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몸 속에 뭐가 들어 있다고? 사계절 그림책
김영명 지음, 김유대 그림 / 사계절 / 201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선명하고 알록달록한 색깔과 장난스러운 그림, 게다가 과일과 야채로 몸을 그린 표지 그림이 재미있다. 그냥 그림만 봐도 웃음이 절로 난다. 유아는 자기 몸에 대해 관심이 많단다. 특히 우리 몸속처럼 보이지 않는 부분이라면 더욱 궁금할 것이다. 어른도 가끔 의외의 사실을 알고 놀라는 경우가 있는데 아이들은 오죽할까.

 글 작가가 어린이집 아이들과의 생활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썼다고 하는데 딱 그 또래의 아이들이 관심 갖는 분야에 그 아이들이 생각하는 만큼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신선하지 못하단 느낌도 든다. 그것은 아마 이런 그림책을 본 기억 때문이 아니라 아이가 어렸을 때 한번쯤은 이야기한 기억 때문이 아닐까 싶다. 즉, 누구나 이런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는 얘기다. 역으로 생각하면 그런 평범한 소재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갔으니 정말 어린이와 함께 생활한 사람이 맞나 보다.

 음식을 먹으니까 몸 속에는 음식이 잔뜩 들어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매일 물이나 음료수를 먹으니까 음료수가 잔뜩 들어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전형적인 유아들의 모습이다. 거기에 익살스러운 그림이 보조를 맞추고 있어서 그림을 보면서도 나눌 이야기가 꽤 있다. 특히 똥이 잔뜩 들어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부분이 재미있다. 온통 똥으로 가득 찬 부분도 그렇지만 그 보다는 얼굴 부분에는 똥이, 몸통에는 과일과 야채 등의 먹을 거리가 그려 있는 부분은 모습 자체만으로도 재미있다. 어찌보면 지식을 알려주기 위한 책 같기도 하고 어찌보면 순수한 그림책 같기도 해서 경계가 모호하다. 특별히 신선하지는 않아도 선명하고 경쾌한 색깔의 그림 덕분에 유쾌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뒷집 준범이 보림 창작 그림책
이혜란 글.그림 / 보림 / 201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혜란이라면 <우리 가족입니다>에서 치매에 걸린 할머니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그린 작가다. 그리고 <짜장면 더 주세요>에서 중국음식점의 모습을 고스란히 그려낸 작가이기도 하다. 이 두 작품의 공통점이라면 배경이 모두 중국음식점이라는 것. 이것은 곧 작가의 어린 시절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는 중국음식점, 그러니까 신흥반점이 안 나오려나. 가만히 살펴보면 본문에는 나오지 않고 단지 중국음식점을 암시하는 글만 나온다. 그러다 책을 다 읽고 덮는 순간, 뒷표지에서 신흥반점을 만날 수 있다. 단지 이번에는 신흥반점이 주인공이 아니라 그 뒷집에 사는 준범이가 주인공일 뿐이다.

