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바둑의 최고봉 이창호 ] *********************************



< "괴롭더라도 참고 기다리는 편이 기회가 더 많이 오죠!" >

이창호는 복잡한 것을 싫어한다고 말한다. 그런 이창호가 어떻게 지구상에서 가장 복잡한 게임이라 할 수 있는 바둑의 최고수가 되었을까?

이창호는 아주 느리고 고전적이다. 때로는 세월의 흐름조차 멈춰버린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런 이창호가 어떻게 스피드를 생명으로 하는 바둑판을 제압할 수 있었을까?

하루가 다르게 기술이 발전하는 첨단의 승부세계에서 어떻게 무적의 제일인자(第一人者)가 되었을까?

이창호는 촌스럽다. 좋게 말하면 소박하다. 남들이 세련미가 넘치는 멋진 감각으로 화려하게 앞서가며 한 건을 노릴 때 그는 묵묵히 후수(後手)를 감수하며 때를 기다린다.

지옥의 파수병처럼 언제나 그곳에 서서 기회가 오지 않는다면 영원히 고통을 감내할 준비가 되어있다.

바둑계가 그런 이창호에게 최고의 영광을 준 배경은 무엇일까?

바둑에는‘실리’와‘두터움’이란 두 마리 토끼가 있다. 실리를 좇으면 엷어지기 쉽고 두터움에 치우치면 실속이 없기 십상이다.

실리는 눈앞의 현찰이고 두터움은 장래성이다. 이 두 가지 요소는 끊임없이 갈등하고 충돌한다.
드넓은 바둑판은 언제나 미지의 변화로 꿈틀거리고 미로와 함정, 유혹으로 가득한데 과연 어느 길로 나가는 것이 최선인가.

바둑은 끝없는 선택의 게임이며 선택의 기준은‘능률’이다. 이것이 최우선이다. 빠르되 뒤탈이 없는 행마가 가장 능률적인 것이니 바둑은 우선 스피드를 익혀야 한다.

그 다음 난국을 돌파할 수 있는 몸싸움의 능력과 수시로 변하는 형세에 대한 판단력을 갖춘 뒤 바둑판이란 대해로 나아간다.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는 경험과 용기, 그리고 인내로 역경을 헤쳐나간다.

그러나 정작 어려운 점은 따로 있다. 용기는 간발의 차이로 만용이 되고 인내는 종이 한 장 차이로 소심의 낙인을 찍힌다는 점이다.

조훈현 9단은 ‘부드러운 바람, 빠른 창’이란 말 그대로 바둑계 최고의 속력행마를 자랑한다.
바람처럼 달리다가 순간적으로 날아드는 창은 화려의 극치다. 일거에 형세를 휘어잡고 불길처럼 일어선다.

조치훈 9단은 입에 단도를 물고 폭포를 거슬러올라가는 투사다. 역경에 처할 때마다 불같은 투혼으로 극복하며 온몸을 던져 승리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일류들은 대개 그랬다. 일본을 휩쓸었던‘면도날 사카다’는 손만 닿으면 피가 배어날 정도로 날카로웠고 유창혁 9단은 여름 햇살처럼 강렬한 공격으로 지울 수 없는 이미지를 남겼다.

이창호는 그러나 이런 일류들의 화려함과는 전혀 다른, 어쩌면 누추하기조차 한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다.

강자는 혼란과 변화 속에서 더욱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기에 당연히 변화를 좋아한다. 그러나 최강 이창호는 될 수 있으면 변화를 피한다.

막강한 화력과 전술전략을 지녔음에도 그걸 사용하지 않고 평탄한 길을 가려고 애쓴다. 프로가 변화를 피하면 겁쟁이란 비난을 면할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창호는 적이 대군을 몰고 달려오면 허리를 숙여 옆으로 피한다.

이창호는 전력을 다해 싸우지 않는다. 전력을 다하는 첨예한 싸움은 어디서 묘수가 등장할지 모른다. 사태는 예상치 못한 곳으로 마구 흐르고 종종 백척간두에 서게 된다.

한 방에 성공할 수 있지만 한 방에 무너질 수 있다. 이창호는 이런 위험은 옳지 않다는 신념이 뼛속까지 배어 있는 청년이다.

반대로 이창호의 스승인 조훈현 9단은 ‘기세에서 밀리는 건 바둑도 아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다.

그는 어린 창호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상대가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마라. 낯선 길을 두려워 마라. 그렇게 해야 오늘은 지더라도 내일은 이긴다.”

이창호는 스승의 가르침과 다른 방향으로 갔다. 그는 어려서부터 ‘실수’에 깊이 천착했다.
패배한 바둑을 밤새우며 복기하면서 승부는 결국 묘수가 아니라 실수로 판가름난다는 것을 뼈저리게 인식했다.

선생님은 실수도 내일의 밑거름이라고 말했지만 그는 실수가 하나의 습관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9단은 실수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았다. 상대를 경시하는 마음, 상황을 쉽게 보는 경솔함, 내쪽도 불안하기는 하지만 상대가 그 정도로 완벽하겠느냐는 오만함, 서로 모르는 길이니까 어떻게 잘 되겠지 하는 안이함.
이런 것들은 습관이 된다. 그것을 근절해야 한다.

사람이 어떤 것을 안다는 것과 그 해결책을 실천에 옮긴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이창호는 달랐다. 그의 자세는 더욱 신중해졌고 그의 바둑은 점점 더 견실해졌다.
1백점짜리 수를 찾기 어려우면 70점이나 80점짜리에 만족했다. 1백점짜리 수가 번쩍번쩍 빛을 내며 유혹을 해도 그 수가 0점의 위험요소를 지니고 있다면 못 본체 참았다.

뛰어난 사람일수록 한계에 도전하는 법이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즐기는 법이다. 뛰어난 사람이 아니더라도 바둑두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발견한 묘수를(설령 그로 인해 파멸을 겪는다 하더라도) 자랑하고 싶은 법이다.

이창호는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 속에서도 1백점짜리 묘수를 쓰레기통에 던졌다.

조훈현 9단은 언제나 그 장면의 최선, 즉 1백점짜리 수를 찾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다 0점 짜리를 둔 적도 많다.
하지만 자신에게 1백점 짜리를 찾아낼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포기한 적이 없었다.
이창호는 따지고 보면 스승 조훈현 9단과 정반대의 길로 가버린 것이다.

하지만 부작용이 생겼다. 견실하면 느리다. 느린 것은 치명적이다.
이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여기서 이창호의 저 유명한 ‘기다림’이 등장한다.

곧은 낚시를 드리운 채 세월을 낚았던 강태공처럼 이창호는 천변만화(千變萬化)를 등 뒤로 흘려보내며 무한한 인내력으로 때를 기다렸다.

이창호는 스승의 집에서 기거하던 7년 동안 발소리 한 번 크게 내지 않고 살았다.
밤엔 새벽 2시나 3시까지 매일 공부하며 자신의 바둑에서 단 한 수라도 실수를 지우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이런 수도승 같은 타고난 기질이 그의 바둑스타일에 그대로 배어들었다.

이창호 바둑은 이런 식으로 하나의 틀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감각의 화려함을 중시하는 바둑계에서 이창호를 바라보는 시선은 미묘했다.

승률은 좋으나 품격은 초일류가 아니라는 말이 많았다. 특히 형태의 아름다움과 능률을 중시하는 일본은 이창호의 가치를 노골적으로 폄하했다.

한 판의 불꽃놀이 같은 조훈현의 바둑에 비할 때, 이창호의 바둑에선 바닷물이 소금이 되는 길고 긴 세월이 느껴진다.
상대가 찌르면 그는 물러선다. 상대가 빈사상태의 미생마를 놔둔 채 활개치고 다녀도 그는 공격하지 않고 못 본체 한다.

