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오늘 아침

아내를 울리고 말았습니다.
돈이 많아 물질적으로 잘 해주거나 여행 한번 제대로 가본 적은 없지만 아내 마음편하게 해주고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살려고 노력했는데...

 

1년에 큰 싸움 한번 안하고 말 다툼이나 몇번 할 정도 밖에 안되는 저희 부부가 아침의 일은 모두 제 잘못입니다.
저와 아내가 가정을 이루고 산지 어느덧 13년이 되었지만 저는 항상 아내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없고 열심히 살기만 한 나를 믿고 시집와서 알뜰 살뜰하게 살림 잘 해주고 음식 솜씨가 좋아서 항상 맛있는 음식 해주고 아들 둘 낳아주고 잘 키워주고 모든 집안일에  착하고 사랑스런 사람에게 제가 이러면 안되는 데요...

평생 눈에서 눈물 안나게 살게 해준다고 다짐하고 약속했는데 그렇게 쉽게 안되네요.

 

발단은 이랬습니다.
아내는 항상 아침이면 바쁩니다.
초등학교 5학년,1학년  두아들 챙겨야지, 밥 먹여야지, 준비물 준비 해주어야지, 아침의 아내는 전쟁터를 누비는 장군처럼 항상 바쁩니다.

오늘도 그런 전쟁을 치루고 저도 출근 준비를 한 후에 추워진 날씨에 겨울 외투 아내에게 찾아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오늘 나 굉장히 바쁜 날인데 저녁에 해주면 안될까?  " 하는 아내의 말에 나는 어디있느냐는 말을 했고

창고 저쪽에 있다는 아내의말에 여기냐? 저기냐?  를 반복했고 찾다가 선반 위에서 털어진 삼겹살 굽는 뚜겅에 발을 맞았습니다.
저의 이런 저런 궁시렁 끝에 아내가 그 것도 못찾냐고 잔소리를 하면서 저에게 다가와 자기가 하겠노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집은 애가 셋이라면서 ....  이런 저런 잔소리를 하기에 저도 모르게 벌컥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습니다.

항상  뭔 잔소리가 그리 많냐고.  그 잔소리 때문에 더 찾을 것도 못 찾는다고...
성질을 부렸습니다. 굽는 불판에 떨어진 발도 아프고 도와주지는 못 할 망정 잔소리만 해대는 아내가 야속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내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나를 보다가 세탁기 쪽으로 가더니 빨래를 만지다가 털썩 주저앉아 우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서럽고 슬프게 울던지 ...

 

내가 표도 안나는 집안일 하면서 이렇게 살고 싶어서 사는 줄 아냐고...
애들 학원보내고 남들처럼 돈이나 벌면 되는 데 그걸 못해서 그런줄 아냐고...
돈이 많아서 마음이 편한 것도 아니고 하루내내 집안일에 아이들 뒤치닥거리하면 하루가 금방 가는대 좋아서 하는 줄 아냐고... 아기처럼  펑펑 우는 아내의 말은 계속이어 졌습니다.

없는 형편에 무료로 복지회관에서 배우는 컴퓨터학원 좀 가려고 이렇게 서두르는데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이렇게 서럽게 하냐는 그 말에 제 가슴에서 무언가 꽉 막히는 아픔이 세겨들어 왔습니다.
아!  오늘이 아내 복지관 컴퓨터 무료 습하는 날이구나....
알고나니 너무도 미안햇습니다.

 

나이들기 전에 하나라도 더 배우고 싶어서 정말 바쁜 시간을 쪼개서 가는 것이라고...

그나마 가까운 곳에서 무료로 배우는 컴퓨터, 비즈  이외에는 자기 시간이 없다는 아내의 말과 요즘 엄마들 아들들 얼마나 학교에서 일이 많은 줄 아느냐...식들 잘 보이려고 하루가 멀다하고 청소며 학교일에 자식들보다 더 늦을 때도 있는데 누가 알아주냐고 ...  교회 봉사도 가야하고 하루가 어떻게 가는 지 모르는 내 자신에게 이렇게라도 내 시간을 만들고 배우지 않으면 나는 무어냐고...

당신이야  추운날씨에 남자라 돈만 벌어오면 그만이지만 아내로써 엄마로써  주부로써  일인 3역을 하는 아내의 그 말에 정말 할 말이 없었습니다.

 정말 틀린 말이 한마디도 없었습니다.
그 잘난 밖에서 일하고 돈 벌어다 준다는 그 한가지에 어쩌면 아내 혼자 많이 힘들게 했씁니다. 한국남자들 누구 돈 안벌어다는 사람 어디 없지 않습니까...
아침에 그 바쁜 시간에도 점심, 저녁 도시락을 싸주고 항상 도시락 반찬 걱정하는 아내를 보면서 제가 불쑷 "  대충 싸...   그냥 그럭저럭 먹으면 되지...  "
하면  아내가

"남자들이 다 그렇다고  쉽게 말하지만 어디 그게 쉬운줄 알아...    항상 내일 되면 뭐 해먹을까   고민하는 일이 아줌마들이야...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꼭  껴안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 당신 마음 내가 다 알아.  내가 홧김에 그랬어. 다시는 안 그럴게" 하면서 따뜻한 녹차를 한잔 타주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다른 다 참아도 잔소리 하지말라는 말이 가장 서럽다고 했습니다.

"누가 잔소리를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있어. 자기들 할 일들만 잘 해놓으면 누가 잔소리를 할 것이며, 사용한 물건 제자리, 입은 옷만 바구니에 갔다놓으면  되는 것을 그 것 나 못 도와줘?"
" 누가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래. 바쁠 때 서로 조금만 도와주면 되잖아...

