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유학 다녀오지 않은 영어도사 이보영 ] ***************************



* EBS FM '모닝스페셜' 진행 7년 이보영씨

아침 8시마다 진행자 특유의 상쾌·발랄한 목소리로 아침을 깨우는 영어 프로그램이 있다.
영어강사 이보영(36)씨가 진행하는 EBS FM 라디오 생방송 '모닝스페셜'.

이 프로그램은 이달로 벌써 7년째다. 이씨는 “스스로 영어를 공부한다는 가벼운 기분으로 시작했는데 7년이 흘렀다”고 했다.

14일 서울 우면동 EBS 녹화장. 이보영씨는 영어강좌 진행자들이 가장 기피하는, '무식'을 시인하는 멘트를 거침없이 날린다.

“어머, 또 제가 모르는 게 나왔네요. 아시는 분 계시면 전화주세요.”

그의 생기발랄한 멘트는 80% 이상이 애드리브. 신선한 영어뉴스를 전하는 '헤드라인' 코너에선 척, 척, 영어사전 넘기는 소리도 난다.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생방송 중에도 그때 그때 찾아보기 때문이다. 이씨는 “내가 네이티브 스피커랑 똑같을 순 없는데다 똑같아야 할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는 외국 유학 경험이 없다. 이화여대 영어교육과와 한국외국어대 동시통역대학원을 졸업했고 죽 한국에서 살았다.

이씨는 그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런 나도 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생방송이라 크리스마스도, 설날도, 추석도 없어요. 골백번도 더 그만두려고 생각했죠. 그런데 언젠가 '나도 한때는 자작나무를 탔다'라는 소설을 쓰신 작가가 편지를 보내오셨더라구요.
아침마다 '모닝스페셜'을 듣고 생기를 얻어 작품을 쓰실 수 있었다구요.”

'모닝스페셜'은 라디오 프로그램으로는 드물게 5000명이 넘는 동호회원을 거느리고 있다. 청취자들의 엽서는 군대, 원양어선, 벨기에 등 외국, 교도소 등 온갖 곳에서 날아온다.

“교도소 검열 도장이 꽝꽝 찍힌 편지를 받아들고 가슴 찡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에요. 영어가 이렇게 재밌는 줄 몰랐다. '모닝스페셜' 듣는 재미에 산다, 토플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었다는 분도 계셨어요.”

지난 99년 이보영씨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성대결절'에 걸려 3주간 방송을 쉬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모닝스페셜' 스튜디오에는 청취자들이 보내온 약이 수북이 쌓였다고 한다.
이씨는 “'모닝스페셜'은 이보영 혼자 만들어가는 프로그램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영어에 대해 자신감 없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것이 제 최대 목표예요. 단순히 영어를 가르치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행복'을 전하는 방송을 하고 싶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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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지에서 사장으로 영안모자 백성학 회장 ] *************************



세계 최대 모자 회사인 영안모자 백성학 (白聖鶴·63) 회장의 일생은 한편의 드라마다.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7일. 열 살 소년 백성학은 피란 가는 교회 형들을 배웅하기 위해 원산 갈마항으로 달려갔다. 나루터에서 손을 흔들던 백 회장은 형들이 건네주는 사탕을 받기 위해 잠깐 배에 옮겨 탔다가 영영 가족들과 이별했다.

“얼떨결에 묵호항에 도착한 후 3년 동안 거지 생활을 했습니다. 쓰레기통을 뒤지고, 양아치 패거리에 들어갔다가 담배를 못 피운다는 이유로 두들겨맞기도 했습니다.
어머니가 계신 북한으로 가려고 무조건 북으로 걸어가다 강원도 홍천 인근에서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지 못해 쓰러졌습니다.”

그는 죽어가면서 '어머니를 보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기적처럼 신문지에 싸인 찐빵 두 개를 발견, 이틀을 연명할 수 있었다.

그후 다행히 한국군과 미군 부대에서 군인들의 잔심부름을 해주는 '쇼리'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때 그를 돌봐준 사람이 같은 고아 출신의 '빌리'라는 미군이었다. 하지만 미군 부대에서 일하던 중 북한군이 쏜 포탄이 유류 저장고를 명중시키는 바람에 전신에 화상을 입는 중상을 당했다.

빌리는 죽어가는 그를 헬기에 태워 가장 좋다는 미군 병원에 입원시켰다.
19개월 동안 치료를 받은 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백 회장은 15세 때 상경, 모자 가게 사환으로 취직했다.

