공들이 직접 환경문제를 직면하고 해결하는 책을 읽으며 우리 아이들도 스스로 지구수비대가 되어, 작은 과제들을 실천해나간다면 분명 환경위기는 조금 더 먼 미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이 책이 수많은 지구수비대를 양산해내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1가구 1 라바”를 응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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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에도 연습이 필요합니다 - 매력적인 사람이 되기 위한 공감의 기술 아우름 55
권수영 지음 / 샘터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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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였던 1919년 3월 발표된 <3.1독립선언서>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자신을 바로 세우는 것이지 결코 남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이 글처럼 다시 자기 자신의 숨겨진 감정부터 따뜻하게 돌아볼 수 있다면 무한 경쟁으로 빼앗긴 우리 마음에도 봄이 오지 않을까요? (p.65) 


언젠가 아이와 함께 참가했던 한 교육에서, 우리 아이는 “엄마가 해주는 행복한 말”로 “그랬구나, 생각을 말해줘서 고마워”를 적었다. 대부분의 아이처럼 “사랑해”, “고마워”, “너는 소중해” 등의 문장을 나열한 뒤에 적힌 문장이었다. 그때 강사님은 이 아이의 엄마가 누구냐고, 손 한번 들어봐달라고 하시더니 손뼉을 쳐주셨다. 난 그 문장을 적으리라 생각도 하지 않았고, 말을 할 당시에도 큰 의도를 가지지 않았기에 어안이 벙벙했다. 어리둥절해 하는 나에게 강사님은 그 말이 아이가 마음을 이야기하게 하는 말이라고 하셨다. 어릴 때는 대부분의 아이가 마음을 이야기하지만 커갈수록 그게 줄어드는데, '엄마가 내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어.'라는 느낌을 받는 아이들은 나이를 먹어도 엄마에게만큼은 속마음을 터놓을 수 있을 거라고, 앞으로도 아이에게 귀 기울여주시라고 하시며 말이다. 


그때 나는 뿌듯함과 걱정이 반반 들었다. 내가 끝까지 공감하고 경청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어느새 아이는 자기 생각이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 종종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있는 어른들을 '눈치'채기도 한다. 말로만 '공감하는 척' 하면 입을 다물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래서일까. 이 책의 말들이 구원투수 같았다. “공감에도 연습이 필요합니다.”라는 우리가 잘한다고 착각하지만, 정작 제대로 못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공감'을 딱딱 짚어주는 참고서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수많은 감정과 감성에 묻혀 '풍요 속 빈곤'한 시대를 보내는지 모른다. 우리는 거의 매일 누군가에게 “좋아요”를 누르지만, 속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진짜 공감해주지 못하고, 받지 못하고 있는지도. 단순한 나이의 장벽을 넘어 사상이나 가치 등의 차이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존감이 낮아 자신도 타인도 사랑하지 못하는 세상. 작가는 이러한 시대를 '감정적 문맹'이라 칭하며 정서적 교류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 내용이 너무 안타까우면서도 현실같이 느껴져 마음에 쓴맛이 느껴졌다. 


