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은 군대에서 나는 모공업고등학교에서 생활하는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이글을 마치고자 한다.

하지만 이글을 썼던 이유는 이 마지막에 나오는 나의 눈물때문에 처음부터 눈물의 이야기를 쓰려고 이글을 시작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1988년...

 나는 전북 이리에 있는 모 국립기계공업고등학교로 입학을 하게된다.

모기계공고는 당시 우리나라에 국립으로 우리나라에서 3군데 밖에 없었다.

내가 왜 이 학교를 오게되었나?

나는 중학교때 공부를 그리 잘하지도 못하고 항상 딴 생각만하고 장난기많은 소년이었다.

공부보다는  소설책이 좋았고, 공부보다는 어머니 도와서 일하는게 더 좋았다.

 

그런던중 축구를 하다가 발이 부러저 3개월을 기브스하는 사고를 당하게되었다.

학교는 가야했고 친구들 놀때나 공부할때 할것이 뭐 있나?

그래서 공부를 했고 순전히 할 일없어서 공부했다.

그러니 성적은 당연히 올라갔었고 다리가 거의 아물무렵 또 개구장이가 되려나 했는데 재수가 없어도 그렇게없나...

또 부주의로 또 다리를 다쳐서 기브스하게 되어 도합 7개월을 목발로 절름발이로 살아야했다.    정말 폭폭하고 답답했다.

그러던 와중에 형이 동생아 

 

"우리 형편에 갈학교는 이리(지금은 익산)에있는 모국립공고밖에없다... 이것이 기회라 생각하고 죽기 살기로 공부해라!  그 학교는 시험도아닌  철저한 내신성적이니까  전체학생등수 30등안에만 들어라" 

 

형은 절실한 심정으로 이야기했다.

그 학교는 국립이라, 수험료도 안내고 기숙사도 있으니 우리같이 없는 사람들은 그곳이 딱이다. 넌 몸만 가면 되는거니까  한번 죽었다 하고 해봐라.

난 그말만 믿고 정말 열심히 했다. 아픈몸  할일이 없어 공부했다...

그리고 합격했다....

형에게 처음으로 기쁨을 준것같아 참으로 기뻣다.  지금 생각해도 운이 좋았다.

 

시골 촌놈!

눈이 휘둥그래지는것은 어쩔수없었다.

답답한 시골살다가 ,일만하는 시골에 있다가 도시에 올라왔으니 어쩌랴?

하루하루가 신기하고 얼마나 좋았던지, 이리저리 많이도 돌아다녔다.

그러니 시골촌놈..

세상이란 곳에서 시골때가 벗겨지고 ,머리가 조금크니 살짝은 겁이 상실해지지 않겠나?

형은 그렇게 고생하고,어렵게 신문배달하고 우유배달하면서 피와땀으로 살았는데 난 그생각은 추어도 못하고  하룻강아지 마냥 그렇게 살았다.

형에 반에 반만 이라도 열심히 살았으면...형의  처한 상황보다도 비하면 행복한 그시간을 난 허비했다...

 

내 나름데로 공부한다고 햇었다.

야간에도 했었고 ,새벽에도 해었는데  그 학교 첫번째 중간고사에서 꼴등했다.

55명 중에서 55등했다.

글쎄 나도 한다고 했는데..이럴수가?

이렇게 공부잘하는 학교였나?

아버지께서 통신표를 받아보시더니  "야 이놈아 꼴에서 첫번째는 해야지 꼴등이뭐냐?

내가 생각해도 한심하고 해라고해도 못하겠다....

 

그런던중 시간은 쉼없이가 2학년이 되어 2학기에 접어드는와중에 일요일 귀가시간을 20분어기는 일이 발생되었다.

시골집에서 막차를 타고 열심히 왔었는데도  늦은것이다.

그때가 2번제 늦은 귀가어기는 일이었는데  사감선생은 퇴사조치를 한다는것이었다.

남들은 4번도 5번도 봐주더구만...

이유는 너는 위험인물이라는것이었다.

지뢰같은 위험인물이었는데 이기회에  나가주었으면한다는것이었다.

많은 이야기가 나왔지만 소귀에 경읽기가 되엇다.

