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노르웨이 '라면왕' - 이철호씨의 성공 인생 ] ***************************



“열일곱 나이에 남의 나라에 가서 온갖 잡일을 하면서도 희망과 웃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금발에 벽안의 노르웨이 청소년들이 ‘우상’으로 떠받드는 땅딸막한 한국인 아저씨가 있다.

그들에겐 ‘MR LEE 누들’로 더 유명한 이철호씨.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로 출발하여 머나먼 이국에서 온갖 잡일에서 출발, 최고 요리사에 도전하고 ‘라면’하나로 부와 명예를 거머쥔 사업가가 된 이철호씨의 쫄깃하고 얼큰한 라이프 스토리를 들아보자.

지난해 11월, 해외에 거주하는 자랑스런 한국인을 소개하는 한 방송 프로그램이 끝난 뒤, 그 프로그램의 인터넷 시청자 게시판은 밀려드는 사연들로 폭주했다.

‘너무나 감동적이다’ ‘그의 삶을 보고 희망과 용기를 얻었다’ ‘한번 더 보고싶다’ 등이 주 내용. 대체 어떤 주인공이길래 평일 저녁 심드렁하게 TV화면을 지켜보던 수많은 시청자들을 그토록 사로잡은 것일까.

주인공은 노르웨이의 한국인 이철호씨(64). 노르웨이에서 ‘MR LEE 누들’로 통하는 그는 그곳 청소년들 사이에서 수상보다도 더 인기가 있다.

그가 벌이는 백화점 라면 시식행사를 보기 위해 초등학생들이 무더기로 결석을 할 정도라니, 여느 연예인 스타도 부럽지 않을 정도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오슬로에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을 때도, 노르웨이 국민들은 ‘MR LEE 조국의 대통령’이 왔다고 했다던가.

그런 그의 라이프 스토리를 소개한 책이 나왔다. <노르웨이 라면왕 MR. Lee 이야기, ‘Be Happy!’>가 그것. 책 출간 기념으로 한국을 오랜만에 다시 찾은 이철호씨를 만나보았다.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로 있다가 폭격으로 다리 부상 입고 노르웨이로 떠나

연간 1천5백만달러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고 있는 ‘성공한 사업가’ 이철호씨. 그러나 그의 첫인상은 그저 마음씨 좋은 동네 아저씨 같다.

작은 눈에 뭉툭한 코, 불룩한 배와 사람 좋은 미소가 몇 마디만 나누어도 마주 대한 사람의 긴장을 확 풀어놓는다.

그리고 잠시 후엔 쿡쿡 웃게 만든다. 이런 친화력과 ‘웃음’을 잃지 않는 낙천성이야말로 그가 지닌 성공의 열쇠가 아닐까 싶다.

누군가는 그를 가리켜 ‘웃음 바이러스’ 보균자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풀어놓은 삶 속에는 웃음보다는 차라리 눈물과 땀이 더 많았다.

그가 전쟁중 다친 다리를 치료할 수 있다기에, 노르웨이 오슬로 공항에 첫발을 내디딘 게 54년. 당시 그의 나이, 열일곱살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죠. 수중에 돈이라곤 한푼도 없이 거지꼴로 보따리에 책 몇권만 달랑 넣은 채 낯선 곳에 도착하던 그 느낌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지금은 9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당시엔 비행기로도 악천후 속에 덜컹거리며 무려 72시간이나 걸려 도착했죠. 그땐 제 인생이 이렇게 변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어요.”

충북 천안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이씨가 머나먼 노르웨이에 가게 된 건 따지고 보면 전쟁 탓이다.

한국전쟁 당시 이씨는 열네살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아버지는 은행에서 돈을 찾아서 가족들에게 고루 나눠주며 일렀다.

“혹시라도 전쟁통에 헤어지게 되더라도 이 돈으로 끝까지 살아 남아 다시 만나자.”

남들은 피난 가네 어쩌네 하는 와중이었지만 ‘타고난 장사꾼 기질’을 지닌 이씨는 10대의 나이에 엉뚱하게도 돈벌이를 해보겠노라 나섰다.

그리고 친구들과 어울려 밀짚모자 장사, 냉차 장사 등을 하며 돈을 벌었다. 전국이 난리통이었지만 이씨는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목숨을 이어나갔다. 그러다가 전쟁중에 우연히 알게 된 미군 병사와의 인연으로 미군부대에 ‘하우스보이(미군들의 잔심부름과 궂은 일을 해주는 소년)’로 들어갔다.

워낙 싹싹하고 성실했던 그를 미군들은 퍽 아껴주었다. 미군부대에서 그의 별명은 ‘아치 볼’. 그가 좋아했던 만화 주인공의 이름이다.

그러던 중 어느날 폭격을 맞아 다리 한쪽을 다치게 됐다. 야전병원을 전전하며 수술과 치료를 거듭했지만 다리의 상처는 더욱 악화되기만 했다.

평소 똑똑하고 정직한 이씨를 아끼던 당시 해병대 사단장 스나이더 장군은 이씨를 좀더 좋은 의료진에게 보이고 싶어 ‘미국 군인신문’에 광고를 내주었다.

그 광고를 보고 프랑스, 독일, 노르웨이 등지에서 도움을 주겠다는 뜻을 보내왔고, 결국 노르웨이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그야말로 그분은 제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죠. 당시 노르웨이로 가면서 다친 다리를 꼭 고쳐보겠다는 생각 외에 또 하나의 욕심이 있었어요.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자는 것이죠. 당시 제가 가진 최고의 기술은 그래봤자 ‘구두 닦기’였지만요. 그런데 노르웨이에선 구두닦이도 면허증 없이는 못한다더군요.”

이씨는 닥치는 대로 일자리를 찾았다. 언어도 서툴고 몸도 불편한 그가 찾을 수 있는 일이란 허드렛일밖에 없었다.
호텔 벨보이, 서류 심부름, 연극 단역배우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중에서도 ‘남의 나라에서 똥지게를 진 일’은 그의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당시엔 노르웨이에도 재래식 화장실이 있었다. 따라서 화장실 청소부로 들어간 이씨는 재래식 화장실의 용변 양동이를 꺼내 치우는 일을 해야 했다.

처음엔 냄새 때문에 미칠 것 같았지만, 1년쯤 지나자 어느새 그 냄새에 길들여지게 되어 전처럼 괴롭지가 않았다고.

일이 힘들어도 이씨는 한번도 자신의 삶 자체를 비참하거나 힘겹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화장실 청소부 일을 하러 다닐 때조차도 항상 웃는 얼굴을 잊지 않았다.

이씨는 “고생도 팔자다, 이런 고생에서 배울 게 있을 거다, 언제가는 분명히 좋은 일이 있을 거다 하고 느긋하게 생각했어요.
아마도 전형적인 충청도 성격을 타고난 덕분이 아닐까 싶습니다”라며 웃는다.
타고난 낙천적인 마음가짐 없이는 고달픈 이국 생활을 이겨내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세상 모든 일은 다 마음먹기에 따라 간다고 생각합니다. 슬프게 생각하면 슬픈 일만 생기고, 기쁘게 생각하면 기쁜 일만 생기는 법이죠. 모든 일이 잘될 거라고 믿고 열심히 일하면, 다 잘되는 방향으로 일이 나아가게끔 되어 있어요. 제가 평소에 농담을 잘하고 잘 웃는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죠. 낙천적인 사람, 언제라도 희망이 있는 사람은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는 법입니다.”

그의 생활신조가 된 ‘Be Happy!’는 사업이 성공하고 생활의 여유를 갖게 된 후 찾아낸 말이 아니다.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에 그의 마음에서 불씨로 자라나 등불이 되고 결국 그의 삶 전체를 비쳐주는 태양 같은 말인 것이다.


< 타고난 성실성과 열정으로 그릇닦이에서 노르웨이 최고 요리사가 되다. >

‘구두닦이 면허증’을 받을 생각으로 진학한 상업학교 공부를 끝내놓고 나니, 공부 욕심이 더 커졌다.
이대로 구두닦이가 되지 말고 공부를 더 해서 전문적인 직업을 갖자는 생각에 이씨는 요리전문대학을 택했다.

사실 요리사가 되면 먹는 것 만큼은 여한 없이 먹겠지 하는 단순한 마음도 있었다. 그때만 해도 먹고 사는 것이 여전히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 꿈을 품고 키 작은 이국소년이 문을 두드린 곳은 ‘홀믄 콜른 파크 호텔’이라는, 노르웨이 최고의 호텔 요리학교였다.

“처음엔 그릇만 닦았어요. 남이 20개를 닦으면 저는 50개쯤 닦으려고 부지런을 떨었어요. 물론 남들보다 더 깨끗하게 닦으려고 애썼고요. 그렇게 열심히 일하니까 하루는 주방장이 부르더군요. 그리곤 저한테 정말 요리사가 되고 싶냐고 물어요. 그래서 자신 있게 ‘Yes’라고 대답했죠. 결국 그 주방장 덕분에 그 학교 학생으로 선발이 되었어요.”

