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세기 최고의 경영자 잭 웰치 ] ******************************
♤♤♤ 실현되기에 너무 큰 꿈은 없다. ♤♤♤
** GE에서 20년간의 오랜 경영 일정을 마침내 끝마친 잭 웰치. 재임 기간 내내 그의 경영방식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는데, 결과는 매우 긍정적으로 드러났다.
그는 GE에 열정을 불어넣었고, 커뮤니케이션을 가로막았던 보이지 않는 벽을 타파했으며, 철저히 능력에 따른 승진 문화를 심었고, 불량률을 극한으로 줄이는 6시그마 경영을 펼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은 GE를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거듭나게 했다. **
1961년 잭 웰치는 회사를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다. GE에 입사한 지 1년이 갓 지났을 때였다. 관료주의가 팽배해 있고, 능력에 따른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회사에 더 이상 다닐 수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미 더 좋은 일자리에 대한 제안을 받아둔 터였다. 그런데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루벤 구토프 이사가 그를 만류했다.
사실 그는 1년 차 신입사원치고는 남다른 행동을 보여주고 있었다. 세계 유수 경쟁회사 제품에 대항할 만한 새로운 플라스틱의 물리적 분석 결과와 전체 원가를 제시했던 것이다.
대단한 건 아니었지만, 신입사원이 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선 것이었다.
루벤 구토프 이사는 높은 급여를 약속했고, 웰치는 회사에 남았다. 그 때 그가 떠났다면 오늘날의 GE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웰치는 입사한 지 8년 만에 최연소(32세)로 연매출 2600만 달러의 플라스틱 사업본부장으로 승진했고, 점차 GE 전체의 경영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37세에 임원으로 승진했을 때 제출한 업적평가 고서에는, 자신의 궁극적인 목표가 CEO가 되는 것이라고 적어놓았다.
이러한 열망은 그를 세 명의 CEO 후보 중 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당시 CEO였던 레그 존스는 후보들에게 각각 그 유명한 ‘비행기 면접’을 실시했다.
비행기 사고를 설정하여 답변을 요구하는 면접이었다. 이 면접의 마지막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잭, 자네와 내가 비행기를 타고 가다 추락했다네. 나는 죽었지만 자네는 살았네. 이제 누가 제너럴 일렉트릭의 회장이 되어야겠나?”
“바로 접니다.”
1981년 4월 잭 웰치는 GE 전체를 통솔하는 위치에 올랐고, 20여 년의 기나긴 경영 여정이 시작됐다.
♤♤♤ “나는 인재를 발견하는 데 대부분의 힘을 쏟았다” ♤♤♤
잭 웰치는 20년간 GE라는 배를 이끌고 항해하면서, 완벽한 혁신을 통해 놀라운 성과를 만들어냈다.
매출은 1981년 270억 달러에서 2000년 1290억 달러로, 순이익은 15억 달러에서 127억 달러로 증가했고, 자본수익률은 미국 평균인12%를 훨씬 초과한 20% 수준을 기록했다.
GE를 시장가치 5300억 달러의 기업으로 만들었고, 자신의 연봉 역시 9400만 달러로 업계 최고 수준을 유지했다.
미국 <포춘> 지와 <파이낸셜 타임스>는 3년 연속 GE를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으로 선정했다.
2000년 일본계 컨설팅회사 AT커니가 아시아의 100대 기업을 대상으로 가장 존경하는 기업인을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약 60%가 GE의 웰치 회장을 꼽았다.
GE의 키를 잡게 됐을 때, 웰치는 겉보기와는 달리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외향적이고 활달해야 하는 CEO의 자질이 많이 부족하다고 스스로 느꼈다. 하지만 그는 GE가 어떤 회사가 되어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GE는 생산성 있는 역동적인 조직으로 거듭나야 했다. GE 재임기간 동안 그는 딱딱한 관료주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던 GE의 허물을 벗겨내느라 고군분투했다.