그때나는 큰사고는 치지않았지만 얼굴은 아주 불량한,세상의 때에절은 반항기가득한

소년이었던것이다.

 

형이 왔다.

군대 하사관으로 잇던 형이와서 어머니와같이 방을 얻어주었다.

철부지녀석은 딴짓거리하기가 쉬운  방을 고르려했고 형은 주인아주머니가 굉장히좋고

자취방 옆집사람들이 성실하고좋은 아주 선한 자취방으로 삭월세를 구해주셨다.

그당시 24만원! 결코작은 돈이 아니다.  한달에 2만원, 1년치 선불이었으니...

형은 박봉일 그 힘든 군대생활하면서 모은 피같은 돈을 못난동생에게 내주었다.

그리고 한마디를 꼭 한마디를 하였다.

"동생아  !   형이 좋아서 이러는게 절대 아니다.

내 너를 지금 귓뺨을 때리고싶고, 죽도록 패버리고 싶지만 난 너를 믿는다.

이제부터  새로이 시작하는 너를 믿는다.

이러고도 정신을 차리지못하면 너는 내동생이 아니다.

부디 잘살고 잘 생활해라 "

 

정말로 미안했다.

할말도없었다.. 참으로 못난 동생일 뿐이었다.

그때 느낀것이 아무리 어떤일을 해도 졸업하기전까지는 조용히 절대 형이나

가족들에게 피해나 걱정을 끼치지말자고 다짐해본다.

 

그리고 몇달이 흐른 어느날 학교를 마치고 집에돌아왔다.

자취를 하자보니 내마음처럼 혼자만 잘살고싶은데 그게 잘안되는날이있다.


 그전날 친구생일이라고 친구녀석들이 몰려와서 술마시고, 담배피우고

자취방이 아주난리 이런난리가없다.

나홀로 있을때는 정리정돈잘하고,항상 깔끔한 모습과, 형이 한번도 방 구해준이후

안와봤기에 언제올지모르는 형을 위해 준비를 해주고있었는데

이것이 무슨 전쟁터라는 말인가?

빨리 치우자.. 어서 치우자...팔을 걷어 붇이는순간

멀리서 당동딩동 ~~

누구람 ?

누구 손님인가하고  문을 열어주던 그순간 .

나는 얼어붙은줄 알았다.

세상에 형이다.

형이었다.

 

 

갑작스러운정도는 표현이 안되었다.

" 야 잘있었냐?

여기 근처 동기집이잇어 왔다가 들렸다.

잘살지  ㅎㅎㅎㅎ~~"

 

"형 ~~형 ~

잠깐만 ...

얼어붙은나는 말이 모기만하게나왔다.

 

"야 임마 !

네가 해주는 밥이나 먹고가자"하는 형은 내방문 가까이에 도착했다.

 

그리고 방문앞에 나뒹구는 술병들 ,,,

문을 여는순간 , 담배피우다 얼른끄고 상황을 파악하는 친구들 ..

뿌연 담배연기속에서 전쟁터가 된 방과 부엌을 보는형은 눈빛은 카리스마적인 그런눈빛도

아니었고 촉촉히 젖은 눈빛은 차라리 슬퍼보였다.

 

그어떤말로도 설명할수가없었다. 입에서 말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뭔가 변명이라도 해야하는데 말이 떨어지지가 않았고 그저 이순간이 꿈이었으면...

 

형도 말이없었다.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리곤 다시왓던 대문으로 걸어가는것이었다.

"형!   형!  나는 뒷쫒아 나가 형을 불렀다."

묵묵히 가던형은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나를 몇초간 아무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마디만 했다.

"형   간다"

그말하는 눈빛을 지금도 잊을수없다.

그리고는 말없이 형은 걸어갔다.

조금씩 멀어지는 형을 보면서 나는 눈물을 얼마나 많이 흘렸는지모른다.

하염없이 나오는 눈물을 주체할길이 없었다.

 

멀리 군복을 입고 쳐진 어깨를 가르며 걷는 형을 보며 눈물이 멈추질않았다.

우는 와중에도 형이 택시를 타주길바랬다.

기본요금이 600원, 이리역까지 형이 타고 가주길바랬다.

