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사 팔리면 나도 불안, 살아남기 위해 인수했다." - 2년 뒤 흑자 전환, 3년 뒤 뉴욕증시 재상장, 10년 뒤 스포츠브랜드 빅3 진입 목표


"아이고, 이제 연봉 얘기는 그만합시다." 탤런트 중 아이돌(idol) 스타에서 성인 연기자로 거듭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첫인상'이 워낙 강하게 각인됐기 때문이다. 상당수의 아이돌 스타들은 그 첫 이미지의 단맛에 물들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다. 결국 시간의 흐름 속에 아이돌 스타는 잊혀져 간다.

윤윤수 스포츠브랜드인터내셔널(SBI) 아시아 회장은 그런 아이돌 스타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는 듯 연봉에 관한 질문부터 가로막고 나섰다.

잘 알려져 있는 대로 그는 한때 공식적으로 국내에서 최고 연봉을 받는 CEO 중 하나였다.
감봉은 다반사였고 정리해고, 부도도 흔했던 1997년 겨울. 그는 '내가 연봉 18억원을 받는 이유'라는 책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해운공사 직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다국적 스포츠 브랜드 기업인 휠라의 한국 지사장에까지 오른 그의 성공담은 당시 직장인들에게 일종의 대리만족과 희망을 주기에 충분했다.

때문에 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대개 연봉에 맞춰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월급쟁이 사장의 신화로 남을 만큼 충분한 성취였다.
하지만 '연봉 18억'은 그에게 훈장인 동시에 족쇄였다.

지난 6월11일, 윤회장은 미국계 투자회사인 서버러스, 휠라 아메리카의 CEO인 존 엡스타인과 함께 이탈리아의 휠라 본사를 인수함으로써 연봉의 족쇄에서 벗어났다.

연봉을 많이 받는 다국적 회사의 한국 경영자에서 세계적인 스포츠 브랜드의 글로벌 CEO로 변신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그의 레퍼토리도 연봉에서 경영으로 바뀌었다.

윤회장이 휠라와 인연을 맺은 건 84년. 윤회장은 당시 휠라 신발에 관한 라이선스를 갖고 있던 미국의 한 사업자가 고전하는 것을 알고 그를 설득해 한국에서 신발을 제조해 공급하겠다고 제안한다.

그해 8월 처음으로 수출을 시작한 후 연말까지 불과 4개월 만에 8백만 달러어치를 수출했다. 제조업체였던 국제상사는 물론 휠라와 라이센스 소유권자, 당시 자금을 지원했던 쌍용 파이낸스도 대만족이었다.

윤회장이 소싱한 신발이 미국에서 큰 인기를 얻으면서 의류 위주로 사업을 해왔던 휠라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업인 옷보다 신발이 더 큰 비즈니스로 성장한 것.

물론 본사에서도 그 주인공이 진윤(Jene Yoon, 윤회장의 영문 이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휠라 본사가 윤회장과 합작으로 휠라코리아를 세운 것도, 또 당시 연봉 1백50만 달러도 회사 측에서 제안한 것이다.


< 신발로 전 세계 훨라 살려 >

91년 휠라코리아 최고경영자 자리에 오른 후 윤회장의 진가는 더욱 빛났다. 92년 매출 1백50억원, 순이익 4억6천만원에 불과했던 휠라코리아는 지난해 매출 2천74억원, 순이익 2백65억원을 기록했다.
쾌속성장은 윤회장의 기발한 결심이 기폭제가 됐다.

"당시 휠라코리아는 전 세계 시장에 신발을 공급하고 있었어요. 그 커미션만 연간 1천만 달러에 달했는데 제가 당시 휠라 회장에게 '연말에 줄 커미션을 연초에 미리 지급해 달라'고 요청했죠."

이렇게 미리 받은 돈으로 윤회장은 공격적인 마케팅을 했고 그 결과 휠라코리아는 전 세계 휠라 중 가장 큰 이익을 내는 회사로 발돋움했다.
덕분에 휠라그룹 내에서 윤회장의 입지도 탄탄해져 갔다.

지난해 기준 휠라의 전 세계 매출액은 약 11억 달러 정도. 이중 휠라코리아의 매출액은 약 1억7천만 달러로 15%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전 세계에 50개의 법인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비율이다.

윤회장의 연봉도 한때 24억여원까지 치솟았다. 엔리코 후레쉬 휠라 전 회장은 "휠라의 탄생은 이탈리아지만 성장은 한국"이라는 말로 그에 대한 신뢰와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비단 휠라 내부에서 뿐만이 아니다.

우리금융지주회사의 윤병철 회장도 "월스트리트에서 진윤이 그렇게 유명한지 몰랐다."고 할 정도다.

생산공장이 없는 휠라의 경쟁력은 말 그대로 CEO의 역량에 의해 좌우된다. 일종의 마케팅 회사이기 때문에 브랜드 관리 자체가 가장 큰 경쟁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회장의 성공이 휠라 전체의 성공은 아니었다. 80년대까지 승승장구하던 휠라는 90년대에 들어 어려움을 겪는다.

휠라의 지주회사인 이탈리아의 HDP사는 패션 하우스를 목표로 세계적인 의류 브랜드를 잇따라 인수하다 어려움에 빠졌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발렌티노나 조르지오 아르마니 옷을 생산하는 GFT 등 HDP사는 10여개의 브랜드를 인수했다.

사업이 확장되면서 집중력이 분산되고 또 지나치게 제품 연구 개발에 투자하면서 비용이 많이 늘어났다.

"휠라는 90년부터 96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호황을 누리면서 본사 경영진이 몇 가지 실수를 범했어요. 품질 우선주의를 지나치게 강조해 엄청난 개발비를 쏟아부었고, 스타 마케팅을 위해 농구스타 그랜트 휠에게 8년 동안 8천만 달러를 지급하고, 미국에 6천4백만 달러를 들여 물류 기지를 지었어요. 한마디로 도를 넘는 투자에 결국 발목을 잡힌 셈이죠."

여기에 유럽시장 부진으로 인한 적자와 은행 부채가 쌓여 결국 매각을 추진하게 됐다.
2001년부터 매물로 등장한 휠라는 여러 캐피털회사들이 인수를 시도했다. 1년간 인수협상을 했던 컨티넨털 파트너스는 물론 한국의 모 그룹도 인수를 시도했다. 하지만 현 경영진들의 협조가 없어서 실패했다.


<과도한 투자로 매각될 운명>

"본사가 팔리면 지사장인 저도 불안해지잖아요. 그래서 2002년부터 역으로 내가 휠라를 인수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가졌었죠."

원점을 맴돌던 휠라 본사 매각 작업은 미국계 펀드 서버러스가 인수 작업에 뛰어들면서 활기를 찾았다. 서버러스는 휠라USA의 존 엡스틴 사장과 윤회장이 함께 끌어들인 미국계 투자전문 펀드다.

