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린 시인들 - 내 안의 어린아이를 잃어버린 어른들에게
오설자 지음 / 푸른향기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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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걸음이 빨라지다가 내 손을 팽개치고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막 달려갑니다. 할머니 손을 잡고 엄마 품에 안기는 어린이들을 봅니다. 누군가의 손을 잡은 아이들이 그때야 돌아서서 내게 인사를 합니다. 오늘도 어린이들은 조금 더 자랐습니다. (p.41)

 

나는 어린이를 참 좋아한다. 물론 그중 가장 좋아하는 것은 우리 집 어린이다. 어린이들을 위한다는 그림책도, 동화책도 좋다. 때로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여전히 내 안에 나라는 어린이가 살아있음을 믿는다. 그래서 잘 웃고, 잘 울고, 쉽게 행복해한다. 이 책을 받아들고 들어가는 말을 읽으며 이미 이 책이 마음에 닿았다. 사실 표지의 까슬함을 만지며 이미 이 책이 퍽 괜찮게 느껴졌으나, 머리말에서 이미 이 책은 내 마음에 들어왔다. 

 

사실 수려한 글솜씨는 아니다. 일기를 쓰듯 찬찬히 써 내려간 글들이 모여있는데 그래서 더 쉽게 읽히고 더 이웃에서 듣는 이야기 같은 정겨움이 있다. 그리고 군데군데 적힌 단어들에서 작가님이 아이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느끼게 했다. 이런 분이 우리 아이의 첫 학교 선생님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모두가 다 공부하지 않아도 됩니다. (...) 그는 다만 착하게 학교에 다니면서 기술을 배우고 있습니다. 굴착기를 운전하며 어디서든 성실하게 일 잘하고 엄마에게 효도하며 살아갈 아이입니다. 다만 이 사회에서 필요한 사람이 되어 남들에게 해 끼치지 않고 선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나는 도진이를 믿습니다. (p.65)

 

'체리 씨를 가져간 아이의 마음'을 온전히 지켜줄 수 있는 '위그든 씨'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의 많은 어린이는 체리 씨를 가져간 마음에 상처받지 않고 오래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p.151)

 

 우리 아이는 이제 7살. 입학을 앞둔 예비 초등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이렇게 섬세한 눈으로 아이를 바라봐주는 선생님을 살면서 많이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하는 마음이었다. 작년 우리 아이의 담임선생님이 해주신 말이 떠오른다. “00이는 일 년 내내 자유 놀이 시간이 시작될 때 꼭 줄넘기 연습을 했어요. 사실 잘 못 해서 지칠 만도 한데, 하루도 빼먹지 않고 매일매일 연습했어요. 엄마가 노력하는 게 멋진 거라고 말해주셨다고. 어머니도 00이도 서로에게 제일 좋은 짝꿍 같아요.” 나는 그 말을 가슴에 꼭꼭 새겨두었다. 우리 아이가 무엇인가를 잘 못 하더라도, 노력하는 사람으로 살게 평생을 응원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나 역시 살면서 내 아이를 통해 나 자신을 피드백 받고 있음을 잊지 않고 싶었다. 아마 이 책에 기록된 도진이를 비롯한 수많은 엄마의 마음에 작가님이 그런 선생님으로 남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어린이는 어른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반대로 어른도 어린이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생각해본다. 아이의 행동에서 그 집 어른들의 행동을 볼 수 있고, 어른의 모습에서 아이의 훗날을 짐작해볼 수 있으리라는 의미다. 물론 세상 모든 일이 변수를 만나겠지만, 사랑을 많이 받은 아이가 사랑스러운 아이로 자라는 것은 만고의 진리 아니던가. 작가님처럼, 나도 좋은 위그든 씨가 되어주어야지. 그런 다짐을 수없이 한 고운 책이었다. (곱다는 말이 아주 적합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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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밖 여고생 (리커버)
슬구 지음 / 푸른향기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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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은 날 밖으로 이끌었고 날개뼈를 꿈틀거리게 했다. 내가 배운 것처럼 세상은 무섭지도, 험하지도, 척박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나는 여전히 날지 못한다. 그저 닭장 속을 나와 조그마한 날갯짓을 할 뿐이다. 하지만 곧 날 수 있노라고, 더 높이 비상할 수 있노라고 난 확신을 가진다. (p.37)

