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바이러스 터미네이터 안철수 !! ] ******************************



< 영혼이 있는 기업을 만들어가는 안철수 소장 인터뷰 >


1. 어떤 계기로 일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제가 의사입장에서 의대교수 사표를 내고 중소기업 사장되기로 결심했는데 그 당시 갖았던 생각이 경영에 대해서 잘 모른 상태에서 결정을 내렸고 제가 좋아하는 일은 프로그램이나 기술쪽에 관심이 있어서 시작하게 되었다.


2. 시련이 있었을 때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주신분이 있으시다면?

없습니다.
저는 굉장한 독서광이다. 눈에 띄는 활자가 있으면 모두 읽는다.
초등학교 때 학교 가는 30분간에도 책을 읽고 걸었다. 왠만한 도서관에 읽는 책들은 대부분 읽었다.
책을 많이 보니까 어느 책에서 도움을 받았다 보다는 복합적으로 작용을 하게 되었다.

독일의 [마틴발저]가 말한 ‘우리는 우리가 읽은 것으로부터 만들어진다.’ 말처럼 조직생활에 대한 경험도 없었고 경영을 모른 상태에서 간접경험을 통해 얻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되었고, 또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 경영학 공부를 하게 되면서 경영학 책을 읽게 되었다.

원칙을 세우고 현실과 타협하지 않도록 많은 도움을 받았다. 저를 도와주신 분들은 수 많은 책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일을 하시면서 열의와 열정을 넘쳤을 때…

사실은 열정보다 더 큰 게 책임감이다. 저는 책임감 하나로 드라이브되는 사람이다.
열정이 없더라도 책임감이 있으면 열심히 일하게 된다.
저의 가장 큰 신조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한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일하고 있다.

평생 학교만 26년 다녔다. 집중력이 남 다른 것 같다.
어떤 일을 9시에서 시작했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11시인 경우가 많았다. 두 세시간은 거의 시간 흐름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집중하고 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일어나 보니 밖은 천둥, 번개가 치고 교실에는 아무도 없었던 경험도 있었다. 그만큼 집중력이 나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다.


4.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특별한 방법은?

“나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이용하지 않는다.”
이것에서 모든 인간관계의 모든 신뢰가 파생된다고 생각됩니다.
이미지메이킹에 관해서는 따로 신경 쓰지 않는다.


5. 예전의 연구소의 목표와 지금의 목표는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개인의 목표는 많이 바뀌었다.
경영을 하려고 회사를 만든 것은 아니었고, 그 당시 경영자가 있었으면 저는 기술만 했을 텐데 당시의 어려운 상황에서 그렇게 되지 않았다. 지금은 경영에 대해 많이 공부하였고 전념하고 있다.

기업의 목표는 변한 것이 없다. 다만 [영혼이 있는 기업]을 추구하는 것이 목표다.
기업이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나름대로 이 물음에 대한 정리를 해야 경영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기업은 구성원들이 월급, 삶을 실현하기 위한 단순한 도구일 수 있다. 그렇지만 한 개인이 할 수 없는 의미 있는 일을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같이 만들어 나가는 것이 기업이 가진 진정한 의미라 생각되었다.
그래서 기업은 자본주의의 꽃이라 말하지 않는가?

내가 단순히 생활을 위한 기업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위해서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곳이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기업에 있어서의 목표가 수익이다”라는 말을 많이 듣는데 나는 이것에 의문이 들었다.
기업이 돈이 목적이 되다 보면 많은 부작용이 일어나게 된다. 벤처버블, sk사건이 그 좋은 예일 것이다.

기업에 있어서 수익은 목적이 될 수 없고 어떤 결과일 뿐이다. 핵심역량을 갈고 닦으면 수익은 결과로 따라온다고 생각한다.

기업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루하루 닥친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모든 구성원이 가치관을 공유해야 한다.

공통된 가치관을 가지고 일을 해 나간다면 공통된 가치관은 기업에 있어서 ‘영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공통된 가치관을 공유하는 기업이라면 창업자가 바뀌더라도 기업은 건전한 가치관과 사회에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커다란 구성원으로써 의미를 가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의 기업적 목표는 영혼이 있는 기업을 이루고 싶습니다.


6. 효율적인 시간관리의 방법.

자투리 시간이 매우 중요한 것 같다. 엘리베이터 탈 때도 기다릴 때마다 잡지나 책을 읽습니다. 한 달에 몇 권을 볼 수 있다.
대학원 시절에 식사시간동안의 5~6분 동안에도 짬 시간에도 활용했다.


7. 조직원과 팀원의 협력은 어떻게 이끌어 내십니까?

회사 설립이전에 조직생활의 경험은 없었다.
“내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서 남을 이용하지 않는다. “ 라는 원칙이 리더십을 발휘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마음을 책에서 많이 들었다.
예를 들면 역사소설, SF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이 상황에서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행동을 하게 되었을까” 생각하게 되었고 이런 과정은 조직 생활 속에서도 300명이라는 구성원을 이해하고 이해되지 않을 경우라도 포용하려는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조직의 이익과 개인의 이익이 상충되는 경우에 개인의 이익을 버릴 줄 알아야 하는 사람이 리더가 해야 된다고 생각됩니다.


8. 이것 하나만큼은 반드시 한다는 습관이 있으십니까?

모든 일을 할 때 기초를 다진다. 그래서 책을 많이 보고 준비를 많이 한다.

처음에는 무척 느리게 보일 지라도 나중에 크게 뛸 수 있다. 개구리가 뛰기 전에 뒷다리를 움츠려야 하듯이 기초를 다지면 멀리 뛸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9. 살아오시면서 자신에게 기억되는 좋은 경험이나 표어가 있으십니까?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인식과 나는 잘 될 수 있다는 믿음.

[스톡데일 패러독스] 베트남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 있었던 미국의 최고위 장교가 베트남전쟁 후 기자와 인터뷰에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살아 남았던 사람은 낙관적인 사람보다 현실주의적인 사람이 살아 남았다.라고 말했습니다.
현실에서 안 맞는 얘기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제가 생각하기엔 이렇습니다.

낙관론자는 ‘이번 부활절이면 풀려날 수 있을거야’라는 믿음을 가지고 생활하지만 부활절에 풀려나지 않으면 낙담과 회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주의자는 그런 경우가 일어난다는 설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끝까지 살아 남았다는 얘기입니다.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인식과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잘될 수 있다는 믿음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99년도에 어려운 상황에서도 외국기업체(맥아피)에서 1,000만불을 주고 회사를 양도하라는 제의에도 바로 거절하게 되었다.

그 당시 보험회사에서 보험가입요청에 가입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사항이었지만 나는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10. 의사결정을 하실 때 판단하는 기준이 있으십니까?

돈이라는 것은 결과일 뿐이라는 원칙이 확실하기 때문에 돈, 명예 등 결과에 해당하는 것들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단순해집니다.

결과에 해당되는 것은 결정적인 판단요소가 아니라 생각됩니다.

99년도의 인수요구에 바로 거절하게 된 것도 회사를 팔아서 나에게 남는 것은 돈밖에 없다라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진정한 원칙을 원칙이 있게 하는 힘은 잘될 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어려울 때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원칙을 지킨 경우가 연구소 역사상 많이 있어왔고 이것이 회사의 자산이라고 생각됩니다.