'변화가 일어날 때 주도적으로 변화하지 않으면 밀려난다.'는 평소 생각대로 오히려 변화에 중심에 선 것이다.

더 이상 매각 작업을 미룰 수 없었던 HDP도 적극적으로 나왔고 곧바로 협상이 시작됐다.
6개월 이상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가 계속되다 지난해 11월 말 3억5천1백만 달러(약 4천3백억원)로 인수 대금에 대한 의견이 좁혀졌다.

가장 중요한 걸림돌인 인수 대금에 대한 합의가 이뤄진 만큼 협상은 절반이상 성공한 셈.

지난 3월7일 서버러스가 새로 설립한 지주회사 SBI(Sports Brand International)와 HDP가 마침내 인수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인수 금액은 당초 합의대로 3억5천1백만 달러로 최종 결정됐다. 윤회장은 이번 인수에서 지분의 5% 정도를 할당받았다. 상장될 경우 지분 가치가 1천억원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다. 연봉도 2백만 달러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SBI는 세계 시장을 미국·유럽·아시아 등 3개 지역으로 나눠 별도의 회사를 설립, 휠라를 운영하기로 했다.

글로벌 회장은 휠라USA 사장을 지냈던존 엡스틴이 맡고 윤회장은 아시아 지사 회장을 맡기로 했다.
유럽 사장에는 서버러스 측이 내세운 인물인 밥 갤빈이 임명됐고, 휠라USA는 부사장이었던 톰 오리오단이 사장으로 임명됐다.

휠라는 현재 나이키(7백억 달러)·아디다스(5백억 달러)·리복(3백억 달러)에 이어 세계 스포츠 브랜드의 4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브랜드 인지도 면에서는 세계 4대 브랜드라고 할만하지만 매출 규모로는 '빅3'에 크게 뒤떨어져 있다. 때문에 전략도 다르다.

'빅3'처럼 제품을 만들고 소비자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 원하는 것을 만들어서 소비자들에게 제공하는 전략을 쓰고 있다.

대규모 광고나 물량 공세보다는 소비자의 욕구에 빨리 반응해 선택을 받는다는 전략이다.


<글로벌 경영 능력 시험대>

하지만 세계 시장에서 휠라의 상황이 그리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전 세계 50개국에 있는 현지법인 중 한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 지역이 적자에 허덕이고 있다.

미국 시장에서 휠라는 최근 3년 동안 매년 1억 달러씩의 적자를 기록했다. 2년 전부터 강도높은 구조조정에 들어가 지난해 적자 폭을 1천2백만 달러 수준으로 줄이고 올 연말 흑자전환을 기대하고 있지만 본 궤도에 오를지 여부는 연말까지 가봐야 알 수 있다.

유럽시장의 사정도 스페인과 독일에서 약간의 이익이 발생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열악하기는 마찬가지다.
연간 3억5천∼4억 달러 정도의 매출을 올리고 있는 유럽시장에서 발생되는 적자는 연간 3천만 달러 수준이다. 유럽시장 역시 강도높은 구조조정을 거치고 이탈리아와 영국이 부진을 털어 내면 2004년 말께 흑자로 전환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지만 쉽지 않다.

다행스럽게도 윤회장이 맡은 SBI 아시아 시장의 경우 국내를 비롯, 일본 등지에서 매출이 늘고 있어 휠라 본사를 지탱할 수 있는 버팀목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윤회장은 "앞으로 2년 정도면 전 세계적으로 흑자전환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현재 이탈리아에서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고 영국의 경우 시장에 정통한 사람으로 사장을 교체했다.

또 천문학적 금액이 들어가는 농구스타와의 계약이 내년이면 끝난다. 미국 시장도 점차 살아나고 있어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2년 뒤 흑자전환이 되고 그룹이 정상궤도에 들어서면 뉴욕 증시에 재상장한다는 계획이다.

그리고 윤회장의 희망사항이지만 10년 뒤면 빅3에 들어가는 스포츠 브랜드로 키우겠다는 생각이다.

윤회장은 이를 위해 SBI 아시아 회장으로 일본·홍콩·중국·필리핀·말레이시아 등 15개국 17개 지사를 총괄하게 된다.

휠라코리아의 업무는 조선묵 사장에게 주로 맡기고 홍콩과 아시아 각국을 오가며 아시아 시장을 개척하게 된다.
물론 휠라의 글로벌 경영도 파트너의 한사람으로서 책임을 진다. 명실공히 세계를 상대로 비즈니스를 하는 CEO가 됐다.

연봉으로 2000년대 샐러리맨 신화를 만들었던 윤윤수 회장. 이제 그의 앞에는 ‘글로벌 경영’이라는 시험대가 놓여 있다.

이 시험대를 통과할 경우 사람들은 더 이상 그의 연봉이 아니라 그의 경영 능력에 대해 얘기할 것이다. 아이돌 스타를 뛰어넘어 연기파 배우가 될 수 있을지 모두들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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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병철 회장에 대한 증언 ] ********************************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역사가 일천한 우라나라에서 대표적인 기업가를 꼽으라면 삼성그룹 창업자 湖巖(호암) 李秉喆 회장을 거명 하지 않을 수 없다.

호암은 1986년에 펴낸 그의 자서전 「湖巖自傳」(호암자전)에서 기업가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기업가는 기업을 구상하여 그것을 실현시 키고 합리적으로 운영하면서, 국가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를 파악하여, 새로운 기업을 단계적으로 일으킬 때 더없는 창조의 기쁨을 가지는 것 같다.
그 과정에서의 흥분 과 긴장과 보람, 그리고 가끔 겪는 좌절감은 기업을 해본 사람 아니고서는 알 수 없을 것이다.
황무지에 공장이 들어서고 수많은 종업원들 이 활기에 넘쳐 일에 몰두한다. 쏟아져 나오는 제품의 산더미가 화차와 트럭에 만재 되어 실려 나간다.
기업가에게는 이러한 창조와 혁신감에 생동하는 과정을 바라볼 때 야말로, 살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게 하는 더없이 소중한 순간일 것이다>"


이제 호암이라는 기업가의 인물탐구로 들어가 보자.

그는 성격이 까탈스러우면서도 귀족적이다. 키 1백67㎝에 몸무게 60㎏, 신발 사이즈 는 2백45mm로 발이 작았다.
단단하고 야무 진 외모, 한 올의 머리칼도 흐트러지지 않도록 단정한 빗질, 꽉 다문 입술, 날카로우 면서도 온화한 시선….

