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 - 실력도 기술도 사람 됨됨이도, 기본을 지키는 손웅정의 삶의 철학
손웅정 지음 / 수오서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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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라는 건 아주 조용히 옵니다. 그리고 기회는 악착같이 내가 만들어내야 합니다. 미래가 나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책을 읽으며 예의주시하며 관찰해야 합니다. (...) 책을 통해서 미래를 준비했을 때 의외의 기회, 꼼수가 아닌 내가 노력한 만큼 기회를 잡을 수 있습니다. (p.143) 

 



언제인가 아이와 책을 읽고 노는 것을 책으로 엮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사실 나는 1초도 고민하지 않고 거절했다. 어설픈 솜씨로 아직 다 크지도 않은 아이와 관련된 책을 내었을 때, 훗날 우리 아이의 결과물(싫지만 이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내가 싫다.)이 극악한 어른들의 평가 잣대가 되는 게 두려워서였다. 그러나 “가정은 최초의, 최고의 학교”라는 손흥민(!)의 아버지 최웅정 님의 책을 읽고 난 지금, 내 마음은 달라졌다. 여전히 아이와 관련된 글을 쓸 생각은 없으나, 내가 그것을 책으로 엮어내지 못하는 건 내가 단단하지 못함이라고. 

 


이 책을 단 한 줄로 표현하라면 나는 “신념”이라고 적고 싶다. 일단 손흥민이라는 세계적인 축구선수를 만들어낸 아버지라는 것만으로도 존경받을 분이지만, 그에 앞서 자신의 삶에 신념을 가지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아가는 인생 선배님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게 남았기 때문이다. 책의 첫 장을 펼칠 땐 손흥민의 아버지였다면, 책의 마지막 장에는 그저 손웅정이 남았다.

 



나는 내 아이들이 돈을 위해 살지 않고 진정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삶을 살길 바랐다. 그 길에 돈이 따라오면 좋은 것이고, 안 따라와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주객이 전도돼서 내가 좋아하는 것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돈만 좇는 삶을 산다면 그것을 과연 자기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p.112) 



 

사실 나 정도 또래, 그리고 그보다 나이 많은 이들 중에 돈을 생각하지 않고 주도적인 삶을 선택할 수 있던 이들이 얼마나 될까. 내 또래만 하더라도 그렇게 경제적으로 궁핍하지는 않더라도 사회적인 통념이나 기대에 갇혀 사는 이들이 많았다. 나 역시도 곤궁한 삶은 아니었으나, 내가 꿈을 좇는 것은 배고픈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눌려 취업을 위한 진학을 시도했던 것 같다. 웰빙한 삶보다는 월급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워라벨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러워진 요즘 아이들이 부럽다고 해야 할까, 내가 꼰대가 되어 부럽다고 느끼는 걸까 알 수는 없지만 나 역시 나의 아이가 돈만을 쫓지 않게 키우고 싶다. 그래서 더 돈을 위해 노력했던 것도 없지 않고. 

 


그러나 이 책을 읽는 내내 아이를 넉넉하게 키우는 것은 부모의 넉넉한 환경이 아니라, 넉넉한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언론을 통해 보았던 “손흥민의 아버지”는 아들을 오로지 축구만 바라보게 한 독한 이미지가 더욱 강했으나, 이 책을 읽으며 이미지가 크게 바뀌었다. 단단해서, 단단하게 아들을 키워낸 사람. 또 단단해서, 아들에게 그 단단함을 몸소 배우고 실천하게 한 사람으로.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아버지들이 좀 읽으시면 좋겠다. 물론 책을 읽는다고 해서 다 이런 아버지가 되기는 어려울 테지만, 손웅정 님의 말처럼, 책을 읽으며 단단해지려고 노력하고 단단한 아이를 키워내려고 노력하는 마음만으로도 충분한 변화를 몰고 올 수 있지 않을까. 이 책 가득한 신념을 많은 아빠가, 또 엄마들이, 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열심히 사는 이들에게 가득히 전파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계속하면서, 이 책의 뒤표지를 한참이나 보았다. 

 


나도, 이렇게 신념 가진 사람이, 엄마가 되어야지. 하면서. 