당신이 힘들게 안 해도 나 힘들일 많아.  말 안해서 그렇지...
하옇튼 여자에게 잔소리 하지 말라는 말은 가장 서운한 말이라는 것을 명심해.  잔소리 말 하니까 또 눈물이 나오려 하네.."  
하면서 아내는 웃는 얼굴로 풀어졌습니다.

 저는 싸우면서 정이 든다는 말이 싫습니다. 어떻게 싸우면서 정이 듭니까?
사랑하고 아끼고 살기도 바쁜 세상인데.  상처주고 아픈 말이나 행동은 다시는 아내에게 안하렵니다.
힘차게 웃는 얼굴로 배웅해주는 아내에게 차안에서 고맙고 사랑한다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아내에게 온 답장은 이렇습니다.

 

[제목 : 고마운 꿀물에게]

좀전에 속이 후련했는데 (울어서 그런 거 겠죠.) 출근하는 당신에게 그래서 미안하고 내 넋두리 다 받아줘서 고마워.  추운데 밖에서 가족 위해 열심히 생활해줘서 고맙고 사랑해요^^
이 문자를 받고 정말 기뻤습니다.
오늘은 일찍 끝내고 저녁에 들어가서 아기처럼 우는 아내를 위하여 동네 가까운 삼겹살 집에서 소주한잔 하면서 아내에게 애교를 많이 피울겁니다. 

 자기야!  설빈,찬빈이 엄마!  
진심으로 오늘 미안하고 사랑해요.  항상 내가 당신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앞으로 내가 더 열심히 할께.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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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느티나무 2008-01-25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앙..ㅠ.ㅠ 읽고 눈물 났어요...
 

 

"최악의 상황에서도 기회는 반드시온다"
 

 

6월의 초 어느날  휴대폰이 울린다.

나에게 서울지역번호가 올일이 거의없는데 이전화도 분명 투자나

상업성 전화겠구나...하고  그래도 전화기에 손을들었다.

 

"네 신풍입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실례하지만 그곳이 그랜드슬램님이라는분이 하시는

신풍물산 아닙니까?"

당황한나머지  "실례지만  어디로 전화를 하셨죠?"  여쭈어보았다.

이런류의 전화는  거의 받아본적이 없었다.

"선한부자 카페에 글올리신 분 아닌가요?"  하고 또 물어본다.

 

"네... 제가 글올린적이 한번은 있었는데  어떻게 전화하셨는지..."

"절대하수이야기를  감명깊게 읽고 힘을얻어서  이렇게  목소리한번듣고싶어

전화를 드렸습니다...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몇마디 이야기가 오갔다.   통화를 마쳤다...

처음이었다  나에게 이런 전화는 ....

 

커다란 기쁨의  희열이 나의 온몸의 신경을 감싸않는다.

미약하고 작은 나에게...

부족하고  헛점 투성이인 나에게...

바람앞에서도 흔들리는 나에게...

다른누군가에게 힘을 주었다...

나도 다른이에게 기쁨을 주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나의 작은 사랑을 나누어주었다는  것이  이렇게 기쁠수가 없었다!!!

 

전화해주신 그 분과,  나의글에서 힘과 용기를

얻으실   그다른 딱한분을 위하여 ...

오늘도 나는 진실만을 쓰고싶다...

순수의  진실이 없어지는 그순간 나는 글을 쓸수가 없을 것이다...

 

부족한 내가 신풍물산 창업편을  쓰는 이유는 이러하다.

무수한 사람들이 "스트레스 받아서 못해먹겠다~~  있는돈 털어 장사나 해볼까"

주위에서 많이듣는 목소리이다.

장사라는게 그렇게 만만하게 보이는가?

사업이라는것이 시간만 지나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보이는가?

장사라는것이 그렇게 쉽고 메리트 있는것 처럼 보일까?

 

엘도라도를 꿈꾸며, 마냥 잘되겠지!   라는  생각은  그어떤 보이지않는 암흑의 나라에서나 통하는

게임의법칙이라고  나도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도시 어느곳을 가더라도 보이고 만나는 것이, 모두 장사하는 곳이고

사업하는 곳이다.

밥을 먹으로가는 식당도 사업체이고, 담배를 한갑 사는 슈퍼도 구멍가게라는 표현을 쓰지만

분명히 사업체이다.

배가 아파 약국을 들러도, 볼펜이 없어 문구점을 들러도, 전구를 하나 사는 철물점,

심지어 돈내고 급한볼일을 한번 보는 화장실도...

술한잔 친구하고 먹는 동네치킨집도...

짜장면 한그릇 시켜먹는 중국집 에서도,

그어떤 곳이라도 일단은 돈이라는걸 지불한곳이라면 난 사업체라고 보고싶다.

 

흔히들 큰사업을 하여야하고, 종업원을 몇명 두어야 사장님이라는 소리를 듣기도하고

고급승용차에, 운전기사가 있어야 사업한다고 생각할수도 있다.

목을 뻣뻣이 세우고, 어흠 기침소리를 내야만 사장 이라는 대표의 명함을 쓸수도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사업이란...

실전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만의 방식이 철저히 담긴 "무형의 자산" 이라고 생각한다.

 

동네 구멍가게하는 분들도 나름데로의 철학과 노하우가 있다.

그분들이 더운날 선풍기 아래에서도 부채를 부치고 있지만 나름데로의 생각과

계산을 하며, 어떤방식과 매출증대를 위한 방법들을 무수히 머리속에서 저울질 하고있다.

 

세상은 만만치가 않다.

만만치가 않으니, 어쩌면 의욕과 도전의식이 생기는지도 모른다.

만만하면 다들 돈벌어서 다 잘살지  왜 힘들게 살겠나?

 

나는 장사라는 표현보다는 사업이라는 말을 자주한다.

장사는 극한되어 있고 범위가 작은 느낌이든다.

하지만 사업이라는 것은 물처럼 크면서 원대한 느낌이든다.