한국경제인협회(全經聯의 전신) 창업 과정 부터 李秉喆 회장과 깊은 대화를 나누었던 金立三(김입삼) 全經聯 고문은 『李회장은 매사에 제일주의를 고집해 남에게 뒤지는 것을 생리적으로 싫어했던 사람』이라고 평했다.

申勳澈(신훈철) 星友會(성우회·삼성그룹 퇴직 임원 동우회) 회장은 『先代회장(삼성 출신 관계자들은 李秉喆 회장을 이렇게 표현했다)께서는 말을 대단히 아낀 분』이라 고 회고했다.

호암의 장남 李孟熙(이맹희) 씨는 자서전 「묻어둔 이야기」에서 부친의 성격을 이렇게 설명한다.

"좀체 화를 내는 법도 없었고 큰 소리와 욕설은 물론 보고 받을 때도 겉으로 좋다 싫다는 표현을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눈빛과 분위기로 찬성과 반대를 구분할 수밖에 없었다.
평생 동안 아버지가 큰 소리를 내면서 웃는 모습을 본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궁금하다."

호암을 가까이서 보좌했던 인사들의 의견과 世評을 종합하면 非情하다, 차갑다, 매섭 다, 냉혹하다, 사정없다, 예리하다, 날카롭다, 까다롭다 등으로 귀결된다.

이런 면모는 기업가들이 갖추어야 할 기본 속성, 즉 성격이 모나지 않고 둥글어야 하며 사교성 ·친교성이 뛰어나야 한다는 고정관념의 彼岸(피안)에 그가 서 있음이 발견된다.

언론인으로서 호암을 가까이서 지켜봤던 崔禹錫(최우석) 삼성경제연구소장은 기업가 李秉喆을 『사색을 즐기던 분, 그리고 음식 남기는 것을 싫어했던 분』으로 기억했다.

식사도 우동 한 그릇과 초밥 몇 점, 뚝배기 음식을 즐겼다고 한다.


호암의 막내딸 李明熙(이명희) 여사(신세계백화점 회장)의 증언.

"아버지는 집에서도 혼자 무엇을 깊이 생각하고 계실 때가 자주 있어요. 그런 시간 에 제가 들어가서 바깥일을 얘기해 드리면 참으로 신기하게 여겨요."(상아출판사의 「재벌들」이란 책에서 인용)

호암은 또 독서를 즐긴 경영자로서, 평생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 申勳澈 성우회장 의 증언에 의하면 호암은 일본에서 올 때마 다 신간서적을 대형 가방 한 가득씩 구해 와 직접 읽거나 임원들에게 나눠주고 독후 감을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반도체 사업 참여 과정에서는 일본 현지의 업계, 기술자, 설비 관계자, 연구소 등을 돌며 얻은 산더미 같은 자료를 항공편으로 空輸(공수)해다 일일이 붉은 줄을 그어가며 읽은 후 해당 부서 기술자에게 주고 숙 지하도록 했다.

후에 독서할 내용이 많아지자 비서실 내에 서적이나 외국 원서를 번역 요약하는 팀을 운영하기도 했다.

호암은 골프, 서예, 國樂감상, 골동품 수집 및 감상 등을 즐겼다. 취미생활도 귀족적 이라는 世評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全經聯에서 행한 「나의 창업이념과 경영철학」 이란 강연(1980년 7월3일)에서 자신의 성격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한가한 것을 가장 싫어하고 못 견디는 성미입니다. TV를 보면서도 신문이나 잡지를 읽고 이야기를 합니다. TV는 세 대를 동시에 켜놓고 보는데, 國樂과 권투중계를 즐겨 봅니다. 國樂은 오래된 취미이고, 권투는 투지에 불타 치고 받는 것이 볼만하 며, 한쪽이 KO승을 거둘 때 몹시 통쾌합니다."

崔禹錫 삼성경제연구소장은 호암의 기질을 대담한 면과 사소한 면이 변증법적으로 통합된 성격이라고 소개했다.

권력과 맞서 의사를 관철시키거나, 공들여 키운 수천억짜리 기업을 내주고도 눈 하나 까딱 않는 대담성이 있는 반면, 사업 추진과정에서 세세 한 부분까지 빈틈없이 챙기는 스타일이란 것이다.

서울 태평로 2가 삼성 본관 옆에 동방생명(현 삼성생명)과 중앙일보 건물을 지을 때 호암은 외벽 대리석 색상을 직접 지정해 주었고, 대리석 칸과 칸 사이 간격을 몇 m m로 할 것인가까지 일일이 지시했다고 관계자들은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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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멋있는 성공자들의 명 장면 !! ] *******************************



* <1> 카이사르(로마의 군인, 정치인)

유명한 카이사르 연구가 존 H. 콜린스(Jhon H. Collins)는 카이사르를 알면 그에게서 매력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하기전 아르바이트와 독서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낼때 나와 항상 함께 했던 책은 "로마인 이야기"였다.

로마인 이야기는 일년에 한권씩 출판 되는 '시오노나나미'의 야심작이다.
역사책 이라기보다 인물을 중심으로 사건을 전개하는 역사 이야기에 가깝다.

이 책을 읽다보면 검은색 활자가 만화책 보다 훨씬 더 흥미로울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로마인 이야기중 가장 두꺼운 4,5권은 모두 카이사르에 대한 이야기다.
두권을 다 읽고 나서야 카이사르가 왜 그토록 비중있게 다뤄졌는지 알수 있었다.

카이사르는 자기 이익 때문에 양심과 자존심을 팔고 굽신거리는 짓을 지극히 싫어했다. 그렇다고 거만하거나 상대를 업신 여기며 무시하는 행동도 하지 않았다.

전쟁에서 잡힌 포로를 불러 놓고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어 본다. 그래서 그 포로가 고국으로 돌아 가고 싶어하면 먹을 것을 주고 아무말 없이 돌려 보내 주곤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카이사르 군대의 병사가 되길 원했다. 카이사르 부대의 병사가 되는 것은 그시대 남자들의 최대 자부심이였다.

한번은 카이사르와 10년을 넘게 목숨걸고 싸웠던 최정예 병사들이 파업을 하였다.
로마의 군대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만이 정예부대원이 될수 있는 명예로운 직업이였다.

적군의 포로까지 존중하고 평등한 기회를 준 카이사르에게 서운함을 느낀 로마병사들이 전쟁을 못하겠다며 고향으로 돌려 보내줄것을 요구했다.

성난 병사들이 어떤 짓을 할지 모른다며 참모들은 말렸지만 카이사르는 직접 로마 병사들이 소란을 일이키는 곳으로 걸어갔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자신들의 영웅 카이사르가 혼자서 걸어오자 모두들 봉급인상과 처우 개선을 기대하며 카이사르의 말에 귀를 귀울였다.

카이사르는 간단한 한마디를 한다.

" 로마시민들이여! 그대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동안 그대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바입니다. 그대들의 요구를 모두 받아 들이겠습니다."

