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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방스에서의 완전한 휴식
정수복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집 근처에 허브농원이 있다. 잘 꾸며놓은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러운 맛과 상큼한 향이 좋아 종종 가는 곳이다. 그곳에서 허브차를 마시면 돌아갈 때 작은 화분을 하나 준다. 작년 봄엔가 여럿이 가서 차를 마시고 가져온 라벤다가 이제 막 꽃을 피우려 한다. 작년에 꽃을 피우지 않아 속상했는데 알고 보니 꽃은 봄에 피우는가 보다. 그런 걸 가을에 꽃이 피지 않는다고 속상해 했으니 괜한 오해를 한 셈이다. 이 책을 읽는데 라방드 포푸리를 베개에 넣으면 숙면을 취할 수 있다거나 보라색꽃이 아름답고 은은하게 퍼지는 향이 무척 좋다기에 도대체 무슨 꽃일까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바로 라벤더였다. 안 그래도 카뮈의 묘소 사진을 보며 혹시나 했다. 프로방스에서는 라벤더를 밖에서 키워도 되는가 보다. 우리는 겨울에는 실내에 들여놓아야 하는데. 그게 바로 지중해 기후의 장점인가.
이 책을 읽고 언젠가는 프로방스를 꼭 가겠다고 결심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프로방스라는 지명은 알퐁스 도데의 <별> 때문에 모두 익숙할 것이다. 그게 중학교였는지 고등학교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여하튼 교과서에 실렸으니 웬만큼 기억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사실 알퐁스 도데의 소설을 읽으면서는 그냥 아름다운 장면이겠구나만 생각했지 그곳의 자연은 어떨까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그곳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언젠가는 꼭 가보고 싶은 곳으로 추가되었다.
우리나라 여름은 온도가 높고 습도까지 높아서 끈적끈적하고 기분 나쁜 느낌인데 프로방스는 강렬한 햇빛은 있지만 건조하다니 우리와는 전혀 다른 느낌일 것이다. 습도가 낮아서 햇빛이 더욱 강렬하고 모두 감탄하는 그런 풍경이 연출되는 것이겠지. 거기다가 바람이 불면, 정말 시원하겠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나라에서의 바람을 생각했을 때 얘기란다. 저자도 처음에는 사람들이 바람을 왜 싫어하는지 몰랐다고 하니, 역시 환경은 사람의 생각을 규정짓는다. 햇살은 강렬하고 건조한데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어온다면 나뭇잎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겠지. 특히 커다란 사이프러스나무에 바람이 분다면 어떨까. 아마 고흐가 이런 모습을 보고 그림으로 남겼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저자는 아를에서 고흐의 흔적을 찾아다니며(프랑스의 지명이 익숙하지 않아서 당췌 저자가 이야기하는 지명이 어느 부분인지 감이 없다. 그저 대충 짐작할 뿐이다.) 그와 내면의 대화를 할 때 사이프러스나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리라 기대했는데 웬걸, 한 마디도 없다. 고흐의 그림에서 사이프러스나무가 워낙 강렬한 인상을 줬기에 그 맛을 느끼고 싶었는데 아쉽다. 생 레미 병원이며 고흐가 그린 방, 카페 등등을 돌아다닌 이야기를 읽다 보니 고흐의 그림들이 지나간다. 비록 고흐의 그림을 모두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어찌보면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를 중심으로 풀어가는 일기 형식의 글인데도 지금까지 읽었던 어떤 여행 이야기보다 푹 빠져, 마치 저자와 함께 그곳을 거닐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내가 그리워하고 원하는 모든 것이 갖춰져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고요함, 햇살, 느긋함 그리고 자연. 이런 것들이 내가 그리워하는 것들이다. 때로는 분주한 여행이 좋을 수도 있지만 워낙 번거로운 걸 싫어하는 관계로 사람이 많지 않은 곳을 골라다니는데 프로방스가 딱 그런 곳이다.
문득 난 왜 그렇게 여행을 좋아하는 것일까라는데 생각이 미친다. 상당한 귀차니스트여서 하루 종일 집에서 뒹구는 것도 무척 좋아하는데 말이다. 무엇보다 낯선 곳에서 마주치는 자연의 모습, 지금까지 접하지 못했던 것을 접하는 경이로움과 그런 곳에서는 '나'를 좀 더 자유롭게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가 알지 못하고 나를 알지 못하는 곳에서 마주치는 '나'는 지금까지 규정지어진 '나'와는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전혀 다르게 행동할 주변머리도 없다. 그러나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확실히 다르다. 어쩌면 그러한 변화가 나를 자꾸 어딘가로 떠나고 싶게끔 하는지도 모르겠다. 저자가 그곳에서 온전히 자신을 만나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완전한 휴식을 취하고 왔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