 

 

 

덧. 사실 이 책을 한점 전에 읽고, 이제야 리뷰를 쓰며 다시 읽었는데- 두 번 읽어도 너무나 좋았다. 힘들었을 때 다시 일어서게 하는 힘을 준다고 해야 할까. 살면서 넘어지는 순간들도, 그저 축구장에서 넘어져서 다시 일어나는 것처럼 당연함으로 받아들이는 의연함을 갖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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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누가 데려가나 했더니 나였다 - 웃프고 찡한 극사실주의 결혼생활
햄햄 지음 / 씨네21북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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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나는 그러고 싶다.

엉뚱하다고 하겠지만 난 그게 좋아, 정말로. (p.267)

 

몇몇 지인에게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재미없는(?) 책만 골라읽는다고. 물론 그때의 나는 내가 읽는 책이 얼마나 재미있는지를 강력히 설명하였지만 말이다. 그러나 정말 세상에는 재미없는 책이 거의 있다. (100권에 세 권 정도는 작가가 이따위 책을 세상에 내다니 미친건가 싶은 책과, 좋은 건 알지만 진짜 미칠거 같이 재미없는 책과, 무슨 말을 하는지 1도 모를 책들이 있긴 있다. 그나마 첫 예시같은 책은 그냥 덮어버리면 그만이니 뒤끝없는데, 나머지 두 종류는 머리카락을 쥐어뜯게 만든다. OMG!)

 

서론이 길었다. 아무튼 오늘은 재미없는 책만 읽는 이미지를 한방에 날릴 책을 소개하려한다. 책을 읽지않아도 인스타나 짤 등을 통해 누구라도 알만한 “시바(!)” 햄햄작가님의 신간, “누가 널 데려가나 했더니 나였다”. 사실 난 햄햄작가님의 팔로워라서 진즉 살짝살짝 엿보던 내용을 이렇게 완전히 책으로 볼 수 있다니, 너무 좋자나 시바. 으흐흐흐.

 

지난번 책은 정사각 판형이었는데, 이번 책은 또 길쭉하다. 책을 펼치자마자 판형의 이유를 정확히 알겠더라. 지난번 책은 살짝 짤 느낌이었다면, 이번에는 네칸만화같은 느낌. 그래서 더욱 읽을거리가 있고, 익살넘치는 일러스트도 가득하고- 정말이지 너무 재미있고 공감되는 내용이 너무 많아서 혼자 낄낄거리며 단숨에 읽어냈다. 그저 웃기기만 하면 사실 나는 리뷰를 남기지 않을텐데, 현실의 매운 맛도, 연애의 달고쓴맛도, 인생 짠맛도 고루 담겨있다. 진짜 우리네 사는 이야기가 걸러지지 않고 그대로 담겨있달까. (곰팡이 꽃 이야기를 볼 때는 안쓰러워서 모금활동이라도 하고 싶었고, 설거지 후 배가 축축한 시바를 볼 때는 내 배를 한번 바라봤다.) 

 

사실 상단에 옮겨적은 저 부분은 찐한(?) 연애편지(?)의 한 부분인데, 이왕이면 로맨틱만 남기고 싶어서 저 부분만 따왔다. 그러나 작가님의 하루하루는 그저 핑크빛이 아니다. 아니, 우리 모두의 하루하루는 핑크빛이 아니다. 그저 핑크빛이기만 한 연애는 세상에 없을 뿐더러, 만약 핑크만 있다면 한달도 안되어 다른 연인을 찾아 떠날 것이다. 작가님의 하루하루를 엿보며 나는 때로 내 삶을 만났고, 친구의 삶을, 가족의 삶을 만났다. 그래서 이 책은 내게 첫장부터 끝장까지 공감이 가득한 이야기였다. 아마 누구라도 그럴 것 같다. 

 

겨울 철, 햇살아래 배깔고 고구마나 물어뜯으며 읽기 가장 좋은 책이었다. 

(아 끝으로 판다씨. 수고 많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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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생의 마지막 도전 - 황혼이 깃든 예술가의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분투기
윌리엄 E. 월리스 지음, 이종인 옮김 / 책과함께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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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인들은 미켈란젤로가 슬픔과 절망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전한다. 그는 정말로 절망했고 고령에 너무나 외로웠다. 이제 친구가 없었다. (p.81)

 



미켈란젤로. 아마 그림이나 종교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미켈란젤로의 이름은 알 듯하다.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 그리고 <피에타>와 <다비드>. 그의 작품은 어느 하나 유명하지 않은 것이 없고,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하!”하는 경탄이 흘러나온다. 내가 아직 어린 시절, 그가 <최후의 심판>에 고뇌하는 자화상을 그려 넣었다고 하는 글을 읽고 “이정도 예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무슨 고뇌를 하는가. 물론 창조는 힘이 들겠지만, 이정도 작품을 낳을 수 있다면 매일 손뼉을 치고 다닐 텐데”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그 오랜 궁금증을 풀어낼 책을 드디어 만났다. 

