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The Collection 2
유주연 글.그림 / 보림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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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창 그림책에 빠져있을 때 참 행복했다. 멋있는 그림책이 읽어도 읽어도 계속 있었으니까.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마음이 설레는 그림책을 만나기 힘들어졌다. 물론 새로운 그림책은 계속 나오지만 뭔가 울림이 있는 책은 만나기 쉽지 않았다. 게다가 컴퓨터그래픽으로 작업한 책이 많아지면서 손으로 직접 그린 책은 만나기 더욱 어려워졌다. 볼로냐그림책 전시회에 가도 눈길이 가는 책은 역시 손으로 그린 그림이었다. 기법이 다양해진 것은 좋으나 어딘지 모르게 깊이보다는 기교에 더 집중한 듯해 아쉬움을 느끼기도 했다.  

 우리나라 그림책 초창기를 이끌던 작가들이 수면 아래로 들어간 다음, 그 뒤를 잇는 작가가 그다지 많지 않다. 더욱이 꾸준한 작품 활동을 하는 그림책 작가를 만나기는 더 힘들다. 동화의 경우는 새로운 작가가 꾸준히 나타나고 각자 활발히 작품 활동을 하는데 왜 그림책은 그렇지 못한 것일까. 일각에서는 그림책의 경우 글 작가와 그림 작가가 따로 작업을 해야하므로 시간이 오래 걸리고 독자의 눈이 까다로워졌기 때문에 선뜻 발을 못 들여놓는다고 하는데, 그 보다는 출판사에서 작업이 쉬우면서도 안전한 외서번역이나 동화로 눈길을 돌리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요지는 우리나라 작가의 그림책을 만나면 일단 기쁜데 이처럼 전적으로 작품에 비중을 둔 책을 만나서 더욱 기쁘다는 얘기다. 'The Collection' 시리즈를 내면서 '시대의 유행을 벗어나 그림책의 본래 기능을 되살'리고, '시각언어를 통해 예술적 감동을 전하'는 책을 내겠다고 하니 나처럼 그림책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책을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치르치르와 미치르가 행복을 의미하는 파랑새를 찾아 한참을 헤매고 다니지만 알고 보니 그것은 자신의 집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연상되는 책인 동시에 수묵화의 필치로 현대적인 도시를 표현했어도 묘한 어울림이 느껴지는 책이다. 대신 파랑새가 아니라 빨간 새지만. 흑백 그림책을 유난히 좋아하는데 이처럼 수묵으로 된 책은 처음 본다. 애석하게도 수묵화의 기법을 잘 몰라서 다양한 기법이 사용되었다는 것 정도만 알겠다. 

 빨간 새가 넓은 곳으로 가기 위해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 날아간 곳은 우리가 흔히 보는 세계다. 커다란 빌딩이 꽉 차있고 높은 곳엔 피뢰침이 설치되어 있으며 곳곳에는 공사하느라 크레인이 서있다. 친구가 강에 떠 있는 줄 알고 내려가 보면 그건 새를 흉내낸 플라스틱일 뿐이다. 그런 걸 보고 새는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어디를 다녀봐도 자신이 살던 곳이 가장 좋다는 것을 느끼지 않았을까. 인간이 사는 곳은 그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을 뿐더러 자연적이지 않으니까. 결국 헤매다니다 자신의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 새는 주변에 있는 진짜 친구들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처음에 위만 바라봤던 빨간 새가 돌아와서는 옆과 아래의 친구들을 보는 것만 봐도 마음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어쨌든 현재보다는 미래를, 상업성보다는 가치를 더 생각하는 이런 그림책을 앞으로도 꾸준히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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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 돈 벌자고? 창비아동문고 261
박효미 지음, 이경석 그림 / 창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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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마디로 말해서 동화속에 경제를 적절히 버무린 이야기면서 동시에 이 책을 읽는 아이의 부모들이 자신의 어린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책이다. 그래서 유년을 시골에서 보낸 사람이 아이와 함께 읽는다면 할 이야기가 많겠다. 게다가 사투리가 어찌나 고스란히 나오는지 덕분에 비록 읽는 속도는 느렸어도 사투리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작가와 거의 비슷한 시대를 살아서인지 마치 내 어린시절을 보는 듯했다. 물론 가희처럼 놀진 않았어도 거의 대부분을 아이들과 어울려 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이토록 활달하고 천방지축인 가희가 그동안 어떻게 집에서만 보냈을까 의아할 정도다. 모든 일을 다음으로 미루고 방도 치우지 않는 가희와 무척 깔끔한 나희가 자매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둘은 정반대의 성격을 가졌다. 대신 그렇기 때문에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기도 한다. 뭐, 결국 가희가 구슬을 몽땅 잃는 바람에 원상태로 돌아가긴 했지만. 

