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즉흥적 웃음 보다는 여운있는 웃음 주고파... >

"안녕하세요. 재미있는 라디오 유쾌한 코믹 보이 최양락입니다. 웃을 준비 됐다고요?"

매일 오후 8시10분 MBC 라디오(FM 95.9㎒)를 켜면 개그맨 최양락(42)을 만날 수 있다.
라디오에서는 보기 드문 개그 프로그램인 "최양락의 재미있는 라디오".

2002년 4월 첫 방송을 시작한 이래 2년 동안 한결같은 모습으로 퇴근길 시민들의 스트레스를 웃음으로 날려주고 있다.

특히 프로그램의 간판 코너인 "3김 퀴즈"는 독특한 정치 코미디로 인기를 끌고 있다. 퀴즈 9단을 자처하는 YS, DJ, JP가 나와 초등학생 수준의 문제를 풀지만 한번도 정답을 맞히지 못한다.

힌트를 아무리 줘도 소용없다. 너무나 뻔한 정답을 애써 외면한 채 자기들끼리 치고 받느라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국민의 말은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정쟁에만 골몰하는 정치인들에 대한 신랄한 풍자다.

물론 3김이 진짜 나오는 것은 아니고 목소리만 흉내낸다. YS와 DJ는 후배 개그맨 배칠수가 맡고, 최양락은 JP의 흉내를 내면서 사회를 본다.

"사람들이 복도 많다고 해요. 이 나이에 TV에서도 웃기고 라디오에서도 웃길 수 있으니까. 지난해 말 MBC 연기대상 시상식에서는 라디오 우수상도 받았어요."

최양락은 MBC TV의 "코미디 하우스"에서도 맹활약을 하고 있다. "10분 토론", "웃지마" 등의 코너에서 후배들과 함께 코미디 연기에 구슬땀을 흘린다.

40대의 나이에 현역에서 활동하는 개그맨이 드문 현실에서 후배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어느 날 분장실에서 주변을 둘러보니 마흔 넘은 사람은 저 혼자더라고요. 예전 제가 신인일 때 구봉서 선생님을 바라보던 것과 비슷한 위치가 된 것 같아요. 후배들은 제가 부럽겠지만 사실 저는 불안해요. 언제 무대를 떠나게 될지 모르거든요."

1981년 MBC 개그콘테스트로 데뷔해 올해로 방송 23년을 맞는 그에게도 힘든 시절은 있었다. 90년대 후반 모 방송사의 오락 프로그램에서 난데없는 퇴출 통보를 받고 방송을 떠나야 했다.

"마흔도 안 됐는데 어쩌란 말이"고 따지는 그에게 "잘 아시면서…"라는 냉정한 대답만 돌아왔다.
억울하고 섭섭한 생각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고민하던 그는 짐을 싸서 호주로 떠났다.

"한국에 있으면 TV를 보게 되잖아요. 그런데 TV에 저는 없고 다른 사람들만 있는 거예요. 그게 너무 괴로웠어요. 그래서 무작정 떠났죠. 개그를 그만둬야 하나, 그만둔다면 뭐를 하며 살아야 하나 고민 많이 했어요."

호주에서 1년간 쉬면서 차분히 자기를 돌아본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당당히 재기에 성공했다. 특히 "알까기"는 최양락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한 히트작.

"알까기가 떴을 때 제일 행복했어요. 어른이 하기엔 너무 유치한 게임을 진지하게 보여준 것이 히트의 비결일까요. 남은 코미디 인생에서 알까기 같은 히트작이 하나만 더 나와도 대단한 성공일 것 같아요."

88년 동료 개그맨 팽현숙과 결혼해 개그맨 부부 1호가 된 그는 아내의 내조에서 큰 힘을 얻고 있다고 했다.

"저는 집안에서 손가락 하나 꼼짝 안 해요. 하나엄마(팽현숙) 말이 "당신은 방송을 하는 사람이니 방송만 해요" 라더군요.
개그맨이 집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밖에서 웃길 수 없거든요. 하나엄마도 같은 일을 했기 때문에 이해를 잘 해줘요. 그러고 보니 개그맨 부부는 하나도 깨진 경우가 없는 것 같네요."

시청자들의 머릿속에는 웃기는 최양락의 모습만 있겠지만 인터뷰를 위해 만난 그는 무척 진지한 사람이었다. 23년 경험에서 우러난 그의 개그론을 들어보자.

"시청자들은 수십년 동안 TV를 봐온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을 5분 웃기려면 1주일을 연구해야 해요. 더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비극에는 후한 점수를 주지만 코미디에는 야박하거든요.
그러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즉흥적인 웃음을 유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요. 여운이 남는 웃음, 멘트로 기억되는 개그가 진짜 좋은 거죠."

