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술집 웨이타 생활을 시작한지 5년이 다 되어간다...

 

ㅋㅋ 오래도했지 2002월드컵끝날때쯤 시작했으니깐...

 

그땐 그냥 제대후 복학등록금 마련할려구 잠깐 하려던거였는데

 

이렇게 (본의아니게?)지금까지 쟁반을 들고있다.

 

고등학교2학년 겨울 새벽에 아저씨들 몇명이 집으로들어와서는 다짜고짜

 

집에있던것들을 밖으로 던저버리는것을 경험한후부터인거같다... 

 

돈을벌자 돈을벌자 나중에 나는 아버지처럼 준비없는 삶을 살지 말아야지...

 

지금은 좋은? 경험일수도있지만 그당시에는 많이힘들었던 기억이난다

 

밤일이라는게 빠지면 거의 헤어나오질못한다...돈이라는것때문에

 

보통 낮에 회사다니는것보다 2배는족히 벌수있으니깐....

 

아이러니하게도 많이번만큼 많이쓴다 5년 화류계있으면서

 

돈모은사람은 10명중1명있을까말가였으니깐......

 

5년전 23살때 첫달번금액이 300정도였다...

 

등록금벌려고 했었는데 목표를 바꿨다   내집마련으로 ㅋㅋ

 

꿈도야무지지란말이 바로 그때 나에게 적용되는말이라 생각된다

 

직장은 잠실이고 당시 집은 석관동이었다...고딩때 부도로 아버지는 일어나시질못했다

 

엄만 호프집 주방일을하셨고....집이 이러니 제대하고 복학할생각이 없었다

 

오후3시반까지 출근해서 새벽5시에끝난다....겨울에도 남방이 다 젖을정도로

 

활동량이 많고 고되지만 하루하루 쌓여가는 통장잔고를 보면서 나를 위로했다.

 

그렇게 1년을모으니 3000정도가 모였고 난 나름대로 노하우가생겨 급전이 필요한사람한테

 

100/5씩 이자를 받으며 아주 작은 대부업을 투잡으로하게됐고 2년이돼서 7500정도가모였다

 

2004년도에 누나의 도움을 조금받아 나의꿈인  월곡동 삼성래미안32평 분양권을 1억에 매입하고

 

또다시 2년동안4개월에 한번씩 1600이라는 중도금을 단 한번도 융자를 않받고 입주하게됐다.... 

 

2006년 입주할때는 아파트값이 내가 매입할때보다 2배가까이올라 2억정도의 시세차익올렸다

 

그리고 1년후인지금 아파트5억 보유주식1억 그리고 펀드랑 이것저것하면 6억5000정도 모은것같다

 

비록  10억은 아니지만 마음은 100억이상 가진것처럼 뿌듯하다.....

 

적어도 목표를 이루었으니까....다음주에 5년동안 일했던 웨이터일을 그만둔다..

 

백수가되는것이다 ㅋㅋㅋㅋ 지금 확실히 정하진않았지만 한달에 100만원벌어도 좋으니

 

내가 잘 할수있고 즐길수있는 사업을 시작하려한다...

 

실패와 변화를 두려워하지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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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혼남이 쓴 글이라고합니다. 길어도 끝까지읽어보세여~

특히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시는분들 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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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혼 10년차이다. 하지만 이혼경력 2년차이기도하다.

나에겐 아들 한명과, 딸 한명이 있다. 그리고 아내는 없다.

그 자리를 내가 지키지 못했다.

그래서 아내는 나의 곁을 떠났다.



부부는 물방울과 같은 것이다. 두 물방울이 만나서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여느 부부처럼 우리도 한때는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이었다.

아내는 애교도 많았고, 한편으론 엄마같은 포근함을 지닌 여자였다.

우리의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부모님과 가까이 살면서 부터였을 것이다.

거리상으로 10분 정도의 거리로 우리의 보금자리를 옮겼다.

첫애를 놓은 후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어느 순간 아내는 투정이 늘기 시작했다. 첨음엔 다독여 주기도 해보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 역시도 아내가 못마땅했다.

부모님과 한집에 살면서부터는 관계가 더욱 악화되어갔다.



난 그 모든 잘못이 아내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자기만을 아는 그런 이기적인 여자라고...

부모님이나 형제모두에게 아내는 늘 불만이었다.

그런 아내의 투정들이 나를 너무 힘들게 했다.

아내 하나만 참아주면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내는 참아주질 못했다. 그리고 우린 이혼을 하게되었다.


그런데 나에게 좋은 부모 좋은 형제일지 모르지만...

아내에겐 그렇지 않을수도 있다는걸 그땐 알지 못했다..


남편들은 명심해야 된다.

나에게 좋은 친구지만 다른 친구에게 그 녀석은...

아주 안 좋은 사람일 수도 있다는것을...



남편들은 아내를 대신해 효를 다하려 한다.

결혼하면 남자들은 효자가 되네” 늘 아내가 나에게 하던 말이었다.

결혼을 해서 보니 늙어가는 부모님 모습을 보면서...

안쓰러운 마음이 하나,둘씩 생기더니 아이가 생기고나서부터는 더욱 간절해졌다.