11. 건강관리에 신경을 쓰시고 있으신 것이 있다면…

건강관리를 못해서 몇 년에 한 번씩 심하게 앓는다. (몸살정도가 아니고 과로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가족관계 ? 지금은 가족구성원이 자기발전을 위해 노력중이다. (참고로 사모님은 법률공부를 위해 미국유학중)


11. 칭찬은 많이 하시는 편이십니까?
칭찬은 많이 하는 편은 아니고, 가끔 한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칭찬이 아닌 의도적이고 어색한 칭찬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칭찬이 영혼을 가진 사람에게 효과가 있고 와 닿을 것 같다.

부모 자식간에도 이해하는 정도가 다 틀리지 않는가? 땨라서 제 기대수준을 전부 타인에 적용시키지는 않는다.

실제로 나는 88년 ~ 96년 새벽 3시 ~6시 까지 컴퓨터 기술에 할애했다.
95년 ~ 97년 경영학 공부하면서 이틀에 한번 밖에 못 잤다.
직원이 내 기대의 50%면 잘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현은 가급적 하지 않는다.

만약, 기대에 너무 못 미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기회를 주고 많이 기다리는 스타일이다. 2~3년 동안 적성에 맞는 일이 있는지 배려하고 잘 할 수 있도록 주의 깊게 지켜본다.


12. 바쁘신 와중에도 즐기시는 취미가 있으시다면?

술, 담배, 골프는 하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 소설책이 여유 날 때 읽는다.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되어 영어로 된 소설을 읽으면서 영어에 대한 공부도 한다.


13. 청소년에게 권해주고 싶은 말씀이나 책이 있으십니까?

역사는 되풀이 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나를 이해하는 것이다.”
책은 읽는 사람의 이해의 폭만큼 받아들여진다.고 생각됩니다.

한가지 책에 대한 느낌도 10년 전과 지금과 틀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그릇만큼 받아들여진다고 생각됩니다.

어떤 사람의 그릇의 크기와 이해의 폭을 알고 싶다면, 같이 읽은 책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면 될 것 같습니다.

책이 구체적인 방법론을 알려주지는 않을 것이고 모든 사람은 받아들여지는 상황과 폭이 다르기 때문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14.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가 있다면?

매 순간이다. 어는 순간에 30대 중반이었다.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가는 것을 인지를 하지 못할 정도로 일에 몰두해 있었다.
행복한 것보다 의미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STAR DUST(별먼지)란 낱말을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우주와 지구는 먼지로 이워졌고 우리 몸을 구성하는 것은 별 먼지로 만들어진 소중한 존재들이고 결국에는 별 먼지로 돌아갈 것이다.

개인적으로 종교는 없지만, 내세가 있다고 그걸 바라고 사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고 내세가 없다고 해서 함부로 사는 것도 바람직 하지 않다.

서로 좋은 생각을 가지고 우주의 절대적 법칙에 따라 대가를 바라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저는 책임감과 성실로 살아가다 보니 행복보다는 의미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가끔 사람들이 저를 청교도적이다라고 생각합니다.

부부, 회사사람등 대인관계에서 행복이라는 관점보다 돈에 대한 가치관, 육아에 관한 가치관등 가치관 공유가 인간관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오래 같이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공통된 가치관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15. 직원을 채용할 때 판단하시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Skill보다 Talent가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능력보다도 가치관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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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스타벅스커피 코리아 정진구 대표이사 ] *********************



< 커피 향내에 묻어나는 인생철학, 더불어 사는 삶 >

스타벅스 사상 최단시간 흑자 달성과 모범적인 점포 운영으로 미국 본사에서 대상(president award)을 수상했던 정진구 사장.

그의 인생은 체인스토어와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븐일레븐'에서 '배스킨라빈스', 다시 '파파이스'와 '스타벅스'로 이어지는 시간들은 그가 몸담았던 기업들의 기록을 깨는 과정이기도 했다.

에스프레소처럼 깊고 짙은 향내 속에 묻어나는 이 노신사의 인생 철학은 '기업 리더'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

새벽 6시 20분, 경기도 분당에 있는 집을 나선 한 노신사는 스타벅스에 들러 8온스짜리 드립 커피 한 잔을 산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종업원들과 담소를 나누기도 하고, 매장을 둘러보기도 하는 그 노신사는 에스프레소 커피 전문점 하면 떠오르는 '스타벅스'를 한국에 들여온 주인공이다.

(주)스타벅스커피 코리아의 정진구 사장(56)은 항상 그 시간이면 서울 어딘가의 스타벅스 매장을 둘러본다.

“우리 아들, 딸들 얼굴을 봐야 하루가 시작되죠. 여의도처럼 매장이 두 개 있는 곳엔 꼭 두 곳 다 들러야 해요. 서운해하거든요. 최고경영자가 매장을 찾는다면 신경 써야 할 것도 많고, 부담이 될텐데…. 우리 파트너들 참 착하죠?”

공부 때문에 자녀들과 떨어져 혼자 지내는 정 사장에게 매장 직원들은 아들, 딸이고 사업 파트너다.

손님이 많아 매장이 바쁘면 직접 앞치마를 두르고 설거지며 커피 만드는 일을 돕기도 하는 품새가 꽤나 익숙해 보인다.


< 도미 유학생, 세븐일레븐의 명물이 되다. >

“스타벅스는 사장도 돈 내고 커피 사먹어야 돼요”라며 소박하게 웃는 그가 체인 사업에 발을 디딘 것은 1974년 미국 유학 시절이다.

그 무렵 한국은 보릿고개로 서민들이 먹고살기도 힘들었는데, 그때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왜 미국은 잘 먹고 잘 살까?'라는 의문으로 꽉 차 있었다.

농사꾼이 꿈이었던 그가 미국행을 결심한 것은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서였다.
"미국이란 나라가 어떻게 생겼고, 얼마나 잘 사는지를 보고 와서 식량난을 해결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제게 한국의 식량난을 해결한다는 건 사명감과도 같았어요."

원대한 꿈과 사명감을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정작 그를 기다린 것은 오일 쇼크로 인한 불경기였다.
공부는 물론, 취직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막막한 상황에서 신문 한쪽 귀퉁이에 실린 건설회사의 '공정관리 직원' 채용 공고는 그의 인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일 단위 생산성 계산 직원 채용에서 그는 서툰 영어에도 불구하고 수십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이 건설회사의 직원이 되었다. 현지인들과는 달리 계산기도 없이 치른 수학 시험에서 만점을 맞은 것이다.

하지만 입사한 회사는 몇 년 후 부도를 맞았고, 그는 세븐일레븐 점원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무덤(grave night shift)이라고까지 불리는 밤 시간대(밤 11시∼아침 7시)에 일을 하면서 그는 편의점 사업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한국의 구멍가게 문화에 익숙했던 그에게 미국의 편의점 문화는 충격이었다.

편의점 유통구조가 궁금해졌고, 정식으로 세븐일레븐에 입사를 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운'이 따라 줘 진급도 빨랐고, 점포 운영 능력도 인정받았다.

그런 그에게 세븐일레븐에서 메릴랜드주의 고속도로 변에 위치한 5000평 규모의 점포를 운영해달라는 부탁이 들어왔다.
주택가나 상가, 비즈니스 빌딩가에만 들어섰던 세븐일레븐이 야심만만하게 시작한 이 대형 직영점에서 기대만큼의 매출을 올리지 못한 것이다.

그는 고심 끝에 무선통신 라디오로 밤샘 방송을 했다.
"지금 커피를 만들기 위해서 버튼을 눌렀다. 50초 후에 오면 가장 신선한 커피를 마실 수 있다."
“30분 전에 핫도그를 그릴에 넣었는데 지금 오면 딱 먹기 좋게 익었다”
등의 방송 멘트는 확실한 효과를 발휘했다.

