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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박자 느려도 좋은 포르투갈
권호영 지음 / 푸른향기 / 2022년 4월
평점 :

세차게 비가 내리는 날에는 창밖을 바라보는 일이 더욱 행복했다. 그것은 하나의 일과였다. 하루종일 유리창을 흘러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고만 있어도 괜찮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었다. (P.36)
커피는 커피 자체를 마신다는 느낌보다는 여유 있게 아침을 여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할 테니. 포르투갈에서 마신 커피가 이토록 생각나는 이유는 역시 그 시간이 아름다웠기 때문이겠다. (P.210)
창문에 툭툭 부딪히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는 일을 몹시나 좋아한다. 그때의 커피는 세상 그 어느 시점의 커피보다 묵직하고 향이 짙다. 창문에 떨어지는 비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니. 이 책을 몇 장 넘기기도 전에 나는 이 작가의 문장들에 슬쩍 마음이 갔다. 아니 어쩌면 포르투갈, 그 네 글자에서 이미 매료되었는지도 모른다. '제제'처럼 공상가인 내게, 그 시절 늘 한결같았던 나의 '뽀르뚜가' 때문에.
초록색은 변치 않는다. 언제부터 풍경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생각해본다. 반대편의 공간에 가만히 서서 바다와 산, 하늘 같은 공간을 그리워하는 일에 대해, 위로와 벅참이 교차하는 순간에 대하여. (P.133)
작가가 사진을 유독 잘 찍는 것인지, 포르투갈이 원래 이렇게 아름다운 곳인지는 모르겠다. 어느 페이지는 그저 펼쳐둔 채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기도 했고, 어느 페이지는 같은 문장을 두세 번 읽으며 잘 소화하려 노력했다. 그녀가 포르투갈 빵집에서는 빵과 커피가 세트처럼 등장한다고 했는데, 마치 사진과 글이 딱 그런 느낌이었다. 사진 속에는 감성과 풍미가 아득했고, 문장은 에스프레소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갈했다. 그래서 문장은 사진을 더 빛나게 했고, 사진은 문장을 설명하듯 오목조목 많은 이야기가 숨어있었다.
이 책은 작가의 여행기록이기도 하나, 잘 기록된 가이드 복스럽기도 하다. 그녀가 묵은 숙소, 코스, 식당까지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물론 타인의 여행을 따라가는 것은 매력이 없다고 생각할 이들이 많겠지만, 여행지에서는 무엇이든 특별한 무엇인가로 바뀌는 마법에 걸리기 때문에 같은 길도 결코 같은 길이 아니고, 같은 음식도 절대 같지 않다. 그러니 낯선 포르투갈을 사랑하고 싶다면 그녀의 여행을 '참고'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나같은 경우는 잘 쓰인 여행기 하나가, 독자에게는 방에서 그곳을 만나게 한다는 말을 실감하게 하는 책이었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마주할 수 없는 풍경을 선물 받았다. (P.199)
사실 어쩌면 우리가 하는 모든 여행이 그렇다. 그 순간에 본 그 태양은, 그 순간 내 머리칼을 스치는 바람은, 그 순간 내 발가락을 간질이는 파도는 다시는 없다. 인생샷도 좋지만, 그 순간에 오롯이 집중하는 게 좋은 이유는 어쩌면 그거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마주할 수 없는 시간이니까. 어쩌면 이 책은 내게 여행이 아닌, 지금 순간에 더 집중하고 살 것을 권한 느낌이다. 지독한 집순이인 내가 포르투갈을 갈 날이 올지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 내가 잡은 작은 손, 아이의 손을 꽉 잡고 세상 여기저기를 더 집중하며 걸을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