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보기에 아무 걱정없어 보이는 사람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름대로 걱정이 있고 어려움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내가 지금 갈구하는 걸 누군가가 가졌다고 해서 그 사람이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은 다분히 주관적인 생각일 뿐이다. 알고 보면 그 사람은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걸 갈구하며 나를 부러워할 수도 있으니까. 여기 나오는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타자의 입장에서 보기에 부족한 것 없어보여도 나름대로 힘들고 고민이 많다. 예뻐서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을 독차지하는 세희도 사실은 엄마가 아파서 자기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어쩌다 물건까지 훔쳐서 마음 고생을 하지 않던가. 결국 엄마가 제자리로 돌아와서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하자 세희의 방황과 고민도 해결되었다. 평범한 생활을 하던 지우는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시자 모든 상황이 달라졌다. 형편이 어려워져 신발이 작아도 사 달라고 못할 정도다. 그래서 지우는 세희를 부러워한다.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만 보고 세희는 걱정이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세희에게도 나름대로 고민이 있다. 그러니까 누구나 그 선에서 고민과 걱정이 있다는 얘기다. 심장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자주 가는 준호가 일기장을 하나 마련해서 자기의 속마음을 적어 놓는데 그 일기장을 잃어버리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 일기장이 등장인물들 손에 들어가고, 각 인물들은 거기에 댓글 달듯 자기만의 방식으로 누군지 모르는 상대방을 위로해 주는 글을 쓴다. 그러나 글이라는 게 원래 그렇듯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쓰지만 결국 그것이 자신을 위로하는 이야기임을 안다. 다섯 명의 친구가 서로의 입장에서 겪은 일을 이야기하다 보면 어느새 모든 상황이 맞춰지는 방식, 전혀 낯설지는 않다. 그러나 준호의 일기장을 매개로 다섯 친구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서로에 대한 오해를 풀기보다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취한다. 처음에는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나에 관심을 가졌는데 읽다 보니 남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보다 자신이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성장하는 것이다. 엄마가 어떤 낯선 남자와 있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지만 알고 보니 엄마에게 자기가 모르는 아들이 있었다는 동현이 이야기는 언젠가 읽은 어떤 단편 동화와 소재가 비슷하다(물론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다). 이런 소재도 이제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 쉽게 마주칠 수 있는 것인가 보다. 그러고 보니 다섯 편의 이야기에 주인공의 성장 외에 공통으로 흐르는 정서가 또 있다. 바로 가족의 힘, 가족의 사랑이라는 것. 주인공들은 혼자인 것 같아 힘들고 외로워도 의지할 곳은 결국 가족이라는 평범한 사실을 깨닫는다. 삐딱하게 재미있는 맛은 없지만 안정되고 모범적인 결말과 하나하나 상황이 맞춰지는 맛은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이 많은 떠들썩한 곳에서 자신의 이름은 용케 알아듣는다는 칵테일 효과. 문득 그 단어가 생각난다. 책 뒷표지에 있는 심사평을 읽으니, 아니 그 보다 앙코르 와트 앞을 뚝뚝이가 지나가는 그림을 보자 이 곳이 어디인지 금방 알겠다. 마침 올 초에 캄보디아에 다녀 온 후로 왜 이리 캄보디아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가 눈에 띄는지 모르겠다. <안녕, 스퐁나무>가 출간된 지는 좀 됐어도 언젠가는 읽어야겠다는 생각만 했지 꼭 읽고 싶다는 생각을 못했는데 캄보디아에 다녀온 후에 궁금해서 찾아 읽었더랬다. 그런데 이번에는 캄보디아를 배겨으로 한 청소년 책이다. 내가 갔다 왔기에 눈에 더 잘 띈 것인지 아니면 안 다녀왔더라도 어차피 나온 책이니 상관없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여하튼 내게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현상'이다. 처음 시작은 캄보디아에서 여행 가이드를 하고 있는 수아 엄마의 철딱서니 없는 행동부터 시작한다. 아무리 딸이 일찍 철이 들었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엄마라는 사람이 이처럼 무책임하고 생각없이 살 수 있을까 싶어 화가 날 정도다. 가이드를 하기로 되어 있는데 아침에 사라져 버린다? 이건 누가 봐도 말도 안되는 상황이다. 게다가 엄마라는 사람이 딸이 감춰 놓은 돈까지 훔쳐가지고. 간혹 드라마에서 철 없는 부모가 나오기도 하지만 그건 극적 구성을 위해서 과장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여기도 그런 부모가 있다. 뭐, 이것도 어차피 드라마와 별반 차이 없는 허구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쩐지 괜히 실제 있었던 일만 같다. 아마 여기 나오는 곳들이 모두 갔던 곳이라 눈앞에 훤히 그려지기 때문일 게다. 그래서 책의 내용보다는 여행 일정과 내가 갔던 일정을 견주며 추억을 되새기던 시간이 많기도 했다. 