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두콩 - 고정욱 선생님이 들려주는 인생 동화 상수리 작은숲 1
고정욱 지음, 김소희 그림 / 상수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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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애를 다룬 동화의 대부분은 이 작가의 글이다. 그래서 아예 '장애를 이야기하는 작가'라는 타이틀이 따라다닌다. 본인이 장애를 가졌기 때문에 누구보다 그들의 고통을 잘 알기 때문일 게다. 또한 대개의 작품이 지향하는 바가 장애우와 비장애우가 다함께 어울려 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현실에서는 그다지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이 작가가 그토록 열심히 그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예전에 고정욱 작가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자신의 어린 시절과 살아가면서 겪었던 이야기를 해주는데 그 때 들었던 이야기가 대부분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사실 고정욱 작가는 그래도 행복한 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소아마비라서 다리만 불편할 뿐(당사자에게는 이 말이 거슬릴지 몰라도 뇌성마비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든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이 유별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즉 지금의 작가를 만든 사람은 어머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업어서 등하교를 시켜주고 다른 사람과 똑같이 생각하고 활동하도록 지지와 격려를 해주었으니 그보다 값진 것이 또  있을까. 물론 그렇더라도 작가가 감내해야 했던 여러 상황들이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이니까 웃으며 이야기하지 당시는 무척 힘들었으리라는 것 또한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은 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어린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 7가지 덕목을 고르고 그것에 맞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모두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라서 쉽게 공감할 수 있다. 다만 경험과는 별개로 덕목에 억지로 끼워맞춘 듯한 느낌이 들어서 그 부분은 썩 와닿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작가가 그동안 어린이를 만나서 했던 이야기들을 더 많은 어린이에게 들려주기 위해 이처럼 책으로 쓴 것일 게다. 강연으로 이야기하는 것과 이처럼 글로 남기는 것은 큰 차이가 있기에 자신의 어린 시절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 어린이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작가 자신이 용기를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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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랑골 왕코와 백석이 상수리 큰숲 1
장주식 지음, 박영진 그림 / 상수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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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인 시골 동네에는 골짜기마다 이름이 있다. 안골, 새미골, 대지골(돼지골인지 대지골인지 정확한 명칭은 모르겠다.) 등등. 모르긴해도 바랑골도 있지 않았을까. 이처럼 이름이 낯설지 않은데다가 어린 시절에 집에서 소를 키웠기 때문에 읽으면서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다만 내가 회상한 어린 시절은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전(아, 내가 나이를 이렇게 많이 먹었단 말인가!)인데 반해 이 이야기의 배경은 구제역 사건이 일어났을 때이니 가깝게는 2010년 겨울이고 멀게는 불과 몇 년 전이다. 시골 동네에서 소가 자취를 감추면서 소를 키우며 일어나는 일은 그저 아득한 옛일 정도로만 생각했다. 지금도 천석이처럼 생활하는 어린이가 있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한 것이다.

  천석이와 할아버지에게 왕코는 특별한 존재다. 어떤 것을 무의미하게 바라보는 것과 의미를 두고 바라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다른 식구들은 왕코를 그저 한 마리의 암소로 보지만 천석이와 할아버지는 특별한 존재로 인식한다. 그래서 다른 소들과는 달리 따로 떨어진 외양간에서 키우며 사료보다는 풀을 먹인다. 그야말로 예전 방식 그대로 키우는 것이다. 그런 왕코가 새끼를 낳았는데 천석이는 자신의 조카라고 명명하게 특별대접을 한다. 이름도 자신의 돌림자를 넣어서 백석이라고 지어준다. 사실 시골에서 소는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단순히 재산을 넘어서 한 가족으로 인식하곤 한다. 그래서 어른이라도 소를 파는 날이면 눈시울을 붉히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소를 키우며 그럭저럭 살아가는 천석이네에게 큰 불행이 닥쳐온다. 바로 이 농장이 구제역 대상지역으로 지목되면서 모든 소를 살처분해야 하는 것. 이제부터는 그동안 매스컴에서 보아왔던 많은 영상들이 오버랩된다. 애지중지 키웠던 소를 병이 걸려서도 아니고, 걸렸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모두 죽여야 한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게다가 그것이 거의 전재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들에게 그 소식은 마른 하늘에 날벼락일 게다. 객관적 위치에 있는 사람도 소가 불쌍하고 농장 주인의 처지가 안타까운데 당사자들은 오죽할까. 그리고 여기서는 그 일을 집행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도 신경을 썼다. 안락사 시키기 위해 주사를 놓는 수의사들과 공무원들의 고충에도 눈길을 보낸다. 당시 안락사 시키는 주사약의 성분 때문에 논란이 되기도 했다. 말이 안락사지 실은 상당히 고통받으며 죽어간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것도 순전히 예산 때문에. 나중에는 살아있는 동물을 그냥 구덩이에 집어넣는 바람에 살겠다고 기를 쓰며 올라오는 동물의 모습이 보도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 일이 불과 몇 달 전의 일인데 마치 오래전의 일처럼 여겨진다. 아마 기억하고 싶지 않아 애써 외면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처럼 제삼자는 외면하면 되지만 가축을 기르던 사람들은 그럴 수도 없다. 결국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겠지. 기르던 가축들은 가슴속에 묻고 말이다.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들려주는 이야기, 그래서 더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허구라면 왕코와 백석이를 살려줬으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음을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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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끝에 오는 잠 - 아기를 품고 어르며 재우는 노래
류형선 글.곡, 노성빈 그림 / 보림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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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이 어렸을 때 자장가를 불러줬던가. 둘 다 잠투정이 심하지 않아서 재우는 데 어려움이 없어서인지 자장가를 불러준 기억이 별로 없다. 게다가 아는 자장가도 없었으니 그럴 수밖에. 각 나라마다, 민족마다 그리고 시대마다 자장가가 있다. 그리고 한 나라 안에서도 지역마다 각기 다른 자장가가 있다. 이처럼 당연한 듯이 얘기하지만 지역별로 어떤 자장가가 있으며 어떻게 다른지는, 모른다.