대신 이창호는 서부영화에 나오는 인디언 추적자처럼 줄기차게 상대를 추격해 간다.

상대는 문득 뒤돌아볼 때마다 언제나 저만큼 떨어져 묵묵히 추격해 오는 이창호의 모습을 보게 된다.

처음엔 그런 이창호의 모습에서 지겨움 비슷한 느낌을 받았으나 이윽고 모든 프로기사들은 뒤를 돌아볼 때마다 전율에 가까운 공포를 느끼게 된다.

“사실은 추격하는 내가 훨씬 괴롭다”고 이창호 9단은 말한다.

“화려한 바둑은 보기 좋다. 나도 그걸 안다. 하지만 바둑은 장기전이고 자신과의 힘겨운 줄다리기다. 승부는 이겨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게 본질이니까 이기려면 실수를 줄이고 괴롭더라도 참고 기다리는 것이 현실적이다.”

이창호를 보면 몇 가지 기훈이 떠오른다.

▶선작50가자필패(先作五十家者必敗)=먼저 50집을 지은 자는 반드시 진다는 얘기이니 너무 앞서가려고 서두르지 말라는 얘기다.

▶묘수를 3번 두면 진다=한 번 두기도 어려운 묘수를 3번이나 두었는데 왜 질까. 재주가 너무 승(勝)하면 위험하다는 경구다.

▶하수(下手)는 겁이 없다=조훈현은 전류처럼 빠르다. 그러나 그 빠름 속에 숨은 과속의 위험성을 지적할 만한 능력자가 없었다. 지금은 이창호라는 교통순경이 종종 딱지를 뗀다.
오랜 바둑사에서, 아니 세상살이에서 이창호는 속도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들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 [ 동동구리무’ 팔며 책 쓰는 장돌뱅이 작가 안효숙 ] **********************



“밑바닥에서 희망을 사고 판다”

물건이 넘쳐나는 백화점과 할인점이 보편화된 요즈음, 아직도 5일장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이의 심정은 어떨까? 그것도 어린 아이 둘을 먹여 살려야만 하는 아녀자라면....

충북 청주에서 의류 대리점을 운영하던 안효숙(43)씨는 IMF를 맞아 어려움을 겪은 끝에 가게문을 닫아야 했다.
남편의 술주정과 구타까지 겹치면서 모든 것을 잃고 거리로 나앉은 안씨는 ‘그냥 대충 살자’는 남편의 자포자기에 더 깊은 절망을 느꼈다.

남편의 폭력으로 상처를 입을수록 안씨는 더욱 살고 싶었다고 한다. 운명은 자신을 외면하는 듯 보였지만 말이다.

안씨는 거칠대로 거칠어진 남편을 피해, 어린 아이 둘과 함께 간신히 몸을 누일 만한 방 한칸을 얻기 위해 무작정 서울로 향했다.
정말이지 무슨 일이든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심정을 갖고서.

상경한 안씨는 밀입국한 조선족 여인과 함께 식당일을 시작했다. 거리에서 빵도 구워 팔았다.
팔다 남은 빵 반죽으로 바닐라향이 역하게 코를 찌르는 수제비를 끓여 먹으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부끄러움을 없애기 위해 소주 반병을 마시고 차량들 사이를 오가며 일회용 면도기도 팔아 보았다.

안씨는 지금 전국의 5일장을 떠도는 ‘장돌뱅이’가 돼 좌판을 펴고 싸구려 화장품을 팔며 지낸다.

더 내려갈 곳 없는 인생이지만, 그래도 어린 두 아이들과 함께 살을 비빌 수 있는 옥탑 방이 있어 행복하다.

폭이 1m도 채 안되어 보이는 작은 인도(人道) 한켠에 마련한 좌판을 지나는 사람들은 안씨를 보며 아는 체 한다.

“아! 그 작가시구먼. 책 잘 읽었습니다. 열심히 사세요.”
안씨는 더욱 몸 둘 바를 몰라 어색한 웃음으로 인사를 한다.

안씨가 ‘유명세’를 탄 것은 장돌뱅이라서가 아니다. ‘젊은 여자’ 장돌뱅이여서도 아니다.

지난 2월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 석자가 들어간 책을 냈기 때문이다. <나는 자꾸만 살고 싶다>는 제목에 ‘오일장 떠돌이 장수 안효숙의 희망통신’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

4월 화창한 봄날 이른 아침, 충북 옥천의 장터에서 만난 그는 더 내려갈 곳 없는 삶을 살아 온 사람치고는 여유 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나이 마흔 셋에 몇 년째 5일장을 돌아다녔으니 말씨가 거칠만도 하건만, 안씨는 내내 수줍은 모습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오전 8시반. 벌써 자리를 잡은 장돌뱅이 이웃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눈 안씨는 중고 승합차에서 화장품이 담긴 플라스틱 소반 여남은 개를 내린다.
그리고 자신보다 몇배는 커 보이는 파라솔을 꺼내 능숙한 솜씨로 펼쳤다.

옥천농협 앞 계단에 만든 그림자가 ‘영업공간’인 셈이다. 무질서해 보이는 장터지만, 장돌뱅이들에게는 저마다 자리가 있다.
농협 앞 계단은 몇 년째 안씨의 전용공간이 돼있다.

“처음엔 화장품을 길바닥에다 펼쳐 놓고는 세 번째 계단에 앉아서 팔았죠. 혹시라도 아는 사람을 만나면 그냥 계단에 앉아서 쉬는 척하려고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두 번째 계단으로, 그 다음에는 첫 번째 계단으로 내려와 앉게 되더군요.”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기 때문에 이젠 부끄러움 같은 건 없단다.

안씨는 면장갑으로 화장품에 앉은 먼지를 닦아낸다. 그래 봐야 이리저리 뒹군 흠집을 숨길 수 없는 싸구려 화장품인데도 정성스레 닦는다.
그리고 파라솔 그늘 밑 계단에 앉아 신경숙씨의 소설 <종소리>를 펼쳐 든다.

도대체 장사에 생각이 없는 사람 같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 호객행위를 하지는 못하더라도 지나가는 손님을 불러세워 물건은 팔아야 할 것 아닌가.

그러나 안씨는 “모르는 소리 말라”고 한다. 손님에게 말 많이 하지 않고 편하게 물건을 고르게 하는 것이 최고라고 둘러댄다.

오전 10시 반이 지나서야 할머니 한 분이 화장품에 관심을 보이며 좌판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이날의 첫 손님이었다.

“손 터진 데 바르는 약 있수?”

“그럼요.”

능숙한 솜씨로 크림을 손가락으로 듬뿍 찍어 할머니 손에 발라 주며 “5,000원인데 단골이니까 4,000원만 달라”고 한다.

하루 4만~5만원을 번다는 안씨가 나름대로 터득한 장사법이다.


< 단칸 옥탑방에서 싹튼 ‘희망글’>

고된 삶에서 그를 지탱해준 것은 글이다. 파김치가 된 몸으로 아이들을 재우고 밤을 하얗게 새우며 글을 썼다.
글을 쓰면 행복했던 어린 시절이 떠오르고, 2년 전 암으로 작고한 어머니의 숨결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솔직하고 사람 냄새나는 그의 글은 지방신문 공모에서 당선되기도 했다.

2001년 가을부터 인터넷에 하나, 둘 올린 메모글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안씨는 팬클럽까지 생겼다.

“영화로 제작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힘내라” 등 격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마침 그의 글을 읽은 한 출판사 사장이 책을 내자는 제안을 해와 책을 내기에 이르렀다.

