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말이 잘 통한다고 생각하는 어린이가 얼마나 될까. 그래서 의사소통을 잘 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대화가 필요해> 같은 책도 있고 엄마가 싫어하는 일을 잔뜩 늘어놓은 다음 그와 반대로 하면 엄마가 좋아하실 거라고 이야기하는 <엄마를 화나게 하는 10가지 방법>과 같은 책도 있다. 그리고 또 이런 책도 있다. 엄마의 특징을 조목조목 설명해 준 다음 어떻게 하면 엄마가 좋아하실지를 슬쩍 알려준다. 게다가 이 책은 어린이의 눈높이로 썼다니 아이 눈에 엄마가 어떻게 비치는지 엿볼 수 있다. 아홉 살짜리가 이 책을 썼다는 것이 대견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순수한 어린이가 맞을까 싶을 정도로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두 녀석과 글로 '대화'를 시도해봤다. 대체로 비슷했는데 게임 많이 하라거나 맛있는 것 사줄 때, 친구들과 놀게 해 줄 때, 공부 안 해도 된다고 할 때는 엄마가 멋지단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요, 게임을 못하게 하는 것도 아닌데 툭 하면 그 소리다. 엄마가 바라보는 아이 모습과 아이가 느끼는 자신의 생활은 정말 다르다는 걸 느낀다. 둘째 친구는 엄마가 어떤 것을 좋아하시느냐고 물었더니 '스스로 할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날 저녁에 친구 엄마를 만나서 이야기하는데 바로 그 부분을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평소에 아이에게 이야기했던 것인데 잘 기억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럼 우리 둘째는? '공부'라고 대답하면서 공부를 하면 '너를 좋아'하실 거라고 답한다. 여기서 잠깐! 공부를 하지 않으면 '너'를 싫어한다는 얘기가 된다. 둘째에게 그 점을 주지시켰더니 처음엔 이해를 잘 못하는 눈치다. 그래서 좀 더 자세히 설명을 해줬다. '네가 공부를 하든 안 하든 너를 싫어하지는 않지. 다만 네가 공부를 하지 않으면 공부하지 않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싫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네가 싫은 건 아니야.'했더니 그제야 수긍한다. 내가 그동안 아이에게 신뢰를 못 준 것일까, 문득 걱정된다. 학원도 안 다녀서 공부할 것도 별로 없는데도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게 바로 공부다. 이걸 어찌 설명해야 할지. 아무래도 '아들에게 말 걸기'를 만들어야 할까 보다.
둘째가 서서히 이성에 눈을 뜨는 시기여서인지 제 얘기는 하지 않지만 친구 이야기는 종종 한다. 이를테면 친구 A가 C를 좋아하는데 A의 친한 친구인 B도 C를 같이 좋아해서 걱정이라는 둥 누구는 좋아하는 표를 너무 낸다는 둥 한번 말이 터지면 줄줄 나온다. 평소 학교나 친구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다른 사람에게 전해 듣는 경우가 허다했던 것에 비하면 많은 발전이다. 다만, 자신의 이야기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는 점이 여전하지만. 이 책을 둘째와 둘째의 친구와 함께 읽었다. 그 친구는 마침 여자 친구를 사귀었던 적도 있고 바로 얼마전까지만 해도 좋아하던 친구가 있었다(믿을 수는 없지만 현재는 없단다). 책을 읽고 얼마나 공감하느냐고 했더니 그냥 웃기만 한다. 큰아이(중학생이지만 여전히 그림책을 좋아한다.)가 이 책을 보더니 깔깔 웃는다. 특히 좋아하는 여자 친구가 있으면 절대 운동복을 입고 다니지 말라는 대목에서. 나도 이거 보고 어쩜 이렇게 콕 찝어서 이야기했냐고 감탄하며 읽었더랬다. 그런데 정작 둘째 친구는 전혀 반응이 없다. 역시, 남자들은 뭘 모른다. 여자들이 무엇을 싫어하는지 잘 모른다니까. 이 책은 어른이 아닌 어린이(그것도 남자 어린이)가 썼으므로 저자는 여자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는 얘기니 상당히 조숙한가 보다. 좋아하는 여자 친구 앞에서는 괜히 잘난 척하지 말고 수업 시간에 장난하지 말라고도 충고한다. 어쩜 이리 옳은 소리만 하는지. 이것은 비단 어린이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글도 재미있지만 단색의 깜찍한 그림은 보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떠오른다. 여자 친구를 사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어린이들, 이 책 읽고 좋은 결과가 있기를!