하지만 형은 걸어갔다.

나는 멀어지는 형을 보면서 울었던 기억을 지금도 잊지를 못한다.

아마 형도 그당시 나처럼 울지않았을까?

 

차라리 몇대 맞고 욕이아 싫것먹었다면 그렇게 서럽지는않았을텐대....

 

 

나는 형을 보면 언제나 

"내자신과의 싸움에 강해져라"

형이 나에게 하는말인것같다.

내자신에게 절대 지지않는 강한 내자신의 주인으로 나에게 살라고 이야기하는것같다.

힘들고 냉정한 이세상을 살아가매  다른이들에게는 지더라도 철저히 내자신에게만은

더욱더 냉정하고 강한 그 정신으로...

 

형에게는 항상 빛진느낌이다.

살아가면서 천천히 갚아야지 ...

 

형만한 아우는 없다고한다.

하지만 내마음속의 스승, 형에게 한마디여쭙고싶다.

 

형만한 아우가 되기 위하여 나는 오늘도 이전쟁같은 삶에서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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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맨 




프리맨은 자유로운 사람이다.

바람같이 자유로울 수가 있고 구름처럼 어느 곳이든 갈 수 있는 사람이다.

자유롭다는 것은 권리와 의무를 다하여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자유로운 사람은 누군가에게나 부담을 주지 않는 사람이다.

누군가에게 부담을 줄 수 잇다면 차라리 만나지 않는 편이 나은 사람이다.

자유로운 사람은 자신감이 충만한 사람이다.

만용과 교만이 아닌 실제의 것보다 더 잘 할 수 잇다고 자신을 믿는 마음이 투철한 사람이다. 말을 하매 때로는 굵직한 언행과 다부진 말로 자신을 피력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목소리를 낮추어가면서 경청을 하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짖는 사람이다.




자유로운 사람이 갖추어야 할 덕목 중에 가장 큰 사람은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현재의 위치를 알고 나아갈 때를 안다는 것 같이 중요한 것은 또 없을 것이다.




나는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싶기도 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강사가 되고 싶기도 하고

다른 이들에게 큰 목소리로 좋은 경쾌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되고 싶기도 하다.

모르는 곳에서 타인들을 기분좋게 여행을 안내하는 여행가이드가 되고 싶기도 하다.

자유로운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이런 재능이 있다고 자부하는 바이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자유로울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

시골에서 농사나 짓고 살지, 그래 마음만 편하면 되는 것이야 라고 말들을 하지만 다 그것도 무언가가 형성이 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돈이다.

돈은 가장 평등하게 살고자 하는 이의 소망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남들이 해보는 것은 어느 정도 해보고 살아야 하지 않겠나.

어머니에게 용돈도 두둑히 주고 싶은 아들이 되고 싶다.

아내에게 생일이나 기념일날 근사한 저녁과 선물도 하고 싶다.

아내를 돈이라는 물질속에서 겪었던 그 아픔을 다시는 이제 다시는 주고 싶지가 아니하다.

형제들을 만나면 내가 맛있는 저녁을 사고 싶다.

가끔 펜션이난 민박집도 좋겠지만 최고급 호텔에서 우아하게 야경도 즐기면서 근사한 저녁을 먹고 싶다.

해보지도 않은 사람이 그렇게 지내보지도 못한 사람이 하는 말 따위는 이제 잊어버리자.

이제 다시는 현혹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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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멋지고 듬직한 나의 아들아!

 

 

 

설빈아!

아빠다.

 

 

듬직한 우리 아들이 요즘 장이 안좋고 감기에 걸려서 고생이 많지.

항상 열심히 모든일에 잘 해주어서 아빠는 너무도 고맙구나.

 

집에서는 큰아들로써 듬직하고 멋지게 잘하고, 학교에서는 반장으로써 최선을 다하고,

태권도에서도 하루도 안 빠지고 열심히 하는 우리 아들이 아빠는 너무도 고맙고 사랑스럽다.

 

아빠가 항상 말하지.

공부하는 것도 좋지만 사람은 항상 예의가 바르어야 한단다.

인사도 잘하고 대답도 잘하고 어른에게 공손하고 예의바른 설빈이가 아빠는 너무도 좋고 사랑스럽단다.