어렵게 들어간 학교에서 이씨는 최선을 다해 공부했고, 결국 최우수 학생으로 졸업을 하게 된다. 노르웨이에 간 지 7년 만에 이룬 결실이다.

언어도 유창하지 못하고 신체적으로도 장애를 갖고 있는 이씨가 낯선 이국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유일한 방법은 한가지.
그것은 자신의 콤플렉스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남보다 서너배의 노력과 시간을 투자하는 일이다.

요리전문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이씨는 이번에는 스위스로 건너가 감자를 깎는 일부터 시작해서 기본부터 요리를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결국 이씨는 3년 뒤 최고급 호텔의 주방장으로 스카웃되어 노르웨이로 돌아왔다.

이제 이씨의 삶은 더 이상 남루한 이방인의 삶이 아니었다. 그는 펜팔로 만나 10년 동안 마음을 주고받은 독일여성 아네리스와 결혼하고 첫딸 ‘안자’를 낳았다.

꿈에 그리던 가족을 이룬 것이다. 그리고 노르웨이에 뿌리를 깊게 내리기 시작했다.


< “면이 꼭 걸레같다”던 노르웨이 사람들에게 ‘진짜 라면맛’을 알려주다. >

호텔 주방장으로 활약하던 중에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노르웨이의 대형 빵 공장이 오슬로에 식당을 개업한다는 것이다.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이씨는 월급을 받는 대신 총수입에서 이윤을 배당받는 조건으로 계약하고, 평소의 소신대로 열심히 그 일에 뛰어들었다.

결과는 대성공. 나중에 빵 공장이 덴마크로 넘어갈 때까지 오슬로의 식당은 22년 동안 15개 체인점을 열 만큼 엄청난 흑자를 냈다. 그리고 그 22년 동안, 이씨는 변함없이 식당의 총지배인이었다.

그렇다고 그의 인생이 이후로 늘 화창했던 것만은 아니다. 세 딸을 낳아주고 가장 든든한 조력자인 아내 아네리스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맛보았고, 엄청난 노력과 투자를 들여 시작한 인삼차 사업이 실패한 경험도 있었다.

친구와 함께 시작한 세탁사업으로 친구도 잃고 돈도 잃는 괴로움을 맛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이씨는 괴로움의 나락을 뒹굴기보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몸을 일으켜 세웠다. 지칠 때면 하늘에서 그를 지켜볼 아내를 생각했다.

89년, 빵공장이 덴마크계 회사로 넘어가면서, 이씨는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회사에서는 만류했지만 그는 이 기회에 평생을 두고 이루어 갈 ‘내 일’을 찾아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그러던 중 뜬금없이 ‘라면’이 사업의 아이템으로 떠올랐다. 이씨가 라면 맛을 본 것은 68년, 노르웨이로 건너간 지 14년 만에 처음으로 고향인 한국으로 방문했을 때다.

그때 을지로의 한 분식집에서 처음 먹어본 라면 맛이 그의 뇌리에서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고 있다가 사업 아이템으로 떠오른 것이다.
일단 부딪혀보기로 마음먹은 그는 농심사 관계자를 만나 사업논의에 들어갔다.

“처음엔 라면 세 박스로 시작했죠. 라면박스를 들고 슈퍼마켓을 찾아다니면서 맛을 보라고 건네주었어요. 처음엔 라면의 면 모양이 걸레같다며 손도 대지 않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작하더군요. 물론 정식으로 첫 주문을 받기까지 3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죠.”

조심스럽게, 그러나 끈질긴 마음으로 시작한 라면사업이 일단 본 궤도에 오르자 순풍에 돛을 달고 출항하는 배처럼 매끄럽게 노르웨이 식품시장이라는 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노르웨이에 처음 선보이는 ‘라면’인 만큼 이씨는 자신의 브랜드를 내걸자고 굳게 마음먹었다. 20년이 넘도록 남 좋은 일만 시키고 결국 손을 털어야 했던 오슬로 식당사업으로 인해 배운 깨달음이기도 했다.

이씨와 거래를 시작한 농심사 측에서는 처음엔 난색을 표했지만, 이씨가 컨테이너 20대 분량의 포장비용을 미리 지불하기로 하자, 자체 브랜드 제작을 수락했다. 그렇게 해서 ‘MR. LEE’라면이 노르웨이 시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유럽 사람들의 입맛에 맞춰 스프의 종류를 다양하게 만든 ‘MR. LEE’라면은 곧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다. 라면이라는 새로운 음식이 주는 매력도 컸지만, 무엇보다 이철호 사장이 ‘라면 붐’을 이끈 공신이었다.

“저는 라면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갑니다. 제 시식회가 인기 있는 이유요? 글쎄요…아마 아이들이 좋아하는 편안한 외모 때문이 아닐까요? TV광고에 여러 번 출연했기 때문에 저를 굉장히 친숙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저 역시 아이들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시식회에 아이들이 많이 오면 덩달아 흥이 납니다.”

빳빳하게 다린 요리사 복장을 하고, 요리사협회로부터 받은 ‘최고의 요리사’ 훈장을 달고 직접 라면을 끓여 선보이는 이철호사장. 한국인으로서 노르웨이에 그가 굳힌 입지는 대단하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한국을 ‘MR LEE의 조국’이라고 인식한다. 그만큼 그로 인해 나라 이미지까지 높아진 것이다.

그런 그의 취미이자 보람은, 노르웨이에서 한국과 관련된 일을 하는 것. 6·25 참전용사들을 위한 모임을 만들고 해마다 잔치를 벌이는 것은 물론, 참전 50주년 기념 국립의료원을 설립하는 일까지 도맡고 있다.

이런 성공도 중요하지만 그에게 있어 놓칠 수 없는 가장 큰 보배는 바로 가족이다.

14년 전에 재혼한, 누구보다 그를 가장 잘 이해하고 도와주는 아내 이혜정씨(48)와 엄마가 없던 때 아버지 곁에서 잘 자라준 세 딸들이야말로 그가 노르웨이에서 일궈낸 가장 큰 결실인 것이다.

큰딸 안자씨는 소아과 전문의로, 둘째딸 선자씨는 오슬로 시내에 있는 큰 식당의 요리사로, 그리고 막내 이리나씨는 기자로 활동중인데, 모두 동업자 남편을 두고 있다고 한다.

“방송이 나가고 난 뒤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격려의 인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칭찬과 격려를 곰곰 들여다보면 모두 ‘성공’이란 키워드로 모아지더군요. 하지만 저는 제가 성공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저 꿈이 있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던 것뿐이지요.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고요.”

아직도 ‘노력중’이라는 이철호씨, 그는 분명 성공에 대한 정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오랜만에 찾아온 한국땅에서 새로운 가능성과 도전을 안고 돌아간다는 그의 모습에서 아직도 처음 노르웨이 땅에 발을 딛던 청년의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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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맨손으로 도미해 미국 100대 우량기업인 TYK 그룹 설립하고 성공신화 창조한 김태연 ] *******



여자로 태어난 죄로 받았던 천대,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겪어야 했던 고난이 일궈낸 눈부신 성공!!

라이트 하우스와 모닝 플라넷, 데이터 스토어X, 엔젤힐링등을 거느린 TYK 그룹의 총수 김태연 회장(55)의 성공 신화는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많은 나라에서 감동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국이라는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숱한 고생을 겪으면서 그랜드 마스터로, 실리콘 밸리 신화를 창조한 기업인으로 성공을 거둔 그녀의 영화 같은 인생 스토리를 담았다.

많은 사람들은 김태연 회장을 단순히 성공한 기업인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실리콘 밸리의 작은 거인’, ‘여성 최초의 그랜드 마스터’, ‘미국 100대 우량기업 여성 CEO’, ‘김태연 Can do’.

그녀의 이름 앞에 붙는 수많은 수식어들은 그녀가 미국에서 어떤 존재로 기억되고 있는지를 대변해준다. 반도체 장비회사인 라이트 하우스와 웹사이트 전문회사 모닝 플라넷, 놀스타, 데이터스토어X, 엔젤힐링 등 유망 하이테크 산업의 최고 경영자일 뿐만 아니라 정수원 아카데미를 운영하는 미국 최초의 여성 그랜드마스터로서 젊은이들에게 건강한 신체와 정신을 심어주고 있다.

주변에서 모두들 성공을 인정하고 있는 그녀는 그러나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턱없이 무시당하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

1964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난 그녀는 정월 초하루가 시작되는 밤12시 무렵에 첫 울음을 터뜨려 온 집안 집안 사람들로부터 ‘세상을 흔들 장군감’이란 기대를 심어주었다.

그러나 그런 기대도 잠시였을 뿐 태어난 아이가 사내가 아니라 계집아이라는 사실은 가문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았으며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모진 시련이 시작되었다.

‘집안을 망하게 할 아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늘 싸늘한 시선을 받아야 했으며 특히 아버지의 지독한 냉대는 어린 마음에 지울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 그녀의 유년 시절은 그렇게 눈물이 마를 새 없이 지나갔다.

그녀의 고난은 미국 생활에서도 그칠 줄 몰랐다. 고향에서 제대로 기 한번 못펴고 지내다가 23세 때 가족들과 함께 이민길에 오른 그녀는 유색인종으로서 겪어야 할 갖은 어려움은 다 당했다.