 


사실 미켈란젤로나, 대성당, 바티칸에 관련된 책은 꽤 많이 읽었다. 그런데도 이 책은 매우 새롭다. 보통의 책들은 정점을 기록하고 있기에, 미켈란젤로가 소위 가장 잘나가던 시절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책은, 70세에서 88세에 이르는 마지막 생을 기록하고 있다. 비록 예술가로서의 찬란한 시절은 한 끗 비껴갔을지라도 그의 일상과 생각, 예술과 종교에 대한 신념을 제대로 만나볼 수 있다. 어쩌면 이제 인생의 절반 정도를 살아온 내게 이 책은 말한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잘 걷고 있는가.”

 







피렌체 <피에타>는 미켈란젤로의 신심을 웅변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애초에 그 자신의 무덤에 묘표로서 그 쓰임새를 의도했던 작품이다. 그러나 거기에 딜레마가 있었다. 그 조각을 완성한다는 것은 대리석을 생생하게 살려내는 것이지만, 그 자신은 죽음에 숙명 해야 했다. (...)그러나 여러 기술적 심리적 이유 탓에 이 작품은 미완으로 남을 운명이었다. (P.243)

 


생각해본다. 그는 무슨 이유로 이 작품을 그리도 오래 간직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왜 <피에타>를 포기했을까. 그리고 칼카니가 이 작품을 보수하지 않았더라면, 그 앳되고 아름다운 성모마리아님은 세상에 나올 수 있었을까. 나는 <피에타>를 처음 볼 때 (물론 실물은 못 봤지만) 미완성인 것도, 예수님의 다리가 한쪽이 없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너무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고, 성모마리아님의 얼굴의 깊은 감정이 놀라울 뿐이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난 지금, 이런저런 생각이 나를 휘감는다.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을 만들 때, 가슴이 매우 아프지 않았을까. 고뇌하지 않았을까. 스스로 불완전함을, 스스로 미완의 인간임을 아파한 것은 아닐까. 

 


사실 이 책은 꽤 두꺼움에도 순식간에 읽혀지는 책이다. 며칠만에 나는 이 책을 두번 반복하여 읽었다. 처음에는 그저 술술 읽었고, 두번째에는 기존에 알던 이야기까지 살을 입혀 그의 마음을 좀 더 고스란히 느껴보려고 노력했다. 그래서일까. 수십년을 함께 한 지기를 잃고, 가슴아파하는 그의 편지들을 읽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슬픔의 한 가운데에서 홀로남은 외로움을 이야기하는 그가 처음으로 위대한 예술가가 아닌, 그저 나같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 느껴져 그의 작품들이 더 대단함으로 느껴진다면 역설일까. 

 

 




그 어떤 변경도 이것이 미켈란젤로의 건축물이라는 사실과 평가를 흔들지 않았다. 미켈란젤로로서는 어떤 구체적 형태를 설계하는 것보다 교회의 온전한 정체성을 보존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것은 하느님의 교회였고 그는 하느님의 건축가였다. (p.362)

 


어떠한 문헌을 보더라도 그가 하느님의 건축가였음은 틀림이 없다. 그렇지않고서야 고된 천정화를 그렇게나 많이 그릴 수 없을 테다. 디스크를 앓으면서도 천정에 그림을 그린다니. 책조차 들지 못하겠다고 가벼운 책만 읽은 내가 부끄러울 정도의 열정이다. 아니 열정이라는 단어도 너무 약소하다. 그것은 그저 하느님께 순명하는 삶, 그 자체였다고 보인다. 그리고 너무나 다행히도 그가 그런 삶을 걸을 수 있도록 돕는 이들이 늘 곁에 있었다. 아마 하느님께서 그에게 사람으로서 보답하신 게 아닐까. 당신의 집을 짓는, 당신을 위한 건축을 하는 숭고한 예술가를 그래도 홀로 두지 않겠다는 대답이지 않으셨을까. 

 


성 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할 당시, 그의 결의도 결의였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위해 이 일을 하고 있고, 이제 그 사랑이 나의 모든 희망(p.375)>이라고 말하는 그의 말에서 그의 신념을 정확히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순간들을 그 성당에서 함께 하며 외로움 대신 성취를 안겨준 것도 하느님의 대답이었다고 생각된다. 