회장 취임 직후 관료제의 온상인 본사 스탭 조직의 혁신에 들어갔다.
그는 GE가 너무 많은 스웨터를 껴입고 있다는 판단 아래, 400명에 달했던 본사 전략팀을 해체하고 그 기능을 각사에 이관했다.
또한 회장과 사업부 사이에 존재하던 그룹 임원(6인), 섹터 임원(6인), 부사장(2인)의 3개 계층을 자연퇴직·이직 등을 통해 4년 만에 정리했다.
잭 웰치의 경영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무엇보다 인재에 대한 경영이다.
그는 ‘중성자탄 잭’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사람을 갈아치웠다. 이 별명은 1982년 <뉴스위크> 지가, 건물들은 멀쩡한데 사람들만 조용히 죽어간다는 의미로 붙인 별명이다.
<포춘> 지는 1984년에 ‘미국에서 가장 무자비한 경영자 10명’ 중 1위에 잭 웰치를 선정했다.
대규모 감원을 서슴지 않았던 그는 오로지 기업의 이익만 탐욕스럽게 추구했던 사람으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그는 ‘기업은 곧 사람’이라는 공식을 가슴 깊이 갖고 었다.
“GE는 벽돌과 건물들의 단순한 집합체가 아니다. GE를 존재하게 하는 것은 바로 살아 있는 사람들이다. 기업은 인간이다.
슬로건이나 연설만으로는 아무 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 그것은 변화가 필요한 곳에 적당한 인물을 배치함으로써 가능하다.
그것은 전략을 개발하는 일보다 훨씬 중요하다. 우리는 초음파 기기를 위한 멋진 계획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실현할 만한 완벽한 인물을 찾을 때까지는 단지 하나의 헛된 꿈에 불과했다.”
그는 단순히 실수를 저질렀다고 해서 직원을 내보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처벌은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환경친화적인 전구를 개발하는 5000만 달러 규모의 프로젝트가 실패했을 때, 그는 관련자들을 문책하지 않고 오히려 포상과 승진을 내렸다.
그는 회사 내의 사람들이, 큰 도전 끝의 실패가 용납될 수 있다는 것을 알기를 바랐다.
그는 누군가 좌절하고 있을 때 그를 더욱 꾸짖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뛰어난 인재가 자신이 저지른 실수 때문에 스스로를 갉아먹지 않도록 도와줘야 한다는 것이다.
GE 전략기획 총책임자로 승진하여 다양한 사업부들을 감독하게 되자,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성공이 고용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임을 절실히 깨달았다.
직위가 높아지면서 통제 범위는 넓어졌고, 더 이상 모든 세부 사항을 혼자 통제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능력 있는 사람을 발굴하는 일에 더욱 집착했다. 실력이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은 현장에서 바로 승진시켰다.
그는 겨우 시장개발 담당 관리자였던 존 오피를 전국판매 담당 관리자로 승진시키면서, 그 후로 이어지는 수많은 ‘현장 승진’에 발동을 걸었다.
그것은 분명 일반적인 관례를 아주 많이 벗어난 것이었고, 팀에 큰 충격을 주었다.
또 부동산 부문의 총책임자에 지나지 않았던 데니스 대머먼을 GE 전체의 재무를 담당하는 CFO로 승진시키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 회사 전체를 충격에 휩싸이게 할 정도로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공식적인 인사관리 과정도 있었지만, 식당이나 복도 그리고 모든 사업상의 회의를 통해, 격식을 갖추지 않은 비공식적이고 개인적인 인사관리 및 평가가 이루어졌다.
사업부에서 뛰어난 인재를 발견하면, 웰치는 그들에게 줄 새로운 기회에 대해 생각하느라 몹시 흥분하곤 했다.
