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그림이란 재주 있는 사람만 그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나야 워낙 그쪽엔 재주가 없으니 학교에서 배우는 미술만 끝내면 그림과는 인연을 맺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림을 잘 그렸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전에는 그림에 대한 이런 마음이 생기리라 전혀 상상도 못했는데 말이다. 그림을 잘 그린다면, 아니 적어도 그림 그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어디 가서 멋있는 풍경을 보면 그림으로 표현할 수도 있을 텐데 아쉽다. 사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전에는 아예 그림에 대해 알지 못했던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알았을 때에야 비로소 알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전에는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으니 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림과는 담을 쌓고 살았던 나와는 달리 딸은 그림을 무척 좋아한다. 나도 어렸을 때는 그림을 좋아했던 것 같다. 그런데 딸과 내가 다른 점이라면 딸은 계속 그림을 좋아했고 난 어느 순간부터 두려워했다는 점이다. 한때는 딸의 그 모습이 싫어서 잔소리도 꽤 했다. 그런데 요즘의 여러 일들이 있은 후 딸의 그 모습에 너그러워졌다. 그래, 넌 나중에 문득 그림으로 남겨두고 싶은 모습이 있을 때 선뜻 종이와 연필을 꺼내는 용기를 갖길 바란단다. 한창 시험공부해야 하는데도 방에 들어가면 후다닥 그림을 감추는 모습을 보며 가끔 열받기도 했지만 나중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내가 좀 참아주는 여유가 생겼다. 워낙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고흐. 그만큼 그림도 파란만장하다. 그림 그린 기간이 10여 년 남짓한데도 엄청나게 많은 작품을 남겼던 고흐. 본인은 고흐라는 이름이 싫어서 서명을 할 때 항상 빈센트라고 썼단다. 그래서인지 여기 있는 그림에서도 고흐라는 서명은 찾아볼 수 없다. 살아있을 땐 무척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았지만 지금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화가가 바로 고흐 아닐까. 사실 여기 나오는 그림을 내가 따라해 보고 싶었지만 여전히 두려운 마음에 차마 하지 못하고 딸에게 내밀었다. 처음엔 고흐 그림이 어렵다고 한다. 그래도 워낙 그림을 좋아하니 어느새 책상 앞에 앉는다. 아직도 딸이 왼손으로 그림을 그릴 때마다 깜짝 놀라고 어색하다. 이 사진을 찍는데도 왜 색을 안 칠하나 한참 기다렸는데 알고보니 벌써 칠하고 있다. 왼손으로. 그래도 글씨는 오른손으로 쓴다. 갈색을 칠하고 쑥색으로 칠해야 하는데 승아 색연필에는 쑥색이 없단다. 알아서 비슷한 색으로 칠했나보다. 그래도 꽤 여러 색깔의 색연필인데... 다음은 주황색, 노란색, 초록, 연두, 검정색, 마지막으로 흰색으로 마무리를 하면 된다고 한다. 이렇게 차근차근 설명이 되어 있어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잠시 든다. 흰색으로 덧칠이 안 되어 크레파스로 해 버렸단다. 앞에 설명에 보니 유화는 덧칠이 가능하지만 색연필은 원래 덧칠이 안 되는 것이라고 나와있다고 설명해 주자 그래서 예시 그림에서 중간중간 공백을 뒀나 보다고 해석한다. 어쨌거나. 승아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 그런데 색연필이 별로 안 좋다고 탓을 한다. 꼭 일 못하는 사람이 공구 탓을 한다지만 다음에 화방 가면 좋은 색연필(여러 색짜리) 좀 사 줘야겠다.
특종, 기자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단어가 아닐까. 간혹 빗나간 특종으로 인해 곤욕을 치르는 경우도 있지만 그 유혹을 뿌리치기는 힘들 것이다. 근데 왜 아이들 과학책에 특종 이야기가 나올까. 아, 등장인물들이 과학기자들이란다. 어쩐지. 그리고 역시 글쓴이도 어린이 과학잡지 기자란다. 아무래도 기자가 기자에 대한 이야기, 그것도 과학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니 일단은 믿음이 간다. 전 세계 과학기자들을 대상으로 새로 창간한 과학신문 기자를 뽑는다는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새로 창간하는 과학신문은 온통 베일에 쌓여있다. 그런데도 기자라는 사람들의 특성 때문인지 아니면 인간의 본성이 원래 그런 것인지 모험을 걸기로 하고 기자 모집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다. 1차 예선은 가위바위보라나. 전 세계에서 그래도 내로라 하는 기자들이 모여 가위바위보로 반을 추려낸다니 설정이 좀 우습기는 하지만 원래 머리 쓰지 않는 일이 더 긴장되고 재미있는 법이긴 하다. 어쨌든 그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 딱 여섯 명이 최종 합격하고 거기서 다시 일등을 가려 편집장을 뽑는다는데 그들이 거치는 과정 자체가 과학과 연관된다. 가장 황당한 특종을 취재해 오라는데 각각의 기자들은 우여곡절 끝에 주어진 제시어에 맞는 황당한 특종을 찾아내니까. 그런데 뭐, 그다지 특종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이들에게 재미를 주고 간간이 제시되는 문제를 기자들과 함께 풀어보는 재미가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황당한 이야기는 마지막에 펼쳐지는 사기극이란다. 이땐 독자들도 정말 황당하다. 그럼 표지에 있는 부제가 성공한 셈이다. 세상에서 가장 황당한 특종이었으니까. 완성도를 추구하는 동화책이 아니니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겠지만 좀 어정쩡한 느낌도 든다. 동화도 아니고 과학 지식책도 아닌... 줄거리를 갖고 있으면서 그 안에 과학 상식과 지식이 들어간다지만 어딘지 어색함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중간에 들어있는 그림은 내용에서는 여섯 명이라는데 그림에서는 다섯 명이다. 삽화야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소소한 것에도 신경을 썼으면 좋겠다.