부모님에 대한 마음이..

아내역시도 그러했을것이다. 하지만 아내는 마음만 간절했을 뿐이었다.


난 내부모를 모시는 것에 우선시 했으면서도...

처가댁 부모님을 모시는 것을 우선시 해본적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이기적인 건 아닐까? 왜 우리 집이 우선시 되는 걸까?



하지만 난 중요한걸 잊고 있었다. 아내를 통해서 효도를 하려고 했던 것이다.

아내가 나를 대신해 우리 부모님께 형제에게 잘 하는 게 좋았다. 아니, 어쩜 대리만족이었는지 모른다.

내가 하는것보단 아내가 하는게 사랑받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나를 정당화하기 위한 변명에 불과 했다.


아내 역시도 바랬을 일들을 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래의 상황들처럼...



* 아내는 우리 부모님께 전화를 자주 드린다.

나는 가끔 처가에 전화를 드린다. 그리고 아내에게 처가에 전화를 했다고 대견스럽게 얘길한다. (잘했지? 라고 칭찬이라고 듣고 싶은 사람처럼)

* 아내는 시댁에 못해도 한달에 2,3번은 가려고 애쓴다. (아내는 일을한다)

나는 아내가 처가에 가자고 하기전에 먼저 가자고한 적이 별로 없다.




* 제사 있는 날이면 아내는 하루 쉬더라도 아님 일찍 마쳐서라도 와서 음식을 하고, 설겆이를 하고 있다.

나는 한 번도 처가 제사에 가본 적이 없다.

우리 집 제사는 당연히 가야 되는 것처럼 옷을 차려입고 간다.

하지만 처가 제사 때는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다.

(우리 둘 다 양가 부모님은 살아 계신다. 우리 집은 증조까지 제사를 지낸다.)




* 아내는 우리 가족의 생일이며, 제사며, 기념일등을 기억하면서 늘 신경을 쓰고.. 꼼꼼히 챙긴다.

나는 한 번도 처가 가족들의 생일이며, 제사며, 기념일등을 미리 아내처럼 신경쓰고 챙긴 적이 없다. 아내가 전화를 드리라고 하면 전화를 하는 정도였고, 그 모임에 참석하는 정도였다.




* 아내는 휴가 때면 바리바리 싸들고 간 음식을 장만하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휴가는 쉬기 위해 가는 것인데, 아내는 휴가 때마저도 집안일을 해야 했다.

나는 처가랑 휴가를 갔을때 밥을 해먹은적이 없다. 끼니때면 사먹고 놀았다.

그때 아내는 정말 휴가다운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 명절 때 아내는 힘들게 제사음식이며 명절음식을 준비하고, 하루종일 부엌에 서서 일을한다.

나는 도와준다고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청소하고, TV보다가 잠도 잠깐자고, 저녁을 먹고 난 후 가족들과 놀고, 술을 마시며 도란도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명절 당일 날 처가에 저녁 늦게 간다. 모처럼 모인 가족들 보기힘들어서 누나들 오는것까지 항상 보고간다.

처가에 가면 난 그 전날의 피곤함에 잠을 청한다.

아내는 처가에서 몰려오는 잠을 청한다.

처가 식구들하고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그 이튿날 오는 경우가 많았다.



* 내가 아빠가 되던때 우리부모님이 아기를 보고싶어 하셔서 친정에서 몸조리하는 아내에게 가자고 이야기한다. 보고싶어하는데 보여드려야된다고 아내를 데리고 아기를 데리고 집에갔다.

아기를 보는것보다 산후 몸조리가 중요한데 그건 아직도 아내에게 미안하다.


부모님의 보고 싶음 보다 아내의 몸을 생각했어야 하는 게 당연한데도 불구하고나는 아내를 데리고 갔었다.




* 같이 살면서부터 나는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해서 씻고, 저녁 먹고, 아이들하고 잠깐 놀아주고, TV시청을 하고 잠자리에 들곤 했다. 가끔 주말에 아이들과 부모님 모시고 근교에 놀러가고, 외식하고 그렇게 하는 게 다 일거라고 생각했다.

아내는 하루세끼를 꼬박챙기고, 아이들 뒤치닥거리에 집안일에 하루종일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난 아내가 저녁때 하는 그런 투정들이 갈수록 짜증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아내는 내가 알아주길, 이해해주길, 숨쉴 구멍을 찾아주길 바랬을 것인데 말이다.

나는 아내를 외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내는 점점 말수가 줄기 시작했다. 어느날부터는 아예 입을 닫아버렸다. 투정도 하지않고, 싸늘하게 나를 대했다.

우리 부모님을 모시는게 그렇게 불만이냐는 식으로 너같은 여자와 더이상 살수 없다고했다. 생각만해도 무섭고 이기적인 여자라고 해버렸다.

난 내 부모 감정과 형제들 감정만 중요시 했지 정작 아내의 감정들은 이해할 수도 없었고,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 아내가 미웠다.




아내가 화를 내는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고, 아내에게 참으라고 하기 이전에 내가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인식을 시켜 주었어야 될 일들 이었다.

