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계서 가장 영향력 있는 CEO' 카를로스 곤 닛산 사장 인터뷰 ] *****************



< 아시아 조직문화는 튀는 사람 꺼려 … 리더 크기 힘들어 >

6800억엔 적자(작년)에서 3300억엔 흑자(올해)로!!!
파산 직전의 회사가 1년 만에 창립 후 최고 이익을 낸 우량회사로 변신했다면 ‘기적’ 말고 달리 표현할 말이 있을까?

닛산(日産)자동차의 프랑스 용병 카를로스 곤(47) 사장이 종종 “죽은 사람을 되살린 마술사”로까지 비유되는 까닭이다.

일본에서 영웅 대접을 받는 그는 미국 타임지와 CNN 방송이 선정한 올해의 ‘영향력 있는 최고경영자(CEO) 25인’에서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을 제치고 1위에 올라 세계적 비즈니스 스타임을 인정받았다.

사원 개개인의 재건 의욕을 자극해 활기 넘치는 회사로 바꿔놓은 그의 경영술은, 한 사람의 현명한 리더에 의해 조직의 운명이 송두리째 달라질 수 있음을 증명하는 실례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곤 혁명’의 요체는 낡은 일본형 리더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새 타입의 리더십 혁명이다.

바쁘기로는 일본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는 그가 조선일보와의 단독 회견을 통해 밝힌 재건 드라마를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한다.


* 닛산의 부활을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한다.

- “적절한 표현은 아니다. 닛산이 단기간에 궤도에 오른 것은 전 사원이 의욕을 갖고 재건 계획에 참여해 공헌한 결과이지, 인간 능력을 초월한 기적은 아니다.
성공이 보장됐던 것은 아니나 예상됐던 결과고, 나는 특별히 놀라지 않는다.”


* 2년8개월 전 닛산에 왔을 때의 인상은?

- “한마디로 말하면 ‘혼란’이었다. 사원들은 전략도, 우선순위도, 목표도 없이 그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혼란을 불식시켜 회사가 나갈 방향이 무엇이고, 개개인에게 무엇이 요구되는지를 명확히 해주는 게 우선 급선무였다.”


* 사원들에게 ‘불타는 갑판론’을 내세웠는데.

- “당시 닛산은 침몰하는 배였고, 사원은 불타는 갑판 위에 있었다. 이 경우 살기 위한 선택은 단 하나, 바다에 뛰어드는 것뿐이다.
앞날은 예측 곤란하지만 어쨌든 행동에 나서는 것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런 위기 의식을 사원들로 하여금 갖게 하는 데 힘썼다.”


* 동기부여가 쉽지는 않았을 텐데.

- “물론이다. 하지만 그게 나의 일이고, 리더의 역할이다. 조직 내부에 위기감을 심고 행동에 나서게 하기 위한 동기를 부여해 모든 관계자가 노력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리더다.”


* 당신의 사전엔 리더란 어떻게 정의돼있나?

- “조직이 위기에 직면했을 때, 조직원이 혼란스런 상황을 탈출하기 위해 신뢰하는 존재다.
따라서 리더에 대한 기대감은 위기 국면에서 고조된다. 역경 속에서 리더십도 발전하는 것이다.”


* 당신의 성공은 아웃사이더(외부인)였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지적도 있다.

-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인정과 정실에 구애받지 않아도 되는 아웃사이더인 것은 확실히 과감한 개혁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모든 아웃사이더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비즈니스 세계에서 많은 실패 사례를 보아왔다.”


* 일본인 리더가 못했는데 당신이 가능했던 비결이라면?

- “일본에도 훌륭한 비즈니스 리더는 많다. 다만 문제는 실행력과 결과다.
아무리 좋은 플랜을 짜도, 성과가 예컨대 5년 뒤에나 나온다면 리더가 신뢰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중요한 것은 플랜을 실행하는 단계부터 조기에 성과를 올려, 조직원의 사기를 고취시키는 것이다.”


* 일본의 침체는 흔히 리더십 위기 때문으로 일컬어지는데.

- “일본에선 리더란 타고나는 것이라고 오해하는 것 같다. 나는 리더가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역경 속에서 다양한 과제에 부닥쳐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리더로 성장해 가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선 리더로 클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제공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 일본, 나아가 아시아식 조직문화가 리더를 못 키운다는 뜻인가?

- “일본이나 아시아에선 사람들이 돌출하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 그래선 리더가 육성되기 힘들다.
리더란 혼자 결정을 내리고 책임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문화를 개혁해야 좋은 리더를 육성하는 토대가 마련될 수 있다.”


* 당신의 경영 스타일은 유럽식인가, 미국식인가?

- “내 스타일은 어느 한 모델에 속하지 않는다. 다양한 문화적 어프로치의 복합체라고 할까.
나는 그동안 남미·유럽·미국 등에서 일하는 행운을 누렸고, 각각의 지역에서 강점을 배워 내 경영 스타일에 소화해 넣으려는 노력을 해왔다.
지금 닛산에서도 나는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몇 년 뒤 일본을 떠날 무렵엔 내 스타일이 또다시 달라져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 일본에서 배울 강점이라면?

- “예컨대 회사에 대한 충성심과 헌신적 자세다. 특히 ‘겐바(현장·현장의 일본식 발음)’의 충성심은 일본의 큰 강점이다.
치밀한 작업을 통해 높은 품질을 실현하고, 전문성을 중시한다는 것도 배울 부분이다.”


* 당신은 사람을 중시하는 경영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식 모델도 마찬가지다.

- “나와 일본식이 다른 것은, 나는 사원들에게 진실을 말한다는 점이다. 나도 사람을 소중히 여기지만 사원들에게 듣기 좋은 말만해서 그들이 자만심과 자기만족에 빠지게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일본, 최소한 닛산에서는 경영진·관리자가 사원에게 상처주기 싫어 진실을 말하는 것을 주저하는 경향이 분명히 있다.”


* 당신에게 국적이란 무엇인가?

- “아무 것도 아니다(Nothing at all). 국적보다 중요한 것이 문화다. 일본은 다르지만, 미국도 프랑스도 브라질도 같은 나라 안에서 사람에 따라 문화적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국적과 국경의 중요성은 갈수록 줄어들고 그에 비례해 문화가 중요해질 것이다.”


* 당신은 누구를 위해 그렇게 일벌레처럼 일하나?

