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주식회사 - 질병과 비만 빈곤 뒤에 숨은 식품산업의 비밀
에릭 슐로서 외 지음, 박은영 옮김, 허남혁 해설 / 따비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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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유난히 눈이 많이 오고 날씨도 추운 이번 겨울. 밖에서 조금만 돌아다니다 보면 어렸을 때 추웠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를 지경이다. 단열이 되지 않는 시골집의 윗목은 바람이 들어왔다. 그래서 아침이면 걸레가 얼어있었다고 엄마는 지금도 말씀하신다. 그런데 지금은 이처럼 추운 한겨울에도 집안에서 짧은 옷을 입고 있으니 세월  참 좋아졌다고. 어디 그 뿐인가. 여름에나 먹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깻잎, 고추, 호박을 이처럼 추운 겨울에도 먹을 수 있다. 그래서 갖가지 야채를 넣고 된장찌개를 보글보글 끓여 먹는다. 예전에는 떡볶이에 넣는 야채라고는 가을에 통에 심어뒀던 파를 넣는 게 전부였지만 지금은 깻잎에 호박을 넣는다. 맛있게 먹을 수 있어서 좋다가도 문득 의문이 든다. 이런 것을 키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연료를 써야하는 것일까. 굳이 정확한 자료를 찾아보지 않더라도 딱히 친환경적이라고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한때는 제철 음식만 먹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요즘처럼 이런 한겨울에 먹을 수 있는 건 뭐가 있을까. 야채 중에서는 콩나물, 시금치, 두부 정도가 아닐런지. 예전처럼 말린 나물이 흔하지도 않을 뿐더러 워낙 믿을 수 없으니 실제로 선택의 폭은 좁아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매번 엄마에게 얻어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래서 아주 안 사먹을 수는 없으니 대신 많이 사먹지는 말자고 자신과 타협했다. 비겁한 행동 같지만 현재 내 선에선 그나마 적정한 방법이 아닐런지. 

 이미 먹을 거리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예전같지 않다. 생협이나 한살림에서 장을 보는 사람들도 꽤 있고 유기농을 고집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마음만 먹는다고 실천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다. 문제는 돈이다. 자본주의답게 역시 돈이 최대의 걸림돌이다. 누구든 좋은 것 먹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부분을 식료품값에 지불해야 하는데 그게 결코 쉽지 않다. 게다가 유기농이라고 해서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가하는 점도 문제다. 그런데 매리언 네슬은 비록 유기농식푸밍 사람들의 건강을 눈에 띄게 개선시킬만큼의 효과가 있다고 장담하기는 힘들다고 말한다. 대신 유기농법이 환경 손실을 훨씬 덜 일으키는 방식이라는 점은 확실하다며 이것만으로도 유기농식품을 선택할 가치는 충분하다고 말한다. 내가 의문을 가졌던 게 바로 그 점인데 이런 관점으로 접근한다면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겠다. 

 나와 아이들은 육식을 좋아한다. 가끔 소나 돼지가 사육되는 장면을 보면서 둘째가 불쌍하다고 말하면 큰아이는 대뜸 그런다. 그러면서 너는 고기를 그렇게 좋아하냐고. 정육점에서 사는 고기와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소와 돼지를 완전히 동일하게 취급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전혀 별개의 것도 아니기에 둘째처럼 그런 모순된 감정을 가지고 있다. 물론 나도 그렇다. 어렸을 때 집에서 키우던 소를 내다 팔 때는 애써 깊게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면 마음이 아플 테니까. 영화 <식객>에서 주인공이 한식구로 여기며 키웠던 소를 도살장으로 들여보내고 소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장면을 보며 주인공의 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아니 내가 그랬다기보다 아마 소를 직접 키우셨던 아버지가 그런 마음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도 예전에는 소든 돼지든 그들의 최소한의 권리는 지켜줬는데 요즘은 하나의 상품으로밖에 취급을 안 한다. 움직이지도 못하는 곳에서 오로지 육질이 더 좋고 양이 더 많은 '고기'를 생산하도록 하는 우리 인간. 그리고 그것을 좋다고 사 먹는 나는 또 어떻고. 그렇다고 소나 돼지를 직접 키워서 자급자족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참 어렵다. 물론 농가에 항생제를 먹였느냐, 어떤 방식으로 키우는지 등을 물어보라고 하지만 우리 현실과는 안 맞기에 그냥 지식으로 저장하는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폴리페이스 농장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 모두가 그런 방식으로 가축을 기른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려면 훨씬 힘들고 더 많은 땅이 필요하지만 결국에는 그게 맞는 방식이라는 걸 안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기 위해 찾아오는 젊은이들이 많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아직 먼 이야기일까. 글쎄,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간혹 돼지를 야산에 풀어놓고 키우고 소를 방목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다만 혼자 그런 방식을 택하는 것보다 좀 더 조직적으로 연대한다면 훨씬 지속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엄마도 닭을 기십 마리 키우신다. 순전히 달걀을 얻기 위해서. 그런데 요즘은 추워서 밖에 나가질 않아서인지 하루에 알을 두어 개도 낳지 않는단다. 한창 나돌아다닐 때는 하루에 열다섯 개 이상씩 낳던 닭들이. 그런데 양계장의 닭들은 어떤가. 그들에게 계절은 의미가 없다. 언제나 똑같은 수의 알을 낳으니까. 자연의 이치를 거스른 댓가는 언젠가 꼭 치른다던데 혹시 시도 때도 없이 나도는 전염병이 그 신호는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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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뇌에 관한 과학적인 보고서 - 인간은 왜 지금의 인간인가
에두아르도 푼셋 지음, 유혜경 옮김 / 새터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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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짧은 순간에 그야말로 수만 가지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당시는 미처 알아채지 못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고 나서 가만히 돌이켜 보면 어떻게 한순간에 그토록 다양한 생각을 했을까 의아할 정도의 경험, 누구나 겪어보지 않았을까. 이처럼 뇌는 신기하고 경이롭다. 아니, 인간의 매커니즘이 그렇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헛점이 많은 것 또한 인간의 매커니즘이라는 생각도 든다. 거기에 더해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이 많다는 사실도 이런 이중적인 생각을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밝혀진 것이 얼마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알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한다.  

