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하워드 슐츠의 스타벅스 성공비결 ] ****************************



커피를 갈아 금으로 만드는 기업” “천년의 커피 역사를 뒤 집는 성공의 신화를 이룩한 기업가” 스페셜티 커피기업 스타벅스와 그 기업 회장겸 최고경영자 하워드 슐츠에 대한 평가다.

미국 시애틀의 고급 커피원두 소매점이었던 스타벅스가 오늘날 전세계 2000여개의 스토어를 자랑하는 세계최고의 커피 브랜드로 명성을 날리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하워드 슐츠와 스타벅스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했길래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레스터 서로교수로부터 ‘지식기반경제에 있어서 새로운 규칙에 따라 부(富)를 창출한 대표적인 사례로 지목되었을까?

우선 우리가 알아둘 것은 스타벅스가 회장 겸 최고경영자인 하워드 슐츠에 의해 창업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스타벅스는 하워드 슐츠에 의해 ‘커피에서 금을 캐는’ 스타벅스로 새롭게 창출되었다. 그 과정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뉴욕 브루클린의 빈민가 태생인 하워드 슐츠는 운좋게 미식축구 덕분에 장학생으로 대학을 갈 수 있었다.

졸업 후 제록스 세일즈맨으로서 대학에서 배운 것보다 더많은 것을 배운 덕분에 스웨덴 기업의 미국지사 부회장으로 잘나가는 삶을 영위한다.

우연히 작은 규모의 원두커피 판매점이 다량의 커피추출기를 구매하는 ‘이상한 현상’을 목격한 후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게 된다. 호기심이 많던 그는 시애틀의 스타벅스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직접 갈아서 만들어준 커피를 세 모금째 마신 후 ‘신대륙이라도 발견한 느낌 ’에 사로잡힌다.

커피라는 신대륙을 발견한 그는 뉴욕의 풍요를 버리고 새로운 세계의 개척에 나선다.

3년후 ‘사람들이 커피 한잔을 하며 편하게 토론도 나누고 재즈를 듣기도 하며 쉴 수 있는 오아시스를 창조하겠다’는 낭만적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스타벅스라는 오두막을 박차고 창업에 나선다.

창업 1년만에 커피 라는 신대륙에 발을 딛게 한 스타벅스까지 인수하여 세계최고의 커피왕국을 건설한다.


■ 인간중심의 문화 경영전문가들은 흔히 성공한 기업의 특징의 하나로 기업문화를 꼽는다.

스타벅스의 문화는 정말 독특하다. 커피원두를 볶는 기술자들로부터 최고경영자까지 스타벅스 사람들은 커피 자체와 커피로 상징되는 모든 것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커피에 대한 그들의 열정과 사랑은 연봉이 깎이는 불이익도 감수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하루 12시간의 격무에도 지치지 않게 했다.

스타벅스 사람들의 그러한 열정은 휴워드 슐츠가 미국 기업으로서는 드물게 파트타이머들에게까지 제공한 의료보험 혜택과 고위 경영자는 물론 모든 직원 들에게까지 제공한 스톡옵션을 제공하는 빈스톡(Bean Stock)제도를 통해 스타벅스의 엔진을 힘차게 돌리는 원동력으로 변했다.

그래서 스타벅스에서 종 업원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는다. 미국 기업으로서는 예를 찾아 볼 수 없는 이러한 파격적인 제도가 스타 벅스에서 시행된 배경에는 무엇보다 최고경영자 휴워드 슐츠가 어린 시절 아버지가 병석에서 회사로부터 받지 못했던 인간적 대우에 대한 노여움을 터트리는 것을 보며 가슴 속에 간직했던 결심에 가능했다.


■ 끊임없는 혁신 휴워드 슐츠 회장은 최고품질의 신선한 원두커피를 팔아야 한다는 원칙 이외에는 모든 것을 고치고 혁신할 수 있으며 그것이 바로 스타벅스의 유산이라고 강조한다.

이같은 정신이 없었다면 스타벅스는 미국 시애틀의 소수의 커피 애호가 들만 기억하는 최고급 커피 원두 판매점으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커피는 그저 레스토랑에서 부대적인 음료로 판매되고 있었다.

그러나 스타벅스는 커피를 마실 수도 있고 원두를 살 수도 있는 고독한 군중을 위한 제3의 장소라는 혁신적인 생각이 창조해 낸 전혀 새로운 패라다임이었다.

그 당시 뉴욕은 물론 미국의 어떤 다른 도시에도 그와 같은 형태의 비즈니스는 없었다. 휴워드 슐츠와 스타벅스 사람들은 그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던 사회적 추세를 읽어내고 과거의 비즈니스 패러다임을 과감하게 혁신했던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패러다임이 이해되기에는 시간이 걸린다. 휴워드 슐츠도 그의 꿈이 실행에 옮겨지기까지 3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물론 철저한 준비와 계획의 시기였다.

스타벅스의 혁신은 새로운 비지니스 패러다임의 창출에 그치지 않는다. 판매 제품과 서비스를 끊임없이 혁신해냈다. 기업이 발전하기 위해 혁신이 필요하다는 것은 정말 뻔한 소리다.

어떻게 해내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스타벅스는 혁신을 현장근로자들의 지식을 최대한 존중하고 활용해내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는 후라푸치노. 커피와 우유를 미세한 얼음과 섞은 이 제품은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 지역 관리자인 디나 캠피온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됐다.

근처 다른 커피바에서 인기를 끌고 있던 냉커피에 설탕을 넣은 음료를 찾아 스타벅스의 문을 박차고 나가는 고객들을 보며 생각해낸 그 제품은 스타벅스의 이미지와 걸맞지 않다는 이유에서 본사로부터 처음에는 기각됐다.

휴워드 슐츠 역시 그 제품을 제공하는 것이 탐탁치 않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고객의 요구와 흐름을 누구보다 꿰뚫어 보고있는 현장근로자와 그들을 존중하는 매니저의 설득으로 마침내 제품으로 개발되어 소비자에게 제공됐다.

결과는 엄청났다. 1994년 여름 그 제품의 매출액은 스타벅스 전체 매출액의 11%나 차지하는 성과를 올렸으며 상종가를 기록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96년에 들어 후라푸치노는 연간 총판매 액의 7%에 달하는 5천200만 달러어치가 팔렸다.