어린 시절 배운 태권도로 도장을 운영을 할 때나 자신의 사업을 꾸려 나갈 때도 혼자 넘어야 할 산들이 수없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스스로를 다잡았다. 할 수 있다는 마음, 반드시 해내고 말 것이라는 신념으로 버텨다.

현재 그녀가 운영하는 라이트 하우스는 연매출이 1천5백억원을 기록하는 우량기업이며 환경, 컴퓨터, 인터넷, 피부미용에 이르기까지 사업을 확장 시켰다.

사업뿐만 아니라 태권도 도장인 정수원 아카데미의 그랜드 마스터로, 또 자신의 이름을 내건 프로그램인 ‘태연 김 쇼’ 진행자 등 미국 내 저명인사들의 반열에 올라있다.
그녀는 분명 성공을 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성공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있다.


POINT 1 He can do, She can do, Why not me?

지난해 초 김 회장은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프로그램에 출연하기 위해 잠시 귀국을 했다.

지난 96년 방문 이후 5년 만에 다시 고국을 찾은 그녀는 이번 방문을 통해 사람들의 뇌리에 자신의 오랜 신념을 깊이 심어주었다.

지금까지 숱한 고생 속에서도 늘 할 수 있다는 자신감, ‘Can Do’를 잊지 않았던 그녀는 프로그램 마지막에 특유의 강한 목소리로 ‘He can do, She can do, Why not me?’(그도 할 수 있고, 그녀도 할 수 있는데 왜 나라고 못하겠느냐?)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그녀의 성공 이야기를 듣기 원하는 수많은 기업체와 학교들로 쇄도하는 요청을 수락, 강연을 위해 잠시 귀국했을 때 인터뷰에 응한 그녀는 그 자리에서도 자신의 성공 포인트는 ‘할 수 있다’는 정신이라고 강조했다.

“사람의 마음가짐이 인생을 결정짓는 중대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안된다고 생각 때문에 조바심을 내고 자학을 하는 것처럼 자신을 망치는 지름길은 없습니다. 그런 마음이 자신의 발전을 방해하는 가장 큰 적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할 수 있는 일을 왜 자신은 못한다고 생각을 합니까? 모든 일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부터 출발을 합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꿈을 가지고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그것이 발로 성공의 출발이 되는 것입니다.”


POINT 2 도전하는 자만이 성공을 만난다

성공을 한 사람의 공통점 중 빼놓을 수 없는 것 한 가지가 바로 도전정신이다. 김 회장 역시 남다른 도전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다.

특히 그녀의 인생을 살펴보면 무엇 하나 쉽게 이루어진 것이 없다. 하지만 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은 그녀로 하여금 세상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자신감으로 도전하는 자세를 갖추게 했다.

그녀가 미국에 갔을 때까지만 해도 그곳에서는 동양인을 찾아볼 수 없었다. 버몬트에 새로운 둥지를 튼 그녀는 자신을 곱지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새로운 터전에 적응을 하기 위해서는 친구가 필요했지만 누구 하나 마음을 터놓고 대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 그들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이 먼저 손을 내밀기로 결심했다.

흰 종이에 큰 글씨로 ‘내 이름은 김태연입니다. 여러분의 친구가 되고 싶다’는 문구를 적어 피켓을 만든 그녀는 그것을 들고 무작정 마을을 돌았다.

하루에 백 군데를 돈다는 목표를 세운 그녀는 집집마다 방문해 초인종을 눌러댔다.

대부분 문도 열어주지 않은 채 창 밖으로 쳐다보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방문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주 가끔씩 문을 열고 악수를 건네거나 집 안으로 들어오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쁨을 느꼈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있듯이 하루도 빠짐없이 자신을 홍보하고 다닌 그녀의 노력은 마침내 마을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그녀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 이웃들도 점점 늘었다. 미국에서의 첫 도전은 성공적인 것이었다.

그녀가 미국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게 된 것도 그녀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도전이었다.

버몬트의 한 고등학교의 교장을 찾아가 무작정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다.

작은 동양여자가 되지도 않는 영어로 아이들을 가르치겠다고 하니 학교 측으로서는 쉽게 믿을 수 없었지만 워낙 당당하고 열정이 느껴져 수업을 허락했다.

그녀가 미국에서 최초의 여성 그랜드 마스터가 되는 첫 출발이었다.
그녀의 끊임없는 도전정신은 결국 사업으로까지 이어져 1985년 오랫동안 머물렀던 버몬트를 떠나 캘리포니아의 산호세에서 새로운 둥지를 마련, ‘라이트 하우스’라는 이름의 회사를 설립하고 컴퓨터 사업을 시작했다.

버몬트에서 태권도를 배우기 위해 찾아 왔다가 양아들이 된 스캇과 마이클, 토머스가 그녀를 도왔다. 실리콘밸리의 신화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POINT 3 포기라는 말을 사전에서 지운다

컴퓨터 사업을 시작하면서 성공에 대한 확신도 있었고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의지로 치밀한 계획도 세웠다.

넉넉하지 않은 자금으로 작은 아파트를 마련하고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개발에 들어갔다. 할 수 있다는 정신으로 열심히만 하면 자리를 잡는 것도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넘치는 의욕과는 달리 현실은 냉혹했다. 집에 마련한 작은 사무실에 컴퓨터 몇 대가 고작인 새로운 업체를 알아주는 곳은 없었다.
게다가 워낙 자금이 부족했기 때문에 돈을 아껴쓰기 위해 늘 수제비와 고구마로 끼니를 이어갔다.

처음 의뢰가 들어온 프로젝트를 위해 매일 밤을 꼬박 새가면서 최선을 다했지만 6개월씩이나 늦게 완성을 하는 등 처음부터 시행착오가 이어졌다.

일이 들어오지 않아서 수제비 만들 밀가루를 살 돈이 없을 때도 있었다. 하루 하루가 버티기 힘들만큼 어려운 적이 많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처음 사업을 시작한지 6개월 만에 사기를 당해 모든 것을 털렸을 때도 꿋꿋하게 버텼던 그녀였기에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라이트 하우스가 미국 내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하게 된 것도 어려움 앞에서 포기하기보다는 할 수 있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그녀의 포기하지 않는 정신은 사업에서뿐만 아니라 태권도장을 설립하고 그랜드 마스터가 되는 과정에서 더 감동적으로 나타난다.

버몬트에서 오래된 창고같은 허름한 건물의 2층을 빌려 도장을 열었을 때 그녀가 겪은 시련은 기억하기 싫을 만큼 끔찍했다.

동양인 여자가 운영하는 체육관이라고 해서 허가를 내는 것부터 애를 먹이더니만 ‘더러운 동양 여자는 나가라’, ‘동양인은 이 땅에서 살 자격이 없다’등 갖가지 욕을 하는가 하면 도장안에 쓰레기를 던지는등 심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저에 대한 그들의 시기와 질투는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을 만큼 심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행동들이 저를 주저앉히지 못했죠.
오히려 제 자신을 더 채찍질했습니다. 그런 모욕을 받을 때마다 반드시 성공을 하리라고 결심을 했으니까요.”

힘들 때마다 샤워실에 들어가 물을 틀어놓고 목놓아 울면서도 그들보다는 강해지고 단단해져 언젠가는 성공하고 말겠다고 스스로를 다졌다는 그녀는 무슨일이 닥쳐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승자의 미소를 갖게 되었다.


POINT 4 진실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한다

현재 그녀는 산호세에서 15만 평의 대지에 ‘스타게이저’라는 대저택에서 살고 있다.

오래 전 자신과 인연이 없는 남자와의 결혼을 접은 그녀는 6명의 아들과 세명의 딸을 입양해 함께 가정을 꾸리고 있다.

이들은 현재 그녀의 사업을 이끌고 있는 주춧돌이기도 하다. 그녀는 현재 자신이 이룬 성공도 자녀들로부터 얻은 ‘어머니’란 이름에 비하면 하찮을 것일 뿐이라는 말을 할 만큼 자녀들에 대한 사랑이 대단하다.

하지만 그들이 처음부터 그녀와 좋은 관계로 만난 것은 아니다. 이들이 지금의 어머니인 김 회장을 만나기 전에는 결손가정의 자녀들이었으며 폭력과 마약, 섹스 등 사회의 어둠속을 떠돌던 그야말로 문제아들이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이런 아이들을 그저 쉽게 판단하고 가까이 하기조차 꺼려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사실 이들이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킨 것은 사실이지만 그 내부에는 나름대로 뛰어난 재능을 안고 있었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그 재능을 높이 샀다. 대부분 자신의 도장을 찾아와 태권도를 배우면서 김 회장과 사제지간으로 만나기 시작한 이들은 그녀가 보여준 따뜻한 정과 인간적인 마음에 이끌려 모자의 인연을 맺었다.