물은 떨어지면 작은 낙수물이지만, 모이면 옹달샘이되고

뭉쳐서 내려오면 폭포가되고,  모이고 굳게 모이면 바다가 된다.

갈증이 나면 여름날 시원한 생수가 되지만,

화가나면 해일과 장마를 동반한 폭풍우 수마가된다.

 

사업은 이런 물같은 존재라는 생각이든다.

 

사업을  처음 시작할때도 마찬가지다.

팔아서 남은 이익으로 힘겹게,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것이

처음부터 많은돈을 투자해서 시작하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이든다.

기왕이면 여유자금과 많은 재고와 든든한 비축력을 기본으로 하면야 두말을 할 나위가 없겠지만  어차피 인생이라는 장에서 밑바닥 부터  흩듯이 고생고생 하면서 시작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자부한다.

어차피 하여야할 사업이고, 진정한 승부사가 되길 원한다면 철저한 홀로서기도

뿌듯한 자기위로와 자부심, 초심을 잃지 않는 자산이 되리라 생각한다.

 

새롭고 색다른 창업을 하다보면 필연적으로 실망이나 좌절, 고통을 겪게된다.

그러나 최소한의 자본으로 시작하면 실망이나 좌절을 이겨내기 위해

자신의 지혜를 총동원 하려는 적극적 의지를 표출하게 되리라...

 

 

 

그러면 사업은 아무나 하는것이 아니다?

아무나 할수는있다.

하지만 쓰라린 고통과 실패와 좌절을 극복하는 사람의 마지막 종착역이 성공이라는

두글자의 행복이 아닌가 감히 나는 생각해본다...

 

 

사업이라는  발걸음이  결코 쉽지 않은 발걸음이다.

머리를 쥐어짜고, 밤을 세워 고민한날도 있었다.

눈으로 눈물을 흘리진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흘린 보이지않는 가슴의 눈물도있었다.

폭폭해서 벽을 치며, 돈이라는 종이로 한번 맞아나 봤으면 하는 생각이 든적도있었다.

홀로 소주잔을 기울이며,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고, 노력해봐도 되지않는 현실이

안타까워  먼하늘만 본적도 있었다...

차라리... 그냥 속편히 회사나 나닐걸 그랬나...

하지만 내안에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나만의 방식이있다...

 

글이란 정말 성공하고, 자기분야의 일가를 이룬,

또는 부를 창출한 분들이 써야 리얼하고  배움에 깊이가 더할것이다.

하지만 배운다는 느낌과, 다시금 담금질 하는 마음으로 글을 이어나간다.

 

 

지금내가 음료사업이라는 사업을 하고있지만  그리 많은돈도 벌지못했고

지금도 항상 배우는 단계이지만  내가, 정말 부족한 내가... 이제까지 창업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하면서 느꼈던 여러시행착오와  창업을하매 많은것은  잘알지는못하지만

그래도 내가 이제까지 사업이라는 세상의 도전에서  얻은것을,부족한 내용을

약간의 창업에 관심이 있으신분들께 도움을 조금이라도 드리고저  졸필의힘을 빌어

용기라는 가속도를 붙여본다...

 

 

 

 

 

 

한달간의 긴 휴식이 끝이났다.

내인생에서 이만큼 쉬어보고  가족과함께 있어보고, 또 나만의 극기훈련이라는

여행도 갈날이 다시는올까?

소중하고 소중하고, 감사한 시간들이었다.

나의 현재의 위치를 알수있었고 또 강하게 성장했다고 느낄수있었다.

 

2002년 9월1일 나는   모음료유통으로 들어가게되었다.

말이 음료유통이지, 도매상인것이다.

음료회사에서  싸게매입하여  약간의 마진을 챙기는 중간상인인것이다.

모음료회사있을때  그렇게도 눈에 가시같았던 존재들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제는  내가 그입장에 선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한번은 하고싶었던 일이었다.

내가 이 음료업계에서 발을 들여놓았다면  쓴맛 단맛  다보고싶었다.

 

모음료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정한 다음날 운이좋게도 소개를 받기도했었고

그유통 사장과는 오래전 거래처였기에  쌍수를 들면서 환영했다.

다른일을 할수도있었겠지만  당시 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이었다.

찿아보고  다른 분야의 일을 할수도 있었겠지만  배운것이 도둑질이라고 했던가?

내가 가장 자신있게 할수있다고 믿었었고 이일이 나에게 또다른 시작이라고 믿고싶었다.

 

그랬다!!

나는 정말 자신감에 충만했었고, 내가 해오던 일이었고

다른이들도  다하는일인데 내가 무엇을 못하랴?

난 내자신을 믿었고  또 돈도 내가 원하는만큼 벌 자신이있었다.

이것도 어쩌면 나에게오는 기회라 믿고싶었다.

그리고 내가 모음료회사에서 쌓아왔던 신용과 거래처가 있었기에 그 거래처에서

나를 져버리지는 않을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그래서 한달간의 달콤한 휴가도 마음편하게 쉬어오지 않았나?

 

첫날이다...!

2.5톤  차하나가득 물건을 적재했다.

그렇게 음료수가  많은줄 몰랐다.

내가 모음료회사 있을때에는  그회사 제품만 판매했기에 그것도 많았다 싶었는데

이것은 또다른 신선한 배움이었다.

꼬마병에 각타사 음료에 박카스, 동충하초,홍삼, 여러드링크 음료에  별별 들어보지도못한

음료들이 가득하구나.

설명을 듣자니 하나팔면 3만원남는 제품도있고, 가벼운 병음료하나에 마진률을 둘어보니

사람이 어찌 욕심이 안생기랴?

용솟음치는 힘이 도리어 더욱생겼다.

나가기만 하면 돈을 긁어서 들어올것만 같았다...