- “사장, 특히 위기에 처한 회사의 사장이 되면 사원과 고객과 주주의 기대에 부응해야 된다는 책임이 늘 어깨를 짓누른다.
나는 회사와 내 자신과 가족을 위해 일한다. 단 이것은 월요일 오전 6시부터 금요일 밤까지의 얘기다. 나의 주말은 오직 가족을 위해 존재한다.”


* 카를로스 곤

1999년 봄 닛산의 대주주가 된 프랑스 르노로부터 ‘재생 청부인’의 특명을 띠고 파견돼 왔다.
급진적 구조조정 덕분에 처음엔 ‘도살자’ ‘점령군’ 등의 비난도 받았으나 닛산이 극적인 부활에 성공하면서 일약 영웅이 됐다.
‘오토모티브 뉴스’지가 세계 자동차 메이커의 탁월한 CEO(최고경영자)에게 주는 ‘올해의 경영자상’을 작년과 올해 연속 수상했다.

코스모폴리탄(세계인)을 자처하는 그는 성장 이력부터 복잡하다. 레바논계 이민 3세로 브라질에서 태어나, 레바논에서 자랐고, 프랑스의 명문 국립대학을 나왔다.
영어·프랑스어·이탈리아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하며, 프랑스와 브라질 국적을 갖고 있다.

타이어 메이커 ‘미셸린’에 입사, 브라질과 미국의 현지법인 사장을 지낸 뒤 42세 때 르노에 스카우트됐다.
그는 벨기에 공장폐쇄 등의 구조조정 작업을 성공시키면서 ‘재건 전문가’의 명성을 얻었고, 지금은 르노의 차기 사장 자리에 가장 근접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 쉬지 않고 일한다고 해서 별명이 ‘세븐·일레븐’이다.
그러나 토·일요일은 무조건 부인과 네 자녀를 위해 비워둔다. 올해 봄 일본의 ‘아버지의 날’엔 ‘베스트 파더(best father)’ 상도 받았다.


◇ 곤 사장의 어느 날 일과
6:00 기상. 가족과 아침 식사. 식탁에서 수학 시험과 용돈 문제에 대해 아이들과 대화.
7:40 회사 도착
8:00 미국에 전화
8:30 잡지 인터뷰
9:30 사내 회의
10:30 회의
12:00 임원식당에서 점심 식사(메뉴는 라면)
13:00 회의
15:00 회의
15:30 유럽 지사에 전화
16:00 노조와 협의
18:15 사외 회의
21:00 퇴근
21:30 자택에서 부인과 저녁
23:30 취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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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성에버랜드 허태학 사장 ] ********************************



< 세계 최고 테마파크 꿈꾸는 서비스업계 ‘터줏대감’>

'일거리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워커홀릭' 삼성에버랜드 허태학 사장은 스스로를 이렇게 표현한다.
삼성의 서비스 분야를 개척한 산 증인. 허사장의 텁텁하면서도 속으로는 부드러운 경영세계를 들여다보았다.


허태학 사장은 우리나라에서 몇 안되는 '서비스 전문경영인'이다.
그는 삼성에버랜드의 전신인 중앙개발에 입사한 이래 호텔신라와 중앙개발 등 서비스업체에서만 일해왔다.

친절하기로 소문난 호텔신라와 삼성에버랜드에서 근무해왔기 때문에 허사장이 나긋나긋하고 연약한 인상을 갖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다부진 인상에 눈매가 예리하고 매서운 것이 도전적 성격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드라이브 허.' 이것이 삼성그룹에서 불리는 그의 별명이다.
신규사업만을 전문적으로 추진해온데다 거의 모두 확실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력은 그가 기획력과 추진력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용인자연농원이란 브랜드를 삼성에버랜드로 바꾸고, 중앙개발이란 회사이름도 삼성에버랜드로 개명하고 나서 그가 이룩한 성과는 눈부실 지경이다.

하지만 허사장은 ‘외강내유(外剛內柔)’란 말로 자신의 내면은 매우 나긋하고 연약하다고 소개한다.

비록 외모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우락부락하지만 내면은 서비스업에 오래 종사하면서 많이 순치됐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사실인 듯하다. 삼성에버랜드에서 이룩한 성과 중에는 내면이 부드러운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가 주장하는 경영이념 중 디자인경영과 고객만족경영이 그렇다.

삼성에버랜드의 CEO로서 그가 올린 가장 큰 성과는 외형보다는 내면의 변화다. 그는 친절을 삼성그룹은 물론이고 전국 각지에 퍼뜨린 주인공이다. 서비스아카데미 운영이 바로 그것이다.

“직원을 채용할 때 반드시 제가 면접을 봅니다. 아무리 훈련을 해도 서비스맨이 될 수 없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리고 제가 직접 두 시간 정도 친절에 대한 교육을 시킵니다. 그런 다음에야 서비스아카데미에서 본격적인 교육을 받지요.”


< 친절의 벤치마킹, 전국민의 친절화가 모토 >

삼성에버랜드의 직원이 친절하다는 소문이 퍼지자 삼성그룹 계열사들이 벤치마킹을 하러 왔는데 이것이 1994년 서비스아카데미를 설립하게 된 이유다.

현재까지 서비스아카데미를 거쳐간 인원은 26만 명, 2001년 한 해에만 8만5000명이 교육을 받았다.
경찰청은 물론 국세청, 철도청, 은행, 언론사 간부들도 찾아왔다. 최근에는 병원이나 지방자치단체에서 많이 입교하는데 예약하고 2개월 간 기다려야 할 정도라고 한다.

서비스아카데미는 친절교육에 관한 한 어느 교육기관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독보적인 존재다.
하지만 전국민을 매너와 에티켓을 갖춘 사람으로 만드는 게 목표라는 허사장은 서비스아카데미를 독점적인 교육기관으로 만들 생각은 없다.

그래서 그는 다른 회사에서 이런 교육기관을 만드는 것을 장려하고 있으며 그 교육기관의 선생들을 연수시켜주기도 한다.
철도청을 비롯 한국야쿠르트, 교보생명, 삼성생명 등이 서비스아카데미를 만든 회사들.