스타벅스의 또다른 대표적인 혁신으로는 음악사업을 꼽을 수 있다.

유니버시티 빌리지라는 고급주택가에 위치한 한 스타벅스의 매니저인 티모시 존스가 고객들을 위한 ’이달의 테이프’에 담길 음악을 선곡하면서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음악이 담긴 CD를 어디 에서 살 수 있는 고객의 질문을 하는 고객이 많아진 것이다. 그 CD는 스타벅스 점포용으로 특별히 선곡되어 제작된 것으로 어디서도 살 수 없는 것이었다.

20년간 레코드 산업에 분야에 종사한 경험을 가지고 있던 티모시 존스는 스타벅스 스토어에서 틀어주고 있는 CD를 자체적으로 선곡, 편집하여 판매하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은 것이다.

결과는 기껏해야 1만장정도라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 어 7만5천장이 팔려나갔다. 대성공이었다.

이처럼 스타벅스는 고객들과 함께 하며 그들의 요구를 알아차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현장의 동업자’들의 샘솟는 획기적인 아이디어와 그 것이 적극적으로 수용되어 실행에 옮겨지는 ‘풀뿌리 혁신 시스템’을 갖추었기 때문에 부를 창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성공의 공식을 새롭게 쓴다. 레스터 서로 교수는 잘 나갈 때 과감히 자신을 파괴해야 부를 창출할 수 있다고 했다. 스타벅스 성공의 역사는 파괴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스타벅스는 일이 잘 되고 있고 팬들의 환호 속에서 승리의 공식을 끊임없이 바꿔 써왔다.

휴워드 슐츠 회장은 ‘현상에 의지하는 것은 슬픔만을 초래할 뿐’이라고 못박는다. ‘생존하고 번영하기를 기대한다면 핵심적인 제품을 재창조해야만 한다 ’는 휴워드 슐츠 회장의 신념은 마침내 커피 그 자체를 재창조하게 만 들었다.

생물의학 전문가 돈 발렌시아가 장난삼아 개발한 세포 분자추출법을 이용한 커피 제조기술을 스타벅스가 놓치지 않은 것은 두말 할 것도 없다.

스타벅스는 그 기술을 활용하여 커피의 영역을 병음료, 아이스 크림까지 확대해나갔으며 그와 함께 스타벅스의 명성은 전세계로 퍼져나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스타벅스의 성공의 핵심에는 ‘인간’이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


혁신의 주체, 고객과의 관계, 브랜드 가치의 상향 등 모든 것이 전적으로 스타벅스에서 함께 일하고 있고 스타벅스를 발전시켜 온 사람들의 덕분이라고 휴워드 슐츠 회장은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스타벅스의 가치를 높이는 지식을 창출하고 활용하는 것은 스타벅스 사람들이라고 믿고 있고, 그들에게 함께 성장하려고 노력해온 휴워드 슐츠라는 최고경영자의 존재라고 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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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로에 보급의 '전도사' 김정문 회장의 끝없는 도전 ] *********************


* 성공사례연구: ㈜김정문알로에


건강보조식품의 대명사 '알로에'.
국내에 알로에가 보급된 지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 인기는 여전하다.

이는 국내 알로에 보급의 전도사로 불릴 만큼 지대한 역할을 해온 김정문 회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30년 이상 자신을 괴롭히던 병마를 극복하고 알로에 보급과 연구에 평생을 바친 김회장의 질곡 많은 삶. 그리고 그 성공스토리.


중소기업인으로서 20권 이상의 책을 출간하고 라디오·TV 등에 1,000회 이상 출연한 인물.
단 한가지 품목으로 자신의 이름을 온 국민의 머리 속에 확실히 각인시킨 주인공.

특별히 경영학이나 마케팅 공부를 해본 적도 없으면서 5만개의 기업과 점포가 무너져 갔던 IMF 위기를 거뜬히 넘긴 우량기업인. 바로 ㈜김정문알로에의 김정문 회장을 이르는 말이다.

그 어느 때보다 건강에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요즘, 건강보조식품의 대명사로 통하는 것이 '알로에'지만 그 앞에 '김정문' 이라는 이름 석자가 빠진 '알로에'는 뭔가 알맹이가 없는 듯 허전하게 느껴진다.

'김정문알로에'는 이제 단순히 한 기업의 고유 브랜드 이상이다. 건강보조식품의 보통명사로까지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김회장이 몇년전 한 방송국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프로그램 진행자가 그를 두고 “알로에 하면 김정문, 김정문 하면 알로에”라고 소개했던 것은 결코 의례적 방송용 멘트나 과장이 아니었다.

이처럼 국내에 알로에를 도입하고 보급하는 데 앞장서온 '김정문알로에'는 현재 알로에를 주원료로 건강보조식품과 화장품은 물론이고 키토산·자라·초유·벌집 프로폴리스 등 각종 건강보조식품을 생산하고 있다.

특히 이 회사는 국내산이 수입산보다 비싼 값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1993년부터 김제에 2만평, 제주에 5만평(자체농장 1만평, 계약재배 4만평) 규모로 국내산 알로에로만 원료로 쓰고 있다.

최근 알로에 수요가 지속적으로 늘어나면서 올해부터는 세계적인 청정지역인 호주 번다버그시에 소재한 호주업체와의 제휴를 통해 원료 공급 다변화를 꾀하고 있다.


* 건강보조식품의 보통명사 ‘김정문알로에’

해외에는 1993년부터 본격 수출하기 시작해 현재 미국·중국·호주·일본·캐나다 등을 주요 수출시장으로 하고 있다.
지난 1999년에는 미국 AMECOR 상사와 300만달러어치의 수출계약을 체결해 알로에 제품을 본고장에 역수출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며 지난 5월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지사를 개설하고 시장 확대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또한 호주의 세계적 알로에업체인 ‘하이테크 알로에베라사’와 R&D 및 마케팅 등 업무 전반에 관한 제휴를 체결하고 본격적인 세계화에 전력하고 있다.

아울러 김정문알로에의 제조기술을 이전해 청정지역인 호주 현지에서 제품을 생산함으로써 우리 기술의 우수성을 과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지난 1997년 ‘우량중소기업체’로 선정된 바 있는 김정문알로에는 지난 91년부터 지금까지 경제적 어려움으로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환자들을 추천받아 완치될 때까지 적절한 건강보조식품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산수유제도’를 운영하는 등 기업이익의 사회 환원이라는 기업윤리를 몸소 실천하고 있다.