난 아내에게 양보하라고 만 했다. 부모님의 섭섭함도 참으라고...

"그런 분들이 아닌데 왜 그러나 몰라"식으로 달래곤 했다. 분명 그건 잘못된 것인데도 말이다.



하루, 이틀.. 점점 우리부부는 멀어져갔다. 그리고 결국 헤어졌다.

부모님이랑 같이 살면서 나는 자식이기에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우리 형수가 모시기 싫어해서 불쌍한 우리 부모님 나라도 모셔야된다는 생각에 아내의 의견도 듣지않고 같이 살게된게 나의 잘못이었다.



누구에게나 부모는 소중하다.



하지만 결혼을 함과 동시에 시댁에 귀속이 되어버린 아내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남편들에게 묻고 싶다.



위에 나열한 몇몇가지 상황들에서도 남편들에게 묻고싶다. 정말 자신이 효를 한다고 생각하는지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내처럼 처가에 똑같이 하고있는지 마이다.



부모님을 모시면서 그 흔한 영화한편 보러가는 날이면 나 몰래 아내에게 타박하던 어머니, 외식이라고 할라 치면 부모님이 맘에 걸러 제대로 외식하번 할 수 없었던 일등 너무 많은 일들이 스쳐 지나간다.



나에겐 인자하고 좋고, 사랑하는 부모님이지만 아내에겐 시부모님이란건 몰랐다.

아내에게 시댁은 서있어도, 앉아있어도 결코 편하지 않은 곳인데 말이다.



늘 아내는 친정을 휴식처로 여긴다.

친정에 있을 때 아내의 얼굴과 맘은 편해 보인다.

아무리 우리 부모가 아내를 딸처럼 여긴다 해도...

나만큼은 될수도 없다는걸 알았다. 그래도 부모님한테 아내는 며느리였던 것이었다.

남편들은 이점을 착각해선 안된다.

사위는 백년손님이다. 우리는 처가에가서 손님대접을 받고온다.



하지만 아내를 봐라.

사위처럼 처가에 하는지.. 아내들은 시댁에 그 이상을 항상 하고 온다.

만약 남편들과 아내들의 자리가 바뀐다면 분명 우리 남편들도 아내들과 같을 것이다.



지금 이 시대의 이혼율은 점점 증가하고 있다. 성격 탓도 있지만 시댁과의 갈등으로 인해 이혼하는 경우가 생각보단 많은 %를 차지하고 있다.

“난 부모님을 모시지 않는 그런 여자완 살수 없어”..

"우리집에 이렇게밖에 못하는 여자와 살수없어" 라고한다.



당신과 평생 갈 사람은 아내다.

부모도 형제도 아닌 아내이다.



당신은 무엇때문에 결혼을 했는가?



"착한 며느리"로써 아내를 보고 결혼을 했는가?

아님 묵묵하게 싫은 소리 안하고 일만하는 아이만 잘 키워주면 되는 이유로 결혼했는가?



나에게 시집와서 사랑스런 나의 아이들도 낳아주고, 살림도 잘했던 아내를 난 며느리에 맞추어서 보았다.

그런 감정들은 하나, 둘씩 쌓여져갔고 급기야 터져버리고 말았다.
사람들은 소중한 걸 잃고 나서야 후회를 한다고 한다.

지금 내가 그런 모양이다.



아내와 헤어진 후 마음의 이 빈자리는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었다. 내 부모도, 내 형제도 말이다.

부모가 내 인생을 살아주는 것도 아니고, 형제또한 자신들의 인생을 소중히 여기며 살고있었고, 단지 난 그들에게 가여운 존재일뿐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삶을 혼자 견뎌가야만했다.




좀 더 아내의 입장에서 생각해줄 껄..

내가 좀더 참아볼껄... 하는 후회가 든다.

난 지금의 남편들이 나처럼 소중한 것을 잃고난 뒤에 후회하지 않았으면 한다.

어찌보면 우리 남편들의 잘못이 크지 않았을까?


분명 아내들은 이야기 했을 것이다.


힘든 마음을 우리가 알아주고 보듬어 주길 말이다.

하지만 남자들은 그것이 아내에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질 깨닫지 못한채 아내를 바꾸려 했을 것이다.

앞에 10게명만 잘 지켜나간다면 나같은 불행한 사람은 없을것이다. 소중한걸 깨닫기 전에 그것을 지키는 자세부터가 중요할 것이다.

나의 가정을 소중히 지켜라. 세상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게 나의 가정이다.

부부는 등돌리면 남이라고 하듯이 정말 이렇게 돌아서고나니 남남이 되었다.

항상 소중히 여기고 아끼며 가꾸어가야 되는게 가정인것 같다.



남편들이여~~~~~~!!!!

나 같은 실수는 하지 말기 바란다.

이해한다고 하면서 아내를 순간의 말로 안심시키려 하지말고, 아내가 진실로 무엇을 원하는지 듣고 존중해 주어라.

그리고 가슴으로 같이 아내가 아파하는 것들을 같이 아파해줘라.

그래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내의 인생을 존중해 주어라.




