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년 외길 인생, 메이크업 아티스트 ] ***************************



“성실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성공할 수 없어요. 전 19년 동안 한 번도 여름 휴가를 못갔는 걸요!”

텔레비전을 통해 비춰지는 여배우의 얼굴은 누구누구 할 것 없이 예쁘다. 그녀들의 얼굴을 예쁘게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전문가를 메이크업 아티스트라고 한다.

국내 내로라는 여배우의 얼굴을 책임지고 있는 메이크업 아티스트 김청경씨(41).
타고난 재능과 노력, 성실함, 포기하지 않는 끈기로 이어진 김청경씨의 성공 이야기를 들어본다.


메이크업 아티스트 김청경씨의 하루는 오전 5시부터 시작된다. ‘설마 새벽부터 메이크업을 할려구?’라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이다. 그녀의 기상 시간은 항상 오전 5시를 넘기지 않는다. 기자와 인터뷰가 있던 날, 김청경씨는 오전 5시30분부터 작업을 시작했다.

그 날 처음으로 숍을 찾은 이는 탤런트 김남주. 그녀의 뒤를 이어 손태영, 김정은, 강성연, SES의 바다 등 국내 내로라는 연예인들이 속속 김청경씨의 메이크업실을 찾았다.

화이트와 크림색으로 인테리어된 김청경씨의 메이크업실을 찾는 연예인들은 투명한 유리문을 열고 들어오며 가장 먼저 “선생님,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를 한다.
이런 이들을 김청경씨는 “어서 와라”며 반갑게 맞이해준다.

1남 4녀 중 장녀, 집안일 책임지는 든든한 기둥수입의 전부는 어머니께, 부모님이 모르는 딴 주머니는 없다!

김청경씨가 분장일을 처음 시작한 지난 83년만 해도 메이크업을 담당하는 사람에겐 분장사라는 호칭을 붙였을 뿐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이름 뒤에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붙었다. 그렇다고 해서 메이크업을 담당하는 모든 사람을 ‘선생님’이라고 표현하지는 않는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선생님’으로 표현하는 것은 그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에 오른 사람에게만 붙여주는 훈장과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Point 1. 일등을 할 수 있는 분야에 도전한다.>

김청경씨는 4녀 1남 중 장녀다. 그녀는 현재까지 미혼이고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으며 아직 학생인 막내 남동생의 학비를 대주는 집안의 기둥 역할을 하고 있다.

그녀에게 있어 가족은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재산이다. 김청경씨는 메이크업을 해서 번 돈으로 동생 세 명을 대학까지 졸업시켰고 그 중 막내인 남동생은 현재 미국 유학을 준비중이다.

그리고 처음 돈을 벌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어머니 모르게 딴 주머니를 찬 일이 없다. 그녀의 모든 수입금은 바로바로 어머니께 맡겨지고 있는 것이다.

“전 어머니를 꼭 닮았어요. 저희 어머니는 연세가 많으신 지금도 얼마나 셈이 정확한지 몰라요. 아버지는 정이 많아 자식들에게 사랑을 가르쳐주셨고 어머니는 인자하면서 똑똑한 면을 많이 보여주셨어요. 두 분 모두 현재 저와 함께 살아요.”

김청경이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된 것은 어쩜 집안의 피를 이어받아서 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손꼽놀이와 인형놀이를 즐길 나이인 4세 때부터 그림을 그렸다.

인형을 잡고 놀 나이에 크레파스를 쥐고 그림을 그리는 김청경씨를 보며 가장 흐뭇해 한 사람은 바로 그녀의 큰아버지였다.
고등학교 미술 선생님이셨던 김청경씨의 큰아버지는 그녀의 그림을 보고 “색을 사용할 줄 아는 아이다”라며 유난히 예뻐하셨다고 한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김청경씨는 색에 대한 감각이 남달랐던 것. 그것을 눈치챈 큰아버지는 중학생이 된 그녀를 고등학생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게 했을 만큼 그녀에 대해 큰 애정을 보였다.

그래서 김청경씨는 자신의 진로를 미술 선생님으로 정하고 그 목표를 향해 열심히 매진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대에 진학한 김청경씨는 대학에 입학한 후 자신의 꿈에 대한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미술 선생님보다 더 근사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전문직 여성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그녀는 어느날 갑자기 앵커우먼이 되고 싶다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됐다.

왜 앵커우먼이 되고 싶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똑똑하고 지적인 이미지의 앵커우먼이 되기 위해 그녀는 다니던 대학에 자퇴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서울예전 방송연예과에 입학했다.

그 당시 김청경씨가 2년제 대학을 선택한 것은 앵커로 입사하려면 또래들과 대학 졸업 연도가 똑같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그녀만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김청경씨는 서울예전에 입학한 후에야 깨달았다.

2년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앵커가 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보다 힘든 일이라는 것을 눈치챈 김청경씨는 새로운 꿈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그건 바로 분장이라는 분야였다.

“그 당시 서울예전에서는 다른 학과 수업을 듣는 것을 학점으로 인정해주었어요. 그래서 2년 내내 연극과와 영화과의 분장학 수업을 들었죠.
어렸을 적부터 그림을 그린 것이 분장학 수업에 큰 도움을 주었어요. 교수님께서 그린 그림을 똑같이 흉내내면 친구들은 물론 교수님도 놀라셨어요.
전 중·고교시절 매일 노트와 연필을 가지고 다니며 아무 곳에서나 스케치를 했거든요. 특히 인물 크로키하는 걸 좋아했어요.
버스를 타고 지나갈 때 창문으로 스며드는 햇살에 따라 할아버지의 얼굴에 자리잡은 주름살이 보이기도 하고 숨겨지기도 하죠.
이런 것을 그림으로 그리는 게 너무 재밌어서 매일 크로키를 하다보니 명암 표현과 선 그리기가 자연스럽게 완성된 거예요. 분장학 수업을 들으면서 제가 그림을 그린 것이 얼마나 잘 한 일인지 새삼 깨달았죠.”

1년 8개월 동안 월급 10만원 받으며 악바리로 일 배우기하루에 엑스트라 80명에게 수염 붙여주며 순발력 쌓았다!


<Point 2. 악바리처럼 잠을 줄여라!>

대학 재학 시절 김청경씨는 학내 정오 뉴스의 앵커를 할 만큼 목소리가 좋았고 발음도 정확했다.

그런 그녀를 두고 주위에서는 성우를 하라고 권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앞으로 자신의 진로를 분장사로 정했다.

그리고 방송국에 입사 원서를 제출했다. 대학에서 방송연예과 수업을 들으며 김청경씨는 2년 내내 학교 행사의 주인공을 맡았다.
똑 부러진 말투와 정확한 발음 그리고 잘 생긴 외모를 가진 그녀는 학교에서 준비하는 공연에서 매번 주연으로 출연했다.

하지만 방송국의 탤런트 시험에 응시한 후 생각하니 남보다 자그마한 신장이 걸림돌이 되었다.
다른 배우들과 공연을 하기 위해서는 얼굴은 물론 신장도 얼추 맞아주어야 하는데 김청경씨는 또래들에 비해 조금 작은 체구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탤런트가 되는 것이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대학 졸업 후 응시한 KBS 탤런트 시험에서 그녀는 탈락을 했다. 하지만 방송국이 좋았다.

대학 시절 실습을 통해 몇 번 방문한 방송국에서 그녀는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방송국에서 할 수 있는 일, 그것도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다보니 분장사가 되는 거였다.

"그해 KBS 분장실에서 공채 사원을 두 명 뽑았는데 그 중 한 명이 저였어요. 제 동기는 현재 대하드라마 '여인천하'의 분장을 맡고 있는 이승남씨였구요.
그는 입사 4개월만에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어요. 그래서 저 혼자서 일년 동안 수습사원 생활을 했는데 월급은 10만원이었어요.
정해진 출퇴근 시간은 오전 9시와 오후 7시였는데 전 매일 아침 8시에 출근했어요. 제 위로 선배가 열 여섯 명 있었는데 저 혼자서 그분들 수발을 다 들었죠.

대학에서 연기를 했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대본을 한 번 읽으면 사진 촬영을 한 것처럼 대본 한 바닥이 모두 머릿속에 떠올랐어요.
그래서 선배들이 분장할 인물에 대한 캐릭터를 파악한 후 필요한 준비물을 아침 일찍부터 미리 준비했죠.
퇴근 시간이 7시였지만 입사 이후 단 한번도 정해진 퇴근 시간에 퇴근을 한 일이 없어요.
드라마 촬영이라는 게 한 번 시작되면 다음날 새벽이나 되어야 끝나거든요. 그러면 가정이 있는 선배들은 집안 일이 있거나 또는 아이들과의 약속 때문에 일찍 퇴근해야 하는 경우가 생겨요.

이럴 때면 선배들은 “청경아, 너만 믿는다”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비웠어요."

군대만큼이나 엄격하기로 유명한 방송국에서 김청경씨는 입사한 지 서너 달이 지난 후부터 선배들로부터 '일을 맡겨도 괜찮을 인물'로 낙점된 것이다.
1년 8개월 동안 방송국 생활을 하며 그녀가 쉰 날은 열 손가락에 셀 수 있을 정도였다.