 굳이 다윈이라는 과학자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인간도 진화되었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어떻게, 어느만큼 진화되었을까. 전공자가 아닌 다음에야 그것을 일일이 따라갈 필요는 없을 테고 우리는 흥미있고 큰 부분만 따라가면 될 것이다. 어차피 자세히 알려준다고 해서 그걸 다 이해하지도 못할 테고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더욱 더 당연할 테니까. 

 지구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이제는 어린이들도 마음만 먹으면 알 수 있다. 지구의 나이에서 보자면 아주 보잘 것 없는 시간이지만 인간의 시간으로 보자면 긴 세월 동안 인간은 그것을 모르고 지냈다. 지구의 역사를 일 년으로 축약해본다면 인간의 탄생은 마지막에 걸칠 것이라는 얘기는 인류의 역사가 그만큼 짧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인류가 진화의 관점에서 보잘 것 없다고 치부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 사람들이 거기에 매달려 진실을 밝혀내고자 애쓰는 것일 게다.  

 우리는 산소가 없으면 살 수 없다. 물론 산소 뿐만 아니라 꼭 필요한 물질은 많지만 숨을 쉬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산소인데 역설적이게도 생명의 발전에 필요한 분자들에게는 산소가 해로운 물질이란다. 산소를 피해 도망가거나 산소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으로 숨는 유기체가 있다니 산소는 생명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물질이라는 생각은 전적으로 내 기준이었나 보다. 그러니까 외부의 생명체가 있는지 알아볼 때 산소는 그다지 중요한 항목은 아니라고 생각해도 되는 것 아닐까(확신하지 못하고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간혹 번역한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지식이 짧은 탓도 있겠지만 수식어의 부정확한 위치로 의미가 모호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우리가 발견한 것은 자발적인 모든 행동은 기본적으로 무의식적이라는 사실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의식적인 모든 행동은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뇌가 정교하게 계획한 것이다." (128쪽) 

 자발적으로 행동한 것조차 사실은 뇌가 무의식적으로 행동한 것이고, 오히려 의식적인 행동을 뇌가 계획한 것이라니 이 얼마나 역설적인지. 그러나 내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어느 한 순간에 뇌는 여러 가지를 동시에 처리하기도 하니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발을 뗄까 말까 하는 그 짧은 순간마저 머릿속으로는 수십 가지 가능성과 미래 상황까지 따지고 있으니 말이다. 정말이지 우리의 뇌는 알면 알수록 신기하고 궁금한 게 늘어난다. 