 

최근 내 피드에 이 책이 참 자주 등장했다. 워낙 책을 좋아하는지라, 늘 책 피드가 올라오지만 같은 책을 여러 번 올리는 스타일은 아닌데 (책 친구만 있는 것은 아니니, 지겹다고 생각할까 봐 다소 자제하는 편) 나도 모르게 이 책에는 자꾸 애정이 가더라. 여고생의 여행기. 솔직히 첫 느낌은 이게 정말 재미있을까, 였다. 그리고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엉덩이 한번 안 움직이고 끝까지 읽었다. 미성숙한 여고생의 이야기들을 생각했던 나는 크지도 않은 코를 다치고, 단단한 마음을 가진 작가님에게 매료되어 마지막 장을 아쉬워하기까지 했다. 

 

혼자 여행을 떠나는 것. 사실 그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 생각한다. 더구나 어린 여자일수록 두려움이 수반되는 것은 당연한 얘기일 터.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시작했고, 무섭고 험한 세상 대신에 아름다운 세상을 만났다고 기록한다. 문득 어쩌면 세상의 모든 것은 일단 시작해야 아름다운 거라는 것을 새삼 떠올려본다. 

 

예전에는 타인의 여행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가지 않은 곳, 혹은 갔던 곳에 타인의 감상을 덮어씌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 그러나 코로나 이후 발목이 묶이며, 또 바쁘게 살아오며 여행기의 매력을 점차 느꼈다. 슬구 작가님의 글을 읽으며 여행기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다시 깨달았다. 그녀의 여행은 단순히 어디서 먹고, 놀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루만큼 자라는 성장기이고, 본인의 역사를 담담히 기록한 흔적들이다. 그래서 그녀는 꿈많던 내 10대를, 치열했던 나의 20대를, 좋으면서도 아프고 힘들었던 30대의 나날들을 돌아보게 했다. 어느새 40대를 목전에 두고 서서 생각해본다. 앞으로의 나는 어디를 향해가면 좋은지, 무엇을 경험하면 좋을지. 계획은 여전히 계획 중이지만, 그래도 그녀는 앞으로의 내 나이를 경험으로 잘 채워보자는 다짐을 하게 했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어디론가 떠난다고 해서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건 아니다. 나는 언제나 나이고, 여행은 나의 수많은 일상 중 한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해야 하는 이유는 그런 자잘한 경험 속에서 내가 성장하기 때문. 중요한 건 나이의 숫자가 아니다. 정말 중요한 건 그 숫자 속에 들어있는 경험이다. (p.47) 

 

자존심 때문에 스스로를 아프게 했다는 대목을 읽을 때는 그녀를 안아주고 싶었다. 나도 그랬다고, 다들 그런다고. 그리고 그녀가 다시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는 부분들을 만나면서 기특하다고 손뼉을 쳐주고 싶기도 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모르고 살던 그녀에게 이렇게 감정이입을 하며 이 책을 읽은 것은 어쩌면 그때의 나를 떠올리기 때문이겠지. 이 책이 이렇게 마음이 끌리는 것도 아마 그런 이유일 테다. 이 책을 만나는 누구라도 그녀의 문장들에서 묘한 힘과 응원을 느끼게 될 것이고, 그리고 다짐 비슷한 것들을 하게 될 것 같다.