그는 개그맨을 제대로 대접해 주지 않는 방송가의 분위기에 대해선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우리나라 코미디언이나 개그맨은 실컷 써먹고 버리는 소모품과 비슷해요. 미국이나 일본은 한 명의 스타를 위해 수십, 수백 명의 작가가 동원돼요.
우리는 개그맨 본인에게 모든 것을 맡기지요. 그래선 아깝게 키운 사람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려요. 우리나라도 개그맨이 장수할 수 있는 풍토가 만들어지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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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근(尹洪根·50) 회장은 무슨 일이든 시작하기 전에 치밀하게 계산해 목표를 계량화한다. 그는 “최근 조류독감 파동으로 닭고기 판매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여러분의 도움으로 지금은 100% 회복했다.”고 밝은 표정을 지었다.

창업 9년 만에 연 매출 4000억원의 국내 최대 프랜차이즈그룹을 일군 비결을 물었더니 어릴 적 가정환경부터 털어놓았다.


●“고마운 물건을 만드는 곳이 회사”

- 나는 전남 순천의 종갓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여수에서 사업을 하셨고, 집에는 할머니도 계셨다.
부잣집 종손이어서 외지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대신해 머슴도 부려야 했다. 기업에 대한 마인드는 아버지가 심어주셨다.

초등학교 1,2학년 때쯤인가, 아버지가 운동화와 책가방을 사 주셨다. 검정 고무신과 허리춤에 찬 책보가 전부인 시절이라 뛸 듯이 기뻤다.
아버지께 이런 좋은 물건들은 어디서 만드는지 물었더니 아버지께서 “회사”라고 말해 주셨다.

나는 "아! 회사는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는 물건을 만드는 고마운 곳이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이때부터 내 꿈은 여느 아이들처럼 대통령이나 군인, 판·검사가 아니고 큰 회사의 회장이었다.


- 대학 입학을 앞두고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버지 회사도 부도가 나 집안이 그야말로 완전히 망했다.

장학금을 받기 위해 서울 유학을 포기하고 조선대에 입학했다. 가정교사 생활로 돈을 벌며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공부했다. 덕분에 수석으로 졸업했다.

졸업 후 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장교를 택했다. 학사장교 1기로 입대했다. 리더십이 있어서인지 동기들로부터 "군단장 같은 소위"라는 말을 들으며 군 생활을 했고, 동기회 회장까지 맡았다.

당시엔 학사장교 제도가 생소해 실력이 있어도 취업이 쉽지 않았다. 나는 취업대책위원장을 맡아 기업의 인사담당자들을 직접 찾아다녔다.

취업희망자 350명 전원이 취업에 성공했다. 그때 무엇이든 기다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헤쳐나가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 사장이 되기 위한 도상훈련

- 1984년 미원(현재 대상그룹)에 입사했다. 매사 일을 할 때 "내가 만약 사장이라면…."이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했다.
덕분에 "과장 같은 신입사원"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지금 생각하면 기업경영을 위한 도상훈련을 한 셈이다.

- 나의 첫 업무는 사료곡물 수입이었다. 개인적으로도 무역에 관심이 많았다. 구매업자들은 흔히 판매상들을 상대할 때 구입가격을 무조건 깎으려고 하기 마련인데 나는 판매상들이 달라고 하는 대로 주었다.

소탐대실(小貪大失)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대신에 판매상들로부터 사료에 쓰이는 옥수수나 소맥 등에 대한 시장정보를 입수했다.

수출국의 생산 동향도 파악했다. 정보가 쌓여 나중에는 수입시장에 공급이 넘칠 때 주문을 내서 평소보다 더 싸게 곡물을 들여올 수 있었다.

판매상들에게 인심도 잃지 않았으니 일석이조(一石二鳥)인 셈이었다. 월급의 3분의1이 집안의 빚을 갚는 데 들어갔지만 일에 몰두했다.

벽 6시에 출근해 밤 12시에 퇴근하는 날이 계속됐다.1978년 프랜차이즈를 국내에 도입한 롯데리아에 관심을 가졌다. "롯데리아처럼 사업을 하면 빨리 성장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프랜차이즈를 공부했다.


- 곡물수입을 하며 돼지, 닭 등에 대해 많이 배웠다. 유통사정도 알게 됐다. 고속으로 승진해 경기도 이천의 사료공장에서 총무과장으로 일했다.

이때 품질·신용·법무 관리 등에 대해 식견을 넓힐 수 있었고, 합리적인 생산지원으로 부임 3년 만에 판매량을 3배 늘렸다.


●목표는 반드시 달성한다

- 94년 미원이 닭 생산업체인 천호 마니커를 인수하면서 미원 마니커의 영업부장으로 발령이 났다.
당시 마니커의 하루 평균 판매량은 채 1만 마리가 되지 않았다. 임원진에게 “발로 뛰는 영업으로 3개월 안에 5만마리로 늘린 뒤 매월 1만마리씩 증대시키겠다.”고 보고했다.