“저희 나이 또래는 할아버지에게 예절을 배웠지요. 하지만 요즘은 입시지옥이다 뭐다 해서 가정교육이 잘 안되는 것 같아요.
그러니 어쩝니까. 사회에서 가르쳐야 하는데, 바로 기업이 나서야지요. 우리는 상대가 인사 안하면 먼저 안합니다. 아파트의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서로 돌아서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선진외국에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먼저 인사해야 한다는 문화가 없어요. 먼저 보는 사람이 합니다. 아이터치만 되면 인사합니다. OECD 가입하면 뭐합니까. 하는 짓들이 컨트리보이 스타일인데….”

그는 월드컵이 열리는 2002년까지 우리가 일본경제를 따라잡을 수 없을 바엔 의식과 관행만이라도 일본을 누르자고 강조한다. 그는 이를 위해 월드컵문화시민위원회와 연계해서 범국민적인 계몽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그가 호텔신라에서의 24년 근무를 마치고 삼성에버랜드에 온 것은 1993년 9월. 두 달간 개발사업부 본부장으로 일하다 11월 대표이사 전무가 됐다.

“처음에 와서 보니까 참 촌스럽더라고요. 그래서 전직원을 모아놓고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1차 산업에서 3차 산업형으로, 자기 중심적에서 고객 중심적으로, 지역형 지방형에서 국가형 국제형으로, 내국인 중심에서 내외국인 중심으로 바꾸겠다, 이를 위해 친절·청결·고급·정보·종업원 만족을 실시하겠다고요.”


< 사명 바꾸고 ‘三間주의’ 선언 >

자연농원이란 브랜드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팜랜드’라는 ‘지역적’인 이름으로는 외국인 유치가 어렵다고 판단한 것.

외국인 관광객이 오지 않으면 그가 추구하는 월드클래스의 테마파크는 물 건너 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삼성에버랜드라는 회사도 한계에 부딪칠 것이 뻔했다.

“자연농원은 선대회장(이병철 삼성창업자)께서 국토의 70%가 산지이므로 과수와 가축의 시험장으로 쓰려고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용인은 물이 별로 없어서 과일이 안됩니다. ‘살아서 진천, 죽어서 용인’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관이 썩지 않는다고 해 묘자리로 좋다고 해요. 그럼 축산이라도 해야 하는데 지역 농민들이 들고일어나서 땅을 전부 나눠줬습니다.”

그는 이건희 회장에게 이름을 바꿔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당시는 이회장이 신경영을 기치로 내걸고 ‘마누라와 자식을 빼고는 다 바꾸자’고 할 때였다.

허사장은 이왕 바꿀 바에야 최고로 하자며 월트디즈니를 비롯, 아이비엠, 코카콜라 등 세계적인 기업의 CI를 작업한 미국의 랜도(Landor)사에 의뢰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에버’와 ‘랜드’의 합성어인 에버랜드다.

“에버는 시간(時間)이고 랜드는 공간(空間)이죠. 그래서 인간(人間)을 포함해서 3간(三間)주의를 경영이념으로 정했습니다.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시간과 공간의 무한한 가치를 창조해 나가자는 취지였습니다.”

골프장 브랜드도 그때 다 바꿨다. 안양골프장을 안양베네스트로 바꾸면서 다른 골프장에도 다 베네스트란 이름을 붙였다.
베네스트란 ‘베스트’와 ‘네스트’의 합성어로 최고의 보금자리란 뜻이다.

그 다음에 한 것이 인프라구축을 위한 투자다. 허사장은 삼성에버랜드 진입로를 2차선에서 4차선으로 늘렸다.
5000대밖에 수용하지 못하던 주차장을 1만6000대 수준으로 확장했다. 여름상품이 전혀 없어 여름이 극비수기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물을 소재로 한 상품을 개발했다.

그것이 바로 유명한 ‘캐러비안 베이’라는 워터파크. 연기자도 내국인 일색에서 벗어나 외국인들을 상당수 채용했다.
총 6000억원을 투자해 삼성에버랜드를 사계절 놀이시설로 탈바꿈시킴으로써 명실상부한 월드클래스 테마파크로 격상시킨 것이다.

“당시에는 일년에 겨우 400만 명이 입장했어요. 2001년엔 915만 명이 다녀갔어요. 외국인도 50만 명이나 옵니다. 처음에는 외국인이 거의 오지 않았지요.”


< "로컬 레벨은 성에 안찬다." >

제주도라는 지역 특성상 성수기와 비수기의 매출 차이가 커 인사시스템을 새롭게 한 것도 허태학 사장의 경영능력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는 주중과 주말에 따라 고객의 수에 차이가 큰 것을 감안, 인력을 탄력적으로 운용하기 위해 정규직을 가급적 줄이고 비정규직을 여유있게 확보하는 전략을 세웠다. 조직도 호텔업에 맞게 ‘콤팩트’하게 운영했다.

“호텔은 대개 상무이사가 총지배인을 맡는데, 그 밑에 이사 둘, 이사 밑에 부장 3∼4명을 둡니다.
관리부장이 이런 형식적인 조직도를 갖고 왔지만 위인설관(爲人設官)형으로는 조직안정이 어렵다고 판단돼 임원 둘을 빼고 8개 부서를 3개 부서로 통합했습니다.
440명을 300명 이하로 줄이고 나머지는 아웃소싱을 했지요. 거기서 절감되는 비용으로 직원들 복리 후생비를 늘렸더니 반응이 좋았어요.”

허사장은 신규사업 추진이 성취감도 크고 일하는 재미도 있지만 어렵고 스트레스도 많이 쌓인다고 털어놓는다.

신규사업팀을 구성하면 타부서에서 사람을 데려와야 하는데 1급 인력은 주지 않고 2급이나 3급 사원을 보낸다는 것.
이런 인력을 정예요원으로 만드는 용해과정이 가장 어려웠다는 그는 목욕탕 스킨십으로 조직의 단결을 이끌어왔다고 설명한다.

“팀 파워를 형성하는 것이 급선무니까요. 한 달에 한 번 일요일에 함께 등산을 했습니다.
땀 흘린 뒤에 공중목욕탕에서 함께 벌거벗고 목욕하면 아주 친해집니다. 그리고 소주 한잔 마시며 이 프로젝트를 성공하지 못하면 조직에 짐이 되고 누가 된다, 바보같은 조직원이 되지 말자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는 삼성에버랜드에 온 이후 해마다 신년 해맞이를 간부들과 함께 관악산에서 한다.
등산 후 목욕하고 술을 마시며 단합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예전이나 똑같다.

그와 일하는 직원들은 ‘드라이브 허’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항상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추진하기 때문에 일이 힘들다고 털어놓는다.