 

 

이제 선택하라. 무작정 배낭 하나 들고 떠날 용기를 가질지 아니면 언제 올지도 모를 미래의 목표로 미뤄둘지. 선택은 언제나 본인의 몫이다. 하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잊지 말자.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행복해야 한다. (p.117)

 

그녀의 말처럼,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나보다 나이가 더 많다고 해서 다 배울 사람이 아니듯, 나보다 어린 사람이라고 해서 배울 수 없는 것을 아님을 우리는 자주 잊고 산다. 나는 그녀의 글을 읽으며 온 마음을 다해 끄덕였다. 그래서 오늘 그녀가 주는 가르침을 소중히 가슴에 담아두려고 한다. 지금, 이 순간을 행복하기. 오늘의 나에게 집중하기. 그녀는 내게 단순히 여행기의 즐거움을 준 것이 아니라, 다시 오늘을 사랑하게 하는, 또 살아가게 하는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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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가 사랑으로
최형준 지음 / 부크럼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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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묻고, 대답해야 한다. 일상적으로 고민하고, 사색해야 한다. 웃기고, 울리고, 멱살을 올리고, 등을 쓰다듬고, 수치심과 자부심 두 가지 모두와 친해져야 한다. (p.15)


얼마 전 지인과 수다를 떨며 누가 취미를 물어볼 때 난감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늘 부지런히 읽고 쓰는데 무슨 소리냐고 묻겠지만, 난감함은 거기서 비롯된다. 많은 이들이 취미 칸에 “독서”라는 단어를 사용하기에, 진짜 취미가 독서인 나같은 아이들은 일부러 방패 세울 취미를 한두 개는 세워두어야 한다. 아무튼, 많이 읽는 편이지만 소설이나 사랑이 주제인 에세이는 덜 읽는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리뷰쓰기 힘들어서. 스포일러 없이 소설 리뷰를 쓰기가 어려워서, 또 다른 사람 사랑 이야기를 내가 정리하는 것은 건방진 것 같아서 덜 읽게 된다. 


사실은 이 책도 그렇다. 내가 'true love'를 평가해도 될까 싶어진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책의 제목과 달리 에로스적인 사랑에세이가 아니다. 자신의 삶을, 하루를, 오늘을 성실히 살아가는 이의 글이다. 읽는 문장이 내내 좋았고, 공감하며 받아적은 것도 꽤 많다. 그런데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함은 나의 미숙일 뿐이다. 이 책이 “가장 오래 감상한 그림”이 될 거라던 작가의 말은 정말 이었다. 



혼자라는 이유로 외로움에 사무치지 않는다는 거, 세상에 등을 지고도 어깨를 움츠리지 않는다는 거, 잠시 잠깐의 피폐로 인해 필요 이상 무너져버리지 않는다는 거, 혼자를 향유하고, 새벽을 유랑하는 거. 그런 것들을 품위를 읽지 않고 해낸다는 거. (p.121) 


혼자서 혼자이지 못하는 역설, 둘이서도 둘이기 어려운 모순, 셋이고 넷이고 온전한 때는 드물어

사색은 꺼립니다. (p.71)


읽으려 꺼내둔 책 중, 가장 쉬이 읽힐 책일 거라는 생각에 묵직한 책들 사이사이 이 책을 읽었다. 그러나 이 책이 주는 묵직함이 때때로 내 마음을 울렸다. 분명 가볍게 술술 읽히는데, 읽다 보면 가슴 한쪽이 저릿한 것. 마음이 묵직해지는 것. 사실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책을 덮어 표지를 바라보았다. 종종 눈물을 흘리기는 했으나 이 책을 읽은 후 마음이 참 편안해지더라. 그래, 시간이 흐르는 것이 자연스럽듯 “삶은 강물처럼 변화함으로써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잊고, 기억하고, 미워하고, 사랑하며. (P.146)”사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을 확인받은 기분이었다. 