 

이렇게 새로운 도전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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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쁜매미 2008-01-18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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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神도 감탄한 사람 - 강영우 박사 ] *****************************



어릴 적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17살때 축구공에 맞아 눈이 멀게 되었다.

2년 동안 눈치료를 하면서 두 차례의 대수술을 했지만 결국 망막이 파손되어 맹인이 되었다.

멀쩡하던 아들이 맹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는 충격받고 이틀뒤에 돌아가셨다.

생계가 막막해지자 누나가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에 취직했다
눈먼 동생과 코흘리게 동생을 위해 일하던 누나는 과로로 쓰러져 죽게됐다.

18살에 중등과정 맹인학교에 입학했다.
맹인학교에서 동기들 보다 5년 늦게 학업을 시작한지 몇 년후 연세대 인문계열 전체 차석으로 졸업했다.

졸업 며칠 후 10년 동안 자신을 돌봐주던 숙명여대 영문과 출신의 지성과 미모를 갖춘 마음 착한 여인과 결혼했다.

그후 맹인은 유학을 갈 수 없다는 법률을 뜯어고치고 대한민국 맹인최초로 전액 장학생의 자격으로 미국유학을 갔다.

유학한지 3년 6개월만에 피츠버그대학 교육학 석사, 심리학 석사, 교육철학 박사가 됐다

일리노이 대학 교수가 됐다

슬하의 두 명의 아들을 미국 최고의 명문고등학교인 '엑서터'와 '앤도버'에 입학시켰다

그후 큰 아들은 하버드 의대를 나와 안과 의사가 되고, 작은 아들은 남부 최고의 명문인 듀크법대를 나와 리처드 더빈 상원의원 고문 변호사가 되어 미국 국회의사당으로 출근을 한다.
물론 미연방 상원 최연소 고문 변호사다

미연방정부 최고위 공직자중 하나인 백악관 직속기관인 국가장애위원회 차관보에 임명됐다
( 미연방정부의 450만명 공무원중에 약 2500명은 대통령이 임명한다. 그리고 그 2500명중에 500명만이 FBI의 3개월의 조사와 상원인준을 거치는 소위 최고위 공직자가 된다.)

미국 교육계 명사인명 사전에 등록됐다
미국 명사 인명사전에 등록됐다
세계 명사 인명사전에 등록됐다

위의 소설과 같은 성공스토리의 주인공은 앞을 볼 수 없는 맹인인 '강영우 박사'이다.

우영히 강연우 박사의 초청강연 오디오 테잎을 빌려들을 수 있었고, 비록 내가 소장은 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큰 행운이였다.
그리고 그의 강연 핵심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그 강연에서 명쾌한 성공의 원리를 제시하며 이런 말을 꺼냈다.

미국에서 한국계 학생들은 소위 아이비리그라는 명문대 진학률이 제일 높다고 한다.
그리고 최고의 성적으로 입학해서 낙제률도 제일 많다고 한다.

몇 해전 하버드 대학에서는 낙제하는 동양계 학생을 대상으로 조사를 벌였다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낙제생 10명중 9명은 최고의 성적으로 입학하는 한국계 학생이었다.

하버드 교육위원회에서는 그 이유에 대해 오랜 시간동안 조사를 했다. 그 결과 한국학생들에게 이런 진단이 내려졌다.

'Nothing! Long term life goal' 즉 인생 장기목표의 부재 였다.

한국계 학생들에게 최고의 목적은 하버드였다.
그래서 하버드를 정복한 학생들은 사춘기에나 겪어야할 심각한 방황의 시기를 대학의 황금기 때 맞이하게 된다.
그 이유는 과정목적만 있고 이상목적, 궁긍적 목적은 없다는 것이다.

비교대상, 경쟁 대상만 있고 성취목적, 성취대상은 희미하다는 것이다.

이상목적, 즉 내 인생의 궁극적 목적이 분명히 정해진 사람은 그에따라 과정목적도 뚜렷이 정해진다.
과정목적이 뚜렷한 사람은 오늘 나의 행동의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상대평가에 의해서 사는 사람들은 'Long term life goal' 즉 인생의 장기적 목적을 세우기가 힘들다.

나의 능력과 타고난 환경에서 출발하여 인생의 궁극적 목적을 세워 놓게되면 과정목적이 정해지게 되고, 오늘 해야할 실천목적이 분명해 지는 것이다.

여기서 삶이 분명한 사람과 분명치 않는 사람이 생겨난다

여기서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활기찬 사람과 늘 불만과 우울함에 빠지는 한심한 사람이 생겨난다.

여기서 자신에 최선을 다하고 인생은 절대 평가임을 깨닫고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과, 자신의 주어진 환경과 여건에 넋두리만 하고 남들과 이것저것 비교만 하는 한심한 청춘이 생겨나게 된다.

내가 죽을 날을 상상하고 최후의 순간부터 지금까지 소급하여 내가 무엇을 하고 이룰지 인생의 궁극목적을 정해 놓아라

인생을 상대평가하는 실패자의 생각을 버리고 .Long term life goal 의 성공의 원리를 터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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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인 모두에게 최고의 성공체험을 선물한 사람 ] **********************



16강 진출을 놓고 한판 승부를 겨룬 한국과 포르투갈전이 벌어진 6월 14일, 이날만큼 온 국민이 한마음이 되어 즐거워한 날이 우리 역사에 있었을까?

우승후보로까지 거론되던 포르투갈을 점수면에서나 경기내용면에서나 모두 압도한 한국의 승리는 정말 통쾌함 그 자체였다.
아울러 그것은 IMF구제금융이나 진절머리나는 정치사회현실로 인해 우리의 의식속에 소리없이 커져가던 실패감정을 일거에 날려버리는 「성공체험」이기도 했다.