 돈을 벌기 위해 궁리를 하던 중 얼음이 언 논에서 노는 동네 아이들에게 입장료를 받기로 하면서 일은 시작된다. 지금이야 얼음이 언 논에서 입장료를 내거나 썰매를 대여해서 노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겠지만 책 속의 아이들이 노는 시절엔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어차피 얼어 있는 곳에서 노는데 입장료라니, 그건 완전히 구두쇠, 아니 강도라고 여겨질 정도였을 게다. 가희가 내세운 입장료는 또 어떻고. 지금은 어쩌다 유행할 때나 가지고 노는 구슬이다. 나는 구슬을 갖고 놀지 않아서 어느 정도의 가치인지 모르겠으나 당시 아이들에겐 상당히 귀한 물건이었을 것이다. 

 집에서 꼼짝도 않던 가희와 나희가 틈만 나면 밖으로 나가고, 그러다 결국 노는 맛을 알아버렸다. 그래서 사정이 생겨서 못 나가는 날은 안절부절한다. 물론 거기에는 구슬을 따기 위한 집념도 있었지만 내 보기에는 놀이에 점점 빠져들고 있었기 때문인 듯싶다. 아이들은 원래 실컷 놀아봐야 나중에 미련을 갖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실컷 놀다가 아예 거기서 헤어나오지 못할까봐 걱정돼서 지레 겁먹고 못 놀게 하는 게 요즘 우리 부모들이지만. 머리로는 아는데 그것이 가슴까지 내려오는데는 시간과 용기가 필요한 일이 너무 많다. 

 서로 못 잡아 먹어 안달이던 팔석이와 함께 놀면서 전에는 알지 못했던 모습을 본다. 가끔씩 볼 때 가졌던 선입견이 서서히 사라진 것이다. 이렇듯 동네 아이들과 놀면서 드디어 가희는 많은 것을 배웠다. 모닥불을 피웠다가 팽나무에 옮겨붙는 바람에 불이 나서 고생하고 엄마에게 툭하면 맞고 욕 먹는 모습이 지금 아이들이 보기엔 도저히 이해가 안 갈지도 모르겠다. 지금이야 성냥이나 라이터를 갖고 다니면 절대 안 되지만 그 당시는 어느 집이나 아궁이에 불을 지피려면 성냥이 필요했으므로 성냥은 흔한 물건이었다. 실제로 작가와 비슷한 또래들은 추워서 모닥불을 놓았다가 짚가리에 옮겨 붙어서 혼났다는 이야기를 종종 한다. 