그후 하루 18시간씩 일한 결과 19세에 처음으로 자신의 모자 가게를 차릴 수 있었다. 그는 편하고 멋있는 모자를 만들기 위해 종일 사람 머리 모양만 연구했다.

단골이 늘어가고 번창하던 그에게 닥친 다음 시련은 5·16 군사혁명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 국민에게 국민재건복을 입도록 하는 바람에 사치스러운 모자도 자취를 감춘 것.

“다른 모자 가게는 모두 문을 닫고 재고는 엄청나게 늘었습니다. 모두 망했다고 좌절했지만 저는 다르게 보았지요. 오히려 싼값에 고급 모자들을 왕창 사들여 창고에 보관했습니다.”

사람들은 얼마 뒤 다시 모자를 찾기 시작했다. 좋은 모자를 갖고 있었던 곳은 백 회장의 가게뿐이었다. 이렇게 큰 돈을 벌어들인 백 회장은 영안모자를 세워 수출에 눈을 돌린다.

미국 수출로 승승장구하던 백 회장에게 또다시 큰 시련이 닥친다. 미국에 히피문화가 유행하면서 젊은이들이 청바지에 장발 차림으로 다니면서 모자를 멀리한 것이다.

백 회장은 미국 야구장에서 살 길을 찾았다. 미국 프로야구단이 팬들에게 멋있는 '스포츠 캡'을 제공하면 대히트를 칠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친 것.
이때부터 영안모자는 미국 프로 스포츠 구단의 모든 팬서비스용 모자를 휩쓸게 된다.

영안모자는 현재 미국에 3개 공장을 비롯, 코스타리카·중국·스리랑카· 방글라데시 등 전 세계에 14개 생산거점과 12개 판매법인을 거느린 기업으로 성장해 있다.

연간 만드는 모자 개수는 1억개가 넘고, 연간 모자 매출이 2억1000만달러에 달한다.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의 모자 제조업체.

북미시장 점유율만 70%에 이른다. 대우자동차 버스부문 인수에 이어 최근에는 세계적인 지게차 업체인 클라크 본사를 인수,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고합의 케미컬부문 인수도 추진 중이다.

성공한 백 회장은 전쟁 때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빌리와 감격스러운 해후도 했다. 86년부터 전직 FBI 요원에 부탁, 4년간 미국 전역을 샅샅이 뒤진 끝에 필라델피아에서 빌딩 청소부 겸 야간 관리인으로 일하던 빌리를 찾아낸 것.

“빌리에게 좋은 차와 집을 사주고, 자식들의 교육을 모두 책임지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빌리는 한사코 거절하더군요. 대신 빌리의 이름을 딴 ‘빌리 사랑의 집’을 만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빌리 사랑의 집'은 백 회장이 강원도 홍천 6만평 부지에 만든 복지시설 백학마을에 있다.
백 회장이 사재를 털어 만든 이곳에는 고아원·양로원·병원·장애인 수용시설·자활공장이 들어서 있다.

『살아가는 데 신조라면 두 가지가 있지요. 하나는 내가 번 돈의 20%는 무조건 다시 사회에 기부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은행 돈입니다. 은행 돈은 결국 국민 세금이기 때문에 가급적 쓰지 않고, 절대로 축내지도 않는다는 각오로 살고 있습니다.』

백 회장은 후에 북한의 어머니(김숙녀)가 아들을 위해 내내 기도를 했고, 신앙인이라는 이유로 탄압을 받다 숨졌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그래서 백 회장은 어머니를 기리는 교회를 지어 이화여대에 기부하기도 했다. 또 독립기념관을 지을 때 5억원을 쾌척했으며, 학교법인 숭의학원을 창설, 숭의여자대학과 초·중·고등학교도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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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붕어빵 장사에서 '음식재벌'로... ] *****************************



서울 종각 옆 길거리에 판을 벌였다. 붕어빵을 구웠다.
열흘이 지나도록 허탕만 쳤다. 살을 에는 겨울날씨 탓에 동상까지 얻었다. 좌절감이 엄습해 왔다.

지금은 '음식재벌'이란 말을 듣는 배대열 퍼시픽씨푸드 사장(45)의 대학시절 얘기다.

28살 늦깎이로 대학에 들어간 배대열은 스스로 학비를 조달해야 했다.
붕어빵 노점상은 그의 첫 사업이었다.