난 특별한 종교가 없다. 아니 관심이 없다. 그러나 간혹 어떤 종교든 의지할 무언가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긴한다. 하지만 워낙 선천적으로 무조건 믿는 것을 못하는 성격 때문인지 아니면 게을러서 믿음을 실천할 자신이 없어서인지 종교를 가져야겠다는 결심은 서지 않는다. 주변에는 기독교를 믿는 친구도 있고 불교를 믿는 친구도 있으며 카톨릭을 믿는 친구도 있다. 다만 아직 이슬람을 믿는 친구는 만나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들과 대화할 때 종교가 커다란 걸림돌이 된다거나 의견차이를 보인 기억은 없다. 어쩌면 대화에서 종교에 관한 문제는 배제했기 때문에, 애당초에 문제거리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남의 종교를 최대한 존중해 주려 노력한다. 왜냐, 나와 별 상관이 없으니까. 책을 읽는 내내 불편했다. 내가 종교를 가지지도 않았고, 그래서 내가 철썩같이 믿는 종교가 비판을 받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저자는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인 논조를 띠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굳이 '생각이 든다'는 표현을 하는 이유는 이렇게 박식하고 유명한 사람의 의견을, 그리고 저작을 종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아는 것도 별로 없는 일개의 독자가 어떻게 함부로 평가할 수 있겠나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어쩌면 비난을 피해갈 수 있는 길을 미리 만들어 놓는라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미 언론이 선정한 100인의 지식인 가운데 5위에 손꼽히는 사람답게 다양한 인물들을 인용하고 그보다 더 다양한 많은 서적들을 인용한 '덕분에' 그 중 읽어본 것이 별로 없는 나는 나의 무지를 개탄하며 읽어야 했다. 이제부터라도 잠자는 시간과 밥 먹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더 많은 책을 읽어야 하나... 그러잖아도 요즘 종교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차였다. 이슬람에 대한 내 고정관념을 깨는 계기도 있었고 우리나라에서도 다른 사람들은 사이비 종교라고 비판하는데도 정작 그 신도들은 우상처럼 떠받드는 모습을 보며 종교란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던 차였다. 그래서 더 이 책에 끌렸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신은 위대하지 않다는 의견에 진작부터 동의하고 있던 차였고. 그 어떤 종교도 순수하다거나 절대적이라거나 위대하다는 환상을 버린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러리라 생각한다. 아마 어떤 종교를 믿는 사람조차 자신의 종교가 절대적이라고 믿는 사람은 극히 일부 아닐까. 다만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자신의 마음을 의지할 곳을 찾는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는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 초점을 맞췄다기 보다 종교의 원론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고 거기서부터 사람들로 확대한다. 예수에 대한 논쟁이나 모하메드에 대한 논쟁 등은 이미 새로울 것은 없었다. 그러나 해당 종교를 바라보는 시각은 지나치게 편파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카톨릭이나 기독교에 대한 집단적인 광기나 횡포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특히 이슬람에 대해서는 적대감마저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종교를 객관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주관적이고 독선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어느 종교든 그 종교에 심취한 사람이 읽는다면 반응이 어떨까 자못 궁금하다. 저자가 재치 있고 대단한 은유를 씀으로써 웃음짓게 만드는 것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간혹 매끄럽지 못한 번역으로 인해 재치가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미국에서는 대단한 인기를 쓴 베스트셀러라고 한다. 아마 그들의 문화권에서는 생활의 연장선상에서 충분히 공감할 수 있고 통쾌함을 느낄 수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지식이 너무 협소한 내게는, 그리고 종교에 대해 두루 알지도 못하는 내게는 그다지 공감이 되지 않았다. 아마도 이것은 저자를 탓할 게 아니라 나의 무지를 탓해야 한다는 점, 인정한다.