 처음 읽는 순간 작가의 어린 시절을 무대로 이야기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다면 요즘 아이들은 이해하지 못할 텐데 과연 공감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야기는 기록의 의미도 있다고 본다. 지금 아이들이 읽는 이야기라고 해서 여기서 일어나는 일만 유효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느 시대나 그 시대의 어린이가 생활하는 모습을 그림으로써 비교하기도 하고 기록하기도 하는 것이니까. 결국 그것이 모여 생활사가 되는 것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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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하라 고양이 - 가끔은 즐겁고, 언제나 아픈, 끝없는 고행 속에서도 안녕 고양이 시리즈 2
이용한 글.사진 / 북폴리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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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렸을 때, 시골에선 다 그렇듯이 강아지와 고양이를 키웠다. 내 기억으로 고양이를 여러 번 키웠던 것 같은데 유독 사람을 잘 따르던 어느 고양이는 주로 방에서 함께 지냈다. 고양이에 대한 무서운 이야기가 많아서 사람들이 썩 좋아하지 않는데 우리는 그 고양이 덕분에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 후로 고양이가 새끼를 몇 배 낳았는데 언제부턴가 밖으로 나돌더니 아예 사라졌다. 들고양이가 된 것이다. 흔히 말하듯이 고양이는 예민한 동물이다. 강아지는 혼을 내도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주인을 따르지만 고양이는 그렇지 않다. 적어도 우리가 키웠던 고양이는 그랬다. 그래서 저한테 조금만 서운하게 대하거나 관심을 갖지 않으면 집을 나가곤 했다.  

 한동안 고양이를 키우지 않다가 몇 년 전 사촌 오빠가 키우던 고양이를 데려다 시골에 놨다. 러시안블루로 족보 있는 고양이지만 시골에서 키우다 보니 예쁘게 치장해주지 않아 거의 들고양이처럼 산다. 그렇다고 남의 집을 기웃거리는 건 아니지만 마실을 간다는 이야기로 보아 아주 아니라고는 못하겠다. 이 책의 달타냥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마당고양이지만 그렇다고 집에만 갇혀 사는 건 아니요, 마실도 가고 엄마따라 마을회관에도 간단다. 


 부모님만 계실 때는 집안에 거의 들어오지 않는데 우리만 가면 아이들이 예뻐하는 걸 알고 들어와서 나가질 않는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애교를 떨지 않는다. 책에서 고양이들이 발라당을 한다는데 난 이 고양이가 발라당하는 모습을 본 적이 전혀 없다. 대신 이 고양이가 낳은 새끼는 발라당을 한단다. 물론 이 고양이 남편은 족보 없는 시골의 마당고양이다.  


 사료를 넉넉히 주고 개밥도 빼앗아 먹고, 때로는 마실가서 얻어먹기도 하나 본데 이렇듯 먹는 걸 밝힌다. 과자건 아이스크림이건 못 먹는 게 없다. 안 주면 입에 들어가는 것도 채갈 정도로 아주 뻔뻔하다. 어디 그 뿐인가. 주방에 못 들어가게 한다거나 먹을 걸 들고 안 주면 아주 짜증난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야옹거린다. 고양이가 신경질을 낸다는 걸 요즘에야 알았다. 


 어미 고양이가 낳은 새끼 고양이가 이만큼 컸다. 확실히 위의 고양이보다 자태는 멋지지 않지만 애교는 많다. 우리가 부르면 꼭 대답을 한다. 어미 고양이는 자기가 필요할 때 야옹거릴 뿐 절대 대답하지 않는다. 얘 이름이 여름이인데 첫 배로 네 마리를 낳아서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이름을 붙여줬는데 두 마리는 입양가고 두 마리만 남았다. 헌데 한 마리는 어찌나 겁이 많은지 사람에게 절대 가까이 오지 않는다. 집에서 정성을 기울여 키우는 고양이도 이럴진대 들고양이는 오죽할까. 게다가 저마다 아픔을 갖고 있을 테고 먹이도 제대로 먹지 못하니 마음의 상처가 클 것이다. 심지어 사람이 때리거나 약을 놓아서 죽게 만드니.