 공주네와 충원이네, 강희네는 같은 상가에 사는 사람들이다. 처음에 각각의 집을 소개하는데 인물만 바뀔 뿐 모든 것이 똑같아서 거기에 무슨 의도가 숨어있나 하고 열심히 찾아봤는데 알고 보니 세 집이 똑같은 구조였던 것이다. 준범이가 보기에 공주네 엄마 아빠는 왕비와 왕으로 보인다. 할머니와 단 둘이 사는 준범이로서는 엄마와 아빠의 존재자체만으로도 그런 생각이 들 것이다. 준범이 눈높이에서 보자면 세 집 아이들이 너무 부럽다. 엄마와 아빠가 있는 것도 그렇고 언제나 함께 유치원 가고 같이 노는 것도 부럽다. 그렇기에 이사온 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지만 밖으로 나 있는 창을 통해 웬만한 것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마냥 부러워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함께 놀자고 한다. 역시 아이들은 순수하다. 누군가 낯선 얼굴이 보이면 그가 누구인지 주변 상황이 어떤지는 아예 생각하지 않고 함께 놀자고 제안하니 말이다. 그런데 그 후에 더 가슴 뭉클한 장면이 펼쳐진다. 지금의 삭막한 아파트 생활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장면이다. 창문으로 자장면을 갖다 주는 엄마나 그것을 받아서 다같이 먹는 아이들이 어찌 그리 정겹던지. 혼자 남아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준범이에게 찾아온 친구들은 원래부터 알던 사이처럼 스스럼없이 어울려 논다. 친구들이 같이 놀자고 하자 말로는 괜찮다고 하면서도 실은 심심해서 어쩔 줄 모르던 준범이. 그런 준범이가 퇴근하는 할머니를 쫓아다니며 낮에 있었던 일을 미주알 고주알 이야기하는 마지막 장면은 괜히 기분이 좋다. 이제 앞으로 준범이는 앞집의 아이들과 함께 잘 지낼 테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치의 발견 - 정치에서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학 강의
박상훈 지음 / 폴리테이아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솔직히 말해서 나는 정치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마르크스의 책을 누군가와 같이 읽은 것도 아니요, 이념서나 철학서를 읽은 것도 아니다. 우연히 대학 4학년 때부터 어떤 주간지를 꾸준히 보기 시작했고 정치와 관련된 책을 조금 읽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역사나 세계사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지도 않다(이렇게 써 놓고 보니 정말 내가 알고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나는군). 그러나 관심은 많다. 내가 뭔가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냥 관심이 많은 것뿐이다.

 3년 전에는 매일 속으로 화를 내고 살았던 듯하다. 세상이 내가 생각한대로 움직일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틈만 나면 당시 상황을 성토하기 바빴다. 모든 것을 보수 탓으로 돌리면서 말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은 단지 화풀이 대상을 미리 정해놓았을 뿐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실망한 진짜 원인은 다른 데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아예 포기했다는 편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진보든 좌파든 지금처럼 하다가는 집권은 커녕 국민의 관심을 받는 것조차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읽게 된 책이다. 그동안 진보측 사람들의 말이며 행동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부분이 무엇이었는지 이 책을 읽으니 조금 감이 잡힌다. 그들은 자신들이 활동했던 운동권적 기질이 아직도 남아있지 않나 싶다. 그래서 일반 국민을 계몽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자신들이 앞에서 끌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와 반대의 양상으로 나타난 촛불집회를 보고 화들짝 놀랐던 것이고. 하지만 지금은 이미 그때처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헌데도 여전히 그네들의 고정관념틀 안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으니 일반 대중과의 괴리는 좁혀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진보적인 정치가는 권력에 관심이 없어야 한다는, 아니 적어도 권력을 위해서 정치를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나도 은연중에 하고 있었나 보다. 그렇기에 '정치가라는 직업은 권력감을 제공한다.'라는 글귀에 뒤통수를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곰곰 생각해 보니 정치를 한다는 것은 어차피 권력을 잡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 권력에 초월해야 한다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생각 아닌가. 그렇다면 권력을 잘 사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지 그것과 거리를 두라는 얘기는 아니잖은가.

 '유머와 웃음이 없는 정치는 위험하다.'는 말이 왜 그리 공감되던지. 지난 정권 때는 대통령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서 좌중이 웃는 장면을 종종 목격했으나 현 정권에서는 그런 장면을 본 기억이 없다. 언제나 진지하게 지시하고 설명하는 장면만 기억난다. 물론 진보도 마찬가지다. 원래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길 진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잘못만 성토하고 흥분을 잘한단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불평불만만 일삼는 사람처럼 보인단다. 그러면서 막상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한다는 문제가 있다. 이러한 문제점이 현재도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고 등을 돌리지는 못하더라도(대안이 없으므로) 적어도 지지하지는 않는 것일 게다.