나는 미신을 믿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단호하게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입장이다. 어느 나라(라기보다 부족이라는 편이 맞을 것이다.)는 지금도 미신이 부정적인 면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면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곳이 있다고 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전 인류가 어느 시점까지는 신적인 존재에 상당히 의존했다. 과학에 의존한 기간보다 신에게 의존한 기간이 훨씬 길었으니 오히려 지금처럼 신에 의지하는 사람이 적은 게 이상할 정도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신보다는 과학을 믿는 편이다. 이 책을 처음 접할 때는 마치 어떤 여험한 존재가 인간을 지배하는 그런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일곱 샘물이라니 물을 신봉하는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읽으면 읽을수록 그 보다는 자연의 자연스러움을 받아들이고 그에 못지 않게 자신을 인정하고 자존감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티아 난나가 물을 신봉하고 경외한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연을 거역하지 않고 자신을 수양하기 위한 것이지 내가 생각하듯이 마법이 존재하는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하긴 시골에 계신 고모도 무슨 때가 되면 치성을 드린다며 떡을 해서 산에 있는 샘물에 가시곤 했다. 그 산이 동네에서 가장 큰 산이자 영험한 산이라고 하는데 신기한 것이 사시사철 샘물의 양이 일정하다는 것이다. 나도 전에는 산책할 겸 가끔 그 샘물에 가서 물을 떠오곤 했는데, 물맛이 진짜 달다. 고모는 그렇게 떡을 해서 절을 한 덕분인지 그 근처에서 산삼을 캤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물론 사실이다. 나도 봤으니까. 이렇듯 샘물은 사람들에게 경외감을 주는 존재다. 그렇기에 티아 난나가 백혈병에 걸린 안토니에타에게 아무도 없는 깊은 산 속의 샘물에 가서 자신을 맡기라고 하는 것일 게다. 그러나 위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무조건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에 앞서 자신감을 갖고 살겠다는 의지를 확실하게 하며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스스로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존재인지 깨닫는, 자존감을 갖는 과정이다. 병은 어느 정도의 정신력으로 물리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모두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본인의 의지가 가장 중요한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결국 안토니에타도 티아 난나와 함께 지내며 자신을 찾고 난 후에 병이 말끔히(그야말로 마법처럼) 나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환자인 자신에게 일을 시키고 조금도 배려해 주지 않는 것처럼 느꼈지만 알고 보니 그것도 모두 자신을 찾도록 하는 과정의 하나였다. 열네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죽을지도 모르는 병을 만난, 여리디 여린 소녀가 병을 극복하는 과정이 신비한 분위기에서 펼쳐지지만 읽고 나면 그것은 결국 신비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이고 당연한 귀결이었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스승의 날 즈음에 보아서인지, 부제가 더 눈에 들어온다. 물론 표제 이야기는 스승의 날에 대한 이야이가 아니라 갑자기 전근을 가는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지만 말이다. 주로 학교에서 일어나는 아이들의 일상을 모은 단편모음집이지만 그동안 읽었던 것과는 약간 다르다. 처음에는 뭔가 다르긴 한데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는데 정리하는 시점인 지금에야 알았다. 바로 주인공의 나이가 천차만별이라는 것. 단편모음집이라도 각 이야기의 주인공은 나이가 같거나 비슷한데 여기 이야기는 정말 다양하다. 어는 것은 3학년이고 어느 것은 6학년이다. 대개 동화를 읽을 때는 나도 모르게 주인공 또래에 나를 맞추고 읽는 습관이 있다. 그래야 그 또래의 생활에 더 공감이 잘 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왔다갔다 하니 연령에 나를 맞추느라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모든 이야기가 재미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첫 번째 이야기는 새롭다. 소재도 새롭고 새엄마에게 다가가도록 만드는 선생님의 방식도 재치있다. 요즘은 워낙 디지털 기기가 보편화 되어 3학년 짜리의 취미가 사진찍기라는 점은 새삼스러울 게 없지만 벌칙이 새롭다. 다른 친구의 사진을 몰래 찍는 것을 안 선생님이 그것의 잘못된 점을 일깨워주기 위한 벌칙으로 친구의 사진을 찍어오라는 벌을 준다. 바로 주연이가 제일 싫어하는 수지의 사진을 찍어오는 것이다. 그것도 수지가 엄마와 껴안고 있는 사진으로. 그런데 여기서 수지는 왜 벌을 받아야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그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면 더 멋진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새엄마라서 어색해하는 수지를 위해 선생님이 생각해낸 방법이 정말 바람직하면서도 효과적이다. 결국 둘은 친해지리라는 예측을 할 수 있다. 새엄마와 친해지는 계기도 만들고 싫어하는 친구와 친하게 만드는 벌칙이라니, 그런 벌칙이라면 많이 있어도 되겠다. 정말 새로운 소재였다. 그 밖에도 천방지축 동생 때문에 마음 고생을 많이 하지만 가족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두 번째 이야기나 억척스럽게 돈만 아는 엄마라서 싫고 창피해하지만 엄마도 마음 깊은 곳에는 남을 사랑하고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이야기 등 모두 가슴 따스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다. 참 이상하다. 다른 때 같으면 이처럼 별다른 고민이나 고통없이 감동적인 이야기는 너무 작위적이라며 투덜댔는데 여기 있는 이야기에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마 각각의 이야기에 나름대로 고민과 갈등이 있고 사람의 본성을 일깨우는 뭔가가 있기 때문인가 보다. 그리고 때로는 감동이 있다. 시종일관 경쾌하게 흘러가는 이야기나 우울한 환경 때문에 읽는 이마저 가라앉게 만드는 이야기에도 기본적으로 가족과 친구에 대한 사랑이 들어있다. 다만 화장식 낙서 자작극 이야기는 좀 지나치게 나아간 듯하지만 말이다.