 30년 이상 인지 신경학 분야에서 연구한 로모 박사에게 더 이상의 호기심 내지는 연구 의욕이 남아 있을까라는 의문에 대한 그의 답(앞서 뇌가 우리는 속인다는 이야기를 나눴던 것처럼, 뇌는 또 우리가 뇌를 이해하는 과정에 있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함정일 뿐이다. 매우 아름다운 함정이다. 뇌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환상을 가지고 계속해서 노력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기에는 가야할 길이 너무 많이 남아 있다.-331쪽)은 뇌의 교묘하고 탁월한 능력에 혀를 내두르게 한다. 이처럼 수십 년간 한 우물을 판 연구자조차 모르는 것이 있다고 '착각'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오죽할까. 그러기에 오늘도 이처럼 이런 책을 읽으며 이해하려고 애쓰는가 보다. 구체적인 사례나 객관적인 자료를 들어 뇌를 이야기하는 줄 알았는데 그보다는 뇌를 기준으로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이야기해서 조금 혼란스럽기도 했다. 주로 사랑과 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뒷부분도 하나의 주제로 수렴하지 못하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을 이야기하려는지 모르겠는 부분도 있었다. 역시 내 수준에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일까. 그래도 내 수준에서 얻은 몇 가지 소득은 있었으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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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손은 약손 국시꼬랭이 동네 18
이춘희 지음, 윤정주 그림, 임재해 감수 / 사파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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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하게 어린시절이 별로 기억나지 않는다. 큰 일을 겪었던 것도 아닌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 그나마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들이 몇 개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아이스케키에 대한 것이다. 그것도 온전히 내가 기억해낸 것이 아니라 엄마의 도움을 상당히 받았다. 이 책의 그림을 보니 바닥에 타일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아 시골은 아닌 듯하다. 시골이었으면 흙길이었을 테니까. 다시 내 이야기로 돌아와서 아이스케키 장사가 오면 비료포대를 들고 뛰어나갔다고 한다. 비료포를 몇 개 줘야 아이스케키 하나랑 바꿀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비료포를 들고 나갔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잡한 아이스크림이었겠지만 당시는 냉장고도 없었으니 그때나 맛볼 수 있는 것이었다.  

 욕심부리고 아이스케키를 두 개나 먹어 배탈이 난 동생에게 엄마가 했던 방식을 떠올리며 소금도 먹여보고 손도 따주려고 하지만 잘될 리 없다. 사실 손 따는 거 나도 못하겠다. 나를 따 주는 것도 싫고 내가 따 주는 것도 못한다. 다행히 연희 엄마가 와서 응급조치를 하니 배탈이 나아졌다. 엄마가 아픈 동생의 배를 문질러 주고 머리맡에 앉아서 간호하는 모습을 보니 언니는 샘이 나서 자기도 배가 아프다고 한다. 엄마는 모르는 척 언니의 배도 문질러 준다. 이처럼 엄마들이 꾀병인 줄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어가기도 한다. 몸이 아픈 게 아니라 마음이 아픈 것을 알기에.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지만 현재 어른들에게 어린 시절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야기다. 그럼 나는 아이가 배 아프다고 할 때 어떻게 해주었지? 아주 어렸을 때는 배를 문질러 주긴 했는데 이제는 그냥 약을 주고 만다. 커도 엄마의 손길을 느끼고 싶을 때가 있을지도 모른는데.  

 전통이라고 하면 왠지 거창하고 특별한 것처럼 생각되는데 이 책을 보면 그냥 내가 어린 시절에 겪었던 것들이 하나의 전통이 되고 문화가 된다는 걸 알 수 있다. 그점이 바로 이 시리즈의 가장 큰 역할이 아닌가 싶다. 배 아프면 엄마가 노래를 불러 주며 배를 문질러 주었던 일이 문화라는 생각, 전혀 못했다. 사실 이 시리즈가 한 권씩 나올 때마다 이제 더 나올 게 뭐가 있을까 싶은데 그래도 여전히 나오는 걸 보면 내가 너무 거창한 것만 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싶다. 내가 생각지 못한 자투리 문화가 무엇이 또 있을까. 다음에 나올 이야기가 무엇인지 예측해보는 건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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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지금은 조금 흔들려도 괜찮아 - 대한민국 희망수업 1교시 작은숲 작은학교
신현수 외 15인 지음 / 작은숲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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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원봉사라는 명목으로 중학생들을 만난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교사가 싫기 때문에 자신도 절대 교사가 되지 않겠다(딸도 여기에 속한다.)는 친구와 지금의 선생님들 교수법이 맘에 안 들기 때문에 자신이 바꾸고 싶어 교사가 되겠다는 친구로 나뉜다. 둘 다 충분히 이해된다. 이유야 다르지만 나는 전자에 속했다. 부모님은 교사가 되길 은근히 바라셨지만 내 성격상(조금 익숙해지면 안주하고 마는, 그리고 권위적인 것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지라) 그 길은 아닌 듯해 일찌감치 접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교직이수를 했으나 역시나 이수를 했을 뿐이다. 