새벽까지 계속된 촬영 때문에 졸린 눈을 부비며 동이 틀 무렵 집으로 향했어도 오전 8시에 출근하는 것은 한번도 어긴 적이 없을 만큼 김청경은 악바리처럼 일했다.

선배들의 수발을 제외하고 당시 그녀에게 배당된 일은 ‘전설의 고향’과 대하 사극의 엑스트라들에게 수염을 붙이는 일이었다.

그 시절에는 사극 촬영이 유난히도 많았다. 엑스트라가 많은 날은 하루에 80명까지 수염을 붙여봤다는 김청경씨. 엑스트라들을 한 줄로 세워놓고 감독의 큐 사인이 떨어지기 전에 수염을 붙이는 일은 엄청난 스피드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그녀는 단 한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열심히 수염을 붙였다. 그래서 한동안 방송국에서는 김청경을 두고 ‘수염을 가장 예쁘게 잘 붙이는 분장사’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열심히 수염을 붙이던 실력은 어느새 그녀에게 손놀림을 빨리 하는 습관을 갖게 했다.

연예인들의 메이크업을 하다 보면 시간에 쫓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럴 때면 그녀의 수염 붙이기 실력은 어김없이 발휘된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대학을 졸업하고 1년 8개월을 월급 10만원씩 받고 다니던 김청경씨에게 어느 날 굿 뉴스가 전해졌다.

선배 중 한 사람이 퇴사를 한다는 것. 그것은 그녀가 정식 분장사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녀의 상사는 그녀에게 한 달에 16만원이라는 월급을 제시했다. 그런데 회사측과 한번 월급 협상을 하고 나면 4∼5년 동안 월급이 오르지 않는 병폐를 안고 있는 상황에서 그녀는 16만원이라는 터무니없는 월급에 사인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선배들 역시 ‘버티라’며 무언의 압력을 주었다. 선배들 말만 믿고 ‘버티기’를 하던 그녀에게 얼토당토않은 루머가 생긴 것은 그 무렵이었다.

“새벽까지 일하고 아침에 일찍 나와서 청소하고 책상 정리하고 분장 도구 준비를 하는 저를 누가 안 예뻐하겠어요. 제가 워낙 열심히 하니까 남자 선배들이 커피도 뽑아주고 점심도 사주면서 격려해줬는데 제 상사가 이상한 루머를 퍼뜨린 거예요.
행동이 불미스런(?) 아이라고. 그 일 때문에 함부로 쳐다보지도 못할 만큼 대 선배인 상사와 큰 소리를 내며 싸우고는 쫓겨나다시피 방송국을 나왔어요.”


< Point 3. 나이는 필요없다. 하고 싶은 일을 한다! >

광고 메이크업 시작한 지 일년만에 정상 차지!!!
지난 90년 초 한 달 수입 6백 만원을 기록하며 급성장 방송국에서 쫓겨난 후 김청경씨는 ‘10년 후에 보자’며 이를 갈았다.

그러나 방송국을 나온 후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건 너무도 힘들었다. 그녀와 언성을 높인 상사가 그녀의 일을 계속 방해했기 때문이다.

김청경씨에게 KBS 출입 금지령을 내렸고 그녀가 메이크업을 하는 연예인은 KBS안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조치를 하는 거였다.
심지어는 다음날 새벽에 약속된 스케줄까지 펑크를 내게 만드는 어처구니없는 경우까지 당하면서도 김청경씨는 그에게 굽히지 않았다.

강한 것에는 강하고 약한 것에는 약한 것이 그녀의 특징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잘못하지 않을 일을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것만큼은 죽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분장 일은 해야 했다. 돈보다 일년에 단 열흘을 쉬지 않을 만큼 바쁘게 생활했는데 갑자기 집에서 빈둥거리는 신세가 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하루에 2만원의 일당을 받으며 남산에 위치한 국립 극장에서 분장을 담당했다.
그러다가 김청경씨는 광고 분장을 시작했다. 광고에 출연하는 모델의 메이크업을 하는 일이었다.

그 당시 우리 나라에서 광고 분장을 하는 사람은 다섯 명뿐이었다. 이중 김청경씨의 실력은 탁월했다.

“어려서부터 미술을 배운 것과 KBS에서 분장사로 일하면서 익힌 노하우가 있으니까 언제 어느 순간에서도 당당하게 일할 수 있었어요. 광고 메이크업을 시작한 지 일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 화장품 브랜드 8개의 모델 메이크업을 담당했을 정도니까 능력 발휘를 빨리 했죠.”

김청경씨는 광고 메이크업 분야에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할 만큼 급속도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KBS 분장실에서 쫓겨날 때 ‘10년 후에 보자’던 약속도 3년만에 이룰 수 있었다.

지난 89년 김청경씨는 자신의 이름을 건 숍을 오픈했다. 또 같은 해 분장협회에서 주관하는 행사에서 화장품 광고에 대한 강의를 했다.

이 행사는 분장 종사자들이 모이는 곳이었는데 여기서 광고 메이업을 강의했다는 것은 김청경씨가 광고 메이크업 분야에서는 최고라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그런데 이 행사의 맨 앞자리에 앉은 이를 보는 순간 그녀는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3년 전 그녀를 KBS 분장실에서 쫓아낸 상사였던 것이다.

“그때 기분이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10년 후에 보자’는 내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 것과 그 상사를 일로 이겼다는 것이 너무 큰 기쁨이었어요.”

그 이후 김청경씨는 한 달에 25건 이상의 일을 맡으며 즐거운 비명을 질러야 했다. 25건 중에는 1박 2일의 출장 스케줄도 있었던 만큼 그녀는 한 달에 단 하루도 쉬지 못했을 만큼 일속에 파묻혀 살았다.

지난 83년 KBS 분장실의 월급 10만원 짜리 수습 사원으로 시작한 김청경씨는 10년이 지난 후인 지난 94년에는 패션과 화장품 업계의 메이크업을 담당하는 최고의 아티스트가 되어 있었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일하던 중 쓰러져 나흘 동안 깨어나지 못하는 위험한 순간을 두 번이나 경험했다.
그리고 새벽까지 촬영하고 혼자서 운전을 하고 오다가 졸음운전을 해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긴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김청경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 지금까지 단 한번도 여름 휴가를 떠나지 못했다.
패션 일번지로 일컫어지는 강남구 청담동에 ‘김청경 헤어 페이스’라는 숍을 오픈한 후에도 그녀는 직원들이 휴가 떠난 자리를 메꾸며 정작 자신의 휴가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살았다고 한다.

앞으로 5년 후까지 자신에게 휴가란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김청경씨. 그녀는 자신의 성공 비결 중 하나는 잠을 줄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즘도 그녀의 기상 시간은 오전 5시를 넘기지 않는다고 한다.

지난 89년부터 98년까지 메이크업 학원을 운영한 김청경씨는 학원에서 강의하며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한달에 분장학원에서 배출되는 분장사는 수백 명이 넘는다. 이렇게 많은 인원 중 살아남는 사람은 30∼40명 뿐이다. 그렇다면 1백대 1, 2백대 1의 치열한 경쟁자를 물리쳐야하는데 몇 백명의 경쟁자가 있는 지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다.
여기서 기억할 것은 살아 남는 한 사람의 분장사가 바로 내가 될 수 있게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포기하지 않는 인내력이 가장 필요하다.”

김청경씨의 ‘포기하지 말라’는 말은 학원생 뿐 아니라 그녀 자신에게도 적용된 것이었다.

김청경씨는 남들이 말하는 ‘성공’이라는 위치에 오른 지난 94년 서른 네 살이라는 나이를 등에 업고 이태리 밀라노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10년을 뛰면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B.C.M이라는 분장 학원에서 열심히 학업에 열중한 덕분에 그녀는 그곳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어느날 B.C.M 분장 학원의 관계자가 그녀에게 ‘언어를 열심히 공부해 학업을 마친 후에는 이곳에서 강의를 하라’는 제의를 했던 것.

세계의 내로라는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모이는 이 학원에서도 김청경씨는 손이 섬세하기로 유명했다.


< Point 4. 포기할 것은 과감하게 포기하라! >

오래도록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남는 것이 소원!!!
지난 해(2002년) 여름, 지금보다 3배 넓은 숍으로 이전하는 게 흐뭇. 그러나 김청경씨의 유학생활은 그리 길지 못했다. 유학 4개월만에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한 것.

이때 생각으로는 아버지의 병세가 호전되면 다시 밀라노로 떠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는데 연세가 있으신 아버지는 그녀의 생각처럼 빨리 회복되지 않았다.

그 바람에 김청경씨는 다시 밀라노로 떠나지 못하고 국내에 주저앉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도 참 아쉬웠던 일이에요.

그런데 아파서 누워 계신 아버지를 보며 ‘다시 밀라노로 떠나면 아버지와는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더라구요.
전 우리 부모님을 너무 사랑해요. 지금도 분가하지 않고 두 분을 모시며 살고 있어요. 한동안은 일산에서 청담동까지 출근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숍 근처에 오피스텔에서 살았어요.

그런데 가끔 일산 집에 갈 때면 아버지, 어머니가 너무 반갑게 맞아주는 게 마음이 아파서 다시 집으로 들어갔어요.”김청경씨는 오는 여름, 숍을 이전할 예정이다.