이밖에 건강보조식품업계 최초로 ISO9001 인증을 획득한 김정문알로에는 자체 자연과학연구소를 운영, 연구범위를 알로에에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생명공학기술로까지 확대해 나가고 있다.

1995년 천안에 제품개발실, 연구기획실, 산학공동 연구실의 조직을 갖춘 200평 규모의 연구소를 신축한 것이다.
1999년에는 여기에 미용연구실을 새로 보강하여 현재 박사 1명, 석사 7명, 학사 4명 등 총 12명의 연구인력이 상주하며 연구개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으며 점차 연구인력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한편 연구소 설립 이후 현재까지 많은 연구과제를 수행해 알로에 추출물의 항암성 연구를 시작으로 건강식품 소재로써의 알로에 용도 적성탐색, 알로에 유효이용 연구, 알로에의 화장품 소재화에 관한 연구, 알로에 속 식물의 알콜 대사 촉진 성분에 관한 연구, 알로에 추출물의 항바이러스 연구 등 총 15건의 산학공동 연구를 실시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기반을 토대로 1993년 국내 최초로 합성 보존료를 첨가하지 않은 알로에 겔인 ‘베라겔’ 용액의 제조에 성공해 가열과 농축 및 희석 과정을 거치지 않고 알로에 생잎의 겔 성분을 갈아 만드는 제조법을 특허등록하기도 했다.

특히 지난해 특허를 획득한 ‘항 고혈압 효능의 알로에 아세틸만난 함유 조성물’은 알로에에서 고혈압 촉진을 억제하는 조성물을 국내 최초로 분리 추출한 것으로, 그 응용분야가 다양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김정문알로에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반평생을 병마와 싸우며 힘겨워했던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알로에에 대한 김회장의 남다른 철학이 있었다.

질곡의 연속이었던 그의 삶은 오히려 생명에 대한 경외와 가치있는 삶에 대한 강한 애착으로 나타났다.


* 두번의 자살 시도, 그리고 알로에와의 만남

김회장은 1927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학시절이던 1942년 폐결핵 진단을 받고 이어 3년 뒤에는 만성 류머티스 관절염이라는 믿기지 않는 병을 얻게 된다.

1945년 해방이 되고 폐결핵은 치유됐지만 여전히 질병의 고통은 계속됐다. 류머티스 관절염에 위장병·신경쇠약·약물중독·중증변비·빈혈·알레르기 등이 연이어 찾아온 것이다.

병마와 싸우던 30년의 삶은 김회장에게 고통 그 자체였다. 너무 힘든 나머지 두번이나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김회장은 삶을 포기하지 않고 더욱 치열하게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다지며 다양한 경험을 쌓아갔다.

부산 동아대를 졸업한 김회장은 서울 기독학생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한때 신교사란 출판사를 운영하기도 했다.

약관 30세의 나이에 현 제일생명보험주식회사 초창기의 감사역을 맡기도 했지만 그의 재능과 열정은 이듬해 부산에서 꽃 재배업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김회장은 화훼·원예업계 최초로 가을에만 피는 국화를 겨울에서 봄까지 피게 하는 기술을 도입하는가 하면 고무나무·몬테스테라 등 꽃이 피지 않고 잎을 감상하는 관엽식물을 재배하여 시장에 내놓았다.

지금은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국산 파인애플과 바나나 재배를 20년전 국내 처음으로 성공해 한때 매스컴의 집중 조명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적 경제상황에서 그가 재배한 작물들은 일반 소비자들이 접근하기에는 고가였고, 시장 역시 협소하여 사업적 성공은 거둘 수 없었다.

그러던 그가 '알로에'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사업이 실패로 돌아가고 병마로 인해 심신이 피폐해 있던 1975년이었다.
우연히 일본에서 발간된 '알로에 건강법'이라는 책을 접하게 된 것이다.

"이 책에는 알로에로 치료할 수 있는 수많은 병이 열거돼 있었고,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세균학자인 일본의 소에다 박사가 기고한 알로에 연구 실험 결과가 소개돼 있었어요.
책을 다 읽고 나서 혹시 알로에가 내 병을 낫게 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게 됐습니다.”

놀랍게도 김회장이 알로에 생잎을 구해 먹기 시작한 지 1년만에 그의 육체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던 각종 병증들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특히 중증의 변비·위궤양·류머티스 그리고 그 많던 머리 비듬에 직효를 발휘했던 것이다.
몸소 알로에의 효능을 체험한 김회장은 건강을 회복해 가면서 알로에에 관해 조사를 시작했다.

자신의 복음(服飮)체험과 면밀한 자료검토를 통해 알로에는 종류에 따라 위장에 대한 반응이 정반대인 것이 있고, 인체효능도 서로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독자적으로 알아냈다.

알로에가 수십년간 자신을 괴롭히던 병마에 탁월한 효능을 발휘했다는 임상체험도 있었지만, 이후 알로에를 조사하고 연구하면 할수록 알로에에 대한 김회장의 호기심은 점차 믿음과 확신으로 변해갔다.

"나는 동양적인 것보다 서양적인 것을 동경했고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학문에 의해 증명된 것이 아니면 믿지 않았습니다. 알로에를 접한 후 설마 하던 내 병이 점차 나아가자 알로에 역시 과학적으로 그 효능이 증명될 수 있을 것이고 이를 규명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 80년대 초반 전국적인 알로에 열풍, 그리고 좌절

그는 부평에 있는 친구의 농장에서 알로에를 재배하는 한편 세계 여러 나라에서 알로에라는 어휘가 들어 있는 문헌들을 닥치는 대로 수집하기 시작했다.

3,500년전 이집트 의서(醫書)에서부터 20세기 구소련 의사들의 임상보고서에 이르기까지 알로에에 대한 인류 역사의 수천년의 경험이 김회장의 10년에 걸친 조사작업에 의해 차곡차곡 정리돼 갔다.