 정치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5회로 진행된 강연을 묶은 책인데 꼭 정치를 하고자 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앞으로 더 나은 나라를 만들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도 흥미있는 책이다. 정치의 속성부터(어쩌면 내가 가장 오해를 많이 한 게 이 부분이 아닐까 싶다.) 현재의 문제점과 대안까지 골고루 이야기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진보적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책을 읽으면 상대편의 잘못을 부각시키며 자신을 정당화하는데 반해 이 책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물론 상대편이 잘못한다는 전제는 똑같지만 적어도 이쪽의 잘못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알고 있다. 그래서 상대의 잘못만 이야기하는 책은 읽는 도중에는 비록 속이 후련할지 몰라도 읽고 나서 얼굴이 일그러지고 마음이 불편한데 비해 이 책은 읽으면서도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정치' 이야기에는 으레 정치가가 주였는데 이 책은 정치가가 아니라 순수한 '정치'를 이야기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바의 눈물 마음이 자라는 나무 25
세사르 마요르키 지음, 김미화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방학에 한 달 동안 시골이나 친척 집에 가 있다면 어떨까. 그러고 보니 내가 어렸을 때 방학만 되면 외사촌 오빠와 언니(특히 오빠가 많이 왔다.)가 와서 몇 주일간 놀다 가곤 했다(우리가 시골이었으니 내가 다른 곳으로 간 기억은 없다). 그 기억은 아직도 유년을 생각할 때 큰 부분을 차지한다. 물론 언니와 오빠는 지금도 그때 이야기를 종종 한다. 또한 아직도 시골에 자주 오고 여전히 친하다.

 열다섯의 하비에르는 내키지 않는 시골 이모집으로 여행을 떠난다. 한 달씩이나 친척 집에 머무르면 좋을 텐데 하비에르는 전혀 좋지 않다. 그동안 사촌들과 왕래도 별로 없었거니와 사촌들이 모두 여자이기 때문이란다. 아빠가 병에 걸려 아이들에게 전염될지 몰라 내린 결정이니 타협할 여지가 없다. 형은 큰아버지집으로 가서 하비에르가 무척 부러워하지만 결과적으로 보자면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아니, 전화위복이라는 말보다 더 큰 기회를 잡았다고나 할까.

 컴퓨터나 게임기는 원래 없었던 시절이지만 흑백텔레비전 정도는 있던 시기였다. 그러나 하비에르가 가게 된 이모집에는 그마저도 없다. 달 착륙하는 장면을 보기 위해 이모부가 특별히 텔레비전을 볼 수 있게 만들어준 것만 해도 다행일 정도다. 가만 있자, 인류가 최초로 달 착륙하는 날이라면 1969년인데 시대적 배경이 1969년인 셈이다. 그러면서 이야기는 189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두 가문의 과거에 얽힌 이야기가 전설이 되다시피해서 지금까지 영향을 줘서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상시키는 줄거리와 하비에르와 바이올렛이 유령을 보고 그 정체를 밝히며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가 절묘하게 맞물려간다. 과거의 어떤 사건에 대한 문제를 풀기 위해 주변 인물을 탐색해가는 중에 만나는 이야기는 일종의 전설이다. 즉 전설과 탐정소설의 묘한 만남이라고나 할까. 그러면서도 유령이 어디 있느냐는 식으로 끝내지 않고 그것은 그대로 인정해준다. 결국 바이올렛과 하비에르는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으니 사랑 이야기도 들어있다. 하비에르의 말처럼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에 불과할 테지만 여기서는 일단 사랑이 시작되었다는 암시만 주고 끝난다.

