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취미로 하는 홈피서 年4억 수입 ] *****************************



[홈피의 强者들] 인라인 스케이팅의 박순백 드림위즈 부사장

2003년. 인라인 스케이팅이 붐이다. 인라인 스케이트는 자전거 전용도로와 시민공원 뿐 아니라 거리를 점거했다.

한국에서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은 대략 600만명으로 추산된다. 인라인 스케이팅 정보로 가득찬 박순백(50) 드림위즈 부사장의 개인 인터넷 홈페이지(spark.dreamwiz.com)는 이같은 '인라인 붐'의 정점(頂點)에 서 있다.

그의 홈페이지는 월별 사이트 순위정보를 제공하는 랭키닷컴(www.rankey.com)이 지난달 31일 집계한 '시간당 방문자 순위'에서 549위를 차지했다.

최상위권 사이트는 대부분 각종 포털사이트나 언론 매체이고 보면 그의 홈페이지의 선전은 주목할 만하다. 이 홈페이지의 하루 페이지뷰는 약 40만건. 방문자가 가장 많은 월요일의 경우 65만 페이지뷰를 넘는다.

특히 인라인 관련 사이트에서 그의 홈피의 점유율은 57.74%. 그는 홈페이지의 인기 비결에 대해 “우리나라 인라이너들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면 그만큼 매체 파워가 생긴다. 매체 파워는 구매력으로 연결된다. 얼마 전 그의 홈페이지에서 '인라인복 공동구매'를 실시했던 한 회사는 단 2주만에 2억원 이상의 매출액을 올렸다.

박순백 부사장이 “업체도 놀랐지만 운영자인 내가 더 놀랐다”고 말할 정도다. 그는 “그 어떤 이보다 인라인에 관심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간이다 보니, 인라인 관련 상품에 대한 구매력은 놀라울 정도”라며 “막상 내 눈으로 보기 전까진 (사람들의 구매력을) 실감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 박순백 드림위즈 부사장의 다양한 인라인 스케이팅 모션과 겨울에 즐기는 스키.

그는 지난 1996년 7월 홈페이지를 첫 오픈했다. 당시 한글과 컴퓨터에 상무이사로 일하던 그에게 이찬진 사장은 “윗사람이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어 모범을 보이라”고 했다.

당시 한글과 컴퓨터는 개인 홈페이지 만들기를 독려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스키광(狂)인 박 부사장은 “달리 쓸 것도 없어” 홈페이지에 스키 관련 칼럼과 정보를 싣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스키는 겨울이 아니고서야 탈 수가 없었다. 그는 스키 비(非)시즌 운동으로 인라인 스케이팅에 착안했다.

그는 “외국선 대부분 스키를 만드는 회사가 인라인 스케이트를 만든다”며 “스키에 관심을 갖다 보니, 이들 회사에서 만드는 인라인 스케이트에도 관심이 쏠렸다”고 설명했다. 책도 보고, 외국 비디오도 보면서 그는 혼자 인라인 스케이트를 익혔다.


▲ 박순백 드림위즈 부사장의 홈페이지 spark.dreamwiz.com 초기화면

1998년 봄 그는 홈페이지에 “인라인 스케이팅 배우고 싶은 사람, 모여라”라는 글을 올렸다. 그리고 1999년까지 매주 주말이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인라인 스케이팅을 무료로 가르쳤다.

처음에는 단 5명으로 시작했던 강습은, 2년 만에 각각 5000명이 넘는 회원이 가입한 동호회 '스키 플러스 인라인'과 '아름다운 바퀴'를 탄생시킬 정도로 성공을 거뒀다.

“인라인은 어디에서든 탈 수 있고 경비도 많이 들지 않습니다. 마라톤처럼 즐기는 운동이되, 마라톤보다 스피드를 느끼는 맛도 있구요. 42.195㎞의 경우, 마라톤으로는 3∼4시간 걸리지만 인라인으로는 1시간 30분이면 주파가 가능하지요.”

그의 인라인 스케이팅 예찬은 끝이 없다. 그는 그러나 “인라인 붐은 인터넷 붐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말했다.