이름 석자에 달린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게끔 해줘라.

누구의 며느리도 아닌, 누구의 엄마도 아닌, 누구의 아내도 아닌 이름 석자의 인생을 살 수 있도록 해줘라.

그리고 더 이상 시댁에 아내를 맞추려 하지 마라.

나의 반려자로 아내를 보아라.




그리고 한가지 명심할 것이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나에겐 좋은 부모라고 하더라도 아내에겐 불편하고 어렵고, 때론 밉고 싫은 사람일 수 있다.

아내에게 참으라 이해하라 하기전에 한 번쯤 부모님에게 나에겐 아내가 중요하다는 걸 인식시켜줘라.




팔불출이라는 소리가 나을 것이다.

효자가 되길 바란다면 지금의 아내를 떠나 보내주어라.



아내는 시댁의 며느리로써 맞추어 지기 위해 결혼한 게 아니다.

당신과 자신의 삶을 위해 결혼을 한 것임을 잊지 마라.

그런 자신은 처가를 위해 맞추어 사는지 한번 돌아보라.



그리고 되도록 이면 시댁과 멀리 살아라.

부모는 가까이 있는 자식에게 의지를 하게 된다.

그럼 아내가 힘들어 진다.

요구하게 늘어가기 마련이다.

부모를 생각하기 전에 아내의 마음을 읽어라.

내가 아내에게 잘하게 되면 자연히 시댁에 잘 하기 마련이다.

아내가 믿고 따르는 사람은 시부모님도 아니고, 친정 부모님도 아니다.

오직 나뿐인 것이다.

그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당연히 내 주위 모든 사람에게 소홀해 지기 마련이다.



난 지금 아내와 재결합을 하기위해 노력중이다. 진정 소중한 것이 무엇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과 그렇게 다시금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


나의 간절한 소망은 지금 그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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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시부모와 같이 사는 부부가 힘든것은 아니지만..

곧 닥쳐올 저의 상황과 비슷해서..

너무너무 공감이가서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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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가을이 깊어 가고 있습니다.

몇일전 달력을 보다가 깜짝 놀랬습니다.

하는 일이 일요일, 휴일도 없는 지라 아침 일찍 나서서 저녁늦게 들어오는 일을 하는 지라 달력 볼 일이 있어도 심각하게 보지를 않았는데 오늘 문득 달력을 보다가 세상에 겨우 올 한해가 두달 정도 밖에 안남았다는 것을 알고 적지 않게 놀랐습니다.

 

솔직히 나이가 먹는 다는 것이 그리 두려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이라는 것도 이제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많은 이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60대의 젊은이가 있고 20대의 노인이 있다는 말은 참으로 유쾌한 말입니다.



.

.

.

 

 항상 제 마음속에 계시는 분이라 동경하고 존경하지만, 속에 있는 마음으로만 그치지않고 마음으로 표현하고자 용기를 내어 편지를  보냅니다.

항상 바쁘신 분이시라 이 글을 읽어볼 시간이 허락하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편지라 함은 답장을 받고자 아님이 아닌, 자의에 의한 글이기에 쓰는 그 자체에 의미로 답장을 꼭 받아야 한다는 전제로 편지를 보내는 것은 아니니 부담 갖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짝사랑과 비슷하죠.

내가 그사람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 사람도 나를 좋아해 줄 것이라 생각해서는 부담이 갈 수가 있습니다.

 

저는 가까운 안양에 있는 그랜드슬램을 꼭 이루고 픈 이경상이라고 합니다.

 

그저 선배님의 글을 아끼고 사랑하며 실천하고픈 마음을 가진 보통사람입니다.

고마움을 마음속으로만 간직하는 것보다 글로 표현하여 감사함을 전하고 싶어서 이렇게 편지를 하는 것이지요. 

책을 읽는 다는 것, 독서라 함은 저자와의 진지한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점에서 저는 선배님께 너무도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낀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표현하는 사랑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그저 마음속에 있는 천가지 마음보다는 한 번의 실천을 지향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선배님의 글을 읽다가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속의 제 마음의 동경과 흠모의 대상이신 선배님께 글을 올려보자.

 

답장이 없는 편지일지라도 그저 이제까지의 가르침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여보자 ...

편지보내는 이 순간 얼마나 마음이 편하고 좋은가?  학창시절 연애편지를 보내는 이 기분만으로도 얼마나 제자신에게 존중감을  느끼게하는가?  

그저 이런 기분만으로도 마음이 잔잔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많은 독자들이 선배님의 글속에서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었고 저 또한 큰 힘과 용기를 내었습니다.

애국이라는 것 또한, 사회봉사라는 것 또한,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님을 느꼈습니다. 자신이 가진 생각과 마음을 글이라는 유기체로 표현하여 글을 읽고 변화하고 그 변화에 실천이라는 가속도를 붙여서 무언언가에 정진한다면 무엇이 되도 일가를 이루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알고 있는 것을 깨우쳐주시는 선배님의 글을 정말 감사히 동경합니다...

 

 

 

편지를  쓰면서 저는  분명히  배우고 있고 또한 성숙하리라 생각합니다.