이 엄청난 일을 누가 해냈는가? 온몸을 던져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운 선수들, 뜨겁다 못해 데일 정도이지만 그러면서도 경기후 쓰레기까지 치우는 질서있는 응원을 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붉은 악마들, 그리고 업무를 중단하면서까지 축구를 보느라 전력사용량까지 크게 떨어질 정도였다는 우리 국민들의 열성이 바로 이 성공체험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원동력을 끌어낸 사람은 또 누구인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한국축구팀의 명장 거스 히딩크이다. 그가 없었으면 이런 성공체험, 이런 기적이 가능했겠는가?

우리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하게 해주고 변화의 방향을 일깨워주고 우리 국민 모두에게 최고의 즐거움을 선사한 사람, 히딩크야말로 진정한 성공인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이렇게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히딩크에 대해 그가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의미에서 그의 성공스토리를 소개하고 성공요인을 분석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성공스토리]

근세들어 전세계를 누비고 다니던 해양국가 네덜란드 출신의 히딩크는 지금으로부터 40여년 전 네덜란드 왕립축구협회가 축구 강국 건설의 깃발을 내걸고 의욕적으로 펼쳤던 ‘유소년 육성 프로그램’에 의해 축구를 시작한 네덜란드 축구의 1세대다.

축구선수가 된 그는 1960년대 말 네덜란드의 1부 프로구단인 데 그라프샤프, 1970년대 PSV 아인트호벤, 미국의 워싱턴 디플로매츠 등에서 뛰면서 비교적 성공적인 선수생활을 했지만 세계적 선수로까지 성장하진 못했다.

그의 성공은 1982년에 선수생활을 접고 감독의 길을 걸으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자신이 선수생활을 했던 PVS 아인트호벤의 감독이 되어 1985년 시즌부터 1988∼89시즌까지 팀의 프로리그 4연패라는 신화를 창조하면서 지도자로서의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으며 1988년에는 네덜란드리그와 축구협회(FA)컵, 유럽 챔피언스리그 등 3개 타이틀을 모조리 석권하며 명감독으로서의 성가를 높였다.

그가 세계적인 감독으로 부상하게 된 것은 1995년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을 맡으면서이다.

그는 탁월한 리더십으로 98프랑스 월드컵에서 네덜란드팀을 4강으로까지 끌어올리는 성과를 올렸는데 이 과정에서 한국은 네덜란드에 5 대 0으로 대패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이 수모는 한국팀이 히딩크를 만나게 되는 운명적 계기로 작용한다.

2002년 월드컵에 대비하여 세계적 명성을 갖는 감독을 찾고 있었던 한국축구협회가 한국을 초토화시킨 히딩크감독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축구협회로부터 감독직 제의를 받은 히딩크는 처음에는 상당히 망설였다고 한다.

한국이라는 만년 축구변방국을 잘 알지도 못했음은 물론 자신이 5 : 0으로 패배를 안겨준 팀에 감독으로 간다는 것이 아무래도 찜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한국팀의 감독직을 수락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월드컵 16강 진출을 역사적 사명처럼 생각하는 한국선수들의 순수한 열정이 그의 감독직 수락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2000년 12월에 감독직을 수락하고 나서 그가 맨처음 한 일은 한국팀의 특성과 전력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체력도 정신력도 팀웍도 모두 세계수준과는 상당한 격차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월드컵대회까지 1년 6개월밖에 남지 않은 기간동안 한국팀을 세계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단계별 대책수립에 들어갔다.

그는 한국축구가 세계수준에 이르기 위해서는 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전원공격, 전원수비를 통해 쉴새없이 강팀을 몰아붙이는 「토탈축구」, 「파워축구」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국축구에는 이미 누구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과 관행이 뿌리깊게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기술이 모자라는 것이지 체력과 정신력은 결코 축구선진국에 뒤지지 않는다는 생각, 각자에게는 고유의 포지션이 있어 공격하는 사람은 공격만 수비하는 사람은 수비만 잘 하면 된다는 배타적 의식, 외국인 감독은 우리 현실을 잘 모르고 자기식대로 하다가 결국 좌초하고 말 것이라는 냉소의식 등등.

히딩크는 이 만만찮은 난관에 뚝심과 배짱으로 대응해나갔다. 그는 먼저 멀티플레이어가 될 수 없는 사람은 선수기용에서 배제했다.

또 팀웍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스타의식에 안주해 있는 선수들도 철저히 배제했다. 개인기의 부족을 메꿀 수 있는 것은 조직력의 강화밖에 대안이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는 한편으로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실행에 옮겨줄 수 있는 미완의 대기들을 발굴하여 훈련에 참가시켰다.

이러한 그의 실험은 사실 상당한 리스크를 안고 있는 것이었다. 1년 6개월이라는 남은 기간이 그렇게 길다고도 할 수 없는데 새로운 실험을 해서 과연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실제로 그가 감독직을 수행하기 시작한 2001년 1월부터 8월까지의 실적은 형편없다고 할 정도로 부진의 연속이었다.

자신감을 기르기 위해서는 강팀과 맞붙어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소신으로 선진축구팀과 대전한 결과는 5월 프랑스에 5:0 8월 체코에 5:0으로 대패하는 참담한 현실로 드러났다.
오죽하면 히딩크의 한국이름이 오대영이라고 했을까.