그녀가 점찍어 놓은 새 숍은 가정집이다. 그곳을 개조해 앞마당이 넓고 시야가 뻥 뚫린 숍을 마련할 예정이다.
그곳은 현재의 숍에 비해 3배 가량이나 넓어지는 공간을 활용할 수 있다.

그녀는 그 사실이 너무도 가슴 설레 개조 작업을 서둘러 달라고 재촉했다가 공사 담당자에게 핀잔을 듣기도 했다고 한다.

김청경씨의 숍에는 그녀의 둘째와 셋째 동생이 함께 일하고 있다. 첫째 동생은 결혼과 함께 잠시 일을 쉬고 있지만 그녀의 여동생들은 모두 메이크업과 관계된 일을 한다. 아마도 큰 언니의 영향을 받아서 인 듯하다.

막내 남동생은 컴퓨터 공학도인데 현재 유학을 준비중이다. 김청경씨는 지난 90년 초 한달 수입이 6백 만원 선이었다고 한다.
이 당시 가장 유명한 앵커 황인용씨의 수입이 6백 만원이어서 그의 별명이 ‘황육백’이었는데 김청경씨의 수입이 그와 같은 수준이었던 것.

웬만한 월급 사장이 한 달에 2∼3백만원의 월급을 받은 것에 비하면 그녀는 그 당시부터 고소득을 올린 거였다.
앞으로 김청경씨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프랜차이즈 숍을 오픈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욕심은 내지 않을 거라고 한다.

김청경은 한 명인데 자신의 이름을 걸고 이곳저곳에 숍을 오픈해 오히려 역효과를 내지나 않을까 고민도 하고 있다. 그래서 사업 확장은 조심스럽게 진행할 예정이다.

그렇다면 메이크업 아티스트 김청경씨가 가장 소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오래도록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남는 거예요. 나이가 들면 현장을 지키는 것보다 사업가가 되거나 고문이라는 이름으로 관리만 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전 나이를 먹은 후에도 현장에서 메이크업을 하고 싶어요. 사업가나 무슨 협회의 감투직을 수행하는 것보다 평생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남는 것이 제 진정한 소원이에요.”

인터뷰를 마치며 김청경씨는 성공에 대한 포인트 몇가지를 짚어주었다.

첫째, 어떤 일을 시작할 때는 ‘내가 이 일을 해서 1등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

둘째, 잠을 줄여야 한다. 남과 똑같이 잠을 자면 절대 성공할 수 없다. 그러니까 부지런해야 한다는 것.

셋째, 성실함과 끈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는 경쟁자가 많은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살아남는 한 사람이 자신이 될 수 있을 때까지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다섯째는 세상의 모든 사람은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청경씨는 메이크업 아티스트로서의 부와 명성을 얻었지만 여자로서의 행복이라고 할 수 있는 결혼은 아직까지 미지수로 남겨두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결혼에 대해 ‘하느님은 모든 것을 다 주시지 않는다’라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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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즈니스위크지 선정 ‘아시아 스타’ 김택진 엔씨소프트 사장 ] ******************



인터넷 게임 ‘리니지’를 개발한 김택진(35) 엔씨소프트 사장은 “결코 저는 게임광(狂)이 아닙니다”라며 말문을 열었다.
한국을 게임 천국으로 만든 사내의 체구는 작고 단단했다.

“책을 보는 것이 제 일상(日常)입니다. 게임 제작 회의에서는 역사·철학·신화·심리학 등 온갖 얘기가 쏟아지죠.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멋진 게임이 나올 수 없어요. 요즘에는 시를 읽는 중입니다. 한국의 대표 시인 전집을 다시 보고 있죠. 윤동주(尹東柱) 시는 영역본으로 읽으니 새로운 느낌이 옵니다.”


국내 300여만명의 남녀노소를 리니지 게임에 빠져들게 한 그는 책 읽느라 새벽이 온 줄 몰랐던 대학 시절을 이야기했다.

― 그런데 청소년들은 당신이 만든 리니지 게임에 몰두하는 만큼 책을 덜 읽게 되지 않을까요?

(* 현재 리니지 게임의 회원은 하루 평균 1.8시간씩 게임을 하고 있다.)

-> “우리 집에는 컴퓨터가 없어요. 아이가 기계에 익숙해지기 전에 부모와 사람과 친해지기를 원했기 때문이죠.
사람과 먼저 대화하고 그 감정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해요. 그래야 좋은 엔지니어가 되고, 훌륭한 의사나 판·검사도 될 수 있어요.
제가 게임을 하는 모습을 우리 아이에게 보여주기는 하죠. 그러나 게임은 생활 안의 즐거움으로 남아야지 생활을 파괴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그는 액면가 500원짜리 주식이 23만6000원이 된 벤처기업을 이끄는 경영자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인간은 동물에서 떨어져 나온 것은 정신을 추구했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진정한 실존이란 정신적인(사이버) 세계에 있는 게 아닐까요.
독서는 정신을 추구하려는 욕구에서 수동적이죠. 게임은 능동적입니다. 요즘 게임은 단순히 자극과 반응의 놀이가 아닙니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해석을 담고 있죠.
게임을 통해 많은 걸 나눌 수 있어요. 게임의 가상적 상황을 통해 더 많은 현실을 느낄 수도 있죠.”

그는 ‘아래아 한글’을 공동개발하고, ‘한메소프트’(컴퓨터 타자 프로그램)를 창립한 주역이다. 그런 그가 유희적인 게임을 만들기 위해 돈을 빌리러 다닐 때 주변에서는 한심하게 여겼다.

“게임은 컴퓨터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한번 도전해볼 만한 분야죠. 컴퓨터란 당초 사무작업을 편하게 해주는 기능이 위주였지요.
하지만 TV가 뉴스 전달만 아니라 오락(entertainment)의 영역으로 갔지 않습니까.
인터넷도 마찬가지죠. 정보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게임에서 꽃이 활짝 필 것입니다. 게임에는 자신의 철학이나 세계관을 집어넣을 수 있죠.”


― 당신 이전에는 인터넷 게임에 도전한 이가 없었나요?

-> “일본과 미국은 비디오 게임이나 PC 게임이 발달해 있었죠. 그 쪽 승부에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예 무대를 바꿨죠.
우리의 장점은 다이내미즘(dynamism)입니다. 가능성 있는 분야에 돌진하는 거죠. 인터넷 망이 깔리고 PC방이 생겨난 것도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반면 기존 게임이 발달한 미국과 일본에서는 오히려 인터넷 게임으로 전환하는 데 부담이 많았지요. 그러나 우리의 독주가 계속되리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미국이나 일본은 우리가 못 가진 힘이 있어요. 올해부터 경쟁이 치열할 겁니다.”


회사의 작년 매출액은 1247억원이었다. 그 중 90%가 국내에서 발생됐다. 이 때문에 국내급(級)이라는 ‘혐의’를 받고 있다.

- > “국내에서는 직접 판매하지만 해외에서는 로열티만을 받아요. 매출액의 기준이 다른 거죠. 작년 로열티 매출이 100억원대였고, 올해는 160억원대로 늘어납니다.
로열티 매출은 그대로 수익이지요. 가령 1%의 이익이 남는 전자레인지를 팔아 100억원을 남기려면 1조원 가량의 제품을 수출해야 가능합니다.”


그가 시작할 때인 5년 전 ‘리니지’의 개발 멤버는 7명. 지금은 672명이다. “초기 멤버는 얼마나 남아 있는가”라는 질문에 그는 “게임 업종은 잔인합니다”라고 말했다.

“위에서 정리해고를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도태된 사실을 알게 만드니까요. 아이디어 회의나 작업을 할 때 우리는 직위와 상관없이 평등합니다. 경력과 보상(報償)의 함수 관계가 없습니다.
자신이 더 이상 쓸모가 없다는 걸 깨닫고 스스로 물러나는 경우도 있고, 테스트 요원으로 들어온 친구가 게임 개발의 주체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 뒤 “우리 회사에서는 최고령자가 42세”라고 했다가, “하지만 스트레스를 받는 게 정상이고 그렇지 않은 게 비정상이지요”라고 바꿨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가끔 스릴을 느끼기도 합니다. 물론 어느 순간 제가 그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지 모르지요.
저는 가끔 산사(山寺)를 찾습니다. 왜 이 자리에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돈도 명예도 사회 기여의 책임 때문도 아닙니다. 즐기기 때문입니다.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게임을 만드는 제작과정이 너무 재미있다는 것뿐이지요.”


―그럼에도 작년에 소유 주식의 평가액만 1553억원이었으니, 마음이 느긋하겠습니다.

-> “그런 말을 듣지만 실제로 돈을 만져보거나 주식투자를 해본 적도 없습니다. 이에 대해 아무런 감정의 반응이 없기 때문에 아직은 제 자신을 신뢰하는 겁니다.
벤처업계에 몸담은 13년 동안, 인생의 흥망성쇠를 바로 곁에서 봐왔습니다. 성공과 실패는 스쳐가는 바람…, 잠시 내 앞에 있다가 없어지는 허상 같은 것이지요.”