“언제 어디서 능력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될지 알 수 없다. 따라서 나는 항상 모든 사람과의 만남이 하나의 인터뷰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 최선을 다했지만, 능력 있는 사람을 GE의 핵심 역량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은 그 어떤 문제에 기울였던 노력보다 컸다.”
♤♤♤ “직원을 해고하는 일은 내가 했던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
1등이나 2등이 될 수 있는 사업이 아니면 포기한다는 원칙을 통해 웰치는 GE를 무너지지 않는 반석 위에 올려놓으려 했다.
재임 기간 내내 그는 ‘고쳐라, 매각하라, 아니면 폐쇄하라’라는 구호를 외쳤다.
웰치는 과거에 GE를 상징했던 냉난방기·소형가전·TV·오디오· 반도체 등의 사업부를 매각 대상 사업부로 지정했다.
물론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비껴갈 수 없는 장애였다. 처음 2년 동안 웰치는 71개 사업부 및 제품라인을 매각하고, 118건의 합병, 합작투자, 소수 지분 참여를 했다.
취임 후 웰치는 15년간 400여 개의 사업 또는 생산라인을 처분하고, 전체 직원의 1/4인 11만2000명을 해고했다.
선두가 될 수 없는 사업을 매각하는 것은, 그 사업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평생고용은 직원들을 진정으로 위하는 것이 아니라고 웰치는 생각했다.
“고용 안정을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조직은 죽음의 문턱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기업이 직원의 일자리를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 고객을 만족시킨 결과로 일자리가 보장되는 것이다.
고통 분담 차원에서 전체적으로 급여를 삭감하는 것은 경영이라고도, 리더십이라고도 볼 수 없다. 그건 조직 내 인재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지름길이다.”
‘회사 전체를 위해서’라는 대의명분이 분명히 있었지만, 직원들을 해고하는 데 있어서 웰치는 많은 고심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람을 해고하는 일은 이제껏 해왔던 일 중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그 일은 한 번도 쉬운 적이 없었고, 절대 수월해지지도 않았다.
해고의 충격을 줄일 수 있는 충분한 자금이 있는 회사에서 일했다는 것은 내 일생에 걸쳐 큰 행운이었다.
사람들을 해고하는 것은 리더들이 가장 하기 어려운 결정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 일을 즐기는’ 사람이 리더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도 리더가 될 수 없다.”
♤♤♤ “CEO는 최고의 직업이다.” ♤♤♤
웰치는 CEO가 정말 골치 아픈 직업이라고 했다. 최고의 자리이면서 화끈하기도 하고, 많은 친구들을 만들어주지만, 반면 한밤중까지 회의가 진행되며, 위기와 압력, 패배의 쓰라림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CEO보다 더 좋은 직업은 없다고 생각했다. 일하는 재미가 그 이상 없다는 것이다.
그는 CEO로서의 특권 중, 회사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깊이 관여할 수 있다는 점을 마음에 들어 했다.
GE의 CT스캐너 사업은 그가 깊이 관여한 좋은 사례를 보여준다. GE의 CT스캐너는 우수하다고 인정을 받고 있었지만, 그 안에 들어가는 튜브에 문제가 있었다.
그 튜브는 평균 2만5000번 정도의 스캔을 할 수 있었는데, 이는 경쟁사 제품의 절반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문제를 포착한 웰치는 현장으로 달려가, 그 일을 해결할 사람을 물색했다. 그는 곧 서비스 분야에 근무하던 마르크 오네토를 찾아 그 일을 맡기고 지원을 약속했다.
또 그가 여러 인재들을 고용할 수 있도록 도왔다. 또 당시 새로 뽑은 직원이 이직하려 하자 적극적으로 나서서, 흔들리는 것을 막기도 했다.
그리고 4년 동안 연구에 대한 보고를 받았고, 마침내 20만 번을 스캔할 수 있는 튜브가 만들어지는 것을 보았다.