9월 이후에는 그동안의 프로그램이 서서히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한 탓인지 강호 나이지리아에 1승 1무, 11월에는 크로아티아에 1승1무의 성적을 올리는 비교적 양호한 성적을 올렸다. 그러나 다시 2002년 1월의 북중미골드컵에서는 미국에 1무 1패의 전적밖에 올리지 못하는등 히딩크호는 여전히 불안한 모습을 불식시키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언론과 국민사이에는 히딩크에 대한 불신의 소리가 높아졌고 여기에 여자친구 문제나 선수선발을 둘러싼 기술위원과의 마찰등의 문제가 불거져 자칫하면 도중 하차할 수도 있는 최악의 위기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정몽준 축구협회의 전폭적 신임을 바탕으로 히딩크는 일관되게 자신의 플랜을 실천해 나갈 수 있었고 월드컵이 다가오면서 3월 핀란드에 2:0 승, 4월 코스타리카에 2:0승 등의 양호한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5월 16일 유럽의 스코틀랜드에 4:1의 대승 5월 21일에는 우승후보 잉글랜드와 1:1 무승부 5월 26일에는 월드컵 전대회 우승국인 프랑스와 3:2의 대등한 경기를 펼치면서 상승세를 이어갔다.

그리고 드디어 6월 월드컵이 시작되면서 한국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기 시작했다.

6월 4일 폴란드에 2:0의 통쾌한 승리, 6월 10일 포르투갈을 꺾은 미국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인 끝에 1:1 무승부, 6월 14일 FIFA랭킹 5위이자 우승후보 포르투갈을 맞아 1:0의 감격적인 승리.

6월 18일 역대 월드컵 3회 우승전력의 이탈리아에 2:1 승으로 8강 진출, 6월 22일 우승후보 스페인에 0:0 PK 5:3승으로 4강 진출.

준결승전에서는 아깝게 독일에 1 : 0 으로 패배했지만 한국팀은 세계 축구사를 다시 쓴 열정과 패기의 팀으로 찬사를 받으면서 전세계에 한국을 강렬하게 각인시켰다.

그리고 4강진출의 신화를 달성한 히딩크는 한국의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을 받으면서 한국인의 마음에 영원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간직되는 인물이 되었다.


[성공요인]

히딩크의 성공은 한국팀의 성공과 별도로 생각하기 어렵다. 따라서 히딩크의 성공요인 분석도 한국팀의 성공요인 분석과 중첩될 수 밖에 없다.

한국팀의 성공요인에 대한 분석은
매스컴을 통해 이미 넘칠 정도로 많이 나와있고 카페가족 여러분들도 이미 상당부분 숙지하고 있는 상태이지만 여기서는 그러한 내용들을 열정, 인간관계, 전문지식, 창의성, 리더십이라는 항목으로 다시 한번 정리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 열정 ]

히딩크 성공의 핵심요인은 역시 어느 성공에서나 마찬가지로 열정이다. 히딩크의 한국팀에 대한 열정 그리고 우리선수들의 열정이 활화산처럼 불타올라 오늘의 성공을 이루어냈다.

감독제의를 받기까지는 거의 잘 모르는 팀이었을 한국팀에 대한 히딩크의 열정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성공스토리에서는 그가 한국선수들의 순수성에 반하여 감독직을 수락한
것으로 되어 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겠지만 반드시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거액에 이르는 연봉도 그의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는 무엇보다 몸값을 철저히 따지는 프로이기 때문이다.

그가 받는 연봉은 월드컵이 끝나는 2002년 6월까지 1년 6개월동안 145만 달러(18억원), 16강 진출시 25만 달러(3억원)를 보너스로 받고 8강전 이후 토너먼트에서 승리를 거둘때마다 거액의 보너스를 추가로 받기로 약정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1년 6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동안 온갖 비난에도 불구하고 한국팀에 열정을 쏟아부었던 것은 돈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한국선수의 순수성과 열정을 보고 느끼면서 자기가 열정을 쏟아붓기만하면 세계가 깜짝 놀랄만한 일을 해낼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발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미완의 대기를 갈고 닦아 진정으로 세계가 인정해줄 수 있는 대기로 키워내는 기쁨, 이것은 곧 리더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모국 네덜란드가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탈락하여 자국팀으로는 그런 기쁨을 만족시킬 수 없었을 때 한국에서 그런 가능성을 발견했다면 국적이 큰 문제는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이처럼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 지난 세월동안 한국팀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게 아닐까?

그런데 그가 쏟는 열정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열정과는 약간 차이가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흔히 열정하면 모든 것을 희생해서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고 자신의 사생활 마저도 포기해야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는 진정으로 자기 일을 즐거워하면서 집중하는 것을 열정의 척도로 생각했다.

자신의 역할만 충실히 수행한다면 사생활은 전혀 문제삼지 않았고 본인 스스로도 연인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갖는등 우리의 상식과는 잘 부합되지 않는 자유분방한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또 정신력이라는 정체모를 용어로 포장된 열정을 경계했다. 그가 강조하는 열정은 어떠한 강팀과 맞붙어도 기죽지 않는 자신감이었고 그러한 자신감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훈련을 거듭하는 것이었고, 무작정 "패배하거든 살아 돌아올 생각말라" 식의 어둡고 우울한 열정이 아니었다.

요컨대 그가 말하는 열정은 진정으로 즐거워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집중과 도전이었고, 그러한 열정을 몸에 익힌 한국팀은 불안감과 비장감을 주던 과거와는 달리 자신감과 여유를 주면서 펄펄 나는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관계]

히딩크는 한국식 인간관계를 뿌리채 뒤집어 놓은 원흉(?) 이다. 장유유서와 연줄로 요약되는 우리의 인간관계.
나이많으면 무조건 한수 접어야 되고 연이 없으면 되는 일이 없고 연이 있으면 안되는 일도 없는 우리들의 터무니없이 비합리적인 인간관계를 적어도 축구에서만큼은 철저히 깨부신 히딩크는 이것만으로도 길이 길이 찬사를 들어 마땅하다.

생각해보라. 선수 11명이 나이에 따라 연줄에 따라 모두 따로따로 노는 팀과 11명이 서로 충분히 알고 협력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내는 팀이 맞붙었을 경우를...

이 게임은 11명과 11X11 = 121명이 싸우는 게임이다. 결과는 뻔하지 않는가?