책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재판, 삼판을 찍어야 할 정도가 됐다. 이 이야기가 언론을 타면서 안씨는 순식간에 유명해졌다.

그냥 손 한번 만져보고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산에서 이것저것 먹을 것 사 들고 와서는 한아름 안겨주고 가는 사람도 있다.

“인터넷과 기사, 방송을 접한 사람들이 된장, 고추장, 김치까지 담가 보내주세요. 저희는 김치가 떨어진 적이 없어요.
아직은 따뜻한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아요. 아이들 평생장학금을 주겠다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돈은 정말 못 받겠더군요. 부담이 돼서요.”

안씨의 거처는 대전광역시 송촌동 한 상가건물의 옥상에 있다. 일어서면 머리가 닿을 정도인 옥탑방이 그와 두아이의 보금자리다.

게임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다는 아들 유영림(16)군과, 선생님을 꿈꾸는 딸 영비(14)양을 데리고 1칸짜리 옥탑방으로 이사 오던 날, 아이들이 “백설공주에 나오는 난장이 집 같아 좋다”며 엄마를 오히려 위로했다고 한다.

5월초 그는 옥탑방을 벗어난다. 그의 책을 읽고 비로소 사정을 알게 된 집 주인이 2층 방이 비었다며 안씨 가족을 불러내린 것이다.

“아이들이 무척 좋아해요. 옥탑방은 정말 춥고 더워서 아이들이 안쓰러웠거든요.”

스스로를 ‘장돌뱅이’라고 당당히 말하는 안씨는 이제 MBC 라디오 <여성시대> 초대 손님으로, 그리고 CBS 라디오 <행복한 아침>에 고정 코너를 맡아 5일장 이야기를 들려줄 정도로 유명해졌다.

“현모양처가 되고 싶었죠. 그런데 이젠 거지가 되는 게 꿈이에요.”

삶의 밑바닥에 있으면 위를 볼 수 있기 때문이란다. 또 욕심을 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돈이 좀 모이면 더 깊은 시골로 갈 겁니다. 빈집이라도 내 집 삼아 살 수 있잖아요. 그리고 거동 못하는 시골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물건 파는 방물장수가 되고 싶어요.”

올 가을쯤 장터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진솔하게 표현한 책을 낼 것이라는 안씨는 앞으로도 책은 계속 쓰겠노라고 했다.
글은 그의 유일한 삶의 탈출구이자 위안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옥천에 장이 서는 날이면 그는 화장품 좌판을 펴고 농협 계단에서 책을 읽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 [ 노동시장 유연화를 주도하는 리더 ] ****************************



취업하기 위해 혹은 전직하기 위해 이력서를 작성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잡코리아(www.jobkorea.co.kr)라는 사이트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98년 취업메타 검색엔진으로 시작하여 4년만에 기업회원 18만, 개인회원 60만, 하루 채용공고 등록 1,500건, 이력서 등록 2,300건에 이르는 한국최대의 취업사이트로 성장한 잡코리아, 구인구직의 연결을 통해 노동시장 유연화와 실업해소에 커다란 기여를 하고 있는 잡코리아의 김화수 사장을 만나 성공스토리를 들어보고 석세스피아 고유의 분석틀로 성공요인을 분석해본다.

===============================================================================

[ 성공스토리 ]

김화수사장이 사업을 시작한 것은 28세때인 1997년.

1995년 성균관대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약 1년간 넥서스 컨설팅이라는 회사에서 정보분석팀장으로 직장생활을 한후 다시 대학원생과 프리랜서를 겸한 생활을 1년 정도 겪은 후에 (주)칼스텍 이라는 웹에이전시 회사를 차리면서부터이다.

칼스텍은 주로 인트라넷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회사였는데 일을 해나가면서 김화수 사장은 인터넷 이용자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면서 사업타당성이 있는 아이템은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다.

숙고 끝에 내려진 결론은 온라인 리크루팅사업. 선택이유는 정보나 데이터를 직접 생산 가공하는 것은 원가가 높아 수지가 맞지 않는 만큼 정보생산은 유저가 담당하도록 하고 그 관리만을 행하는 사업이어야만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1998년의 취업메타검색엔진. 오늘날의 잡코리아의 기반을 닦아준 최초의 작품이자 조선일보 추천사이트로 선정되는 계기가 된 히트상품이다.

그 결과 사이트 인지도가 크게 높아지면서 99년 4월부터는 자체 취업정보 컨텐츠 서비스를 할 수 있게 되었으며 12월에는 MBC가 주최하는 10만일자리 찾기 캠페인의 주관기업이 될 정도로 급성장을 보였다.

2000년에 들어서는 잡코리아는 더욱 눈부신 성장을 보이게 된다.
5월에 회사명을 칼스텍에서 현재의 잡코리아로 바꾼 이후 IT 취업채용서비스 IT잡코리아(it.jobkorea.co.kr), 아르바이트 취업정보서비스 알바잡코리아(alba.jobkorea.co.kr)등이 잇따라 오픈되었으며, 그러한 성과들이 높게 평가되어 디지털 컨텐츠 대상 정보통신부장관상을 수상하고 주요 언론 매체로부터 상반기 히트상품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또 9월에는 국내주요취업사이트에 등록된 채용정보를 한꺼번에 검색할 수 있는 채용정보 통합정보검색엔진인 잡스파이더(jobspider.co.kr)를 오픈하였고, 11월에는 Web기반 온라인 채용관리 시스템인 ORAS(Online Recruiting Application System)서비스, 11월에는 구직자의 인성·적성검사 서비스등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매출과 수익도 크게 증가하여 2001년 상반기 매출은 전년동기 대비 200% 이상 증가한 7억원의 실적을 보였으며 3/4분기 이후에는 흑자경영으로 전환할 수 있게 되었다.

주요 수익원은 채용공고나 이력서의 노출위치에 따라 차별화된 과금을 적용하는 유료옵션으로 이러한 유료서비스와 일반적인 무료서비스를 혼합한 하이브리드 모델을 통해 구인구직이라는 공공성과 수익성을 조화시킨 점이 높게 평가되어 2001년 인터넷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현재 잡코리아는 지난 2000년 12월부터 주요랭킹포털에서 선정한 '구인구직서비스'부문에서 도달율과 접속율면에서 모두 1위에 랭크, 국내에서 가장 많은 구직자와 기업인사담당자가 이용하는 구인구직 사이트로 성장하였다.

잡코리아는 향후에는 '리크루팅 e-마켓플레이스' 서비스를 발전시키는 것을 중요한 사업 비전으로 정하고 있다. 최종 사용자라 할 수 있는 채용기업과 구직자 뿐만 아니라 헤드헌팅 또는 채용대행업체와 아웃소싱기업과 같은 에이전시 기업들이 모두 참여하는 e-마켓플레이스를 통해 대형시장을 형성하고 현재의 주요 수익모델인 '채용광고' 수익 모델을 '중개수수료' 모델로 전환하여 비약적인 성장을 달성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 성공요인분석 ]

잡코리아의 사무실 문을 들어서 안내를 받았을 때, 제일 먼저 놀란 것은 사장실이 보이지 않는 점이었다.

사장님께서 전화를 받고 계시니 잠깐 기다리라고 하는데 사장이 앉아 있는 자리는 사장실이 아니고 다른 직원들과 크기면에서나 주변환경면에서나 하나도 다를 바 없는 구석의 조그만 자리였다.

구석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팀장 자리정도로 보일 뿐, 입구에서 들어가면 곧바로 보이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보통사람들이라면 썩 내켜 하지 않을 자리에서 김화수 사장은 전화를 받고 있었다.

나중에 김화수 사장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지만 현재의 강남 사무실로 옮겨오기 전에는 사무실의 한 중간에 사장자리가 있었다고 한다.