무엇인가를 잊는다는 것, 잃는다는 것, 그래서 다시는 볼 수 없게 된다는 것. 그건 지나치게 서글픈 일이다. 그러나 그 서글픔조차 잊고, 잃어버려서 다시 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미 잊어버렸기 때문에, 지금도 잃어버리고 잇기에, 그래서 때때로 자연히 고통스럽다. 그러니 다시 볼 수 없는 것들을 위해 흘리는 눈물을 아낄 이유가 없다. (p.38) 

                                                                                   

이 책의 비평은 많은 말이 오히려 사족일 것 같다. 평소보다 많은 문장을 옮겨적으며, 사족 대신 공감할 문장들을 적어두는 편이 이 책을 이해하기 쉽겠다는 생각을 했다. “5월 무렵에는 커다란 장미를 보고, 여름에는 공차는 금발 머리 아이들을 구경한다. 그러고 언덕을 내려와 진짜 맛있는 수제 버거와 밀크셰이크를 진탕 먹어준다. 그 길로 나는 당분간의 사랑 총량을 충전하는 것. (p.232)”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하루를 충실히, 또 때로는 가장 느슨한 태도로 살아가며 장미의 아름다움을, 공차는 아이들의 천진함을 배우는 것. 그 자체가 삶 아니던가. 



'먼저 갈게'가 아니라 '다녀올게.' 그게 꼭 기다리라는 말 같아서 나는 잠자코 그곳에 남았다.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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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읽기 세창명저산책 90
임채광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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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에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과연 칸트가 요구한 바 있는, '스스로 따지고, 알고 그리고 판단'하고자 하는 의지가 충분한가? 자유롭고 독립된 한 인간으로서의 성숙도는 충분한 수준에 도달했을까? (p.6)

 

책을 좋아하는 사람 중 에리히 프롬에 '도전'하지 않은 사람들은 거의 없을 듯하다. 나 역시 '사랑의 기술'과 '자유로부터의 도피' 두 권에 도전했다. 사랑은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하는 거로 생각했던 내게 멈춤이 없는 노력을 하는 성숙한 인간이 되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남긴 '사랑의 기술', 무엇으로부터의 자유, 무엇에 대한 자유인지를 놓고 고찰과 자아 정립을 목적으로 한 '자유로부터의 도피'. 어쩌면 나의 요약을 보고 뭐라는 거야, 하며 비웃을 분들도 있을 듯하다. 맞다. 분명 읽기는 읽었는데 글씨만 읽은 느낌이었다. 그저 지성인이 되고 싶은 우매한 나의 발버둥이랄까. 

 

몇 년이 흘러 이 책을 만났다.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읽기” 사실 처음에는 나 스스로 실소가 나왔다. 몇 년을 책을 읽어놓고 이렇게 '설명서'까지 읽어야 하나 하는 마음에서. 그러나 결과적으로 나는 이 책을 읽기를 잘했고, 머잖아 다시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읽을 예정이다. 물론 나이를 먹으며 저절로 이해되거나 감상이 바뀌는 책이 있음을 안다. (최근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으며 뼛속까지 감동했다) 하지만 이렇게 '돕는 책'을 통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면, 굳이 먼 길을 둘러가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프롬의 의도와 무관히 그의 책이 히틀러를 포함한 독재 정권과 불의한 권력자들에 대한 비판적 분석의 주요 관점을 제공해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p.39)

 

프롬에 따르면 중세 사회가 물론 근대 사회와 비교하여 볼 때 “개인의 자유가 결여 ”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개인의 자유가 전체적으로 억압되거나 통제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p.76) 

 