 

 

겨울밤이 깊어 질 수록 글을 벗삼아 동경하는 분에게 글을 적는 이 순간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습니다.   편안한 밤,  깊은 수면 취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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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은 그렇게 고향을 떠나 전주로 떠나게되었다.
내기억에 많은 짐이아닌 이불보따리와 옷가지가 몇개든 작은 가방하나에...
완행버스 트렁크에 형에짐을 옮겨주었다.
멀리사라져가는 버스를보니  영원히 볼수없을것처럼 마음이 찹찹했다.

 

전주로 상경한 형은 하숙생활형편이 안되니 자취를 하게되었다.
자취방 월세를 아끼기위해서 친구한분과같은방을 쓰면서 그렇게 하나하나 자리를 잡아갔다.
하지만 집에서 도와줄형편이 아니니 형이  처할수있는 방법은 철저한 홀로서기 그것뿐이었다.
자취방월세, 학비,생활비, 여러 들어가는 일상생활비를 형 혼자 극복해나가야했다.
시골집에서 도와줄수있는것은 쌀이며 , 반찬 몇가지일뿐이다.
그래서 시작한 형의 홀로서기방법은 신문배달과 우유배달이었다.
남들처럼 하면 보수가 적기때문에 다른이들보다 더많은 신문과 우유를 돌렸다.
새벽4시부터 몇시간을 그렇게 악착같이 일을 해나갔다.
그리고 학교가 끝난후에는 또다른 아르바이트를 병행해나갔다.

 

신문배달 이라는것이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나는 새벽에는 안해보고 아침에만 하는신문배달을 5년 가까이 해보았지만
신문배달이라는것이 아침에 하루도 거르지않고 일관성있게하는, 날씨에 많이도 영향을 받는
쉬운일이 아니다.
비가오나 눈이오나 ,바람이부나  달린다는것이 운동이 될수는 있으나
운동하고 일하고는 결코 같은 부류는 아닌것같다.

 학교생활은 학교생활데로 공부도 열심히 해야했고 상업고등학교라는 특성상
부기,주산,여러 공부와 학원생활, 그리고 밤이면 아르바이트...
마치면 집으로와 또다른 공부  (공부도 효과적으로 했던것같다. 이마에 흰천을 두르고 책상앞에는 할수있다"하면된다" 여러 글귀가보이고 잠을 깨우려고 바늘이나  여름에는 세수대야에 물가득붓고 발을 담구는등  방학때 형에 자취방을 보면 진풍경이다)도해야했고
새벽이면 신문배달에 밥도 해먹고 또싸가야지 ...내가본형은 항상 바쁘고 시간이없었다.

 그렇게 살아가는 형의 강한 집념과 힘은 대체 어데서 나오는것일까?

하루 3시간이상을 자지 않으면서 학교생활과 생활수단을 병행할수잇는 그강한 , 대체 강해질수있는 힘은 무엇인가?
가까이에서본 형의 가장강한 스승은 책이었다.
누가 가르쳐주지않은 냉정한 세상에서 찿을수있는 가장 큰힘이자 스승은 형에겐 책뿐이었다.  약해지는 마음을 잡기위에서 택한 가장 강한힘...
형은 강해지고저 무수한책을 보았다.
그리고 나에게 항상 하는 말이있고 항상 선물한것은 책이었다.
동생아! 책을 보아라 ... 책속에 길이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나도 그렇게 책을 무수히보나보다.
올해목표가 백권인데 벌써 반절은 달성한것같다.

 

형은 책도 가려서 보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읽었던 책이 자기개발 마인드책과 3시간 수면법에 관련된책,
그리고 어려움속에서도 굳세게 살아가 나중에 훗날 꼭 성공한 분들의책을 ...
형이 그당시 선물했던 책중에 대우 김우중회장님에"세계는 넓고 할일은많다"가 가장 기억에남고 지금도 내책장에 소중히 소장하고있다.

 그당시 형이 봤던책들중에 지금도 기억에 남는책은

신념은 마술이다"  "내자신과의 싸움에 강해져라"  "3시간 수면법"
"효과적인 3시간 수면법"  "잠들어있는 나의 죽은 시간들"
여러 책들을 보면서 형이 했던말들은 절대 책은 빌려보지말고 사서봐라.
그리고 집중하고 정독하라!  좋은 책은 한번에 그치지말고 몇번이라도 읽어라.
좋은내용은 몇번이고 되세김하듯 외우듯이 읽어라,, 그리고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어라...
나는 지금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한다.

 

어느 한여름밤에 형이 친구분과 하는 얘기를 들은적이있다.
이 내용또한 책에서 인용된이야기다.
내용인즉  세상은 마음먹기에따라서 다할수있다.
문제는 마음가짐이고  철저한 마인드다.
나를 믿지않고 , 내자신을 어떻게 극복하지못하고 세상을 살아간단말인가..미국에서 실험을 했더란다.
밀가루를 조금씩 봉투에담고 10명에게 주었단다.