사장이라면 조용히 자기만의 생각을 할 때도 있고, 중요한 전화를 하거나 받을 일도 있을 터이니 따로 사장실을 가질 필요가 있지 않느냐고 질문했더니 별로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 김화수 사장의 대답이었다.

자기만의 공간을 갖고 싶어하는 것은 누구나가 바라는 일이지만 회사는 투명하고 개방적으로 운영되어야 하며 사장부터 그렇게 행동해야만 직원들도 따라준다는 것이었다.

나이 34세의 젊은 벤처기업 경영자 김화수 사장은 IMF이후 지난 몇년동안 우리가 귀가 아프도록 들어왔던 개방경영, 투명경영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실천하고 있었다.

김화수 사장을 처음 만난 사람은 그가 너무나도 젊고 부드럽게 보이기 때문에 기업의 사장이라기보다는 진지하게 공부하는 대학원생 같은 인상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한시간 남짓 대화를 나누면서 아! 한 분야의 선두를 달려가는 사람은 역시 남다른 데가 있구나, 또 지식의 시대 혹은 디지털시대가 요구하는 경영자란 바로 이런 모습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다른 면이란 성공한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열정이라는 특성이다.

열정이라고 하면 언뜻 가정도 잊어버릴 정도로 밤새워 일하고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터프함을 연상할지 모른다.

그러나 김화수 사장의 열정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는 아침8시 반에 일어나 9시반 쯤 회사에 도착한다. 낮에는 물론 업무로 바쁘다.
그래서 귀가시간은 밤 11시를 넘어서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집에 들어가면 가족과 두시간 정도는 시간을 같이 한다.
그리고 새벽1시부터 2시 정도까지 오늘의 업무를 정리하고 내일의 업무를 계획하는 시간을 갖는다.

김화수 사장이 강조하는 열정은 하루 하루의 열정이 아니다. 그보다는 중장기에 걸쳐 하나의 목표를 이루어 내는 장기적 집중력이 소중하다고 그는 말한다.

조그마한 성과에 만족하여 무사안일에 빠지는 사람이나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난관 앞에 주저앉아 쉽게 목표를 포기하는 사람은 성공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언뜻 순탄한 길만 걸어왔을 것처럼 보이는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99년에 유동성위기로 직원들에게 석 달여 동안 급여를 줄 수 없었던 상황으로까지 몰린 적도 있었지만 온라인 리크루팅 사업의 비전에 대한 확신을 갖고 적극적으로 사업활동을 전개하여 한 명의 직원도 해고하지 않은 채 위기를 극복해나가는 저력을 발휘하였다.


* 인간관계는 어떠한가?

그는 인간관계를 통해 사업을 확대해 나가는 구시대적 전략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사업에서 인간관계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는 있지만 인간관계 그 자체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제품이나 서비스의 품질개선에 노력하는 쪽이 사업에 보다 효과적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사이트인지도 강화를 인한 매스컴 홍보에 있어서도 그 효과와 지속성을 결정하는 핵심 요인은 매스컴종사자들과의 친분보다는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그는 한국식 인간관계에서 필수적인 술자리를 가능한한 피하고 그 시간을 서비스향상이나 업무 개발에 쏟아 붓는다는 자세로 사업에 임하고 있다.

사업에 필요한 전문지식에 대해서는 김화수 사장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21세기를 흔히 지식의 시대라고 하는데 경영자에게도 기업경영과 관련하여 다방면에 걸쳐 깊은 지식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점에 있어서는 김화수사장은 상당히 양호한 출발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미 1996년에 『인터넷검색』이라는 책을 냈고 1998년과 1999년에도 각각 『비즈니스와 실무를 위한 인터넷 파워가이드』,『알기쉬운 인터넷 무역』등의 책을 낼 정도로 인터넷에 대해서는 이론적으로나 실무적으로나 탄탄한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또 대학에서 무역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경제, 경영관련 분야에 대해서도 상당히 깊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지식들이 온라인 리크루팅사업의 구상과 발전과정에서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 창의성은 어떠한가?

김화수사장에게 다른 사람에 비해 자신이 창의적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의외로 순순하게 그렇게 생각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는 창의성을 기존의 것을 새롭게 조합하는 것이라고 정의했고, 일상생활에서 그러한 조합의 습관을 들임으로써 창의성이 배양될 수 있다고 말했다.

거리를 다니면서 혹은 인터넷을 탐색하면서 일견 서로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조합해보는 노력을 하다보면 그 자체로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데도 매우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노출위치에 따른 차별과금 부과라는 잡코리아의 유료옵션도 인터넷 경매업체인 이베이를 조사하다가 눈에 잘 띠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 사이에 수수료상의 차이가 있는 점에 주목하여 이것을 경매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취업분야에 적용하여 생겨난 아이디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잡코리아의 면접시험에서도 피아노와 마우스처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단어를 주고 문장을 만들어보라는 주문을 하기도 한다고 한다.


* 리더십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의 리더십은 위에서 장기적 집중력으로 정의한 열정, 투명하고 개방적인 경영, 관심사업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 기존의 것을 조합하여 새로운 아이템을 만들어 내는 창의성등이 어우러져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이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하자, 그는 망설임 없이 열정이 가장 중요하다고 대답했다.

열정이 있어야 원대한 비전을 향하여 뛸 힘이 생길 것이고 열정있는 경영자 하에서만 직원들도 느슨해지지 않고 전력투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사업에 필요한 지식도 열정만 있으면 얼마든지 쌓을 수 있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생각해내는 습관의 결과인 창의성도 일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만 비로소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떠한가? 디지털시대 혹은 지식의 시대를 이끌어가는 리더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접근하기 어려운 카리스마나 마당발의 인간관계, 불도저같은 추진력으로 포장되기 일쑤인 산업화시대의 리더의 모습과는 달리, 김화수 사장에게서는 차분하고 부드러운 지성으로 걸러진 뜨거운 열정, 생활습관의 하나로 되어버린 창의성, 투명하고 개방적인 마인드라는 디지털시대의 리더의 덕목이 부각된다.

요즘 벤처게이트로 세상이 뒤숭숭하지만 그것은 산업화시대의 잘못된 관행과 의식에 젖어 있던 일부의 사람들이 아직도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패러다임을 깨닫지 못하고 그에 역행하여 저지른 시대착오적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직 우리 사회가 이러한 관행과 의식을 완전히 탈각하지는 못하고 있는 상태이긴 하지만, 김화수 사장처럼 새로운 마인드와 지식으로 무장한 리더들이 조용히 그러나 열정을 갖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해나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의 미래에 대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 [ 인터넷이 만든 개미군단의 우상 ] ******************************



주가지수 1000포인트를 향해 달려갈 때의 주식시장!!!

마냥 올라가는 주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별로 어렵지 않게 돈벌 수도 있을 것 같지만 막상 투자를 해보면 돈벌기는커녕 손해만 보기 일쑤인 주식시장.

5%만이 살아남고 95%가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는다는 전쟁터와 같은 주식시장.

이런 주식시장에 뛰어든 개미군단이 무려 390만에 이른다고 한다.

이 주식시장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사람이 있다.
9.11테러 이후 지난 6개월간 거의 1000%에 가까운 수익률을 올린 사람.
한번 글을 올리면 조회수가 거의 3만건에 이르는 인기칼럼니스트.

MBN의 「고수 대 고수」에서, 그리고 「시골의사가 다시 쓰는 기술적 분석」에서 해박한 지식과 화려한 언변으로 시청자를 탄복케 한 주식투자의 최고수, 시골의사(본명 박경철).

그를 만나 성공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들어보고 성공요인을 고유의 분석틀로 살펴보기로 한다.