또 넘치는 오지랖이나 일반화로 타인의 말을 막아버리는 사례들을 들으며, 아이들이 이런 대화방식을 가진 어른들에게 더 많은 상처를 받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아이가 이야기할 때 한발 물러서서 들어줘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했다. 특히 많은 도움을 얻은 것은 3장으로 실제 공감을 잘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제시되었다. 특히 공감이 갔던 것은 상대방의 웅덩이 아래까지 함께 내려갈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우리는 흔히 너의 슬픔을 이해한다고 말은 하지만, 그 사람과 같이 수렁에 들어가기는 쉽지 않은데, 그러한 감정교류를 가지는 사람에게 마음을 열기 쉬워진다는 작가님의 말은 마음을 둥둥 울렸다. 혹여나 우리 아이가 훗날 감정의 수렁에 빠지는 날, 기꺼이 같이 들어 앉아있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그러려면 늘 아이의 감정에 귀를 기울여야지 하고 결심하고 또 결심했다.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들을 옮겨적다 보니 책 한 권을 다 필사할 뻔했다. 그만큼 이 책에는 타인과 감정을 교류하는 법을 여러 방면에서 잘 제시하고 있다. 공감 능력이 신뢰와 행복, 사랑이나 우정까지 만들어내는 초석이라면- 나도 아이도 더 부지런히 키워야 할 능력일 테다. 물론, 아이를 넘어 다른 가족, 친구, 지인에게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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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장소들의 지도 - 잃어버린 세계와 만나는 뜻밖의 시간여행
트래비스 엘버러 지음, 성소희 옮김 / 한겨레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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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년대에는 이 지방에 철로를 깔던 기술자들이 불가사의한 석조물들을 보았지만, 선로 공사를 방해하는 애물단지로 여겼다. 실리적이고 실용적인 사고방식을 지녔던 그들은 서슴지 않고 벽돌을 기념품으로 챙기거나 다른 건설현장에 가져다 썼다. 하지만 바네르지와 동료들은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근대 고고학 발굴 방식을 개척하고 이집트 왕가의 계곡에서 투탕카멘 무덤을 발굴한 선구자 하워드 카터를 본받았다. 그들은 이 기이한 벽돌들에 수많은 사람의 처음 추측과 달리 뭔가가 더 있으리라고 짐작했다. 그 직감이 옳다는 사실이 곧바로 드러났다. (p.12) 



처음 책을 보고는 책의 소재나 완성도에 깜짝 놀랐고, 두 번째는 의아했다. 사라져버린 장소? 잃어버린 세계?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은 곳을 여행한다고.? 지금처럼 GPS가 발달한 시대에 그런 곳이 있기나 할까 생각했는데, 첫 장부터 빨간 점이 콕콕 나를 바라본다. “응, 그런 곳이 있어. 그런 곳을 37군데나 다녀왔는걸” 하며 말이다. 이렇게나 많은 곳은 왜 세상에서 사라져가는 걸까. 그의 발자취를 따라 낯선 곳을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사라졌다가 다시 찾은 도시와 안타까움 속에 사라져가는 도시들을 모은 이 책은 그림자 혹은 폐허로 자리하고 있으나 사라진 문명과 사회였던 도시를 기록하고 있다. 어쩌면 세월을 거듭하며 사람의 손을 타온 지역보다, 숨겨진 이야기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이 도시들을 끈질기게 추적하는 이들이 있는 것이겠지.


44장의 지도, 77장의 도판은 특별한 여행을 하게 한다. 한때 번영했으나 묻혀버린 도시들, 더이상 갈 수 없게 된 도시들, 인간의 개입이나 자연으로 인해 사라져가고 있는 도시들을 향한 그 여정은 안타까움이 범벅이 된다. 글레이셔국립공원의 빙하를 10년 안팎에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이 더는 미국의 일이 아니라, 전 세계인들이 긴장 속에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임이 선명히 느껴졌다. 십여 년 전, 부산의 해안도로가 물속으로 가라앉는 영화는 어쩌면 가까운 미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공포심마저 들었다. 


이 책에서 만나는 도시들에서 인간의 이기와 문명발달의 그림자를 보게 된다고 말하면 너무 극단적일까. 그러나 분명, 그 아름답던 도시들을 폐허 혹은 '사라진 곳'으로 만드는 것이 인간임을 알기에 이 책이 주는 의미는 더욱 깊다. 고고학이나 지리학, 혹은 역사학적으로도 의미를 지니는 도시들이겠지만, 현 인류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그것보다 크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을 만나고, 사라진 도시들을 '깨닫고' 변화해야 한다. 

