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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불꽃처럼 맞선 자들 - 새로운 세상을 꿈꾼 25명의 20세기 한국사
강부원 지음 / 믹스커피 / 2022년 5월
평점 :

남자현은 죽기 직전, 아들 '김성삼'과 손자 '김시련'에게 소중히 보관해온 행랑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249원 80전'이 들어있었다. 그녀는 이 돈을 조선이 독립했을 때 '독립축하금'으로 쓰라는 유언을 남겼다. 실제로 이 돈은 해방 후 1946년 3.1절 기념식에서 김구와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달됐다. (p.47)
학창시절부터 역사서를 좋아하긴 했으나, 여전히 역사는 어렵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면 학창시절에는 '문제를 잘 푸느라' 어려웠고, 지금은 온 마음을 다해 '감사하고 죄송해하며 읽느라' 어렵다. 어느 시대의 위인인들 우리에게 좋은 영향을 주신 분들이 대다수니 감사하지 않겠냐마는, 죄송한 마음이 함께 드는 20세기의 역사는 시간이 흐를수록 나를 더 공부하게 하고 생각하게 한다. 언제인가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김이경 저. 한겨레 2021 출판)”를 읽고 한동안 묵직함을 떨칠 수 없었는데, 오늘 소개할 이 책 역시 그런 묵직한 찬사를 할 수밖에 없는 책이다.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 리뷰 https://blog.naver.com/renai_jin/222274419032)
한 드라마에서 보통의 여인들이 방안의 꽃으로 살다 간다면, 독립운동을 하는 이들은 불꽃으로 산다고 하였던가. 이 책은 그렇게 불꽃으로 살다간 25명을 이야기한다. 그야말로 책 제목처럼 새로운 세상을 꿈꾼 “역사에 불꽃처럼 맞선 자들” 이야기다. “세상에 맞서 싸운 여자들”, “최초의 도전을 감행한 자들”, “시대와 불화한 열정과 분노” 세 가지 주제로 나누어진 이 책은 25명 어느 하나 경중을 따질 수 없이 묵직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강주룡, 남자현, 김점동, 나운규, 김승옥 등을 비롯하여 '감사하고 꼭 기억해야 할' 이름들을 또박또박 부르고 있다.
세상에 드러난 이들의 이야기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도 있었으나, 25명의 이야기는 하나하나 저마다의 서사와 깨달음을 지니고 있었다. 담담한 문장으로 이어지는 글이나, 결코 담담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 아무렇게나 잊혀도 무방한 이름은 없다며, 그들의 이야기를 세상으로 꺼내온 작가님도 그들이 바꿔놓은 '어제'를 고마워하고 미안해한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역사서를 꽤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알지 못했던 5개의 이름과 그래도 무엇을 한 사람이라고 한 줄 정도는 나열할 수 있는 20개의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 책을 읽는 내내 자세를 한번도 바꾸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자세를 바꿀 틈도 없이 심취하여 읽었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이 책은 25명의 삶을, 사상을, 업적을 촘촘하게 기록하고 있다. '메인의 역사'가 아니라 읽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 이 책에는 역사의 그늘에 숨겨진 조연이 아니라, 25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 책을 만나고 나면, 그들이 왜 주인공인지 너무나 여실히 깨닫게 될 것이다.
나운규의 성난 얼굴은 견고한 성벽을 향해 던진 작은 달걀 하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운규는 그 후 한국 영화계가 낳은 '기린아'이자 '풍운아'가 됐다. (p.231)
나운규에 대해 작가가 기록한 이 말은, 어쩌면 이 책의 25명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견고한 성벽을 향해 작은 달걀을 던졌다. 달걀 파편이 자신에게 튀어도, 때로는 성벽이 무너져도 발을 떼지 않고 계속해서 달걀을 던졌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가 있다. 그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고, 그래서 정말 세상이 바뀌었다.
나도 한때는 그들과 내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변하기까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오늘 이 책을 통해, 다시 확인받는다. 역사는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동시에 비추는 거울임을. 그들의 신념으로 우리의 오늘이 조금 더 나았고, 우리의 신념은 아이들의 내일을 조금 더 낫게 만들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
작가가 한글자 한글자 온 마음으로 적었을 25명의 이름에 나도 감사의 마음을 보태며, 이렇게 묵직한 지식을 선물해주신 작가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