인라인 스케이팅의 인기는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이 '생소한' 인라인을 접하고 이에 대한 정보를 공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 그의 홈페이지는 이처럼 인라인을 알리는 '매체'가 됐다는 설명이다.

업계 사람들은 그의 홈페이지의 매체 파워를 높이 평가한다. 그는 매일 광고 수익으로 100만원 이상을 올리고 있다.

박 부사장은 “내 연봉보다 홈피 광고 수익이 높을 정도”라며 웃었다. 그가 처음 광고를 게재한 것은 서버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였다. 일반 서버로는 용량이 모자라 서버를 늘려야 했기 때문. 이제는 광고만으로 서버 비용을 충당하고도 남는다.

그는 지난주 '인라인 스케이팅'(넥서스 북스)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은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은 3일 온라인 서점 '알라딘'의 레저·스포츠 분야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그는 “내 홈페이지의 광고 덕분”이라고 했다. 박 부사장은 매년 외국의 유수 인라인 스케이팅 업체들로부터 인라인 스케이트 등을 협찬받고 있다.

업체들이 그의 홈페이지가 인라인 스케이트 업계에서 대중에게 갖는 파급력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스포츠 고글을 생산하는 '딥스'는 그의 인터넷 홈페이지 이름을 따서 '딥스 스파크(spark)'라고 하는 고글을 제작하기도 했다.
한 미국 인라인 업체는 내년에 '닥터 스파크'라는 스케이트를 선보일 계획이다.

박 부사장은 “프로 선수도 아닌데, 홈페이지 덕분에 인라인 스케이트까지 공짜로 얻어타고 책까지 내게 됐다”고 웃었다.

그는 그러나 “발빠른 마케팅으로 소문난 외국 업체들이 괜히 인라인 스케이트를 제공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개인 홈페이지 하나가 시대의 유행(流行)을 선도하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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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아있는 신화…스티브 발머의 MS 성공신화 ] ************************



< 30년 우정 ‘바늘과 실’>

스티브 발머(오른쪽)와 빌 게이츠. 발머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창업공신'은 아니었지만 대학 시절 친구인 게이츠를 도와 '컴퓨터 왕국'의 신화를 완성했다.


한신(韓信)이 없는 한(漢)제국, 정도전이 없는 조선을 생각하기 힘들 듯, 스티브 발머 없는 마이크로소프트(MS)사는 생각하기 힘들다.

그가 누구인가? 스위스 출신 고졸 이민자 부모 밑에서 태어나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을 중퇴한 뒤 P&G 제품담당 매니저를 거쳐 1980년 MS사에 입사해 사장을 거쳐 최고경영자(CEO)가 됐다. 2000년 1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빌 게이츠에게서 MS사의 모든 운영권과 CEO 직위를 넘겨받은 것이다.

그런 스티브 발머를 집중 조명한 이 책의 원서 제목은 흥미롭게도 'Bad Boy Ballmer'다.

'시대의 반항아 발머', '악동 발머', '나쁜 녀석 발머' 등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빌 게이츠가 MS사의 비전을 제시하는 슬로건 주창자라면 발머는 '손에 피를 묻히는' 해결사다.


'나쁜 녀석' 발머는 협력관계를 유지하던 기업의 뒤통수를 치거나, MS사의 시장을 위협하는 상대를 군대식 전술로 무자비하게 초토화하기도 했다.

신제품 출시일을 사실상 조작해서 훨씬 일찍 발표하는 일도 다반사였고, 심지어 한때 파트너였던 IBM과 협상하면서 도청장치를 설치했다가 발각당한 일마저 있었다.

"나에겐 적 아니면 아군뿐이다!"라는 발머의 외침에 그런 모습이 집약돼 있다.


"티브 발머, 그를 보면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생각난다”는 저자의 말대로 발머의 얼굴은 무척이나 다양하다.

그 가운데 인재 등용에서 탁월한 발머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MS사가 기업공개를 실시한 1986년 이후 채용된 어느 직원의 말이다.

"발머의 인터뷰는 정신감정을 해봐야 할 정도로 어이가 없었죠. '왜 맨홀 뚜껑은 둥근가?'. '미국에 주유소가 몇 개인가?'등과 같은 질문을 하곤 했어요.
이는 단지 어떤 식으로 대답하는지 보기 위한 질문이었죠."