[성공스토리]

시골의사의 주식투자는 의대졸업반으로부터 시작된다. 금융계에 종사하던 어머니의 권유로 현대건설에 500만원을 투자한 것이 주식투자의 첫 출발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원금의 90%를 날린 것이다.

오기가 생긴 그는 90년 인턴생활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다. 먼저 동료 5명을 설득하여 MD인베스트(Medical Doctor Invest)라는 주식스터디 그룹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미국 메이요 클리닉에서 연수 중이던 선배에게 주식관련 서적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이때만 해도 국내에는 주식투자에 참고할 만한 좋은 책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보내온 책은 무려 50여권. 이 책을 MD인베스트의 5인방은 함께 윤독하는 방식으로 2년 간에 걸쳐 독파해냈다. 또 일본어도 따로 공부하여 일본에서 나온 주식책도 섭렵했다.

이 정도라면 주식에 대해 상당한 지식과 논리를 갖추었으니 주식투자는 필승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이야 전문가 못지 않은 전문지식을 갖춘 개미도 적지 않지만 90년대 초라면 대부분이 묻지마 투자 수준이니 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이 승리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는 계속하여 실패였다. 투자 할 때마다 돈을 잃었고 94년 주가가 천장을 치던 무렵에는 상투를 잡아 돈이 모두 털리는 경험도 했다.

그는 고민에 빠졌다. 공부를 할 만큼 했는데도 주식투자에 실패하는 요인이 무엇인가?
숙고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주식시장의 언어는 반드시 책에 나오는 논리언어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주식시장에서 적용되는 언어는 기술적 분석의 논리언어 이상의 플러스 알파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주식시장 특유의 언어를 찾기 위해 주식시장의 역사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미국 주식시장 1백년사, 일본주식시장 50년사 등 주식시장의 역사에 관한 수많은 책을 읽으면서 이론과 실제에 괴리가 생기는 원인을 깊이 탐구했다.
또 시장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면벽참선하듯 마냥 주가 그래프만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러자 이제 어느 정도 감이 오기 시작했다. 주식시장의 흐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수익을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고 실제로 서서히 수익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IMF위기가 닥쳤다. 주식의 흐름이 보이기 시작한 그에게는 IMF위기는 주식투자에서 다시없는 황금기였다.

IMF위기의 극복과정에서 정보통신산업이 한국경제의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을 간파한 그는 관련기업들에 적극 투자를 했고 주변에도 빚을 내서라도 주식투자를 하라고 권유했다.

그의 예상대로 주가지수는 가파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98년 한때 280포인트까지 추락했던 종합주가지수는 99년말에는 1000포인트를 넘어섰다.

단순계산을 하면 거의 2년만에 평균적으로는 4배에 이르는 수익률을 낼 수 있었고 시장과 종목의 흐름을 파악한 주식투자고수들에게는 몇천%, 심지어는 몇만%의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전무후무한 시기였다.

시골의사도 이 시기에 엄청난 수익률을 올렸다. 그가 매입했던 주식중의 하나인 데이콤은 99년말에 무려 60만원대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주식시장 주변은 온통 호재일색이고 21세기를 맞이하여 장및빛 전망이 신문지상을 도배하고 있었다.

이때 시골의사는 주식시장이 거의 꼭지에 이르렀다고 판단하고 99년말에 보유주식을 전량 매도하였다.
그는 2000년부터는 주식시장이 하락장으로 전환하여 종합주가지수가 500까지 내려갈 것이라고 예측했다.

실제로 종합주가지수는 그의 예측대로 2000년말에 500까지 주저앉았으며 코스닥은 2000년 연초의 280에서 연말에는 50으로 무려 6분의 1수준으로 하락했다.

이 기간동안 코스닥의 대표주인 새롬기술은 27만원에서 5500원으로 무려 50분의 1토막이 났으며 여타종목들도 10분의 1토막 이하로 하락하는 일이 무수히 일어나 개미들에게는 지옥과 같은 한해였다.

그러나 이 기간에도 시골의사의 수익률은 매우 높았다. 주가지수 500에 이를때까지 지속적으로 선물을 매도하는 전략을 취했기 때문이다.

시골의사가 사이버상에 등장하게 된 것은 바로 이시기. 개미들이 주식시장에서 처절하게 깨지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있던 시기였다.

이 시기는 또한 팍스넷, 씽크풀등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증권커뮤니티 사이트가 출범한 시기이기도 했다.
인터넷을 통해 전문가들로부터 정보와 조언을 듣고 개미들끼리 애환을 달랠 수 있는 공간이 생기게 된 것이다.

시골의사가 글을 통해 사이버상에 나타나자 곧바로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주식에 관한 해박한 지식은 물론 음악, 미술, 종교, 주역등 다방면에 걸친 깊이있는 지식을 바탕으로 조언과 위로를 주는 그의 글에서 많은 사람들은 투자손실로 끙끙 앓는 속마음을 약간이나마 달랠 수 있었다.

그의 필명 시골의사는 그가 실제로 시골에서 병원을 경영하는 의사이기도 해서 생긴 이름이었지만 그는 주식투자자로서만이 아니라 의사로서도 평균이상의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

한동안은 외삼촌이 운영하던 부실투성이의 병원을 인수하여 원장으로 재직하면서 5년만에 전국병원수익율 10위안에 들어가는 실적을 올리기도 했고 그 덕택으로 2001년 병원 매각시에 원래가격의 10배 이상을 받기도 했다.

단순한 전문의가 아니라 병원을 경영하는 경영자로서도 탁월한 수완을 보인 셈이다.

병원을 매각한 후에는 7-8개월간 잠시 휴식기간을 갖기도 했지만 고향인 안동에서 다시 새로운 병원을 개업하여 현재 진료도 하면서 원장일을 맡고 있다.

그러는 한편으로 MBN의 「고수 대 고수」에 출연하여 주식투자자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명강사가 되었으며 최근에는 「시골의사가 다시 쓰는 기술적 분석」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등 1인다역의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에게 올해의 수익률을 물어보았다. 그동안의 인터뷰기사에서 수익률을 잘 밝히지 않아서 별로 기대는 안했는데 그다지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5-10배의 수익률을 올렸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런 수익률도 「초절정고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가 알고 있는 「초절정고수」의 수익률은 월 1000%에 이른다고 한다.

단 이들은 항상 원금을 500만원 정도로 하고 수익에 해당하는 월 4-5천만원은 인출하여 따로 저축한다고 한다.

이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할지. 다른 사람의 이야기라면 그냥 웃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진지한 시골의사의 이야기라 그런지 정말 그런 사람이 있긴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진다.

마지막으로 돈도 벌만큼 벌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환호하는 스타가 되었는데 정치쪽으로 나갈 생각을 해본 적은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시골의사는 웃으면서 친구들이 시장선거에 나가보라고 하지만 자신은 직접 정치를 하기보다는 제대로 된 신념과 정책을 갖고 사회정의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을 전폭적으로 지원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정치인이 우리나라에 있느냐고 물었더니 최근 기대를 걸어 볼만한 사람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주식투자, 의사, 경영자, 등등 하는 일마다 성공해온 그가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일에서도 성공을 거둘 수 있을지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싶다.


[성공요인]

주식투자에서 탁월한 실적을 올리고 인터넷에서, 방송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시골의사의 성공요인은 무엇인가?


<열정>

그는 먼저 무엇보다 열정적인 사람이다. 90년 이후 10여년에 걸쳐 주식투자에 쏟은 열정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간단히 언급했지만 자타가 공인하는 주식고수의 반열에 들어선 지금에도 그는 저녁 8시부터 새벽 3시까지 주식공부를 하는 열성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고 그가 주식투자에만 전념하는 것도 아니다. 병원장으로서 병원경영에도 신경 써야하고 때로는 직접 진료를 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목요일 이후에는 그를 손꼽아 기다리는 투자자들을 위해 안동에서 서울까지 올라와 TV주식강의를 진행한다.