18개의 바퀴가 달린 트럭을 모는 운전수들은 이 방송을 듣고 속속 허허벌판에 마련된 편의점으로 모여들었다.

그는 외로움과 싸우며 밤새 트럭을 모는 운전수에게 다정다감한 서비스를 하기 위해 여직원을 고용하고 그들과 함께 뜬눈으로 매장을 지켰다.

그의 열성 때문이었을까. 메릴랜드주의 세븐일레븐 매장은 그가 운영한 지 6개월만에 한 달 평균 2만5000잔 이상의 커피를 팔아치웠다.

덩치만 크고 실속은 없었던 이 점포는, 미국 전체 세븐일레븐은 물론 커피를 파는 모든 매장 가운데 가장 많은 커피를 파는 기록을 세웠다. 커피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그는 슈퍼바이저로서 점포의 효율적 경영에 대해 고민하고, 본사에 무수한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세븐일레븐에서 만 9년을 근무하면서 그가 만들어낸 점포 운영 매뉴얼만도 강도 예방법(robber prevention program)을 포함해 일일이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세븐일레븐은 회사 운영 매뉴얼 강화를 위해 매년 7000여 개 점포의 매니저들을 대상으로 회사 운영 아이디어 콘테스트를 열고 있다.
이 중 우수 아이디어를 뽑아 본사 회장 부부와 함께 라스베이거스며 휴양지로 여행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만 9년을 세븐일레븐에 근무했던 그가 그 여행에 동반한 횟수는 8번. 세븐일레븐의 '명물'로 신화를 창조한 것이다.

새로운 것을 전파하는 데 효과적인 '보여주기 마케팅'

1986년, 그는 12년 만에 한국 땅을 밟았다. 3년간 체류할 계획으로 갔던 미국 땅에서 9년이나 늦게 귀향한 것이다.

그는 하드와 아이스케키가 빙과류의 전부였던 한국에 아이스크림을 전파할 계획이었다. '배스킨라빈스'가 한국 진출을 시작하면서 그를 찾았고, 그해 8월에 명동 1호점을 오픈했다.

가장 어려운 것은 '어른도 아이스크림을 길거리에 들고 다니면서 먹을 수 있다.'는 걸 자연스럽게 인식시키는 일이었다.
음식은 꼭 앉아서 먹어야 한다는 한국의 전통문화가 그에겐 힘겨운 싸움 상대였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방법은 직접 몸으로 보여주는 것.

“직원들에게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길거리를 활보하게 했어요. 저도 예외는 아니었죠. 소비자들에게 아이스크림도 들고 다니면서 먹을 수 있다고 교육을 시키는 겁니다.”

이러한 그의 보여주기 마케팅은 3년 동안 지속되었고, 1988년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을 들고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을 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다.

이러한 직접 보여주기 마케팅은 그가 새로운 것을 전파하기 위해 꼭 거치는 과정이다. 스타벅스에서도 이 방법을 사용한 것은 당연하다.

“길거리에 다니시면서 제 손에 스타벅스 컵이 없는 사진을 찍어 오세요. 누구든 원하는 시간, 원하는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저녁을 대접하겠습니다”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야기하는 그의 손엔 어김없이 8온스짜리 스타벅스 컵이 들려있다.

“저처럼 나이든 사람도 들고 다니면서 먹고 마시는데 젊은 사람들이 못할 게 뭐 있겠어요.”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이 대중화될 즈음, AFC 파파이스 본사에서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시아 태평양 전체 시장에 '파파이스' 매장 여는 것을 주관해달라는 것이었다.

1994년, 그는 AFC 파파이스 미국 본사의 아시아 본부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스타벅스라는 커피 브랜드를 만나고 나서 그는 고액 연봉과 세계적인 기업의 임원이라는 탄탄한 자리를 과감하게 떨쳤다.

위암 초기 진단을 받고 수술을 했던 1998년, 그는 애틀랜타 상공에 떠있는 비행기 안에서 스타벅스 창업자 하워드 슐츠의 '스타벅스, 커피 한잔에 담긴 성공신화'라는 책을 읽었다.

슐츠의 경영이념과 인생철학은 그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얼마 후, 한국에 들른 그는 스타벅스의 '러브콜'을 받았다.

한국에서 스타벅스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이를 진두지휘할 전문 경영인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그는 성패를 가늠할 수 없는 불안감을 감수하며 한국 사람들한테는 낯설기만한 에스프레소 커피 사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쉰을 훌쩍 넘어서 있었다.


< 더불어 사는 삶, 나눔의 미학이 만들어낸 향기 >

한국의 커피 역사는 100년을 넘어선다고 한다. 정 사장이 스타벅스를 한국에 들여오던 당시, 한국에는 꽤나 많은 커피 전문점들이 있었지만 가격이나 맛에서 고객들을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고급 커피라고 해봐야 카푸치노나 에스프레소, 카페라테 등이었고 그마저 가격이 비싼 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객에게 다양한 종류의 고급 커피를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하는 스타벅스의 출현은 커피 마니아들에겐 더없이 반가운 일이었다.

1999년 7월 문을 연 스타벅스 이대점은 6개월 동안 교육장으로만 이용되었다. 장사 이전에 그가 가장 중요하게 고집하는 건 '교육'이다.

“사업에서 장기적으로 가장 효율적인 투자가 교육이에요. 그때 6개월 동안 하드 트레이닝을 한 파트너들은 현재 매장의 점장들이죠. 커피를 만들거나 점포를 운영하는 실력도 중요하지만 점장을 선발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품성'입니다.
더불어 살 줄 아는 사람들을 뽑아놔야 매장에서 일하는 파트너들이나 매장을 찾는 손님들이 편하죠.”

정 사장을 비롯해 스타벅스 직원들은 아침 8시 30분이면 트레이닝실로 모여든다. 그날 당번이 만든 커피를 마시고, 그의 설명과 콘셉트를 듣고, 맛을 평가한다.

새로운 메뉴 개발과 맛좋은 커피를 만들어내는 작업은 시작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거른 날이 없다. 신입사원들도 시간당 급여를 올려주는 한이 있더라도 4주 교육 프로그램 과정을 마치게 한다.

그의 경영이념은 한결같이 '더불어 살자'다. '파트너'라고 호칭하는 직원들, 파트타이머들까지 이익 배당과 스톡옵션을 챙겨주고, 회사의 이익 중 일정 부분을 떼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지역사회에 환원하고 있다.

현재 서울대학교 아동병원에서 주관하는 불우아동 치료연구 개발비를 모금하는 모임에 정기적인 지원을 계획중이기도 하고, 회사 차원으로 보육원을 정해 두고 이익의 일부를 기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 사장이 자랑스러워하는 건 파트너들이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주머니를 털어 어려운 이웃들을 돌볼 때이다.

2001년 초, 그를 감동시켰던 사건(?)이 있었다. 미국 본사에서 스타벅스 사상 최단시간 흑자 달성과 모범적인 점포 운영으로 대상(president award)을 수상한 것이다.

하지만 그를 감동시켰던 것은 수상 자체가 아니었다. 상금 600만원을 파트너들에게 맡겼는데, 그 돈이 고아원의 컴퓨터실과 도서관 설립에 전액 기부된 사실이었다.

“얼마나 대견스럽던지…. 이러니 제가 우리 파트너들을 안 믿을 수가 있어요? 제가 할 일은 우리 파트너들을 행복하게 하는 거예요. 그들을 행복하게 하면 매장을 찾는 고객들도 행복해질 수 있거든요. 오너로서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죠.”

그는 4000만원을 들여 연세대학원에 파트너들의 의견 수렴작업을 의뢰했다. 회사 자체 내에서 조사를 하면 진솔한 의견을 들을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그는 설레기까지 한다고.