특히 김 회장으로부터 엄격한 훈련을 받은 이들은 과거의 어두웠던 생활은 완전히 잊고 지금은 모두들 김 회장의 그룹에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녀가 지금의 성공을 이루기까지 6남3녀의 역할은 눈부심 자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이들 모두가 과연 외국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지극한 효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어머니의 일이라면 모두들 자다가도 달려나올 정도며 어머니의 말이라면 한치의 어긋남이 없이 지킨다.

김 회장에 대한 태도는 비단 양자가 된 6남3녀뿐만 아니다. 그녀의 기업에서 일하는 직원들 그리고 그녀가 설립한 정수원에서 태권도를 배우고 있는 많은 제자들이 그녀를 대하는 마음은 한결같다.

이는 곧 그녀가 그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거 진실하게 대한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녀는 자신의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원들을 위해 파티를 자주 여는 편인데 언제나 가족을 동반하라고 이른다.
그리고 파티가 열리면 가장 말단 사원들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내고 그들의 능력을 아낌없이 칭찬한다. 가족들 앞에서 회장으로부터 칭찬을 들은 사원이 더욱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POINT 5 내 자신도 ‘상품’임을 잊지 않는다

김 회장을 처음 만나는 사람이면 그녀의 화려한 외모에 먼저 눈이 가게 된다. 스스로 미니스커트를 즐겨 입는다고 밝힐 만큼 그녀의 복장은 눈에 띤다.

화장도 보통 사람들에 비해 짙다. 인터뷰를 위해 김 회장을 만났을 때 그녀는 선명한 빨간색의 투피스를 입고 있었으며 오른쪽 가슴에 하트 모양의 브로치를 달았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복장은 철저하게 상대를 배려한 것이라는 것을 한참동안 대화를 나눈 후에야 알게 되었다.

“레이디경향은 여성 독자들이 많은 잡지죠? 그래서 일부러 빨간색 의상을 선택했어요. 만일 잡지 성격이 달랐으면 제 복장도 달라졌겠죠. 가슴에 단 하트 모양의 브로치는 비록 지면을 통해서지만 제가 독자들과 마음을 터놓고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뜻에서 달았습니다.”

짧은 인터뷰를 위해 세심하게 신경을 쓸 만큼 그녀는 자기 관리에 철저한 사람이었다. 사실 그녀가 화장을 하고 의상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외모를 꾸미는 일에 대해 도통 관심이 없었던 그녀가 자신을 변모시킨 이유는 스스로가 ‘상품’임을 내세우면서부터다.

키 작은 동양 여자에 대해 눈길을 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리기 위한 특별한 방법을 생각하다가 다소 ‘튀는 느낌’을 주기 위해 화장을 시작했고 의상을 준비했다.

요즘에도 그녀는 미팅의 성격에 따라 어울리는 의상을 준비해 하루에도 몇 번이고 갈아입는 성의를 보인다.

그녀가 신경을 쓰는 것은 비단 외모뿐만 아니다. 올해 55세인 김 회장은 그러나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건강하고 활기차다.

한국 태권도연맹이 공식으로 인정한 세계 최초 그랜드마스터인 만큼 여전히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으며 늘 계획적인 생활을 유지한다.

워낙 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한번 시간에 쫓기다 보면 하루 일과 자체가 엉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업과 방송, 강연 등 많은 일을 하면서도 명상과 운동 등 스스로를 단련하는데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 그녀가 여전히 젊게 사는 비결이며 성공의 한 요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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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공하는 사람 곁엔 반드시 귀인이 있다. - 시테크 창안자 윤은기 박사 ] *************



**시테크의 창안자로 널리 알려진 경영컨설턴트 윤은기 박사가 새로운 저서 <귀인(貴人)>을 가지고 우리 앞에 나타났다. 토정비결을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귀인이라는 단어는 디지털 시대의 휴먼 네트워크를 말하고 있다. 윤은기 박사를 만나, 정보화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로서의 귀인 만나는 법, 귀인이 되는 법을 알아본다.**

윤은기 박사를 만나기 위해 여의도 KBS 본관을 향해 가면서 윤은기 박사의 새 저서 <귀인>을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평소 알고 있던 윤은기 박사가 쓸 수 있는 책 제목이 아니라고 생각되면서, 토정비결의 한 대목이 연상되었다. ‘남방에서 온 귀인이 도우리라.’

윤박사를 만난 시간은 저녁 8시가 조금 지난 시간, KBS 1라디오 <생방송 오늘>의 방송을 마치고 난 직후였다.

- 책 제목이 아주 특이합니다. ‘귀인’을 책 제목으로 정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귀인’이 토정비결에 나오는 바로 그 귀인입니까?

‘디지털 시대의 휴먼 릴레이션’, ‘정보화 사회의 인간관계론’이라고 하면 너무 딱딱하고 지적인 냄새가 날 것 같아서 일부러 귀인이라는 말을 쓰게 됐습니다. 귀인이라는 말이 주는 어감도 좋구요. 그래서 책 제목으로 썼는데, 반응이 좋은 것 같습니다. 귀인이란, 말 그대로 귀한 사람입니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 기회를 열어주는 사람, 위험과 위기를 막아주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쓴 것입니다.

1983년부터 지식산업에 뛰어들어서 방송만 10년 정도 하고 있는데, 성공한 사람을 인터뷰해 보면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본인의 노력과 창의력이 있어야 되지만, 거기엔 반드시 다른 사람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이큐가 높고, 일류대학을 나왔다 하더라도, 본인 혼자의 노력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귀인을 만나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겁니다.

- 우리가 너무 앞만 보고 살아오다 보니까 인간관계의 소중함을 망각하고, 지나치게 물질 위주의 삶에 빠져들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정보화 사회로 갈수록 사람이 소중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우리 사회를 유지하는 정신적 지주가 없다는 것도 한 이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 책에서, 귀인 사회를 만들자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귀인 사회는, 사람을 만나면 서로 보탬이 되고, 서로 기회를 만들어주는 사회입니다. 반대로 천인 사회는, 서로 약점을 잡고 발목을 붙잡는 사회입니다. 친구 중에 하나가 권력을 잡았으니까 이번 정권 끝나기 전에 들러붙어서 해 먹어야 되겠다고 한다면 천인 사회입니다.

TV 9시 뉴스를 보면, 우리 사회는 귀인 사회라기보다는 천인 사회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귀인 사회인가 천인 사회인가를 먼저 생각해봐야 합니다. 경기가 바닥을 쳤나, 안 쳤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경제적인 수치만 가지고 선진국이냐 아니냐를 말할 것이 아닙니다. 사회 구성원들이 모여서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서로 신뢰하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가 보탬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상대방 벗겨 먹는 것에만 신경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얘기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무슨 무슨 게이트가 터지면 특정 고등학교 동창회가 박살이 난다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지나치게 학연이나 지연, 혈연에 얽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귀인 사회는 귀인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회이며, 사람을 볼 때 돈으로만 보지 않고 좋은 인간관계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사회입니다.

- 조선시대에는 선비 정신, 양반 정신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또한 서양의 귀족들에게도, 권리가 있으면 책임도 지게 되어 있습니다. 정보화 시대의 올바른 인간관계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요즘은 사회의 위계질서가 깨졌습니다. 대통령에게도 할 말 다하는 실정이고, 자식이 부모의 위상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 사회를 수평적인 사회라고 하고, 여기에 네트워킹 관계가 연결되면 수평적 네트워크 사회라고 합니다. 네트워크에는 컴퓨터 네트워크와 휴먼 네트워크가 있는데, 이 두 가지가 함께 발전해야 합니다.

휴먼 네트워크가 제대로 이루어지면 사람끼리 만나는 것이 재미있고,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그래야 하는데, 우리는 만나는 것이 두렵고, 사기당하지 않을까 미리 걱정해야 합니다. 우리 나라는 디지털 강국이라고 해서 노인정에도 인터넷을 깔아놓을 정도가 됐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나 존경심이 살아 있는 휴먼 네트워크는 제대로 정착시키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선진국이 되려면 컴퓨터 네트워크와 휴먼 네트워크가 함께 발전해야 합니다. <귀인>은 그 중에서 휴먼 네트워크에 대해서 쓴 것입니다.

-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우리는 수많은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귀인을 만나려면 어떤 인연을 소중히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인연, 악연이라는 말을 하는데, 이 ‘연(緣)’이라는 말이 재미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지연·혈연·학연을 중시합니다. 충청도 출신이다, 파평 윤씨다, 고대 나왔다, 이렇게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는 직연(職緣)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은 비교적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매력적인 사람인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가, 나보다 핵심역량이 있는가 하는 것을 보고 사귀다 보면 서로 괜찮은 면을 발견하게 되고, 상승효과가 일어날 수도 있으며, 오래도록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지연·혈연·학연을 뛰어넘어서 사람을 만나야 귀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지연·혈연·학연이 너무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내 주장은, 지연·학연 등을 베이스로 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들이 중심적인 축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직연을 소중히 하자, 더 나아가 국적이 달라도, 믿을 만하고 매력적이면 좋은 인간관계를 가질 수가 있다, 벽을 깨보자 하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 얘기를 듣고 보니까, 어느 특정한 사람이 귀인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늘 마주 대하는 사람이 곧 귀인이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귀인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결국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을 귀인처럼 여기고, 귀인처럼 대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귀인 정신입니다. 토정비결에 ‘동쪽에서 귀인을 만난다’ 하면 동쪽으로 가야 하는데, 그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귀인은 내 주변에 있습니다. 오늘 만난 사람 중에서도 나와 마음이 통하고, 내게 정보를 줄 수 있고, 고민을 풀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바로 귀인입니다. 그러므로 친구가 귀인이 될 수 있고, 부하나 상사, 고객, 그리고 선생님이 귀인이 될 수 있습니다.