하지만 일 이외의 문제에는 간섭하지 않고 인간적인 정도 많아 인기는 좋은 편이라고 한다.
직원들과 이메일 커뮤니케이션을 즐기고 서류결재를 없앨 정도로 생각이 깨어있는 경영인인 그는 오고가는 시간을 단축해서 그 시간을 고객 만족에 할애하는 철저한 서비스맨이다.

허사장은 5년 후배와 뜻이 잘 맞아 옮겨다닐 때마다 그를 중용했다고 한다. 허사장이 매번 신규프로젝트를 추진했으니 그 후배의 일 부담이 얼마나 컸을지는 짐작이 간다.

삼성에버랜드에 와서도 그 후배와 함께 많은 일을 추진했는데, 후배가 몇 년 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한 직원의 회고.

“장례식장에서 선 채로 한 30분을 엉엉 소리내 흐느껴 울어 보는 직원들까지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중에 사장님한테 들은 얘긴데 그 후배를 고생만 시킨 것 같아 가장 마음에 걸렸다고 하시더군요.”

그는 일 하지 않고 성과창출이 없는 직원은 솎아내야 한다는 철칙을 갖고 있다. 아무리 서비스업종이라도 선택과 집중으로 수익을 창출하지 못하면 CEO로서의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로컬레벨을 가장 싫어한다는 그는 60억 세계 인구의 공감대와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창조는 도전정신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스스로 워커홀릭을 자처하며 끊임없이 도전할 수 있는 일거리를 찾고 있다.


< 세계적 서비스전문 CEO가 꿈 >

1998년 지식경영을 도입한 허사장은 전직원의 지식인화에 성공, 2년 연속 지식경영상을 받았고, 지난해는 6시그마경영을 도입했다.

세계적으로 서비스기업이 6시그마경영을 도입한 예가 없다고 하는데, 이의 결과로 재무성과가 좋아져 지난해 15억원, 2001년 상반기 45억원, 하반기 90억원의 비용절감을 기록했다고 한다.

‘물은 고이면 반드시 썩는다’고 확신하는 허사장은 현재까지 68회의 해외출장을 다니며 한번도 자신만의 시간을 가져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최고의 리조트와 테마파크, 휴양지를 다니며 벤치마킹하는 것이 그의 주요 일과.
그는 다녀본 곳 중에서 엄청난 자본을 투자한 플로리다의 월트디즈니를 최고의 리조트로 꼽는다.

샌프란시스코 부근의 페블비치와 하와이의 나나이 아일랜드에서도 감명을 받았다. 또 골프장은 역시 스코틀랜드가 최고라고 소개한다.

그에게 당장 닥친 일은 삼성에버랜드를 체재형 테마파크로 만드는 것. 1박2일과 2박3일의 상품을 개발하기 위해 콘도와 호텔을 설계중이다.
내년에 착공 예정인데, 이 또한 최고의 시설로 만들겠다고 다짐한다.

삼성에버랜드의 CEO로서 8년째 장수하고 있는 그는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다고 말한다.

“서비스맨으로 일관해 지겨울 때도 됐지 않았냐”는 질문에 “이제 와서 방향 선회하는 것이 어려울 것 같다”며 “한국의 CEO로서 서비스 부문에도 특성화·전문화된 월드클래스급이 한 명 정도는 있어야 되지 않겠냐”고 반문한다.

그는 2001년 9월 세계관광의 날 기념식에서 서비스 향상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

하지만 그는 진정한 상은 60억 인구 모두가 삼성에버랜드, 나아가 한국의 서비스를 인정해줄 때 받을 수 있다고 수상의 기쁨을 유보했다.

허태학 사장이 전파하는 서비스 정신이란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습관화하고 인격화하는 것.
그의 서비스 정신이 이대로 계속 퍼져나간다면 한국이 문화선진국으로 우뚝설 날도 멀지 않을 것이다.


▶ 30문 30답
1. 경영철학 경쟁력 있는 기업, 고객만족, 고객 삶의 질 향상
2. 21세기 기업비전 월드클래스 종합 서비스 전문 기업
3. 비전 실현을 위해 우선 해야 할 일 호텔, 콘도 등 체재형 숙박시설 대폭 확충
4. 평소 직원들에게 강조하는 말 관심 배려, 칭찬 격려의 Win-Win 문화
5. 최근에 읽은 책 잭 웰치의 ‘끝없는 도전과 용기’
6. 최고 경영자의 조건 선견지명과 리더십
7. 인생의 전환점이 됐던 일 신규 프로젝트를 맡았을 때 (제주신라, 에버랜드)
8. 존경하는 인물 잭 웰치
9. 자신의 장점 해내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와 실천력
10. 자신의 단점 일 중독증
11. 하루 평균 근무시간 / 평소 출퇴근 시간 아침부터 저녁 7시까지 약 12시간
12. 해외출장 빈도 / 1년 평균 출장일 연간 4∼5회 정도, 40일 가량
13. 하루 평균 수면시간 4∼5시간
14. 연봉 삼성그룹 CEO 수준
15. 자기 계발을 위해 현재 하는 일, 계획 독서, 벤치마킹
16. 기업활동 이외의 사회활동 한국능률협회 CS위원회 위원장, 한국고객만족경영학회 부회장, 대한골프협회 상임이사
17. 최미 골프, 독서
18. 나름의 건강비법 긍정적으로 사고하고 즐겁게 일하며 규칙적인 생활
19. 즐기는 음식 생선회
20. 주량/흡연량 소주 1병 정도/담배 안함
21. 가장 최근의 문화활동 클래식 음악회 관람
22. 요즘 자주 찾는 인터넷 사이트 www.sericeo.org / www.csjournal.or.kr
23. 전자메일 주소 thher@samsung.co.kr
24. 가족관계 부인, 1남 1녀
25. 일주일 평균 자녀와 함께하는 시간 / 자녀와 함께 무엇을 하는가 결혼후 분가(아들), 유학중(딸)
26. 10년 뒤 자신의 모습을 그려본다면 여행을 하면서 작품을 쓰고 있을 것 같다.
27. 다시 태어나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 성직자, 작가
28. 한국사회의 장래에 대한 견해 잠재력이 있어 발전 가능성 기대
29. 장래에 대한 그와 같은 견해의 근거 5000년 유구한 문화 보유, 우수 인재 배출
30. 한국사회가 시급히 고쳐야 할 점 기본 지키기(친절, 청결, 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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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세기 최고의 경영자 잭 웰치 ] ******************************



♤♤♤ 실현되기에 너무 큰 꿈은 없다. ♤♤♤


** GE에서 20년간의 오랜 경영 일정을 마침내 끝마친 잭 웰치. 재임 기간 내내 그의 경영방식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는데, 결과는 매우 긍정적으로 드러났다.