1979년 김회장은 본격적으로 알로에를 재배하여 대중적으로 보급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문제는 자금이었다. 또 이미 50을 넘긴 초로의 나이에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사실들이 이미 알로에에 대해 신앙과 같은 확신을 가지고 있던 김회장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재물을 잃는 것은 작은 것을 잃는 것이고, 친구를 잃는 것은 큰 것을 잃는 것이지만 용기를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재물도, 나를 도와줄 친구도 없었지만 믿음과 용기 하나로 버텼어요.”

이듬해(1980년) 봄 김회장은 어렵게 끌어모은 자본과 20년 경력의 원예업자로서의 경험을 살려 알로에 재배를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수만본의 알로에를 길러내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그 누구도 알로에를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자금도 바닥나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 좋은 약초를 왜 몰라줄까 하고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기회는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찾아왔어요.”

그는 수중에 남은 돈을 다 털어 일간지에 작은 광고를 내기로 결심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뒤 광고를 보고 찾아온 모신문 기자에 의해 알로에 관련 기사가 나간 뒤 TV·신문·잡지 등 김정문알로에에 대한 보도가 줄을 잇기 시작했다.

방송을 본 청취자들의 문의가 방송국으로 빗발쳐 업무에 큰 지장을 줄 정도였다.

드디어 전국적인 알로에 붐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알로에 붐은 소비자들이 그 효능을 체험한 이후 더욱 거세게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시련이 닥쳤다.

김정문알로에 덕분에 한국에 비로소 건강산업이라는 것이 움트기 시작하던 1982년, 알로에의 인기에 편승하여 검증받지 않은 각종 건강식품들이 판치기 시작했다.

또 알로에 수입업자와 재배자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돈벌이에만 혈안이 된 업자들은 수입한 알로에 제품을 턱없는 고가에 팔거나 엉터리 제품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심지어 보건사회부의 식품검사에서 대장균이 허가치의 수천배나 들어있는 경우도 있었다.

알로에 과열현상이 빚어낸 부작용은 확산돼 갔다. 얼마전 까지 호의적인 시각을 견지했던 언론은 서서히 부정적인 기사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또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알로에와 같은 건강보조식품에 대한 법률적인 보호와 규제가 미비한 상태였다.


* 기업경영은 감동과 행복을 주는 예술

알로에의 권위는 점차 타격을 입게 됐고, 과도한 경쟁은 결국 모든 알로에업자를 도산으로 몰고 가는 극한상황까지 연출했다.

김회장 역시 타격이 컸다. 하지만 그는 알로에에 대한 신념을 결코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연구와 경험을 밑천으로 알로에 건강 강연을 지속적으로 열어 나갔다.

주변에서는 알로에사업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알로에사업의 난점과 극복 방안을 잘 알고 있었다.

알로에를 생잎이나 생그루로 공급할 때는 판매되기 전에 썩거나 불량이 많이 발생해 수지를 맞추기가 곤란했다.

그는 시행착오 끝에 보관과 휴대, 복용이 간편한 분말 형태의 알로에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미국 냉동건조분말의 베라 제품을 수입 판매하는 방식이었으나 1988년 마침내 국내에서도 독자적으로 냉동건조분말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1990년 7월, 알로에사업 7년만에 김회장은 당당한 법인체를 설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2년 뒤 두개의 자회사를 설립했다. 하나는 건강식품만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건도식품이고, 다른 하나는 화장품만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푸른알로에화장품이 그것이다.

이후 '김정문알로에'는 국내 건강보조식품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당당히 자리매김했다.

"기업경영은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술은 인간의 창조성에서 시작되지요. 기업인 역시 경영에서 창조적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만들어 가야 합니다. 또 예술이 인류에게 감동을 주듯 기업도 소비자, 더 나아가 인류에게 행복과 감동을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업가로서의 제 인생에서 알로에야말로 바로 그런 감동과 행복을 가져다준 주인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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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여자의 성공 포인트/ 건축가 김진애 ] ***************************



'여자라서 행복해요'란 광고 카피가 있다. 수많은 여자들이 '여자라서 불편하고 부당한 대접을 받아 억울하다'고 아우성인데, 커다란 냉장고 문 앞에 선 여잔 행복이 뚝뚝 묻어나는 미소를 지으며 '여자라서 행복하다'고 말한다.

여자라서 뭐가, 왜 행복하다는 걸까? 그리고 과연 이렇게 '여자임이 행복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런 회의도 잠깐, 여기 자신이 여자임을 기꺼워하는 여자가 있다. (주)서울 포럼의 대표 김진애씨(48세).

산본 신도시 설계, 인사동 새길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끝낸 소문난 건축가이자, 건축 관련 서적 '매일매일 자라기' '이 집은 누구인가' 등과 유쾌한 여자 전략 '새로운 종의 여자 메타우먼'이라는 책을 비롯 수십종의 책을 쓴 작가이기도 하다.

건축가와 작가란 동전의 양면 같은 직업이 멋드러지게 어울리는 목소리가 큰 여자 김진애씨.

그녀는 이미 '여자, 우리는 쿨하다' '남자, 당신은 흥미롭다' 라는 책에서도 남녀 성의 역할, 특징 등을 얘기했지만 이번에 새로 나온 책에선 좀더 구체적이다.

'새로운 종의 여자 메타우먼'이란 책 제목처럼, 성공하는 여자로 살기 위한 전략이 시시콜콜 들어 있다.
고등학교, 대학교 졸업반 두 딸을 둔 엄마답게, 조목조목 다정다감한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여자로 자라서 좋은 점을 조목조목 짚어가고, 한편으론 여자로 살기 힘든 점도 지적해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누가 뭐래도 21세기는 여자의 세기라고, 지금쯤이면 변화하는, 새로운 여성상이 등장해야 할 때 '메타우먼(변화하는 여자, 진화하는 여자라는 뜻)'이 되자고 목소리를 높이는 여자 김진애씨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자.

1971년 보수적인 서울대학교 공대엔 여자를 구경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웠다. 이화여중·고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졸업후 서울대 공대 건축과를 선택한 건 단순히 '내가 벌어먹고 살아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문과보다 이과가 '독립'하기엔 좋을 거 같았고, 그림 그리기 좋아하던 그녀는 설계도면의 그림 그리기가 멋있어 보이는 '건축과'를 두 말 없이 선택했다.