리더의 능력의 차이는 어떻게 보면 간단하다. 11명을 따로 놀게 할 것인가. 아니면 11명이 상호 시너지효과를 내면서 121명이 뛰는 것처럼 하게 할 것인가?

11명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11명 상호간의 수평적 관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이다. 아니 선수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선수들을 이끄는 리더와도 진정한 수평적 관계가 되어야 한다.

히딩크는 이 역할을 해냈다. 선수들 모두에게 같은 자리에서 식사를 하게 하고 서로 반말하도록 하고 언제나 공정한 기준으로 선수들을 대하고 따뜻한 애정으로 감싸는 히딩크 앞에서 우리 선수들 11명은 121 명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전문지식]

사람들은 납득할만한 설명을 해주지 않으면 좀처럼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더구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나름대로 상당한 성과를 올리고 있는 스타라면 더더욱 그렇다.

축구국가대표 선수가 될 정도면 축구에 관한 한 주관이 뚜렷하지 않겠는가? 이런 사람들을 기존에 익숙했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개조해 나가는 것은 정말 어려운 과제일 것이다.

이 어려운 과제를 히딩크는 해냈다. 그가 택한 방법은 데이터에 입각한 과학적 분석과 훈련 프로그램. 히딩크는 이를 위해 3사람의 참모를 직접 데리고 왔다.

핀 베어백 수석 코치와 레이몬드 베르하이엔 체력 담당 트레이너, 이즈신 고트비 비디오 분석관이 바로 그사람들이다.

베어백 고치는 과학적이고 치밀한 훈련프로그램 작성을 통해 11명의 선수들이 톱니바퀴 돌아가듯 유기적으로 움직이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네덜란드 왕립 축구 학교에서 운동생리학을 강의한 경력이 있는 베르하이엔 트레이너는 체력강화를 위한 프로그램을 끊임없이 개발해 후반 체력부족이라는 한국축구의 고질병을 치료했다.

특히 그가 개발한 체력강화프로그램은 지겹게 마냥 뛰기만 하는 원시적
방식이 아니라 즐기는 가운데 저절로 체력이 높아지는 방식으로 되어있어 선수들의 훈련 효율성을 크게 높일 수 있었다.

고트비 비디오 분석가는 대표팀과 상대의 경기를 담은 비디오를 컴퓨터로 분석해 히딩크 감독이 작전을 수립하는데 필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전반전 게임이 끝나면 그 결과를 상세히 분석해 후반전 작전수립에 참고할 정도이니 어느 선수가 그렇게 해서 나온 지시에 저항할까?

전문지식이란 이래서 중요하다.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는 상대에 대한 지식을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팀의 내부부터 리더의 지시를 마음으로부터 수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히딩크는 과학적 데이터를 통해 경험이나 감에 의거한 반발을 억제하고 선수들을 모두 납득시킴으로써 선수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최대로 끌어낼 수 있었다.


[창의성]

선수들에 대한 히딩크의 가장 강력한 주문은 공격과 수비가 따로 없는 전원공격 전원수비의 멀티플레이어가 되라는 것이었다. 각각의 포지션에 충실한 선수들로 구성된 팀과 어느 포지션이나 소화할 능력을 지닌 선수로 구성된 팀을 비교해보자.

1. 각각의 포지션에 충실하면서 선수들간에 시너지 효과가 없는 경우에는 각자의 능력을 1이라고 한다면 11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

2. 각각의 포지션에 충실하면서 상호 시너지 효과가 있다면 11X11 = 121 의 힘이 나온다.

3.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해 내면서 상호 시너지 효과가 있다면 11X11X2(2포지션을 소화하는 경우) = 242 의 힘이 나온다.
너무 도식적으로 수치를 제시했지만 멀티플레이어가 될 경우의 이점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멀티플레이어가 되려면 몇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강한 체력이 뒷받침 되어야한다.
한가지 역할을 하는 데만도 전후반 90분을 뛰려면 탄탄한 체력이 필요한데 수비하다가 공격하고 공격하다가 수비할 수 있는 선수가 되려면 체력이 훨씬 더 강화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논리이다.
히딩크가 체력강화를 제1우선으로 삼은 주된 이유이다.

둘째 스스로 생각하는 축구를 해야한다.
하나의 역할에만 충실한 종래의 방식대로라면 자신의 체력이나 개인기만 높이는 훈련만 열심히 쌓으면 되었다.
그러나 팀속에서 언제 자신의 역할이 바뀔지 모르는 가변적 상황에서는 팀플레이 자체를 정교하게 이해하고 습득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제 선수들은 끊임없이 공부를 해야 하였고,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 평소에도 동료와의 호흡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여기의 분석용어를 사용하여 말하면 열정과 인간관계와 전문지식이 총체적으로 결합되지 않으면 창의성을 발휘하는 멀티플레이어가 될 수 없고 그런 사람은 자연히 히딩크의 선수기용에서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박지성과 같이 지칠 줄 모르는 체력으로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해 내면서 창의적 플레이를 하는 선수들.

히딩크는 이런 선수들을 중심으로 월드컵 이전 치러진 32번 의 A매치에서 항상 상대가 예측하지 못한 카드를 준비할 수 있었고 그 결과는 바로 우리가 보고 있는 대로 한국축구팀의 환골탈태였다.


[리더십]

지금까지 한국 축구의 성공을 가져온 요인들을 열정, 인간관계, 전문지식, 창의성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하나하나를 뜯어본다면 사실 세계축구의 벽을 넘기 위해서는 당연한 수순이자 논리였다.

우리가 이 당연한 논리를 그동안 실천할 수 없었던 것은 크게 보아 두가지 요인 때문이다.