 시바의 눈물이라고 불리는 목걸이를 찾는 과정과 유령의 정체를 밝히는 과정이 긴장감을 주면서 하비에르가 차츰 성장해 가는 모습도 보여준다. 다만, 문화적인 차이가 있는데다 시대적인 차이까지 있어서 뒷표지의 후기처럼 그 정도로 감동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설과 판타지, 추리소설의 요소까지 골고루 느낄 수 있는 책이다. 거기다 사랑까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라마조프 집안의 형제들 1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 28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서상범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1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만 들으면 자동적으로 작가가 튀어나오는 작품들이 있다. 그렇지만 그 중 읽은 책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이 책도 워낙 유명해서 읽었다고 착각할 정도다. 다만 러시아를 배경으로 하는 책은 이름이 하도 복잡해서 지레 겁먹고 포기하니 읽었다고 착각하지는 않는다. <전쟁과 평화>를 읽으며 어찌나 정신이 없는지 가계도를 그리며 읽다가 그마저도 헷갈려서 중도에 포기했었다. 그 후로 톨스토이의 작품은 조금 읽었지만 <전쟁과 평화>는 다시 집어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연장선에서 이 책도 비슷했는데 어찌어찌 하다 보니 읽게 되었고 3권 모두 읽었다. 읽어보니, 재미있다. 이렇게 술술 넘어가는 걸 그땐 왜 그렇게 힘들어했을까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그런데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은 완역이 아니라는 점, 즉 분량을 많이 줄였기 때문에 줄거리를 이해하는데는 문제가 없지만 작가의 섬세한 문장을 이해하기에는 약간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안 읽는 것보다는 이렇게라도 읽는 게 낫다는 게 내 생각이다. 게다가 심하게 축약한 것은 아니니까. 내가 종종 하는 말이 있는데 내 수준에는 이런 책이 딱이라는 것이다. 완역본을 힘들게 읽다가 포기하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다. 사실 원전의 맛을 느끼려면 완역을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얼마전에 <돈 키호테>를 읽으며 느꼈다. 축약본과 완역본을 함께 읽으니 확실히 차이가 났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처음 감동받았던 책은 이 시리즈의 <돈 키호테>였다. 책을 읽고 문체나 서술방식에서 감동을 받을 수도 있지만 말로 표현하지 못할 어떤 느낌에 감동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완역본의 <돈 키호테>를 읽고 작가의 재치와 문체에 대한 감탄이었다면 이 시리즈의 <돈 키호테>는 돈 키호테에 대한 연민이 감동으로 다가왔었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읽었느냐가 중요한 것 아닐까.

 장장 세 권의 책을 단숨에 읽었다. 예전에는 러시아 사람들의 이름이 그토록 헷갈렸는데 이제 그 정도는 아니다. 각 인물들의 특징이 확연히 드러나고 서사가 긴박하게 전개되어서 구별이 잘 되었다고나 할까. 어느 나라나 한 집안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당시 사회를 보여주는 이야기들이 있다. 어차피 개인이든 가족이든 나라와 떨어져서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니까. 표도르 파블로비치의 비인간적이고 비상식적인 모습을 보고 자란 세 형제가 은연중에 자신들도 아버지의 피를 이어 받아 인간답게 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알렉세이만 다른 형제들과 구별된다. 그러나 그마저도 후속편에서 살인을 저지르게 될 뻔했다니 전혀 아니라고는 못하겠다. 그래서 도스토에프스키가 후속편을 쓰지 않은-아니, 못 쓴-것이 오히려 다행이다.

 원래는 애칭을 많이 쓰지만(어떤 관계냐에 따라 애칭이 다르단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정식 이름을 썼다고 한다. 어쩌면 그래서 덜 헷갈렸는지도 모른다. 만약 친밀도에 따라 부르는 애칭이 달랐다면 그거 쫓아다니느라 애먹었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이야기에는 유독 죄와 살인이 많고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게 드러난다. 애초부터 종교에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는 나로서는 공감하기 힘든 부분이다. 이래서 사람은 문화적인 영향도 크다고 하는가 보다. 그런데 그런 책도 자꾸 보니까 이제 조금 이해가 되고 공감이 가기 시작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