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말표구두약 창업주에서 된장 담그는 '머슴'으로 변신한 정두화 회장 ] **************



<“구두약 장사 관둔 지 33년이여…”>

“나는 나이 여든이 넘은 늙은이예요. 늙은이한테 무슨 들을 말이 있겠어요. 시골에서 농사나 짓는 사람인데….”

정두화(84) 수진원 농장 회장은 직접 전화를 받았다. 한사코 인터뷰를 거부해 “어르신의 된장 담그는 솜씨를 보고 싶어 언제 어느 때 출발하겠다”는 메모만 남기고 자동차 시동을 걸었다.

미끈하게 닦인 6번 국도를 따라 달리기를 1시간여. 양평에서 대흥리 방향으로 살짝 빠지면 어렵지 않게 ‘수진원 농장’을 찾을 수 있다.
농장 입구에는 '기다리는 마음'이란 시비(詩碑)가 서 있고, 사람을 부르려면 시비 옆에 있는 종(鐘)을 울려야 한다.

‘징∼’ 하고 종을 울리니 ‘빡빡머리’의 정회장이 털신 차림으로 타박타박 걸어 나온다. 얼룩강아지 두 마리가 얼른 주인의 꽁무니에 따라붙었다. 그러는 동안 시비에 새겨진 시를 읽는다.

‘맑은 시냇물 흐르는 동산 위에/꽃피고 새가 노래하는 곳/수진원이라 하네/…/농사를 천직으로 얼룩진 몸을 닦으며/의리를 배워 실천하는 그분을 기다리며.’

정회장은 ‘수진원 농장 머슴 정두화(鄭斗和)’라는 명함을 공손히 건넸다. 두 손으로 명함을 주는 자세가 무슨 맞절을 하는 것 같다. 6시간에 걸친 인터뷰 내내 그는 젊은 기자에게 존대말을 썼다.

‘머슴’이라는 직위에 눈길이 갈 수밖에…. “머슴은 남의 것을 뺏어먹는 재주가 없어요. 사람의 주인이 자연인데, 그저 자연이 주는 대로 받으면서 살아야지요. 머슴은 정성만 심으면 됩니다.” 그래서 아호(雅號)도 머슴이라고 했다고.


< 거룻배 타고 들어와 집 짓고 콩밭 갈아.. >

-농장이 꽤 넓은데요. 족히 2만평은 돼 보입니다.

* “콩밭만 2만5천 평이에요. 농사에 바쁘니까 땅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릅니다.”

수진원에서는 농장 안에 콩과 찹쌀을 심어 된장·간장·고추장을 만든다. 처음에는 친지와 지인들에게 재래식 된장을 선물하는 수준이었는데, 알음알음 찾는 사람이 늘어 단골이 꽤 된다.

옛 창경원에서 종자를 얻어와 토종닭도 기른다. 길마다 은행나무를 심어 가을에 은행 따는 일도 만만치 않다.

장독대에는 듬직한 항아리만 9백여개가 빼곡하게 도열해 있다. 항아리별로 ‘4334된7’ ‘4328간2’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다.
이들은 각각 단기 4334년(2001년) 담근 7번째 된장독, 단기 4328년(1998년) 담근 간장독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임금님 수라상에 올라가는 간장은 최소 5년은 묵혀야 했어요. 새끼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세요. 아주 고소합니다. 간장 한 종지에 계란 한 알이면 누구든지 밥도둑이 됩니다.”

정회장은 옹골차게 재래식만 고집한다.

“메주를 띄우고, 된장을 담그는 데 옛날 방식이 최고”라는 믿음 때문이다.

“옛날부터 메주는 대청 시렁 위에 매달았습니다. 가장 햇볕이 잘 들기 때문이지요. 여기에 바람이 들고, 미생물이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산수유부터 국화까지 계절의 꽃가루가 찾아와야 합니다. 그 방식 그대로 따르려고 합니다.”


정회장이 머슴 생활을 결심한 것은 꼭 33년 전이다. 군수품으로 시작한 ‘말표 구두약’이 빅히트를 치던 때였다.

고향인 경기도 양평 용문면 삼성리에 농사터를 잡았다. 지금이야 다리도 놓이고 인터넷 홈페이지(www.suzinwon.com)도 생겼지만, 당시는 개천을 건너려면 배를 타야 했던 시절이다.