 

아빠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동생이 아직 어리니까 조금만 더 이해하고 잘 해주었으면 한다.

항상 엄마 말씀 잘 듣는 것 잊지말고..

 

 

항상 아빠는 설빈이 편     자 우리 아들   파이팅

 

 

 

2007년 10월 24일 사랑하는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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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증금 50만원에 월세 6만원짜리 자취방. 한달에 25만원으로 살아가는 고시생. 회사원 A씨의 1996년 초 생
활 모습이다. 지방 출신인 그는 고등학교 때 집안이 기울면서 ‘눈물 겨운’ 서울의 대학 생활을 보냈다.
달랑 1천원으로 열흘을 버틴 적도 있었다.
.
약 7년 후인 2003년 1월 그의 모습은 이렇다. EF소나타를 모는 강남의 33평형 아파트 거주자. 부동산 자산
8억5천만원, 주식 8천만원, 현금 1억여원 등 총 10억원 이상의 자산가.
.
운 좋게도 99년∼2000년 증시 활황과 2002년 부동산 시장 상승세를 제대로 탄 덕이 크다. 하지만 노력하는
사람만이 기회를 잡는 법이다. 올해 서른다섯의 A씨의 ‘10억원 모으기’는 20대부터 시작된 ‘살인적 지출
봉쇄’에서 출발한다.
.
‘가난’은 재테크의 스승
.
1996년. 그는 고시의 꿈을 접고 취직한다. 당시 그가 회사를 선택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잠재력이 큰 첨
단 업종 그리고 주택자금 1천만원 무이자 대출을 해주는 회사라는 점이었다. 그는 집에서 보태준 5백만원
을 얹어 1천5백만원짜리 옥탑방 전세를 얻었다. 그리고 맹목적 저축에 돌입했다.
.
입사 당시 그의 기본급은 월 75만원. 세전(稅前) 연봉이라야 1천8백만원 정도였다. 그 중 95%를 저축했다.
이를 위한 수칙, 첫째 회식은 절대 빠지지 않는다, 둘째 저녁식사가 해결되는 야근은 되도록 많이 한다. 물
론 열심히 일해서 회사에서 출세하겠다는 다짐도 한몫 했다.
.
이듬해인 97년, 그는 우리사주 5천주를 매입했다. 후에 종잣돈이 돼 준 투자였다. 한 해 뒤인 98년, 그는
‘종자 철학’을 다질 기회를 맞는다.
.
“부동산 계약·권리 분석·채권회수 업무를 맡게 됐죠. 채권회수 때문에 분당지역의 아파트 등기부등본을
열람하는데 70∼80%가 집을 담보로 빚을 지고 있더군요. 등기부등본이 깨끗한 집은 20%가 채 안 돼더라고
요.”
.
그는 빚쟁이들일수록 생활이 호화롭고 실속 있는 부자들은 오히려 검소하다는 점을 체득했다. 사시준비 시
절 얻은 법률지식에 부동산 실물 공부가 맞물리면서 부동산 안목을 상당한 수준으로 끌어올린 때이기도 하
다.
.
99년 4월 그는 가정을 꾸렸다. 결혼 직전 그는 신부와 함께 동원 가능한 총 재산을 계산해 봤다. 7천8백만
원이었다. 그 돈으로 28평짜리 번듯한 아파트를 전세로 얻었다. 가계약을 하고 집에 돌아온 A씨는 곰곰 생
각했다.
.
‘전 재산을 전세금으로 털어 넣으면 앞으로 무슨 돈으로 재테크를 하지? 결혼하면 예전처럼 무식하게 저축
하기도 어려울 텐데?’
.
다음날 A씨는 신부에게 “행복을 연기하자”고 제안했다. 나중의 더 큰 행복을 위해 지금 검소하게 출발하
자는 얘기였다. 그래서 둘은 A씨가 살던 전세금 2천5백만원짜리 잠실 13평 아파트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한
다.
.
혼수는 싱글 침대를 대신할 더블침대가 전부. 대신 나머지 돈으로 주식투자에 나섰다. A씨에게는 장외시장
에서 눈여겨봐 뒀던 종목이 있었다. 강원랜드였다. 내국인이 유일하게 출입가능한 카지노는 ‘반드시 된
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종잣돈이 모이면 내집부터 마련하라
.
‘잘 아는 우량주식 1∼2종목에 집중한다.’ 그가 주식투자에서 지키는 원칙이다. 그의 재테크 원칙이 또
하나 있다. ‘어느 정도 종잣돈이 모이면 내집 마련부터 한다.’ 그래서 그는 결혼하던 해 송파구에 있는
아파트 분양권을 매입했다.
.