그렇다면 발머 자신은 인사 문제에 관해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을까?

"우선 사람을 제대로 골라야 한다.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고,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 보고 나서 믿을 만한 사람을 골라야 한다. 그러고 나선 그들을 들들 볶아라.", "처음 3년 동안 나는 모든 지원자를 직접 인터뷰했어요. 내가 곧 인사부였고, 나를 거치지 않고는 채용될 수 없었죠.
똑똑하고 의욕 넘치는 인재를 뽑아 하나의 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74년 하버드대 기숙사에서 빌 게이츠와 처음 만난 이후 30년의 세월에 걸쳐 우정과 사업의 파트너십을 쌓아 온 발머는 게이츠의 분신으로도 일컬어진다.

자신들의 관계를 '결혼'으로까지 묘사한 이들을 저자는 흥미롭게도 프로이트 심리학의 에고(ego·자아)와 이드(id·본능)로 파악한다.
게이츠가 MS사의 에고라면 발머는 이드라는 것이다.

어떤 독자들과 궁합이 잘 맞는 책일까? MS사, 나아가 정보통신산업의 현재와 미래를 가늠해 볼 목적으로 전략적 독서 또는 실용적 독서를 할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좋은 의미의 시시콜콜함을 만끽하면서 읽는 즐거움을 누릴 수도 있다. 요컨대 엔터테인먼트로서의 독서를 할 수도 있다. 문장의 걸음이 경쾌하고 발랄하며 재치도 만만치 않다.


빠르게 전개되는 수작 인물 다큐멘터리를 감상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건 경제경영서 번역에서 두각을 나타내 온 번역자의 솜씨 덕분이다.

물론 저자 프레드릭 맥스웰의 부지런한 발품이 각별하기도 하다. 그는 어린 시절 발머와 길거리농구를 함께 즐겼던 친구부터 시작해 발머와 사적, 공적으로 접촉했던 거의 모든 사람들과 인터뷰했다.
'MS사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통찰'이란 찬사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스티브 발머는 누구인가 ▼


1956 스위스계 고졸 이민자의 아들로 출생

1973 4.0점 만점으로 컨트리 데이 고교 졸업, 하버드대 진학

1974 하버드대 기숙사에서 빌 게이츠와 첫 만남

1976 문예지 ‘하버드 애드버킷’ 발행자가 됨

1977 대학 졸업, P&G 식품사업부 입사

1979 P&G 퇴사, 스탠퍼드 경영대학원 입학

1980 마이크로소프트(MS)사에 28번째 사원으로 입사

1983 MS ‘윈도’ 마케팅전 대성공

1986 MS 나스닥 상장, 첫날 주가 25% 급등

1998 마이크로소프트 사장 취임

2000 마이크로소프트 CEO 취임

2003 현재 세계 4위 부자(개인재산 160억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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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스 에디슨 !! 그는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발명가임을 누구나 알고 있다. 나 역시도 그를 그런 정도로만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그의 노력, 열정, 집념을 되새겨볼 때 이제는 내가 가장 존경해야 될 한 사람으로 영원히 기억하고 싶으며 한달여 동안 그의 전기를 읽고 간단히 정리해 본다.

* 에디슨 (Edison, Thomas Alva ; 미국의 발명가)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이다.
에디슨은 84년 생애 동안 무려 1천93개의 발명품을 남겼으며, 기록한 아이디어 노트만 해도 3천4백권이나 된다. 하루 20시간을 연구에 몰두했고 백열전구에 알맞은 필라멘트를 구하기 위해 6천여 종의 식물을 탄소처리할 만큼 열성을 보였다.


▶ 에디슨의 일화

토마스 에디슨은 1000종 이상을 발명했다. 이 많은 발명을 위해서 에디슨은 수백만번의 실패를 거듭했다.
에디슨은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전구를 완성하기 위해 9,999번이나 실패를 했다.
한 친구가 "자네는 실패를 1만번 되풀이할 작정인가." 라고 물었다.
그러자 에디슨은 "나는 실패를 거듭한 게 아니야. 그동안 전구를 발명하지 않는 법을 9,999번 발견했을 뿐이야." 라고 대답했다.