그렇다면 의학공부는 아무래도 소홀히 할 수 밖에 없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의사일에 전념할 경우에 비해서는 못하겠지만 관련분야의 최신흐름을 따라가는 데는 큰 지장이 없다고 한다.

진료에 필요한 임상기술은 이미 다년간의 공부와 경험의 축적을 통해 숙련의 경지에 들어섰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고 새로운 의학정보에 대해서도 학회 모임등을 통해 부지런히 수용, 체득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21세기의 성장산업은 바이오라는 확신하에 친구들과 함께 바이오벤처에도 직접 관여하고 있다고 한다.

그가 하고 있는 일을 죽 나열해보니 이렇다.
병원의사, 병원경영자, 주식투자고수, TV명강사, 바이오벤처기획자

그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해내기 어려운 일을 별 무리없이 진행시키는 그의 모습을 보니 세상이 좀 불공평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로 거침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보면 타고난 능력보다는 일에 대한 열정이 오늘의 그를 있게 한 보다 큰 원동력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의 이러한 열정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보통 주식투자를 하는 사람들은 돈을 버는게 최고의 목표이자 유일한 목표인 경우가 많다.

시골의사도 그럴까? 물론 그도 주식투자를 할 때 그런 동기가 상당부분 작용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원래 부유한 집 출신이었고 주식투자가 아니라도 의사로서 또 병원경영자로서 충분히 돈을 벌 수 있었다.

실제로 그는 외삼촌이 경영하던 병원을 인수하여 5년 만에 10배의 매각수익을 얻을 정도로 탁월한 경영수완을 보이기도 했다.

주식투자는 확률적으로만 보면 투입노력에 비해 산출이익이 매우 낮은 분야이다.
밤새워 공부해도 판판이 깨지는 사람들이 이미 주변에 수두룩하지 않은가?

시골의사도 주식투자를 시작했던 처음에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주식투자에 열정을 쏟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는 오기이다.
패하고 물러설 수는 없다는 오기. 주식투자에 한번 실패했다고 해서 그대로 주저앉기보다는 원인을 분석해서 꼭 승리하고 말겠다는 투지가 그로 하여금 주식공부에 도전하게 만든 한 요인이었다. 이것은 그의 인생의 좌우명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좌우명을 상어반야불퇴전(常於般若不退轉)이라는 불교용어로 표현했다.
언제나 반야의 큰 지혜로부터 물러나지 않게 한다는 뜻인데 그는 이것을 이치를 깨달을 때까지 물러서지 않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 평소의 생활신조로 하고 있다고 한다.

사이버상에서 항상 잔잔하고 부드러운 글을 대해왔던 사람들에게는 약간 의외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열정의 또 하나의 원천은 지식시대의 리더가 되고 싶다는 꿈이다.
그는 대학시절에 앨빈 토플러가 쓴 「제3의 물결」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미래의 세계는 지식을 가진 사람이 주도한다는 주장에 커다란 영향을 받고 지식의 리더가 되겠다는 꿈을 키워왔다고 한다.

물론 전공인 의학을 통해서도 지식의 리더는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의학은 이미 똑똑한 사람이 너무 많이 참여하고 있어서 평범한 의사로서 지내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아도 의학계에서 지식의 리더가 되기는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반면 주식의 분야는 당시만 해도 거의가 묻지마 투자수준이었기 때문에 제대로만 공부하면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지식의 리더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대중이 생각하는 것과 항상 달리 생각하고 소수의 법칙에 따르라는 주식투자의 격언을 그는 자신의 인생에도 적용한 셈이고 결과적으로 보다 효과적으로 성공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인간관계>

인간관계는 어떠한가?
주식투자는 보통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이라고 일컬어진다. 따라서 인간관계는 별로 중시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인간관계가 필요하다면 수익률을 높일 수 있는 정보를 얻는 정도인데 불확실한 정보가 난무하다 보니 인간관계를 경원시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시골의사는 주식투자에서도 인간관계를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그가 인턴시절 에 조직한 MD인베스트는 미국에서 보내온 수십권의 증권관련 영어책을 읽는데 대단히 효과적인 학습모임이었다.

책을 나누어 읽고 토론하면 공부에 효율성도 높아질 뿐만 아니라 혼자 공부할 때 생길 수 있는 독선이나 편향성을 예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또 탄탄한 지식과 따뜻한 감성을 바탕으로 쓰여진 글을 통해 사이버상에서 형성된 인간관계는 그에게 오늘날과 같은 스타의 위치를 부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전문지식>

전문지식은 어떠한가?
그가 주식투자에 필요한 전문지식을 쌓아온 과정에 대해서는 이미 살펴본대로 이지만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주식투자에 필요한 지식을 쌓으면 투자에서 반드시 성공하는가?

주변을 보면 주식에 관해 상당수준의 전문지식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수익률은 별로인 사람이 허다하다. 오로지 극소수 사람만이 주식에서 돈을 벌고있는 것이 현실이다.

주식투자에서 성공과 전문지식과의 사이에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이에 대한 시골의사의 답은 명쾌하다. 주식투자에서 돈을 벌려면 목숨을 걸 정도로 철저히 공부하던지 아니면 아예 무식한 방법으로 투자하던지 둘 중에 하나라는 것이다.

무식한 방법이란 모두가 비관론자가 되었을 때 주식을 사고 모두가 낙관론자가 되었을 때 주식을 파는 방법이다.
어설프게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지식으로 주식시장의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현실을 따라잡을 수 없기 때문에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시골의사의 견해이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주식시장을 완전히 꿰뚫을 수 있을 정도로 철저히 공부해야하는데 그럴 자신이 없으면 아예 무식한 방법으로 투자를 하거나 간접투자에 맡기는 것이 수익률면에서는 훨씬 나을 것이라고 조언한다.


<창의성>

창의성은 어떠한가?
어떤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최고의 일류가 되기 위해서는 창의성이 필수불가결하다.

시골의사의 창의성은 어디에 있는가? 그는 다년간의 엄청난 독서와 투자경험을 통해 「각도이론」이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이론을 개발했다.
이 이론의 탄생과정에 대해서는 기존의 인터뷰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와있다.

외국책을 통해 이동평균선이니 주가수익비율이니 하는 용어들을 처음 접한 그는 눈이 번쩍 뜨이는 느낌을 받았다.

“돈버는 방법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주식판에 무식한 아줌마, 아저씨들밖에 없었을 때라 공부만 하면 얼마든지 돈을 긁어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결과는 어땠을까. 인턴과 레지던트를 거치면서 바쁜 가운데 틈틈이 짬을 내 수십권의 주식책을 들여다봤는데도 계속 잃기만 했다.

결국 94년 주가가 천장을 치던 무렵 또다시 상투를 잡고 남김없이 털리게 된다. 8년여의 거듭된 실패 끝에 내린 뼈아픈 결론은 이론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바둑을 정석으로만 두는 게 아닌 것처럼, 널리 알려진 이론은 더 이상 전략으로서의 가치를 갖지 못했다. 책에서 주워섬긴 이론 몇 가지로 어설프게 덤벼들었으니 실패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절망한 그는 이제 책을 뒤적거리는 대신 면벽수도를 하듯 마냥 주가 그래프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내기를 일년. 그래프 안에서 해답이 튀어나왔다.
“한참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래프가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시장의 생명력이 느껴졌고 사람들이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시골의사는 그동안 배웠던 이론들을 모두 버리고 자신만의 이론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그게 이른바 ‘각도 이론’이다.