< 가장 일하고 싶어하는 회사 만드는 게 목표 >

'더불어 함께 하기.' 미국의 세븐일레븐에서 10년을 근무하면서, 그리고 배스킨라빈스와 파파이스, 스타벅스를 운영하면서 그가 고집스럽게 지켜오는 기업이념이다.

정 사장은 가맹본부가 주체가 되어버린 우리 나라 프랜차이즈 사업 구조를 안타까워한다. 본부와 점주는 공동체,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야 하는 성공 파트너들이다.

미국에서는 운영 아이디어들이 가맹점주로부터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 아이디어들을 본부에서 축적해 성공 비즈니스의 틀을 만든다.

“무슨 사업이든 성공하기 위한 원칙은 ‘고객 만족’입니다. 프랜차이즈 사업에서 1차 고객은 가맹점주죠. 본부가 가맹점을 보살피면 가맹점은 자연스럽게 제2의 고객을 보살피게 되거든요.”

스타벅스는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했다는 정진구 사장. 그는 금년 말까지를 테스트 마켓 기간, 향후 3년을 제2의 도약기로 정하고 적극적인 점포 개발을 해나갈 계획이다.

그 첫 걸음으로 지난 5월부터 부산에 4개점, 부평과 광주광역시, 일산 화정 등 지방 시장 개척에 나섰다.

다리를 심하게 다쳐 8개월간을 고생했지만 그는 지금도 계단을 두 개씩 뛰어오르고 바삐 뛰어 다닌다.
“제 목표는 스타벅스가 한국에 발을 들여놓은 지 만 5년이 되는 2004년까지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젊은이들이 가장 근무하고 싶어하는 회사가 되는 겁니다. 고객에게 세계 최고 품질의 커피를 제공한다는 의지와 자부심만 있으면 못할 게 없어요.”

약간의 설탕을 넣은 드립 커피를 하루에도 5잔 이상 마신다는 그에게선 에스프레소처럼 진하고 깊은 인생의 맛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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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간은 만들면 생긴다 야후코리아 이승일 ] *************************


시대가 빠르게 변하고 있다. 한 가지 일만 잘해서 성공하는 시대는 지났다. 현대사회는 이제 다양한 능력을 지닌 전문가를 원하고 있다. 이른바 '멀티플레이어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우린 오랫동안 집단에 충실한 인간, 조직에 적합한 인간이 출세하고 대접받던 시절을 살았다.

거대한 조직일수록 '자기가 맡은 일만 똑똑히 하라.'는 주문을 자주 들었다. 옆 사람이나 옆 부서가 무엇을 하는지, 바로 전 단계의 컨베이어벨트에서 무슨 제품이 밀려오는지 알 필요가 없었다.

그저 내 앞에 주어진 한 가지 일만 해내면 능력을 인정받고 승승장구하던 시절을 살았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조직화된 인간들이 하루 아침에 조직에서 떨어져 나가는 세상이다. 기계에서 떨어져나온 부품 꼴이나 다름없다.

만일 이 부품이 나사나 못 혹은 클립 따위가 아니라 '형사 가제트 만능팔'처럼 쓸모에 따라 다양한 변신이 가능하다면 어떨까. 조직이 개인을 책임져 주지 않는 시대, 조직이 개인을 위해 약간의 희생도 할 수 없는 이 시대에 한 '개인'으로 살아가려면 조직 밖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멀티형 자질을 갖추어야 하지 않을까.

'명장' 거스 히딩크가 선수들에게 냄새만 쫓아가는 개처럼 맡겨진 일만 충실하게 하지 말고, 전체를 읽고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설정해 창의적으로 움직이는 '멀티플레이어'를 주문했듯이 말이다.

동시대를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멀티형 인간'의 전형적인 인물들을 만나 그들의 일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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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일씨(42)는 야후코리아 대표다. 야후 남아시아 총괄 사장도 겸하고 있다. 그는 이미 37세의 젊은 나이에 미국계 제약회사인 브리스톨메이어 스퀴브의 동남아 지역 사장을 맡으면서 전문 경영인 대열에 올라선 인물이다.

그의 전문 분야는 마케팅이다. 그가 거쳐온 회사는 생활용품전문업체, 은행, 음료회사. 소독약회사, 제약회사, 온라인회사 등 다양하다.

야후에 오기 전 그가 근무한 곳은 홍콩에 있는 아시아온라인사. 아세안 및 인도지역 사장과 전체 총괄 부사장을 맡았었다. 이와 같은 고속성장은, 그가 글로벌한 경험을 바탕으로 철저하게 시간 관리를 하면서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매진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성장 과정부터 남달랐다. 경북대 마케팅 교수였던 아버지가 1969년 유엔 국제식량기구로 옮기면서 아버지를 따라 네팔로 갔다.

초등학교 3학년 때다.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다시 아버지를 따라 태국 방콕으로 옮겨 중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는 홀로 미국에서 다녔다. 그렇게 외국 생활을 하면서도 한국 친구들을 사귀기 위해 방학이 시작되는 6월초쯤 한국에 와서 7월 중순까지 머리 깎고 교복 입고 한 달 반 가량 학교를 다니곤 했다.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나서는 충암고등학교 2학년 2학기에 편입해 설악산으로 수학여행도 다녀왔다. 그 이듬해 연세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그의 인생 행로를 잡아준 사람은 아버지였다. 중학 시절, 매일 저녁 숙제를 끝내고 나면 한 시간 정도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부터 마케팅에 대해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졌고 기업 경영인을 목표로 로드맵(경력지도)을 작성했다.

일도, 공부도, 노는 것도 그는 국제 감각을 키울 수 있는 환경에서 성장했지만 그것만이 그를 키운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했다. 한 겨울에는 신문 배달을 했고 여름엔 하루종일 바닷가에서 조개를 잡았다.
연세대 재학시절 방학 때면 공사판에서 등짐을 졌다. 미국 대학원 유학시절에는 학내에서 청소부 노릇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성장과정을 알 수 있는 일화 하나. 한번은 청소부 아르바이트 6개월 동안 1000달러를 모아 10년 된 중고차를 산 적이 있다.

그 얘기를 들은 아버지가 너무 고생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면서 돈을 보내주었다. 그러나 그는 그 돈을 돌려보냈다. 부모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3가지 부업을 병행해야 했다. 컴퓨터 컨설턴트와 대학원 기술사 사감 그리고 조교까지.
다행히 컴퓨터 컨설턴트는 학내에서 보수가 가장 좋았다. 그렇다고 공부와 일에만 매달린 것은 아니다. 목요일 저녁이면 친구들과 어울려 포커도 치고 볼링도 즐겼다.

그는 공 가지고 하는 운동은 거의 다 할 줄 안다. 농구, 야구, 미식축구, 배구는 수준급이다. 권투, 수구, 체조도 했다. 학부 공부할 때도 128학점을 이수하면 되는데 170학점을 땄다. 철학, 심리학, 문학 등 졸업과 상관없는 학점도 땄다. 그의 하루 취침시간은 4~5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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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자동차 신세대 판매왕 이석이 ] ****************************



< 전문지식과 솔직함으로 승부한다. >

“글쎄요…, 제가 이런 인터뷰를 해도 되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석이 과장(35·현대자동차 천안서부영업소)은 인터뷰 내내 이 말을 되풀이했다.