그는 GE에 열정을 불어넣었고, 커뮤니케이션을 가로막았던 보이지 않는 벽을 타파했으며, 철저히 능력에 따른 승진 문화를 심었고, 불량률을 극한으로 줄이는 6시그마 경영을 펼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은 GE를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거듭나게 했다. **

1961년 잭 웰치는 회사를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다. GE에 입사한 지 1년이 갓 지났을 때였다. 관료주의가 팽배해 있고, 능력에 따른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회사에 더 이상 다닐 수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미 더 좋은 일자리에 대한 제안을 받아둔 터였다. 그런데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루벤 구토프 이사가 그를 만류했다.

사실 그는 1년 차 신입사원치고는 남다른 행동을 보여주고 있었다. 세계 유수 경쟁회사 제품에 대항할 만한 새로운 플라스틱의 물리적 분석 결과와 전체 원가를 제시했던 것이다.
대단한 건 아니었지만, 신입사원이 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선 것이었다.

루벤 구토프 이사는 높은 급여를 약속했고, 웰치는 회사에 남았다. 그 때 그가 떠났다면 오늘날의 GE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웰치는 입사한 지 8년 만에 최연소(32세)로 연매출 2600만 달러의 플라스틱 사업본부장으로 승진했고, 점차 GE 전체의 경영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37세에 임원으로 승진했을 때 제출한 업적평가 고서에는, 자신의 궁극적인 목표가 CEO가 되는 것이라고 적어놓았다.

이러한 열망은 그를 세 명의 CEO 후보 중 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당시 CEO였던 레그 존스는 후보들에게 각각 그 유명한 ‘비행기 면접’을 실시했다.

비행기 사고를 설정하여 답변을 요구하는 면접이었다. 이 면접의 마지막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잭, 자네와 내가 비행기를 타고 가다 추락했다네. 나는 죽었지만 자네는 살았네. 이제 누가 제너럴 일렉트릭의 회장이 되어야겠나?”

“바로 접니다.”

1981년 4월 잭 웰치는 GE 전체를 통솔하는 위치에 올랐고, 20여 년의 기나긴 경영 여정이 시작됐다.


♤♤♤ “나는 인재를 발견하는 데 대부분의 힘을 쏟았다” ♤♤♤

잭 웰치는 20년간 GE라는 배를 이끌고 항해하면서, 완벽한 혁신을 통해 놀라운 성과를 만들어냈다.

매출은 1981년 270억 달러에서 2000년 1290억 달러로, 순이익은 15억 달러에서 127억 달러로 증가했고, 자본수익률은 미국 평균인12%를 훨씬 초과한 20% 수준을 기록했다.
GE를 시장가치 5300억 달러의 기업으로 만들었고, 자신의 연봉 역시 9400만 달러로 업계 최고 수준을 유지했다.

미국 <포춘> 지와 <파이낸셜 타임스>는 3년 연속 GE를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으로 선정했다.

2000년 일본계 컨설팅회사 AT커니가 아시아의 100대 기업을 대상으로 가장 존경하는 기업인을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약 60%가 GE의 웰치 회장을 꼽았다.

GE의 키를 잡게 됐을 때, 웰치는 겉보기와는 달리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외향적이고 활달해야 하는 CEO의 자질이 많이 부족하다고 스스로 느꼈다. 하지만 그는 GE가 어떤 회사가 되어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GE는 생산성 있는 역동적인 조직으로 거듭나야 했다. GE 재임기간 동안 그는 딱딱한 관료주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던 GE의 허물을 벗겨내느라 고군분투했다.

회장 취임 직후 관료제의 온상인 본사 스탭 조직의 혁신에 들어갔다.

그는 GE가 너무 많은 스웨터를 껴입고 있다는 판단 아래, 400명에 달했던 본사 전략팀을 해체하고 그 기능을 각사에 이관했다.

또한 회장과 사업부 사이에 존재하던 그룹 임원(6인), 섹터 임원(6인), 부사장(2인)의 3개 계층을 자연퇴직·이직 등을 통해 4년 만에 정리했다.

잭 웰치의 경영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무엇보다 인재에 대한 경영이다.

그는 ‘중성자탄 잭’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사람을 갈아치웠다. 이 별명은 1982년 <뉴스위크> 지가, 건물들은 멀쩡한데 사람들만 조용히 죽어간다는 의미로 붙인 별명이다.

<포춘> 지는 1984년에 ‘미국에서 가장 무자비한 경영자 10명’ 중 1위에 잭 웰치를 선정했다.

대규모 감원을 서슴지 않았던 그는 오로지 기업의 이익만 탐욕스럽게 추구했던 사람으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그는 ‘기업은 곧 사람’이라는 공식을 가슴 깊이 갖고 었다.

“GE는 벽돌과 건물들의 단순한 집합체가 아니다. GE를 존재하게 하는 것은 바로 살아 있는 사람들이다. 기업은 인간이다.
슬로건이나 연설만으로는 아무 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 그것은 변화가 필요한 곳에 적당한 인물을 배치함으로써 가능하다.
그것은 전략을 개발하는 일보다 훨씬 중요하다. 우리는 초음파 기기를 위한 멋진 계획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실현할 만한 완벽한 인물을 찾을 때까지는 단지 하나의 헛된 꿈에 불과했다.”

그는 단순히 실수를 저질렀다고 해서 직원을 내보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처벌은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환경친화적인 전구를 개발하는 5000만 달러 규모의 프로젝트가 실패했을 때, 그는 관련자들을 문책하지 않고 오히려 포상과 승진을 내렸다.

그는 회사 내의 사람들이, 큰 도전 끝의 실패가 용납될 수 있다는 것을 알기를 바랐다.

그는 누군가 좌절하고 있을 때 그를 더욱 꾸짖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뛰어난 인재가 자신이 저지른 실수 때문에 스스로를 갉아먹지 않도록 도와줘야 한다는 것이다.

GE 전략기획 총책임자로 승진하여 다양한 사업부들을 감독하게 되자,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성공이 고용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임을 절실히 깨달았다.