그러다 그동안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가 마지막에 드러난 반전에 혼자 눈물 훔치긴 했다. 캄보디아는 정말이지 덥다. 건기에 갔는데도 낮에 돌아다니며 물을 얼마나 마셨는지 모른다. 그리고 씨엠립 시내의 모습도 눈에 선하다. 6번 도로를 따라 앙코르 와트도 가고 펍 스트리트도 가고 실크 농장도 갔었지. 피아노가 붙어 있던 가게 옆집에서 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다만 우리를 안내했던 가이드는 수아처럼 캄보디아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초짜가 아니라 아주 노련하고 아는 것도 많아서 내내 캄보디아의 역사를 이야기해 줬다는 점은 다르다.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들어서 자야바르만 7세와 폴 포트 등 많이 들었던 것들만 기억나고 나머지는 모두 뒤죽박죽이 되어서 문제지. 엄마를 대신해 얼떨결에 가이드를 하게 된 수아와 마찬가지로 엄마를 대신해 현지 안내인을 맡게 된 쩜빠가 엮어 내는 이야기가 아슬아슬하면서도 가슴 뭉클하다. 수아의 엄마는 도망친 것이지만 쩜빠의 엄마는 아파서 병원에 간 것이 다를 뿐 둘의 처지는 비슷한 셈이다. 하긴 다친 아빠를 대신해 뚝뚝이를 모는 쏙천도 수아와 다를 게 없다. 어째 여기는 모두 이처럼 무거운 삶을 짊어진 청소년들만 나오는지, 원. 하긴 캄보디아에서는 열 살이 안 된 아이도 팔찌나 엽서 등을 파니 청소년들이라면 집안의 한 일꾼으로서의 역할을 해야하는 게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좋은 인연이 아니었던 쩜빠와 수아가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과, 무엇보다 수아가 현실을 피해 달아나고만 싶어했다가 결국 현실을 인정하고 자신을 좋아하게 되는 과정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엄마와 자신을 버린 아빠를 원망하고, 혼자 남은 자신마저 버릭 도망가 엄마를 원망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는 당연한 결론(그러나 그 원인은 당연하지 않았다.)에 이르렀을 때는 그동안 뭐 이런 엄마가 다 있나 싶었던 내 마음마저 녹아버렸다. 그래도 미워해야 하는데, 수아가 엄마를 미워했던 것처럼 말이다. 수아야 엄마니까 나중에 사실을 알고 이해할 수 있지만 독자는 제삼자니까 계속 미워할 수도 있는데 그럴 수가 없다. 그러니까 작가에게 설득당한 셈이다. 툭툭 내뱉는 말투로 기분내키는 대로 말하는 수아의 이야기나 여기저기 던져 놓기만 하는 것 같은 글투가 딱 요즘의 분위기다. 동화나 청소년 소설의 문체가 점점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과정의 한 부분이다. 그러니까 약간은 상투적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상투적인 것이 부정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이 모여 하나의 사조를 이루기도 하는 것이라는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이것도 그 일부를 이루는 것일 뿐이라는 생각도 든다. 게다가 이 책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배경으로 그곳에서도 여기처럼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니 시야를 넓혔잖은가. 여하튼 내게는 추억도 함께 선물해준 책이다.
간혹 당연히 알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누군가가 모른다고 할 때 설마 그것도 모를까 싶다. 그런데 이제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고, 모든 것을 알 수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는데 생각이 미친다. 왜냐하면 내가 그럴 판이니까. '삼장법사가 서유기에 나오는 인물일 뿐 실존인물, 그것도 중국의 불교를 발전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일 줄은 전혀 몰랐다'고 서두를 쓰려 했는데 문득 누군가가 어떻게 그것도 모를 수 있느냐며, 어쩜 그리 무식할 수가 있느냐고 생각할까봐 걱정되어 변명 아닌 변명을 해본다. 지금까지 고대 상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실크로드를 개척해서 결국 두 문명이 교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거기에 다른 의미는 부여하지 않았다. 그저 수천 킬로미터를 걷거나 말과 낙타를 타고 다녔으니 힘들었겠다 싶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어차피 지금으로부터 수 천 년 전의 이야기에다 우리나라가 아닌 곳에서의 일이니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은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삼장 법사의 이야기를 읽다 보니 실크로드가 조금 유의미하게 다가온다. 오로지 인도의 불교 경전을 공부하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길을 떠난 현장.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 결국 자신의 의지를 실현했다. 사막을 건너면서 오아시스도 만나고(우리는 흔히 오아시스라고 하면 낭만적으로 생각하지만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것쯤은 안다.) 도둑도 만나고 때로는 험준한 산맥을 만나기도 하지만 모든 것을 이겨냈다. 가는 곳마다 지혜와 슬기로 왕의 신임을 얻고 심지어 그곳에서 설법을 하며 머물기를 권유받지만 원래의 목적지인 인도를 포기할 수 없었기에 끝내 어느 곳에서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 현장 즉 삼장 법사의 여행 경로를 거칠게 따라가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고 앞뒤의 내용이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지만 그의 의지만은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국(당시 당나라)으로 돌아와서 삼장이 한 일 때문에 지금까지 그의 이름이 불리는 것일 게다. <대당서역기>에 나오는 기록들이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고 하니 말도 안 되는 모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역사서로 봐도 무방하겠다. 