  

문득 생각해본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들은 사진과 웹 속에 영원히 살아있겠지만, 그 실물들은 더 빠른 속도로 사라져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하다못해 내가 사는 작은 동네도 일주일만 걷지 않으면 낯선 가게가 생겨있을 만큼 빠르게 변화는 세상 속,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조차 지키지 못하고 놓아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라져가는 장소들을 그저 추억 속에 담아둘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 같다. “건강한 미래까지 품을 수 있을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p.142)는 작가의 말은, 자연이 전하는 '온화한 경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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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철도 - 근대화, 수탈, 저항이 깃든 철도 이야기
김지환 지음 / 책과함께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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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표지를 멍하게 보다가 나는 “희성 씨(미스터 션샤인)가 가질 수 없는 조선이 쓸쓸하고 무용하다고 말할 것 같아.”라는 말을 내뱉었다. 허무맹랑한 소리였으나, 이 책을 읽는 내내 '간절히 바라도 가질 수 없던 조선'이 떠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일까. 우리나라 수탈에 큰 역할을 했던 철도는 아이러니하게도 노선의 큰 변화 없이 세월을 쌓아 올리며 역사와 경제를 이어왔다. 아마 그래서 이 책은 더 높은 의미를 지닐 것이다. '철도'가 단순한 주제이기보다 근현대사를 전하는 '통로'랄까. 맞다. 어쩌면 이 책은 18세기 후반에서 출발하는 '역사 열차'인 셈이다.

 

 

그는 기차를 통해 획기적으로 달라진 시간과 공간을 인식하고 충격에 휩싸였다. 그는 한일관계에 드리울 어두운 그림자를 어렴풋이나마 예측하지 않았을까? (p.25)

 

'불수레'라 불리며 우리나라에 등장한 증기기관차는 근대화의 산물인 동시에 한반도를 가로지르며, 조선의 숨통을 막은 주범이다. 근현대에 관심이 많은 편이기에 이미 알던 내용이지만 철도로 엮어진 이야기들은 새로운 슬픔이었다. 바위를 달걀로 치는 것처럼, 철도에 돌을 던지고 철로에 가마니를 얹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달리는 일본을 막을 수는 없어도 하루라도 늦춰보고자 하는 간절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안중근 의사, 강우규 의사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거점'이 된 기차역 의거들은 단순히 일본의 우두머리를 처단하는 것이 아니라, 역의 마비와 일본에는 혼란을 주고 한국인들에게는 작게나마 숨을 틔우는 일이 되었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안중근은 그가 바로 이토임을 직감했다. 러시아 관리들이 호위하고 오는 중에 맨 앞에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을 가진, 일개 조그마한 늙은이가 염치없이 걸어오고 있었다. 안중근은 “저것이 필시 늙은 도둑 이토일 것이다.”라며 단총을 뽑아 들었다고 회고했다. (p.147) 

 

서울역 역사 앞에는 두루마기를 걸친 노인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 이 노인은 1919년 제3대 조선 총독 사이토가 부임하던 9월 2일 남대문 역(서울역)에서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이다. 해방 전에 강우규는 한국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독립운동에 상징적 인물이자 큰 어른으로 존경받았다. (p.151)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위해 필요했으나 결과적으로는 한반도를 수탈하는 총과 칼, 군인들을 실어나르기도 하고, 소중한 문화재들을 실어야 했던 철도는 근현대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일 테다. 정치나 군사, 세계의 정세로 우리의 근현대사를 바라보는 시각도 물론 좋지만, 철도라는 필수 불가결한 소재를 바탕으로 책이나 잡지, 신문기사, 편지, 보고서 등의 사료를 인용하여 역사를 풀어내는 이 책 역시 우리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한국전쟁이 한순간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역사의 연속 선상에서 다다른 것이기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역시 쉬이 보이지 않는다는 작가의 말이 내내 떠오른다. 역사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말처럼, 전쟁 말고도 수많은 도구, '편리성' 때문에 이면은 어두운 그림자로 가려진 수많은 것들이 앞으로의 미래를 어떻게 바꾸게 될지 우려스러운 마음이 되기도 한다. 

 

오늘도 달리고 있는 기차처럼 역사도 쉼 없이 달리고 있음을 기억해서 문명의 부정적인 면을 키우는 반복을 거듭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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