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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 -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걸까
설은아 지음 / 수오서재 / 2022년 3월
평점 :

가끔은 너무 우울해서 물속에 잠긴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어. 근데 그게 왜 나쁜 건지 사실 잘 모르겠어. 나는 우울했다가도 괜찮아질 거고 물속에 잠겼다고 햇빛에 마를 텐데. (p.29 / 28,002번째 통화)
아 이 책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울고 웃으며 지난 밤 홀린 듯 읽어놓고도 뭐라고 서평을 써야 하면 좋을까 생각하느라 몇 시간째 그냥 앉아있었다. “날 것의 아름다움, 미사여구 없는 말들의 진심”이라는 말 말고는 아무 말도 생각이 나지 않을 만큼 난 이 책에 심취했던 거다. 사실 이 책은 “꾸미지 않은 날것의 진심”이라는 한 줄만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책이 맞다. 내가 리뷰를 쓰지 않아도 모두 공감할 그런 책이다.
엮은이는 “유리창 너머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듯, 오늘도 아무 문제 없이 잘 살아가는 것 같다. (...) 타인의 일상 속엔 나에게 있는 슬픔, 고통, 외로움 같은 건 없어 보인다. (p.12, 프롤로그) / 그렇다면 우리가 하지 못한 말들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흐르지 못하고 어딘가 묻혀 있는 말들은 신호가 왔지만 받지 않는 우리의 '부재중 통화'일 것이다. (p.112) “라며 혼자 끌어안고 있는 이야기들을 풀어내고, 자유로워지라고 말해주고 싶었단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이 말들은 전하지 못하고 품었던 이야기이기도 하고, 듣고 싶었으나 듣지 못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의 못 한 말이, 누군가에게로 다 듣지 못한 말이 된다. 누군가가 듣지 못했던 말을, 다른 누군가가 대신해준다.
왜 이 말들이 이렇게 아픈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울었고 또 피식피식 웃기도 했고, 꽤 많이 속이 시원해지기도 했다. 글을 쓰며 내 속의 말들을 많이 뱉어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내 마음속에는 버리지 못한 말이 많았나 보다. 여전히 듣고 싶은 말도 많았나 보다.
사실 진정 내가 원하는 건 딱 두 가지 뿐이구나.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을 충분히 사랑하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을 표현하며 사는 사람이 되는 것. 나머진 모두 장식일 뿐이구나. (p.213)
얼굴도 모르는, 심지어 몇 살인지도 성별도 모르는 이들의 문장에서 깊은 공감했다. 물론 어떤 통화들은 성별이나 나이가 표기되어 있기도 하고, 때로는 추정해볼 단서들이 있기는 하나 굳이 그런 것에 얽매이지 않고 문장 자체만을 읽으려고 노력했다. 아니, 정확히는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문장에 빠져들 수 있었다. 그 문장들과 원래 내게 있던 이야기들이 만나 나만의 이야기로 재해석되고, 그 과정을 통해 나는 오랜만에 제대로 울었다.
나에게도 있었다. 들었어야 할 말들과 했어야 할 말들. 오늘 이 책에서 감히 나에게 하는 말이라고, 내가 한 말이라고 생각하며 살기로 했다. “울지 말고, 욕해버리고 잘 살아. (p.90 / 21,300번째 통화)”라는 말을 그때의 나에게 해주고 싶다. 또 그때 “함께 먼 길을 걷길 바랐어, 그뿐이었어. (p.137 / 69,050번째 통화)”라는 말과 고맙다는 말을 한 것으로 생각하며 살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독서 노트 한 켠에 1522-2290을 옮겨적었다. 언제인가 나도 무엇인가 말할 용기가 생기면, 내 안의 정리되지 않은 단어들이 문장이 될 때가 오면 조용히 한번 전화를 걸어야지. 그때는 남에게서 빌려온 저 문장들을 놓아버리고, 진짜 괜찮아져야지.
그때까지 부디, 이 전화가 살아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