창의적 생각은 어느 날 갑자기 우연하게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열정을 다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한 다음에 주어지는 필연적 우연의 산물이라는 것을 여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이렇게 어렵사리 개발한 창의적 이론을 다른 사람들이 그대로 따라하면 어떻게 될까? 그의 대답은 실패쪽이다.

공부를 통해 어느 정도 원리를 이해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투자의 성공을 좌우하는 것은 남의 이론이 아니라 자신만의 이론에 입각하여 오랫동안의 경험이 결부되어 나타나는 감각의 탁월성 여부에 있기 때문이다.


<리더쉽>

마지막으로 리더십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시골의사는 현재 인터넷 상에서 그리고 방송에서 주식투자자들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의 말한마디 한마디에 투자자들은 귀를 기울이고 일희일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런 영향력의 원천은 무엇인가
첫째는 물론 그의 주식에 관한 해박한 지식일 것이다.
수 백권에 이르는 증권관련 서적의 독서를 바탕으로 정연한 논리를 전개하는 그의 강의에 투자자들이 귀를 기울이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탄탄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시골의사 외에도 적지 않다.

그가 인기를 끄는 보다 설득력 있는 이유는 전문지식에 더하여 사심없이 개미를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는 자세와 그것을 호소력 있게 전달하는 그의 탁월한 커뮤니케이션 능력 때문이 아닐까?

씽크풀에 올라있는 그의 글을 읽어보라. 글의 주제는 주식시황부터 시작하여 왜곡된 주식시장에 대한 질타, 당국에의 건의, 음악, 미술, 종교, 주역, 낚시 등 광범위한 범위에 걸쳐있다.

이렇게 내용은 다양해도 그 속에 일관되게 전달되어 오는 것이 있다. 그것은 많은 손실을 잃고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개미들을 위해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조언과 위로를 주고 싶다는 그의 따뜻하고 순수한 마음이다.

그의 이런 마음이 앞으로도 변하지 않고 지속될 수 있다면 그가 젊은 시절부터 간직해왔던 지식시대의 리더라는 꿈은 진정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 꽃봉오리를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 [ 원 없이 번 돈 몽땅 출판에 재투자 ] ****************************



20년 동안 '키출판사' 운영해 온 김기중 사장… 영어회화·수험서·PC 관련 책 등 베스트셀러


‘호시우행(虎視牛行)’. 소걸음에 호랑이 눈. 매사를 신중하고 끈기 있게 하되 판단은 날카롭게 하라는 불가의 가르침이다.

연 매출 20억원이 넘는 키출판사의 김기중(53) 사장. 혼자 시작했던 출판사가 이만큼 자리잡기까지 김사장은 소처럼 뚝심 있게 자기의 길을 걸었다.

성공하기까지 어려운 시간도 많았지만 묵묵히 사업을 계속했고 결국 성공이라는 단 열매를 얻게 된다.


* 설탕가격 예측해 큰돈 벌어

김사장은 한국전쟁으로 아버지를 잃고 유복자로 태어났다. 공부를 잘 했지만 명문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시골 고등학교를 선택했다.
부유하지 못한 환경이었지만 학생회장을 할 만큼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1969년 중앙대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했다. 입대를 했지만 1년 정도 군생활을 한 뒤 ‘아버지가 없는 외아들’이라는 이유로 일찍 제대했다.

“학교에 복학하려면 돈을 벌어야 했지요. 먼저 친척들이나 지인들을 통해 과외를 했습니다.”

그렇게 6개월 정도 벌었지만 많은 돈을 모으기는 힘들겠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71년 서울 군자동 어린이대공원 근처에서 4평짜리 구멍가게를 열었다.
그의 첫 사업이었다. 위치는 좋았지만 먼저 장사를 시작했던 사람들은 줄줄이 실패한 가게였다.

“너름 허름했나봐요. 저 혼자서 차양도 만들고 진열대도 새로 만들었죠.” 부지런히 일했고 근처 건국대 학생들까지 단골이 됐다. 2개월 뒤에는 조금 무리를 해서 냉장고를 들여놨다.
냉장고가 귀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시원한 음료수는 불티나게 팔렸다. 냉장고에 투자한 돈은 몇 달만에 회수했다.

그러나 그가 큰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은 설탕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 이미 경제신문을 정기 구독했다. 지금은 경제신문 구독이 보편화됐지만 그때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경제신문을 읽다 보니 국제 사탕수수값이 오르면 4개월 뒤 설탕 값이 오르는 것을 발견했죠.”

사탕수수 값이 오르자 설탕을 사서 모으기 시작했다. 위험 부담은 있었지만 확실하게 오를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쌓아둘 곳이 없어 친척집 창고까지 빌렸다. 예상은 적중했다.

4개월 뒤 설탕값은 크게 올랐고 김사장도 많은 돈을 벌었다.

“설탕 도매상들도 저를 찾을 정도였죠. 덕분에 당시에 40평짜리 집을 한 채 살 수 있을 만큼 큰돈을 벌었습니다.”

그렇게 2년 동안 돈 버는 데 매달리다 학업을 포기했다.

"처음에는 대학을 다니려고 돈을 벌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현장에서 일하면서도 성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자 대신 평상시 관심이 많았던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 서울 중랑구 면목동에 기원(棋院)을 냈다.
적당하게 일하면서 공부도 할 생각이었다. 가게를 판돈과 그동안 모은 수입금을 투자했다.

생계와 공부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겠다는 처음 생각과는 달리 담배연기 자욱한 기원에서 바둑만 두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기원의 경영도 악화돼 갔다.

“기료만 받아서는 수입을 올릴 수 없는 구조더라고요. 밤이 되면 마작이나 돈내기 바둑을 지원해 주고 돈은 어느 정도 벌 수 있지만 불법행위라는 점 때문에 외면했습니다.”
기원은 손해만 보고 8개월 만에 접었다.

김사장은 돈과 공부 두 가지를 다 노리는 것보다 돈을 버는 일에만 매달리는 편이 빠르겠다는 생각했다.

돈을 벌기로 작정하고 영등포에 고기집을 냈죠. 자본금이 없었지만 설탕사업으로 성공해서 그런지 친척들이 조금씩 도와주시더군요.”

김사장은 음식점에서 주방장을 하던 고향친구와 함께 8개월 동안 식당을 했다. 새벽5∼6시면 시장에 나가 고기를 샀다.
수입은 괜찮은 편이었지만 홀어머니의 반대로 식당을 접고 75년 처음으로 취직을 했다.

우연히 영어학원 강사 구인공고를 보고 지원했던 것. 평상시 영어에 관심이 많았고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아 영어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는 종로의 한 영어학원 강사로 채용됐다.

“돈은 많이 벌지 못했지만 좋아하는 영어와 관련된 일이라 만족스러웠다”고 한다. 자신만의 영어학습 노하우를 전수한 덕택인지 수강생도 많이 늘었다.

자신이 생긴 그는 5개월 만에 서울 이태원에 조그만 사무실을 임대해 책상 몇 개 갖다놓고 독립했다.

“6개월 동안은 수강 인원이 매달 10명을 넘기지 못했죠. 수업료 받아서 사무실 임대료 내기도 빠듯하더군요.”
그럴수록 더욱 열심히 강의를 했고 수강생도 꾸준히 늘어났다. 1년 뒤에는 13개반을 운영할 만큼 수강생이 늘었다.

김사장은 “하루 10시간 이상씩 밥 먹을 새도 없이 강의를 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그는 평소 친분이 있던 주한미군의 소개로 용산 미군기지 내에 있는 외국대학 분교에 등록했다.