 





미켈란젤로는 결코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그것이 그에게 남은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그가 현실적으로 성취할 수 있다고 기대되는 유일한 길이었고 그는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p.378)

 


책의 끝에 가까워질 무렵, 나는 이 책이 얼마 남지 않음이 너무 아쉬웠다. 읽으면 읽을수록 명사라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다. 위대한 작품 뒤에 가려진 그의 삶이, 그리고 그의 지인들이 사실은 그 모든 작품의 밑거름이었구나, 싶어서 온 마음이 묵직해졌다. 우르비노, 리오 나라도, 칼카니. 그들이 그에게 어떤 역할이었는지, 또 하느님이 그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한문장 발견했다. 

 


사실 나는 평생 처음으로 안식월을 보내고 있다. 가만히 빈둥빈둥 되지 못하는 성격 탓에 늘 무엇인가 조바심내듯 살아온 나에게 처음으로 쉼을 선물한 것이다. (물론 디스크가 가장 큰 원이었겠지만) 그래서일까. 나는 그저 “쉼”에 집중해있었다. 혼자 햇빛을 쐬러 나갔고, 혼자 걸었으며- 친구들과 여행을 떠났고,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술잔을 기울였다. 애인과 느긋하게 점심을 먹었고, 커피잔을 사이에 놓고 걱정도 긴장도 없는 수다를 떨었다. 밀린 영화와 드라마도 잔뜩 보고, 사놓고 보지 못했던 만화책도 잔뜩 읽었다. 그림책 수백 권과 역사 만화책 백여 권도 읽었다. 그러다 보니 무거운 책은 한 권도 읽고 싶지 않았다. 그런 안식월 사이, 이 책을 읽고 싶어 나는 조바심을 냈었다. 아픈 목을 참아가며 많은 책을 읽어냈고, 이 책도 두 번이나 읽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책을 읽기를 너무나 잘했노라고. 반드시 읽었어야 할 책이라고. 항상 나의 “궁극적 아름다움”이었던 하느님과 미켈란젤로를 만났다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이유지만 삶에서 “성취”가 가지는 묵직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늙는다. 또 좌절하기도 하고 상실하기도 한다. 그러나 반대로 사람은 매일 새로운 삶을 부여받고, 곤경을 딛고 일어서며 나아간다. 아마 미켈란젤로 역시 그런 과정들을 겪으며 그저 살아냈을 테다. 자신의 작품들이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받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도 살만한 삶임을,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또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으니 나는 아직도 다시 나아갈 수 있음을 여실히 깨닫게 해준, 최고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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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턱의 청년들 - 한국과 중국, 마주침의 현장
조문영 외 지음 / 책과함께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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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턱에 머문 삶의 모습은 그래도 꽤 다채롭다. 커뮤니타스를 생성해낼만한 에너지 자체가 소진된 삶들. 경이의 순간이 사라진 일상에 익숙해진 삶도 있다. 어떤 삶은 정상성의 궤도에서 탈선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다른 어떤 삶은 창업, 투자, 기술 혁신, 팬덤, 이주 등 다양한 방싱으로 문턱에 생기를 입힌다. 이 과정에서 누군가는 차별과 불평등에 좌절하고, 누군가는 공모한다. (p.17)

 


n포세대. 이게 요즘 아이들이란다. 그저 살아내기 위해 포기할 것이 많은 세대. 우리네 부모 세대만 해도 당연했던 결혼이나 출산이 우리 세대는 선택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되었고, 지금은 포기해야할 무엇인가라고. 돌아보니 나 역시도 무엇인가를 위해 당연히 다른 하나는 포기하고 살아온 것 같아서 씁쓸함을 느끼기도 했고, 더 나은 가치를 위한 (적어도 스스로 판단하기에) 선택한 것에 대해 온 사회가 씁쓸해야 하냐는 회의적 시각도 있었다. 

 


이 책을 읽다보니 이게 과연 한국과 중국의 청년들에 국한되는 이야기인가 싶어진다. 어쩌면 지금의 세상을 살아가는 -숫가락 잘 들고 태어난 애들 제외하고- 모든 청년들의 이야기인 것 같다. 그래서 다소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희망에 가득차 앞을 향해 달려야 할 젊은이들이 왜 이렇게 문턱에서 헤메이고 있나. 우리의 “오늘”은 왜 이런 모습인가. 