직위가 높아지면서 통제 범위는 넓어졌고, 더 이상 모든 세부 사항을 혼자 통제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능력 있는 사람을 발굴하는 일에 더욱 집착했다. 실력이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은 현장에서 바로 승진시켰다.

그는 겨우 시장개발 담당 관리자였던 존 오피를 전국판매 담당 관리자로 승진시키면서, 그 후로 이어지는 수많은 ‘현장 승진’에 발동을 걸었다.
그것은 분명 일반적인 관례를 아주 많이 벗어난 것이었고, 팀에 큰 충격을 주었다.

또 부동산 부문의 총책임자에 지나지 않았던 데니스 대머먼을 GE 전체의 재무를 담당하는 CFO로 승진시키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 회사 전체를 충격에 휩싸이게 할 정도로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공식적인 인사관리 과정도 있었지만, 식당이나 복도 그리고 모든 사업상의 회의를 통해, 격식을 갖추지 않은 비공식적이고 개인적인 인사관리 및 평가가 이루어졌다.

사업부에서 뛰어난 인재를 발견하면, 웰치는 그들에게 줄 새로운 기회에 대해 생각하느라 몹시 흥분하곤 했다.

“언제 어디서 능력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될지 알 수 없다. 따라서 나는 항상 모든 사람과의 만남이 하나의 인터뷰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 최선을 다했지만, 능력 있는 사람을 GE의 핵심 역량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은 그 어떤 문제에 기울였던 노력보다 컸다.”


♤♤♤ “직원을 해고하는 일은 내가 했던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

1등이나 2등이 될 수 있는 사업이 아니면 포기한다는 원칙을 통해 웰치는 GE를 무너지지 않는 반석 위에 올려놓으려 했다.
재임 기간 내내 그는 ‘고쳐라, 매각하라, 아니면 폐쇄하라’라는 구호를 외쳤다.

웰치는 과거에 GE를 상징했던 냉난방기·소형가전·TV·오디오· 반도체 등의 사업부를 매각 대상 사업부로 지정했다.
물론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비껴갈 수 없는 장애였다. 처음 2년 동안 웰치는 71개 사업부 및 제품라인을 매각하고, 118건의 합병, 합작투자, 소수 지분 참여를 했다.

취임 후 웰치는 15년간 400여 개의 사업 또는 생산라인을 처분하고, 전체 직원의 1/4인 11만2000명을 해고했다.

선두가 될 수 없는 사업을 매각하는 것은, 그 사업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평생고용은 직원들을 진정으로 위하는 것이 아니라고 웰치는 생각했다.

“고용 안정을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조직은 죽음의 문턱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기업이 직원의 일자리를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 고객을 만족시킨 결과로 일자리가 보장되는 것이다.
고통 분담 차원에서 전체적으로 급여를 삭감하는 것은 경영이라고도, 리더십이라고도 볼 수 없다. 그건 조직 내 인재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지름길이다.”

‘회사 전체를 위해서’라는 대의명분이 분명히 있었지만, 직원들을 해고하는 데 있어서 웰치는 많은 고심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람을 해고하는 일은 이제껏 해왔던 일 중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그 일은 한 번도 쉬운 적이 없었고, 절대 수월해지지도 않았다.
해고의 충격을 줄일 수 있는 충분한 자금이 있는 회사에서 일했다는 것은 내 일생에 걸쳐 큰 행운이었다.

사람들을 해고하는 것은 리더들이 가장 하기 어려운 결정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 일을 즐기는’ 사람이 리더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도 리더가 될 수 없다.”


♤♤♤ “CEO는 최고의 직업이다.” ♤♤♤

웰치는 CEO가 정말 골치 아픈 직업이라고 했다. 최고의 자리이면서 화끈하기도 하고, 많은 친구들을 만들어주지만, 반면 한밤중까지 회의가 진행되며, 위기와 압력, 패배의 쓰라림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CEO보다 더 좋은 직업은 없다고 생각했다. 일하는 재미가 그 이상 없다는 것이다.
그는 CEO로서의 특권 중, 회사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깊이 관여할 수 있다는 점을 마음에 들어 했다.

GE의 CT스캐너 사업은 그가 깊이 관여한 좋은 사례를 보여준다. GE의 CT스캐너는 우수하다고 인정을 받고 있었지만, 그 안에 들어가는 튜브에 문제가 있었다.

그 튜브는 평균 2만5000번 정도의 스캔을 할 수 있었는데, 이는 경쟁사 제품의 절반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문제를 포착한 웰치는 현장으로 달려가, 그 일을 해결할 사람을 물색했다. 그는 곧 서비스 분야에 근무하던 마르크 오네토를 찾아 그 일을 맡기고 지원을 약속했다.

또 그가 여러 인재들을 고용할 수 있도록 도왔다. 또 당시 새로 뽑은 직원이 이직하려 하자 적극적으로 나서서, 흔들리는 것을 막기도 했다.

그리고 4년 동안 연구에 대한 보고를 받았고, 마침내 20만 번을 스캔할 수 있는 튜브가 만들어지는 것을 보았다.

한 번 맡은 일은 집요하게 끝을 보는 웰치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일이다. 그는 어떤 일에 깊이 관여할 때, 실무 담당자보다 더 큰 흥분과 긴장을 느꼈고 즐겼다.

재임기간 동안 그는 GE를 거듭나게 하는 작업에 분주했는데, 그가 이룬 두드러진 성과 중에서도 ‘6시그마 운동’과 ‘벽 없는 조직’에 대한 성과는 정말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전체 조직에 관계된 이 일을 성공시키기 위해 그는 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6시그마 운동은 쉽게 말해 불량률을 0.00034% 밑으로 떨어뜨리는 것을 의미했다. 일단 일에 착수한 웰치는 모든 사업부문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에게, 현재의 일을 중지하고 6시그마 혁신을 이끌도록 했다.

급여 수준의 40%는 6시그마 운동 결과에 따라 결정되었다.

1998년까지 6시그마 프로젝트를 통해, 투자비용을 모두 상쇄하고도 7억5000만 달러의 이익을 남겼으며, 1999년에는 15억 달러의 이익을 얻었던 것이다.

‘벽 없는 조직’은 정보의 원활한 흐름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각각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서로 지식을 공유할 수 있다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벽 없는 조직에 대한 가치를 공유하지 못한 사람은 회사를 떠나야 했다.