"이약은 설사약입니다"하고
잠시후 5분이경과하자 10명중 3사람이 화장실로가서 설사를 했더란다.
자신의 마음을 설사약이라고 굳게 믿었기에 몸이 스스로 반응을 한거란다.
기가막히지 않은가?
어떤상황에서도 자신을 굳게믿고 ,그러한 정신으로 살면은 하늘도 나를 도울것이요.
내자신을 사랑하고 나는 할수있다는 신념으로 살겠노라고....
다짐하는 형을 보면 참으로 멋있었다.

 

잊혀지지않는 슬픈일이있다.
인생에서 가장 혈기왕성하고 좋을때가 고등학교때이다.
고등학교의꽃은 수학여행이다.
형은 평소에는 항상 홀로서기를 하였는데 그 수학여행때만은 집에와서 돈얘기를햇다.
자존심이 강한 형이왜그런얘기를 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남들처럼  수학여행만은 부모님에게 뿌듯이받아 다녀오고싶은
소년으로 돌아가고 싶었던것같다.
부모님께서 주시지 못하자 형은 스스로 알아서 하겠노라며 쓸쓸히 전주로향했다.


몇주가 흘러 형은 집에 다녀왔는데 수학여행을 잘다녀왔노라고했다.
철부지동생들은 왜 빈손이냐고 묻자 형은 돈이 없어서 선물은 못사왔다고 미안하다며
다음에는 꼭 사오마 말했다.
그리고 또 몇주가 흘렀는데 우리가족은 형이 수학여행을 가지않은것을 우연히알게되었다.

형은 거짓말을 한것이었다.
어머니께서 왜 그랬냐고 우시면서 묻자 형은 하여야할 공부도 많았고  쉬고싶었노라고 하면서 낮에는 도서관에서 밀린공부하고 밤에는 밀린책을 실컷보아서 좋았다고했다.
잠시동안 우리가족은 말없이 조용해졌다.
나는 느꼈다. 형은 갈수도있었는데 가고도 싶었는데  그수학여행이라는것또한
사치라고 느꼈지않았나 생각이든다. 자기가 처해있는 그현실속에서 분명히 그것또한 사치라고...
그렇게 고교생활은 서서히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이 한이 되었던지 형은 대학교나 직장생활은 생각도안해보고 접어버리고
돈벌러 군대나 가련다 하고 하사관에 지원하고 입영날짜를 기다리며
여행에관한한책들을 몇권을 구입해 정독하고 계획을 세워 전국일주를 수십일에걸쳐헤냈다...


 나는 어린시절 형이 참으로 무서웠다.
바늘로 찔러도 피한방울 안나올것처럼 보였다.
비유가 될련지모르겠지만  쉬리의 최민식의 날카로운눈빛과
최민수의 잔잔하면서도 선이굳은 목소리로 형이 비추어졌다.
유독 바로 밑의 남동생이라서 그런지 형은나에게 신경을 많이도 써주었다.
나는 그런형이 거대한 산처럼 느껴졌고  결코 잡지못할 거인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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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이 보인다.  내 앞 바로 입구가 있었다. 

깊이도 알수가 없었고 그 안에 얼마나 찰흑 같은 어둠이 도사리고 있을지 전혀 알수 없는 그 자체가 두려움 이었다.  긴 터널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느낄수도, 잡을 수도 없는 두려움의 그 길을 견딜수 있었던 것은  희망 이라는 거대한 빛이 있었기에 참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출구를 나왔다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분명히  댓가를 치루 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분명히 댓가를 치루었다.

이제는 잊고 싶었다. 어쩌면 벗어 나고 싶었다.

공이병에 대한 것도  분노의 그 사슬도 이제는 끊고 싶었다.

용서가 아닌 내 자신을 위하여 이제는 쉬고 싶고, 기억을 상실 하고 싶었다.

그러지 않으면 세상에 대한 나의 힘겨움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부대로 나는 복귀한 것이다.

부대와 동료들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잘 돌아가고 나무와 풀 , 공기와 전차들도 그저 그자리에 있었다. 나와 김상병만이 이 위치에서 잠시 여행을 떠나온 것이 었다.

내가 없어도 세상은 그렇게 변함이 없는 것이었다. 세상은 나 라는 존재를 그리 크게도, 아쉬워도 않았던 것이다.  나는 잠시 바람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너무도 행복 했다. 그저 내 자리로 이제 원위치를 했을 뿐인것을, 나는 너무도 고마운 마음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열로 가득찼다.  그저 이렇게 평범한 내 역활이 너무도 감사하다. 나는 너무 욕심과 만족을 못하고 내 자신을 변명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세상이 너무도 따뜻하고 모든 사람들의 미소가 좋았다... 그저 좋았다....

 

다음날 아침 중대장의 호출이 떨어졌다.

나와 김상병, 군장을 매고 연병장을 하루내내 돌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10일을 ...

이유인즉 15일간의 그곳 생활에서 저녁에 썼던 수양록이 형편 없다는 것이었다.

내용이 반성의 기미도 보이지 않고 성의가 없다는 것이었다.

생각도 하지 못한 변수였다. 그곳에서 썼던 그 글이 부대로 오리란 생각도 못했고 이렇게 다시 발목을 잡을 줄은 정말로 몰랐다. 그렇구나 이것이 끝난것이 아니 었구나...