 


쉐어주택, 여성전용주택. 나처럼 “나의 공간. 나의 생활”에 대한 욕심이 많은 이들에게는 참 힘겨운 거주공간이었을테다. 그들이라고 하여 공간에 대한, 독립생활에 대한 욕구가 없었을까. 이 부분들을 읽으며 참으로 안타까웠다. 또 그 속에서 위태로이 느끼는 불안과 남성들이 말하는 역차별까지. 집은 쉬어야 하는 공간인데, 집에서마저 피곤함이 이어지는 삶인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의 나는 “눈을 좀 낮추면 되지 않나”라는 시각을 좀 가진 사람이었는데, 문득 “이 이상 눈을 낮추면 생계가 위태롭지 않은가”하는 마음이 든다. 일부는 더 나은 삶을 살고자 다른 것을 포기한다지만, 그저 생존을 위해 포기해야 하는 삶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시리다.  

 


직업에 대한 부분을 읽을 때에도 회의감이 들었다. 경제적 자원에 따른 기회의 불평등이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인식된 채 성장해온 우리들은, 어린 시절부터 차별과 불평등을 교육받으며 성장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의 부모님이 내게 주신 경제적 자원을 불평할 생각은 없지만, 우리 아이도 그러한 불평등을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되는 사회라고 생각하니 아득하다. 우리 아이가 어른이 될 순간에도 달라질 것 없는 사회라는 생각에 씁쓸함만 남았다.  

 


침묵 당하는 동시에 침묵하는 K (p.258). 이 문장이 참으로 가슴아프게 다가왔다. 어쩌면 우리모두는 라서, 경계선에 서 있는 청년들에 대한 이 책이 이렇게 먹먹하다. 개천에서도 용이 날 수 있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고, 용의 둥지에서도 모두가 용이 되지도 못한다. 어제의 영광은 내일 옥살이가 될 수도 있고, 우주까지 날아갈 기세였던 재산은 땅굴도 파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에서 배울 수 있듯, 우리가 지나온 어제의 영광이나 아픔 역시 무엇인가를 남긴다. 

 


규범과 과거를 거부하고, 새로움을 여는 세대들이 불안과 균열을 경험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허나 그들의 흔들림이 그들의 삶 자체를 흔드는 일은 아니기를 바래본다. 다음에 읽게 될 “요즘 아이들”책은 “살기 위해 포기해아 하는 삶”이 아닌 “더 나아지기 위해 선택하는 삶”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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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왜 사라졌는가 - 도시 멸망 탐사 르포르타주
애널리 뉴위츠 지음, 이재황 옮김 / 책과함께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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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폼페이를 버리겠다고 결심하지 않았다. 그곳이 불더미 속에 묻힌 것은 거의 견딜 수 없는 상실로 느껴졌다. 그리고 많은 생존자들은 서둘러 다른 도시들에서 자기네 삶을 재건하고 그들이 잃어버린 공적 공간의 새로운 변형을 건설하는 데 헌신했다. (p.159/폼페이)

 

사실 처음 이 책을 받아들고 두가지 생각이 들었다. 최후의 날이 아닌, 도시 자체로의 폼페이를 드디어 제대로 알게 되겠구나, 하는 마음과 표지에서부터 르포르타주라고 적힌 지겨움이 가득할 것 같은 이 책을 내가 읽어낼 수 있을까하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두가지를 다 해냈다. 폼페이를 알게 되었고, 잘 읽어냈다. 평소 즐겨보는 다큐멘터리 한편을 시청하듯, 푹 빠져들어, 재미있게 말이다. (이거 왜 이제 읽었지?)

 

 

우리가 다름 장소의 거리를 걸을 때 우리는 다시 스스로를 발견한다. 더 좋을 수도 있고 더 나쁠 수도 있지만 말이다. (p. 97 / 차탈회윅)

 

발음조차 어려운 이 도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축에 속한다. 이 도시 이야기를 시작할 때 저자는 “먼 과거로 가는 입구”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처음엔 다소 시적인 표현이라 생각했으나 읽다보니 이는 정말 사실적인 표현이었다. 유목민들의 정착, 도구의 발달, 농경이나 사육, 사유재산 등 인류가 발달하는 그 모든 과정을 이 도시에서 다 만날 수 있다. 지금은 당연한 그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만들어가는 고대의 삶을 내가 쉬이 유추해볼 수는 없지만, 그것을 발견해주고 문헌화해준 이들이 있어 나는 작은 나의 집에 앉아서 고대의 그들을 만난다. 어쩌면 이것이 책의 가장 바람직한 기능이 아닐까. 도시는 도구이고, 조상이고, 우주론이고 역사라는 저자의 말이 깊은 공감을 가져온다. 