둘째가 책을 보더니 읽겠단다. 어쩐 일이지, 책이라면 마지못해 읽는 녀석이. 생각해 보니 제목이 재미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표지를 본 몇몇 아이들도 상당히 친숙해 한다. 왜? 그건 바로 학교에서 종종 들을 수 있는 이야기니까. 제목과 표지 그림만 보자면 까마귀가 삼식이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보인다. 즉 삼식이가 선생님 역할을 하는 까마귀에게 혼나는줄 알았는데 둘이 비록 만나기는 하지만 같이 말을 하거나 서로 소통하지는 않는다. 까마귀 가옥이가 혼잣말로 삼식이에게 화풀이를 할 뿐이다. 가옥이는 삼식이 말을 알아듣지만 삼식이는 가옥이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 가옥이는 새만 보면 질색을 하는 삼식이에게 맺힌 게 많다. 그래서 모두 돌아간 교실의 삼식이 자리에 가서 혼자 삼식이를 혼내고 그것도 모자라 똥까지 싸놓고 간다. 물론 그때 삼식이와 가옥이는 같은 공간에 없지만 서로 약간의 기운은 느낀다. 이런 게 바로 재미다. 서로 연관이 없는 듯하지만 연결이 되지만 그렇다고 영향을 주지도 않는 묘한 분위기 말이다. 나중에는 결국 삼식이가 왜 그렇게 새를 싫어하는지 알게 되어 다른 새에게도 인간과 함께 사는 방법을 알려준다. 새가 다니는 참꽃 분교와 아이들이 다니는 초롱꽃 분교가 상생하는 방법을 모색해 가는 과정에서 올빼미 교장 선생님의 지시로 가옥이가 큰 역할을 한다. 마법이 나오고 동물이 사람의 말을 하는 열매를 먹는 등 비현실적인 이야기와 삼식이 주변의 현실적인 이야기가 전혀 어색하지 않게 잘 어울린다. 앗, 그런데 마지막과 뒷표지에 책 읽는 것을 싫어하는 삼식이를 위해 누나가 그림이 많고 글이 적은 책을 사다줬다는데 그 책을 읽는 삼식이 그림은 <염소 시즈카> 아닌가? <염소 시즈카>는 보림출판사에서 나온 책이고 이 책은 창비출판사인데, 이렇게 서로 인용하니 이 또한 재미있다. 물론 그림에서는 제목을 자세히 표현하지 않았지만 그림 분위기만 봐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수 있다. 우연한 기회에 초등학교 도서관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이곳은 외곽지역이라 학교도 작고 도서관도 작다. 그리고 또 하나, 분교가 있다. 나는 아직 분교를 가보지 못했지만 행사를 같이 하기 때문에 가끔 전교생 35명의 분교 아이들을 본다. 그러니 이 책의 주인공 삼식이가 다니는 학교며 주변 이야기가 전혀 남의 일 같지 않다. 게다가 삼식이처럼 공부는 싫어하고 그저 노는 것만 좋아하는 아이들이 많은 것도 비슷하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현실의 아이들을 볼 때는 걱정이 앞서는 반면 이 책의 아이들은 공부를 안 하고 못해도 마냥 귀엽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