“뚝섬에서 나룻배를 만들어 한강을 따라 양평 삼성리까지 거슬러 왔어요. 여기에 집을 짓고, 밭을 일구고 콩을 심었습니다.”

‘농사’와 ‘수양’이라는 기본정신 아래 농장의 후계자는 ‘동국(東國)의 진인(眞人)’이어야 한다는 뜻에서 수진원(修眞園)이라고 이름 지었다.

“일본 사람들이 우리의 입맛을 빼앗아 갔어요. 왜된장·왜간장이 아직도 우리 식탁을 침략하고 있습니다.
음식문화는 곧 그 민족의 정신인데…. 입맛이 바뀌면 생각이 바뀝니다. 저는 이것을 찾고 싶습니다.”


< 국산구두약 1등 공신은 박태준 前 총리 >

정회장은 교육장·약수터·연구실·발효실·장독대로 옮겨가면서 꼼꼼히 된장과 간장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명했다. ‘왜 된장이 좋은가’라는 45분짜리 비디오까지 보고 나야 정회장의 ‘순서’가 끝난다.

이제는 기자가 질문을 던질 차례다. 화제를 구두약으로 옮겼다. 그는 “하도 옛날 얘기라서”라고 멋쩍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국군 창설 초기에는 미8군에서 군수품을 보급 받았어요. 그런데 군화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미군과 국군이 똑같이 보급을 받는데 유독 우리 국군 군화만 일찍 떨어지는 거예요.”

미군 쪽에서 진상 조사에 나섰다. 나중에는 ‘너희들(미군)은 차를 많이 타고 국군은 주로 걸으니까 그렇다’는 변명 아닌 변명이 나오기도 했다.

“알고 보니 구두약에 비결이 있더랍니다. 당시만 해도 국군에는 구두약이 보급되지 않았거든요. 군에서 갑자기 저를 불러들였습니다.”

당시 정회장은 잘 나가던 군납업자. 그런데 거래 품목이 달랐다. ‘태양사’라는 중소기업을 경영하면서 군납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취급 품목이 두부나 콩나물 같은 식품이었던 것.

그러나 ‘명령’에는 따를 수밖에…. 명령만 내린다고 뚝딱 제품이 나올 수는 없는 일. 당시로선 기름을 적당히 굳혀서 왁스를 만드는 과정이 쉬운 공정이 아니었다.

“포항제철 공사가 한창이던 시절 박태준 사장이 갑자기 저를 부르더라고요. 모월 모시에 김포공항에 나가 보라는 거예요. 그랬더니 일본에서 구두약제조협회장이라는 사람이 저를 찾는 겁니다.”

‘돈은 줄 수 있어도 기술은 줄 수 없다’던 일본 업체로부터 기술 지도를 받게 된 것이다. 태양사는 그러고도 3년이 지나서야 국산 구두약을 생산할 수 있었다.

이때가 67년 6월21일이다. 날개 돋친 듯 구두약이 팔려나간 것은 당연지사. 그렇다고 정회장이 이익을 독점한 것은 아니다. 태양사의 경쟁업체인 ‘캉가루’사에게 제조기술을 제공해 경쟁을 유도했다.

아무리 사양산업이라고 해도 말표구두약은 연간 2천5백만개가 팔리는 ‘밀리온 셀러’다. 92년에는 회사 이름을 말표산업으로 바꾸었다.
현재 회사는 정회장의 차남인 연수(52)씨가 이끌고 있다.

“포철 공사를 하는 데 일본 업체가 많이 들어와 있었고, 공사를 발주하면서 박태준 사장이 이들에게 ‘압력’을 행사해 일본 구두약 제조기술을 전수받을 수 있었던 거지요.
그래서 말표구두약이 탄생한 1등 공신은 박태준 前 총리입니다. 저는 기껏해야 2등쯤 될까요.”

-‘말표’라는 이름은 어떻게 탄생했나요.

* “제가 직접 지었습니다. 당시 구두 중에는 ‘고도방’이 최고였습니다. 가죽으로는 말가죽이에요. 그래서 ‘말가죽으로 만든 고도방’을 신었다고 하면 빗물도 안 새는 줄 알았어요. 고민 고민하다가 ‘말표 구두약이다’하고 무릎을 탁 쳤지요.