바야흐로 봄이다. 개구리가 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도 지났으니 이제 조금 있으면 개구리알을 볼 수도 있고 조금 더 있으면 개구리 소리도 들을 수 있겠지. 시골에서 자랐기에 봄날 저녁에 논에서 들려오는 개구리 소리를 들을 때의 그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도 가끔 시골에 가면 그 소리가 너무 좋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올챙이를 잡아다가 커다란 대야에 놓고 한참을 구경하곤 한다. 물론 돌아올 때는 모두 원래 있던 곳에 풀어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요즘은 농약을 하도 많이 줘서 논에서 함께 살았던 생명체들이 많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뛰엄질과 풀쩍이 부부도 논에 알을 낳았지만 농약 때문에 실패를 했다. 어떤 올챙이들은 막 깨어났다가 기계에 깔려 죽기도 하고 화학비료 때문에 죽기도 한다. 뛰엄질과 풀쩍이도 논에서 계속 지내려고 하지만 먹을 것도 없고 약 때문에 몸이 가렵기도 해서 무작정 그곳을 떠난다. 한참을 가다가 결국 다정이네 마당에 있는 작은 연못(실은 고무 함지다.)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곳에서도 물론 모든 것이 잘 풀린 것은 아니다. 뱀을 만나기도 하고 무서운 물고기가 들어 있어 두려움에 떨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약을 주지 않아 먹을 것이 많고 언제나 신선한 물이 있다는 점이 그들을 머물게 한다. 결국 다정이네가 가짜 연못이 아니라 진짜 연못을 파면서 그들의 앞날은 희망으로 가득찬다. 그들이 정착하기까지는 결코 쉬운 여정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이 걸렸고 많은 위험도 따랐다. 하지만 그래도 오염되지 않은 곳을 만났다는 것 자체로도 그들에게는 행운이다. 환경과 생태가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누구 하나의 노력으로 될 문제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논에 농약을 주고 화학비료를 사용하는 것만을 무조건 비난할 수 있을까. 무농약으로 지은 벌레 구멍이 숭숭 난 농산물을 시장에 내놓으면 아무도 찾지 않는다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이것은 논점에서 빗나간 이야기고, 다시 이 책으로 돌아와서 이 책은 재미마주에서 초록학급문고라는 이름으로 내 놓은 첫 번째 책이란다. 그래서인지 표지도 초록색이다. 또한 두꺼운 장정이 아닌 얇은 표지를 사용했다. 그런 것은 모두 좋았으나 이야기가 지나치게 늘어진 느낌이었다. 커다란 사건이 있다가 해결되는 것만이 좋다는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상황을 계속 나열하면서 설명을 길게 해서 지루한 감이 있다.
외국의 이야기책들은 아이들이 잠이 안 온다고 할 때 눈을 감고 양을 세라고 한다. 그런 것을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면서 알았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샘은 그런 상상의 양이 아니라 진짜 양을 세야만 한다. 그러니 당연히 끝까지 셀 리가 없다. 아마도 샘은 어려서부터 잠자리에 누우면 습관적으로 양을 세며 잠을 자지 않았을까. 샘은 양을 자신이 돌보아야 하는 가축이 아니라 가족으로 생각하나보다. 밖에 비바람이 몰아치자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서 털양말을 신기고 털모자를 씌우고 함께 침대에 누우니까. 그리고는 모두 들어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세기 시작한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훈련된 탓인지 열을 세기도 전에 항상 잠이 들고 만다. 양들은 자신들을 세는 샘을 보며 일종의 야유를 보낸다. 분명 이번에도 다 세기 전에 잠들 것이라며. 팔짱을 끼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한 마디씩 내뱉는 모습이라니... 그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샘은 무조건 문을 열고 추위에 떨고 있는 양을 얼른 맞이하려고 한다. 양을 전부 센 적이 없으니 안에 몇 마리가 있는지 알 리가 없다. 그러나 주인이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할 것 같으면 스스로 지켜야 하는 법. 양들은 일단 문을 닫고 주인에게 자기들을 세어보라고 한다. 그렇게 옥신각신하는 과정에서 '양을 세다가 안 자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큰소리 치는 샘을 보며 그들의 문화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샘과 양의 대화 속에서 작가의 재치를 느낄 수 있다. 양들은 샘이 다 세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기에 대책을 마련한다. 그 모습이라니... 양들이 샘을 잠에 굴복하지 않게 하기 위해 취하는 행동(쇼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은 귀엽기까지하다. 그들의 가상한 노력 덕분인지 샘은 열 마리가 전부 집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늑대를 내친 다음 편안히 잠을 잔다. 그렇고 그런 뻔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양들의 재치있는 말과 그림이 재미있다. 어른들은 무심코 넘겨 버리는 표지에서도 아이들은 금방 늑대를 찾아낸다. 이렇듯 아이들은 구석구석 놓치지 않고 세심하게 들여다보기에 더 재미있게 그림책을 보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