그는 벽 없는 문화와 학습정신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인재개발 회사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벽 없는 조직은 GE의 관료주의를 타파하고자 했던 그의 강한 바람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웰치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순간적으로 스치는 생각을 메모하는 습관 때문에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곤 했다.

아내 제인과 휴가를 갔을 때, 그는 벽 없는 조직에 대해 생각해냈으며,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다가 갑자기 냅킨에 ‘고치거나 매각하거나 폐쇄하라’라는 아이디어를 메모하기도 했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그의 머리에 강박관념처럼 자리잡아 강력한 행동을 이끌어냈다.


♤♤♤ “승자들의 자산은 정열이다.” ♤♤♤

웰치는 직원들에게 항상 자신감을 심어주려고 노력했다. 그는 자신이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가장 큰 선물이 ‘자신감’이라고 했다.

어렸을 때 웰치는 말을 더듬곤 해서 낭패를 당하는 일이 많았다. 그에 대해 어머니는 “그건 혀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네가 똑똑하기 때문”이라고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잭은 어렸을 때 운동선수 친구들과 함께 찍은 어린 시절의 사진을 보면서, 그 중에 자신의 키가 제일 작고 나이도 어렸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다.

당시 그는 어머니가 심어준 자신감이 너무 강해서, 열등감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요소들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수많은 인수합병 과정에서 실패한 경우도 있었다. 그 중에 아내 캐롤린과의 합병도 실패 사례 중 하나다.

업무 중독으로 가정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캐롤린과 헤어진 후, 그는 51세의 나이로 17세 연하인 변호사 제인 비슬리와 결혼해서 살고 있다.

웰치는 평생을 골프와 함께 했다. 골프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고, 사업과 연결했다.
그는 골프가 인간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완벽해질 수 있다고 부추기는 게임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의 삶 자체가 끝없이 완벽을 추구하는 삶 그 자체였다. 그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실행했다.
때로는 실패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의 정열이 타오르는 것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그는 어떤 사람이 정말 인재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열정’을 들었다. 일에 대해 파고드는 열정이 그 사람을 전진하게 한다는 것이다.

“모든 승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성을 꼽는다면, 그것은 바로 열정일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승리한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의 차이를 가장 잘 나타내준다. 너무 사소해서 땀흘릴 만한 가치가 없는 일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실현되길 바라기엔 너무 큰 꿈이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수년 동안 나는 언제나 우리가 선택한 모든 리더들에게서 그런 열정을 찾아볼 수 있기를 기대했다. 열정은 목소리나 크기 혹은 화려한 외모와는 상관이 없다. 열정은 내면 깊은 곳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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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르바이트에서 억대 연봉의 매니저로[숍 마스터. 오선희 ] *******************



인천대학교 공예디자인과를 다닐 때만 해도 오선희 씨의 꿈은 학교를 졸업한 후 원하는 디자인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숍 마스터라는 직업은 고려의 대상조차 될 수 없었다. 그 직업을 특별히 싫어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런 직업이 있는 줄을 몰랐기 때문이다.
적어도 용돈을 벌기 위해 백화점 매장에서 판매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대학 시절, 선희 씨는 방학이면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정규 사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가 주로 하던 일은 일반 매장이 아닌 그 옆 판매대에서 옷을 파는 것.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녀가 일하는 판매대는 유난히 매출이 좋았다. 정규 매장도 아닌 판매대에서 제품 하나당 6백만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게 어디 흔한 일이겠는가.

파는 옷을 직접 입고 손님에게 권한다거나 어떤 일이 있어도 친절한 태도를 잃지 않았던 그녀의 성실함이 빛을 발했던 것일까?

모델처럼 늘씬한 외모와 붙임성 있는 태도도 큰 역할을 했겠지만, 어쩌면 처음부터 타고난 재능이 있었던 건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무튼 활달하고 성실한 그녀는 어느 날 한 의류회사 간부의 눈에 띄었고, 그것을 계기로 그녀의 인생이 바뀌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때 회장님이 저를 일주일이나 조용히 지켜보셨대요. 손님을 대하거나 물건을 파는 태도를 유심히 관찰하신 거죠. 그리고는 저를 정식 사원으로 채용해주셨어요.”

결국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선희 씨는 베네통의 숍 마스터로 채용되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24살짜리 여자가 일반 사원을 관리하는 매니저로 직장 생활을 시작한 것이니, 이만저만 파격적인 대우가 아니었다.

그녀가 입사했던 94년 당시의 연봉이 2천만원 정도였으니 일반 대기업 사원보다도 훨씬 더 좋은 대우를 받았던 것.

그러나 그 무렵만 해도 숍 마스터라는 직업이 개념조차 없던 시절이라, 백화점에 취직했다는 소식을 들은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부정적이기만 했다.

전공 교수님들과 선배들은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공부나 계속하라’며 말렸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숍 마스터가 백화점 점원과 무엇이 다른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사실 처음엔 선희 씨 자신도 1년 정도 할 생각으로 이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1년 동안 일해서 돈을 번 다음, 그 이후엔 공부를 계속하리라는 계획이 있었던 것.

그렇게 부담 없이 시작한 일이 1년을 훌쩍 넘기고 어느덧 3년에 다달았다.

“일을 시작한 지 3년쯤 되니까 슬슬 한계가 오더군요. 일단 매일 12시간씩 근무해야 하는 것이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었어요. 정신적으로 많이 지치기도 했구요. 그래서 결국 그만두고 말았죠.”


이번에는 전공을 살려 광고 회사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취직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1년을 버티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늘 사람들을 접하던 숍 마스터에 비하면 그녀가 피부로 느끼는 보람이 너무 적었던 것.

사람들 때문에 상처도 많이 받았지만, 그들에게서 느끼던 보람도 그 못지않게 컸던 탓이다. 그림을 그리며 혼자 작업하는 날이 많아질수록 숍 마스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은 커져만 갔다. 결국, 1년 만에 그녀는 다시 백화점 매장으로 돌아왔다.

백화점 매장에서 일하다 보면 재미있는 일도 많았다. 아파트 단지 근처에 있는 매장에서 일할 때는 고생한다며 부침개를 부쳐다주신 아주머니도 계셨고, 여자 친구에게 줄 옷을 대신 입어보라며 그녀에게 옷을 6벌이나 갈아입게 한 남자 손님도 있었다.