에디슨은 만년에도 매일 16시간 일했다. 그는 자기가 유별난 체질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게으르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한정된 인생의 귀중한 시간을 너무나도 많이 수면으로 낭비하고 있다고 입이 마르도록 안타까워했다.

또한 그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극히 작은 양의 식사를 섭취했으며, 다른 사람에게도 식사를 줄이도록 하라고 권유했다.

에디슨은 84년 생애 동안 무려 1천93개의 발명품을 남겼으며, 기록한 아이디어 노트만 해도 3천4백권이나 된다.

하루 20시간을 연구에 몰두했고 백열전구에 알맞은 필라멘트를 구하기 위해 6천여 종의 식물을 탄소처리할 만큼 열성을 보였다.

에디슨은 발명가의 일 외에도 또 하나 전념 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심령의 세게에 대한 연구였다.

초능력의 세계를 믿었던 그는 이 세계를 떠난 영혼의 모습이나 목소리를 기록하고 교신하는 목적의 기계를 만들기 위해 몰래 연구를 했다고 한다.


▶ 평생을 노력한 99% 노력의 천재!

'천재란 1%의 영감과 99%의 땀이다' 라는 그의 일생 동안의 신조는 지금까지도 잘 알려있다.

대학강의를 경멸했고 보통교육에 관해서도 현재의 시스템은 두뇌를 하나의 틀에 끼워 넣는다. 독창적인 사고가 길러질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물건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는 것이다>라고 비판하였다.

만년에는 <나는 발명을 계속할 돈을 손에 넣기 위해 항상 발명하는 것이다>라고 술회하여 끊임없이 창조 활동을 계속하였던 끈질긴 발명가의 심경을 엿보게 한다.
밀란에 있는 그의 생가는 사적이 되었고, 미시간주 디어본으로 옮긴 멘로파크실험실과 웨스트오렌지실험실은 각각 박물관이 되었다.


▶에디슨의 연표

1847년 --- 2월 11일 오전3시 미국 오하이오주의 밀란에서 태어났다.
1854년 7세 --- 에디슨 일가는 포트휴론으로 옮기다.
1856년 9세 --- 학교에서 저능아라고 해서 국민학교를 중도(입학 후 3개월)에서 퇴학하다.
1859년 12세 --- 그랜드 트렁크 철도의 신문팔이 소년으로 돌벌며 공부하다.
1862년 15세 --- 열차 안에서 신문을 발행하다. 열차 안에 화재를 일으키다. 마운트 클레멘스 역장 아들을 위기에서 구해내다. 이 고장에 사설 전신국을 열다.
1863년 16세 --- 마운트 클레멘스 역의 전신기사 견습으로 일하다.
1864년 17세 --- 이 해부터 4년간, 전신기사로서 미국 중부와 서부지방을 방랑하다.
1868년 21세 --- 투표기록기를 발명해 내다.(이것으로 처음으로 특허를 얻다.)
1869년 22세 --- 뉴욕으로 가다. 금시세 표시기 회사의 지사장이 되다. 독립하여 포프-에디슨 전기회사를 설립하다.
1870년 23세 --- 주식(증권) 표시기를 발명하고, 뉴욕에 연구소와 공장을 세우다.
1871년 24세 --- 어머니 낸시가 세상을 떠나다. 이 해에 타이프라이터를 발명 또한 인자(印字)전신기를 발명해 내다.
1872년 25세 --- 2중 전신기를 발명하다.
1873년 26세 --- 메리 스틸웰 양과 결혼하다.
1874년 27세 --- 4중 전신기를 발명하다.
1876년 29세 --- 멘로파크에 발명 연구소를 짓고서 그곳으로 옮기다. 탄소 송화기에 의한 전화를 발명하다.

*참고: 전화는 벨이 발명했다지만, 실용적인 것은 에디슨의 이 탄소송화기가 주류를 이루도록 사업적으로 성공했다.