임원진은 믿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실제로 그 해 5월에 5만 마리, 6월에 6만마리, 비수기인 7∼8월에 10만 마리를 달성했다.
내 계획대로 2년 후 13만 마리,3년 후에 20만 마리도 가능했다. 국내 최고의 닭고기 생산업체를 만들 수 있다는 자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 그러나 목표를 달성하려면 생산물량을 제때 소화해 줄 치킨 전문점이 필요했다. 마침 오너도 미국의 맥도널드를 보고 미원을 식품회사에서 외식산업 회사로 키우고 싶어했다.

미원은 이미 생산·유통망을 확보하고 있고, 자금력도 있었다. 미원 식품연구소에서 최고의 맛을 만들 준비도 돼 있었다.
그 정도면 3년 안에 1000개의 프랜차이즈 점포를 만들 수 있다고 자신했다.

- 내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나는 닭고기점 특성에 맞는 소형 점포를 주장했고, 임원진은 그룹 이미지에 걸맞은 대형점을 주장했다.

나는 점포당 2억원을 투자해야 하는 대형점보다 5000만원만 있어도 가능한 소형점이 7배의 투자효율성을 지녔다고 설득했다.

당시 대형업체로서 경쟁관계에 있던 K사는 100개의 점포를 내기 위해 2000억원을 투자했다. 경기도 광명에 모델점을 개설했다. BBQ 브랜드도 만들었다.

그러나 일부 중역들의 계속되는 반대에 부딪혀 사업 자체가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나는 중대한 결심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미원과 내가 만족하는 협력관계 제안

- 아내, 친구들과 상의한 끝에 미원에 사표를 내면서 "사내 사업가"제도의 도입을 건의했다. 마니커는 판매처가 필요하고, 나는 미원이라는 브랜드가 필요하니 서로 돕자고 했다.

미원의 닭고기를 독점적으로 구입하는 만큼 미원의 리스크는 없다고 설득했다. 마침내 95년 9월 친구들로부터 5억원의 투자를 받아 제너시스를 설립했다.

치킨점의 브랜드는 마니커가 소유권을 지닌 BBQ를 그대로 사용했다. BBQ는 "Best Believable Quality",가장 맛있는 치킨이라는 의미다. 회사는 나를 적절히 활용했고, 나도 회사의 인프라를 충분히 이용한 셈이다.

- 치킨 시장은 당시 일부 전문가들의 말처럼 포화상태가 아니었다. 당시에는 치킨이 맥주의 안주쯤으로 간주돼 호프집에서만 팔렸다.

그러나 치킨은 여성과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맛을 지녔다.1㎏짜리 닭고기로 환산하면 우리나라의 연간 닭고기 소비량은 3억 8000만 마리, 1인당 8마리를 먹는 셈이다.

그러나 일본은 15마리, 미국은 45마리, 이스라엘은 60마리다. 우리의 소비량이 적은 이유는 닭고기를 이용한 요리가 다양하게 개발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맹점 사업의 고속 성장

- 창업 2개월만에 경기도 전곡에 1호점을 차렸다. 전곡점을 운영하는 부부는 지금도 나의 고마운 후원자이다.

1호점 개설 후 7개월만에 100호 점을 돌파했다. 다시 3년 3개월만에 1000호 점을 만들었다. 마니커 생산량의 70%를 제너시스가 구입하면서 "갑과 을"의 관계가 뒤바뀌었다.

- 일부 가맹점에선 재료비를 낮춰 낮은 가격으로 승부하자고 했으나 “좋은 재료만이 소비자의 신뢰를 얻는 길”이라고 설득했다.

다른 치킨점들은 수입 냉동육을 쓰지만 BBQ만은 도축 후 하루가 지나지 않은 신선육을 사용한다. 닭고기는 냉동육을 사용하면 맛이 30% 이상 떨어지는 식품이다.

고비용이 반드시 고품질을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고품질은 반드시 고비용이 든다. 맛과 가격에서 우선순위를 정하라면 맛이 우선이다.

맛은 원재료의 품질에서 나온다. 맥도널드 햄버거 대학을 본뜬 치킨 대학을 경기도 이천에 설립했다.12명의 석·박사들이 맛을 연구한다.
양념이 살코기에 깊숙이 스며들게 하는 인젝션(주사)공법도 개발했다.

- 외환위기가 발생하면서 미원 마니커는 워크아웃 업체가 됐다. 새 경영진이 갑자기 BBQ 브랜드를 내놓라고 했으나 일정한 로열티를 물고 계속 사용하기로 했다.


●중국은 프랜차이즈 석권의 교두보

- 국내 가맹점 1350곳을 기록한 지난해 3월 중국에 진출했다. 중국 희망그룹과 손잡고 올 3월까지 상하이 등에 5호점을 차렸다.

BBQ는 중국에 배달점 문화를 도입했다. 오는 2010년까지 1만개의 매장을 만들 계획이다. 그러면 연간 벌어들이는 돈이 2억 2000만 달러에 달한다.