그러자 모두들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카이사르가 연설 할때의 첫마디는 '형제들이여!' 였다

그러나 그들이 로마 시민이 되는 순간 더이상 카이사르의 병사가 아니다.
잠시 정적이 흐른후 모두들 울부짖으며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다.
다시 카이사르의 병사가 되게 해달라고 애원하듯 매달렸다.

카이사르는 적은 물론 자신을 죽이려는 정치적인 정적에게도 관대하게 대했고 그들과 똑같이 헐뜯고 비판하는 옹졸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런 비판과 모략이 있을때마다 "내가 나의 신념에 충실하며 살듯 상대도 그럴 권리가 있다"며 오히려 주변 사람을 설득하고 달랬다.

그것이 가능했던것은 카이사르의 합리적인 이성과 인격, 그리고 자신에 대한 당당함과 자부심 때문이였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그당시 최고의 변호사 키케로가 인정하는 당대 최고의 지성인 이였다.



* <2> 정주영(기업가)

60년대 말. 당시 한국의 최대 선박건조능력은 10만3백톤, 최대 건조실적은 미국에서 수주한 1만7천톤짜리가 전부였다.

이런 상황에서 정주영은 수십만톤 규모의 조선소를 건립한다는 야심찬 계획에 착수했다.

정주영은 71년 조선소 사업계획서와 울산 미포만의 백사장 사진 1장만을 들고 영국 런던으로 차관을 얻기 위해 떠났다.

문제는 돈이었다. 배 한 척 만든 경험이 없는 현대에 엄청만 금액의 차관을 쉽게 제공해 줄 은행을 찾기가 쉽지 않았으나 결국 런던의 바클레이스 은행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5백원짜리 지페에는 거북선이 그려져 있었다. 정주영은 그자리에서 5백원짜리 지페를 보여주며 우리 선조들은 세계최초로 철갑선을 만든 우수한 민족임을 강조하며 설득했던 것이다.

또 영국 정부기관인 수출보증국의 승인을 얻기 위해 조선소도 없이 선박을 수주하는 모험을 감행해서 그리스 선주를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결국 그는 조선소 착공과 동시에 26만톤급 유조선 2척을 건조하는 세계 조선사상 유례가 없는 신화를 이룩했다.
배를 만들수 있는 조선소도 없이 배를 수출하는 계약까지 따낸 것이다.



* <3> 김규환(기술 명장)

가공 시 1℃ 변할 때 쇠가 얼마나 변하는지 아는 사람은 김규환씨밖에 없다.

김규환씨는 이것을 알려고 국내 모든 자료실을 찾아봤지만 아무런 자료도 없었다.

그래서 공장 바닥에 모포깔고 2년 6개월을 연구했다. 재질, 모형, 종류, 기종별로 X-bar값을 구해 1℃ 변할 때 얼마 변하는지 온도치수가공조견표를 만들었다.

기술공유를 위해 이를 산업인력관리공단의 ‘기술시대’란 책에 기고했다. 그러나 실리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후 3명의 공무원이 찾아왔다. 처음에 회사에서는 큰일이 일어난 줄 알고 난리가 났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제출한 자료가 기계가공의 대혁명 자료인 걸 알고 논문집에 실을 경우 일본에서 알게 될까 봐, 노동부장관이 직접 모셔오라고 했다. 이것이 발간되면 일본에서 가지고 갈 지 모르는 엄청난 것이였다.

2년6개월동안 집에는 두번만 갔다. 휴가는 김규환씨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명절날 잠시 집에가서 차례를 지내고 곧바로 공장으로 돌아왔다.
이런한 집념과 무서운 노력이 그를 세계적인 기술명장으로 만든 것이다.



* <4> 함신익(지휘가)

그 명성에 비해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은 지휘자가 있다.
40대 젊은 지휘자 함신익 씨는 미 예일대 지휘 교수.예일대심포니 상임지휘자.

텍사스 에벌린필하모닉 상임지휘자로 미국에서 명성이 더 화려하다.
2002년 8월에는 텍사스의 에벌린시가 `함신익의 날` 을 선포해 그의 음악을 기리기도 했다

학창시절 이스트만 음대 대학원에 들어간 함신익은 그 곳에서 이른바 `이스트만의 함신익 전설` 을 만들어 냈다.

교과과정 중에 실제로 지휘봉을 잡고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이 1주일에 20분 정도 밖에 안되자 스스로 개인 오케스트라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음악감독인 제임스 레바인이 줄리아드음대에 다닐 때 자신과 똑같은 고민 때문에 개인 오케스트라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그를 본떴다.

함신익은 이스트만 학생들 중에서 연주 실력이 괜찮은 사람들을 골라 그들을 주말에 자기 집으로 초청했다.

"나는 한국에서 온 함신익이다. 언젠가는 세계적인 지휘자가 될 것이다. 우리 집에 오면 한국식 뷔페가 기다리고 있다. 음식을 들면서 오케스트라 이야기를 하자. "

함신익이 그들에게 한 초청의 변이었다. 그리고 그는 교회성가대 시절 만나 결혼한 아내와 함께 금요일 밤을 꼬박 새우며 만두.잡채.볶음밥 따위를 만들어 그들을 기다렸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한국 음식의 맛과 함신익의 열정에 매료된 그들은 곧 15인조 오케스트라를 구성했고 이 오케스트라는 이후 4년 뒤에는 90인조로 성장했다.

나중에는 서로 들어오려는 사람들 때문에 오디션을 봐야 했다.
그의 정열에 감동한 학교측은 당시 일반 연주단체와의 1년 임대료가 50만달러에 달하는 홀을 무료로 제공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고개를 갸우뚱하던 학교도 함신익에게 월터 헤이건 상이라는 지휘자상을 수여했다.

건전한 자부심, 강인한 신념과 확신, 그리고 진취적인 행동력!
이런 것들이 삶의 미덕 인지는 잘 모르지만 불가능을 가능케하고 목표를 성취하게 하고 삶을 멋있게 가꾸는데 있어서는 꼭 필요한 요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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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 벌써 절망합니까? - 정문술 미래산업 사장의 성공스토리 ] ******************



<정문술 사장의 성공스토리>

정문술 사장이 사업을 시작한 것은 43세였다. 그는 원광대학교 종교철학과를 졸업하고 군복무를 한 후 제대와 동시에 중앙정보부로 특채되어 18년간을 근무한 후 강제퇴직을 당하였다.

그는 퇴직금으로 풍전기공이라는 금형제조기업을 인수하여 첫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사업은 사기에 속아 인수한 것으로 부채부담과 납품대기업의 횡포로 인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첫 사업에 실패한 후 그는 새로운 창업아이템을 찾게 된다. 공무원 시절에 공식, 비공식으로 알고 지냈던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밥과 술을 내는 대가로 정보를 수집하고 친구들 사업을 도와주면서 경험을 쌓고 증권객장에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증권의 흐름과 원리에 대해서도 배우는 노력을 하였다.