그는 작년에 미국의 한 게임전문가 그룹을 스카우트하는 데 470억 원어치의 주식을 줬다. 그의 배짱은 업계에서 화제가 됐다.

“그런 비용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는 것은 행운이었죠. 게임산업의 미래에 대해 우리는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죠.
게임에는 무한한 창의성이 발휘될 것이며, 장차 게임 속 세상에서 사람은 즐겁고 재미있고 미치게 될 것이며, 영화산업을 훨씬 앞지르게 될 것이라는….”


그에게 “당신의 몸값은 얼마인가”라고 묻자, “나를 비싸게 주고 사는 사람은 능력이 없는 겁니다. 돈을 많이 주고 데려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나를 싸게 사는 사람이야말로 능력이 있고 같이 일할 만하지요”라고 응수했다.


― 그러면 어떤 직원과 함께 일하기를 원합니까?

-> “권선징악을 믿는 사람입니다. 잠깐 속일 수는 있어도 세상을 길게 속일 수는 없죠. 결국 옳고 바르게 사는 것이 힘이 됩니다.”


―당신에게 소중한 가치는요?

-> “사람의 존재 의미는 이타심(利他心)에 있다고 봅니다. 행복감이란 내가 좋은 밥 먹고 편한 잠을 잘 때보다, 다른 사람을 도와 그렇게 만들 때 있습니다. 이타심이야말로 가장 이기적인 본성일지도 모르죠.”


◆김택진은 누구/ 온라인게임 리니지 개발 벤처기업가

김택진(金澤辰) 사장은 작년 6월 비즈니스위크지(誌)가 선정한 ‘아시아의 스타’로 뽑혔다. 또 홍콩 의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도 ‘아시아 변화를 주도한 인물’로 선정했다.
인터넷 게임 ‘리니지’의 영향력 때문이다. 실제 대만에서는 ‘천당(天堂)’이라는 명칭으로 리니지의 강한 바람이 불고 있는 중이다. 홍콩·중국을 거쳐 일본·미국 시장에도 서비스되고 있다.

그는 바쁜 업무로 하루 평균 4 시간을 잔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육상을 했다. 중학교 때 축구 시합에서는 혼자서 14골을 넣었다. 후반전에 상대 선수들이 모두 지쳤을 때 혼자만 뛴 결과다. 별명이 ‘정력맨’이었다.

리니지 게임은 중세 유럽을 무대로 주인공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왕권을 찾는 내용이다.
게임을 하는 과정에서, 마법의 액체를 마시면 갑자기 캐릭터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투명 망토를 쓰면 투명인간이 돼 괴물이나 상대방 캐릭터를 쉽게 물리칠 수 있다.
괴물을 물리치면 돈을 벌어 더 좋은 장비의 구입이 가능하다. 이 때문에 일부 게임에 몰입한 청소년간에는 해킹을 통해 다른 게이머(gamer)의 무기를 훔치거나, 실제 돈으로 거래하는 일이 빚어져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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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악바리' 근성으로 일군 '샐러리맨 성공기' ] *************************



< 삼성 이경배 부장, 신체장애 극복하고 끊임없는 자격증 도전 … 사내외 굵직한 상도 휩쓸어.. >

'나이:23세, 학력: 대졸, 자격증: 운전면허 2종, 결혼여부 : 미혼'

입사시험과 면접을 위한 이력서에 이 정도 이력을 적어 넣을 수 있다면 평균 한국인 정도로는 취급받을 수 있었다. 적어도 3∼4년 전까지만 해도...

그러나 상황은 빠르게 바뀌었다. 자신의 첫 직장을 위한 이력서에 해외연수 경험을 적어 넣을 수도 없고, 정보기술(IT) 관련 자격증도 없는 데다 그럴듯한 인턴십 경력도 적어 넣을 수 없다면 입사시험의 관문을 뚫었다 해도 직장에서 그 사람의 성장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임직원 수 18만명의 거대 기업 삼성그룹의 인트라넷 개선 T/F를 책임지고 있는 이경배 부장(42).
이부장이 삼성에 입사할 당시 이력서에도 이 같은 기본사항 외에는 적어 넣을 것이 없었다.

20년 전인 1982년 삼성생명 전산실에 입사할 당시의 일이다. 동국대 전자계산학과를 졸업했으니 이른바 명문대 출신으로 분류될 만한 형편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다. 그는 어릴 적 앓은 소아마비의 후유증으로 지금까지도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다.

대략 이렇게 보자면 이부장은 '관리해야 할' 경력조차 변변치 않은 평범한 중년 샐러리맨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경배 부장은 지금 삼성 내에서 입지전적인 경력관리의 성공 사례로 꼽힌다.

남들보다 불편한 신체조건에도 불구하고 경영혁신 대통령상 수상, 삼성그룹 기술상, 삼성SDS 최우수 프리젠테이션상, 정보통신부 장관 표창 등 굵직굵직한 상들을 휩쓸었다.

최근 들어 정보통신 분야에서 가장 각광받는 자격증 중 하나인 정보처리기술사 자격으로도 그는 '삼성 내 1호'를 기록했다.

“당시는 이건희 회장이 신경영을 도입하면서 '7 - 4제 근무 방식'을 채택한 직후였습니다. 몇몇 계열사에서는 오후 4시가 되면 사원들을 회사 밖으로 몰아낼 정도로 철저하게 '7 - 4제'를 지켜 나가던 시점이었습니다.
남들이 대부분 급작스레 생겨난 여가를 어디에 써야 할지 몰라 방황할 때 저는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경력관리가 이직(移職)이나 전직(轉職)을 위해 몸값을 높이는 수단이라고만 인식하는 사람에게 이부장의 사례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그에게 현재 직장은 예나 지금이나 ‘평생직장’이다. 그가 평생직장론을 신봉하는 데는 남들이 모르는 숨겨진 이유가 있다.


< 한 달에 책 5권 '지독한 책벌레' >

직장생활을 처음 시작한 82년, 최종 신체검사에서 그는 불편한 다리 때문에 사실상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취업을 포기하려던 순간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자신의 신체검사장에 우연히 함께 있었던 당시 모 방송사 뉴스 앵커가 이 광경을 보고 그날 밤 9시 뉴스에서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신체검사에서 떨어뜨리는 경우가 있다’며 이씨 사례를 오프닝 멘트에서 언급한 것.

그러자 회사가 부랴부랴 나서 이씨를 합격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충실한 삼성맨으로 변신했다. 평생직장론의 실마리가 형성된 것도 이때부터.

그러나 아무리 이부장이 평생직장론을 주장한다 하더라도 전업이나 이동이 빈번한 정보통신 분야의 특성상 20년 가까운 직장생활 동안 스카우트 제의나 창업 유혹을 받아보지 않았을 리 없다.

게다가 그는 테헤란로에서 보지도 않고 데려간다는 삼성SDS 연구소장 출신 아니었던가.

인터넷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이해진 사장, 디지털 저작권 관리(DRM) 전문업체인 파수닷컴의 조규곤 사장, 한솔텔레콤의 유화석 사장 등 이름만 대면 알 만한 테헤란로의 쟁쟁한 최고경영자(CEO)들이 모두 삼성SDS 연구원 출신.

“유혹이 없었던 것은 아니죠. 코스닥에 올라간 동생 회사로 가면 대우도 더 잘 받을 수 있었고…. 하지만 신체검사에서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뒤늦게 합격이 결정된 만큼 이 회사에서 승부를 보자고 마음먹었지요. 그렇게 결심하고 나니 '악바리'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들이 모두 나를 주시하고 있다는 부담감도 느꼈고요. 그런 책임감과 부담감이 저를 이 자리까지 오게 한 원동력이라고나 할까요.”

벤처 바람을 타고 독립을 포기한 대신 그는 특유의 악바리 근성으로 그룹 내의 핵심요직만 두루 거쳤다.
삼성전자 전략기획실, 삼성SDS 신경영추진팀 등을 거치면서 신사업이나 경영평가 작업을 벌일 때마다 참여했고 정보기술 관련 저서와 역서도 3권이나 펴냈다.

그와 함께 근무했던 한 직원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이부장이 한 직장에서의 경력관리를 위해 어떤 공을 들여왔는지 엿볼 수 있다.

“그는 대부분의 엔지니어들이 자기 분야에만 정통한 것과 달리, 어떤 분야의 누구를 만나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어 나갈 수 있을 만큼 해박합니다. 말하자면 엔지니어로서 문무(文武)를 겸비한 관리자라는 말이지요.”

그러나 최고경영자도 아닌 그가 가만히 앉아 문무를 겸비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 그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몇 년 전부터 집요할 정도로 계획적인 책읽기를 시작했다.

지금도 그의 수첩에는 한 달에 5권씩 매달 읽은 책의 제목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최근 들어 이부장이 읽은 책은 잭 웰치 전 제너럴일렉트릭(GE) 회장의 ‘끝없는 도전과 용기’, 허브 코헨의 ‘협상의 법칙’, 제프리 J. 폭스의 ‘How to become a CEO’ 등이다.

그러나 그의 독서 리스트에 기업 관련 서적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배워서 남 주나' 같은 시사꽁트집도 있고 '금식으로 병 고치는 방법'과 같은 건강서적도 있다.
고객이나 동료들과의 대화 소재를 넓히기 위한 방편으로 읽는 독서에서 가려야 할 분야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기자 앞에서도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니시무라 아키라의 저서 ‘CEO의 다이어리엔 뭔가 비밀이 있다’라는 책을 가리켰다.