무형의 가치인 기술료만 이 정도이니 이를 매출로 환산하면 40억 달러에 이른다. 국내는 가맹점의 영업반경 보호차원에서 볼 때 꽉 찼다. 가맹점은 5분 거리에 한 개 꼴이 원칙이다.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면 추가로 개설해 줄 예정이다.

- 가맹점을 내면 치킨대학에서 1주일 동안 연수를 받는다. 오픈 때에는 슈퍼바이저(일종의 경영지도책임자)가 4일 동안 현장에서 지도해준다.

창업 1개월 동안은 한 주에 두 차례씩 슈퍼바이저가 가맹점을 찾는다. 한 슈퍼바이저가 25개의 가맹점을 책임지며, 현재 100여명이 있다.
치킨은 무엇보다 맛이 우선이다. 본점에선 CF 및 전단지 광고, 입소문 마케팅을 책임진다. 월 7억∼8억원의 광고비를 쓰고 있다.

조류독감 파동 이후 40일 동안 전국을 돌면서 가맹점 점주들을 만났다. 그들의 의견을 듣고 영업비전을 제시했다.

- 프랜차이즈 사업은 절대 주먹구구식으로 하는 게 아니다. 부존자원이 필요없는 지식산업이다.브랜드화, 마케팅, 운영시스템, 물류시스템, 자금과 조직력 등이 모두 맞아떨어져야 한다.
이런 면에서 제너시스의 프랜차이즈 영업은 새로운 한국형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제너시스는 세계적인 맥도널드보다 모든 것이 3∼4배 빠르다. 제너시스는 올 3월 말 현재 치킨 전문점 "BBQ"가 1600개점, 참숯닭불구이 전문점인 "닭익는 마을" 120개점, 우동·돈가스 전문점 "U9" 10개점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 말 본사 매출 1400억 원을 포함해 연간 매출액이 4000억 원에 이른다. 오는 2020년엔 전 세계에 5만개의 가맹점을 차릴 계획이다.
제너시스의 자본금은 200억 원인데, 투자가 필요한 것도 아니어서 제너시스를 당장 주식시장에 내놓을 계획은 아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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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1,000만 목표로 기획… 할리우드 열어 제칠것"

은행융자까지 받고, 영화사(강제규필름) 사무실까지 작고 먼 곳으로 옮기면서 돈을 모았지만 57억원 밖에 안됐다.

보통 영화라면 넉넉한 돈이지만, 턱도 없었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그렇게 출발했다.

강제규(姜帝圭ㆍ42)감독은 “일단 30%만 찍고, 그것을 보여주어도 투자자가 안 나서면 때려치우자”고 했다.

그의 확신대로 투자자는 나타났고, 영화는 빠른 속도로 관객 1,000만명(7을 돌파했다.
99년 "쉬리"로 한국영화의 블로버스터 시대를 연 그가 또 한번 한국영화의 신화를 쓰고 있다.


* 우선 미담 얘기부터 시작하자. 8일 비전향장기수의 삶을 다룬 김동원 감독의 "송환"의 프린트 5벌 제작비용(1,500만원)을 댔다. "태극기…"가 성공하니 폼 좀 잡으려고 한 것인가.

-“아니다(웃음). 설 자리 찾기 힘든 독립영화와 예술영화, 불우한 영화인을 돕자는 것이다. 어차피 상업영화는 알아서 제 갈 길을 간다.
내가 "송환"을 도운 것도 이런 연장선상에서다. 감독으로서도 존경할 만큼 각고의 노력이 든 작품이다.
1명의 관객이라도 더 보게끔 하자는 취지에서 지원했다. 문화다양성이 인정되는 사회가 건강하며 그런 사회에서 영화와 예술이 발전한다. 대만영화는 예술로만 가서 망했고, 홍콩영화는 장사 좋아하다 망했다.


* "태극기…" 관객이 얼마까지 갈 것으로 예상하고 있나. 네티즌들은 1,100만이라고 하는데...

- “더 가지 않겠나? 개봉한 지 이제 2개월도 안 됐다. 3월안에 "실미도" 기록을 깰 것 같다.

"실미도"는 1,100만명 조금 넘는 수준에서 끝날 것이다. 사실 "관객 1,000만명"은 내 입에서 처음 나온 것이다.

지난해 여름 투자자인 쇼박스 정태성 상무가 촬영현장에서 흥행목표를 어떻게 잡느냐고 물었다. 그때 내가 "1,000만 명은 넘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해줬다.”


* 무슨 근거로 1,000만명을 예상했나.

- " "친구"가 820만 명을 기록했다. 한국의 멀티플렉스(복합상영관) 상황이나 한국영화 인지도 등을 봤을 때 적어도 "태극기…"가 "친구" 이상의 몫을 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우선 작품의 테마가 관객에 어필할 것이고, 시청각적 충격 또한 대단할 것으로 예상했다.
99년 "쉬리" 때도 한국영화가 진일보했다는 쾌감을 안겨줬지만 "태극기…"는 더욱 새로운 진보와 가능성을 확인해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이런 얘기는 일체 하지 않았다. 미친놈이란 소리 들을까 봐.”