  자장가를 모아 우리 가락으로 들려주는 책. 비록 그 옛날 불러주던 음과는 다를지 모르지만 우리 악기를 주로 이용했으니 정서는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문득 <노란우산>을 만났을 때가 기억난다. 책에 음악을 곁들여서, 그것도 글이 없는 책에 아주 경쾌하고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듣도록 했었지. 이번에는 자장가다. 그동안 책과 음악을 곁들인 책이 많이 나와서 이제 새로울 것은 없지만 그래도 우리의 전래 자장가만을 모아서 예쁜 그림과 함께 볼 수 있도록 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대개의 자장가는 단조롭다. 별다른 뜻이 없는 소리를 반복하거나 주변의 사물과 동물을 끌어모아 가사에 이용한다. 그래서 그때그때 변주가 가능하다. 오늘 부르는 노래와 내일 부르는 노래의 가사가 동일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원래 옛이야기도 상황에 따라, 화자의 기분에 따라 줄이거나 늘이기도 하는 것처럼 전래 자장가도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강아지가 지나가면 '강아지도 잘도 잔다'하고 갑자기 쥐구멍에서 쥐가 나오면 '쥐가 잘도 잔다'고 할 테니 말이다. 이처럼 그 지역의 특색이 가사에 반영되기도 하고 사투리가 고스란히 들어가기도 한다. 그래서 제주도의 자장가를 들어보면 처음엔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웡이 자랑'에서도 도대체 웡이가 무엇이길래 자랑을 한다는 것일까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웡이는 워리처럼 개를 부르는 소리고 '자랑'은  '자장'이라는 뜻이란다. 그제서야 노래가 이해된다. 다양한 자장가를 예쁜 그림과 우리 가락으로 만나는 시간이었다. 노래를 들으니 졸립기는 했지만(자장가이므로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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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세계의 걸작 그림책 지크
넬리 스테판 글, 앙드레 프랑소와 그림, 정지현 옮김 / 보림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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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작가도 생소하고 그림 작가도 생소한데 책을 펼치면 다시 생소한 인물이 쓴 서문이 나온다. 게다가 제목도 사람 이름이다. 이쯤되면 헷갈리기 시작한다. 처음에 서문을 읽으며 별 생각없이 서문을 쓴 사람이 글이나 그림 작가 중 한 명이려니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다. 그제서야 넷의 관계를 자세히 살펴본다. 그러니까 롤랑은 이 책의 주인공 어린이고 서문을 쓴 로베르 마생은 아트디렉터이자 작가란다. 로베르 마생의 서문에 '다시 출간했다'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프랑스에서는 많이 알려진 책인가 보다.