 청소년들이 교사를 좋아하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 궁금하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부분 불만이니 말이다. 그런데 희안한 것은 그렇게 욕을 하면서도 선생님들에게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아무리 철부지 같은 청소년들이라도 선생님들을 판단하는 눈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속없고 생각없는 것 같아도 나름대로 생각하는 걸 보면 오히려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청소년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어떤 마음을 갖고 있을까. 이 책을 통해 일부라도 엿볼 수 있었다. 다만 여기 선생님들은 워낙 학생들을 이해해주고 그야말로 참교육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선생님들만 있어서 모든 선생님이 이렇다고 일반화시키기에 무리가 있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나 어디나 똑같은 부류의 사람만 있을 수 없고 교사도 그런 사람이니 당연하다는 논리로 위안을 삼는다.  

 여기 선생님들은 대개 교사이면서 문인이다. 특히 시인이 많은데 전업 작가도 아니고 교직을 겸한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자신의 수업을 들을 새로운 학년의 청소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었단다. 처음엔 제목과 표지의 글을 보고도 무슨 책인지 감이 안 잡혔던 게 사실이다. 게다가 꽤 많은 부분까지 국어 교사의 글만 나오기에 전부 그런가 싶기도 했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다양한 과목의 선생님들이 등장하니 좀 다양해졌다. 청소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는데 어째 나도 혹 하는지. 특히 전문적인 글을 쓰지 않더라도 자기만의 언어로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게 도움이 된다는 김춘현 선생님의 말이 어찌 그리 와닿던지. 안 그래도 우리 아이들과 그 친구들에게 글은 쓰면 쓸수록 좋아지므로 될 수 있으면 많이 쓰라고 말해주곤 하는데(듣질 않아서 그렇지) 내 마음과 똑같아서 기뻤다. 그러면서 그럼 나도 이제부터라도 주변의 일상을 한 번 적어볼까라는 용기도 가져본다. 실천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자존감에 대해 설파하던 선생님이 있는가 하면 수학은 꾸준한 연습임을 강조하는 선생님도 있다. 내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과목인 지구과학 선생님은 지구가 생성되기까지의 역사를 좌르륵 훑기도 한다. 무엇보다 철학으로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다. 전에는 별로 필요없는 주변 과목으로 여겼지만 살아보니 진짜 필요한 게 바로 철학이라는 생각에 틈만 나면 주변 사람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던 차다. 

 솔직히 엄마로 교사를 바라봐서인지 몰라도 나이가 많은 분들은 고루하고 권위적이며 안주하려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실제로 주변에서 보거나 이야기 듣는 것도 그런 생각에 확신을 심어주기도 했고. 그런데 당연한 얘기겠지만 끊임없이 노력하는 분들도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그러면서 이런 분들이 알게 모르게 더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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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괜찮아 푸른도서관 40
안오일 지음 / 푸른책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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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그러니까 2010년에 우연히 청소년들이 쓴 수필, 소설을 읽고 그들을 위한 시집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도 이야기했듯이 처음 청소년 전용(?) 시집이 나왔을 때 '이거다' 싶었다. 물론 내가 그런 시를 쓰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러한 시집이 있다는 것이 신선했으며 나아가 그에 대해 전혀 관심 갖지 않았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어린이시는 당연하게 여기면서 왜 청소년시는 생각하지 못했을까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썼던 어느 글에서 그러한 마음을 이야기했는데 이 작가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었나 보다.  

 그 후로 청소년을 위한 시집이나 청소년들이 읽기 쉽게 해석한 시집이 가끔 눈에 띈다. 내가 그닥 시를 좋아하지 않고 어려워하는 이유를 곰곰 생각해보니 학창시절에 지나치게 분해하는 방식으로 시를 접해서가 아닐까 싶다. 온전히 내가 느끼는 시가 아니라 누군가가 분해한 방식을 그대로 전달받았을 뿐이었다. 심지어는 그들이 느끼는 방식까지 강요받았다. 시조차 문학이 아닌 지식으로 접근했던 지난 날을 돌이켜보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으니 순수하게 문학으로 접근하는 시를 읽자고 다짐하지만 그게 또 쉽지 않다.  

 그러나 어쨌든 이제 청소년들을 위한 시집이 차츰 나오기 시작하니 나중에는 나보다 시를 많이 접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한 위안을 삼으며 이번에는 푸른책들에서 나온 청소년 시집을 보았다. 헌데 나도 모르게 창비에서 나온 시집과 견주어 읽게 된다. 그러면서 출판사마다 뭐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분위기가 있음을 느낀다. 내가 느낀 바로 이 출판사는 일반적으로 서정적이고 긍정적인 메시지가 많은 편이다. 그래서인지 처음 만났던 청소년 시집은 청소년들의 어두운 면과 감추고 싶은 면을 과감히 드러낸 반면 이 시집은 그들의 힘든 상황에 천착하고 있어서 동정적인 시선을 갖게 만든다. 대신 시대를 꼬집는 날카로운 쾌감은 느끼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청소년들의 문제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으며 그들의 상황에 공감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충분히 만족하며 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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