* 개봉전 개인적으로 나눈 전화통화에서 흥행보다는 기록이 문제라고 했다. "실미도"를 염두에 둔 것이었나.

- “"실미도"가 잘 된 것에 박수는 보내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실미도"가 잘 되면 잘 될수록 "태극기…"도 좋다고 생각했다.
"실미도"를 1,000만 명이나 봤는데 뒤에 개봉한 "태극기…"를 누가 보겠느냐는 "시장 파이의 논리"는 이미 깨졌다.”


* "실미도"와 "태극기…"는 출발이나 흥행성격 등 여러 면에서 다르다고 생각한다. "실미도"는 처음 의도와 달리 다분히 국내용으로 사회적 이슈를 등에 업었다면, "태극기…"는 처음부터 세계시장을 겨냥했고, 영화의 힘으로 흥행에도 성공했다.

- “나는 영화란 예상한 것과 다르게 결과가 나오면 잘 되도 실패라고 생각한다. 500만명을 예상했는데 1,000만명이 들어오면 실패라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통계적ㆍ사회적ㆍ문화적으로 접근해 시뮬레이션을 해보고, 리스크 관리도 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 강 감독은 "쉬리" 때도 그랬지만, 안 되면 죽는다는 각오로 영화를 만든다. 마케팅비 포함 200억원의 제작비를 갖고 벼랑 끝에서 영화를 만든 소감은 어떤가. 실패하면 어떻게 할 작정이었나.

- “제주도 가서 국수 장사를 해야지…(웃음). "태극기…"를 찍을 때 매일매일 "만약 뒈지더라도 이 영화 찍으면서 후회는 없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이런 기분으로 찍었다. 앞으로도 이처럼 모질고 독하게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 싶다.”


*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가 이렇게 폭 넓게 각광을 받는 이유는 뭔가.

- “한국에서는 영화 관람 결정권의 70%를 여자가 갖고 있는데, 여자는 때리고 싸우는 걸 싫어한다. 설문조사 결과 10~20대는 한국전쟁에 매력을 못 느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렇게 소재주의와 장르주의로 접근하면 답이 안 나온다는 게 내 평소 소신이다. 어떻게 주물러 관객 기분을 끄집어내느냐가 문제다. 관객이 추구하는 것은 뭔가. 감동과 재미다. ”


* 그럼 이 영화에서 감동과 재미는 무엇인가.

- “가족주의에서 비롯되는 감동, 상황에 맞는 캐릭터들의 매력, 스펙터클에서 오는 재미, 사실감과 형제 갈등에서 오는 재미, 전쟁영화가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재미다.”


* 그런 점에서 스스로 이 영화를 몇 점 짜리로 보는가.

- “90점이다. 이 영화에 대해 냉소적이고 비난하는 사람이 많다. 이런 스토리 라인과 메시지를 갖고 기획했을 때부터 예견했던 일이다. 노근리 사건이나 실미도 사태는 그 상황 속에서 있었던 소수 사람들의 이야기라 접근하기가 쉽다.
사실에 충실하면서 극적 리얼리티를 잘 끌고 나가면 뭐라 할 사람이 없다. 사건의 축이 간단하고 심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6ㆍ25는 3년2개월이나 간 전쟁이었다. 영화 100편을 만들어도 모두 담을 수 없다. 그때 이런 전쟁이 있었고, 가족의 아픔이 있었고, 그 아픔이 50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지고 있었구나 하는 것만 보여주자고 생각했다.”


* 여성 관객들은 극중 진태의 애인인 영신(이은주)이 죽는 장면에서 많이 운다. 이런 멜로적 설정도 감동을 염두에 둔 것인가.

- “한국전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민(民)과 군(軍)의 공통된 전쟁이었다. 민과 민이 이데올로기 때문에 오는 비극을 꼭 담고 싶었다.
엄마를 죽일까, 영신을 죽일까 고민했다. 엄마는 그래도 있어야 할 방석 같아서 결국 영신을 죽였다.”


* "태극기…"를 비판하는 쪽에서는 이 영화의 모든 등장 인물들이 남한에 의해 희생되고, 그 과정도 상세히 묘사된다.
반면 북의 폭력성은 단편적이 평면적이다. 그래서 좌익영화라는 말하기도 한다. "쉬리" 때 김정일에게 너무 욕을 먹어서 바꾼 것 아닌가.

-“"태극기…"는 진태와 진석을 따라간다. 이런 구조에서 인민군의 행동을 구체적으로 담기란 불가능하다. "쉬리"는 대립구조, 최민식이라는 상대가 있어 가능했다.”


* 3년2개월을 담은 영화이다 보니 중간에 헐거워 보인다. 압축은 불가능했을까. 영화를 보면서 장동건의 마지막 반전이 어느 시점에 나와야 하는지 감독도 고민했을 것 같다.