- 그렇다면 평상시에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도 변화가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주변에서 귀인을 만나려면 어떤 자세로 사람들을 대해야 하겠습니까?

귀인을 만나려면 귀인으로서의 품성·인간성을 중심으로 봐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 그것보다는 지위나 돈을 가지고 봅니다. 옷을 잘 빼입고 오는 사람, 좋은 차 타고 오는 사람만 대접하는 것은 천인 사회입니다. 귀인이 꼭 지위가 높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에게 공군을 가라고 권유한 친구를 나는 귀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는 대학도 안 간 친구였습니다. 장교를 지원하라면서 원서도 구해줬습니다. 난 공군에 가서 많은 것을 배웠고, 그로 인해 내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귀인은 아주 남루한 옷을 입고 찾아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귀인이 왔더라도 자기가 못 알아보면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장인이 돌아가시기 전에 영등포에서 길을 잃어버렸는데, 가판대에서 장사하는 사람이 데려다 줬습니다. 그 사람이 우리에게는 말할 수 없는 귀인입니다. 재력이나 지위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인간미·휴머니티를 품성으로 갖추지 않고는 귀인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아내도 귀인이고, 부모 자식 또한 귀인입니다. 상대방을 귀인처럼 대하면 그는 나에게 귀인이 되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A라는 사람이 B에게는 귀인이지만 C라는 사람에게는 악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B가 A에게 인격적으로 대해주고 도와주려고 노력하면 A는 B에게 귀인이 되지만, C가 A에게는 왠지 마음에 안 들어서 해꼬지를 한다면 A는 C에게 악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상대방을 귀인으로 인정하고, 귀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은 자기가 해야 합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자기가 만나는 사람들을 귀인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몇 년 전 미국 심리학회에서, 임원으로 승진되거나 연봉을 많이 받는 사람의 특징이 뭔가 하는 것을 조사했는데, 실력 + 알파라는 것입니다. 알파란, 다른 사람에게 호감을 주는 능력, 즉 인간관계를 좋게 하는 능력이었습니다. 아무리 명문대학을 나오고 핵심역량이 있다 하더라도 인간관계가 서투르면 리더가 될 수 없고, 임원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출세하려면 학벌이 좋아야 하고, 시험을 잘 쳐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간관계는 시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 사회를 보면, 생판 모르는 사람 때문에 사고가 터지는 경우는 드물고, 대개 아는 사람 때문에 터집니다. 사람을 사귈 때 귀인 정신으로 사귀는 것이 아니라 이해타산으로 만나다 보니까, 불리하면 터트립니다. ‘나를 건드리면 다 죽는다’, ‘내가 입만 벌리면…’하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이러한 말이 난무하는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닙니다.

귀인 사회는 인간을 존중하는 사회, 휴머니티가 살아 있는 사회입니다. 누구나 잘하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총점이 몇 점인가에 따라 줄 세우기 하는 식은 곤란합니다. 청소년들의 존경심을 조사했는데 존경할 대상이 없다는 보고가 나왔어요. 이것은 엄청난 불행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청소년을 탓할 수도 없습니다. 어른들 하는 것을 가만히 보니 기가 막힌 거죠. 앞으로 귀인 사회를 만드는 시민운동을 하려고 합니다. 인터넷 사이트를 개설하여, 내가 만난 귀인을 공개하고, 인간 사는 맛을 느끼게 하고 싶습니다.

- 그러면 박사님은 그 동안 어떤 귀인을 만나셨습니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게 정신적으로 영향을 주어 내 인생을 바꾼 귀인들이, 생각해보니까 아주 많았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역량 중에서 학력과 지식도 중요하지만, 인격과 인품, 리더십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공군 시절 김동호 장군님, 나를키워주신 어머니, 그리고 교실 분위기를 잡아 나를 대학에 가게 만들어준 고3 담임선생님, 그 동안 모든 일이 잘 풀려가게 도와준 아내 등등, 따져보니까 내 주위에 귀인이 정말 많았습니다.

젊었을 때는 자기 혼자의 능력만 가지고 발버둥을 친 것이었다면, 살아갈수록, 자기 주변의 모든 사람의 도움으로 내가 이렇게 성장하게 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자기 자신부터 귀인이 되어야 귀인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귀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감사하는 마음, 존경하는 마음, 베푸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베풀어야 상대방도 내게 귀인 노릇을 해줍니다. 이 세상에는 거미·개미·꿀벌과 같은 인간이 있습니다. 거미는 거미줄에 걸린 곤충을 뜯어먹고 삽니다. 거미에게 뭐라고 그러면, ‘나는 걸린 놈만 먹지, 그렇지 않은 놈은 안 먹는다. 그러니까 걸린 놈이 잘못이다’ 하고 말할 겁니다. 거미 같은 인간은 남에게 해를 끼치면서 사는 유형입니다. 개미는 자기가 땀흘린 만큼 먹습니다. 개미 같은 인간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지만, 남을 돕지도 않는 유형입니다. 그러나 꿀벌은 자기도 먹고, 남에게도 꿀을 나누어줍니다. 꿀벌 같은 인간은 남을 도우면서 사는 유형이며, 이런 꿀벌 같은 유형의 사람이 많으면 이 사회는 훨씬 좋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21세기에는 ‘소프트’라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소프트라는 말의 뜻은 부드럽다, 관대하다, 무형의 가치 등입니다. 백화점에서 살 수 없는 자산이 소프트 자산입니다. 부부간의 애정, 신뢰, 우정, 가정의 화목, 기분 좋게 부를 수 있는 친구, 이런 소프트 자산은 백화점에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먹고 살기에 급급한 나머지 이와 같은 소프트한 자산을 많이 잃어갔습니다. 식민지 시대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 가난에 쪼들리다 보니까 목구멍이 포도청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한 가난의 고통 때문에 좋은 집에서 먹고 풍족하게 사는 것이 지상과제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강남에서 30~40억 가진 사람이 내게 재테크 상담을 하러 옵니다. 어떻게 하면 50억을 만들 수 있는가를 물어보는데, 난 거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만한 돈이 있으면 다 쓰고 죽지도 못할 텐데 50억을 왜 만들어야 되는지 나는 알 수가 없습니다. 난 그 사람에게 말합니다. 백화점에서 살 수 없는 재산을 만드십시오. 그러려면 돈을 써야 합니다. 하드한 재산과 소프트한 재산의 균형을 맞추려면 돈을 써야 합니다. 삶의 질을 높이려면, 당신의 행복도를 높이려면 반물질적 행동을 해라, 기부금도 내고 어려운 사람들도 도우면서 살아라 하고 말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이 그를 귀인으로 대접해 줍니다. 소프트한 것이야말로 21세기를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9·11 미국 테러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비행기와 같이 죽겠다고 하는 것은 이미 합리성을 뛰어넘은 것입니다. 미국이 테러에 대해서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소프트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이슬람도 살고, 서구도 살고, 지구 전체가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귀인 정신은 아주 중요한 화두라고 생각됩니다. 귀인 정신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얘기해 주십시오.

귀인 정신에는 소프트 파워나 신인본주의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이큐(EQ) 이론도 소프트 파워와 관련이 있습니다. 누구를 화나게 하거나 열받게 하는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닙니다. 차 부딪치면 서로 목소리 높이고 삿대질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보험 들었는데 뭘 걱정합니까. 작년 눈 올 때 누가 뒤를 받아서 보니까 별로 들어간 데가 없어서 괜찮다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KBS 직원이었습니다. 내가 한 번 베풀면 그것이 다 내게 돌아옵니다.

결국 내가 그 사람에게 귀인이 돼야 합니다. 동전의 앞뒷면처럼, 내가 먼저 귀인이 되면 그 사람도 내게 귀인이 됩니다. 내가 먼저 도움을 주고 기회를 주고 베풀면 내가 귀인이 되는 것이고, 그런 사람이 귀인을 만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늘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실제로 전화위복이 됩니다. 우리가 그 동안 압축성장하다 보니까,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 생겼습니다. 이런 것이 법에는 없지만, 일상생활의 큰 행동원리가 되어버렸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론적 원리에는 강한데 실천적 지식이나 창의력이 떨어집니다. 습관을 잘 들여야 귀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삐 소리가 나면 먼저 내리는 것부터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일일선(一日一善) 일일일창(一日一創)이 나의 행동 신조입니다. 좋은 습관을 가지면 귀인이 될 수 있는데, 우리는 한탕주의에 물들어 있습니다. ‘짧고 굵게 살자’ 그러는데, 사람 잡는 소리입니다. ‘배째라’라는 말에는 반성도 없고, 무시무시하기만 합니다. 압축성장을 하면서 생긴 잘못된 문화를 고쳐야 합니다.