“저 책에는 1시간을 4등분해서 25분 단위로 쪼개 쓰는 시간관리 기법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회사에서 어영부영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많습니까. 목표의식만 뚜렷하다면 그런 무미건조한 직장생활은 당장 때려치워야지요.”

한 직장에서 승부하겠다고 결심한 이상 당연히 그의 꿈은 CEO가 되는 것이다.

“흔히들 새로운 직장을 찾는 것을 경력 전환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지금 직장 내에서 제 능력과 적성에 맞는 업무로 전환하면서 새로운 전환점을 찾는 것도 보람 있는 길입니다.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일이기는 하지만요.”

'난 가방끈도 짧고, 변변한 자격증도 없고…' 하면서 '생존'과 '버티기'만이 직장생활의 유일한 방편이라고 생각하는 직장인이 있다면 이부장의 경험담을 듣고 자신의 자세를 다시 한번 점검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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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뇌성마비 장애인 벤처기업가의 '화려한 시절' ] ************************



** 뇌성마비 장애를 딛고 학창시절 ‘스타 투자가’로 이름을 날렸던 사람. 서른 번이나 취직원서를 냈으나 모두 거절당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결국은 AIG생명에 입사, 6개월 만에 최연소 팀장에 올랐던 사람. ‘노리넷’을 설립하여 모바일 분야의 유망 벤처기업으로 만들어낸 오대규 사장의 ‘화려한 시절’을 들어본다. **

계단을 오르다 몇 번을 주저앉았는지 모른다. 불편한 몸 때문일 수도 있었지만, 사업계획서를 보고 냉랭한 반응만 보이는 담당자들을 보노라면 투자받을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대규 사장은 자신의 아이디어가 한껏 가미되어 잘 정리된 사업계획서를 본다면 누구라도 감탄하게 될 것이라 확신했었다. 그러나 10군데, 20군데, 거절을 받을수록 점점 암담해져갔다.

어느 해외투자자는 사업계획서를 쭉 훑어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 회사는 기껏해야 100만 원 정도 가치밖에 안 된다."

오대규 사장은 순간 오기가 끓어올랐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30군데 가량의 문을 두드렸지만, 누구도 긍정적인 평가를 해주지 않았다.

40군데를 두드렸지만 역시 되돌아온 것은 거절뿐이었다. 주변에서는 이야기했다.
“그건 계란으로 바위 치기야.”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고? 그래 그럼 바위가 부서질 때까지 계란을 던지면 될 거 아냐. 결국 43번째 방문한 창투사로부터 투자를 받아냈다.

모바일 분야 유망벤처기업 노리넷(norri.net)은 그렇게 설립되었다. 노리넷은 KTF를 통해 일곱 가지의 게임을 선보이고 있으며, 특히 ‘루나리스사가 - 영웅탄생’이라는 게임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최근 성심병원으로부터, 휴대폰을 통해 예약 및 환자 체크 등을 할 수 있는 단문메시지 서비스(SMS) 프로젝트도 수주했다.

2002년에 들어서면서 바야흐로 모바일 서비스 산업이 본격적인 성장세에 들어섰다. 그 선두에 노리넷이 자리를 잡은 것이다.


* “내가 마음 아파하면 엄마는 어떻겠어요”

오대규 사장과의 인터뷰를 위해 약속시간에 노리넷 사무실에 들어섰다. 급한 일 때문에 잠깐 자리를 비웠다는 오사장이 10분쯤 지나자 땀을 뻘뻘 흘리면서 뛰어들어왔다. 뇌성마비로 인해 불편한 몸을 끌다시피하며 계단을 뛰어올라온 것이다.

미안하다며 웃는 특유의 순박한 모습에 기자의 모든 부담감이 일순 해소되었다. 그에게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거기에는 어떤 핸디캡도 느껴지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였어요. 뇌의 한 부분이 죽는 것인데, 다행히 육체적인 분야를 관장하는 뇌 쪽이 죽었어요. 그래서 정신지체아가 되진 않았어요.”
마치 남의 얘기하듯 자연스레 이야기한다.

그는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절고 한쪽 팔을 사용하진 못했지만 다행히 지적 능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핸디캡이 많았겠어요. 애들한테 놀림도 많이 받았을 텐데요?”

“저는 아주 어릴 때부터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마음 아파하면 엄마는 더 마음 아파할 거라구요. 놀림받을 때, 정작 저는 괜찮았는데 저의 어머니가 몹시 힘들어하셨죠.”

오대규 사장의 오늘이 있기까지에는 그의 어머니의 힘이 가장 크다. 그가 입학할 나이가 되었을 때, 당연히 장애인학교로 가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만은 생각이 달랐다. 아들이 장애인처럼 성장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일반 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출발이 좋았다. 처음 치는 시험에서 전교 1등을 한 것이다.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그의 육체적 핸디캡을 많이 커버해주었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의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남들보다 탁월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학창 시절 그는 오로지 집과 학교밖에 몰랐다.

“공부는 잘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쫌팽이었어요. 오로지 제 길만 있었죠. 남과의 교류는 없었어요.”

당시 그는 서울대를 들어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그것만이 불리한 여건에 있는 자기 인생의 든든한 받침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의대를 희망했던 그는 자신의 신체적 조건으로 인해 의대에 진학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크나큰 좌절을 맛봐야 했다.
그 후로 그는 방황하게 되었고, 대학을 떨어지고 말았다.


* 5수 시절에 신념을 배우다

그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기를 꼽으라면 5수 시절을 꼽는다. 어떻게 보면 가장 참담했을 수도 있을 시절이었지만, 돌이켜보면 그에게는 보약이 된 시절이었다.

“재수, 삼수 시절에 비로소 주위를 둘러보게 되었어요. 주변에 저만큼 실력 있는 친구들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요. 그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사람과 사람 간의 만남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성격도 외향적으로 바뀌게 되었어요.”

외향적으로 바뀌었다기보다, 그의 속에 숨어 있던 적극성·외향성이 드디어 세상을 향해 튀어나온 것이다. 그 시절 그는, 자신 역시 여느 누구와 다름없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와 서울대는 끝내 인연이 없었다. 공부하는 맛에 흠뻑 빠져들었던 삼수 시절에 모의고사에서 전국 1등을 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지만, 결국 서울대에는 떨어지고 말았다. 이때 또 한 번 좌절을 겪었다. 그러나 그의 의지만은 꺾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이와 같은 좌절을, 편견 속에서 홀로 서기를 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라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결국 입시요강이 바뀌면서 5수 끝에 서강대 경영학과에 전체 수석으로 입학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사실 연세대 경영학과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그것도 불안하게 여겼던 어머니가 고등학교 때 담임과 짜고 저 몰래 서강대에 원서를 넣었더라구요.”

그는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당시 서강대 박홍 총장이 직접 찾아와 그를 한 시간 동안이나 설득했다. “자네 같은 사람이 우리 서강대를 빛내줘야 한다”는 말에 그는 고집을 꺾었다.


*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한마디씩 성장한다

대학 1학년 때 그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다. 그는 이성이 자기를 좋아하고 따른다는 것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1년쯤 사귀었을 무렵 여자 측 부모로부터 인사하러 오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명문대고 수재고 간에 무조건 안 돼, 당장 헤어져.”

어떤 이유나 설명도 할 틈이 없었다. 그의 사랑은 이렇게 깨어졌다. 그는 삶의 의욕마저 잃어버렸다.

“그때 어머니 얼굴이 떠오르더라구요. 절 위해 온갖 고초를 마다하지 않던 어머니를 저버릴 수가 없었어요.”

그는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도약할 계기를 찾았다. 마침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투자수익률 게임이 열렸다.

오래 전부터 나름대로 투자를 해왔던 그는 집중적으로 투자기법을 다듬고 그것을 가지고 수익률 게임에 도전했다.
그리고 그 게임에서 엄청난 수익률을 올리면서 일등을 차지했다. 스물 여섯 살 젊은이가 개발한 투자이론은 당시에 커다란 화제가 되었다. 그는 다시 자신감을 회복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내몰았다. 조금의 위축도 용납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틈이 없을 만큼 자신을 내몰았다. 교수들을 좇아다니면서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하고, 또 교내 아르바이트도 했다.

“저는 나서는 것을 아주 좋아해요. 그리고 뭔가 좀 튈려고 하구요.”

재학 시절 서강대에서 그를 모르면 간첩이었다. 대학생 주식도사로 명성이 자자했던 그는 친구 어머니들 대상으로 10억 원 규모의 사설 펀드(오대규 펀드)를 운영하기도 했다.

매년 수익률을 30% 이상 유지했으며, 타 대학에 강연도 다녔다. 대학교 3·4학년 때는 무려 50번 이상의 미팅을 하기도 했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했어요. 제가 좋아하기도 했고, 또 후배들이 알아서 약속을 잡아놓는 거예요.”

그는 그 많은 미팅에서 애프터 신청을 해서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비결요? 글쎄요. 다들 제가 편안하대요.”