한 번 맡은 일은 집요하게 끝을 보는 웰치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일이다. 그는 어떤 일에 깊이 관여할 때, 실무 담당자보다 더 큰 흥분과 긴장을 느꼈고 즐겼다.
재임기간 동안 그는 GE를 거듭나게 하는 작업에 분주했는데, 그가 이룬 두드러진 성과 중에서도 ‘6시그마 운동’과 ‘벽 없는 조직’에 대한 성과는 정말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전체 조직에 관계된 이 일을 성공시키기 위해 그는 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6시그마 운동은 쉽게 말해 불량률을 0.00034% 밑으로 떨어뜨리는 것을 의미했다. 일단 일에 착수한 웰치는 모든 사업부문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에게, 현재의 일을 중지하고 6시그마 혁신을 이끌도록 했다.
급여 수준의 40%는 6시그마 운동 결과에 따라 결정되었다.
1998년까지 6시그마 프로젝트를 통해, 투자비용을 모두 상쇄하고도 7억5000만 달러의 이익을 남겼으며, 1999년에는 15억 달러의 이익을 얻었던 것이다.
‘벽 없는 조직’은 정보의 원활한 흐름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각각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서로 지식을 공유할 수 있다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벽 없는 조직에 대한 가치를 공유하지 못한 사람은 회사를 떠나야 했다.
그는 벽 없는 문화와 학습정신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인재개발 회사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벽 없는 조직은 GE의 관료주의를 타파하고자 했던 그의 강한 바람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웰치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순간적으로 스치는 생각을 메모하는 습관 때문에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곤 했다.
아내 제인과 휴가를 갔을 때, 그는 벽 없는 조직에 대해 생각해냈으며,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다가 갑자기 냅킨에 ‘고치거나 매각하거나 폐쇄하라’라는 아이디어를 메모하기도 했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그의 머리에 강박관념처럼 자리잡아 강력한 행동을 이끌어냈다.
♤♤♤ “승자들의 자산은 정열이다.” ♤♤♤
웰치는 직원들에게 항상 자신감을 심어주려고 노력했다. 그는 자신이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가장 큰 선물이 ‘자신감’이라고 했다.
어렸을 때 웰치는 말을 더듬곤 해서 낭패를 당하는 일이 많았다. 그에 대해 어머니는 “그건 혀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네가 똑똑하기 때문”이라고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잭은 어렸을 때 운동선수 친구들과 함께 찍은 어린 시절의 사진을 보면서, 그 중에 자신의 키가 제일 작고 나이도 어렸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다.
당시 그는 어머니가 심어준 자신감이 너무 강해서, 열등감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요소들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수많은 인수합병 과정에서 실패한 경우도 있었다. 그 중에 아내 캐롤린과의 합병도 실패 사례 중 하나다.
업무 중독으로 가정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캐롤린과 헤어진 후, 그는 51세의 나이로 17세 연하인 변호사 제인 비슬리와 결혼해서 살고 있다.
웰치는 평생을 골프와 함께 했다. 골프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고, 사업과 연결했다.
그는 골프가 인간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완벽해질 수 있다고 부추기는 게임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의 삶 자체가 끝없이 완벽을 추구하는 삶 그 자체였다. 그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실행했다.
때로는 실패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의 정열이 타오르는 것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그는 어떤 사람이 정말 인재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열정’을 들었다. 일에 대해 파고드는 열정이 그 사람을 전진하게 한다는 것이다.
“모든 승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성을 꼽는다면, 그것은 바로 열정일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승리한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의 차이를 가장 잘 나타내준다. 너무 사소해서 땀흘릴 만한 가치가 없는 일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실현되길 바라기엔 너무 큰 꿈이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수년 동안 나는 언제나 우리가 선택한 모든 리더들에게서 그런 열정을 찾아볼 수 있기를 기대했다. 열정은 목소리나 크기 혹은 화려한 외모와는 상관이 없다. 열정은 내면 깊은 곳에서 비롯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