- 새해가 밝았습니다. 올해는 선거가 있는 해이기도 합니다. 국내외적으로 많은 변동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는데, 올 한해를 충실히 살기 위해서는 어떤 마인드로 임해야 하겠습니까?

귀인이 2002년의 화두가 될 것입니다. 올해가 선거가 있는 해인데, 선거를 통해서 사회적 귀인을 선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리더는 사회적 귀인입니다. 정치적 지도자나 회사의 CEO 같은 사람은 사회의 귀인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올해의 선거에서 ‘귀인을 뽑자’라고 주장합니다. 사회적 기여도를 생각해서 사람을 뽑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뽑았으면 사회적 역할을 할 수 있게 밀어주자, 밑에서 흔들지 말고 제대로 일할 수 있게 해주자 하는 것입니다. 지도자를 제대로 된 사람을 뽑고, 뽑았으면 임기 중에는 믿고 일할 수 있게 밀어줘야지, 천하 없는 사람이 되더라도 흔들어대는 데는 도리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클린턴이 연임도 하면서 미국 대통령을 잘했다고 하는데, 한국 대통령이 됐다면 못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학연·지연, 이런 걸로 뽑지 말고, 귀인다운 품성을 가진 사람을 뽑은 다음, 그 사람이 귀인 역할을 할 수 있게 밀어주자는 것입니다.

피터 드러커는, 부하관리도 중요하지만 상사관리도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상사는 부하를 인격적으로 잘 대해줘야 하고, 부하는 상사가 잘 나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그리고 주변에서부터 만나는 모든 사람을 귀인으로 만들기 바랍니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올해 최고의 덕담입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보니 귀인은 어느 특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 주변에서 자주 만나는 친구, 직장 동료들이 모두 귀인인 것이다. 귀인을 만나 도움을 받으려면 내가 먼저 귀인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헤어지려고 하는데 어느 중소기업의 사장이 1월 달에 직원들을 위해 ‘귀인이 되는 법, 귀인을 만나는 법’을 강의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사장이 책을 보고 연락해왔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귀인을 만나고 싶은 마음은 나뿐만 아니고 누구나의 바람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었다.



* 윤은기 박사 약력

윤은기 박사는 고려대학교 심리학과와 연세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인하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한국의 대표적인 경영컨설턴트이자 방송인이다.

현재 공군대학 명예교수, 인하대학 겸임교수, 생산성학회 부회장, AIO컴퍼니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KBS 제1라디오 <생방송 오늘>, MBN TV <쉽게 풀어본 우리 경제> 등을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時테크 성공학> <골드칼라가 뛴다> <하트경영> <예술가처럼 벌어서 천사처럼 써라> 등 2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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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대연 KAIST교수 성공 분석 - 웹통합미들웨어 개발 ] *********************



"가난? 면학? 문제 안돼요. 혼을 바치면 성공합니다."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에 대해 ‘비결’이라고 할만한 것 한가지를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집중’하는 것이다.”
'지식의 르네상스인'으로 불리는 피터 드러커의 얘기다.

이 말마따나 한국과학기술원(KAIST) 박대연(朴大演·45)교수는 ‘집중의 화신’이라 함직하다. 명절도 없고 주말도 없다. 그저 연구만 한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하루 한시간씩 테니스를 하는 것도, 몸을 튼튼하게 해서 연구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결혼도 안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세계최초의 웹통합미들웨어 웹인원(WebInOne)과 세계에서 가장 빠른 웹서버 웹투비(WebToB)를 개발했고, 그가 차린 벤처기업 티맥스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미들웨어의 전제품을 보유하고 있다.

1월엔 일본 NTT그룹의 자회사인 NTT컴웨어가 티맥스제품을 일본에 팔겠다며 기술제휴를 맺었고, 여름에 미국 실리콘밸리에 진출할 계획이다.


웹투비로 말하자면 현재 세계시장의 60%를 장악하고 있는 웹서버 아파치보다 서비스 처리속도는 4배 빠르고 이용자수는 10배이상 늘릴 수 있다는 데서 그 ‘파워’를 짐작할 뿐이다. KAIST의 이광형교수는 “미국이 독점하고 있고, 일본도 엄두를 못내고, 다른 나라는 감히 생각도 못하는 기술을 박교수가 개발했다고 보면 된다”고 명쾌하게 정리해주었다.


그는 전남 담양에서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엄청난 부잣집이었지만 삼촌이 벌이던 일이 제대로 안돼 집안이 풍비박산난 후 집안살림은 말이 아니었다.
온식구가 굶어죽을 수 밖에 없어 낳은 지 얼마안된 막내동생을 눈물을 뿌리며 남의 집에 주었을 만큼.

간신히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작은 운수회사에 사환으로 취직했다. 월급 3000원. 사춘기고 뭐고 없었다. 생존이 중요했으므로. 바지런하고 똑똑한 소년 박대연은 그 돈으로 식구들 먹여살리며 광주 동성중 야간부와 광주상고 야간부를 다녔다.

당시 상고생 사이에 최고 인기직장은 은행이었다. 전교 1등을 하면 학교장 추천서를 받아 무시험으로 은행에 취직할 수 있었다.

졸업 6개월을 남기고 5년 간 다니던 사환일을 그만두고 공부만 팠다. 드디어 1등으로 졸업해 들어간 직장이 한일은행(지금의 우리은행)이다.
여기서 번 돈으로 동생들 대학까지 공부시키고 시집장가 다 보냈다.


"동생 장가보내느라고 3000만원 넘게 빚을 지기도 했어요. 한달 이자만 100만원이 넘었죠. 동생들은 아무도 몰라요. 형한테 얘기만 하면 돈이 나오니까 형이 힘든 것도 몰랐다고 해요."


자기 인생도 있는데, 그걸 포기하고 동생들 뒷바라지만 하느라 얼마나 속이 탔느냐고 묻자 그는 아니라고 했다.

"속이 왜 타요? 해보면 알겠지만 남을 돕는다는 게 굉장히 기쁜 일 이예요. 아니 남도 돕는데 왜 동생들한테 못해주겠어요. 오히려 내가 동생들에게 고마워해야지요. 나한테 그만큼 기쁨을 줬으니까."


은행원 생활에서 그는 컴퓨터에 재미를 붙였다. 남들이 프로그램 1개도 못짜는 시간에 그는 30개도 넘게 짤 수 있었다.
남들이 못고치는 컴퓨터 시스템고장도 그는 뚝딱 잘도 고쳤다. 자꾸 칭찬을 받으니까 신도 났다.


온라인 고객이 한꺼번에 몰릴 때 은행 컴퓨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걸 보고 이걸 해결할 수 있는 시스템이 왜 없을까 고민하기도 했다.
그가 98년 세계에서 두번째로 개발한 시스템 소프트웨어 TP모니터가 바로 그 고민의 산물이었다.


사실 유학도 가려해서 간 것이 아니었다. 빚을 더 내서라도 동생들 유학까지 보내고 싶었는데 다들 안가겠다고 했다.
서른이 넘은 나이. 늦었다는 생각은 안했다. 이제라도 공부를 해본다는 즐거움이 얼마나 클 것이냐. 이제 어차피 혼자 몸인데 돈을 벌면 무얼할 것이며, 모은들 무얼하겠느냐 싶어 1300만원을 들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던 그가 가방메고 랄랄라 캠퍼스를 누빌라치면 온 세상이 내 것 같았다.


그런데 가자마자 탈장 진단을 받았다. 몇 달을 참다 방학하자마자 수술을 하기로 하고 날짜를 잡았다. 막상 수술날이 되자 괜찮은 것 같았다. 살았다 싶었는데 섣달 그믐날밤 방안을 데굴데굴 구르다 응급실로 실려갔다.

1월1일 수술을 했다. 내일이 개학. 그는 ‘죽어도 병원탓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피로 물든 붕대를 칭칭 감은 채 이튿날 퇴원해 강의실로 갔다.


“내가 가진 돈이 딱 1년3개월 버틸 수 있는 돈이었거든요. 학부를 1년 3개월 안에 마쳐야 되는데 하루라도 빠질 수는 없었죠. 또 입원비도 없고. 그 일을 겪고 나니까 다음일은 아무것도 아니더라구요. 힘든 일이 하나도 없었어요.”

지도교수도 1년3개월 안에 학부를 마친 전례가 없다며 “당신같이 미친사람은 처음봤다”고 했지만 결국 그는 해냈다. 그것도 ‘ALL A’로. 96년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KAIST교수로 자리를 잡았다.


학교에서 박교수는 ‘맛이 간 교수’로 통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누리는 행복에 그는 관심조차 없다.
아침 5시반에 일어나 6시에 연구실에 출근하고, 하루 세끼를 학교식당에서 2500원짜리 백반으로 해결한다.

일에 방해될까봐 전화도 거의 안받는다. 오후5시부터 한 시간쯤 테니스를 치는 것도 몸을 가뿐하게 해 연구에 몰두하기 위해서다.

밤10시에 교수아파트로 퇴근. 머리 속이 온통 프로그램으로 가득차 있으므로 TV로 머리를 식히다 11시쯤 잠든다.