대학 시절 그에게 핸디캡이란 없었다. 오히려 그의 열정적인 활동에 보통 학생들이 핸디캡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의 후배들은 그를 보면 이렇게 말한다. “형! 형 얼굴에는 아예 ‘거만’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어.” 이 시절 오대규 사장은 크고 작은 모임의 장을 맡아 이끌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그야말로 잘나가던 그는 졸업을 눈앞에 두고 또 한 번 제도권의 벽에 부딪힌다.
서강대에 전체 수석으로 입학하고 과 수석으로 졸업한 그였지만, 면접에서 번번히 떨어졌다. 무려 30군데나 취업원서를 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면접볼 때 저는 제가 장애인이라는 생각을 안 했었어요. ‘난 뭐든지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날 안 뽑아주느냐’는 식이었죠.”

어떻게 보면 간단한 문제였지만, 당시 그에게는 큰 벽이자 시련이었다. 평소 따르며 조언을 구하곤 했던 심리학 담당 최혜림 교수를 찾아갔다.

“교수님께 제 상황을 말씀드리고 도움을 구했죠. 그랬더니 대뜸 이렇게 물으시는 거예요. ‘자네,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그랬지. 그럼, 저기 가서 저거 한번 들어봐.'

그러면서 구석에 있는 무거운 짐을 가리키는 것이었어요. 당연히 못 든다고 그랬죠. 곧바로 교수님이 일갈했어요.”

“그것 봐, 다 할 수 있긴 뭘 다 해. 장애자라는 것을 인정해. 그것을 인정하고 들어가야 취직이 돼지. 그렇지 않으면 결코 취직이 될 수 없어.”

당시 그는 마치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고 한다. 잘난 자기가 무너지면서, 세상이 눈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고 한다.

“제가 다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신 제가 잘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최대한 만족을 시켜드리겠습니다.”

얼마 후 삼성전자·현대종합상사·AIG생명 등 무려 다섯 개 회사로부터 취직 통지서를 받았다.


* AIG생명보험에서 돌풍을 일으키다

현대종합상사에 입사했던 오사장은 조직의 시스템이 자신과는 너무 맞지 않아 곧바로 그만두고 AIG생명을 노크했다.

AIG생명에서는 매니저만이 그를 매우 마음에 들어했다. 그러나 부지점장과 지점장은 그가 영업 일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정을 내렸다. 매일 찾아갔으나 헛수고였다.

“저에 대해 무척 안타까워하던 매니저가 하루는 저를 부르더라구요. 그러더니 몇 월 몇 일에 전무님이 새로 부임해 오시니 그날 나와보라는 거예요.”

AIG생명에 새로 부임한 전무는 그를 흘깃 보고는 망설임 없이 한마디했다.

“저 친구, 잘하겠는데.”

이로써 오대규 씨의 입사는 결정이 났다. 그리고 그 전무의 안목은 정확했다. AIG생명의 신입사원들은 입사 후 처음 7개월 동안 일정액의 계약고를 올려야 비로소 정식 부서로 발령이 났다.

그 약정액은 사회생활을 처음 하는 신입사원에게는 벅찬 액수였다. 오대규 씨는 단 2개월 만에 그 계약고를 채우는 기염을 토했다. AIG생명 설립 사상 최단기 기록이었다.

처음에 오대규 씨도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의 유일한 백그라운드인 모교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다시 도서관 주임의 소개로, 연대 신방과 교수로 있는 그녀의 남편을 찾아갔다.

“나이도 얼마 안 되고 입사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놈한테 어떻게 돈을 맡기냐?”

당시 연대 교수는 마치 시험이라는 하는 듯한 투로 오대규 씨에게 물었다. 한 번 맡겨주시면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자네, 주식 좀 한다며?”

그러더니 500만 원을 건네주며, 말일까지 20% 수익만 내오라고 했다.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는 것이었다. 그날이 12월 1일이었으니 딱 한 달의 기간이 주어진 것이다.

오대규 씨는 단 3주 만에 50%의 수익을 만들어 찾아갔다. 교수가 수익액을 돌려주려 했지만, 오대규 씨는 돈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며 고사했다.

그것을 인연으로 그 교수는 물론, 그 교수를 통해 30여 명의 교수가 단체로 보험에 가입했다. 그 후 6개월 동안 그는 한 번도 1등을 놓치지 않았다.

“비결이라면, 보험상품을 고가·중가·저가로 다양하게 설계해 고객의 급여 정도와 필요성 등을 따져서 가장 경제적이고 저렴한 것을 권했어요. 고객의 돈을 제 돈처럼 소중하게 여긴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영업방식은 생명보험업계의 영업 패턴을 완전히 바꾸어놓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오대규 씨의 신화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최단기간인 6개월 만에 최연소 팀장으로 발령받는 기염을 토했다.

그는 전무실 직속기관인 기획실에 배치되어 상품개발을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그가 개발한 ‘에버레스팅’이라는 연금상품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지금도 인기 상품 중의 하나이다.


* 동생한테 진 빚을 갚기 위해 벤처기업 시작

“동생한테는 항상 빚진 심정이었어요. 가족들의 시선이 항상 저를 향하고 있었으니 동생은 상대적으로 많은 박탈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그의 동생은 지금 노리넷 개발팀장으로 있는데, 오대규 사장의 초·중·고 후배이기도 하다.

주변의 모든 시선이 오대규 사장에게 집결되니 동생은 상대적으로 소외감을 느꼈으며, 방황도 많이 했다.
오대규 사장은 그런 동생에 대해 항상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동생이었는데 어느 날 친구 둘과 함께 모바일 게임을 개발했다며 형에게 도움을 청해왔다. 사업화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당시 스물 아홉 살의 오대규 사장은 AIG생명에서 그야말로 잘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동생에게 진 심리적인 빚을 갚을 때라고 생각했다.

순풍에 돛을 달려는 찰라에서 AIG생명을 그만두고, 계란으로 바위 치기 격인 벤처기업가의 길을 택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투자를 이끌어냈으며, 노리넷을 설립했다.

“2000년도 초반 노리넷을 설립했을 때는 벤처 열풍이 막 막을 내리던 시점이었어요. 결국 우리가 시작했을 때는 벤처기업으로서 최악이었지요.”

당시 모바일 분야는 누군가는 시작해야 할 시점이었지만, 수익과는 거리가 먼 시점이었다. 더군다나 경기 위축으로 모든 이동통신사들이 금고를 꼭꼭 걸어 잠가버렸다.

“영업을 뛸 데라도 있었으면 어디든지 다녔겠지요. 우리가 상대해야 할 곳은 통신사 네 군데뿐인데, 그곳에서 빗장을 걸어 잠가버리니 다른 데 갈 데도 없는 거예요.”

대학입시 때 겪었던 어려움, 취업 때 겪었던 어려움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지난 2년간 회사 문을 들어서기가 마치 지옥문에 들어서는 것 같았다고 한다.

“정말 자살도 생각할 때가 있었어요. 그러나 팀원들이 회사를 너무 잘 지켜주었어요. 그들 때문에 저 역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2001년 가을부터 모바일 산업은 본격적인 성장 궤도에 진입했다. 이제 매년 300% 이상 성장할 것이라는 것이 오대규 씨의 예측이다. 그리고 그 선두에 노리넷이 있는 것이다.

“우선 회사가 성공해야 됩니다. 그래야 저의 성공도 있고, 직원들의 성공도 있습니다. 모바일 게임 컨텐츠 분야에서 세계 제일의 기업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의 다음 목표는 보건복지부 장관이 되는 것이다. 장애인으로서 겪어왔던 자신의 어려움을 바탕 삼아 좀더 현실적인 복지정책을 수립하고 싶다는 것이다.

사실 그가 훌륭한 벤처기업가로서 노리넷을 최고의 기업으로 키워낸다면, 그것만으로도 장애인들에게는 그 어느 복지정책보다 더 크고 값진 가치를 전달해줄 것이라 생각된다.

이미 오대규 사장은, 사람을 완성시키는 것은 어떤 외형적인 완전성의 여부가 아닌 내면적인 요소, 이를테면 신념·꿈·인내 등의 힘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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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공의 안내자!!! - 데일 카네기 ] ******************************



<< 사람을 움직이려 하지 말고 포용하라. >>

** 기업의 성과부진, 영업력, 리더십, 조직관리 능력, 가족애 등 데일 카네기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생길 수 있는 모든 문제 해결의 근간을 인간관계에 두었다.
어떤 혁신 전략이나 시스템 재구축보다도 인간관계의 문제를 원활하게 하는 것이 발전의 핵심 열쇠라 여긴 것이다.
그의 이런 사상은 100여 년 동안 검증되어 왔으며, 지금도 수많은 조직에서 카네기 트레이닝을 통해 성과를 얻고 있다. **


1912년 데일 카네기가 뉴욕의 YMCA에서 대중화술에 대한 강연을 시작한 이래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삶 속에서 크고 작은 기적들을 접했다.

그의 저서 <인간관계론(How to win friends and influence people)>은 근 100년 동안 전 세계적으로 매월 2만 권 이상 팔렸으며, 지금도 여전히 팔리고 있다.


또한 카네기 트레이닝 코스는 포춘 500대 기업들 중 420개 이상 기업의 교육코스로 채택되고 있으며, 전 세계 80여 개 국에서 연간 30만 명 이상이 카네기 트레이닝 과정을 이수하고 있다.