편의시설·접근성·자연환경·교육 등 모든 면에서 서울시내에서 송파구의 잠재력이 가장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33평형 아파트를 분양가 2억2천5백만원에 프리미엄 2천5백만원을 얹어 2억5천만원을 주고 샀다.
.
“중도금을 내려면 갖고 있던 주식의 일부를 중간 중간 팔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행운이었죠.
계속 갖고 있었다면 주가 급락으로 손해를 봤을 겁니다.”
.
2001년은 그가 본격적인 재테크 공부를 시작한 해였다. 부서를 옮기면서 시간 여유가 좀 생긴 덕이었다. 당
시 그의 관심은 부동산으로 옮겨갔다. 그동안 그의 주식투자는 ‘우리사주나 장외시장 매입·공모주 청약’
으로 제한돼 있었다.
.
본격적인 자본시장 데뷰 이전에 투자해야 높은 수익률을 올릴 확률이 높다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2001년
은 이미 장외시장도 한물 가고, 증시도 싸늘히 식은 때였다. 그래서 주식은 한풀 접고 부동산 정보 수집에
집중했다. 주말이면 관심지역에 직접 가서 현장조사도 벌였다. 그런 그에게 2002년부터 부동산 상승기라는
‘감(感)’이 왔다.
.
그 해 7월, 그는 잠실에 14평형짜리 시영 아파트를 2억8천만원에 사들였다. 매각대금 마련을 위해 갖고 있
던 강원랜드 주식도 팔았다. 시세차익은 5배나 됐다. 현재 그가 살고 있는 송파구 아파트는 5억원, 잠실 아
파트는 3억5천만원에 이른다.
.
아파트 차익만 총 3억3천만원이나 본 셈이다. 여기에 그동안 금융기관에 모아 둔 돈이 1억여원에 달한다.
그는 지금도 매년 최소한 3천만원 이상씩을 저축한다. 그의 연봉이 세전 5천만원쯤 되는데다 투자수익까지
합치면 그 정도는 가능하다. 맞벌이인 아내의 월급도 상당액이 ‘통장행’이다.
.
그런 그가 요즘 반성을 많이 하고 있다. 현재 아내·딸과 함께 세식구가 살기에 33평은 너무 ‘호화로운
게 아닌가’ 해서다. 그래서 좀더 싼 아파트로 이사가는 방안을 고려 중이다. 그의 가족이 요즘 쓰는 한달
평균 생활비는 약 3백만원이다.
.
그 중 보모비 등 두살배기 아들에게 90만원쯤 들어가고 실 생활비는 2백10만원인 셈이다. 이처럼 생활비가
늘어난 것은 2000년 1단계 재산 불리기가 마감되고 지난해부터는 2단계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
“안 쓰고, 안 먹고, 무조건 모으는 게 1단계죠. 총자산 10억원 가까이 되면서 1단계는 마무리됐습니다. 이
제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도 돕고, 외식도 하고 1년에 한번 해외여행도 가기 시작했습니다.”
.
진정한 지혜는 고생에서 나온다
.
이제 그는 2단계에 들어갔다. 2단계는 돈을 버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 A씨는 요즘 상가에 관심이 많다.
저평가돼 있는 상가를 발굴, 리모델링으로 부가가치를 높여 임대하는 방식을 연구중이다.
.
‘투자에서 벌어들이는 소득이 급여소득을 초과하는 상태’가 5년 중기목표다. 40대는 ‘1백억원’을 모은
다는 야심도 갖고 있다. “5백만원으로 시작해 7년여 만에 2백배 이상 불렸으니 10억원의 10배인 1백억원
만들기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자신한다.
.
3단계 목표도 있다. 50대에 천억원대의 재산을 모아 사회사업을 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가슴 아픈 사연이
하나 있다. 고시공부에 매달려 힘겹게 살던 대학시절, 한 방에서 고생하던 동생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
다. 그 때 이렇게 결심했단다.
.
“동생 몫까지 농도 짙게, 행복하고 그리고 뜻있게 살겠다.” 그래서 그는 돈도 많이 벌고, 죽기 전에 ‘진
하게’ 사회환원도 하고 싶다.
.
그는 자신의 재테크 최대 성공요인으로 운(運)과 함께 ‘대학시절의 가난’이라고 말했다. 그날 A씨와의 인
터뷰 장소 엘리베이터에는 ‘진정한 지혜는 고생에서 나온다’는 격언이 붙어 있었다.
.
A씨의 10억 만들기
.
1996년
.
1천5백만원.취직. 회사의 1천만원 무이자 대출+자기 돈 5백만원으로 출발. 세전 연봉 1천8백만원 중 95% 저