- “한번 더 봐라. 안 늘어진다. 그 긴 시간이 모두 현재의 진석이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을 위해서다. 내가 의도했던 바는 50년의 기다림을 가졌던 진석의 아픔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노인 진석이 울 때 울림이 있어야 성공한다고 믿었다.”


* 앞으로 계획은.

- “ "태극기…" 해외반응을 냉정히 지켜보면서 이 단계에서 또 한번 도약하는 아이템을 위해 고민해야 할 것이다.
생각하고 있는 SF 판타지물이 있다. 올해 안에 시나리오 작업을 끝내고 내년에 촬영에 들어갈 계획이다. 강제규필름도 이제는 내가 영화를 열심히 만들 수 있는 곳으로 바꿀 생각이다.”


인터뷰를 끝내면서 이 영화로 얼마나 버냐고 물었다. "실미도"보다 제작비가 2배 이상이어서 속상하겠다고 약도 올려 보았다.

그러자 그는 “돈은 무슨, 내가 뭔 돈을 번다고. 어떻게 내 회사에서 만든 영화를 가지고 얼마를 버느니 받는다느니 할 수 있느냐. 그것은 좋은 선례가 아니다”며 말을 끊었다.

강우석 감독이 “나 돈 많이 벌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이런 모습이 강제규가 천상 감독임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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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년창업 4명 - '열려라, 대박' ] ******************************



인터넷 카드업계를 선도하고 있는 '카드코리아'(www.cardkorea.com· 인터카드넷)의 김경진 (26) 사장은 이화여대 전자공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지난 98년 일찌감치 창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아르바이트로 학교 교수님들과 기업들의 인터넷 홈페이지를 제작하던 김씨는 당시 미국에서 인터넷 카드사업이 커지는 것을 보고 학교 동아리방에서 친구들과 함께 창업을 결심했다.

당시만 해도 인터넷 카드는 국내에서는 아직 낯선 분야였으나 다행히 네티즌들의 반응이 좋아 회원수가 급증했다.

다음·심마니·오르지오 등 포털 사이트들도 앞다투어 카드코리아에 인터넷 카드 서비스를 요청했다.

하지만 김 사장은 보다 안정적인 수익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플래시 애니메이션(인터넷상의 움직이는 그림)을 새로운 사업 분야로 개척했다.

“요즘은 기업들이 사사(社史)를 편찬하거나 홍보물을 제작할 때 따분하게 글과 사진으로 구성하는 대신 플래시 애니메이션을 이용해 그림동화나 만화처럼 독자가 보기 쉽게 만든다”는 것이 김 사장의 설명.

또 은행들 중에는 인터넷 사이트에 새로운 금융상품을 소개할 때 플래시 애니매이션을 사용, 소비자들이 쉽게 상품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플래시 애니메이션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회사도 빠르게 성장했다. 직원수가 8명으로 늘어났고, 지난해 매출액은 5억원에 이르렀다.

김 사장은 “지난해 연구개발에 투자를 많이 하는 바람에 이익을 내지 못했지만 올해부터는 순이익을 낼 수 있을 것”이라며 “플래시 애니메이션의 품질을 높여 이 분야 최고 기업을 만드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20대에 일찌감치 창업전선에 뛰어드는 청년 기업가들이 최근 늘어나고 있다.

이들 청년 창업자의 특징은 인터넷을 이용해 적은 비용으로 창업을 하고,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재미있게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사업으로 연결된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아이유(IYU)'의 박치영 (28) 사장은 인터넷을 이용, 해외 유명 브랜드 제품을 판매 중이다.

박 사장은 지난해 1월 단돈 10만원으로 창업했다. 도매가 10만원짜리 버버리 지갑을 구입, 인터넷에 20만원에 팔겠다고 내놓자 5분도 안돼 주문이 들어온 것.

이렇게 해서 차츰 돈을 모은 박 사장은 몽블랑 안경테, D&G(돌체앤가바나) 셔츠, 구찌 선글라스 등 제품을 다양화했다.

특히 박 사장은 명품 브랜드 제품 중 눈에 잘 보이지 않는 흠이 있는 제품을 본사에서 직접 구입, 저렴한 가격에 판매해 소비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는 “남성정장 브랜드 이탈리아 ‘제냐’의 넥타이 중 올이 한 줄 빠진 것과 같은, 눈에 거의 띄지 않는 흠이 있는 제품을 들여와 개당 3만원에 공급했더니 순식간에 팔렸다”고 말했다.

박 사장은 자체 인터넷 사이트(www.babyelf.co.kr)를 만드는 것은 물론, 옥션 등 경매와 판매를 전문으로 하는 인터넷 사이트를 적절히 이용해 제품을 유통시키고 있다.