처음 한 번은 인사치레려니 했는데, 여러 차례 반복하자 그의 겸손은 꾸민 것이 아니라 몸에서 우러난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그의 다소곳한 태도를 신뢰하는 고객들이 이 과장과 계약하길 원했고, 그 결과 그는 지난 한해 모두 222대의 자동차를 판매했다.
한달 평균 18.5대, 공휴일을 제외하면 거의 매일 계약서를 작성한 셈이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이 과장은 현대자동차 전체 판매왕은 아니다. 이 과장 외에도 지난해 현대자동차에는 270여 대를 판 영업사원도 있고 240대 넘게 판 사원도 있다.
판매대수만 보면 이 과장을 능가하는 사원이 3명이나 있다.

그러나 현대자동차 측에서는 이 과장을 현대자동차의 ‘실질적인’ 판매왕으로 추천했다.

현대자동차 측은 “실제 판매대수로는 이 과장이 4위를 기록했지만, 1∼3위를 차지한 사원들의 경우 렌트카 업체 등으로부터 한번에 20∼30대를 계약하는 등 꾸준한 고객관리로 올린 실적으로 볼 수 없으므로 실질적으로 이석이 과장이 판매왕이라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지금은 성공한 세일즈맨이지만 이 과장은 한때 신체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어 의기소침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 과장의 왼쪽 눈 주변에는 교통사고로 인한 흉터가 남아 있다. 대학
을 졸업하고 해군학사장교 입대를 앞둔 90년 초, 화물트럭에 받히는 사고를 당했다.

그 후 여러 차례 성형수술을 했으나 좀체 원래 모습을 회복하지 못했다. 얼굴에, 그것도 눈 주변에 큰 상처가 있다 보니 남들 앞에 나서는 것도 꺼려했다.


< 의리의 해병전우회 >

해군학사장교 교육을 마치고 이 과장은 해병대 장교로 복무한 뒤 93년 제대했다.

군복무를 마치고 취업에 나섰으나 얼굴에 상처가 있는 이 과장을 흔쾌히 채용하겠다는 회사는 없었다. 거듭되는 입사실패로 이 과장은 점점 자신감을 잃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현대자동차에서 합격증이 날아왔다.

이 과장은 “다른 회사는 모두 나를 외면했는데 채용해준 현대자동차가 고마워 열심히 하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자신을 알아준 회사에 보답하겠다는 심정으로 처음 영업활동을 시작했지만 막막하기만 했다.

거리로 나섰으나 그에게 차를 사주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그에게 천군만마(千軍萬馬)와도 같은 원군이 있었다.

바로 대한민국 친목회 가운데 최고의 결속력을 자랑하는 해병전우회였다.

“93년 11월부터 본격적인 영업을 시작했는데 그 해 연말까지 그레이스와 엘란트라를 각각 1대씩 전부 2대를 팔았습니다. 그런데 그 차를 사준 분이 해병대 중사로 제대한 해병전우회 회원이었습니다.”

사실 연고판매만큼 세일즈맨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것도 없다. 그러나 이 과장의 경우 해병전우의 도움은 그 후 그의 자동차 세일즈맨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자신도 당당하게 차를 팔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 무엇보다 큰 소득이었다.

본격적인 세일즈맨 생활 첫해인 94년 이 과장은 회사에서 제시한 목표인 72대 판매를 달성했다.

94년 연말 이 과장은 송년회식 자리에서 영업소 직원 모두 앞에 나서서 자신의 새해 포부를 밝혔다.
내년에는 반드시 우리 영업소에서 3등 이내에 드는 실적을 올리겠습니
다.”

이 과장의 큰소리를 참석자들은 신입사원의 객기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러나 95년 연말 결산 결과 이 과장은 모두에게 한 약속을 지켰다. 그해 영업소 내 1등 사원이 187대를 팔았는데 이 과장은 128대를 팔아 당당히 3위를 차지한 것이다.

95년의 성공은 그 후 이 과장의 영업활동에 모범이 됐다. 스스로 마음속에 목표를 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방식으로 일했다.

예를 들면 96년까지 충남 지역에서 한 해 동안 가장 많이 판 기록이 209대였는데 이 과장은 이 기록을 깨보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영업전선을 누비고 다녔다.


< 판매에는 왕도(王道)가 없다. >

그러나 209대는 좀체 돌파하기 힘든 장벽이었다. 이 과장은 97년부터 99년까지 3년 연속 충남지역 판매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180대에서 190대 사이를 오르내렸을 뿐 200대 고지를 넘어서지 못했다.

이 과장도 앞서의 대우자동차 박노진 이사처럼 법인 영업보다는 철저히 개인 고객을 대상으로 차를 팔아왔다.

200대 이상 자동차를 팔려면 한꺼번에 수십 대를 사주는 법인 고객이 있어야 하는데 결국 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20세기를 보내고 말았다.

2000년 이 과장은 마침내 200대 고지를 넘어섰다.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던 '200고지'를 넘어선 비결에 대해 그는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잘한 것이 꾸준히 누적돼 좋은 결실을 맺은 것 같다”고 말했다.

매번 차를 팔 때마다 고객이 조금의 불편도 느끼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는데 이런 그의 성실함이 소문이 나면서 자연스럽게 손님들이 모여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공식적 멘트'말고 그만의 판매 노하우가 있을 것이란 생각에 거듭 판매왕이 된 비결을 물었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여전히 싱거웠다.

“몇 년간 해봤지만 판매에는 왕도(王道) 없는 것 같습니다. 그냥 고객만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노하우입니다.” 이 말 끝에 이 과장은 “영업도 이제는 전문직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즉 차를 팔면 이 세상 누구보다 차에 정통하겠다는 각오로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장은 “영업사원들 가운데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자동차의 구조와 판매제도에 대한 지식을 갖췄다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자동차에 대한 지식을 최대의 판매무기로 삼고 고객들을 설득해온 까닭에, 이 과장은 지금까지 영업활동을 하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시기를 “제품 자체의 결함 때문에 고객에게 불신을 받았을 때”라고 말했다.

그러면 현대자동차의 '실질적 판매왕’ 이석이 과장의 꿈은 무엇일까?

그는 거창하지는 않지만 야무진 꿈 두 가지를 소개했다. “현대자동차 본사에 가면 '명예의 전당'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그동안 회사 발전에 공을 세운 사람들의 행적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데, 명실상부한 전국 판매왕이 돼 이곳에 이름 석 자를 남기고 싶습니다.”

첫째 희망을 말할 때 다소 들떠 보이던 이 과장의 목소리가 둘째 꿈을 소개할 때 잦아들었다.


< 돈보다 목표달성이 먼저 >

“처음에 외모에 콤플렉스가 있는 나를 받아준 회사가 고마워 회사에서 정년까지 영업사원으로 일하며 이름을 남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자동차 제조사 직영 영업소와 영업사원을 없애는 추세입니다. 우리나라 역시 자동차 판매시스템이 딜러 체제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평생직장보다는 바뀌는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합니다. 만약 불가피하게 딜러로 나선다면 그 분야에서도 성공하고 싶습니다.”

현대자동차 내에서도 손꼽히는 판매도사인 이 과장의 연봉은 7200만 원 가량.
판매왕 치고는 억대 연봉에 못 미치는 것이 오히려 이채롭기까지 하다.

그러나 당사자인 이 과장은 “지금까지는 돈보다는 스스로 정한 목표를 달성하는 재미에 정신 없이 일을 해왔다”며 개의치 않는다는 반응이다.

한없이 겸손하고 수더분한 영업사원 이석이 과장. 그의 성공비결은 상대방이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는 평범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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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만불 원탁회의" 보험설계사들의 성공 노하우 ] **********************



< 화장터에서 고객 사냥, 면도시간 아끼려 제모수술 >

백만불 원탁회의(MDRT). 연봉 1억원 이상의 보험설계사들만 가입할 수 있는 "명예의 전당"이다.