 

차탈회윅을 다 읽어갈 무렵부터 나는, 완전히 이 책에 빠져들어 도시들을 여행했다.

 

 

이 장소는 새로운 발견이었다. 도시가 딱딱하게 굳은 재 아래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로마 유적지들은 침식된 대리석 더미로 무너저 내렸거나 현대 도시 아래에 묻혀버렸다. 그러나 폼페이에서는 화려한 신전 봉헌물에서부터 구매자를 위한 가격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보존됐다. (p.104 / 폼페이)

 

사실 로마문명에 그닥 관심이 없는 이들도 폼페이는 알지도 모른다. 하루아침에 화산재에 뒤덮인 도시. 남녀가 끌어안은 화석(?)을 만들어낸 도시. 나 역시 폼페이를 역사적 의미보다는 하루아침에 사라졌다가 하루아침에 나타난 로마의 도시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바뀐 관점이 하나있다면 “사회화”라는 관점이다. “집”단위의 도시가 “거리”중심으로 변화하고 각기의 사회적인 건물들이 생겨나는 것. 그것이 현대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가. 넓게는 우리가 “문화”라 부르는 것들의 모체라고 생각한다면 로마문명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얼마나 큰가.  

 

 

“앙코르는 그 신전 가운데 하나가 스테로이드를 복용한 거예요.” 

그 말이 맞다. 이 도시의 숨이 멎을 듯한 사원들에 대한 경탄을 참을 수 있다면 그것들이 기본적으로 흙으로 된 기단 위에 세워진 더 크고 화려한 신전임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p.195) 

 

엄청난 문화유적을 품에 안고 정글로 사라졌고, 베트남군과 게릴라의 총질, 약탈에 의해 파괴되고 빼앗긴 도시. 개인적으로 앙코르는 아픔이 가득한 도시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새로운 상식을 가장 많이 얻은 부분이 바로 앙코르였다. 그 아름다운 유적들만 바라보았던 나의 눈은 앙코르의 노동, 정치 등에 새로이 매료되었고 어쩌면 한 도시로의 집중이 어떤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유추하게 되었다고 할까. 오늘 다른 글을 쓰며 거론했던 “발전”의 어두운 뒷 모습을 앙코르에서도 만났다고 하면 나의 지나친 비약일까. 

 

 

아마도 이런 생각이 사람들로 하여금 도시를 떠나고 새로운 곳으로 옮겨가는 것을 더 쉽게 만들어주었을 것이다. 카오키아의 극적인 확장과 폐기를 생각할 때는 “폐쇄”라는 근본적인 관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p.279 / 카호키아)

 

네 도시 중 가장 생소했던 곳이 카호키아였다. 아마 이 도시가 가장 앞에 나왔더라면 생경한 마음에 이 여정을 마무리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 도시를 만나는 동안 내내 도시의 가치관, 미술, 기술 등이 옮겨가는 과정과 그로 인해 도시까지 옮겨지는 것들을 보며 사람에게 있어서 문화가 얼마나 큰 가를 깨달았다. 그리고 사라져가는 것들이 얼마나 덧없는지도. (아, 이 사실주의 독서를 하면서도 덧없음을 논하는 나의 뇌여)

 

이 책을 편집한 이가 이 책에 대해 매우 완벽히 이해하고 있고, 매우 똑똑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이 파트를 읽으며 생각했다. 차탈회윅을 가장 앞에 넣고 카호키아를 가장 끝에 넣은 책을 덮은 후에 에피타이저부터 디저트까지 한상 제대로 받은 느낌을 얻었다고나 할까. 폼페이와 앙코르가 메인요리로 완벽한 것처럼, 차탈회윅은 에피타이저로써, 카호키아는 디저트로써 넘치도록 완벽했다. 

  

밤이 긴 계절이다. 소설책이나 에세이를 읽기에는 다소 긴 밤이다. 그럴 때 이런 책들을 만나시라고 권해드리고 싶다. 물론 이렇게 호흡이 긴 책을 읽으려면 자세도 여러번 바꾸어야하고, 고구마나 귤도 여러개 건들여야겠지만- 책을 덮은 후 책장을 쓸어보면서는 읽기를 잘했다고 여러번 생각하게 될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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