“솔직히 그 당시엔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죠. 제가 입어본 6벌 중에서 그 분이 4벌이나 사 가셨지만, 왠지 제가 상품이 되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어서 기분이 나빴어요.
그런데 나중에 그 분이 여자친구와 함께 매장을 찾으셨더라구요. 그때 여자친구가 외국에 있어서 부득이하게 옷을 입게 했다, 그래서 정말 고마웠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런 것들이 바로 이 직업의 큰 매력인 것 같아요. 사람들에게서 얻는 기쁨 같은 것.”

이제 숍 마스터 8년차인 그녀의 연봉은 무려 1억에 달한다. 약 2년 전, 파격적인 조건으로 에고이스트에 스카웃되면서 그녀도 억대 연봉자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 것. 물론 매장의 책임자이다 보니 매출액에 따라서 연봉이 좀더 올라가기도, 내려가기도 한다고.

그렇지만 어쨌거나 1억이 아닌가. 평범한 샐러리맨은 그 정확한 액수조차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로 큰돈. 이쯤 되면 지금의 위치가 만족스럽지 않을까?

“궁극적으로는 웨딩드레스와 한복을 포함한 웨딩 토털숍을 운영하는 것이 꿈이에요.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서 패션이나 디자인에 대해서 적지 않은 것을 배웠으니까요. 앞으로 더 공부하고 노력해서 꼭 그 꿈을 이루고 싶어요.”

대단하다. 지칠 줄 모르는 그녀의 패기도 1억원짜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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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랑 사업계획서 한 장으로 시작한 큰숲 대표 박신영 ] *********************



남들이 말하는 젊은 나이에 부자가 된 사람을 찾아보았다. 우리가 말하는 '성공한 사람들'이라고 하기에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부자가 되고싶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시사점은 던져주리라 생각되어서 실어본다.

"나는 과연 부자가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게될 때 "나도 될 수 있다."고 생각이 들면 성공이다.


전공이 산업디자인이라기에 미대 출신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박신영 씨는 카이스트 출신이었다.

전공에 ‘디자인’이란 말은 들어가지만 미술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학과라고 한다. 아, 외형보다는 그 디자인의 메커니즘에 대해 공부하는 학문인가 보다.

어쨌건 이 ‘미술과는 관계없는 디자인’을 전공한 여성은 27살의 나이로 ‘베베타운’이라는 인터넷 회사를 설립했다. 사이트의 주 내용은 육아에 관련된 것들. 아이가 없는 미혼 여성이 관심을 가지기 참 애매한 분야인데… 어쨌건 그 이력이 여러 가지로 특이하다.

“제가 워낙 아이를 좋아했어요. 아이들에게 관심이 많아서 카이스트 졸업 작품도 ‘초등학생을 위한 인체공학적 디자인의 식판 카트’였으니까요.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럽게 사업 아이템으로 이어진 셈이죠.”

97년, 대학을 졸업한 박신영 씨는 LG전자 디자인 연구소에 입사했다. 전략 기획실 소속이었던 그녀의 주업무는 설문과 세미나를 하는 것.
일은 단조로울 수밖에 없었고 전공과 뚜렷한 연관이 없었던 터라 별로 재미도 못 느꼈다.

다만 여러 세미나를 거치다 보니 앞으로는 좀더 국제 정세에 대한 배경지식과 안목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래서 연세대 국제대학원에 입학해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일에 흥미를 잃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결국 아는 선배들이 많은 벤처 인티즌으로 옮기게 됐다.

“예전부터 구상하던 것이 바로 육아 사이트 개발이었어요. 아이템과 디자인에 대한 아이디어를 말했더니 다들 열렬히 좋아하시며 실행해보라고 격려해주시더군요.
부모님은 얌전히 회사나 다니지 무슨 사업을 하냐며 마땅찮게 생각하셨지만요. 선배들의 적극적인 후원이 없었다면 아마 저 혼자 창업하는 건 불가능했을 거예요.”

사업 경험이 전무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함께 일할 사람들은 일부러 나이나 경력이 있는 사람으로 뽑았다.
그리고 사업계획서를 작성해서 투자자들을 찾아 나섰다. 당시 그녀가 개인적으로 끌어 모은 자금은 8천만원 정도. 본격적인 사업을 위해서는 더 큰 투자자들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제가 전혀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이었어요. 다른 것 아무것도 없이 오직 사업계획서 달랑 한 장 들고 투자자들에게 다가갔으니까요. 진지하게 아이템을 설명하고 그 가능성을 봐달라고 부탁했어요.”


진심이 받아들여진 것일까? 몇 달이 지나자 투자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박신영 씨는 그 중에서도 알려진 업체, 믿을 만한 투자자들만 신중하게 선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자액은 16억 원으로 껑충 뛰어올랐다. 8천만 원에서 16억 원으로, 불과 몇 달 사이에 이룬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렇게 오픈한 ‘베베타운’은 최초로 육아 관련 콘텐츠를 제공하고 모든 회원에게 맞춤 서비스를 실시했던 사이트.

전자 상거래를 통해서 육아용품을 판매하기도 했다. ‘베베타운’을 시작으로 갑자기 각종 육아 사이트 붐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문제는 바로 수입이었다.

인터넷 사이트의 수입은 대부분 콘텐츠 판매와 광고로 이루어지는데, 온라인이 오프라인을 지원하지 못하면 수입을 크게 올리지 못하는 한계가 있는 것.
결국 작년 9월 무렵 ‘베베타운’은 중앙교육문화사와 합병, ‘아이큰숲(iconsupe)’으로 다시 태어났다.

박신영 씨는 온라인과 신상품 기획을 담당하는 I.lab의 이사를 맡고 있다. 합병 후 온라인 콘텐츠가 3배가 되면서 매출도 2배로 껑충 뛰었다고.
한 달 평균 매출은 1억5천만원 정도. 이 동안(童顔)의 여자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 아닌가.

“요즘은 에니메이션과 실험 상품을 결합한 제품을 기획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아이들에게 친숙한 에니메이션 캐릭터가 직접 과학 실험을 함께 하고, 이를 통해 교육 효과를 증대시키는 것이 목적이죠. 앞으로도 다양한 프로젝트를 시도할 계획이구요.”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성별과 직업을 초월해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현재에 안주하지 않는 도전 의식,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미래에 대한 자신감.
사회적으로 성공하거나 수입이 많은 것보다 더 값진 것은 바로 이 ‘성공의 향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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