이러한 고민과 연구의 기간이 약 2년. 결론은 반도체 제조장비 분야였다. 반도체 제조장비라면 중소기업으로도 할 수 있고 외국기술에 의존할 필요가 없는 몇가지 제조장비들이 전량 수입되고 있었기 때문에 도전해볼 만한 분야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회사의 이름은 「미래산업」, 총 자본금 8천만원에 사장까지 포함해서 전 직원이 여섯명 밖에 안되는 조그마한 회사로 1983년 2월에 출범하였다.

미래산업이 최초로 도전한 제품은 「리드프레임 매거진」이라는 기구였다. 이것은 반도체 조립공정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리드프레임」이라는 반도체소자에 단자를 부착하기 위해 사용되는 복잡한 형상의 금속상자로, 고도의 정밀도를 요구하는 고부가가치상품이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반도체산업이 급속도로 확대되고 있었기 때문에 시장성도 충분하다고 판단되었다.

그러나 막상 시작해보니 경쟁력있는 제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정밀도와 내구력의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몇달 동안이나 전력을 다해 온갖 시도를 다해 보았지만 성과는 별로 없었다. 모두가 그 일에만 매달리다 보니 기존의 납품거래선도 하나둘씩 떨어져 나갔고 엔지니어들도 지쳐버려 결국 제품개발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까지 몰리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정문술사장의 입에서는 짜증섞인 푸념이 흘러나왔다.
"에이, 빌어먹을, 조립하지 않고 통째로 꽝꽝 찍어버렸으면 좋겠구먼."

이때 공고출신 엔지니어인 백정규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말했다. “정말 그러면 되겠는데요! 금형으로 찍어버리는 겁니다!”

이것은 미래산업이 가진 금형기술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때까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기막힌 발상의 전환이었다.

이렇게 하여 매우 정확하고 내구성도 높은 「리드프레임 매거진」이 탄생했다. 금형으로 한번에 찍어내는 이음새 없는 매거진이었다.

제품이 생산되자 반도체업체들은 탄성을 보냈고 3개월도 채 되지 않아 시장을 모두 장악했다. 순식간에 매출액이 억단위로 뛰어올랐고, 미래산업은 일약 반도체조립장치업체의 반열에 올랐다.

리드프레임 매거진의 성공으로 회사가 본궤도에 오르자 정사장은 또다시 새로운 제품의 개발에 착수했다.

이번에는 최첨단의 반도체제조장비인 「무인웨이퍼검사장비」의 개발이었다. 반도체의 기본소자인 웨이퍼의 검사를 현미경과 육안으로부터 기계로 대체하는 것으로, 개발만 되면 사업성은 확실하지만 당시의 미래산업으로서는 엄청난 기술도약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일단 개발목표가 정해지자 엔지니어들은 야전침대까지 갖다 놓고 일하는 등 제품개발에 총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또 정사장도 엔지니어들이 걱정없이 일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이 되도록 최선을 기울였다.

그러나 막대한 금액을 차입까지 해서 개발비용으로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3년째가 되도록 원하는 성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의 미래산업이 보유하고 있는 기술수준 자체가 이 장비를 개발하는데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사전인식이 너무 부족했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였다.

정사장이 제품개발에 쏟아부은 돈은 4년동안 무려 18억원, 개발에 성공하지 못한 그는 파산의 위기에 직면하여 가족동반자살까지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 순간 제품개발에 실패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축적한 기술을 살려 한단계 낮은 새로운 제품을 만들면 된다는 생각이 스치면서 마음을 돌리게 된다.

새로이 도전하는 품목은 「핸들러」였다. 당시 코엑스에서 열린 “세미콘코리아”라는 반도체전시회에 다녀온 직원들이 이구동성으로 추천한 품목이었다.

그러나 개발초기에는 소프트웨어나 컨트롤러 같은 핵심기술은 물론 설계도면도 없어 핸들러의 기계구조를 파악하는 것조차 어려운 상태였다.

이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김두철이라고 하는 평소 실적도 신통치 않고 엉뚱한 소리만 하던 공고출신의 한 조수가 불쑥 설계도면을 가지고 나타났던 것이다.

그는 기계내부를 들여다보지 않고도 타고난 눈썰미에다 뛰어난 상상력과 구성력으로 머리 속에서 도면을 그려보고 나름대로 수정까지 하는 특이한 능력을 갖고 있는 “걸어다니는 사진기”였다.

미래산업은 이 설계도를 기본으로 하고 여기저기서 입수한 핸들러 관련자료들을 참고로 해서 천신만고끝에 시제품을 완성했다.

이 시제품은 테스트 결과 당시 사용되고 있었던 일본제품보다 훨씬 양호한 성과를 보여 납품기업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그 자리에서 주문까지 받을 수 있었다.

주문을 확보한 미래산업은 일본기업들이 생산한 핸들러의 개조나 복제를 통한 모방학습을 마친 뒤, 비메모리 DIP타입 테스트 핸들러 개발에 착수했다.

이를 위해 정사장은 당시 홍릉에 있던 산업연구원과 KAIST를 다니면서 자료조사를 시작했다. 특히 미국과 독일, 일본의 데이터베이스들을 검색하면서 에어베어링, 정밀서보모터, 정밀스태핑모터, 고정밀베어링 등등에 관한 논문과 제품목록 등을 조사하는 한편 기술관련문헌정보와 카탈로그, 기술잡지, 특허정보 등도 검토했다. 핸들러를 개발하는 석달동안 그는 일주일에 3일정도는 밤낮을 그곳에서 보냈는데, 산업연구원들의 연구원들도 50이 넘은 사람의 열정에 감탄하여 성심껏 도와주었다.

당시 산업연구원은 중소기업의 기술지원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는데, 그 덕택에 선진국의 핸들러 제품들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시장을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정사장은 이렇게 하여 모은 다양한 자료들을 엔지니어들이 즉석에서 참조할 수 있도록 정리하는 일을 담당했다. 엔지니어들이 핸들러를 개발하는 동안 그는 외곽지원업무를 수행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고생끝에 미래산업은 마침내 최초의 고유모델인 MR- 3000이라는 「트랜지스터 테스트 핸들러」의 개발에 성공하였고 이를 계기로 미래산업은 비약적 성장을 하게 된다.

정문술 사장이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는지는 98년 11월호 「신동아」에 실린 미래산업의 기사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연간 매출액 615억2300만 원(97년 기준)에 우리 나라 상장회사 중 유일하게 3년연속 당기 순이익 30% 이상을 기록.