<“정두화 돈은 세지 마라”>

구두약 얘기를 하는 동안 쌍화차가 한잔, 산수유차가 한잔 나왔다. 깨끗하게 깎은 밤알도 나왔다.

이번에는 정회장이 묻는다. “성공이 무엇이냐”고.

기자가 눈치없이 ‘뚝∼’ 하고 밤을 씹는 사이 벌써 “정직이 정답”이라는 대답이 나온다.

조흥은행 동대문 지점에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온다. ‘정두화가 입금한 돈은 세지 말라’는 것이다.

지폐 개수기가 없었던 시절, 은행에 입금을 하려면 출납계 직원이 일일이 손으로 지폐를 세어야 했다. 몇 줄을 서서 입금을 하는데 기다리는 시간이 꽤 걸렸다.

“하루는 지점장이 차를 한잔하자고 하는 겁니다. 지점장실에 들어가 보니 이런 말을 하더군요.

'앞으로 정두화씨는 입금을 하려면 줄을 서지말고 곧바로 창구에 넘겨도 된다'는 것입니다. '1백장 묶음 다발에 도장 날인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이튿날부터 정회장이 창구로 직행하니까 다른 손님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다른 사람은 멀쩡히 줄을 섰는데 왜 정두화 돈만 그냥 받아주느냐”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지요. 3년 동안 은행과 거래했는데 한번도 액수가 틀린 적이 없고, 제 돈은 반듯하게 정리돼 있었거든요.”

-은행으로부터 신용을 쌓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어려서부터 ‘돈을 천하게 다루면 돈이 안 붙는다’는 가르침을 배웠어요. 사업을 하면서 저녁 아홉시만 되면 수금해 온 돈을 정리하는 것이 정해진 일과였습니다.

돈이 구겨져 있으면 인두로 다려서 폈고, 찢어져 있으면 창호지를 대 곱게 붙였습니다. 그리고 얼굴 나오는 쪽을 앞으로 묶어서 다음날 은행으로 가져갔지요.”

외상 거래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10일까지 대금을 갖다 준다고 약속하면 절대 10일까지 간 적이 없다.

언제나 8일·9일에 대금을 치렀다. 돈이 나가는 것도 철저하다. ‘왜, 어디에, 어떻게 쓰며 원 단위까지 계산이 맞아야’ 지출 결재를 받을 수 있다.

이런 원칙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돈 1천원도 그의 허락 없이는 절대 금고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농장에서 쓰던 농기계가 고장이 나 수리를 받았는데 비용이 2만원이 나왔다.
그러자 직원들이 쩔쩔 매면서 수리공에게 돈 대신 된장을 주더란다. 정회장한테 2만원 결재 받기가 그렇게 힘들다는 것.

이제야 머리카락 얘기를 묻는다. 정회장은 머리카락이 한올도 없는 ‘빡빡머리’다.

-그리고 보니 머리카락이 한올도 없으시네요.

* “제가 19살 때부터 일을 했어요. 하루 3시간만 자다 보니 그렇습니다. 한올 두올 빠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눈썹도 없네요.”

이야기는 아파트살이에 대한 꾸짖음으로 정리된다.

“아파트에는 된장이 살 수 없어요. 그러면 이렇게 해봐요. 세 가구가 모여서 1천평 땅을 사는 겁니다. 일요일마다 내려와 배추를 길러요.
집집마다 메주를 띄우고 된장을 담그는데, 이 일은 꼭 품앗이로 해야 합니다. 이렇게 농사를 짓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저는 언제라도 콩 한 가마니 짊어지고 가겠습니다. 집집마다 장독대 있는 세상이 제 꿈입니다.”

그러는 동안 부인인 장옥(78)씨는 된장 주문전화를 받고 있다. “일산시 굳…, 모, 닝… 힐? 아파트예요, 별 희한한 이름이 다 있네, 그래. 몇동 몇호예요? …. 안녕히 계슈.” 이미 날이 저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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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른손마비 극복 한국화가 오태학 ] *****************************



‘분노를 삭이니, 왼손이 보였다’
“움직여야 살고, 살아야 그림을 그린다”


한국화가 산동(山童) 오태학(吳泰鶴). 오전 5시20분이면 어김없이 신발끈을 졸라맨다.