김상병과 나는 연병장을 하루내 돌았다.  하지만 행복했다.  그곳 생활에 비하면 이곳은 행복이 겨운 곳이었다.  뛰면서도 김상병과 나는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이말을 자주했다. 이런 구보 라면 몇달이라도 하겠다고...

고참들은 고생한다고 음료들을 사들고 가끔씩 들렸다.  그들의 입에서는 한마디씩이 나왔다.

" 야..!  파이팅  이다.  이제 부터는 고생 끝이라 생각해라.. "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고 저녁이면 그저 일상생활과 담배를 피우는 순간이 좋았다.

모든것은 저 담배연기에 날려 버리자...

나는 잠깐 악몽을 꾼 것이라고 생각하자...

 

악몽을 꾼 순간에도 나의 군생활은 시간이 흘러 갔었고 어느덧 나는 상병 마루봉이다.

이제 병장까지는 15일도 채남지 않았다.

상병선임 이었던 것이다.  군생활중 가장 파워가 있고 또한 그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직책을 잘해야 한다는 상병선임!   내가 다녀온지 1주일이 채 되지도 않았는데 후임들은 내가 보기에도 영 형편이 없어 보였다. 당연히 고참들은 성에 안차고 상병 선임들만 나무라는 것이 었다.

당시 나 빼고 동기는 2명이 더있었다. 

나는 일을 치룬지 얼마 되지 않았고 연병장을 돌고 있었으므로 고참들은 너는 할만큼 했다.

이제는 쉬어라, 더이상 나서지 말고 이제 병장이 되거든 몸사리고 제대나 하라는 것이었다.

네 동기들이 있으니 맡겨 두라는 것이었다.

정말 그랬다. 이제는 나서고 싶지 않았다. 쉬고 싶다...

하지만 동기들은 한번만 더 나서주기를 바라는 눈치 였다.

동기들 사람이야 좋고 성실하지, 내가 보기에는 무능했다.  앞에서 끄는 강한 기운이 없었다.

나는 엄청 망설이고 있었다.  피하는 것이냐, 아니면 또 한번 내 역활을 충실히 해내는

것이냐?  참으로 너무도 망설였다...

내 자신에게 현실을 담보로한 이시간을 편안하게 안주하는 것이냐?

아니면 어려운 고통이 있었지만 마지막 까지 최선을 다하는 삶을 선택할 것이냐?

현실주의자 이냐 , 아니면  나만이 인정하는 내 자신의 비겁자가 된다는 것이냐...

 

후자를 선택하기로 했다.

마지막 까지 최선을 다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제 어떤 일도 두려움 이라는 것 때문에 피하거나 도망 가지를 않는다. 그리고 내 자신에게 변명을 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가야할 길 이라면 후회 라는 것을 없애기로 했다.

공이병을 뺀 나머지 후임들을 모두 한사람도 빠지지 않고 세면장에 집합을 시켰다.

적막이 흐르고 숨소리 하나 제대로 들리지 않는 팽팽한 긴장감..

나는 한마디만 했다.

 

"  군대 라는 곳이 전쟁놀이 하는 소꿉장난 하는 곳이 아니다.

   군인은 곧 군인 다워야 한다.  너희들이 상병이 되고 병장이 되었을때 후임에게 떳떳이 나는 이렇게 열심히 군생활  열심히 했노라고 말할수 있겠냐?

지금 이렇게 안일하게 하고 있는 군생활이 너희들을 시간만 가면 달아주는 계급장만 믿고 살것이냐?   잘 보아라 너희들이  잘못하면 너희 고참이 얼마나 고통을 당하는지 똑똑히 보여주마.  잘못은 개개인이 했는데 왜 고참들이 맞아야 하는지 똑똑히 보여주마..!  "

 

그리고 나의 주먹은 단  두사람에게만 가격을 시작했다.

바람을 가르고 나는 있는 힘껏 주먹에 힘을 실었다.

수십차례의 가격이 끝이 났다.

그리고 두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김상병과 그의 동기 인것이다. 

 내가 세상에, 내가 다른이도 아닌 김상병을 무참하게 때린 것이었다. 그 한달간을 같이한 나를 형이라고 부를 정도로 간절한 김상병을 이 두 손으로 가격을 한것이었다...

나의 비참하고 참담한 마음이 얼마나 컸던지,   나 자신이 정말로 두려웠다.

어쩌면 한달간의 그 고통 보다 이순간이 나를 더욱 크나큰 두려움으로 떨게 만들었다...

김상병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김상병의 눈이 살짝 젖어 있었다. 설마 하니 내가 자기를 때릴것인줄은 상상도 못한 눈빛이었다.. 그리고 다른 눈빛 하나는 "  형 !  형 마음 알고 있수,  그만 마음 아파 하시요.. "

그런 눈빛이었다...    이것은 미안한 감정을 떠난 무언의 대화였다.

세면장 안은  긴장 그 자체 였고 적막이 흘렀다.

나는 아무 말없이 세면장 문을 걷어 차 나왔다.