97년도 한국능률협회가 선정한 최우량 10대 기업 중 1위. 혹시 돈이 필요하면 다른 은행보다 저리(低利)로 얼마든지 빌려 주겠다고 지점장들이 달려와 각축을 벌이는 회사.

총 320명의 직원 중 연구원만 150명인 회사. 직원 보너스를 본봉 기준이 아니라 총수령액 기준으로 800%를 지급하고, 직원들 직계가족의 치료비까지 부담해줄 뿐 아니라 아침밥값 500원을 빼고는 끼니를 공짜로 제공하는 회사.

연구원들에게 필요한 경비를 지체없이 먼저 갖다 쓰고 나중에 결재받도록 하는 경영주. 45세에 창업해 15년만에 2000억 원이 넘는 재산을 가진 사람.



* 정문술 사장의 성공요인 분석

1. 열정

* 43세의 늦은 나이로 사업을 시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뜨거운 열정으로 목표실현

- 핸들러를 개발하는 석달동안 일주일에 3일정도 밤낮을 홍릉에 있던 산업연구원과 KAIST에서 보내면서 관련자료를 조사하고 수집

- 기술개발과정에서 18억원이라는 엄청난 부채를 지면서 자살까지 생각하는 극한상황에 몰렸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기술개발의 목표를 실현


* 열정의 원천은 일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

- 군대 가는 것을 죽으러 가는 것처럼 생각하던 전후(戰後) 혼란기에 각개전투훈련나 총검술을 신기하고 흥미롭게 생각할 정도의 호기심의 소유자

- 5·16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행정요원을 뽑을 때 모두가 기피하였지만 틀림없이 뭔가 재미있는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용감하게 지원

- 반도체장비업이라는 미지의 분야에 도전하게 된 것도 이러한 호기심의 연장선상에서 이해가능


2. 인간관계

* 정문술 사장의 성공배경에는 핵심개발인력이나 사원들과의 끈끈한 유대관계가 중요한 역할

- 공고출신 엔지니어 백정규나 김두철은 기술개발의 고비고비마다 중요한 아이디어를 제공하여 오늘의 미래산업이 있게 한 주역

- 1994년에 미래산업이 부천에서 천안으로 이동시 인력유출이 우려되었지만 직원 137명 중 단 한 사람만이 나갈 정도로 직원들의 회사신뢰도가 높았음


* 끈끈한 인간관계의 원천은 일과 사람에 대한 열정과 성실성

(회고담) :
"나는 사업경험은 없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다 했다. 현장직원들이 부품을 사다 달라면 즉시 청계천으로 달려가서 필요한 부품을 사다 주었다.

거래처에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찾아가서 몇번이고 도와달라고 애걸을 했다. 그러다 보니 별 치욕스런 꼴을 다 겪었지만 더 큰 자존심을 위해 참고 또 참았다.

청소도 직접 하고 은행도 내가 다녔다. 나는 직원들에게‘심부름꾼이라고 생각하고 무슨 일이든 시켜 달라’고 공공연히 부탁했다.

허수아비 사장이라고 무시하던 예전 직원들도 차츰 나를 인정해 주기 시작했다. 뒤늦게 내 사람으로 입사한 백정규도 자연스럽게 현장책임자로 자리를 잡았다. 그런 과정을 거쳐 풍전기공은 점차‘내 공장’이 되어 갔다"


3. 전문지식

사업에 필요한 전문지식은 대부분 대학 이후 경험과 독학을 통해 습득

- 대학시절 전공은 종교철학으로 사업에 별로 도움이 안됨

- 군복무와 18년 정보부 생활에서 체득한 기획·분석·예측·감사능력이 사업에 중요한 자산으로 됨

- 반도체장비업에 필요한 지식은 기술조사 및 개발과정에서 습득


* 전문지식의 원천은 열정과 호기심, 인간관계

-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즐거움으로 훈련소에서 다른 사병들이 밤에 담넘어가 막걸리 마실 때 내무반에서 책을 읽고 행정학교로 배속되었을 때는 기획관리·문서관리등 미육군의 행정제도를 습득

- 핸들러를 개발하기 위해 산업연구원과 KAIST에서 관련자료를 조사하고 수집할 때는 정사장의 열정에 감동한 연구원들이 자료조사에 적극 협력


* 높은 학력이 고도의 전문지식과 동의어는 아님

- 오늘의 미래산업을 있게 한 일등공신인 부사장, 매거진사업본부장, 설계팀장, 전자개발부장이 모두 공고 출신


4. 창의성

정사장은 제품개발이나 사업전개과정에서 고비고비마다 핵심 아이디어를 제공

- 리드프레임 매거진 개발시에는 “조립하지 않고 통째로 꽝꽝 찍어버렸으면 좋겠구먼.”이라는 푸념을 내뱉어 금형으로 한번에 찍어내는 이음새 없는 매거진 개발에 결정적 단서를 제공

- 4년동안 18억원의 개발비용을 쏟아부었던 「무인웨이퍼검사장비」의 개발이 실패했을 때는 자살일보직전에서 그동안 축적한 기술보다 한단계 낮은 제품을 만들면 된다는 생각으로 도전한 핸들러로 현재의 미래산업의 기반을 구축


* 창의성의 원천은 호기심과 열정

- 정 사장은 모든 창의력은 호기심에서 출발한다고 역설

- 회고담 : "제품 개발과정에서 기술적인 벽에 맞닥뜨린 적이 있었어요. 젊은 엔지니어가 해결을 못하고 끙끙거리고 있는 겁니다. 가서 문제가 뭔지 일단 파악을 하고 그 친구에게 「넌 해낼 수 있을 거다」라는 자신감을 심어줬지요. 그 때부터 실무자인 그와 사장인 제가 산고(産苦)를 함께 앓는 겁니다. 그런데 보세요. 물론 그 젊은 친구도 절박하겠지만 사장인 저보다야 더 절박하겠습니까. 그 친구는 잘못 돼봤자 직장 그만두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주문을 받아놨는데 개발 못해내면 망하는 겁니다. 몇날 며칠을 긴장상태에서 지내면서 집중하다보니 해결책이 떠오르더라구요"


5. 리더십

* 열정, 인간관계, 전문지식, 창의성의 결합을 통해 리더십 발휘

- 인내와 성실, 근면이라는 산업화 시대의 열정과 함께 집중과 도전정신이라는 디지털 시대의 열정도 겸비

- 믿고 맡기는 권한 위임, 직원만족을 위한 세심한 배려, 친인척의 경영개입이나 청탁등을 철저히 배제한 원칙중시의 인간관계 구축을 통해 직원들의 신뢰를 확보

- 열정과 인간관계를 통해 전문가 못지 않은 지식을 쌓아 아이템선정이나 기술개발방향제시등에서 탁월성을 발휘

- 뜨거운 열정을 갖고 기술개발이라는 목표실현에 매진하는 과정에서 고비고비마다 중요한 아이디어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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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구원으로부터 사업가로의 성공적인 변신 - 부동산114 이상영 사장 ] **************



주택이나 오피스, 토지등을 매매하거나 임대차를 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들어가봤을 사이트가 있다.