10개월여 부인과 함께 나서는 운동. 연희동 집에서 연세대 북문을 거쳐 산책로 따라 동네를 도는, 그래봬도 시간 반 코스다.

정상인이라면 세번 왕복할 시간이지만 풍을 맞은 그에겐 결코 녹록지 않다. 연대 기숙사 앞 급경사에서는 부인의 팔에 의지해야 한다.

예순넷, 대가의 인생 역정을 밟으며 무슨 의식을 치르기라도 하듯 그렇게 느릴 수 없다. 지난 몇 년간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아직도 꿈속인 양 실감이 나질 않는다.


1999년 7월2일. 중앙대 부총장직을 맡고 있던 그는 강원도 고성에서 짧은 휴가를 보내던 중이었다.

혼자 며칠 간 작업을 하고 친구들과 어울린 그는 냇물에 막 낚시를 드리웠다가 뇌출혈로 쓰러지고 만다.

그 뒤 한 달 반만에 의식을 회복했지만 몸은 이미 반신불수가 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운명을 탓해봐도 승복할 수가 없었다.

좌절보다는 분노가 앞섰다. 닥치는 대로 원망하고 욕을 퍼부어 봤지만 허사였다.

“처음엔 죽고 싶었습니다. 한 주먹씩 주는 약도 먹지 않아 혈변·혈뇨를 보았어요. 그 모든 화풀이와 투정은 죄없는 아내 몫이었습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집을 나가려 했고요. 내 인생은 모두 오른손으로 이뤄졌는데 왼손으로 오점을 남길 수 없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산동의 오른손은 실로 위대했다. 홍익대 3학년 시절 국전에 특선하고 24세에 국전 추천작가를 완료해 그 천재성을 일찍이 인정받았다.
이당 김은호에서 운보 김기창으로 이어진 우리나라 정통화맥을 계승한 적자라는 사실도 자타가 공인한다.

양립이 어려운 채색과 수묵에서 모두 일가를 이룬 유일한 화가다. 그림 속 천진한 어린이들처럼 꾸밈이 없어 시세 편승과 타협을 모르는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산동의 재능은 특유의 ‘호언’과 ‘허세’와 어우러져 항상 ‘견제’와 ‘질시’의 대상이 될 정도로 도드라졌다.


산동의 제자들은 그의 호언·허세를 ‘산동 데포르메’(대상을 왜곡·변형하는 미술기법)라 부른다. 그 모든 것은 또한 완벽성을 추구하는 자신감에서 비롯됐음을 믿는다.

사고 후에도 동료·후배들의 전화라도 받을라치면 “모든 것이 잘 되어간다. 그림도 곧 그릴 것이다”라는 호언은 여전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초조했다. 몸이 뜻대로 움직여주질 않았던 까닭이다. 자폐아처럼 자꾸 움츠러들었다. 바깥에 나가지 않았을 뿐더러 누가 찾아오는 것도 싫어했다.

그러나 기적은 싹트고 있었다. 수도여사대(현 세종대) 재직시절 제자 신분으로 인생의 반려가 된 부인 김영신씨와 1978년 이후 중앙대에서 가르친 제자들의 헌신적인 보살핌이 씨앗이 됐다.

특히 ‘사은의 간호’는 산동에게 활기를 불어넣었다. 강선구·서정태·김진관·김선두·박완용·김덕기·조상열씨 등 20여명은 사고 직후 4명 1조를 이뤄 은사의 굳은 몸을 24시간 주무르는 노고를 자청했다.

몸은 조금씩 풀렸다. 운동 역시 제자들이 주도했다. 휠체어에 산동을 태워 바깥으로 나온 후 걸음을 걸렸다. 첫날 100m를 20분에 걷고는 사제가 모두 눈시울을 적셨다고 한다.

산동의 마음도 함께 열렸다. 얼마나 집착하던 오른손인가. 용하다는 의원도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중국에서 침 치료를 받은 것만도 두차례에 6개월이었다. 하지만 오른손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까운 시간을 계속 허비할 수는 없었다. 작년 가을 중국에서 마지막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부인과 함께 운동을 시작하고 붓을 잡았다. ‘현실을 인정하고 환경에 순응하자’. 고집불통인 그가 왼손에 새로운 인생을 거는 데만 2년이 걸린 셈이었다.