학교 공부는 별로 흥미롭지 않았지만 졸업하자 마자 동양종합 건축사무소에서 실무를 익히며 '집짓기'의 재미를 느꼈다. KIST 지역개발연구소에서 일할 땐 '공부하고 싶은' 열망이 점점 커져만 갔다.

이미 스물 넷에 결혼해 한 아이의 엄마였던 김진애씨는 미국 학생들도 들어가기 어렵다는 MIT 공대에 유학을 떠난다. 물론 남편과 함께였다.

도시건축 설계 석사 박사를 따고 돌아온 것이 1987년. 한국에 오자마자 대한주택공사 주택연구소에서 도시/단지계획 연구실장을 지내며 '인간'을 위한 집짓기를 시작하게 된다. 1991년 드디어 '독립'의 날개를 편다.


Point 1 위험을 즐긴다

'자유롭다' '당당하다' '여자보다 더 여자같고, 남자보다 더 남자같다' '등등의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김진애씨. 1991년 잘 다니던 대한주택공사 주택연구소를 그만두고 건축사 사무실 '서울 포럼'을 차릴 때, 주변에선 모두 말리기만 했다.

안정적인 연구소에서 편안하게 월급받으며 일하면 될 걸 굳이 '어렵고 힘든 독립의 길'을 택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위험은 감수해야지요. 대학 졸업하고 건축사 사무실을 다니면서 건축 공부를 더 하고 싶어 MIT에 갈 때도 모두 축복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듯이, 이번에도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했지요.
공부한대로 집을 짓는데, '자유로운 작업환경'이 무엇보다 필요했으니까요. 하고싶은 일이 내게 돌아오기까지 기다리기엔 시간이 너무 아까웠고, 적극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만들어야겠단 생각이 먼저였죠."

안전하고 넓은 길, 위험 없는 길은 그다지 재미가 없다. 꼬불길이라도, 스스로 위험을 감수한 뒤에라야 성취감도, 보람도 배가 되는 걸 이미 그때 알아차렸던 것이다.

여기저기 투자받아 큰 회사 만드는 것도 부담스러워, 정말 혼자 힘으로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자그마한 사무실을 차려 본격적으로 클라이언트를 만나러 다녔다.


Point 2 생존을 위해 일한다

취미로 일하는 사람이 있고, 폼으로 일하는 사람이 있고, 생존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있다면 김진애씨는 '생존을 위해' 일한다고 거침없이 말한다.

먹고 살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바로 생존이다. 그것도 길게 살아남길 바란다. 한 두 개의 사이드 잡을 가진 사람이 그 일에 성공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부업이 잘되면 당연히 본업을 바꿔야 하는 것처럼 '생존을 위한 작업, 생활'은 무슨 일을 하든 마음 깊숙히 새겨두어야 할 경구가 아닐 수 없다.

'생존 기술이 번영 기술이다'란 말이 있다. 사회에 나와 자신의 일로 승부를 거는 사람들은 '생존'을 걸고 일한다는 건 꽤 부리지 않고 일한다는 것이다. 생존을 위한 치열한 삶의 방식은 그 어떤 어려움도 극복해낼 수 있다.

미 국무장관을 지낸 매릴린 올브라이트의 에피소드 하나. 미국에선 성공한 여자로 꼽히는 올브라이트도 일을 처음 시작할 땐, 커피 심부름을 해야만 했다.

회의를 시작하며, 남자직원이 '커피 심부름'을 시켰다. 올브라이트는 기꺼이 기쁘게 이 심부름을 했다.

얼굴 붉히고 자존심을 거론하기 보다는, 기쁘게 일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생존'의 법칙에 충실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어렵고 복잡한 외교 문제를 척척 해결했던 유능한 여걸다운 면모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이 얘기를 듣고 김진애씨는 올브라이트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고 한다).


Point 3 포기할 건 쉽게 포기한다

뭐든 일등을 해야 하고, 남에게 지곤 못배기는 성품이 있다. 이름하여 승부욕. 그러나 김진애씨는 의외로 안되는 건 과감히 포기한다. 안되는 일은 안될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할 줄 알게 된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포기가 쉬웠던 건 아니다.

처음 도시설계를 하며, 계획대로 진행할 때 걸림돌이 되었던 수많은 법규들. 이건 자신의 뜻으로 해결될 수 없는 영역밖의 일이었다.

수차례의 건의와 회의를 거치고 나서,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집에 돌아와 가위에 눌리고 악몽을 꾸면서도, 좌절하지 않게 된 건 한참 시간이 흐른 뒤였다.

연륜이 쌓이면서 '안되는 일'도 있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포기해 버리는 것, 이걸 깨닫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때마다 좌절하지는 않는다. 이런 식의 좌절이나 실패 역시 필요한 과정이라고 고쳐 마음 먹을 수 있게 된 것도 마흔 살이 훌쩍 넘기 후의 일이다.

안되는 일에 매달려 에너지를 낭비하기 보다 될 일, 무슨 일이 있어도 이루어야 할 일에 전력을 기울인다. 남의 기준이 아닌, 철저히 자신의 기준에 맞는 완성도를 위해 끈기를 가지고 최선을 다한다.

그래서인지 꼭 하려는 일은 남들이 하는 두 배, 세 배의 에너지를 투입해 성공해내고 만다. 오랜 경험을 통해 시간을 많이 투자할수록 좋은 결과가 나타나는 걸 알기 때문이다.


Point 4 여자답게 일한다

세상의 절반은 여자고, 또 절반은 남자다. 여자가 일로 성공하려면 남자보다 훨씬 더 어려운 건 사실이다.

하지만, 여자이기를 포기하면서 일로 성공하라는 건 아니다. 남녀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다르다.

생물학적으로든 인간적으로든 남자는 남자대로 장점이 있고, 여자는 여자대로 장점이 있다는 것이다. 서로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보완하는 것이 김진애씨의 경우 '여성스러움'은 걸림돌이 아니라 미덕이라 생각한다.

근사한 여자를 보면 즐거워지고, 잘생긴 남자를 보면 미소가 나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섹스어필하는 것이 마치 수치스러운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여성다움은 즐거운 것이지 부끄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행해지는 '호의적인 차별, 배려'에 속지 말라고 다시 한번 당부한다. 여자니까 철야는 안되고, 여자니까 숙직은 안시키는 식의 차별.