국내 MDRT 회원은 2200여 명. 전체 설계사 중 상위 1%대에 들어야 명함을 내밀 수 있다.

매끄러운 화술, 전방위 고객관리, 해박한 금융지식, 빈틈없는 시간활용으로 정상에 오른 프로 세일즈맨들의 이야기.

연봉 1억원 이상이라야 가입할 수 있는 MDRT 회원들은 "설계사 중의 설계사"로 불린다.

몸뚱아리 하나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스스로를 "행복을 파는 수호천사"라 칭하는 이들은 북극에서도 냉장고를 팔 수 있는 남다른 영업전략과 까다로운 고객도 만족시키는 발군의 재정설계 능력을 갖췄다. 하나같이 최고라는 자부심에 가득 차 있다.

이들은 연봉 1억원 이상의 설계사들만 가입할 수 있는 "백만불 원탁회의(MDRT·Million Dollar Round Table)" 회원들이다.

국내 생명보험 설계사 14만4000여 명 가운데 MDRT 회원은 2200명에 불과하다. 상위 1%대에 드는 프로 세일즈맨들인 만큼 이들은 설계사 중의 설계사, 프로 설계사의 꽃으로 통한다.

이 자리에 한 번 오르는 것 자체가 대단한 영광이기 때문에 설계사라면 누구나 MDRT 입성을 꿈꾼다.


< "재정 컨설턴트" 로 불러 주세요. >

= 한국MDRT 한상철 회장 =

MDRT는 1927년 미국에서 만들어졌다. 보험 영업을 전문으로 하는 재정 컨설턴트들의 모임으로, 현재 세계 74개국의 500여 개 보험사에서 2만8000여 명이 회원으로 가입돼 있다.

한국에서도 1억원 이상의 연봉을 받는 설계사들이 속속 탄생하면서 지난 2000년 한국MDRT가 출범했다.

황훈선 푸르덴셜생명 재정 컨설턴트가 초대 회장을 맡았고, 올해 9월 한상철(ING생명) 회장을 주축으로 한 2기 임원진이 출범했다.

이들의 목표는 MDRT를 최고의 브랜드로 만드는 것. "MDRT를 통해 보험에 가입하면 확실히 뭔가 다르다"는 말을 듣기 위해 뛰고 있다.

아무나 MDRT 회원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연간 수입이 미화 6만5000달러, 보험료 실적은 1억5000만원에 달해야 한다.
이같은 실적이 뒷받침되더라도 고객과의 분쟁이 단 1건이라도 발생하면 회원이 될 수 없다.

MDRT는 회원들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한 세미나 개최, 정보 교류, 성공 노하우 공유 등을 목적으로 삼는다.
또한 불우이웃 돕기, 자선단체 기부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쳐 땀 흘려 일하고 봉사하는 직업인 정신을 실천한다.

MDRT들은 "생활설계사"라는 흔한 명칭을 거부한다. 그 대신 전문적 금융지식으로 무장한 "재정 컨설턴트"로 자부한다. 과거의 "보험 아줌마"와는 분명하게 차별화하고 있다.

MDRT는 보험상품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친화력을 최고의 경쟁력으로 내세운다. 인맥에 의한 상품판매보다는 철저한 재정설계를 통해 고객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활동한다.

개인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것은 기본이고 노트북 컴퓨터와 PDA, 디지털 카메라 등 첨단 장비를 활용해 고객을 위한 최적의 재정설계 프로그램을 제시한다.

고객의 경조사를 빠짐없이 챙기며, 고객이 어려운 일에 처하면 즉시 보험금을 들고 달려간다. MDRT 회원들은 한국 보험산업의 선진화와 국제화를 선도한다는 자부심에 차 있다.

이들은 어떤 성공 노하우로 정상의 자리에 올랐을까?

한국MDRT 한상철 회장은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미국 보험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것이 계기가 돼 "보험인생"을 시작했다.

한씨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영업직에 큰 매력을 느껴 보험업을 택했다"며 "내가 일한 만큼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직업은 아름답다"고 했다.

그는 1996년 ING생명에 입사, 이듬해에 MDRT 대열에 합류한 뒤 지금까지 6년간 자리를 지키고 있다.

ING생명 연도대상 금상을 세 차례 수상했고, 2001년에는 MDRT의 6배 업적을 달성해 TOT(Top of the Table) 회원이 됐다. 지난해에도 COT(Court of the Table·MDRT의 3배 업적 달성) 회원에 올랐다. 1999년에는 재정 컨설턴트 부문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한씨의 "주무기"는 누구를 만나도 술술 대화를 풀어나가는 말솜씨와 "순박한 인상". 고객을 편안하게 만들면서도 그들이 갑갑해하는 부분을 정확히 진단해주는 "개인 주치의"를 자처한다.

무역회사에 다니던 한씨는 회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위기를 맞았다. 그러다 "연봉 1억원에 도전하라"는 ING생명 재정설계사 모집광고를 보고 도전해 1년 만에 목표를 달성했다.

주변에서는 "6개월 이상 못 버틸 것"이라며 싸늘한 눈길을 보냈지만, 갓 태어난 딸 앞에서 "성공한 아빠가 되겠다"고 맹세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는 "무엇보다 초기의 어려움을 슬기롭게 극복해야 한다. "여기에서 좌절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강한 신념으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최고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 "보험철학" 으로 세뇌(洗腦) >

교보생명 "보험여왕" 강순이씨. 28세 때인 1983년 여성설계사 공채 1기로 입사해 두 차례나 보험여왕에 올랐다.

입사 이듬해인 1984년 여성설계사 대상을 차지했다. 강씨는 입사 초기부터 연도대상 시상식에서 금·은·동상을 휩쓸어 수상자 명단에서 그의 이름이 빠지는 것은 "사고"로 간주됐을 정도다.

강씨는 1993년 교보생명 전체 설계사 가운데 실적 1위를 기록해 보험여왕에 등극했고, 1996년에도 보험여왕이 됐다.

연봉이 1억원 이상이라야 가입할 수 있는 "교보 리더스클럽" 회장인 그의 실적은 놀랍기만 하다. 한 달에 50건의 보험상품 판매는 "기본"이고, 더러는 월 100건 넘게 판 적도 있다.

2000년에는 46억원의 보험료 수입실적을 올려 연봉이 5억500만원에 달했다.

강씨의 성공요인은 "끝없는 보험철학 강의"에 있다. 그는 고객들을 만날 때마다 “죽음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은 피해갈 수 없지만, 경제적 고통에서 벗어나야 사람다운 삶을 마칠 수 있다”
“생(生)은 끝나더라도 책임은 끝까지 져야 한다”며 보험의 의미를 귀가 따갑도록 들려준다.

이런 얘기를 처음 듣는 고객들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거나 불쾌해하기도 하지만, 거듭 얼굴을 대하며 진지하게 설명을 계속하면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된다고 한다.
물론 강씨 자신이 보험에 대해 신앙에 가까울 만큼 확고한 믿음을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다.

강씨는 보험영업을 통해 번 돈으로 큰아들을 미국에 유학 보냈고, 이어 내년에는 둘째도 유학 보낼 계획이다.

그는 “보험설계사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렌다”며 “다시 태어나도 보험설계사가 되겠다”고 한다. “보험을 천직으로 알고 보험에 미쳐 보험을 아예 사랑해버린 것이 나를 성공으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 메트라이프생명 MDRT 유원용 회장 >

메트라이프생명 MDRT 유원용 회장은 자격증을 5개나 갖고 있다. 금융자산관리사(AFPK), 공인중개사, 법률중개사, 경매상담사, 투자상담사 등이 그것.