“이제껏 완성한 그림은 사슴과 어린이를 그린 ‘동화’와 아버님 초상 등 2점입니다. 지금은 95년 백두산 여행의 스케치 등 40여점을 동시에 작업하고 있어요”

지난 9월 운보갤러리 개관전에 사고 후 첫 작품을 냈을 때에는 그를 아끼는 동료·후배들이 몰려와 기적의 회생과 재기의 집필을 축하했다.
이전의 세련된 맛은 덜해도 더 순수해졌다는 이야기와 자신감보다는 겸손함이 배어 있다는 말들도 했다.

그들은 그러나 왼손 창작의 고통을 모른다. 작업이야 종일 일이지만 왼손이 생각과 달리 자꾸 무너진다.

힘도 너무 들어 10분 일하고 한 두시간 쉬기 일쑤다. 왼손을 긴장해서 쓰다보면 마비된 오른손과 다리가 강직(强直)되고 이내 몸 전체가 굳어진다.
몸이 풀릴 때까지는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요즘 그의 작업은 자연히 암채를 반복해서 색을 올리는 채색화뿐이다. 수묵은 일필(一筆)이 불가능해 당분간 하지 못한다.

산동이 제자에게 일깨운 교훈 중 하나는 “그림에는 완성이 없다”이다. 영화 ‘취화선’의 ‘귀거래도’ 부분에서 주인공 장승업이 스승에게 혼나는 장면에서 이 메시지가 나온다. 이 영화의 자문을 맡았던 제자 김선두씨(중앙대 교수)가 산동의 가르침을 ‘취화선 버전’으로 만들었다.

“예전에는 표현력의 확신으로 화폭을 채워나갔으나 이제 그것들을 하나씩 비워나갈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린다는 것도 살아있음의 증거지요. 내년쯤 정년퇴임을 기념해 왼손 신작전을 가져볼 작정입니다”

비록 어눌한 붓질이지만 그는 오늘도 순수한 동심의 세계를 화판에 펼치고 있다. 어눌함. 달인·명인의 세련된 단계를 초월하는 최고의 격조가 이 어눌함에서 이루어질지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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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서 경영'으로 亞太 최고 실적 낸 이장우 이메이션코리아 사장 ] **************



"매주 한권씩 책 읽으니 아이디어 절로 나오네"


책읽는 것처럼 경제적인 교육은 없습니다. 토론식 수업을 하는 MBA 강의도 독서만은 못합니다.”

이장우(46) 이메이션코리아 사장의 독특한 ‘독서경영론’이다. 이메이션은 쓰리엠에서 분사한 스토리지 전문업체. 국내 디스켓·CD 시장의 80%를 점유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두산과 합작해 두산 쓰리엠으로 있다가 지난 1996년 이메이션의 국내 자회사인 이메이션코리아로 떨어져 나왔다.

이사장은 지난 82년 두산쓰리엠에 입사, “시골장터를 다니며 수세미 파는 일부터 시작해” 지난 96년 CEO에 올랐다.

“회사 결산 서류를 보면서 깜짝 놀랐어요. 지난해 도서 예산이 자그마치 2천4백84만원이나 되더라고요.
저희 회사 직원이 30명이니까 1인당 80만원이 넘습니다. 올해는 1백만원을 채워 보려고요.”

1인당 80만원어치라면 적어도 50권은 되는 분량이다. 전사원이 1주일에 한 권씩은 책을 읽었다는 뜻이다.

이사장 역시 손꼽히는 독서광이다. 적어도 일주일에 두 세 권은 ‘뚝딱’ 해치운다.
경영이나 경제 관련 서적은 물론 건축·여행 등에 관심이 많다. 이사장의 독서는 회사경영에도 반영된다.

대표적인 것이 ‘창조룸’이다. 창조룸은 이메이션에만 있는 독특한 시스템으로 별도의 공간에 이메이션 제품을 전시한 곳이다.

“사실은 「혁신의 예술」이라는 톰 캘리의 책에서 빌려온 것입니다. 캘리는 ‘눈으로 보는 가운데 창조가 나온다’고 했거든요. 이메이션 제품을 보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으라는 뜻이지요.”