  롤랑이 그림을 그리고 '쨍'이라고 외치기만 하면 그것이 살아 움직인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 누구나 그런 생각 한번쯤은 해보았을 것이다. 실제로 어린이 책에서는-제목이 기억나지 않지만-그런 식의 이야기가 간혹 있다. 다만 좋은 의도를 가졌다기 보다 못된 친구들을 혼내주거나 자신의 누명을 벗는 일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그런데 롤랑은 아무리 봐도 그냥 그림을 그렸지 싶다. 물론 처음에야 지각해서 벌을 세운 선생님을 원망하며 혼내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살짝 의심해 보지만 롤랑의 행동을 보아 그런 의도는 전혀 없어 보인다. 단지 심심해서 호랑이를 그렸고 '쨍'이라고 외쳤을 뿐이다. 또, 호랑이는 그냥 밖으로 나갔으니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다.
 
  여기서 선생님의 반응이 참 멋지다. 보통의 어른이라면 이게 무슨 짓이냐며 롤랑을 혼내고 호랑이를 내쫓았겠지만 선생님은 '여기 네 자리가 없다'는 말 한 마디로 모든 상황을 정리한다. 여기서 잠깐 우리네 문화와의 차이를 느낀다. 예전의 우리 정서였다면 아이와 호랑이를 혼냈을 테고 요즘, 그러니까 아이의 말을 경청해야 하고 나 전달법을 써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요즘이라면 아마도 이것이 선생님을 얼마나 당황하게 하는지, 교실은 어떤 곳인지를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처럼 단 한 마디로 아이의 마음과 상황을 인정해주면서도 한 단계를 뛰어넘어 해결하는 대화법, 정말 재미있다.(이것은 약간 딴 얘기지만 유은실 작가의 이야기가 그런 식이라서 처음에 엄청 열광했다. 물론 지금도 여전하다. 요즘에는 우리 작가들도 재치있고 유머가 넘치며 위트 있는 글을 많이 써서 그런 재미를 느끼곤 한다.)

  선생님이 다시는 '쨍'이라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으로 보아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도 다른 말은 하지 않는다. 그런 반응은 롤랑의 엄마도 마찬가지다. 다만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선을 그으며 이자벨에게 사과하라는 말을 덧붙일 뿐이다. 게다가 롤랑이 생명을 준 동물들이 나중에 모두 롤랑에게 돌아와서 함께 사이좋게 노는 것으로 끝난다. 다시 종이로 돌아가면 어쩌나 괜한 걱정을 했는데 다행이다. 롤랑의 행동이 아주 특별하고 괴짜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나오는 어른들은 그것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애쓰거나 오류를 지적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인다. 그것이 진정 어린이들이 바라는 것일 게다. 아마 어린이들은 매순간 이런 식의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다. 현실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아 좌절하면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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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 33
요한 볼프강 폰 괴테 / 푸른숲주니어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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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순간부터 사랑을 노래하는 책은 잘 안 읽는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또 감수성이 예민한 성격도 못 되기에(하긴 한창 사랑을 시작하는 풋풋한 시기에 읽었다면 감수성이 풍부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책은 고전이니까, 한번 정도는 읽어둬야 한다는 의무감에 읽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참 아름다운 사랑을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긴 한다. 물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한다고 해서 자살을 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젊은 시절, 이 책을 안 읽었기에 만약 그 때 읽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편지 형식의 소설이라 베르테르가 들려주는 이야기 외에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어서 나중에 답답하리라 생각했는데 괴테도 그것을 염두에 뒀던지 나중에 편저자가 등장해서 그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금이야 워낙 다양한 형태의 소설이 많아서 새로울 것이 없지만 이 책이 처음 출간될 당시 이런 형식의 소설은 파격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괴테의 첫 번째 소설이라니. 아마 경험에서 나온 소설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사랑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 이 책을 읽어보진 않았더라도 '베르테르 효과'라는 말은 들어보았을 정도로 워낙 잘 알려진 이야기. 사실 남녀간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용이라 그다지 마음을 끌지는 못하리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 감수성이 예민한 베르테르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주변을 돌아보는 방식이라던가 고뇌에 차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방황하는 모습이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맞아, 나도 그 때는 그랬었지하며 말이다.

  사춘기 아이들은 무슨 벼슬이라도 되는 양 툭 하면 자신들이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질풍노도 문학이라는 장르가 있단다. 계몽주의적인 분위기에 반대해서 나왔다는데 이 책도 실러와 클링거의 작품과 함께 대표작에 속한다고 한다. 대신 이런 풍조는 젊은이들이 중심이어서 사회적인 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생명력이 길지는 못했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가 뒷부분에 잘 나와 있어서 작품을 이해하는데 훨씬 도움이 된다. 작품을 작품으로서만 감상하는 것도 중요하고 좋지만 나처럼 문학적 지식이 별로 없는 사람에게는-매번 느끼는 것이지만-그러한 정보가 상당히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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