이태원에 있던 사무실도 남영동으로 넓혀 이사를 갔다. 간판도 없는 허름한 학원이었지만 거의 최초로 외국인 강사를 초빙했다.
미국인 친구들이 생기자 이들을 학원강사로 끌어들인 것.

요즘 유행하는 외국인 강사를 25년 전 처음 시작했다. 용산에 있는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지 2∼3년 될 무렵 그 동안 차곡차곡 모아왔던 미국 대학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유학정보 사업을 시작했다.
동시에 번역과 학원에 강사를 소개하는 일도 했다.

“한 회사에서 급하게 한국 사설을 영어로 번역해 오라고 하더군요. 급하게 하는 바람에 몇 가지 실수를 했죠. 그런데 그게 장기적으로 일을 맡길 수 있는지 테스트하는 거였대요. 작은 실수로 큰 사업을 놓친 셈이죠.”

그는 “실력이 있으면 기회가 온다”는 말을 다시 한 번 실감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일은 열심히 했지만 좀처럼 재산이 불어나질 않았다. 81년 문화어연(정철카세트)에서 유학안내실장으로 오라는 제의를 받고 다시 취직했다.

“사업을 하다 지쳤나봐요. 영어와 관련된 일이라 욕심도 났구요.”
나중에 교재를 제작하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인 영어 교재 제작일을 맡았다. “지금 출판업을 하게 된 것은 그때의 영향이었죠.”


* 출판 사업 6년 만에 자리 잡아

김사장이 출판업을 시작한 것은 84년의 일이다. “정보가 큰 부가가치를 낼 것으로 내다 본 거죠. 당시만 해도 출판이 거의 유일한 정보제공 수단이었습니다.”

출판등록증은 2백50만원을 주고 샀다. 종로구 관철동 15평짜리 사무실은 역시 친척들의 도움으로 해결했다.

첫 번째 책은 영어회화 서적이었다. 책표지 디자인은 부인이 맡고 나머지는 자신이 담당해 제작비를 최대한 줄였다. 이렇게 1년 동안 2권의 영어책을 냈지만 시장의 반응은 영 신통치 않았다. 2명의 직원은 이미 떠났고 돈은 바닥이 나고 있었다. 정말 벼랑 끝에 서 있는 심정이었다고 한다.

“서점에 들러서 구경을 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한군데 모여 북적북적하더군요. 뭘까 싶어 가 보았더니 공인중개사 수험서를 보고 있습디다.”

12권으로 구성된 공인중계사 수험서가 불티나게 팔리는 것을 목격한 그는 이거다 싶었다.

문제는 자금. 강사료로 근근히 사무실을 운영하던 그에게 돈이 있을 리 만무했다. 유일한 재산인 물려받은 선산을 담보로 1천만원을 빌렸다.

필자는 당시 회계사였던 조카에게 부탁했다. 모든 것을 다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달 만에 나온 책이 「공인중개사 20일 합격」이라는 책이다. 이 책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책을 찍어내기가 무섭게 팔려나갔다.

김사장은 “아파트 몇 채 살 정도”로 큰돈을 벌었다고 한다. 수험서로 재미를 본 그는 이번에는 ‘공인노무사’에 관한 책을 펴냈다.

이번에는 대 실패. 정부에서 각종 자격 시험이 이상 과열현상을 보이자 이를 방지하는 정책을 내놓은 것. 수험서적에 대한 관심은 급속히 줄었고 김사장이 내놓은 책은 몇 권 팔리지 않았다.

공인중개사 수험서로 번 돈도 고스란히 날렸다. 이후 4∼5년간 키출판사는 어려움을 면치 못했다. 변변하게 팔리는 책 한 권 없이 내리 5년을 그렇게 보냈다.

모자란 생활비는 구청이나 사회단체 등을 전전하며 영어강의를 하면서 충당했다. 그런 생활이 오래되다 보니 셋방살이 하는 집 가구에 차압 딱지가 붙을 정도까지 됐다.
그는 그때 붙은 딱지를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실패의 쓰린 기억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쓰라린 절망의 시간이었지만 출판을 포기 할 수 없었다. “이미 발을 빼긴 늦었다는 생각도 들었고 분명 출판 시장이 클 것이라는 자신감도 있었지요.”

키출판사가 회생하는 계기는 컴퓨터라는 새로운 흐름이었다. 컴퓨터가 막 보급되기 시작할 90년 무렵 ‘저는 컴퓨터를 하나도 모르는 데요’라는 책을 냈다.

90년부터 99년까지 교보문고에서 팔린 컴퓨터 관련 서적 가운데 2위를 차지할 만큼 베스트셀러 중에 베스트셀러였다.
이후 키출판사는 안정된 성장을 해 오고 있다. 매년 10권 이상의 책을 내고 있고 판매도 호전돼 적절한 수입을 올리고 있다.

김사장은 90년 과천에 38평짜리 아파트를 장만했다. 마흔이 넘어서야 내집마련을 한 것이다.
다른 재테크 방법을 몰랐던 그는 한눈을 팔지 않고 출판사업에만 전념하고 있다. 번 돈은 새책을 만드는 데 재투자했다.

“재테크요? 출판사업하면서 번 돈으로 건물 샀으면 10층짜리 건물 서너개는 샀을 겁니다.”

김사장은 부동산에는 관심도 없었고 흔한 국민주 한 번 사본 적이 없다.
“주식을 하려면 공부도 많이 해야 하고 시간도 많이 투자해야죠. 그럴 바에야 사업을 열심히 하는 것이 낫죠.”

그의 유일한 재테크 수단은 사업이다. 남는 돈은 은행 PB팀에 맡겼다. 그에게 은행은 돈을 잘 간수해 주는 곳인 셈이다.

"출판산업은 자전거와 같아요. 늘 새로운 책을 내 놓지 않으면 금방 쓰러집니다. 다른 재테크를 생각할 겨를이 없던 거죠."

20년간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지금까지 3백권의 단행본과 4종류의 학습지를 개발했다. 그는 그것을 무엇보다 큰 재산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제는 많이 늙었어요. 참신한 기획이 나오기 힘들다는 생각도 들죠.” 김사장은 2년 후면 은퇴하고 제주도에 가서 살 계획이다.



* 김사장의 10억 만들기 연보

- 1971년 식품점 창업.
- 1976년 영어학원 설립.
- 1981년 정철영어 입사(월급 70여만원).
- 1991년 과천 주공아파트 구입(31평형. 현재가 4억 5천만원).
- 2003년 강남 도곡동 타워팰리스 입주(63평형. 전세 5억원)

- 84년 ∼ 현재 키출판사 경영(매출액 22억 6천만원. 2002년 기준)
- 99년 ∼ 현재 키미디어(학습지판매)겸업.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책사랑 2008-01-30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분을 너무 잘 압니다. 바로 저희 사장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이 분을 존경합니다.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문 분입니다. 사장님께선 자신을 '사업가'라고 말씀하시지만, 저희 직원들 눈엔 학자보다 더 학자다운 '학자'이십니다. 잘 팔리는 책을 만들려고 하시기보단 유익하고 학습 효과 높은 '좋은 책'만을 고집하시기 때문입니다. 좋은 책, '명품'은 언젠가는 선택받는다는 믿음으로 25년간을 출판해 오신 분입니다. 사실 가끔은 사장님이 답답해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냥 쉽게 잘 팔릴 수 있는 책을 만들면 안 되나'는 생각을 하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희 사장님은 이에 꿈쩍도 안 하십니다. 이 점이 못마땅한 부분이지만 동시에 존경하는 부분입니다. 가볍고 편한 것을 좇는 오늘날의 세태에 귀감이 되시는 분. 이 글 참 감명 깊게 잘 읽었습니다! 저희 사장님께도 이 글을 보여드려야겠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