그렇다고 이메이션에 책과 관련된 과제가 있는 게 아니다.
“회사는 책을 사주기만 하지 다른 부담을 줘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사장의 지론이다.
그래서인지 이메이션에는 의례적인 서평 제출 같은 것은 없다. 독서 권장은 하되, 부담은 안 준다는 것이다.

독서경영 덕분인지 이메이션코리아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가장 빼어난 실적을 자랑한다.

“지난해 1천6백만 달러 매출에 1백90만 달러 이익이 목표였는데, 1천7백20억 달러 매출에 3백24만 달러 흑자를 냈습니다.
본사에서 보너스로 전직원을 뉴질랜드로 여행을 보내줬습니다.” 이사장 개인적으로는 전경련 국제경영원이 주관하는 ‘경영인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사장은 독서 예찬론자인 동시에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다. 「미래경영 미래CEO」 「마케팅 잘하는 사람, 잘하는 회사」 등의 책을 써 인세 수입을 공익단체에 기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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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기전 한가지 내뇌리에 거는 최면이있다.

내일 아침은 산에오른다.

맑은 공기와 산의 정기를 맞으며 하루를 꼭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잠이든다.

상상속에서 아침의 산행을 시작하며...

 

5시가 넘어선 시각  자명종시계가 울리지않아도 눈은 자동으로 떠진다.

등산화의 끈을 힘껏 조르며 새벽을 깨우러 나는 발길을 내딛는다.

해가 뜨지않은 대지위에서 미약한 나를 세워 일으켜본다.

발이 한걸음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내안의 나를 서서히 깨워본다.

 

집을 나선지 30여미터부터  산행은 시작된다.

이곳에 이사온지도 어느덧 1년이  살짝 넘었지만 항상 감사하는 마음뿐이다.

삭막한 도시가운데에서, 이렇듯 산이 가까이 있다는것은 신의 축복이다.

어디에서도 찿아보기힘든 이런아침의 산행이 나를 성숙하게한다.

 

산길사이로 공기가 시원하게 물밀듯이 밀려온다.

코로 들여마시고 입으로 시원하게 내쉬어본다.

아...

시원하구나!

역시 산행은 아침산행이라는 말이 맞구나.

모든결단과  준비와  올바른 생각은 그래서 밤이아닌 아침에 하라는 말이맞구나...

 

40분 가까이 숨을 내쉬고, 땀이 기분좋게 나를 감싸면 정상이다.

저멀리 여명이 밝아오는것이 보이고 그멀리 관악산 줄기가 다보이는구나.

산과 숲이 감싸여진 대자연앞에서 나는 얼마나 미약하고 작은 존재인가?

이 숭고한 자연은 나에게 얼마나 큰 스승이란말인가?

산은 나를 겸손하고, 감사하게만드는 스승이다.

 

멋지게생긴 바위에 걸터앉아 가좌부를 틀고 명상에 잠기어본다.

자연의 기를 마시면서, 지금까지의 나의길, 내가 가야하는길 , 앞으로의 설계를,

현실에 안주하지않는 내자신이 되지않기위하여,

내안의 무안한 능력의 발휘를 위하여,

끝없이 내자신을 뒤돌아본다...

 

산은 언제나 선생님처럼 해결을 해주신다.

어린시절 풀지못한 숙제를 헤메이고,고민하던 문제를 옆집형이 도와주어 쉽게풀듯이

인생에서 혼자가아닌 거대한 동반자로써 내스승이 되어주신다.

나는 맑고좋은산에서 또 한번 다짐해본다.

항상  도전하게 해주시라고...

그리고 다가오는 그어떤 어려움과 고통도 이겨내줄 응전의 힘을 주시라고...

 

마부작침!

"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든다"  는 옛성인의 말씀처럼

항상 머릿속에 생각만 하는 몽상가가 되지말고.

언제나 최고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실천가가 되어달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본다...

 

2년전 문득 나는,

"백마탄 왕자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알아볼수있을까? "

라는 내자신의 극기훈련을 떠난적이 있었다.

 

고단하고 힘들기만 생각했던 내자신에게 일침을 가하여야할 훈련이었다.

어쩌면 여행이 될수도있고, 생각의 정렬이라는 표현이 될수도있지만

나는 그훈련이 "3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 라고 생각하고싶다.

 

때로는 삶을 재평가하고 내자신의 현재위치를 알아보는 훈련도 필요한법이다.