이렇게 해서 그가 버는 돈은 월 3000만원 정도. 이 중 1000만원 정도가 순이익이다. 박 사장은 별도의 사무실을 두지 않고 인터넷 전용선이 깔린 자신의 집(아파트)을 사무실로 이용하고 있다.

직원은 박 사장과 여자친구 단 둘뿐이다. 소비자들 중에는 제품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집으로 직접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
박 사장은 초기에 일본의 명품 유통업체를 통해 제품을 들여왔으나 지금은 해외 명품 회사들과 인터넷을 이용해 직거래하고 있다.


온라인 게임회사인 ㈜컴프로자드의 정언산 (25) 기술담당 이사는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학생이었다.

인제대 컴퓨터공학과 97학번인 정 이사는 이미 중학교 시절 컴퓨터 게임에 푹 빠져 장래 희망을 게임사업가로 정하고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학우들과 동아리 '컴프로자드'를 만들어 게임 개발에 몰두했다.

컴프로자드는 영남지역의 학생 기술 경진대회를 대부분 휩쓸었고, 2000년에는 중소기업청이 주최한 전국 대학생 창업 경진대회에서도 상을 받았다. 정 이사는 졸업 직전 컴프로자드 회원들과 상의해 동아리를 아예 기업으로 바꾸고 학교가 제공한 창업보육센터에 입주했다.

이어 2001년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제1회 중소 벤처 창업 박람회'는 컴프로자드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당시 박람회를 찾은 투자자(현재 컴프로자드 윤동현 사장)가 컴프로자드가 전시한 게임사업을 보고 투자를 결정한 것.

정 이사와 컴프로자드 직원들은 서울로 올라와 서초구 잠원동에 사무실을 얻고 게임 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최근 이 회사가 개발한 온라인 게임 '채틱스'는 국내는 물론 일본에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고, 중국·대만과는 공급계약을 체결한 상태다.

또 여러 사람이 인터넷에 동시에 접속해 할 수 있는 온라인 게임 '탕'도 개발 중이다. 컴프로자드의 지난해 매출은 7억9000만원, 순이익은 8000만원 선.


이화여대 정문 앞에서 초콜릿 전문점 '코코핑코'를 운영 중인 김연경 (27) 사장도 일찌감치 창업대열에 합류한 사례에 속한다.

대학에서 의류디자인을 전공한 김 사장은 졸업 후 완구회사에서 3년간 캐릭터 디자인에 전념하면서 같은 상품이라도 특별한 캐릭터와 함께 선보이면 소비자에게 더 빠르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평소 과자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캐릭터를 결합한 과자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마침 국내에 들어와 있던 일본인 전문가에게 초콜릿과 쿠키 등 과자 만드는 법을 체계적으로 배웠다.

지난해 11월 문을 연 코코핑코는 평일 50명 안팎의 손님이 다녀가는 등 예상외로 빠르게 손님을 모으고 있다.
특히 올해 초콜릿 특수(特需)가 발생한 밸런타인 데이에는 수백명의 고객이 몰려드는 바람에 판매 중인 초콜릿 상품이 바닥났다고 한다.

김 사장은 “어린이 날과 어버이 날, 스승의 날이 함께 들어 있는 5월에도 초콜릿 수요가 급증할 것으로 본다”며 “기념일의 분위기에 맞는 캐릭터 초콜릿 제품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코코핑코의 월 매출액은 1000만원, 순이익은 300만∼400만원 선.


<< 20대 창업 특징 >>

▶소비자와 쉽게 만날 수 있는 인터넷 환경을 적극 활용

▶취미·적성·전공을 살려 창업

▶적은 비용으로 사업시작

▶20대 초반부터 체계적인 준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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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재형 프라임 대리운전 사장 ] ******************************



2003년 5월9일! 추재형씨(35)에게 이날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2000년말 자의반 타의반으로 8년간의 샐러리맨 생활을 떨치고 나와 '백수'로 보낸 2년여의 시간에 마침표를 찍은 날이기 때문이다.

추씨는 이날 서울 종로구 통의동에 위치한 영연빌딩 4층 한 귀퉁이(4평남짓)에 '프라임 대리운전'이란 회사를 차렸다.

"창업한뒤 5개월을 이를 악물고 버텼다"고 그는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리운전업은 무한경쟁이 벌어지는 대표적 업종이다.

추씨의 영업구역이랄 수 있는 종로 일대에서 영업하는 대리운전업체수만 15개.

여기에 불황까지 겹치면서 남는게 거의 없는 사업으로 치닫고 있다.

최근 업계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는 대표적인 출혈경쟁이 서울 전지역의 '2만원 서비스'.

대리운전자가 대중교통을 놓쳐 택시를 탈 경우엔 남는게 없다는걸 모르는 업체는 없다.

하지만 일단 가격을 후려치면 그 업체가 문을 닫을때까지 따라갈 수 밖에 없는게 이 업계의 생리다.

추씨는 여러 고비를 넘겨 이제 자기 회사가 어느정도 자리를 잡았다고 자평한다.