1877년 30세 --- 축음기를 발명하다.
1878년 31세 --- 전등의 발명에 착수하다.
1879년 32세 --- 10월 21일, 처음으로 백열전등을 발명하다.
1880년 33세 --- 신식 발전기 및 전등의 부속품을 발명하다. 하늘을 나는 헬리콥터와 비슷한 것을 연구하고 그 설계도를 만들어 내다.
1881년 34세 --- 멘로파크 연구소 내에 있는 빈 터에서 전차의 연구를 하다.
1882년 35세 --- 뉴욕시에 처음으로 전등을 켜다.
1884년 37세 --- 메리 부인이 죽다. [에디슨 효과]의 발견.
1885년 39세 --- 무선전신을 발명하다.
1886년 39세 --- 마이너 밀러 양과 재혼을 하다.
1887년 40세 --- 연구소를 뉴우저어지주 웨스트 오랜지로 옮기다. 활동사진의 발명에 착수하다.
1890년 43세 --- 원반식 레코드의 연구를 하다.
1891년 44세 --- 활동사진을 발명하다. 파리 만국 박람회에 가다. 에디슨식 선광법에 의해서, 철광산을 경영.
1898년 51세 --- 철광산 사업에 실패. 시멘트 사업을 일으키다. 축전지의 발명에 착수하다.
1903년 56세 --- 축전지의 발명에 고심을 거듭하다.
1904년 57세 --- 축전지의 연구를 계속하여 그 실험 횟수가 이미 30,000회나 되풀이 되었으나, 아직 성공을 못했다.
1909년 62세 --- 10년 동안의 고생이 그 열매를 맺어 이 해에 겨우 알칼리 축전 지를 발명해 내다.
1910년 63세 --- 원반식 레코드를 발명하다.
1912년 65세 --- 무성 영화(키네토폰)를 발명하다.
1914년 67세 --- 전화 축음기 및 원반 축음기를 만들어 내다. 합성 페놀을 발명하여 그 공장을 설치하다.
7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다. 웨스트 오렌지 연구소가 화재로 불타다.
1915년 68세 --- 미합중국 해군 고문 위원회의 총재가 되다.
1917년 70세 --- 연구소의 일들은 조수들에게 맡기고 정부를 위해서 군사적 발명에 몰두하다.
1928년 81세 --- 잡초 속에서 고무 즙액을 뽑아내는데 성공.
1929년 82세 --- 에디슨 장학 자금 제도를 마련하다.
1930년 83세 --- 이해 겨울에 폐렴에 걸려서 후유증이 오래가 큰 병이 되다.
1931년 84세 --- 10월 18일, 글렌몬트의 자택에서 이 세상을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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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랜차이즈로 10억 벌수 있다 !! ] ******************************



최근 `10억 벌기` 신드롬이 열풍처럼 번지고 있다. 미화 약 100만 달러와 맞먹는 10억이 부자를 상징하는 지표가 된 셈이다.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그저 재테크나 로또 당첨을 통해 부자를 꿈꾸기도 하지만 현실은 그리 만만치 않다.

평범한 사람이 10억 부자가 되기란 과연 불가능한 것일까?
눈을 돌려 주위를 살펴보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각종 점포들이 이를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창업개발연구원 유재수 원장은 “프랜차이즈는 작은 것이 서로를 도와주는 형세로 큰 것을 제압하는 경이로운 성공 메커니즘”이라며 10억 벌기의 한 방법으로 `프랜차이즈` 사업을 지목했다. 프랜차이즈 사업을 통해 부자의 반열에 오른 3인의 성공 스토리를 소개한다.


◇`원할머니보쌈` 박천희 사장

- 음식장사의 관건인 `맛` 살리기 위해 연구 거듭

원할머니보쌈은 서울럭黎?지역에만 150여 개의 가맹점을 거느리고 있는 견실한 프랜차이즈 회사다.

단일지역 최다 가맹점을 보유하고 있는 원할머니보쌈은 `맛` 하나로 승부수를 걸던 작은 보쌈집에서 시작했다.

장사가 잘된다는 입소문에 여기저기서 가게를 내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박천희 사장은 일절 요청을 무시했다. 가게 하나를 운영하기도 벅찼던 까닭이다.