지금은 종합 장례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필요한 장례지도사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유씨가 자격증에 집착하는 것은 국내 최고의 보험전문가가 되겠다는 목표 때문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평생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게 그의 영업 모토다.

각종 전문자격증으로 무장해야 고객의 어떠한 요구도 만족시킬 수 있는 토털 서비스를 해줄 수 있다는 것. 그는 “죽는 날까지 매년 한 개씩의 자격증을 따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유씨는 전북대 회계학과를 나와 대기업 재무팀에서 안정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외환위기 여파로 선배, 동료들이 회사를 떠나는 것을 보고 전문성 있는 "평생직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유망 직종이 바로 보험 세일즈맨. 그는 전문 보험설계사야말로 선진 영업의 꽃이라고 믿는다. 향후 금융업종간 장벽이 무너지면 보험설계사가 더욱 각광을 받게 되리라는 것.

유씨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결혼식장과 상가(喪家)를 뛰어다니며 고객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눴다.

혈연, 학연, 지연에 얽매이지 않고 고객의 진정한 동반자가 되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입사 1년 만인 2000년 7월 억대 연봉 설계사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이후 3년째 MDRT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MDRT는 상품을 팔기에 앞서 나 자신을 팔아야 하며, 고객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달려가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부지런함과 전문성을 갖춰야 한다”고 했다.


< 휴대전화 두 개에 무전기까지... >

동부생명 MDRT 안주용 회장은 성균관대 경영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석사 출신. 금호그룹 공채로 아시아나항공에 입사해 3년 정도 근무하다 한솔그룹 한솔씨에스엔으로 옮겼다.

그 후 "땀 흘린 만큼 보람을 찾을 수 있는 일"을 찾던 끝에 2001년 보험업계에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보험영업인의 길은 듣던 것처럼 녹록치 않았다. 남들과 똑같이 일해서는 MDRT 회원은커녕 낙오자가 될 것 같았다.

남보다 덜 자고 덜 쉬며 일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MDRT에 입성하기 위해 하루에 15시간씩 일하고 최소한 3∼4명의 "가망 고객"을 만나는 것을 원칙으로 세웠다.

또한 이미 만들어진 보험상품을 무작정 팔아 넘기는 데 급급하지 않고, 고객에게 꼭 필요한 부분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다양한 맞춤식 보험상품을, 글자 그대로 "설계"하는 데 주력했다.

그랬더니 보험 가입 후 중도 해약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보험상품에 대한 충분한 이해, 보험의 가치에 대한 확고한 철학이 밑바탕이 된 건 물론이다.
자신만의 화법과 판매 노하우, 전문지식을 익히고 개발하기 위해서도 최선을 다했다.

“1주일에 평균 20명의 고객을 만났더니 4∼6건씩 계약이 성사되더군요. 열심히 하면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체득하면서 하루 하루, 한 주 한 주, 한 달 한 달 실적을 차곡차곡 채워가는 데서 커다란 기쁨을 얻었습니다.”

안씨는 입사 8개월 만인 지난해 5월 동부생명 전체 설계사 가운데 최고의 실적을 올려 연도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그는 “보험영업의 성공 노하우는 발로 뛰는 데 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사람도 열심히 뛰는 사람을 당해낼 수 없다”고 강조한다.


< 푸르덴셜생명 생활설계사 조태룡씨 >

푸르덴셜생명의 생활설계사 조태룡씨는 설계사 가운데서도 중역에 해당하는 "이사 설계사"다.
그는 1997년 재정설계사가 된 이래 6년 연속 MDRT 회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2000년 COT 회원이 된 이후 올해로 3년째 그 자리를 지켜 "설계사 중의 설계사"로 일컬어진다. 국내에서 COT 회원이 된 설계사는 12명에 불과하다.

그의 올해 목표는 전세계 보험설계사의 "왕중왕"인 TOT 회원 등극. MDRT 회원 실적의 6배를 올려야 오를 수 있는 자리다. 국내 TOT 회원은 현재 10명뿐이다.

조씨가 확보한 개인고객은 무려 2000여 명. 그는 국내 종신보험 최다 고객을 보유해 한국 기네스북에 올랐다.
또한 1주일에 3건 이상의 신계약 체결 실적을 200주 넘게 기록했고, 현재는 250주를 목표로 도전하고 있다.

조씨의 성공 포인트는 고객 중심의 시간관리에 있다. 그는 면도하는 시간이 아까워 아예 제모수술을 받았을 만큼 시간관리의 독종이다.

평소 두 개의 휴대전화와 무전기를 갖고 다니는데, “고객이 통화를 원할 때 통화가 안 되는 것은 죄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고객 찾아 지하철로, 화장터로... >

ING생명 MDRT 안치도 회장은 부산상고, 세종대 회계학과를 나와 21년간 한일은행(현 우리은행)에 근무했던 금융전문가.

은행 구조조정 여파로 퇴직해 사업을 하던 중 친척의 보증을 섰다가 한순간에 전 재산을 잃고 수억 원의 빚까지 떠안았지만, 보험설계사로 변신해 "인생역전"에 성공한 경우다.

안씨는 입사 후 지금까지 205주 연속 1주일에 3건 이상의 계약을 체결하는 기록을 세웠다. ING생명 연도대상에서 2000∼2002년 차례로 동상, 은상, 금상을 받았다.
1999년부터 4년 연속 MDRT 회원이자 COT 회원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는 4년째 토요일과 일요일에 쉬지 않고 일해왔다. “머리가 아니라 발로 뛴다”는 영업철학 때문이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단순한 진리를 굳게 믿고 있다. 하기 싫은 일을 먼저 찾아 하는 것도 그의 원칙이다.
그래서 멀리 떨어진 고객을 먼저 찾아가고, 까다로운 고객을 먼저 만나 어려운 문제를 풀어나간다.

이런 일이 잘되면 나머지 일은 저절로 잘된다고 믿기 때문. 간혹 일이 잘 안 풀리면 “고객이 거절하는 게 아니라 내가 포기하는 것”이라며 자신을 다잡는다.

그는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 쓰는 빡빡한 일정에도 중앙대 최고경영자과정을 마쳤으며, 전경련 등을 오가며 새로운 지식을 충전하는 데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내년 초에는 자신의 영업 성공담과 실패담을 담은 책을 펴내 후배 설계사들에게 나름의 길을 제시해줄 계획이다.


< 한국MDRT 방종국 총무 >

한국MDRT 총무를 맡아 온갖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방종국씨는 한양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쌍용그룹에 입사, 회장 비서실 등에서 8년간 근무했다.

외환위기를 겪던 1998년 6월 구조조정 바람이 불어닥쳤다. 당시 인사부에 근무하던 방씨는 인원감축 작업을 직접 수행하면서 “이건 아니다”는 좌절감에 빠져들었다. 전직을 고려했지만 쉽지 않았다.

별 대안 없이 회사를 계속 다니던 방씨에게 "1인 기업"을 꾸리며 당당하게 일하는 보험설계사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설계사가 바로 자신이 찾던 세계라고 판단했고, 곧바로 보험인이 됐다. 일을 시작하면서 방씨는 “나 자신도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미묘한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수입을 올리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보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행복, 이웃의 편안한 삶을 진심으로 배려하고 도와주면서 기쁨을 느꼈을 때 정말 설계사라는 직업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물론 처음엔 쉽지 않았다. 초기 1년간은 시행착오와 좌절의 연속이었다. 그는 “돈을 벌겠다는 목표 이전에 보험의 사랑 정신을 펼친다는 확신으로 뛰었다”고 한다.