사람마다 그 훈련방법이 다르겠지만 대담하게 전진하여야할 때가 있듯이

때로는 물러서서 재평가해보는 시간도 꼭 필요한 법이라는 간절한 생각이들었다.

 

내자신을 세상에서 격리시켜서, 쉬게할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커다란 모험을 해보고싶었다.

커다란 모험에는 언제나 커다란 위험이 따른다는 말을 들었었다.

하지만 누구도 가본적이 없기에 기꺼이 가려하는 의지가 나에게는 절실하게필요했다.

 

그때가 바로 모음료회사를 떠나왔을 때였다.

모음료회사에 근무할때 그런약속을 내자신에게 햇었다.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절대 가족에게는 가장인 내 무능으로 힘들게하지는말자.

어떤일이있어 그만두어도 3개월 생활비는 비축해두어서 가족을위한 최소한의 사랑으로

남겨두어놓자... 그랬다.

3개월이 넘는 내자신과의 약속은 지킨셈이다.

 

아내에게 간절하게 내의사를 표현했다.

나에게는 여행이 아닌 내자신의 강한 훈련이 필요하다고,

나만이아닌, 내가족을 더욱더사랑하고 지켜야할 힘과용기를 가질

훈련이 필요하다고...

여행이 아닐세...

나는 내안에서 매일 피어나지도 못하고죽는 나의 꿈들을 확실하게 할필요가있다네...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첫걸음을 내딛지도못하는 나의 용기가없는

의지력을 극복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세세이 설명을 해나갔다.

 

아내는 나의 가장 큰 후원자이자  따뜻한 둥지...사랑하는 나의 또하나의 나...

허락이 떨어졌다.

15일의 나의 극기훈련이 시작이되는 시간이다.

15일은 가족와함께 보내고 15일은 나만의 극기훈련...

 

15일동안 철저히 산을 중심으로 극기훈련을 하였다.

지리산,계룡산,대둔산,설악산,오대산,소금강,태백산...

 

그중에서도 내가 최고로 뽑는 지리산종주를 ,

백마탄 왕자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보았던 그 극기훈련장으로

난 떠나보기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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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수로써 세일즈맨 으로서의 하루가 분명히 지나갔다.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 모르게 흘러갔다.

분명히 다 같이오는 하루였고 시간 이었는데 길고도 힘든 하루였다.

주차를 시키고 사무실로 올라가본다.

어제 까지는 분명 부사수로써 그 임무에 충실했었고 열심히만 하면 되는줄 알았는데

전혀 다른 그 느낌은 분명했다.

배정된 자리에 앉고 보니 한여름에도 에어콘 바람에 편할 줄아는 그 생각은 30 여분이 흐르고 절대아님을 분명히 깨닫게 된다.

항상 부러웠었다.  더운 여름이면 에어콘아래에서 마무리를 하는 그 생활이, 추운 겨울이면 따뜻한 히타밑에서 정리하고 퇴근하는 그 삶을 어쩌면 동경했었다.

 

지금은 pda가있어 일이 컴퓨터로 진행되지만 당시는 사람 손으로 하는 수기 그 자체였다.

10 군데의 거래처를 갔으면, 거래명세서를 다시 작성해서 회사입금가 기준으로 일일이

목록을 다시다 작성한다. 그리고 에누리 금액을 옆에 첨부시킨다.

병음료는 다 다르기때문에 다시또 작성한다.

수금내역도 거래처마다 일일이 체크해서 장부에 기입한다.

완료되면 집계표라고해서 일일 판매한 모든 목록을 완성시킨다.

언듯보면 쉬운일 일 것 같지만  굉장히 집중을 요하고 십원짜리 하나 틀리지 않게 하는것은

보통일이 아니다.

하루를 마감하는 그 일이 계산기하고 씨름 하는그일이 평균 5시간은 걸려던 것같다.

산수, 수학 그런차원보다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던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가장 힘든 부분으로 기억된다.

 

그 집계표작업을 마치고 찿아 오는것은 사고경위와 지역에서 벌어진 내용에 대한 보고서와

앞으로의 개선 방향에대한 회의로 이어진다.

머리 아프다.

이러저리 도장찍고 풀어야할, 몇날 몇일이 가야 끝날지도 모르는 서류들을 정리하노라니

첫날 퇴근은 새녘3시...