장남이지만 제사도 동생이 지낸다. 어머니에게 “아들하나는 나라에 바쳤다고 생각하시라”고 일찌감치 말해둔 터다. 연애? 물론 안한다.


"선을 본 적도 있었죠. 그런데 만나고 돌아오면 금방 잊어버려요. 며칠 있다가 여자한테 전화가 오기도 하는데, 그 놈의 전화는 왜 꼭 바쁠 때만 오는지.
조금 있다 내가 전화하겠다고 해놓고 또 깜깜이에요. 그러다보면 끝이지요 뭐.”


결혼, 가족, 아이들, 식도락, 취미생활, 돈 쓰는 재미…. 수 백억 원대의 재산가가 됐으면서 왜 그런 삶의 즐거움을 포기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답답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런 것도 즐겁겠지요. 하지만 나는 지금 이렇게 일하는게 좋아요. 남들은 집에 오면 외롭지 않느냐고 하는데 나는 이해가 안돼요.
뭐가 외로워요. 그냥 자면 되지. 나한테는 이게 즐거움이예요. 왜 욕심이 없느냐고들 하는데, 세계적인 소프트웨어 개발하는 것이 내 욕심이죠. 그게 다 나름대로 사는 방법이지, 남들처럼 안산다고 이상한 건가요?”


그는 성공비결을 ‘혼을 바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인생이 뭐냐, 사람사는 낙이 뭐냐 같은 것은 아예 생각도 않는다.
어차피 결론도 안나는 것. 그때 그때 눈앞에 닥친 일에만 혼신의 힘을 다한다.

어려서는 먹고 살기, 그 다음엔 동생들 뒷바라지하기, 그리고 나선 공부와 연구. 연구재미에 빠져 세계적인 제품을 만들고 나니까 이제는 나라를 위해서라도 더 좋은 제품을 만들어야겠다는 사명감이 생겼다.


KAIST 교수 창업1호로 벤처기업 티맥스를 차리고 이듬해 TP모니터 개발신고식을 했다. 판로를 뚫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빛은행에(현재 우리은행) 들여보내기 위해 그는 납품담당자에게 무릎까지 꿇었다. 은행에 근무할 때 그의 상관이었던 담당자가 “야간상고 나와서 은행다니던 사람이 무슨 수로 엄청난 제품을 개발하겠느냐. 내 앞에 무릎이라도 꿇으면 고려해보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99년 매출 1억원이었던 티맥스는 지난해 53억원, 올해는 500억원 이상을 예상하고 있다.
티맥스 직원들은 “우리 제품 한 카피 팔아서 벌어들이는 외화가 소나타 20만대 팔아서 얻는 수익과 맞먹는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그들이 유일하게 걱정하는 게 있다면 박교수가 혹시나 ‘미인계’에 빠져 딴데 정신을 쏟는 거다. 이 말을 듣던 박교수가 말했다.

“별 걱정을 다 하네. 나는 소프트웨어에 미쳤던 사람이라고 묘비에 기록되면 그걸로 만족할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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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美 사이클선수 랜스 암스트롱의 인생승리 )

불치의 암 극복... "1%의 희망만 주어져도 그것을 향해 달린다"

랜스 암스트롱(Lance Armstrongㆍ29)은 프랑스를 일주하는 유명한 국제 사이클 경기인 '뚜르 드 프랑스'에서 2001년에 이어 2002년에도 우승, 2연패를 거둔 미국 사이클 선수다.

미국 사이클링 매거진은 그의 승리를 "20세기 스포츠 역사상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라고 평했다.
불치의 암을 극복하고 우승하는 감동의 인생 드라마를 연출했기 때문이다.

그는 강인한 정신력과 각고의 노력으로 고환암, 폐암, 뇌암 등으로 이어지는 죽음의 고통을 극복하는 위대함을 보여준 것이다.
최근 국내에도 번역 출간된 그의 저서 '그대 향해 달려가리라'(학원사)의 내용을 요약해서 싣는다.

자전거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릴 때면 대형 트럭이 지나가며 나를 진흙탕 속으로 내동댕이칩니다. 암도 내게 그렇게 찾아왔습니다.

나는 25세에 고환암에 걸렸고 그것 때문에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이후 나는 내가 어떻게 살아있는지 잘 모릅니다.

나는 강인한 체력을 지녔고, 직업상 긴 싸움과 극심한 장애를 헤쳐나가며 고통과 싸우는 법을 배웠습니다.
열심히 연습하는 것도 좋아하고, 열심히 경기하는 것도 좋아합니다. 그게 암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결정적인 요인은 아닙니다.

텍사스주 플레이노 출신인 나는 1996년 사이클 선수로서 고지에 도달했다고 느꼈습니다.
플래시 왈론느대회에서 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우승했고, 또 뚜르 드 뽕에서 우승, 리에지-바스또뉴-리에지에서 2등…. 처음으로 세계 톱 파이브(top 5)에 돌입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고작 25세인 내게 고환암이 찾아왔습니다. 전국적으로 1년에 7000건밖에 생기지 않는 그 병에 걸렸던 것이죠.

두통, 기침을 하면 나오는 피, 목의 통증, 눕기만 하면 곯아떨어지는 등등…. 나는 고통받았습니다.
죽음이 눈앞에 와 있었고 결혼도 물 건너갈 차례였습니다. 더욱 절망스러운 것은 경기를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의 세계, 나의 직업, 나 자신…. 암은 나의 삶과 내가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마저도 빼앗아 갈 것 같았습니다.

내가 암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습니다.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운동선수들은 자신의 두려움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마음이 약해졌습니다.

나의 암은 고환에서 폐까지 전이된 3기에 해당되었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할 수도 있었습니다.
나는 정말이지 훌륭한 아빠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저장해둘 수 있는 나의 정자는 이미 필요한 양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 "정말 훌륭한 아빠가 되고 싶었는데..."

하지만 내 인생의 출발점도 그리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17세에 나를 임신한 채 결혼했고, 내가 두 살 때 이혼했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존재를 모릅니다. 나의 이름은 양아버지 테리 암스트롱에게서 얻은 것입니다.

그는 나를 두들겨 패곤했는데 육체적으로 아픈 것은 잘 몰랐지만 마음만은 아팠습니다.

그러나 운동선수들은 어린 시절에 대해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경기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것을 긍적적인 기회로 삼아라."

내가 좋아하는 어머니의 말씀이었습니다. 나를 끈기 있는 운동선수로 만들어준 것은 당황스러운 상황을 무시해 버리는 능력과 불평하지 않고 고통을 견디어 내는 능력이었습니다. 양아버지 테리 암스트롱의 매조차도.

암 진단을 받은 후 어머니와 나는 마치 사이클 경기를 위해 훈련할 때처럼 열심히 계획을 세워서 실천하면 될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결코 혼자 있지 않도록 '공동체 달력'을 만들었습니다. 나의 항암치료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계속 움직여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했습니다. 산책도 하고 활보도 하면서 매일 아침 사이클을 탔지요.

암에 걸렸는데 왜 사이클을 타냐구요? 아주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정화시켜 주는 힘이 있습니다.

세상 걱정을 다 짊어진 듯한 심정으로 떠나지만 전속력으로 다섯시간 정도 달리고 나면 마음이 평화로워집니다.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내게 힘을 불러일으켜 주는 발전기와도 같았습니다. 학창 시절 비서 일을 하는 어머니는 일을 마치고 나면 나를 헌신적으로 도와주었습니다.

그 덕분에 나는 얼마나 열심히 사이클 연습을 했는지 모릅니다. 교차로에서 차에 받쳐 뇌진탕을 일으킨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3종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하루가 지난 후 병원에서 나왔습니다. 어머니는 그때도 찬성이었습니다. 결과는 3등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내 목표는 이미 세계적인 선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반 2학기였을 때 전미 사이클 연맹에서 주니어 미국 전국 팀과 함게 훈련을 하는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초대를 받았고, 1990년 세계청소년 챔피언십을 위해 모스크바에 가게 되기도 했습니다.

20세에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US 프로 챔피언십에서 나는 우승했습니다.
다음해에 나는 뚜르 드 프랑스의 스테이지에서도 21세로 최연소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꿈 같은 일이었죠.

그리고 노르웨이에서 열린 세계 챔피언십에서도 이겼습니다. 스물한 살 난 선수가 사이클 경기에서 세계적인 타이틀을 얻은 적은 없었습니다.

사이클은 인생에 대한 은유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긴 경기일 뿐 아니라 가장 즐겁고 가슴이 미어지는 체험과 비극이 담겨 있습니다.

추위와 더위 산과 평원 깊게 팬 자동차 바퀴 자국, 사이클 타이어 펑크, 세찬 바람, 극도의 악운,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 하품날 정도의 무감각, 그리고 깊은 자기 성찰….

나는 암을 경기처럼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목적지만이 달라졌을 뿐 사람을 녹초로 만들고 시간에 의존하며 일정 시기마다 얼마나 진전되었는지 알아보고, 숫자와 혈액검사에 매달리는 것 그리고 체크 포인트가 있다는 점이 사이클과 비슷했습니다.