지하철에서 아빠 손을 잡고 있는 대여섯 살 난 아이를 보면 "이렇게 사랑스런 아이의 행복을 보장하기 위해 보험에 들지 않겠냐"고 설득할 요량으로 명함이 든 주머니에 저절로 손이 갔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현장에서 보험의 의미와 가치를 설파하기 위해 벽제 화장터를 찾기도 했다. 그렇지만 차마 유족들에게 명함을 건네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입사 2년 만에 MDRT 대열에 합류, 올해로 4년째 회원 자격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COT 회원이 됐다.


< “자존심을 버려라”>

한국MDRT 서울·중부지역 김태준 회장(푸르덴셜생명)은 1997년부터 6년 연속 MDRT 회원으로 뛰고 있다. 그는 영업전선에서 MDRT 회원의 신인도를 적극 활용한다.

고객들에게 “재정설계 능력을 인정받은 MDRT 회원에게 도움을 청하면 최고 수준의 컨설팅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준다.

김씨는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와 한국투자신탁, 동양매직, 동부건설 등 여러 회사에서 금융, 부동산, 마케팅 분야 등에 대해 다양한 지식을 쌓았다.

그는 1996년까지만 해도 이런 지식들이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보험설계사가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해봤기 때문이다.

1996년 김씨의 장모가 갑작스레 쓰러졌다. 죽음을 앞둔 장모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기도만 할 따름이었다. 바로 그 무렵 푸르덴셜을 알게 됐다.

“보험은 "경제적인 죽음"에 대한 구원이다”는 말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래서 이 바닥에 발을 들이밀었지만, 막상 뛰어들고 보니 길은 여간 험난하지 않았다.

사무실마다 "잡상인 출입금지"라고 쓴 종이가 붙어 있었다. 바쁘게 일하는 회사원들에겐 보험모집인도 "잡상인"과 다를 바 없었다. 자존심이 볼품없이 구겨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특유의 뚝심으로 2001년 푸르덴셜생명 연간 최다 판매건수(489건)를 기록했고, 현재 1650명의 고객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김씨의 조언은 간단명료하다.

“성공하려면 자존심을 버리세요.”


< 삼성생명 MDRT 이영채 회장 >

2001년 5월 입사한 후 지금까지 1주일당 평균 3.6가족을 보장해온 삼성생명 MDRT 이영채 회장은 원칙·정직·전문성을 생활설계사의 필수 덕목으로 강조한다. 이를 바탕으로 고객과 생활설계사가 가족보장이라는 합작품을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이씨가 가장 역점을 두는 것은 보험가입 가능성이 있는 고객을 발굴하는 일. 그는 매주 5∼7가족의 가망 고객 리스트를 만든다. 이들을 가입시키지 못했을 경우에 대비해 5가족의 예비 리스트도 준비한다.

그런 다음 무조건 사람을 만나기 위해 뛰었다. 이씨의 하루 평균 수면시간은 4시간에 불과하다. 물론 주말도 없다.

와이셔츠 주머니에는 늘 340명 전 고객의 연락처가 적힌 영업 리스트가 들어 있다. 이 리스트는 한 달에 한 번, 10명 이상의 고객이 추가되면서 업데이트된다.

리스트에 있는 모든 고객과 매달 최소한 한 번 이상 통화하는 것은 기본이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빳빳한 종이에 리스트를 작성해도 며칠 지나지 않아 해지기 일쑤다.

이렇듯 성공한 MDRT 회원들에겐 나름의 철학과 성공비법이 있다. 이들은 무작정 발로 뛰는 게 아니라 1주일에 3명 이상의 고객을 확보한다는, "3W"라는 확실한 목표를 세워놓고 뛴다. 매일 10여 종의 신문을 읽고 부음란에 고객의 이름이 눈에 띄면 바로 달려간다. 이들의 차에는 언제라도 장례식장으로 직행할 수 있도록 검은색 양복과 검정 넥타이가 갖춰져 있다. 이들은 “MDRT 회원이 되는 것은 성공의 관문이자 시작”이라고 말한다.

다음은 MDRT 회원들이 전하는 성공 비즈니스 10계명.

연고(緣故) 판매는 오래 못간다

▲ 고객의 입장에서 뛰어라 고객에게 가장 적합한 상품을 추천하고 맞춤설계를 해줘야 한다.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고객이 처한 사정이 어떤지를 정확하게 파악해 구석구석까지 만족시킬 수 있도록 상품설계를 해야 한다.
"한번 고객은 끝까지 책임진다"는 자세가 중요하다. 때로는 고객과 취미생활을 같이 하고, 소득의 일부를 고객을 위해 사용하는 투자가 뒤따라야 한다.

▲ 자기개발에 충실하라 보험에 관한 한 어떤 질문에 대해서도 답변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신문, 책, 인터넷 등을 활용해 끊임없이 정보를 축적함으로써 고객과 어떤 유형의 대화라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 고객의 경조사는 빠짐없이 챙겨라 고객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것만큼 좋은 영업방법은 없다. 경조사를 챙기는 것은 고객의 믿음을 사는 행동으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새로운 고객과의 만남으로 연결된다.

▲ 성실하게 일하라 계획에 따라 하루하루 자신을 통제하며 일해야 한다. 큰 계약을 따내겠다는 욕심보다는 작은 액수의 보험이라도 꾸준하게 체결하겠다는 목표를 세워야 한다.
고객에게 숨김없이 말하고 정성을 다해야 한다. 자기 나름대로의 영업전략을 세우고 이를 빈틈없이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고객과의 약속시간을 지키는 것을 철칙으로 삼아라.

▲ 끊임없이 변신하라 항상 새로운 것에 관심을 갖고 전문적인 식견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설득력 있는 화법을 연구하고, 고객의 성향과 특성 등에 대해 항상 메모하는 습관을 들여라.

▲ 연고판매에 집착하지 말라 가족과 친척 등 연고를 통한 영업은 오래가지 못한다. 파생효과가 큰 인간관계를 개척하라.
단순 개척보다는 소개를 통한 영업방법이 더 효과적이다. 고객에게 접근할 수 있는 루트를 다양화해야 한다.

▲ 부지런히 뛰어라 하루 10시간 이상 현장을 뛰어다니며 가급적 많은 사람을 만나라. 부지런히 일하는 것만한 경쟁력은 없다.
고객의 일을 적극적으로 돕고, 고객에게 인간적으로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고객이 받아야 할 보장이 누락되지 않도록 내 일처럼 챙겨라.
가능성 1%에 도전하는 자세로 잠재적인 고객은 무조건 만나야 한다. 한 명 더 만나는 사람이 한 발 더 앞서간다.

▲ 자신감을 가져라 원대한 목표를 세우고 자신감 있게 행동해야 한다. 소극적인 자세는 절대 금물. 자신의 일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일을 사랑할 때 목표는 성취된다.

▲ 고객관리에 철저하라. 고객이 또 다른 고객을 만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인적 네트워크를 만들어 많은 잠재고객을 확보하라.
고객의 기념일에 축하카드를 보내거나 고급 정보를 이메일로 제공하는 것도 필요하다. 다만 비굴한 영업에 매달려선 안 된다. 고객이 단호하게 거절할 때는 깨끗하게 받아들여라.

▲ 건강을 지켜라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동호회에 참여하든지, 많은 사람과 교류할 수 있는 운동을 선택해 즐겨라. 건강한 몸과 건전한 사고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오래 버티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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