몸은 편할지 모르지만, 한번 봐주기 시작하면 남자들은 피해의식을 느끼고 여자랑 일하는 것을 불편해 한다.

여자다움은 지키되, 보호받아야 한다는 수동적인 생각을 버리라는 것이다. 남자들이 수첩에 적은 '유머 한 마디'를 외우듯이 필요하다면 철저히 준비해야 하고, 남자의 영역, 여자의 영역 따지지 말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치열하게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변화하는 여자, 진화하는 여자인 메타우먼이 21세기에 꼭 필요한 여성상이라는 것이다.(물론 김진애씨도 메타우먼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여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Point 5 당당하게 요구한다

논현동의 3층집엔 김진애씨 가족, 김진애씨 시부모, 김진애씨의 동생 가족 등 세 가구가 산다. 게다가 지하와 1층엔 서울 포럼 사무실이 있다.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이 한 데 있는 셈.

침대에서 일어나 사무실 책상에 앉기까진 5분도 채 안 걸린다. 처음 시부모님이 이사오면서 며느리에게 한 말은 '얘야, 왜 집에 사무실과 통하는 인터폰이 없냐?' 였다.

아무리 공간이 가까이 있어도, 사무실과 집은 엄연히 구분되어야 하고, 집안 일로 시시콜콜 며느리를 찾지 말아달라는 '모진 주문'을 받은 시부모님.

물론 처음부터 아무런 불협화음이 없이 이해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김진애씨는 자신이 일하는 과정을 시부모님께 다 보여주었다. 그때까지 며느리가 어떤 일을 하는지 구체적으로 모르셨던 시부모님은 쉽게 이해해주셨다.

집안에선 며느리지만, 밖에 나가면(비록 스무발자국도 떨어져있지 않은 아래층이지만) 부하직원을 거느리고, 한 회사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비록 며느리가 식사 시중을 들어주지 않아도 불평불만을 하지 못하는 것은 김진애씨의 '당당한 요구'와 곁에서 시중은 못들어도 시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을 충분히 보여줬기 때문이다.

막연한 기대는 불평을 낳게 되지만, '정확하고 당당한 요구'는 오해를 풀고 이해를 얻는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친한 사이, 어려운 사이일수록 뭔가 해주길 바라지 말고, 당당히 요구하라고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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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치아노 베네통 회장 ] ************************************



< 나의 성공 비결은 자유로운 발상이다. >

세계 1백20개국 5천여개 매장에서 매년 1억벌 이상의 옷을 판매하고 있는 세계 굴지의 의류기업.

에이즈 환자의 시체나 죽은 병사의 피묻은 군복 등 충격적인 광고사진으로 이름난 캐주얼 왕국.

그에 반해 해마다 선보이는 1천5백여종의 신제품 광고는 전혀 하지 않는 괴짜 회사.

"남들보다 뛰어난 재능은 없습니다.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려고 노력할 뿐이죠"

무일푼으로 시작해 55억달러의 재산가(포브스지 선정 세계 갑부 57위)가 된 인물.

베네통 회장은 성공 비결에 대해 '자유로운 발상'이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창조와 자유라는 그의 경영정신은 그 유명한 광고 캠페인에서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소비자의 눈을 붙잡는 광고시리즈를 통해 '유나이티드 컬러스 오브 베네통'은 더욱 유명한 상표가 됐다.


자신 또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양손으로 중요한 부분만 가리고 광고에 출연하기도 했다.

"중고 의류를 난민에게 보내자는 캠페인을 할 때였죠. 내가 벗는 것이 가장 좋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사진작가가 말하더군요. 그래서 벗었죠"

베네통 회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남들과 다른 생각'을 온 몸으로 실천한 것이다.

그의 관심은 주로 주류에서 소외된 자들과 아픔을 겪고 있는 인간들에게 있다.
흑인 에이즈환자 난민 등을 거쳐 요즘은 음지의 자원봉사자에게 눈길을 돌렸다. 세계 각지 자원봉사자의 모습을 담은 엽서와 포스터 기념티셔츠를 판매한 다음 그 수익금을 자원봉사단체에 기금으로 내놓을 계획이다.
언뜻 보면 흔한 기업봉사 활동이다. 그러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역시 베네통답다.

교회의 동성애자 집회에서 자원봉사하는 게이 간호사, 폭력 추방을 위해 활동하는 전 폭력 조직원, 양로원에서 탭댄스 공연을 하는 72세의 할머니 무용수 등 범상치 않은 이웃들을 사진전시회에서 만날 수 있다.

이처럼 베네통은 광고라는 수단을 통해 매장을 찾지 않는 고객들과도 대화를 나눈다.

"전세계인들은 옷 광고를 굳이 안해도 우리 옷을 삽니다"라는 그의 말은 그가 단순한 몽상가가 아닌 치밀한 사업가임을 깨닫게 한다.

베네통 고객의 70% 가량은 10대와 20대다. 그가 무엇보다 독창성을 강조하는 것은 이 때문이기도 하다.

창의력이 뛰어난 세계 젊은이들을 모아 '파브리카(라틴어로 워크숍이라는 뜻)'라는 이색 연구소를 세우기도 했다.
25세 이하의 전세계 젊은이들이 모여 영화 TV 음악 디자인 책 컴퓨터 그래픽 등을 마음껏 연구하는 장소다.

'젊은이들은 경험이 부족하지만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기 때문에 세계적인 기업컨설팅회사와의 대화에서보다도 더 많은 전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1935년 이탈리아 트레비소의 폰자노 지방에서 태어난 그는 10세때 아버지를 여의고 생활고를 덜기 위해 신문팔이를 하는 등 남보다 일찍 사회에 발을 내디뎠다.

어린 나이에 집안의 생계를 책임졌던 베네통 회장은 1955년 막내 동생의 자전거와 자신의 아코디언을 판 돈으로 중고 직조기 한 대를 사들였다.