국내에도 지난 1992년에 도입되어 국내 400개 기업에서 교육훈련으로 채택하고 있다.

카네기 트레이닝이 만들어진지 근 100년이 지났지만 교육훈련 분야에서는 여전히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다.


< * 시골 청년 데일 카네기, 뉴욕으로 상경하다. >

데일 카네기는 미주리 주의 가난한 시골 농장에서 태어났다. 학창 시절 그는 알 수 없는 열등감에 휩싸여 스스로 위축되곤 했다.
그러한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애를 쓰던 그는 토론 클럽에 가입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대학졸업 때까지 화술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하게 되었다. 이 시절 그는 풍부한 지식과 언어구사 능력을 쌓았다.

졸업 후에 그는 한동안 연극에 몰두했다. 연극 전문학교에 다니기 위해 1910년 뉴욕으로 갔다. 지방순회 극단에 참가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자신의 길이 아님을 발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후 트럭회사의 세일즈맨, 회사원, 교사, 잡상인 등 여러 가지 일을 전전했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들이 아니었다.

1912년 비로소 그의 삶은 제 궤도를 찾았다. 대학시절 화술에 대해 공부했던 것이 인연이 되어 1912년 그는 YMCA에서 대중화술에 대한 강연을 맡게 된 것이다.

당시만 해도 대중 앞에서 말을 한다는 것은 단순한 변론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예술로 인식되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대중화술 교육의 방향도 표현력이 풍부한 웅변가나 연설가 양성에 중점을 두었다.

그런데 데일 카네기는 일반인들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자신감 있는 표현을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강의를 최초로 시도했다.

그의 대중화술에 대한 강의는 뜻밖에 많은 호응을 얻어냈다. 처음 일당 2달러를 받으면서 시작된 그의 강연은 얼마 되지 않아 일당이 30달러로 올랐다.

사람들 누구에게나 남들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보다 분명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숨은 욕구가 있었던 것이다. 그 욕구가 카네기를 통해서 비로소 충족되게 된 것이다.

화술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카네기는 수많은 사람들과 상담을 했으며, 사람들이 가진 문제에 좀더 가까이 직면하게 되었다.

상대편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만 잘 훈련된다고 해서 인간관계의 문제가 완전하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상호간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사람들을 이해하고 또 리드할 수 있기 위해선 특별한 처세술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화술강의를 시작했지만, 인간에 대한 탐구가 곁들어지면서 점차 처세술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데일 카네기는 <인간관계론>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 바가 있다.

“가정주부이거나, 건축가이거나, 기술자이거나 간에 이들이 직면하는 가장 큰 문제는 사람을 다루는 문제일 것입니다. 카네기 기술연구소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큰 성공을 거둔 사람들의 15%가 자신의 기술적 지식에 의한 것이고, 85%는 바로 사람을 움직이는 능력 때문에 성공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당시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의하면, 가장 큰 관심사는, 첫째가 건강이고, 둘째가 어떻게 사람들을 사귀고 이해하느냐, 어떻게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게 만드는가, 어떻게 자기 생각대로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느냐 하는 것 등이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 카네기 성공법의 골수 ‘인간관계론’의 탄생 >

카네기는 인간관계에 대한 지침서의 필요성에 대해 절실히 느꼈다. 그때부터 그는 친구들을 사귀고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쓰여졌던 아이디어를 찾았다.

그는 심리학에 관한 서적과 논문을 섭렵했고, 위대한 지도자들의 전기를 읽으며 그들이 어떻게 사람을 다루어 왔는가를 알아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또 에디슨, 프랭클린 루스벨트, 클라크 게이블 등 각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인간관계 테크닉을 알아내려고 노력했다.

몇 년간의 노력 끝에 ‘인간관계론(How to win friends and influence people)’이라는 작은 자료집이 나왔다.
처음에는 아주 짧은 몇 개의 원칙으로 시작했지만, 강연이 거듭될수록 양이 점점 늘어갔다.
교육을 받는 사람들이 생활에 적용해보고 얻어낸 사례들을 하나둘 첨가해 나갔기 때문이다. ‘인간관계론’은 한 어린이가 자라듯이 수많은 성인들의 경험을 통해서 성장되고 개발되었다.

처음에는 몇 개의 규칙에 불과했던 것이 한 시즌의 교육과정을 거치면서 좀 더 큰 카드에 인쇄되었고, 다음에는 얇은 책자로, 그 다음에는 시리즈로 된 팜플렛으로 만들어졌다.

이런 과정을 거친 15년 동안의 실험과 연구 끝에 드디어 ‘인간관계론’이 완성되었다. 그 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바탕으로 한 카네기 트레이닝을 통해 놀라운 혁신을 이룩해냈다.

카네기는, 인간은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자원의 극히 일부분만 사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사용되지 않는 능력을 개발하는 방법이 인간관계 속에 있다고 한다.

인간관계의 개발을 통해, 사용되지 않는 능력을 발견하고 개발하여 이익을 얻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카네기 트레이닝의 목표이다. 이제 카네기 트레이닝을 통해 인간관계의 지혜를 배워보자.


< 다른 사람의 마음에 열렬한 욕구를 불러 일으켜라. 이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전 세계를 얻을 수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외로운 길을 걷는다. >

카네기는 마이클 위든의 예를 통해, 지시하는 것보다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야기하곤 했다.

로드 아일랜드 주의 워위크에 거주하는 마이클 위든은 셸 석유회사의 지역 담당 판매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마이클은 자기 지역 내에서 첫째 가는 판매원이 되고 싶어했으나, 주유소 한 곳이 말썽거리였다.

이 주유소는 한 노인이 경영하고 있었는데, 주유소 외양이 너무 지저분하다보니 판매량이 형편없었다. 아무리 주유소를 청결하게 만들라고 이야기해도 막무가내였다.
주유소를 개선시키기 위해서 마이클은 그 노인에게 진심 어린 대화도 시도하고, 경고도 했다. 때로는 애원도 했지만 노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고민 끝에 마이클은 노인을 데리고 그 지역 내에서 가장 청결한 주유소를 방문했다.
노인은 마치 자신의 안방처럼 잘 정돈되고 청결한 주유소를 보고는 연신 감탄사를 쏟아냈다.

며칠 후 마이클이 노인의 주유소를 찾아갔다. 완전히 딴판이었다. 예전의 지저분했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당연히 판매량도 급증했으며, 마이클은 그 지역 최고의 판매원이 될 수 있었다.

수많은 이야기와 경고에도 꿈쩍 않던 노인이, 청결하게 관리되는 주유소를 보고는 열렬한 욕구가 생긴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뛰어난 테크닉이나 노하우가 아니다.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에너지인 열렬한 욕구인 것이다.


< 진실된 마음으로 상대에게 관심을 가지면 그들로부터 관심과 협조를 얻을 수 있다. >

루스벨트는 카네기의 단골 초청손님이다. 그의 저서 곳곳에서 루스벨트는 카네기를 돕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중 한 명인 루스벨트의 위대한 힘 중 하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진실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루스벨트는 대통령 임기가 끝난 후에도 가끔씩 백악관으로 전화를 걸어, 옛날에 자신이 데리고 있던 하인들, 심지어 식모에게까지도 이름을 부르면서 인사를 하곤 했다.

퇴임 후 어느 날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였다. 그가 주방 하녀인 앨리스를 만났을 때, 요즘도 옥수수빵을 만드는지 물었다.

그녀는 가끔 하인들을 위해 만들기는 하지만 윗분들은 드시지를 않는다고 했다. 루스벨트는 “맛을 모르는 사람들이구먼. 내가 대통령을 만나면 말해주겠네.”라고 말했다.

앨리스가 쟁반에 옥수수빵을 담아서 가져오자, 루스벨트는 그 빵을 먹으면서 걸어가며 정원사나 일꾼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며 다정하게 인사했다.

40년 동안 백악관의 수석 집사를 지낸 아이크 후버는 눈물을 글썽이며 이 날을 회고했다.
“저희들에게 이렇게 기쁜 날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천만금을 준다 해도 아무도 이 날과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존슨앤존슨 사의 영업직원이었던 에드워드 사익스 역시 상대방에 대해 진실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거래하는 약국에 들를 때마다 점원들과 먼저 인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나중에 주인과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약국의 주인이 존슨 사가 약국보다는 주로 식품가게와 할인매장에 마케팅을 집중한다며, 앞으로 거래를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에드워드는 일단 다른 거래처를 몇 군데 들른 후 다시 그 약국으로 찾아갔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점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주인에게로 갔다.

주인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환영하더니 평소보다 두 배나 더 많이 주문하는 것이었다.

에드워드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주인이 한 젊은 점원을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당신이 나간 뒤에 저 젊은 점원이 오더니, 일부러 점원을 찾아와서 인사하는 세일즈맨은 몇 명 안 되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당신이라며, 어떤 영업사원이 이 약국과 거래할 자격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당신이라는 것입니다.” 그 후 그 약국은 에드워드의 튼튼한 단골이 되었다.