"열하루째 되던 날 ''혁신'을 감행했습니다. 앙꼬(팥소)를 넣는 티스푼을 큰 군용 스푼으로 바꾸고 팥을 4∼5배나 더 넣었어요. 손님이 늘어나기 시작하더군요."

손님들이 1백원짜리 1개를 사서 한입 베어 물다가 다시 돌아와 10개씩 사갔다.

푸짐한 앙꼬 덕이었다.

친구들까지 데리고 왔다.

빵 굽는 기계를 2줄짜리에서 4줄짜리로 바꿨다. 그래도 손님이 줄을 섰다. 끼니를 걸러야 할 정도였다.

그의 사업철학인 '거름과 혁신론'은 여기서 나왔다.

"손님은 논밭, 음식은 거름과 같습니다. 논밭에 거름을 듬뿍 주면 풍성한 수확을 가져다줍니다. 먹는 장사도 같은 이치지요."

1995년 '별난 버섯집'이라는 이름으로 버섯매운탕 전문점을 차릴 때도 주변에선 "미쳤다"며 펄쩍 뛰었다.

경기 하남시 감북동 외딴 변두리에 식당을 내려고 했기 때문.

"저는 자신 있었습니다. 꽃은 산중에 피어도 꿀을 먹으려고 벌이 스스로 찾아오지 않습니까. 맛있으면 오게 돼 있습니다. 그게 식당입니다."

'별난 버섯집'은 대히트였다. 석 달이 채 못돼 하남시 일대 최고의 명소로 등장한 것.

가맹점만도 전국에 1백50개가 삽시간에 깔렸다. 8년이 지난 지금 그는 이 일대에 직영점 5개를 갖고 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손님들이 줄을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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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장직원에서 피자집 CEO로... ] ******************************



지난 5월 피자헛에선 매장 직원 출신의 대리점 사장 3명이 한꺼번에 탄생했다. 우수직원에게 대리점 프렌차이즈권을 주는 '직원 라이선스' 제도의 첫 수혜자가 나온 것이다.

고등학교 또는 전문대 졸업 후 20대 초반부터 피자를 날라온 이들은 비슷한 또래의 젊은이들이 대졸 실업난에 시달리고 있을 때 이미 자신의 매장을 관리하고 있었다.

세 사람의 공통점은 입사 4∼5년이던 20대 중반의 나이에 직영점 점장으로 승진한 억척스러움이다.

피자헛은 이들이 독립적으로 프랜차이즈 대리점을 운영하더라도 회사 이미지 유지에 손색이 없겠다고 보고 아예 독립시키기로 결정했다.


춘천 강원대점장인 정애란 (여·33)씨는 단골손님의 전화 주문 목소리만 듣고도 누구인지, 언제 어떤 메뉴를 주문했는지를 맞히는 놀라운 기억력의 소유자.

철저한 손님 위주 서비스 덕분에 매장을 옮겨도 찾아오는 '고정팬'까지 꽤 생겼을 정도다.

주말에 손님이 많이 몰릴 때는 피자를 학수고대하는 손님을 대신해 주방에서 '싸움'을 벌이는 바람에, 직원들로부터 “적인지 아군인지 구분이 안 된다”는 이야기를 숱하게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손님의 트집에도 얼굴 한번 구긴 적 없다. 대신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몰래 접시 한 장을 들고 바깥으로 나가 사정없이 깨뜨려 버린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89년 서울 대치점 사원으로 입사했고, 92년 상계점 부점장, 94년 광장점장, 99년 본사 컨트롤팀의 감사 업무 담당으로 파죽지세의 승진을 했다.

그는 “시키는 일만 하지 않고, 항상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더 효율적으로 일하는 방법은 무엇인지'를 생각했던 것이 남보다 한발 앞설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말한다.

세 사람 중 유일한 미혼. 현장경험을 사업에 접목시키기 위해 올해 동국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일산 원당점장인 주선희 (여·33)씨는 고등학교 졸업 이듬해인 90년 롯데월드점에서 서빙 직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92년 잠실점 부점장을 거쳐 94년 그랜드백화점장으로 승진했다. 연신내 점장으로 근무하다가 일산 원당점을 열게 됐다.

잠실점에서 함께 근무했던 남자 동료와 열애 끝에 결혼, 부부가 함께 피자헛을 운영하고 있다.