부동산114(www.r114.co.kr). 사이트내에 3,500여개의 사이버 중개업소가 포진하여 실시간으로 부동산 정보를 업데이트하고 있고 수요자들의 관심과 신뢰도가 높아 하루 페이지뷰가 230만에 이르는 한국최대의 부동산 정보회사이다.

이 회사를 이끌어가는 이상영 사장을 만나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성공스토리를 들어보고 성공요인을 살펴보기로 한다.


<성공스토리>

부동산114가 출범한 것은 1998년 11월. 부동산관련 오프라인 간행물인 《부동산뱅크》를 만드는 (주) 정보성에서 함께 일했던 이상영 현 사장, 박종덕 현 전무이사, 김희선 현 상무이사 등 핵심인물들이 그동안의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인터넷을 통해 부동산정보를 체계적으로 생산하여 데이터베이스화하고 이를 기초로 수익사업을 하겠다는 목적으로 회사를 만든 것이 그 시작이었다.

인터넷에서의 부동산정보의 생산에는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간다. 소비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인쇄매체보다 훨씬 광범하게 정보를 생산해야 할 뿐만 아니라 정보생산의 주기도 실시간(real time)에 가까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필요한 비용을 어디에서 마련할 것인가? 이 점에서 부동산114는 비교적 운이 좋았다.
회사가 설립된 1999년은 벤처붐이 불던 시기로 미래에셋에서 10억원이라는 거액의 투자자금을 유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자금을 바탕으로 부동산114는 부동산정보의 수집과 축적에 필요한 인프라를 전국적인 범위에서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부동산에 관한 정보를 축적하고 수요자에 제공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수익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무료정보에 익숙한 우리의 인터넷풍토하에서는 비용을 들여 생산한 양질의 정보에 대해서도 소비자들이 비용을 지불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업을 시작한 99년도의 매출은 겨우 3,500만원. 주로 PC통신을 통한 정보제공에 대한 이용료였다.

부동산114의 성장은 제공되는 부동산정보에 대한 직접적 대가로부터가 아니라 오히려 오프라인의 중개업소들이 자신들의 홍보를 위해 사이버중개업소의 형태로 부동산114에 회원으로 가입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수익모델은 미국의 홈스토어닷컴(www.homestore.com)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온 것인데, 이 사이트는 미국내 10만개의 중개업소가 가입해 있고 100만건 이상의 물건이 등록되어 미국전역에서 부동산의 분양, 거래, 대출, 이사, 인테리어, 리모델링등을 사이버상에서 매개하면서 수익을 올리고 있는 사이트이다.

부동산114도 이 모델을 도입하여 회원으로 가입한 중개업소의 보유매물을 부동산114가 보유한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통해 홍보해주고 회비형태로 대가를 받는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가입한 중개업소가 2,000년에 300개, 2,001년에 2,000개, 2002년 현재 3,500개에 이를 정도로 폭발적인 성장을 보였다.

부동산114의 입장에서 보면 사이버중개업소는 실시간으로 전국에 걸친 부동산정보를 올려주는 은인일뿐만 아니라 회원가입비를 통해 매출과 수익을 보장해주는 황금알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매출도 급신장을 보여 2001년에는 전년대비 300% 이상의 성장을 보인 25억원에 이르렀으며 이익도 5억원의 흑자를 내는 등 견실한 경영기반을 다져나갈 수 있게 되었다.

수익구조를 보면 현재 3500여개에 이르는 사이버중개업소의 수입이 전체의 60%에 이르고 있고, 다음으로는 사이트에서 생산되는 콘텐츠판매 및 광고로 30%, 나머지 10%는 컨설팅이나 교육사업에서 나오고 있다.

부동산114의 이용자 현황을 사이트를 클릭하는 페이지뷰의 수로 보면 2001년말에 하루 100만을 넘어섰고 2002년 2월 중순 현재 180만에 이를 정도로 급속한 신장세를 보이고 있다.

또 주요 웹사이트 순위평가기관이 집계한 주요사이트 접속순위에서도 부동산114는 여타 경쟁업체보다 훨씬 뛰어난 실적을 보이고 있다(랭키닷컴의 조사에 따르면 2002년 3월 8일 현재 부동산114는 부동산정보분야 1위, 분야점유율 24.0%로 2위 스피드뱅크의 13.3%, 3위 부동산뱅크 네오넷의 7.3%과 현격한 격차를 보이고 있다)

부동산114는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향후 부동산 전문 Portal Site화를 지향하면서 아파트, 오피스, 주택, 상가, 토지, 경매 등 하부전문 사이트를 운영할 계획이며, 사이버중개업소는 1만∼1만 5천개 정도로까지 확대하고 부동산 컨설팅서비스를 강화하면서 부동산 자산관리 솔루션을 구축한다는 중장기적 전략을 마련해 놓고 있다.


<성공요인>

1998년에 출범한 부동산114가 3년여만에 업계의 정상으로 우뚝 서게 된 것은 시대의 흐름을 재빨리 파악하여 실행에 옮긴 창업주체들의 혜안과 행동력에 힘입은 바 크다.

여기서는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이상영 사장을 통해 그 성공요인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상영 사장을 처음 만나본 사람이라면 그에게서 사장으로서의 카리스마나 터프함보다는 학자와 같은 지성과 차분함의 느낌을 더 받게 될 것이다.

실제로 그는 상당기간동안 연구원 생활을 했다. 89년부터 92년에 걸쳐 한국 경제정책의 싱크탱크인 한국개발연구원에서 연구원을 했으며 94년부터 97년까지는 기아경제연구소에서, 그리고 97년부터 99년까지는 건설산업연구원에서 연구업무를 해왔다.
또 98년에는 서울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지적 엘리트이기도 하다.

그의 일상생활도 보통의 직장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6시에 기상하여 7시 30분에 회사에 도착하면서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저녁에는 업무로 약간 늦어져 9시나 10시쯤 퇴근하는 우리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보통사람들과 거의 비슷한 일상을 살고 있다.

또 한달에 한번만 근무하면 되는 토요일에는 건강관리를 겸하여 집 근처의 일산호수공원을 혼자서 몇바퀴 달린다고 한다.