"어느날 시장에 나온 스웨터가 단색제품 일색이라는 사실이 눈에 확 들어오는 거예요. 또 여동생 줄리아나의 뜨개질 솜씨가 뛰어나다는 사실도 떠올랐습니다"

베네통은 회색이나 검정색 청색이 고작이었던 직물업계에 색채와 환상을 도입했고 젊은이들은 난생 처음 보는 컬러 스웨터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때 선보인 컬러 스웨터는 이 회사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회사 설립후 30여년 동안 승승장구하던 베네통도 한때 위기를 맞았다. 1990년대 초반 갭 자라 나프나프 등 품질 좋고 가격도 싼 캐주얼 브랜드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베네통 왕국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유럽내 매장도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베네통 회장은 대전환을 시도했다. 자신의 이름을 붙인 대형 매장을 세워 브랜드 이미지를 강화했다. 또 기존 캐주얼 위주의 사업영역을 다각화했다.

스키 용품으로 유명한 노르디카, 인라인스케이트의 원조 롤러브레이드, 전세계 라켓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프린스, 선글라스 킬러룹 등의 회사를 인수했다.

변화의 물결 속에서도 자유와 도전정신을 소유한 회사인지 여부가 인수의 첫번째 조건이었다.

그는 세계적인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는 패션사업가로서 한국 의류산업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일단 자신의 브랜드를 일류 브랜드로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음은 해외 시장에 적극적으로 나가 세계 시장에 알리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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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력 >

<> 1935년 이탈리아 트레비소 출생
<> 1965년 베네통그룹 설립 회장 취임
<> 1992~94년 이탈리아 상원의원 역임
<> 1994년 베네통 커뮤니케이션 연구센터 설립
<> 1997년 킬러룹, 롤러브레이드 등 스포츠용품사 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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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명기업의 사원에서 전경련 회장까지… 손길승의 5가지 성공비결 ] ***************



"미래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다보고 준비하는 것이다."


“제가 성공했나요? 글쎄요…. 저는 열심히 일해 온 것 밖에 없어요. 일은 우리의 삶에 존재가치를 부여해줍니다. 일은 저를 지탱해 주는 삶의 가치였고, 그 자체가 목적이었습니다. 일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성공은 결코 멀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언젠가 손길승 SK 회장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이름도 없는 작은 회사의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회사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든 산증인이면서 동시에 오너가 아니면서도 총수에 오른 이유에 대한 답이었다.

그런 그가 이제는 국내 재벌들의 대변단체인 전경련의 선장이 됐다. ‘오너 클럽’의 비오너 회장이 된 것. 전문경영인이 되는 것도 쉽지 않은 터에 샐러리맨 출신의 전경련 회장 탄생은 이례적인 사건으로 비춰지고 있다. 과연 그는 어떤 능력이 있었길래 ‘재계 총리’라는 전경련 회장에 오를 수 있었을까? 그 비결을 추려보았다.


< 비결 1. ‘저 사람과 함께 일하면 좋겠다’는 말을 들어라. >

‘일이 삶의 가치이고 목적’이라는 말에서 보듯 손회장은 엄청난 일벌레로 유명하다. ‘정통파 일벌레’라는 별명도 그래서 붙여졌고 스스로도 일을 통해 생긴 스트레스는 일로 푼다고 할만큼 일 속에 파묻혀 살아온 삶이었다.

실무자 시절 그의 특기는 밤새우기였다고 하는데 그가 세운 밤새우기 최고 기록은 1박 9일. 지금까지 깨어지지 않고있다. 당연히 출퇴근이 따로 없었고 꼭두새벽이라도 일이 생기면 부하직원의 집에 전화를 걸어 업무를 물어보는 게 일상적인 패턴이었다.

업무에서는 이렇듯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었지만 그는 항상 일이 끝나면 공을 다른 사람에게 돌렸다.

몇 년 전 어떤 유형의 직원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내가 해서 혼자 공을 세워야겠다’는 사람보다, 잘한 것은 상사나 동료에게 공을 돌리고 자기는 빠지는 사람을 좋아한다”며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저 사람과 함께 일하면 좋겠다’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 좋은 예다. 스스로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을 중시한다. 기업경영의 성패도 사람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지난 1998년 그룹 회장에 오르자마자, 그룹 내에서 영원한 맞수였던 김항덕을 야인으로 머물러있게 하지 않고 곧바로 회장 대우 상임고문으로 영입, 자신의 집무실 바로 옆에 자신의 방과 똑같은 크기의 공간을 만들어 경영상 중대한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수시로 상의해오고 있는 것은 좋은 예다.


< 비결 2. 설익은 쇠는 무기가 아니다. >

일밖에 몰랐던 손회장은 지난 94년 한 선배의 조언으로 ‘잡기’라고 할 수 있는 골프에 입문했다. 당시 그의 나이 53세. 골프 입문으로는 ‘아주’ 늦은 나이였다. 하지만 그는 ‘좀 어렵지 않겠느냐’는 주위의 우려를 핸디12라는 실력으로 보여줘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당시 놀라는 이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떻게 50대에 골프를 시작해 핸디 12의 실력에 이르렀냐고 칭찬하지만 저는 골프가 기 수련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필드에서 정신 집중을 하며 매타 최선을 다하다 보니 좋은 결과가 나온 것 같습니다. 골프는 집중력입니다. 한 타, 한 타를 잘 쳐야 합니다. 앞으로 어찌 되느냐를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남이 잘 치는 것을 시샘해서도 안 됩니다. 지나간 것도 잊어버리고 벙커도 겁내면 안 되지요.”

손회장의 이런 치밀함과 집중력은 그의 삶에 깊숙히 배어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지난 78년부터 98년까지 전무후무한 국내 최장수 기조실장을 지낸 것. 일반적으로 대기업의 기조실장은 2∼3년마다 바뀌는 것이 일상적인데 유독 그만이 20년 동안 기조실장을 지냈다. 덕분에 ‘직업이 기조실장’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 “저는 완전히 쇠를 달군 다음에 내놓고 싶습니다. 설익으면 안 됩니다”라는 말은 그의 치밀함을 대변한다.


< 비결 3. 상대를 감동시키는 마당발 인맥관리, ‘뛰어야 산다’>

41년 경남 하동 출신인 손회장은 하동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진주로 이사해 서부 경남지역의 명문인 진주중·고를 졸업한 후 59년 서울상대에 진학했다. 이 59학번은 ‘한국경제를 움직인다’는 말이 나돌 만큼 대단한 힘을 가진 이들이 많다.

진념 전 경제부총리·박용성 대한상의 회장·손병두 전경련 상근 부회장·박재윤 전 재무부 장관·이필곤 전 삼성물산 회장·김태구 전 대우자동차 회장 등이 그들이다.

