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 1,000만 목표로 기획… 할리우드 열어 제칠것"
은행융자까지 받고, 영화사(강제규필름) 사무실까지 작고 먼 곳으로 옮기면서 돈을 모았지만 57억원 밖에 안됐다.
보통 영화라면 넉넉한 돈이지만, 턱도 없었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그렇게 출발했다.
강제규(姜帝圭ㆍ42)감독은 “일단 30%만 찍고, 그것을 보여주어도 투자자가 안 나서면 때려치우자”고 했다.
그의 확신대로 투자자는 나타났고, 영화는 빠른 속도로 관객 1,000만명(7을 돌파했다.
99년 "쉬리"로 한국영화의 블로버스터 시대를 연 그가 또 한번 한국영화의 신화를 쓰고 있다.
* 우선 미담 얘기부터 시작하자. 8일 비전향장기수의 삶을 다룬 김동원 감독의 "송환"의 프린트 5벌 제작비용(1,500만원)을 댔다. "태극기…"가 성공하니 폼 좀 잡으려고 한 것인가.
-“아니다(웃음). 설 자리 찾기 힘든 독립영화와 예술영화, 불우한 영화인을 돕자는 것이다. 어차피 상업영화는 알아서 제 갈 길을 간다.
내가 "송환"을 도운 것도 이런 연장선상에서다. 감독으로서도 존경할 만큼 각고의 노력이 든 작품이다.
1명의 관객이라도 더 보게끔 하자는 취지에서 지원했다. 문화다양성이 인정되는 사회가 건강하며 그런 사회에서 영화와 예술이 발전한다. 대만영화는 예술로만 가서 망했고, 홍콩영화는 장사 좋아하다 망했다.
* "태극기…" 관객이 얼마까지 갈 것으로 예상하고 있나. 네티즌들은 1,100만이라고 하는데...
- “더 가지 않겠나? 개봉한 지 이제 2개월도 안 됐다. 3월안에 "실미도" 기록을 깰 것 같다.
"실미도"는 1,100만명 조금 넘는 수준에서 끝날 것이다. 사실 "관객 1,000만명"은 내 입에서 처음 나온 것이다.
지난해 여름 투자자인 쇼박스 정태성 상무가 촬영현장에서 흥행목표를 어떻게 잡느냐고 물었다. 그때 내가 "1,000만 명은 넘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해줬다.”
* 무슨 근거로 1,000만명을 예상했나.
- " "친구"가 820만 명을 기록했다. 한국의 멀티플렉스(복합상영관) 상황이나 한국영화 인지도 등을 봤을 때 적어도 "태극기…"가 "친구" 이상의 몫을 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우선 작품의 테마가 관객에 어필할 것이고, 시청각적 충격 또한 대단할 것으로 예상했다.
99년 "쉬리" 때도 한국영화가 진일보했다는 쾌감을 안겨줬지만 "태극기…"는 더욱 새로운 진보와 가능성을 확인해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이런 얘기는 일체 하지 않았다. 미친놈이란 소리 들을까 봐.”
* 개봉전 개인적으로 나눈 전화통화에서 흥행보다는 기록이 문제라고 했다. "실미도"를 염두에 둔 것이었나.
- “"실미도"가 잘 된 것에 박수는 보내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실미도"가 잘 되면 잘 될수록 "태극기…"도 좋다고 생각했다.
"실미도"를 1,000만 명이나 봤는데 뒤에 개봉한 "태극기…"를 누가 보겠느냐는 "시장 파이의 논리"는 이미 깨졌다.”
* "실미도"와 "태극기…"는 출발이나 흥행성격 등 여러 면에서 다르다고 생각한다. "실미도"는 처음 의도와 달리 다분히 국내용으로 사회적 이슈를 등에 업었다면, "태극기…"는 처음부터 세계시장을 겨냥했고, 영화의 힘으로 흥행에도 성공했다.
- “나는 영화란 예상한 것과 다르게 결과가 나오면 잘 되도 실패라고 생각한다. 500만명을 예상했는데 1,000만명이 들어오면 실패라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통계적ㆍ사회적ㆍ문화적으로 접근해 시뮬레이션을 해보고, 리스크 관리도 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 강 감독은 "쉬리" 때도 그랬지만, 안 되면 죽는다는 각오로 영화를 만든다. 마케팅비 포함 200억원의 제작비를 갖고 벼랑 끝에서 영화를 만든 소감은 어떤가. 실패하면 어떻게 할 작정이었나.