현재 직원수는 15명.

종로일대 술집 카페 등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꾸준히 영업을 펼친 결과 고정고객도 생겼다.

하루 평균 콜(주문)수가 40∼50건 정도.

콜당 대리운전자로부터 사납금 5천원을 떼면 하루 수입은 평균 20만∼25만원.

사무실임대료 전화비와 같은 경비를 제외하면 월 3백∼4백만원을 번다.

창업후 두달간은 적자였다.

석달이 지나서야 몇푼이나마 손에 쥘 수 있었다.

추씨는 현재 4평 남짓했던 사무실을 10평대로 확장키로 하고 임대계약을 마쳤다.

새 사무실에는 직원들의 휴식공간이 마련된다.

박 터지는 경쟁상황을 감안하면 창업 5개월치곤 놀라운 성장이라고 이 바닥에선 평가한다.

추씨는 창업하기전 6개월을 대리운전자로 일했다.

이때 이 사업의 노하우를 터득했다.

창업에 앞서 영업구역의 잠재고객수를 파악해 보기로 했다. 3개월동안 밤마다 종로 일대의 유흥가를 돌아다녔다. 시장조사를 위해서였다.

음식점 술집 카페 등의 업소 숫자를 꼼꼼히 체크했다. 틈틈히 업소 주인들과 얼굴을 익혔다.

대리운전업은 이들 업소 주인과의 인간관계가 사업의 성패를 좌우한다. 다른 지역에서 문을 연 대리운전업체와 업무제휴도 맺었다.

종로일대를 제외한 지역에서 주문이 접수되면 협력업체들에 넘기기 위해서다. 괜히 욕심부렸다간 남는 것도 없고 단골고객도 놓치기 십상이다.

현재 서울시내 협력업체수는 13곳.

추씨는 앞으로 여력이 생기면 이들 협력업체를 지점으로 대체해 나갈 계획이다. 눈에 띄는 전화번호도 선점했다.

추씨는 무료전화서비스(080)중 현재 사용중인 2004-365에 이어 2005-365도 미리 확보해 놓았다.

추씨는 또 업계 최초로 도입한 '대리운전 실명제'를 실시하고 있다.

대리운전 기사들로 하여금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적은 개인명함을 만들어 손님들에게 건넬 수 있도록 한 것.

이 제도는 예상밖의 효과를 내기 시작했다. 손님들과 기사들간 신뢰가 쌓이면서 이 업계 최대 골칫거리인 기사 이직률이 크게 줄었다.

기사들을 통한 개인 콜이 증가하면서 회사 수입도 자연스레 늘고 있다.
(080)2004-365


* 어떻게 해냈나... *

추재형씨는 창업을 생각한 적도 없는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다.

1993년 중앙대학교 기계공학과를 졸업한뒤 곧바로 대기업인 대우조선에 어렵잖게 입사했다.

그리고 2001년 사표를 내기 전까지 영업설계 파트에서 엔지니어로 8년동안 일했다. 추씨의 직장생활은 IMF 환란을 계기로 금이 가기 시작했다.

당시 대우그룹은 계열사 일부 사원들을 1년가량 대우자동차 세일즈맨으로 돌렸다. 엔지니어였던 추씨도 이때 영업사원으로 외도(?)를 했다.

자동차 세일즈를 통해 안면을 익혔던 고객 몇사람에게 보증을 선게 화근이었다. 추씨가 떠안게 된 연대보증 금액만 무려 1억여원.

월급이 압류당해 매달 월급 절반이 자동으로 공제됐다. 채권자들의 독촉전화는 저승사자의 호령과 같았다.

그는 "IMF전만 해도 보증은 쉽게 서주는 것이었고 지금처럼 무서운게 아니었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2년간을 버티다 사표를 냈다. 2년간 백수 생활을 하면서 PC방 고시원 등을 전전했다.

사우나에서 표를 받기도 하고 제빵업체에서 빵을 굽기도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6개월간 대리운전을 한 게 창업의 계기가 됐다.

그는 "대리운전업계 생리를 구석구석 알게되니 답답한게 많았고 내가 하면 잘 할 자신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는 종로일대를 영업구역으로 정하고 시장조사를 했다. 3개월의 시장조사후 창업에 속도를 붙였다.

5월초 종로세무서에 '간이과세자'로 사업자등록을 했다. 간이과세자는 세금면제 혜택을 받기 때문이다.

문제는 7백만원에 불과한 종잣돈. 이 돈으로 회사 차리기가 불가능할 것 같았지만 한번 도전해보기로 했다.

보증금 없이 월 80만원에 4평짜리 사무실을 얻었다. 5백만원을 주고 중고 산타모도 샀다.

080전화를 4대 신청했다. 전화비를 제외한 월 사용료는 대당 4천원.

협력업체와 연락할 전용 휴대폰과 홍보전단지 제작까지 끝내고 나니 가진 돈 7백만원이 동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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