이런 자연적인 네트워크 이외에도 손회장은 새로운 네트워크 형성에도 적극적이다. SK의 한 관계자는 “재계·관계·금융계 등에 구축해 놓은 손회장의 인맥은 대단하다 못해 놀라울 정도”라고 말한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그는 사내 공식회의만도 1백회 이상의 스케줄을 참석한 초인적인 인물.

임원 시절에는 사내 교육에 거의 빠짐없이 참석해 사원들 사이에서 ‘사장 얼굴은 몰라도 손실장 얼굴은 안다’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중국 진출에 있어서도 그의 이런 인맥관리는 빛을 발하고 있다. 지금도 SK의 중국 내 인맥관리를 총 지휘하고 있는 그는 중국에서 누가 온다고 하면 반드시 그 사람에 대한 기본 정보뿐 아니라 그가 신문에 기고한 내용이나 책까지 모두 구해 보고 만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공통의 화제를 찾아내고 한번 만나면 그 자리에서 친구를 만들어 버리는 그의 특기는 이제 한국을 찾은 중국 VIP들이 꼭 만나고 돌아가는 사람으로 입지를 굳혔을 만큼 탄탄함을 자랑한다.


< 비결 4. 탁월한 경영능력과 리더십 >

20여년간 기조실장이라는 자리에 있으면서 ‘빼어난 2인자’ 소리를 들었던 손회장이 지난 98년 9월 최태원 SK주식회사 회장의 추대를 받아 그룹 회장에 올랐을 때 주위에서는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는 의구심으로 가득했다. 오너가 있는 회사의 수장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4년 반이 지난 지금 안팎의 우려와는 달리 손회장은 내부의 잡음을 최소화시키면서 SK를 세계적인 기업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많은 재벌그룹이 IMF 사태라는 격변기를 맞아 대부분 마이너스 성장에 시달려왔으나, 손회장을 수반으로 한 SK그룹은 오히려 절정을 구가했다. 재계순위 5위에서 3위로 올라섰을 뿐 아니라, 내실로만 본다면 사실상 재계 2위라는 분석이 나올 정도다.

이처럼 기업을 반석 위에 올려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온 것이 손길승 회장이라는 점은 그룹 내외에서 모두 인정하고 있다.

최태원 회장과의 쌍두마차 체제가 잡음없이 몇 년째 유지되고 있는 것도 손회장이 탁월한 경영능력과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SK 관계자들은 “손회장이 큰 틀에서 외곽을 튼튼히 하고 있다면 최회장은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고 실무를 챙긴다”고 말한다.

특히 그의 경영능력은 시대를 내다보는 선견지명과 통찰력으로 집약된다. 그는 언젠가 “나는 항상 미래를 내다보고 준비해 왔으며, 불가능은 없다는 패기로 많은 어려움을 극복해 왔다”고 말한 적이 있었을만큼 앞을 내다보는 혜안에 충실해 왔다.

실제로 선경직물이라는 무명 기업에서 굴지의 대기업이 되기 까지 크고 작은 변화가 있을 때마다 ‘손길승’이라는 이름 석자가 빠진 적이 없었다.그룹의 성장 토대가 된 워커힐호텔 유공(현 SK) SK증권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 그리고 최근의 SK생명에 이르기까지 SK그룹의 성장은 손회장의 머리와 손끝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공을 인수하기 전에 울산에 미리 석유공장을 지어 준비했던 것이나 91년 대한텔레콤을 설립해 놓고 때를 기다리다가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룹 회장에 오른 이후에는 발 빠르게 ‘21세기 황금시장인 중국’ 진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 비결 5. 허세는 망하는 지름길 >

SK그룹에는 ‘일을 처리하는 5단계 방법’이 있다. 최종현 선대 회장 시절, 손회장이 그룹 내에 보급시킨 5단계 방법은 손회장의 일처리 방식에 다름 아니다.

일처리 5단계란 어떤 직책이나 직위에 관계없이 일을 하는 기본 방법을 정리한 것. 5단계의 첫째는 일에 대해 완벽하면서도 입체적으로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흔히 자신의 일은 본인이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수단과 목적이 뒤바뀐 채 일을 수행하는 경우가 흔하고, 과거의 일처리를 그대로 답습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둘째는 반드시 성공시켜야 할 핵심요소는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다. 이렇게 찾아진 요소가 과연 회사에 이윤 극대화를 가져다 줄 것인지를 생각하라는 것이 셋째이다. 다음으로 목표와 현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요소를 모두 추출해 보고, 마지막으로 그 장애 요인을 제거할 방안을 수립하고 실행해 나가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형식과 명분을 특히 중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형식과 실질은 같아야 합니다. 실속 없이 외형만 추구하는 기업은 오래가지 못합니다.”SK 안팎에서 행해지는 손회장의 강연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이 말은 그의 성격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의 일상은 이 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일상에서도 그는 필요 이상으로 말을 하는 법이 거의 없다. 개인적인 문제를 회사에 대입시키는 경우도 없다. 지난 99년 3월에는 차남이 결혼을 했지만 외부에 전혀 알리지 않은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화제가 됐고, 두 달 뒤인 5월에는 모친이 별세했는데도 외부에 절대 알리지 못하게 해 신촌 세브란스 병원의 영안실이 썰렁했다고 한다.

‘SK그룹 임직원들은 절대 발을 들여놓지 말라’는 엄명에 사장단만이 간신히 조문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손회장은 그룹 회장에 오른 이후 자신의 집무실이 있는 서울 서린동 SK 본사 23층에서 북한산을 조망하는 취미를 가지게 됐다고 한다.

그룹의 미래를 생각하기 위해서다. 이제 그는 서린동이 아닌 여의도 전경련 회관의 회장실에서 북한산을 바라봐야 한다. 여의도에서 바라본 북한산이 그와 전경련에 어떤 미래를 가져다 줄지 모두들 궁금해하고 있다.


* 손길승 약력

1959년 진주고 卒
63년 서울대학교 상학과 卒
65년 선경직물 입사
78년 선경합섬 경영기획실 실장
82년 유공해운 대표이사 사장
88년 선경그룹 경영기획실장 사장
94년 한국이동통신 대표이사 부회장
98년∼現 SK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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