물론 이 책은 그것을 토대로 삼장의 행보를 따라간 동화 형태의 이야기 책이고.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말은 쉬운 듯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실천하기 어려운 말이 아닐까 싶다. 다른 사람에게 적용할 때는 쉽게 되지만 자신에게 적용할 때는 어려운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다양한 경험을 하고 때로는 많은 일을 겪으면서 그 말의 진가를 깨닫는다. 아직 인생을 논할 나이는 아닐지라도. 예전에는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일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비록 커다란 사건일지라도 그보다 더 나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을 것이라 위안하는 여유가 생겼다. 즉 앞으로 더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는 계기로 삼게 되었다는 얘기다. 이 책의 럭키처럼 말이다. 남이 보기에는 우연이거나 불운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행운이 될 수 있다는 럭키의 긍정적인 마음 덕분에 읽는 사람도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깃털을 줍는 바람에 여우에게 잡아먹히지 않았다는 얘기는 분명 행운처럼 보여도 진흙탕에서 미끄러졌을 때 깃털에는 진흙이 묻지 않았기에 행운이라는 럭키의 이야기는 어찌 보면 지나치게 긍정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마음 덕분에 럭키는 주위 사람에게까지 행운을 전파할 수 있었다. 결국 독자도 덩달아 행운이 따라올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된다. 아이들에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을 자주 한다. 때로는 악착같이 매달려야 할 때 긍정적으로 포기하는 바람에 열받긴 하지만 그래도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 애쓴다. 아마 럭키의 친구인 루시도 앞으로는 긍정적인 시각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한때 많이 사용되었던 콜라주 기법과 처음 읽으면 바로 무슨 이야기인지 유추할 수 있는 내용, 그래서 너무 뻔한 이야기지만 생각할 거리는 던져주는 이야기다. 참신한 맛은 없지만 나름대로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겠다.
도서관에서 바로 보이는 학교 뒷동산에 갖가지 꽃이 피었다. 내가 좋아하는 매발톱도 있고 요즘들어 부쩍 예뻐 보이는 붓꽃도 있다. 몇 학년인지 과학 교과서에 꽃이 나오는데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뒷동산의 꽃들이 더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또 교장 선생님께서 워낙 야생화나 생태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계셔서 듣다 보니 예전에 한창 생태에 관심을 갖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냥 지나가는 지식으로만 생각했던 암술과 수술, 갖춘꽃과 안갖춘꽃 등이 조금씩 다가오는가 했는데 마침 이 책을 읽으니 약간은 정리가 되는 기분이다. 소나무는 원래 암꽃과 수꽃이 따로 핀다는 것은 알았지만 솔방울을 맺기 위해 2년이 걸리는지는 몰랐다. 은행나무는 암그루와 수그루가 따로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둘을 구분할 줄은 모른다. 책에 확연히 다른 꽃이 나오지만 막상 나무를 보고 알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암꽃과 수꽃이 한 곳에서 같이 피는 호박꽃도 이론상으로는 알고 있어도 실제로 구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림을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이론과 실제가 항상 같다고는 할 수 없으니 말이다. 꽃받침이나 꽃자루와 씨는 별개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니까 꽃받침은 단지 꽃을 피울 때 필요할 뿐이고 씨와는 별 상관이 없을 줄 알았는데 딸기의 경우 꽃받침이 커져서 우리가 먹는 열매가 된다니 신기하다. 사과는 꽃받침과 꽃자루가 변해서 우리가 먹는 과일이 된다나. 그냥 아무 생각없이 먹었던 과일과는 확연히 다르다. 꽃받침은 꽃이 져서 떨어져 나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같은 방식이라 생각했던 사과와 감이 전혀 다른 방식이라는 것도 새삼스럽다. 즉 사과는 헛열매이고 감은 참열매라는 것이다. 아, 그래서 감꼭지 부분에는 꽃받침이 그대로 남아있던 것이구나. 사과에는 없는데.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이처럼 커다란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이래서 아는 만큼 보이는가 보다. 사실 과학 교과서에 식물이 나오지만 아이들은 그다지 관심 갖지 않는다. 시험을 보기 위해 반짝 외우고 지나면 싹 잊어버린다. 둘째도 내가 식물에 대해 설명하면 그게 왜 재미있느냐고 반문한다. 그래, 나도 예전에는 식물이 이처럼 재미있고 신기한 줄 몰랐다. 그런데 조금씩 알아갈수록 재미있다. 특히 무조건 외워야 할 것 같은 교과서가 아니라 제목처럼 자연학교에서 놀다가 만나는 식물이라면 훨씬 재미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