.
1997년
.
5천5백만원(대출 3천만원 포함) 회사로부터 무이자 대출받아 우리사주 5천주 매입.
.
1998년
.
1억5천만원(대출액 총 4천4백만원,아내 결혼자금 약 4천만원 포함) 연초 장외시장에서 회사 주식 추가 매
입. 결혼자금 7천8백만원으로 강원랜드 등 장외시장 우량주 매입. 10월 송파구에 2억5천만원에 33평형 아파
트 분양권 매입.
.
2000년
.
3억원(부채 청산) 회사 주식 등 일부 주식 매각으로 4~5배 차익 실현. 일부 중도금 내면서 주식 매각 매입
반복.
.
2001년
.
4억원. 일부 주식 매매로 차익 실현. 재테크서 탐독 및 부동산 본격적인 연구 시작.
.
2002년
.
6억5천만원. 부동산 시장 집중조사.7월 잠실 14평형 아파트 2억 8천만원에 매입. 강원랜드 주식 매각으로 5
배 차익 실현. 5년짜리 비과세 저축 만기로 3천만원 목돈 마련.
.
2003년
.
약 10억원. 아파트 2채 시가 8억3천만원. 보유 주식 시가 8천만원.현금 1억원.
.
*7년간 약 10억원=저축 1억원+주식 시세차익 5억5천만원+부동산 시세차익 3억3천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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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람들과의 갈등을 해결하는 원칙.




살다보면 여러가지 일로 주위사람들과 다툴때가 있다.
상대방이 평소 가깝게 지내던 사람일수도 있고
아니면 한번보고 말 사람인 경우도 있다.

상대방이 어떠하건 간에 나는 다른 사람과 갈등이 생겨 부득이하게 뜻이 갈릴때 2가지 대응을 한다.
이 방법이 매우 유용하여 하시글 독자 여러분들께서도 기억해 두시기를 바라는 바이다.

만약 상대방이 합리적이고 교양이 있으며 기본적으로 선한 사람일 경우,
다시말해서 싹수가 있는 사람이고 이사람과 앞으로도 함께 하고 싶은 경우,
나는 그사람과 끝까지 옳고 그름을 놓고 논쟁한다.
서로 기분이 상하지 않을 정도의 선은 지키며 갈등의 원인을 파헤치기 위해 뭐가 옳고 그른지를 따진다.
단, 이 경우에 명심할 것은 절대로 누가 옳고 그른지를 따지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따져야 한다. 이 둘의 차이는 정말 크다.

두번째로, 전자와 다르게 상대방이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경우, 논리가 통하지 않는 무대뽀인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때는 그 상대방이 내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 사안이 아니라면 왠만한건 니가 옳다고 하고 피한다.
왜냐하면, 내가 아니라도 그런사람들은 다른 곳에 가서 박살이 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굳이 내 손을 더럽혀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 경우에도 이러한 몰상식적인 이들이 내게 잠재적인 피해가 될 가능성이 있다면 그 싹은 반드시 자르는 절차가 선행된다.

이것이 내가 지켜가는 상대방과의 갈등의 해결 원칙이다.

하루를 시작하는, 하시글 Hasig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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