< 당신의 생각이 틀릴지도 모른다고 인정하면 결코 당신은 곤란에 빠지지 않는다.
또한 이러한 생각은 모든 논쟁을 중단시키며, 상대방으로 하여금 당신처럼 공평해지고 솔직해지고 너그러운 마음을 갖도록 만들 것이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어쩌면 자기 생각이 틀릴지도 모른다고 인정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할지도 모른다. >

카네기는 캐더린 A. 올레드야말로 이 점에 대해 훌륭한 경험을 이야기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킹즈 마운틴에 사는 캐더린 A. 올레드는 어느 방직공장의 생산기계 담당 감독원이다.
생산기계가 늘어나고 생산품목도 늘어남에 따라 그 공장은 전혀 새로운 운영시스템이 필요하게 되었다. 캐더린은 새로운 시스템 개발에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그 필요성과 당위성을 간부들에게 알리기로 했다.

그녀는 간부회의에 참석해서 간부들의 운영상 잘못된 부분, 공평치 못한 부분을 지적하고, 거기에 따른 모든 해결책을 자신이 갖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일순 회의 분위기는 냉각되었고, 누구도 새로운 시스템 구축에 대해 동의를 해주지 않았다. 그녀는 카네기 트레이닝을 받은 후 다시 이 문제를 가지고 간부회의에 참석했다.

“이번에는 간부들이 생각하는 문제점이 무엇인지 의견을 내달라고 했습니다. 의견이 나온 후에는 그들이 생각하는 최선의 방법도 물어보았습니다.
적절한 시간을 두고 저는 낮은 목소리로 몇 가지 제안을 한 후 잠자코 있었습니다. 회의가 끝나갈 무렵, 비로소 제가 연구한 시스템을 소개하자 간부들은 열렬하게 그것을 환영했습니다.”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그가 틀렸다고 그 자리에서 직선적으로 말해보아야 아무런 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방식은 상대방의 자존심을 손상시키며, 어떤 토론에서든지 환영받지 못한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 한 통의 쓸개즙보다 한 방울의 꿀이 더 많은 파리를 잡을 수 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만일 누군가를 자기편으로 만들고 싶다면, 우선 그 사람에게 당신이 그의 진정한 친구임을 확신시켜 주도록 하라. >

카네기는 이 이야기를 할 때면 항상 록펠러의 걸작 연설문 전문을 소개하곤 했다. 1915년 당시 록펠러는 콜로라도 주에서 그 누구보다도 가장 많은 미움을 받던 사람이었다.

미국 산업역사상 가장 끔찍한 파업사태가 2년 동안 콜로라도 주를 강타했다. 성난 광부들이 콜로라도에 있는 록펠러 소유의 석유회사와 강철회사를 대상으로 임금인상을 요구했다.

회사 기물이 파손되고, 군대까지 동원되어, 파업하던 사람들이 총에 맞아 쓰러지는 유혈사태까지 발생했다.

서로에 대한 증오가 하늘을 찌를 듯한 이 때에 록펠러는 어떻게든 상대방을 설득하려 했다.

증오에 가득 찬 광부들을 대상으로 록펠러는 연설을 하기로 결정했으며, 그 연설은 기적을 일으켰다. 증오가 가라앉은 것은 물론 추종세력까지 생겨났다.

파업 광부들은 그토록 격렬하게 싸웠던 임금문제에 대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일터로 돌아갔다.

“오늘은 내 생애에 있어서 특별한 날입니다”로 시작되는 이 연설은 록펠러를 교수대에 매달고 싶어하는 광부들 앞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온화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진행되었다.

이 연설에는 ‘여러분들의 가족을 방문하여 많은 가족들을 만나보았고’, ‘우리가 여기서 만난 것은 낯선 사람들로서가 아니라 친구로서이며’ ‘상호 우호의 정신과 공동의 이익’, ‘내가 여기에 있게 된 것도 다 여러분의 덕택’이라는 구절로 가득 차 있었다.

만일 록펠러가 여러 가지 논리를 동원해서 광부들의 잘못을 입증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광부들의 분노는 더 커졌을 것이고, 더 많은 증오와 폭동이 일어났을 것이다. 카네기는 록펠러의 예를 통해 다음과 같은 것을 이야기한다.

“만일 어떤 사람의 가슴이 당신에 대한 나쁜 감정과 증오로 가득 찼을 때는 이 세상의 어떤 논리를 가지고도 그의 마음을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움직일 수 없다.
아이들을 꾸짖는 부모나 윽박지르는 직장 상사와 남편, 그리고 잔소리 많은 아내들은, 사람들이 자기의 생각을 바꾸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을 강제로 윽박지른다고 해서 그들의 의견이 당신의 것과 똑같아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진심으로 점잖고 다정하게 대하면 그들의 생각이 바뀔 확률이 더 많다.”


< 상대를 설득하려면 상대방이 이야기를 하도록 만들어라. 그들과 의견이 다를 때는 중간에 말참견하고 싶은 유혹이 생길 것이다.
그럴 때는 마음을 활짝 열고 끈기를 가지고 그들의 말에 귀를 귀울여라. 그리고 그들의 생각을 충분히 말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라. >

카네기는 이 장에서는 종종 차 시트용 직물 판매책임자의 예를 든다.

미국 최대의 자동차회사 중 하나가 차 시트용 직물 1년치를 주문하기 위해서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세 개의 큰 메이커가 견본을 제출했다.
이 견본들은 자동차회사 중역의 검사를 거쳤다. 이제 각 직물공장 대표들이 최종 프리젠테이션을 위해 자동차회사를 방문해야 한다.

납품업체인 K공장 대표 G씨는 운이 없게도 프리젠테이션 당일날 후두염 때문에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G씨는 회의실로 안내되어 직물 담당 부장, 엔지니어, 구매 담당 에이전트, 영업부장, 그리고 그 회사의 사장 등과 마주했다.

그는 똑바로 선 채 말을 해보려고 무척 애를 썼으나, 목소리가 쉬어서 말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결국 종이에 ‘여러분, 목소리가 안 나와서 말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라고 써서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사장이 “내가 말씀해드리지요.” 하고 나서더니, G씨가 가져간 샘플을 꺼내 보이면서 그 제품에 대한 장점들을 말했다.

그리고 서로 그 제품의 장점들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결국 G씨가 한 일이라곤 미소를 짓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제스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재미난 모임에서 그가 체결한 계약 액수는 G씨가 지금까지 받은 어떤 거래에서보다도 컸다. 대략 160만 불의 거래가 성사된 것이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만일 목소리가 쉬지 않았더라면 그 계약을 놓쳤을 겁니다. 왜냐 하면 나는 이 주문에 대해 전적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말을 하도록 하면 때로는 큰 이득이 돌아온다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한 셈입니다.”

카네기는 모든 어려움의 근간에는 인간관계에 따른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이 비즈니스건, 가족간이건, 혹은 친구간이건, 어떤 어려움이 발생했다면 그 문제의 원천에는 인간관계의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즉 모든 어려움을 해결하는 열쇠 역시 인간관계에 있다는 말이다.



<< 사람을 다루는 3가지 원칙 >>

1. 비난이나 비평, 불평을 하지 말라.

2. 솔직하고 진지하게 칭찬하라.

3. 다른 사람에게 열렬한 욕구를 불러 일으켜라.


<< 남에게 호감을 사는 6가지 원칙 >>

1. 다른 사람에게 순수한 관심을 기울여라.

2. 미소를 지어라.

3. 상대방에게는 자신의 이름이 그 어떤 것보다도 기분 좋고 중요한 말임을 명심하라.

4.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되어라. 자신에 대해 말하도록 다른 사람들을 고무시켜라.

5. 상대방의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하라.

6. 상대방으로 하여금 중요하다는 느낌이 들게 하라. 단, 성실한 태도로 해야 한다.


<< 자신의 의도대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12가지 원칙 >>

1. 논쟁에서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피하는 것이다.

2. 상대방의 견해를 존중하라. 결코 “당신이 틀렸다”고 말하지 말라.

3. 잘못을 저질렀다면 즉시 분명한 태도로 그것을 인정하라.

4. 우호적인 태도로 말을 시작하라.

5. 상대방이 당신의 말에 즉각 “네, 네”라고 대답하게 하라.

6. 상대방으로 하여금 많은 이야기를 하게 하라.

7.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 아이디어가 바로 자신의 것이라고 느끼게 하라.

8. 상대방의 관점에서 사물을 볼 수 있도록 성실히 노력하라.

9. 상대방의 생각이나 욕구에 공감하라.

10. 보다 고매한 동기에 호소하라.

11. 당신의 생각을 극적으로 표현하라.

12. 도전의욕을 불러 일으켜라.


<< 리더가 갖추어야 할 9가지 원칙 >>

1. 칭찬과 감사의 말로 시작하라.

2. 잘못을 간접적으로 알게 하라.

3. 상대방을 비평하기 전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라.

4. 직접적으로 명령하지 말고, 요청하라.

5. 상대방의 체면을 세워주라.

6. 아주 작은 진전에도 칭찬을 아끼지 말라.

7. 상대방에게 훌륭한 명성을 갖도록 해주라.

8. 격려해주라. 잘못은 쉽게 고칠 수 있다고 느끼게 하라.

9. 당신이 제안하는 것을 상대방이 기꺼이 하도록 만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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