프롬에게 인도주의는 인간의 이성과 지혜를 신뢰하고 도덕적 판다의 근거를 제공하는 윤리적 규범이다. (p.138)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읽을 때 그가 말하는 것이 내가 아는 개념과 다른, 그 이상의 이념을 이야기하는 느낌이라 어렵고 힘들었던 기억이 남아있다. 나는 사회적 동물이기에 '어쩔 수 없이' 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소속감을 위해 사람이 자신의 자유를 파괴한다'라는 말이 지독한 방향으로 들렸던 것. 물론 여전히 나는 그처럼 분석적으로 탐구할 그릇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 그가 하고 싶던 진짜 말이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자본이나 종교, 이념 등을 자유롭게 가지는 것 너머, 정체성을 가지고 나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자유라는 생각을 해본다. 단순히 위협이나 억압을 받지 않는 것만이 자유가 아닌 휘둘리지 않고 나를 살아가는 일이라는 막연한 정리도 해본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며 (정확히는 에리히 프롬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아직도 내가 얼마나 더 배워야 하는지를 실감했다. 나는 또 분명 머리를 쥐어뜯으며 내게 버거운 책들을 탐하겠지만, 사실 탐할 게 없어 무료한 일상보다는 올려다볼 것이 많은 앉은뱅이 지식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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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국 안 책방 - 아직 독립은 못 했습니다만 딴딴 시리즈 2
박훌륭 지음 / 인디고(글담)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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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만 배운 사람으로 남고 싶지 않으면 작게라도 그냥 시작해보길 바란다. 그게 뭐든 좋다. 나도 이렇게 책방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뭘 이류려면 계속해보는 수 밖에 없다는 건 태곳적부터 내려온 삶의 법칙이다. (p.7)




누군가의 글을 통해 그 사람의 생각을 한 조각 얻어 내 생각으로 키워가는 것. 그것이 책의 선순환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의 다른 책을 읽으며 나는 “어떤 문장에는 피식 웃음이 터지고 어떤 문장에는 코가 시큰해졌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여러 번 “나도, 나도”를 외쳤으니 이 책은 참 잘 쓴 책이다.”라고 기록했다. (이름들, 박휼륭 : https://blog.naver.com/renai_jin/222697152112)



앞서 읽은 책을 울고 웃으며 읽었다면, 이번 책은 커피를 마시며 피식거리거나 끄덕였다. 책 얘기라면 나도 밤새 할 수 있는데, 하며 그의 수다에 기꺼이 나를 얹었다. (그나저나 그가 내게 추천해준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책읽기와 글쓰기”가 내 책장에서 나를 부르는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몽둥이를 들고 부르는 '학주'같아 선뜻 손이 가질 않는다. 혼날 짓을 많이 한 모양이다) 그의 굿즈도전기에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고 초창기 책방 이야기를 할 때는 기억을 가만히 더듬어봤다. 나와 아독방의 첫 인연은 무엇이었나. 뮐러 씨였나, 쏘나티네였나. 







책 읽는 모두가 이 세상을 조금씩 바꿀 수 있다. 이분들로 인해 이두근, 삼두근보다 먼저 단련해야 하는 내 마음의 근육도 단단해지리라. (p.34)



다들 그러고 살지 않나. 좋아하는 거 하려고 합리화도 하고 그러는 거지 뭐. (p.57)



인생 책은 누구에게나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없기도 하다. 앞의 누구는 '책과 친한' 누구이고, 뒤의 누구는 '책과 데면데면한' 누구이다. 어떤 누구로 살지는 물론 내가 선택하는 것이다. (p.40)



그의 글을 읽느라 커피는 마시시도 않고 식어버렸는데, 묘하게 마음이 따뜻하다. 왜 그런 기분 있지 않은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누가 같이 좋아할 때 공유하고 신나는 마음. (그것이 이성이라면 다른 얘기겠지만) 내가 30년 넘게 사랑해온 책을 이토록 애정을 가지고 사랑하고, 책방까지 벌리는 사람이 있어서 뿌듯하고 좋은 그런 마음 말이다. 심지어 아독방 sns에는 이런 사람들이 차고 넘치니 '아싸력'넘치는 '방구석키보더'인 나도, “we are the world”가 되는 듯한 마음이 든다. 




여전히 읽을 책은 책장에 넘치지만 그래도 그의 책소개를 성의껏 읽는 것은, “한 권은 알아서 보내주세요.”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책이든 나도 모르게 쌓인 신뢰 때문이겠지. 사실 약국 안 책방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몸이 아픈 사람들은 한약이든 양약이든 먹어야 하나 마음이 아픈 사람은 글을, 사람의 마음을 먹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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