다만 사이클보다 더 집중해야 한다는 것. 조바심을 내도 안되고 한눈을 팔아도 안 된다는 것.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매순간 거기에 집중해야 했습니다. 삶을 되찾는 것이 가장 큰 승리라는 생각을 하면 기운이 났습니다.

의료보험도 되지 않아 나는 이것저것 팔고 검소한 생활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암을 공부하는 학생이 되기 시작했죠.

환자는 그저 의사의 지시만 따르면 되는 것이 아니라 환자 역시 노력하는 것이 의사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암은 뇌에까지 전이돼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살아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머리 속에 불청객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암과의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 "넌 사람을 잘못 골랐어."

나는 고환암에 관한 책을 쓴 아인 혼 박사를 찾아 인디애나대학병원으로 갔습니다.
그 병원에서 니콜스 박사와 샤피로 박사, 그리고 아인 혼 박사의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내 생명이 달린 치료를 담당할 의사와 병원을 찾는 일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뇌 수술까지 받아야 했거든요. 뇌 수술이 있기 전날 밤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일 죽게 된다면, 죽음에 맞서 싸울 것인지 평화롭게 받아들일 것인지.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했습니다. 아쉬운 점은 있지만 나는 본질적으로 선한 사람이다. 그리고 암이 별거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강합니다. 신념은 용감하고 영원한 인간의 특성입니다. 스스로를 믿고, 의사들을 믿고, 치료를 믿고, 내가 믿겠다고 선택한 것을 믿는 것도 중요합니다.

암에 걸리기 전에는 소름끼치는 세상의 부정에 대항하여 어떻게 매일 싸워야 하는지, 서서히 스며드는 냉소주의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두려움은 사람을 서서히 죽게 만들고, 냉소주의 그 자체이며, 영혼의 상실입니다.

6시간 동안 수술대에 누워 있어야 했던 뇌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나이키, 지로, 오클리로, 밀튼-브레들리…. 치료비를 지원해줄 회사도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계약을 끝낼 권리가 있었는데도 계약금을 모두 지불해 주었고, 내가 다시 사이클을 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묻지 않았습니다.


● "내가 죽느냐, 암이 죽느냐"

항암치료는 내가 죽느냐 암이 죽느냐의 문제였습니다. 그것은 특별한 공포였습니다. 탈모, 창백한 안색, 황폐화같은 것들은 암의 증세가 아니라 치료에서 나오는 부작용입니다.

항암치료는 암만 죽이는 게 아니라 건강한 세포도 함께 죽입니다. 외로운 치료입니다. 항암치료는 살아 있는 죽음 같았습니다. 약물은 내 조직을 구석구석 태우고 내 몸에 얼룩까지 남겨 놓았습니다.

그러나 나의 항암치료 결과는 날로 좋아졌습니다. 내가 암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고 사이클 선수의 본능이 다시 생겨났습니다.

나는 암이 뒤쫓아오지 못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사이클을 타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건강한 혈액세포를 파괴해서 헤모글로빈 수치를 끌어내려 산소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천사같은 간호사 라트리스는 내가 다른 환자들과 대화를 나누도록 주선해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순전히 나 자신에 관한 것, 내 치료, 내 투여량, 내 문제점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졌는데 내가 점점 다른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800만명의 미국인들이 온갖 형태의 암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회복기는 훨씬 힘이 들었습니다. 적어도 항암치료를 할 때는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기다리고 있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직도 사이클 선수라고 생각할 때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나의 병상을 지켜 주었던 연인 리사와도 헤어졌고, 진로에 대해서도 고민이었습니다. 대학에서 암 연구를 하거나 경제학 공부를 할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때 매력 있는 여인, 나의 아내 크리스틴이 나타났습니다. 강인하고 독립적이고 민감하고 또 때가 묻지 않은 여자였습니다.
크리스틴은 눈썹도 없고 머리도 박박 민 나를 좋아했습니다. 우리는 함께 유럽으로 가서 투르 드 프랑스를 구경했고 사랑을 고백했죠.

마침내 나는 다시 경기를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1994년 9월 4일 나는 1998년 시즌에 사이클 경기로 복귀하겠다는 선언을 하러 인터팍 엑스포에 갔습니다.

기자회견을 열고 신문기자들과 사이클 전문가들을 방안 가득히 모아놓고 경기 계획을 알려주었지만 아무도 내게 계약을 제안하지 않았습니다.

크리스틴은 나의 청혼을 받았들였습니다. 크리스틴 어머니의 친구가 "어떻게 딸을 암 환자와 결혼시킬 수 있어?" 라고 했다고 합니다.

"나는 그럭저럭 70년 살기보다는 1년이라도 멋지게 살고 싶어요. 인생은 알 수 없는 거잖아요. 아무도 알 수 없어요." 크리스틴의 생각이었죠.

나는 공식적으로 암 생존자가 되었습니다. 의사들은 병이 재발할 확률은 1%도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제부터 어떻게 일상세계로 복귀할 것인가? 그것은 내가 암을 앓고 난 후 직면하게 된 문제였습니다. 마음 속 깊이에서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다시 사이클을 시작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여기저기서 문을 두드려올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18개월만에 내가 참가한 경기는 5일간 스페인 전역을 통과하는 하이킹인 루타 델 솔이었습니다.

14등을 했는데 사람들은 놀랐지만 저는 괴로웠습니다. 2주일 후 힘든 구간 경기인 파리-니스 경기에 참가 19등. 이기는 데 익숙해 있던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나는 아내에게 은퇴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침착했습니다. 직업도 버리고 프랑스에 이사를 오고 모든 것을 희생했는데 거의 하룻밤 사이에 다시 은퇴를 하자는데도 말입니다.

아내 덕분에 은퇴 선언을 미뤘지만 나는 룸펜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즐겁지가 않았습니다. 마음이 가볍지도 않았고 자유롭거나 행복하지도 않았습니다.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나는 나답지 않게 행동하고 있었는데 암을 앓고 나서 생존자들이 느끼는 전형적인 태도였습니다.

신체가 회복되었다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체와 더불어 영혼도 회복되어야 했습니다. 정말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몰랐습니다. 뒹굴뒹굴 지내고 있었지요.

크리스틴과 친구들은 나 없는 데서 어떻게 하면 내가 선수생활을 다시 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대화하며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은퇴를 하겠다는 내 마음도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1998년 5월 크리스틴과 샌터 바바라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나는 완전히 복귀했고 1998년 10월 1일 내가 암선고를 받은 지 거의 2년이 되는 날 부엘타를 완주했습니다.

거기서 4위를 했는데 내가 한 경기 중 가장 중요한 성취였습니다. 그 경기는 너무나 힘들어서 반 이상의 선수들이 포기를 했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23일 동안 2348마일을 달리는 부엘타에서 4위를 한 것은 복귀 그 이상의 것을 의미했습니다.


● 경기 내내 괴롭혔던 마약 구걸수

뚜르 드 프랑스는 이 세상에서 가장 긴 경기입니다. 고속도로 가드레일처럼 길게 이어지고 여름 짚단을 말리는 들판처럼 넓게 펼쳐집니다.
피레네 산맥의 얼음 덮인 봉우리에서 내려다보이는 세 나라의 전경만큼이나 길게 계속됩니다.

이제 나는 옛날처럼 무모하고 불안정한 선수가 아니었습니다. 기술과 방법 면에서 세련되었고 공격적인 면이 줄어들었습니다.
무언가 나를 심리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그리고 정서적으로 밀어대고 있었는데, 다름 아닌 뚜르 드 프랑스였습니다.

나는 거기에 내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쉴 때도 나는 혼자 훈련했습니다. 뚜르 드 프랑스에서 승리하는 것과 체외수정으로 어렵게 얻은 아이를 건강하게 낳는 것, 그 즈음 크리스틴과 나는 이 두 가지 목적만 마음에 품고 살았습니다.

크리스틴은 진지하게 헌신해 주었습니다. 아내가 지루해하거나 불만을 표시했다면 살아가기가 아주 힘들었을 겁니다.

뚜르 드 프랑스에서 내가 우승하리라고 점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내게는 단지 미국의 감동적인 암 생존자라는 각주만 붙어 있었습니다.

르 퓌 뒤 푸에서 열린 시작 경기에서 나는 승리했고 나는 미국 팀을 위해 미국산 사이클을 타고 뚜르 드 프랑스에서 선두로 달리는 최초의 미국 선수가 되었습니다.

"암스트롱에게 무언가 있을 거야." 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프랑스 언론이 마약 의혹을 나타낸 것입니다. 항암치료가 경주하는 데 득이 되었다고 말한 기자가 있었던 것입니다.

암 치료가 경기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1초라도 할 수가 있다니! 암 환자가 받는 치료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르고 하는 소리였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달리고, 약물검사를 하고, 내 결백을 강조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국제사이클연맹은 내 약물 검사가 사실상 깨끗하다고 발표했습니다. 경기조직위원장인 장 마리 르블랑은 "병을 이겨낸 암스트롱이 투어를 달린다는 자체가 상징이다." 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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