하지만 사회가 변하고 있음을 감지한 박 사장은 지난 91년 8월 `원유통`을 설립하고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했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그런데 의외의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해물이 많이 첨가된 보쌈김치는 하루만 지나도 그 맛이 변질된다는 것.

`음식장사의 최고 관건은 맛`이라는 신앙에 가까운 생각을 가지고 있는 박 사장에게 이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박 사장은 이후 연구를 거듭해 김치의 유통기한을 1주일로 연장시키는 보관법을 개발했다. 10년만의 쾌거였다. 이를 통해 전국적으로 점포망을 확대할 수 있게 됐다.

원할머니보쌈의 가맹 희망자들은 본점의 소문을 듣고 찾아와 계약을 맺는 것으로 유명하다.

확실한 성공 모델을 가맹점주들에게 보여주며 가맹점들이 지속적으로 이익을 내게 도와주고 있는 박 사장.

그가 직영하는 청계8가 본점에서 하루 팔리는 보쌈은 2,500∼3,000인분. 324개의 좌석이 마련된 본점에는 오늘도 앉을 자리가 없다.


◇`와바` 이효복 사장

- 젊은 감성에 정통, 독창적인 가맹점 지원 전략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이효복 사장은 소위 남들이 말하는 `장사를 아는 인테리어업자`였다.
하지만 97년 외환 위기을 맞아 시공 주문이 끊기고 심지어 잔금도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99년 이 사장은 궁여지책으로 세계맥주 전문점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했다. 인테리어 잔금을 못 받는 상황만큼은 없으리라는 비교적 단순한 생각에서였다.

현재 그는 국내에 100개가 넘는 가맹점과 중국에 3개의 가맹점을 거느린 잘나가는 프랜차이즈 회사 사장이 돼있다.

`와바(WABAR)`는 정통 웨스턴 스타일의 맥주바에서 세계 각국의 맥주를 즐길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의 맥주전문점이다.

생맥주와 치킨 안주에 익숙했던 젊은 세대들은 세계 각국의 맥주를 골라 먹는 재미와 원목을 사용한 정통 웨스턴 스타일의 인테리어, 다양한 이벤트 등 와바의 새로운 컨셉에 열광했다.

이 사장은 “프랜차이즈 가맹본부는 가맹점의 매출 증대와 효율적인 점포 운영을 위해 적극적인 가맹점 지원정책을 펴야한다”고 말한다.

즉 가맹점 `지원`이 `개설`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토요일 오후의 `솔로탈출파티`, `명예의 전당`, `꾹타임 이벤트`, `로즈데이&레이디 페스티벌` 등이 와바만의 독창적인 가맹점 지원전략이다.


◇`앙뜨리 포토뱅크` 김종래 사장

- 기발한 아이템, 다양하고 적극적인 마케팅 전략

`애니메이션 포토 앨범`, `시뮬레이션 만화영화`, `베이비 포토샵`등 톡톡 튀는 아이템의 모든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은 김종래 사장이다.

밤을 새워가며 정교하게 가다듬은 개발상품이 세상에 나가자 언론의 관심은 대단했다. 자연스레 예비창업자들의 주목을 끌었고 1999년 후반부터는 본격적인 프랜차이즈 사업을 펼칠 수 있었다.

김 사장은 사업 첫해인 1999년 하반기에만 12개의 가맹점을 만들고 이후로도 승승장구, 현재는 90여 개의 가맹점을 거느리고 있다.

1999∼2000년 2년 사이 유사 경쟁업체들이 생겨났지만 최근까지 살아남은 업체들은 없다. 김 사장은 이 원인을 `마케팅의 차이`라고 분석한다.

4개의 아이템을 묶어서 제공할 뿐 아니라 고객을 찾아가는 다양하고 적극적인 마케팅 전략은 앙뜨리 스튜디오가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김 사장은 “프랜차이즈는 시스템과 노하우 사업”이라며 “프랜차이즈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상호, 상표, 제품, 서비스, 마케팅, 판매방법 노하우 등 일련의 시스템이 구축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난해 여름부터 본사의 프랜차이즈 시스템을 미국, 중국, 포르투갈 등 3개국에 수출한 김 사장은 앞으로 해외시장 개척에 주력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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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억 만들기 성공사례 !! ] ********************************


< 우리사주 팔아 재개발 재건축 담보대출 투자 - '정보수집-기회포착'이 재테크 성공 첫 걸음 >

돈을 버는 목적이 다양하듯 방법도 가지각색이다.