집으로가는 차안에서 느끼는 한마디는 

아 !  피곤 하구나..   이 한마디 말 보다는 언제가는 분명히 끝나는 싸움이다.

잘될 것이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혹독하게 추운 겨울도, 찬바람을 동반한 눈보라의 그 얼음들도 분명히 봄 앞에서는 어쩌지 못할 것 아니냐...

분명히 봄은 올 것이다.   가자 ..  그리고 몇시간이라도 가서 자자.

그리고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해보자....

 

 

 

아침이 밝는다.

피곤하지만 해야 한다.

오전까지 지역을 알려주던 부사수마저 사람이 없다는이유 하나로 자기 자리로 가버린다.

그래 ! 갈테면가라 . 어차피 홀로서기라면 나홀로 깨지든 ,죽든 살든 해보리라.

 

사고로  예전 담당 전화기는 없어졌다.

제발 그 번호로 하나 구해달라하니  어차피 네가 개척 해나가야하는 시장이니 돌아다니고 찾아다녀서 명함을 돌리라 한다.    회사전화로 무수히 방문전화가 걸려온다.

문제 해결해 달라고... 제품 가져다 달라고...

일일이 전화걸어 위치 물어보고  모르는길 찿아 헤메고, 찿아간집에서는 너무도 많은사연이나를 기다린다. 어제 보다도 더한 일들도 나를 정신을 못 차리게 한다.

 

가는 곳곳마다 너무 많은 사연에    "큰 사건은  회사에서 꼳 해결해 드릴것이니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작은  사건들은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일단은 해결해 주었다.

아무리 전 담당자가  어질러 놓은 일이었지만 이제는 내일인 것이다.

무조건 피하고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앞으로을 위한 나의 영업에 신뢰을 주지 못할것 같았다.

지금  편하자고 미래를 저당 잡히고 편하게 안일하게 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간절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내 처해진 상황과 내 입장을  그리고 회사에서의 차후 대책마련을

설명해 드리고 이해를 구했다.

정성과 진실된 말 한마디가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 이라고 생각이었다.

밤이되면 또 장부정리에 집계표 작업을 하다보면 , 사고내용 진척 내용을 해결하다 보면

어김없이 새벽2~3시에 퇴근은 기본이다.

 

부사수 없이 이렇게 홀로 물건 적재하고, 낮에는 사고해결에 , 급한 곳만 가져다주는 제품납품 까지, 새벽에 퇴근하는 일들을  홀로이 보름 정도를 하고나니 나는 사는 것이 사는게 아니었다. 

보름이 지나자 머리에서 손톱 만한 왕비듬이 떨어져 내려온다.

군대있을때 훈련소에서 원상폭격(머리박기)을 많이하여 생겼던 왕비듬 보다는 덜 하지만

내가 보기에도 협오스러웠다.

얼마나 신경을쓰고 , 정신적으로 , 육체적으로 힘들었던지 입술이 트고 터지다 못해서

피가 나고 갈라져 말을 하기가 힘들 정도가 되었다.

거울을 보는 내모습은 양쪽 볼이 쏙 들어간, 눈은 쾡하고 갈라진 터진입술은 미이라를 보는듯했다.      이 얼굴이 정녕 내얼 굴 맞다는 얘기인가?

 

세상은 냉정하다.

내 표정에 질렸는지 동료들이 곁에 오지를 않는다.

불쌍 하다는 표정으로 그저 고생한다 ,한마디 해주지 진정 어리고 도움주는 그 누구도없었다.

나만이 개척 해나가야하는 외로운 싸움이다.

전쟁터에서 총칼을 가지고 싸우야만 전쟁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총알이 날아가고 슈류탄이 터지는 이 살아가는 이 삶 또한 전쟁터와 다를 것이 무엇이라는 말이냐...

지금은 나만이 벌이고 수습할 수있는 1인 전쟁인 것이다...

 

하지만 내 눈은 살아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절대로 포기 하지를 않는다.

두고 보아라 !   내가 어떻게 이 바닥을 , 돌 투성이,  전쟁터같은 이 바닥을 일구어 나가는 지를 .     이를 악물고 또 악 물어본다...

절대 포기하지하지 않고 꼭 이루고 말리라!

 

가다려라...   내 열정과 시간은 꼭 보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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