첫째는 축구에서 세계일류 수준으로 간다는 「주제넘은」 목표를 세우지 않았다.
기술이 부족하니 세계수준으로 간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삼성전자가 처음부터 오늘날과 같은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가? 반도체를 해야 삼성과 우리 경제가 살 수있다는 당시로서는 터무니없는 목표설정이 결국 오늘의 삼성전자를 만든 것이 아닌가?

히딩크의 위대한 점은 이처럼 우리가 아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목표를 설정했던 점에 있다.

시간이 부족하여 16강도 못이루고 좌초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과학적 프로그램에 따라 충분히 노력하면 충분히 축구일류국으로 한국을 도약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고 그것이 결코 헛된 비전이 아니었음을 실제의 경기에서 증명해 보였다.

둘째 세계일류 수준으로 간다는 주제넘은 목표를 처음부터 세울 수 없었던 것은 우리의 고질적인 병폐들이 너무나 커다란 제약 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가 수십년동안 익숙하게 받아들여 온 관행을 월드컵 16강 진출이 아무리 중요하다 한들 하루아침에 버릴 수 있겠는가?

이것이 가능하려면 우리의 과거경험과는 완전히 단절된 새로운 인물이 필요했고 히딩크는 외국인이라는 점에서 바로 그러한 요청에 부합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외국인이라고 해서 필요한 변화를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세상물정 모르는 돈키호테로 취급받거나 변화과정에서 적지 않은 저항과 갈등이 일어날 수 도 있었을 것이다.

히딩크는 이것을 시장원리에 입각하여 철저히 능력 위주의 인선과 훈련프로그램을 통해 선수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시스템적 리더십의 형태로 접근함으로써 문제를 비교적 수월하게 풀어나갈 수 있었다.

나아가 허공을 향해 내지르는 그의 어퍼컷만큼이나 파워풀한 히딩크의 카리스마는 선수들에게 무한한 신뢰를 줌으로써 그의 시스템적 리더십을 선수들이 열정적으로 받아들이게 하여 한국팀이 최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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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근로자서 오페라 '디바' 된 창원대 이점자 교수 ] **********************



가난에 허덕이며 방직공장에서 실을 뽑던 여공이 오스트리아의 음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모교의 교수로 ‘금의환향’했다.

올해 초부터 창원대 음대 교수로 일하게 된 이점자 교수
(41)의 이야기다.

그는 역경과 도전으로 가득 찬 자신의 삶을 ‘나는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살고 싶다’는 자전 에세이집에 옮겨 최근 펴냈다.

그의 소녀시절은 어딘가 있을 빛을 찾아 캄캄한 지하 복도를 뚜벅뚜벅 걸어온 시간이었다.
빈속을 채우느라 잔칫집에서 얻어온 상한 음식을 먹고 숨진 큰오빠, 집 안에 곡기가 끊어지자 피를 판 돈으로 쌀 한 됫박을 사온 작은오빠에 대한 기억이 그렇다.

그는 “끝내 낙관을 잃지 않은 어머니가 가르쳐준 곳, 쑥과 흰 찔레꽃이 만발한 고향 산천(전남 담양)이 보여준 하늘을 좇아 살아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신을 채찍질한 삶의 동력은 “세상이 정해준 조건과 끝까지 타협하지 않겠다는 열의 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다”고 찬찬히 말했다.

그가 ‘내게는 노래로 아름다움을 빚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확신 속에 졸업이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중학교를 마치고 찾아간 곳이 마산의 한일합섬 부설 여고. 4시간 수면, 8시간 공장일, 4시간 수업, 그리고 끝없이 매달린 피아노 공부…. 거대한 기계 앞에서 일을 하다가 쏟아지는 잠 속에 톱니 속에 손이 말려 들어간 적도 있었다.

손가락이 잘리지 않은 것은 피아노를 계속 치게 하려는 누군가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로 대학 성악과를 마치자 주변에서는 ‘장한 일을 해냈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실컷, 좀더 실컷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보자는 원(願)이 있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음대생들 조차 아무런 뜻도 모르는 채 부르는 외국 오페라의 노랫말들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부터 알고 싶었다.

그는 독일어라고는 ‘나’ ‘너’도 모르는 상태에서 1991년 오스트리아로 건너갔다.

서른한 살 노처녀의 외로운 결단이었다. 처음에는 어학수업용 컴퓨터 앞에서 하루 종일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빈 프라이너 콘스바토리움 성악과와 오페라과(수석 졸업), 빈 국립대학 음악학과와 음악교육학과를 마쳤다. 동시에 2개 학과에 등록해 공부하기도 했다.

모두가 잠든 밤 10시부터 새벽 3시반까지의 시간, CD를 듣거나 사전을 찾으면서 곡 분석을 마치고 방음장치가 된 방에서 홀로 노래하는 ‘올빼미’ 일과였다. 이처럼 피눈물 나는 노력 끝에 ‘춘희’ ‘피가로의 결혼’ 등의 주역을 맡게 됐다.

‘여공에서 오페라 디바’가 됐지만 그는 아직 어려웠던 시절 공장에서 친구들이 불러주던 ‘이점자’란 이름을 자랑스러워한다.

유학생들이 편의상 갖고 있는 그 흔한 ‘현지이름’조차 없다. ‘이점자’란 이름에 자긍심을 불어넣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는 “힘들게 살아와 작은 것을 이뤘다”며 “나를 무슨 대단한 유럽 오페라계의 거물처럼 치켜세우려는 이를 만나면 할 말이 없다”며 자신의 ‘성취’를 과장하지도 않았다.

또 “내 속의 희망을 따라 실컷 살고자 해왔을 뿐이며 지금도, 앞으로도 ‘실컷 사는’ 그 과정 자체가 내게 큰 기쁨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유학 도중 정류장에서 ‘운명처럼’ 만난 만프레드 크레취마이어(현 빈국립대 연극영화과 교수)와 결혼, 슬하에 아들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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