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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비슷한 얼굴을 하고서 - 한 시절 곁에 있어준 나의 사람들에게
김달님 지음 / 수오서재 / 2022년 4월
평점 :

너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데? 웃게 해준 사람. (p.9)
맙소사. 10장도 넘기기 전부터 이렇게 봉인해제를 시키는 책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웃게 해준 사람”이라는 여섯 글자에, 마치 정리 안 된 벽장을 열어 우르르 쏟아지듯 나의 기억들이 쏟아져나온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내내 울고 웃고, 그리워하고 추억하며 며칠을 보냈다. 평소라면 몇 시간이면 읽어냈을 이 책을 며칠간 아껴 읽은 것은, 책장을 덮고 나면 이 기억들도 사라져버릴까 봐 두려웠다. 또다시 잊어버릴까 봐 겁이 났다. 작가의 말처럼 '나중에는 슬퍼질 좋은 순간'이었는데, 슬퍼지는 시간도 지나고 나니 이젠 기억도 못 할까 무서워지는 나의 순간들.
작가의 전작들을 다 읽었기에 울 준비는 되어있었으나, 이번 울음은 살짝 결이 달랐다. 앞의 책들은 작가 내면을 엿본 느낌이었다면, 이번 책은 아픔을 지나온 이들의 단단한 이야기 같았다. “그래, 그때 그랬지. 그러나 이제는 괜찮아.”하는 느낌 같았다. 이전의 책들은 내가 작가님을 안아주고 싶었다면, 이번 책은 작가님이 나를 안아주는 것 같았다. 이제는 다 내려놔도 된다고, 툭툭 털고 불안함 없이 행복해도 괜찮다고.
아마 현과 사는 동안 여러 번 펑펑 눈이 내리는 장면을 다시 보내게 될 것이다. 크고 작은 목소리로 감탄하기도, 조심하기도 하면서. 보고 싶었던 사려니숲은 보지 못했지만 우리는 함께 좋은 곳으로 가고 있어. 그것을 믿는데 어렵지 않았다. (p.176)
책을 읽으며 문득, 내 주변의 얼굴들을 떠올려보았다. 그러며 생각한 것이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란 것이었다. 많은 이들이 자기소개서 쓰듯 '풍족하지 않지만 유복한 가정'에 태어나 '정이 많은 언니와 장난꾸러기 동생'과 행복하게 성장했고, 내가 외로울 때 곁을 지킬 친구들이 있었고, 지금도 그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간다. 심지어 이제는 나를 완전히 사랑하는 아이도 있다. 문득 좋은 곳으로 가게 하는 사람을 가진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생각하니 코가 시큰해졌다. 결국, 사람은, 내가 가진 행복을 행복으로 볼 수 있으면 행복하고, 행복으로 볼 수 없으면 불행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님이 이렇게도 단단한 사람인 것은 자신이 가진 아픔은 확대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행복은 더 큰 행복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을, 고모들의 온기를, 아빠와 '엄마', 그리고 동생들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의 행복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친구들의 일을 자신의 것처럼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 그 사람이 행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이기에 할아버지의 확고한 신념을 고집이 아닌 신념으로 배우고, 할머니의 이야기들을 잔소리 아닌 사랑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세상은 내 안에 있다는 말을 또다시 실감한다.
뜨거운 물을 부어 컵을 데웠다. “이렇게 하면 따뜻함이 오래가거든.” 몇 년 전 자주 얼굴을 보던 사람이 아끼던 차를 따라주면서 알려준 방법이었다. (...)아무리 보리차가 빨리 식는 계절이라도 손으로 쥐고 있는 동안엔 따뜻함이 달아나기 어려웠다. (p.59)
컵을 데워 따뜻한 차를 쥐여주는 사람의 온기를 안다. 오래도록 꺼내 보지 못한 기억이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그 사람을 생각하고, 온 마음을 다해 그리워했다. 문득, 작가가 세상을 보듯 나도 누군가에게 애틋한 사람이었구나 하고 생각하니 온 마음이 보리차처럼 따뜻했다. 책을 다 읽고 덮을 무렵, 나도 '누군가' 들에 그런 따뜻한 사람이 되어주리라 생각했다. 이제는 내가 데운 컵에 담긴 보리차가 되어주어야지.
태어나서부터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까지, 참 가득히도 사랑받은 나란 녀석은, 인제야 갚을 준비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