 위쪽의 작은 고양이가 낳은 지 얼만 안된 새끼 고양이인데 오빠들(오빠인지 언니인지 형인지 도통 모르겠지만 어쨌든)이 항상 데리고 다녔다. '다닌다'처럼 현재형으로 말하면 좋으련만 이제는 과거형으로밖에 쓸 수가 없다. 새끼 여섯 마리를 산짐승이 그랬는지 수컷 고양이가 그랬는지 모두 죽였기 때문이다. 처음에 몇 마리는 산짐승이 잡아갔는데 나중에는 다른 집 수컷 고양이가 그랬단다. 꼬봉이(러시안블루)도 산짐승과 싸우다가 귀를 다쳐서 아직까지 상처가 남아있는 상태다. 좀 큰 녀석들은 그래도 살아남았다. 꼬봉이가 처음 새끼를 낳았을 때는 어찌나 애지중지 하던지 눈꼴시려 못 볼 정도였는데 두 번째에는 완전 나몰라라였다. 그래서 형 누나들이 데리고 다니며 교육을 다 시켰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와도 이처럼 할 말이 많은데 주변에 있는 들고양이 모두와 지낸 저자는 얼마나 할 이야기가 많았을까. 아마 모르긴 해도 여기에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내가 사는 곳 주변에도 들고양이가 꽤 있다. 걔네들을 볼 때마다 밥을 어떻게 먹을까 걱정되지만 그곳을 벗어나면 까맣게 잊곤 한다. 길고양이들도 부디 행복했으면 좋겠다. 아니 적어도 제 명대로만이라도 살았으면 좋겠다. 아이들은 벌써부터 고양이가 보고 싶다고 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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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을 탁치는 심리학 이야기 만리무운 시리즈 3
이남석 지음 / 종이거울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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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포함해서 주변에 심리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원래부터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내가 관심을 갖다 보니 그런 사람들이 눈에 띄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심리학은 재미있으면서도 끝이 없는 학문처럼 보인다. 게다가 묘한 매력까지 느껴진다. 심리학이 한때는 이상한 학문이라는 인식이 강했지만(잘 모르는 나 같은 사람만 그랬나?) 점차 그 범위가 넓어지고 다양한 분야에서 필요한 학문이 되고 있다. 꼭 심리학 용어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알고 보니 심리학과 연결되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창 다른 사람을 의식하며 생활하는 딸도 심리학에 무척 관심이 많다. 내가 갖는 관심과는 방향이 약간 다를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사는 사회에서 소통을 하기 위해서라는 점만은 같을 것이다. 딸이 책을 소개하는 소책자에서 보고 <자아 놀이 공원>을 사달라고 해서 사줬더니 재미있게 읽었단다. 솔직히 철학이나 심리학은 생활하는데 꼭 필요한 학문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라 딸의 부탁을 흔쾌히, 아주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하며 들어줬다. 그러면서 저자를 기억했다. 저자나 제목도 자꾸 잊어버리는 요즘에 비해 그나마 머리가 잘 돌아가던 때였는지 모르겠으나 이상하게 저자의 이름이 뇌리에 남았다. 그래서 다른 것은 보지도 않고 저자의 이름 하나만 보고 선택한 게 바로 이 책이다.

 사람은 자기위주로 생각한다. 그래서 동일한 책을 읽어도 감정이입하는 부분이 다르고 느낌 또한 다르며 받아들이는 방식도 다르다. 이것은 모두 기존의 경험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심리학은 하나의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해도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할 수 없다. 이것이 심리학이 어려운 이유이자 매력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복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동일한 경험을 했더라도 누구는 복수를 하고 누구는 그냥 넘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복수가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것일까. 절대 그렇지는 않다고 이야기한다. 복수가 합리화될 수 없는 이유를 역시 심리학 이론을 알려주며 이야기한다.

 예전에 지인에게 아이 둘이 모두 AB형이라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했다가 어찌나 구박을 받았는지 모른다. 알만한 사람이 그처럼 떠도는 낭설을 믿는다고 말이다. 물론 나도 그러한 이야기를 전적으로 믿지 않지만 간혹 그런 이야기에 혹하기도 한다. 헌데 돌이켜보면 주로 안 좋은 일이 일어났거나 힘들 때 그런 생각을 하지 좋은 일이 있을 때는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안정되지 않을 때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 점을 보러 가는 사람의 마음과 비슷한 게 아닐까 싶다. 즉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것이다. 원래 비싼 가격의 옷을 아주 싸게 팔면 얼른 사는 심리, 그러면서 마치 횡재를 한 것처럼 뿌듯해하는 마음도 자신의 프레임 때문이라고 한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또 합리화하는 것을 보니, 사람은 지극히 심리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나 보다.