최근 '10억원 만들기' 열풍이 불면서 '남들은 어떻게 돈을 벌었나' 관심을 가지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남의 떡'이기는 하지만 재테크의 힌트라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꼬박꼬박 월급을 받는 직장인으로 수억원에서 수십억원대의 재산을 모은 이들. 모두 다 '월급 한 푼도 안 쓰고 언제 모으나'라는 푸념보다 는 '종자돈-투자-목돈-재투자'라는 기본 공식을 철저히 지켰다.

은행 프라이빗뱅커(PB)들은 "부자들 중에는 유산 없이 무일푼에서 시작해서 스스로 상당한 자산을 쌓은 이들도 많다"며 "옆에서 보면 운으로 보이지만 항상 공부하고 정보를 수집하다 기회가 왔을 때 이를 놓치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은행 PB가 들려준 재테크 성공사례를 통해 '부자에 이르는 길'을 살펴본다.


■15년 만에 무일푼에서 15억원으로

시골 출신으로 대학까지 본인의 노력으로 졸업한 A(41)씨. 종자돈은 대학 졸업 후 입사한 증권사의 우리사주를 처분해 7000만원을 만들었다.

재테크의 방향을 부동산으로 정한 그는 1997년 예금, 아파트 담보대출을 더해 1억6500만원에 서울 사당동 D 아파트 2채를 구입했다.

꾸준히 기다려 8년 만에 3억원에 되팔았다.

이 돈으로 다시 상도동 재개발 아파트 지분 2건을 3억5000만원에 사들였고 4년 뒤 5억2000만원에 팔았다.

재투자를 시도, 2001년에는 서울 대치동 재건축 아파트 3채를 총 9억원에 사들였다.

현 시가는 18억원. 전세금 3억원을 빼면 그의 재산은 15년 만에 15억원으로 불어난 셈이다.

주식과 채권이 2억원(은행 대출금 2억원)이 있기는 하지만 그는 부동산 재투자를 중심으로 부자가 된 사례다.


■경매로 산 아파트로 10억원 만들어...

은행원 B(40)씨는 부동산 경매를 시작으로 재테크의 물꼬를 튼 경우다.

결혼 후 5년 동안 맞벌이로 5000 만원을 일단 모은 그는 평소 경매에 관심이 많아 시간이 나는대로 공부를 해 뒀다.

그러던 중 97년 강동구 고덕동 주공아파트가 경매로 나오자 바로 1억2000만원에 구입, 올 2월 3억5000만원에 되팔았다.

또 다른 투 자처를 찾던 그는 급매물로 나온 아파트를 3억3000만원에 샀고 현재 시 세는 6억5000만원에 이른다.

8000만원에 산 강동구 천호동 재개발 땅은 벌써 2억원으로 껑충 올랐다 . B씨는 장기주택마련저축, 개인연금, 보험 등 금융자산만도 1억원에 이 른다.

재테크 공부와 발품을 무기로 10억원 만들기에 성공한 대표적인 경우다.


■우여곡절 끝에 35억원대 자산가로..

보험사를 은퇴해 건물 임대사업을 하고 있는 C(58)씨의 자산은 무려 30억원대. 금융자산 12억원에 부동산 22억원. 하지만 이 같은 큰 돈을 모으기까지 쓰라린 경험도 많았다.

90년부터 재미로 시작해 주식으로 2억원까지 불린 자금을 외환위기 때 1억 5000만원이나 날렸다.

하지만 C씨는 99년 인터넷 붐이 일자 5000만원을 새롬기술에 투자해 10억원의 돈을 손에 쥐었다.

2001년에는 장외시장에서 강원랜드와 삼성카드 주식을 매입해 12억원 가량을 또 벌었다.

이후 부동산에 투자해 7,000만원 정도의 손실을 입었지만 다시 강남의 아파트 4채를 사서 톡톡한 재미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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