그리고 내안으로 오는 바람을 시원하게 맞이 했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고, 아무런 두려움도 없었다.

정말로 아무런 두려움도 없었다.  두려움, 불안, 근심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결코 포기가 아닌  내안의 커다란 극복 이었다....  그 어떤 것도 이제는 두렵지 않다...

 

그후 공이병은 다른 부대로 전출을 가게 되었고 지금 이순간 까지 얼굴을 볼수가 없었다...

 

 

 

세월이 십년이 훨씬 지났다.

나는 지금도 일년에 몇번씩 군대를 다시 입대하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도 나의 계급장은 이병이었다.  분명 이것은 꿈이다.

나는 분명히 군대를 제대 했지를 않는가?  하지만 꿈속에서 난 항상 다시 이병 부터 시작하는 작은 군인이었다. 어서 깨어야지 하다가 나는 소스라치게 일어난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어 본다.  물을 마시면서 그럼,  꿈 이어야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와 김상병, 공이병, 이렇게 셋 이서  소주 한잔을 하고 싶다고...

모든 옛일을 소주 잔에 털어 버리고 호탕하게 웃고 싶다고, 우리 에게 언제 그런일이 있었느냐고 말하면 서로에게 소주잔을 채워주어 밤을 세우고 싶다고...

 

어쩌면 공이병은 나에게 고마운 존재 일수도 있다.

간절한 돈 주고도 얻을 수 없는 고마운 인생의 크나큰 배움을 얻었다.

지금 이순간,  이제 까지 내가 옳다고 말하고 행동한 사소한 순간들이 타인에게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고 상처를 주는 무기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분명 옳다고 말할수 있지만  개개인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이 다르므로 나만의 방식을 합리화 시켜 판단의 기준으로 살았을 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의 차이는 무서운 것이다.  하지만 그 생각의 차이로 세상에, 내 자신에게 휘둘림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이  무어라 해도 나는 나 일 뿐이다. 

기본은 정확히 지켜 주겠다.  하지만 기본 이외의 모든 책임은 내가 감당할 몫이다.

내 몫 이기에 내가 선택한다.  그리고 후회 하지도  않는다.

또 한번 공이병 같은 일이 이 사회에서 벌어진다면 ...  글쎄...

  

세상에 진정한 공짜는 없다.  그리고 공짜의 바램을 가져서도 안된다.

모든것에는  그 만한 댓가를 치루 어야만 한다. 댓가를 치룬다는 것,  그 것은 세상이 모두에게 준 공평한 자산이다.  나 자신의 원칙과 소신을 분명하게 지켜야 한다.

너무 강하면 부러 질수도 있다.  그 강함을 스스로 드러 내지 않는 다는것...

그것이 스스로 강해 지는 현명한 자 의  진정한 현재 위치 이다.

 

나는 분명  칼날 위에 서있는 듯한 두려움을 느꼈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 속에서 차츰 사라지고 경각심을 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초심을 잊지 않는다는 것,  그 두려웠던 순간을 딛고 이겨냈던 내자신을 기억한다는 것, 그 것이 내게 살아가는 힘이 되고  지금 숨을 쉬는 이유가 될것이다...

 

 

 

 

 

 

2005년 이 몇일이 지나지도 아니 하였는데 특별한 일도 없던 어느날.

나는 엄청난 두려움을 느꼈다. 위기 의식을 느끼게 하는 그 어떤 두려움이 나의 온몸을 감싸 않았다. 왜 일까?   깊이 생각하여 보았다.

결과는 금방 들어 났다. 나는 내 자신을 과소평가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용기라는 허세로 강한척 했지만 나의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가득 차 있었던 것이었다.

작고 사소한 두려움도 있었다.   숨 쉬기도 힘들 정도로 가슴벅찬 큰 두려움도 있었다.

어차피 두려움 이라는 것에는 작고 큼 이 없는 것이었다.  내 안에 두려움이 존재하는것을    부정 하지 말아라,  그 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심장과 같다.  받아들일것은 받아 들이고

이제 그 것 들을 정벌 해 나가자!

 

2005년 한해를 정벌해 나가자!

12달을 빠짐없이 정벌 해 나가자!

1달,1달을 정벌해 나가자!

하루 하루를 정벌해 나가자!

지금 한시간, 한시간을 정벌해 나가자.

적은  타인이 아닌 내 안에 가장 큰 적이 있다.

타인 에게는 져도 내 자신에게만은 철저히 이겨 나가자.

나를 이겨내자 !  나를 극복하자 !  나를 세상의 한복판으로 가져 가자.

 

나를 정벌 하자.  내 자신을 정벌 하자.

2005년 이 꺼지는 그 날까지 내 자신을 나는 기필코 정벌 하리라... !

 

나에게는 나 만의 간절한 목표가 있다.  그 간절한 목표을 위해서는 지금은

희생해야만 한다.

아톰 베개를 껴안고  저 천진난만 이쁘게 천사같이 자는 나의 아들을 위하여도 나는

2005년을  정벌해 나가야 한다.

 

나는 2008년 끝없이 정벌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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