 마하스님과 저자와의 대화 형태로 이루어져 있는데 알고 보니 개정판이란다. 처음 나왔던 제목은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게 나긴 한다. 사실 불교건 기독교건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게 나는 책은 일단 제쳐두는 성격 탓에 만약 원래의 제목으로 나왔다면 분명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여하튼 덕분에 알고 있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보고 모르던 것은 새롭게 아는 시간이 되었다. 역시 심리학은 재미있단 말이야. 단, 깊이 들어가지 않을 경우만. 더 나아가 심리학을 알면 행복하다는 생각에까지 나아가라는데 내 지식으로는 아직 거기까지는 무리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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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함께 죽음을 이야기하자 1218 보물창고 3
게어트루트 엔눌라트 지음, 이옥용 옮김 / 보물창고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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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꿈에 어느 선배가 나타났다. 가끔 이야기 나누거나 어쩌다 술자리에서 만날 정도일 뿐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선배라 무척 의외였다. 왜 갑자기 그 선배가 꿈에 나타났을까. 평소에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 선배를 생각할 어떤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아, 그 선배는 사고를 당해 저세상으로 갔지. 졸업 후에 일어난 일이라 나중에서야 그 소식을 들었지만 그래도 내 뇌리엔 크게 자리를 잡았었나 보다. 그리고 이 책의 뒷부분을 읽다 알았다. 내가 왜 그 꿈을 꿨는지. 아마 죽음에 대한 책을 읽으며 무의식중에 그 선배가 생각난 듯하다. 그것도 책에서 꿈에 죽은 사람이 나타나는 이야기를 읽을 때 비로소 알았다. 

 사실 사람이 살면서 정말 경험하고 싶지 않은 것이지만 누구나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게 죽음이다. 하물며 애지중지 키우던 식물이 죽어도 속상한데 함께 이야기 나누고 사랑하던 사람이 죽는다면? 솔직히 그런 생각을 하고 싶지도 않아 회피하곤 한다. 강아지를 키운 지 5년이 넘어가고 있는데 처음 강아지를 데려왔을 때 둘째가 걱정한 게 바로 그거였다. 나중에 이 강아지가 죽을 때 어떡하냐고. 나도 그 때가 걱정되긴 하지만 아이에게는 그건 시간이 많이 흐른 뒤의 일이니 그때가서 걱정하자고 안심시켰다. 만약 강아지가 죽고 난 후 그와 비슷한 강아지를 다시 데려와야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이 책의 저자는 그게 꼭 잘하는 일은 아니라고 말한다. 대개의 아이들은 정들었던 강아지가 죽었는데 금방 다른 강아지에게 정을 줄 수가 없을 뿐더러 죄책감까지 가지기 때문이란다.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애도기간을 충분히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에 공감한다. 

 아이들에게 가급적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죽음. 그래서 우리도 장례식장에 갈 때 가급적 아이들을 데려가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아이들 고모부가 돌아가셨을 때조차 남편과 나만 갔다 왔다. 당시는 아이들을 위해서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다만 고모부와 아주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기에 그나마 괜찮을 것이라는 위안을 할 뿐이다. 

 이 책이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나온 책이라지만 어찌 보면 어른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책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때로는 아이를 대상으로 이야기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어른을 대상으로 이야기한다. 그래서 살짝 헷갈리긴 했지만 이처럼 내 자신과도 마주하기 힘들었던 이야기, 그래서 회피하기만 했던 이야기를 읽고 약간의 용기를 가졌다. 물론 읽으면서 내게도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야기에서는 '만약 내게'라는 가정을 자꾸 할까봐 건너뛰기도 했다. 아직도 나는 죽음을 터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게 확실하다. 그래도 아주 조금은 나아졌다고 확신한다. 참, 아이가 죽음에 대해 지나치게 자세히 물어볼 때는 모든 것을 이야기해줄 필요가 없다는 글귀가 소중한 정보였다. 책에서 줄곧 솔직하게 이야기하라고 하기에 그에 관한 것도 당연히 사실을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라고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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