이런 모습만을 본다면 그가 사업출범초기 사업을 본궤도에 올리기 위해 8개월여동안 노심초사하면서 단 하루도 쉬는 날 없이 일에 파묻혀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만큼이나마 여유를 갖게 된 것은 이러한 출범초기의 열정과 노력이 시대의 흐름에 부합되는 아이디어와 결합되어 결실을 맺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사업하는데 따르는 스트레스가 없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사업이 갖는 근본적 속성상 때로는 불안한 느낌이 들 때도 있지만 자유롭게 자신이 의사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실천에 옮겨볼 수 있다는 점에서 직장에 있을 때보다 훨씬 스트레스가 적다고 한다.

직장에서 가장 괴로운 때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할 때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가 속해 있는 조직이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것과 별로 관계가 없는 과제를 부여하거나 상사나 동료등에 의해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일을 거부당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일에 대한 열정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다행히 이상영 사장은 부동산114를 통해 평소 자신의 관심사항을 실행에 옮겨볼 수 있는 기회와 자유를 얻었다.

그가 특히 관심을 갖는 사항은 제대로 된 부동산정보의 생산과 가공이다. 이 일에 관한 한 그의 열정은 그 누구보다도 뜨겁다.

그는 「나는 왜 벤처기업을 선택했나」라는 글에서 민간에서 정보생산이 가능한 형태는 벤처기업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 사업에 뛰어들었다고 쓰고 있다.

부동산 정보에 대한 이러한 열정이 오늘날의 부동산114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인간관계는 어떠한가?
이상영 사장은 사업에서 인간관계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종합예술인 사업에서 혼자서 모든 것을 꾸려 갈 수는 없고 역할을 달리하는 많은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여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어야만 사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상영 사장의 경우에도 연구원으로부터 사업가로 변신하기까지는 현재 상무이사로 재직하고 있는 김희선씨와 전무이사로 재직하고 있는 박종덕씨와의 끈끈한 인간관계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들은 과거 《부동산뱅크》시절부터 함께 일을 해온 사람들로 김희선 상무는 부동산업계와 실무에 정통하고 부동산정보의 상업적 접근에 풍부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고, 박종덕 전무는 네트웍 사업본부장으로 중개업소를 네트웍으로 묶는 일에 일가견을 갖고 있었다.

또 이상영 사장 자신은 경제학박사로서 부동산에 관한 이론적 접근에 탁월한 전문성을 갖고 있어 부동산114를 단순한 정보중개가 아닌 지식기업으로 성장시키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세사람의 만남은 이론, 실무, 영업의 3박자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이상영 사장은 이것을 삼국지의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에 비유하기도 했다.

전문지식은 어떠한가? 위에서 사이버중개업소가 부동산114의 주요 수익원의 하나라는 사실을 언급했다.
그러나 사실 잘 생각해보면 이 수익모델은 부동산114만이 독점할 수 있는 안정적 수익모델은 아니다.

어느 정도의 초기자본만 있다면 이와 유사한 서비스는 얼마든지 공급할 수 있고 그런 면에서 부동산정보제공분야는 진입장벽이 낮고 경쟁이 치열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동산114가 업계에서 부동의 1위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부동산114가 부동산정보 이외에 다른 경쟁기업과 차별화되는 플러스 알파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플러스 알파를 제공하고 있는가?

첫째 국내유일의 전국 주간단위 아파트 시세조사를 제공하고 아파트 거래량, 오피스빌딩등의 다양한 조사정보도 제공한다.

둘째 매물정보등의 단순한 부동산정보만이 아니라 아파트 투자지표, 오피스빌딩 인덱스, 부동산 가격전망모델등 다양한 부동산 투자지표를 제공한다.

셋째 국내최고의 언론 및 금융기관과 전략적 제휴를 맺고 있으며 최고수준의 자문단을 운영하고 있다.

넷째 부동산관련 컨설팅, 사업타당성평가, 부동산 투자수익률등을 제공하는 알투코리아를 자회사로 갖고 있다.

이상의 것들은 한마디로 말하면 부동산114가 단순한 부동산관련 정보만을 제공하는 회사가 아니라 체계적인 지식까지 제공하는 지식기업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기까지 부동산 전문가로서의 이상영 사장이 커다란 역할을 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창의성은 어떠한가?
이상영사장은 자신이 특별히 창의적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그보다는 오히려 분야를 달리하는 사람들간의 협력을 통해 처음에 생각했던 이상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고 말한다.

앞서 말한 바처럼 이상영 사장의 이론, 김희선 상무의 실무지식, 박종덕 전무의 영업능력, 그리고 부동산114의 모든 임직원의 합심노력이 현재와 같은 성과를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부동산114의 성과는 특정개인의 창의성의 결과라기보다는 다수의 사람들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서로 협력하여 노력한 결과 나타난 집단적 창의성, 혹은 네트워크 창의성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리더십에 대해 살펴보자. 이제 50여명의 결코 작지 않은 벤처기업으로 성장한 부동산114를 꾸려 가는데 있어 이상영 사장은 어떤 식으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먼저 임직원 모두가 주인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부동산114 주식의 70%를 직원들에게 부여하여 전사원을 주주로 하였고 경영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한다는 운영원칙을 확립했다.

이와 함께 조직의 목표달성을 위해 직원들간에 상하관계가 아닌 수평적 협력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팀제를 도입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목표관리와 연봉제등을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식의 시대를 선도해나가는 이상영 사장의 지적 리더십일 것이다. 지식만이 비교우위로 될 수 있는 시대에서 탄탄한 이론과 실무경험으로 무장한 이상영 사장의 존재는 부동산114의 직원들에게 가장 든든한 방향타와 버팀목의 역할을 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회사연혁 및 현황]

1998년 11월 부동산종합정보 서비스회사 모두넷(부동산114) 창립
1999년 04월 인터넷 부동산 정보사이트 부동산114 오픈 (http://www.r114.co.kr)
1999년 04월 한국건설산업연구원과 아파트/사무실 가격지수 개발을 위한 업무 협약 체결
1999년 06월 주식회사 모두넷 (부동산114) 법인 전환
1999년 09월 한국경제신문 인터넷 부동산정보 Site 서비스 오픈
1999년 11월 YAHOO 코리아 부동산 종합정보 서비스 오픈
1999년 12월 한국감정평가협회 업무협력기관 지정
1999년 12월 미래에셋벤처캐피탈 투자유치
2000년 02월 한국생산성본부 부동산교육사업 업무협약체결
2000년 02월 중소기업청 벤처기업 지정
2000년 02월 한국기업평가와 부동산 정보제공 업무협약 체결
2000년 09월 한국토지신탁 부동산금융 업무협약
2001년 10월 부동산114 주식회사 (상호변경)

한국능률협회, 2000년 부동산정보 소비자만족도 1위 사이트 선정
제1회 한경 Web Award 부동산 부문 최우수상 수상
한국능률협회 2001년 대한민국 부동산 웹사이트 1위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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