처음엔 “남들이 대학갈 때 앞치마 두르고 서빙하는 게 부끄러웠던 것이 사실”이지만, “기왕 들어온 것, 이 분야에서 가장 앞서가는 사람이 한번 되어보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일이라도 그 분야의 최고가 되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는 게 그의 지론.

손님을 향해 짓는 '살인미소'가 특기이며, 포크와 나이프 100개를 2분이면 씻어내는 '설거지의 달인'이다.


인천 가좌점장인 임학렬 (36)씨는 전문대를 졸업한 후 92년에 입사, 94년 동인천점 부점장, 96년 롯데 인천점장으로 근무하다가 지난달 1일 직원 가맹점 1호인 인전 가좌점을 열었다.

신입사원 시절부터 남보다 1시간 일찍 출근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처음 일을 시작한 것이 주방쪽이어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매일 아침 재료의 유효기간을 점검하고 오븐을 예열하는 게 습관이 됐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지식이 대학에서 배우는 것보다 훨씬 값지다”고 주장하는 체험파다.
그의 꿈은 배달 전문점인 현재의 매장을 대규모 레스토랑형으로 키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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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호사 상대로 대박 터뜨린 사나이 ] ****************************



번뜩이는 아이디어 하나를 갖고 3년 동안 지주(地主)를 설득한 끝에 수십억원의 대박을 터뜨린 부동산 개발업자가 서울 서초동 법조타운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서울 고등·지방법원의 동문(東門)에서 대로(우면로)를 건너 자리잡은 서울 서초구 서초동 1699-8의 245평.

법원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 항상 「사법(司法) 수요」가 넘쳐나는 이 동네에서 유독 이곳만은 지난해 초까지 LG주요소가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근처에는 SK삼풍주유소 등 주유소가 3개나 더 있어, 항상 공급이 수요를 초과해왔다.

평당 3000만원을 호가하면서도 제값을 못하고 있던 땅을 「알짜」로 만든 것은 부동산 개발업체 S산업개발의 실질적인 오너 이모(60)씨.
이씨는 지난해 2월 이 땅을 사들여 12층짜리 「서초법률센터」를 지어 변호사들에게 분양, 적어도 수십억원의 차익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근처 부동산에 알려진 서초법률센터의 분양가는 1층 2300만원대, 2층 1600만원대, 3층 이상 1100만~1200만원대.
제대로 된 광고 한번 없이 입소문만으로 분양이 성황리에 끝났다는 것이 근처 부동산 관계자들의 말이다.

서초법률센터가 법조인들의 인기를 끈 것은 법조타운에선 이례적으로 임대가 아닌 분양 방식을 택했기 때문이다.
주위의 법조타운은 평당 월임대료가 400만원을 호가하는 곳이다.

한 부동산 관계자는 “분양 방식이란 아파트처럼 사무실 소유권을 완전히 넘기는 것으로 요즘처럼 금리가 낮을 때는 매달 월세를 내는 것보다 은행돈을 빌려 사무실을 사고 이자를 내는 편이 경제적”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주유소를 첨단 빌딩으로 바꾸는 데 3년 이상을 투자했다. 1999년부터 개발계획을 갖고 있었지만, 땅을 소유하고 있는 5명의 지주들을 설득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씨는 지주들을 모두 만났지만, 개발에 대한 생각은 각각이었다. 이씨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땅을 어떻게 개발할 것인가, 땅값을 얼마나 받을 것인가에 대한 지주들의 생각이 너무 달라 땅을 매입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씨의 집념에 탄복한 덕분일까? 이씨는 인근 부동산업자들과 변호사들에 대한 철저한 사전조사를 통해 이 곳에 사무실 빌딩을 짓되 임대보다는 분양빌딩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리고, 끝내 지주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아이디어 하나로 뛰어다닌 지 3년 만인 지난해 3월 이씨는 이 땅을 사들일 수 있었다.
특히 주유소 땅의 45%를 소유하고 있는 최대 지주에게 끈질기게 공을 들인 것이 땅을 매입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일단 땅을 매입하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현재 사무실 공사가 진행 중이다.

서초동 S부동산의 관계자는 “땅값 73억여원과 공사비 70억여원을 제외하고 최소한 100억원의 개발이익을 남긴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씨는 이에 대해 “실제 남긴 돈은 소문이 과장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분양가가 가장 높은 1층과 2층 일부의 분양이 확정되지 않았고, 땅값과 공사비도 생각보다 많이 들었다”며 “세금을 제외한 개발이익은 20억원 전후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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