- “제주도 가서 국수 장사를 해야지…(웃음). "태극기…"를 찍을 때 매일매일 "만약 뒈지더라도 이 영화 찍으면서 후회는 없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이런 기분으로 찍었다. 앞으로도 이처럼 모질고 독하게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 싶다.”
*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가 이렇게 폭 넓게 각광을 받는 이유는 뭔가.
- “한국에서는 영화 관람 결정권의 70%를 여자가 갖고 있는데, 여자는 때리고 싸우는 걸 싫어한다. 설문조사 결과 10~20대는 한국전쟁에 매력을 못 느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렇게 소재주의와 장르주의로 접근하면 답이 안 나온다는 게 내 평소 소신이다. 어떻게 주물러 관객 기분을 끄집어내느냐가 문제다. 관객이 추구하는 것은 뭔가. 감동과 재미다. ”
* 그럼 이 영화에서 감동과 재미는 무엇인가.
- “가족주의에서 비롯되는 감동, 상황에 맞는 캐릭터들의 매력, 스펙터클에서 오는 재미, 사실감과 형제 갈등에서 오는 재미, 전쟁영화가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재미다.”
* 그런 점에서 스스로 이 영화를 몇 점 짜리로 보는가.
- “90점이다. 이 영화에 대해 냉소적이고 비난하는 사람이 많다. 이런 스토리 라인과 메시지를 갖고 기획했을 때부터 예견했던 일이다. 노근리 사건이나 실미도 사태는 그 상황 속에서 있었던 소수 사람들의 이야기라 접근하기가 쉽다.
사실에 충실하면서 극적 리얼리티를 잘 끌고 나가면 뭐라 할 사람이 없다. 사건의 축이 간단하고 심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6ㆍ25는 3년2개월이나 간 전쟁이었다. 영화 100편을 만들어도 모두 담을 수 없다. 그때 이런 전쟁이 있었고, 가족의 아픔이 있었고, 그 아픔이 50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지고 있었구나 하는 것만 보여주자고 생각했다.”
* 여성 관객들은 극중 진태의 애인인 영신(이은주)이 죽는 장면에서 많이 운다. 이런 멜로적 설정도 감동을 염두에 둔 것인가.
- “한국전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민(民)과 군(軍)의 공통된 전쟁이었다. 민과 민이 이데올로기 때문에 오는 비극을 꼭 담고 싶었다.
엄마를 죽일까, 영신을 죽일까 고민했다. 엄마는 그래도 있어야 할 방석 같아서 결국 영신을 죽였다.”
* "태극기…"를 비판하는 쪽에서는 이 영화의 모든 등장 인물들이 남한에 의해 희생되고, 그 과정도 상세히 묘사된다.
반면 북의 폭력성은 단편적이 평면적이다. 그래서 좌익영화라는 말하기도 한다. "쉬리" 때 김정일에게 너무 욕을 먹어서 바꾼 것 아닌가.
-“"태극기…"는 진태와 진석을 따라간다. 이런 구조에서 인민군의 행동을 구체적으로 담기란 불가능하다. "쉬리"는 대립구조, 최민식이라는 상대가 있어 가능했다.”
* 3년2개월을 담은 영화이다 보니 중간에 헐거워 보인다. 압축은 불가능했을까. 영화를 보면서 장동건의 마지막 반전이 어느 시점에 나와야 하는지 감독도 고민했을 것 같다.
- “한번 더 봐라. 안 늘어진다. 그 긴 시간이 모두 현재의 진석이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을 위해서다. 내가 의도했던 바는 50년의 기다림을 가졌던 진석의 아픔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노인 진석이 울 때 울림이 있어야 성공한다고 믿었다.”
* 앞으로 계획은.
- “ "태극기…" 해외반응을 냉정히 지켜보면서 이 단계에서 또 한번 도약하는 아이템을 위해 고민해야 할 것이다.
생각하고 있는 SF 판타지물이 있다. 올해 안에 시나리오 작업을 끝내고 내년에 촬영에 들어갈 계획이다. 강제규필름도 이제는 내가 영화를 열심히 만들 수 있는 곳으로 바꿀 생각이다.”
인터뷰를 끝내면서 이 영화로 얼마나 버냐고 물었다. "실미도"보다 제작비가 2배 이상이어서 속상하겠다고 약도 올려 보았다.
그러자 그는 “돈은 무슨, 내가 뭔 돈을 번다고. 어떻게 내 회사에서 만든 영화를 가지고 얼마를 버느니 받는다느니 할 수 있느냐. 그것은 좋은 선례가 아니다”며 말을 끊었다.
강우석 감독이 “나 돈 많이 벌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이런 모습이 강제규가 천상 감독임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